< 사업 전개방안 및 향후 계획 >◆ 에덴 소프트를 설립하게 된 동기.여기서 에덴은 성경의 에덴 동산을 말한다. 꿈의 동산! 게임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 이 동산을 가꾸고자 한다.온라인 게임은 하나의 가상세계이므로, 각각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우리는 게임으로 인간의 사는 모습들 이라는 세계관의 눈으로 가상의 세계를 게임으로 표현하기 위해 온라인 게임 개발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프로젝트 The Land Of Phoenix"Concept: 판타지 가상 세계에서 만들어가는 인간의 삶장르: RPG그래픽: 3D◆시나리오피닉스의 전설시공 저편에 이름없는 자로만 알려진 어떤 실체가 존재하였다. 이 실체는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어왔고 미래에도 계속 존재할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주와 그 안의 많은 태양과 세계 뿐만 아니라 인간, 엘프, 드워프와 같은 영민하고 힘은 있으나 유한한 생명체들과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을 그의 정신세계로부터 창조하였다고 고대의 문서에 전해지고 있다.과거 영겁의 시데에 이 신들 중에 하나가 피닉스의 세계에 내려왔다. 비샨이라는 투명한 용인. 이 하늘의 지배자는 이 세계를 만족스러워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밸리어스 라는 대륙 위에 자신의 종족을 퍼뜨렸다. 비샨은 강력한 발톱으로 내리쳐 피닉스의 표면에 상처자국을 내어 이 약속된 새로운 세계가 자기 것임을 나타냈다. 그 후 높은 지성, 지혜와 힘을 지닌 용들은 대륙을 호령하고 하늘을 지배하였다. 마침내 용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그 당시 비샨이 한 일을 알아챈 옹졸하고 시기심 많은 다른 신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길 목적으로 종종 피닉스의 세계에 내려왔다. 광활한 동굴과 끝없는 터널들의 어두운 지하왕국에서 온 브렐 셔를리스가 처음 등장한 존재였다. 그는 몰래 피닉스 계곡 깊숙한 곳의 동굴로 통하는 마법의 포탈을 만들었다. 이 문을 통해 그는 다양한 생명체를 창조하였으며, 신비로운 리빙 스톤의 미궁 안에 포탈을 봉인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그 후 다른 신들이 피닉스의 세계에 왔을 때, 브렐 셔를리스는 그들을 접촉하였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그들을 설득해 세계의 운명을 논하기 위한 모임을 열었다. 위대한 어머니 투나리 바다의 제왕 프렉서스가 그 모임에 참석했다. 전쟁의 신 랄로스 젝도 참석했으나 여전히 불신으로 가득 차 경계하고 있었다. 브렐은 피닉스에 대한 정보를 그가 어디서 얻었는가 하는 의혹들은 드러나지 않게 교묘히 숨겨두고는 비샨이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킨 새롭고 어쩌면 막강한 세계에 대해 얘기했다. 도적들의 왕에게나 어울리는 말들이 브렐의 입에서 쏟아졌고, 그는 모인 신들이 동명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브렐이 이미 이 새로운 지하세계 안으로 그의 창조물들을 물어 놓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랄르스 젝을 제외한 모든 신들이 브렐의 제안에 동의했다. 피닉스라 불리는 이 세계는 비샨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이 강력한 존재들 사이에서 분배되었다. 각자는 피닉스를 감시하기 위한 종족을 만들었고, 드래곤들의 영역에 불침번을 세웠다. 브렐은 땅속을 점유하고는 피닉스의 산맥 깊숙한 곳에 땅땅하고 단단한 난쟁이라는 종족을 창조했다. 프렉서스는 바다 깊은 곳에 케지라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물속에 사는 존재를 두었다. 투나리는 피닉스의 대지위에 무한한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존재인 엘프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랄로스 젝은 자신의 땅을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흉포하고 무시무시한 자이언트를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태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이 대륙에 생명체를 퍼뜨리는 노력이 오히려 더 많은 신들을 끌어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증오의 왕자인 이노룩의 불필요한 시선을 끌어버린 것은 바로 엘프족들이었다. 이노룩은 낡은 탑에서 그가 지배하는 대지위의 썩어가는 암흑의 계곡을 내려다보며 증오를 불태웠다. 그는 다른 신들이 동맹협정에 자신을 끼워주지 않은 데에 대해 저주를 내리고 자신을 무시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리라 결심했다. 그리하여 증오의 군주는 엘프의 아름다운 도시에 있는 타키쉬 히즈 홀에서 엘프족의 왕과 왕비를 납치해 왔다. 그는 엄청난 고통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왕과 왕비를 300년에 결쳐 천천히 육체와 정신을 갈기갈기 조각 내버렸다. 투나리가 창조한 고귀한 종족을 한낱 쓸모도 없는 조각으로 내버리고는 분노에 떨고 있는 이것들을 모아서 자신만의 가학적인 암흑의 이미지에 맞추어 새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테어달이라 불리는 다크엘프를 남겨두고 그는 지하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증오의 군주의 마지막 복수는 시작되었다.피즐쏩 브리슬밴과 카직 툴이 그 다음으로 피닉스에 내려왔다. 브렐은 더 많은 인간들을 세계에 창조할 또 다른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신들과 2차 동맹을 결성한다. 랄로스 젝은 멀리서 그런 모습을 보고서 다시 자신의 창조물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브렐은 랄로스 젝에게 다가가 이번이 그의 묘망을 총족시킬수 있는 정말 절호의 기회라며 그를 설득해 동맹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땅속 깊숙한 곳에서 브렐은 드워프를 닮았지만 좀더 마르고 쭈글쭈글한 놈을 만들게 된다. 놈은 드워프와는 달리 자신들이 만든 기계로써 세상을 바꿀수 있다고 믿는 종족이었다. 브리슬밴은 엘프와 자이언트와는 많이 다른, 땅딸막하고 민첩하며, 참견하길 좋아하고 때때로는 좀도둑질을 하기도 하는 하프링을 만들어 냈다. 공포의 대왕 카직툴은 늪과 정글에 자신의 은신처를 두고 그곳에서 녹색피부의 트롤과 파충류인 리자드맨을 만들어냈다. 랄로스 젝은 자신의 군대를 위해 더 많은 창조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흡족해하며 지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나서 지능은 낮지만 육중한 몸집의 오우거와 전쟁을 위해서 태어났고 오로지 정복하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찬 오크를 만들게 된다.당신이 살아갈 시대는 신비로움으로 가득찬 바로 이시기이다. 먼저 창조된 족속들은 예전에 누렸던 영광을 다시 찾으려고 하고 있으며, 후에 만들어진 종족들은 발전하였고 오더스, 안토니카, 그리고 페이둬에서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투쟁과 전쟁이 가끔씩 일어났지만 대륙을 휩싸는 대대적인 전투가 일어난 지도 몇 세기가 흘렀다. 무수한 동맹과 연합이 존재하고, 친구와 원수가 음모를 꾸미고, 피닉스의 세계는 이제 결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나의 고향처음 내 고향과 족보에 대하여 레포트를 부여받은 뒤 무엇부터 해야할지 몰랐다. 고향에 대해서 먼저 조사해야하는지 족보는 어디부터 조사하는지 눈앞이 막막하였다. 하지만 내 고향과 내 족보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내가 만일 그것들을 모른다면 내 후세에는 어떻게 알려줄지에 대해서 생각해봤을 때 더더욱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서두가 긴 듯 한데 먼저 내 고향에 대해서 여행해 보도록 하겠다.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이지만 나의 고향은 영천이다. 지난시간 교수님께서 알려주셨듯이 고향이라는 곳이 적어도 삼대가 살았던 곳이어야 한다는 말씀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기도 하다.내 고향 영천,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나 보도록 하겠다.영천은 지리학적으로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있는 시이고 면적은 919.76㎢ 인구는 12만 758명(2001) 인구밀도는 131명/㎢(2001) 가구수는 4만 2039(2001) 행정구분은 1읍 10면 5동 시청 소재지는 경북 영천시 문외동 27 시의 꽃은 장미 시의 나무는 은행나무 시의 새는 비둘기라고 사전적으로 그렇게 나와 있다. 물론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내 고향에 대해서 조사를 한다면 적어도 내 고향이 어떠한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알아본 것이다.나는 내 고향에 대해서 유적 역사 인물 유물 사적 등을 조사해 보았다. 그 가운데 문화재를 비롯한 관광 명소를 다녀보겠다.일단 아래 지도를 보며 위쪽으로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답사하도록 하겠다.아래의 지도에 보면 영천과 관련된 거의 모든 관광명소 문화재가 있다. 그 곳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영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가 있을까? 내가 알고 있던 곳은 은해사뿐이었다. 그렇다면 은해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은해사를 출발하여 나머지 곳들도 돌아보겠다.){위 그림이 은해사에 대한 정경이다. 은해사는 조계종 제10교구의 본산으로서 영천시내에서 서쪽으로 19km 떨어림이 바로 영산전의 모습이다.{그 곳을 지나 위로위로 올라가다 보면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들어온다. 물론 내가 아직 가보진 않았지만 사진으로만 하더라도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수려한 산세와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있으며 팔공산의 주맥인 동쪽 사면으로 길게 드리운비로봉이 자리 잡고 있다. 치산저수지에서 약1km올라가면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원효 대사가 수도한 천년고찰 수도사가 있고 상류에는 신녕재와 고려 문종 때 혼수대사가 창건한 진불암을 만날 수 있다, 수도사에서 계곡을 따라 약 1.6km 올라가면 치산(공산)폭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 폭포는 팔공산에 산재해 있는 폭포 가운데 가장 낙차가 크고 낙수가 풍부한 3단 폭포로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으로 풍치미와 경관이 수려하며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 또한 뛰어나다. 영천시에서는 이 일대 8만 2천평의 대규모 위락시설을 만들어 도시민 여가활동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관광지로 조성하고 있으며 대형 주차장과 수변 피크닉장 ,어린이 놀이터 등이 조성되어 있다.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다보면 옛 교육의 상장인 향교를 찾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곳은 보물 616호로 이름이 영천향교 대성전이다. 이 곳 대성전은 유래루(향교 대문 이름), 명륜당(유생들이 강론하는 곳), 신문(대성전에 들어가는 문)을 거쳐 맨 북쪽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세종 17년(1435)에 건립되었고, 그 후 중종 8년(1513)경 군수 김흠조가 중수하였으며 또 광해군 14년(1622)경 군수 황효의도 중수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건물의 양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장대석 바른 층 쌓기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주두와 익공을 놓은 물익공식의 건축이다.대성전 앞 동서 양쪽에는 동무와 서무가 있고, 안에는 세계의 삼대 성인의 한사람인 공자를 비롯하여 그 제자 및 그의 도맥(도학의 맥락)을 이은 현인들 중에서 백세토곳 대창에서 볼 수 있는 고이 바로 영지사 대웅전이다. 이 건물은 신라 무열왕때 의상조사가 창건하여 웅정암이라 하였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고 영지대사가 중창하여 영지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조선 영조 50년(1744)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찰은 구룡산과 오지산 십이봉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전통사찰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명부전 삼성각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역대 주지스님의 부도가 있다.{{이 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축조와 관련이 있는 양면비이다. 이 비는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장방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각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앞면에 한 면은 법흥왕 23년(536)에 청못 저수지를 축조한 사실을 기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원성왕 14년(798)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한때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 아래 계곡에 묻혀 있다가 조선 숙종 14년(1688) 위쪽에 새겨진 청제중립비를 세울 무렵, 다시 정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인명, 관직명, 이두문은 신라시대의 사회사와 언어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이 건물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 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건립한 것으로 일명 명원루라고도 불리었다. 이는 당나라 문장가 한퇴지의 시에서 따온 말로 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 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 는 말에서 나왔다고 조선시대의 명문장가 사가 서거정선생의 명원루 기문에 쓰여 있다. 원래는 조양각을 중심으로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당 등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인조 16년(1638)에 중건하여 이름을 조양각이라 고쳐 불렀다. 현재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이 고다. 오리장림이란 말은 옛날 도로가 나기 이전에 자천리 일대좌우 오리(2km)에 걸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국도가 개설되면서 숲이 좌우로 갈리고 그 후 학교 설립, 도로 확장, 사라호 태풍 등으로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지금은 자천 마을앞 군락지 등 몇 곳에서만 옛 향취를 더듬어 볼 수 있어 아쉬움이 크지만 차량 통행이 뜸한 국도를 따라 가는 호젓함도 맛볼 수 있다. 오리장림은 제방보호와 마을의 풍치 및 수호기능을 하고 있다. 숲이 형성된 지 약 400여년전부터 이 곳 주민들은 마을 수호를 위하여 매년 정월 대보름날 자정에 제사를 올렸으며, 봄에 잎이 무성하면 그 해에는 풍년이 온다고 믿고 있다. 이 숲에는 10여종이 넘는 나무들이 분재박물관을 연상시키듯 온갖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여름에는 자천 마을 앞을 흐르는 고현천의 바람과 하늘을 가리는 오리장림의 그늘이 자연 그대로의 시원함을 빚어낸다.{다음으로 가 볼 곳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대적인 곳이다. 바로 화남원천랜드(온천) 이다.이 곳은 지하 550m에서 퍼 올린 수온 섭씨 32도인 유황탄산 온천수를 사용하고 있으며, 4명에서 5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객실 43개를 갖추고 있다. 90년 온천지구로 지정 고시된 온천리 일대 29만 7천평의 온천개발지구와 인접한 화남원천랜드의 온천수가 피부와 류머티즘, 위장병, 당뇨병에 좋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용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영천의 가장 북동쪽인 곳에 위치한 곳에 보현산 천문대가 있다.{영천시 화북면 보현산 정상(해발 1,124m)에 위치한 보현산 천문대는 1.8m짜리 도약망원경(약 35억원)과 태양플레어망원경(10억원) 등을 보유하고 있는 최첨단 종합천문대이다. 영하 20도, 습도 95%에서도 작동이 가능하며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1백만 배 이상 관측이 가능하다. 천체에서 오는 빛을 모으는 주경이 1.8m 로 넓은 시야를 지녔으며 분해 능력이 0.4초로 12km 떨어져있는 1백원 짜리 동전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우수한 장비를 지 선조 32년(1599) 자호 언덕에 정자를 짓고 여러 교우와 학문을 강론하였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래간은 방이고 중앙칸과 전면 퇴간은 누마루 형식이며 기둥은 원주로 되어있는 익공계의 삼량집이다. 1974년에 영천댐 공사로 수몰됨에 따라 용산동 751번지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그 다음으로 알아 볼 곳이 충효제이다. 충효라는 이름이어서인지 조선시대의 풍이 나는 듯하나 1920년대에 건립된 유형문화재이다. 구(舊) 한말(韓末) 산남의진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정환직(1844 ~1907)선생과 용기(1862~1905)선생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검단동을 충효동으로 고쳐 건립된 건물이다.{이 곳 충효제에서 조금만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곳이 영천댐이다. 영천댐은 일명 자양댐이라 하며 높이는 42m,제당의 길이는 300m이고, 저수량은 9,640만 톤으로 1974년 착공하여 1980년에 준공되었으며, 지금은 포항의 식수와 공업용수로 활용하고 있으나 2001년 임하댐 도수로의 준공으로 영천에서도 이 댐의 물을 상수도 수원(水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 댐의 건설로 자양면의 6개법 정동이 수몰되기도 하였지만 어디서 보아도 산과 물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아래그림은 영천에서 남단에서 볼 수 있는 돌할매라 불리우는 화강암이다. 이 곳은 영천의 관광 명소 중의 한 곳으로 두 손으로 돌을 들어 올리면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고, 안 들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염원하는 바에 대해 가부결정을 해준다는 것이다. 이 돌이 화제를 모으는 것은 예언능력에 대한 신통력 여부보다는 사람에 따라 혹은 원하는 내용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도 하는 것 때문이라 한다.{내 고향 영천에서 마지막으로 다녀갈 곳이 만불산이라는 관광명소이다. 물론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문화 유적을 비롯한 관광명소 사적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아본 곳들 가운데는 만불산이 마지막이다.이
이 소개서는 기존 양식의 소개서와는 다른 면담을 나누면서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현재 기업체에선 서류전형을 거쳐 면접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기소개서는 남들과는 다른 형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이 기업체 인사 간부로부터 캐치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옳고 그름은 여러분들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상해보신 뒤에 결정 하십시오.자기소개서성 명 :연락처 : 01X-XXX-XXXX저는 남들과는 다른 저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자기소개를 쓰고자합니다. 기존의 도표형식이나, 자유형식 등과는 달리 제가 미래 하고자 하는 일 즉, 사회복지상담원에 관련한 면담형식으로 서술할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그리고 밑에 서술된 내용은 제가 미래에 하고 싶은 귀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토대로 하여 서술한 것입니다.내용상담원 : 어서오세요!! 무슨일로 오셨습니까?면담자 : (우물쭈물하며) 네.... 상담 받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상담원 : 네. 잘 오셨습니다. 그럼 이리 앉으시죠.자, 그럼 상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인사를 나누죠.저는 여기서 고민 상담 및 직업 상담을 해주고 정신치료를 돕는 '성영석'입니다.면담자 : 네.... 저는... K모군 입니다.상담원 : 그럼 본격적으로 상담을 시작해볼까요?K모씨는 무슨 상담을 하기 위해서 여기 오신 거죠?면담자 : 네... 저는... 성격이 너무 소심하고요....그래서요... 지금 곧 졸업인데... 취업을 어떻게 할지가 걱정이에요.학점은 그런 데로 나왔지만.. 남들 앞에선 너무 떨려서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 성격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해서 왔어요.상담원 : 잘 오셨습니다. K모씨와 같은 분들이 더러 있으니 일단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의 성격이란 것은 물론 타고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의 환경이 그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법이죠. 그리고 노력하면 고칠 수 있는 것도 성격이죠.저도 물론 그런 경우 중의 한 예 이구요.면 강했어요. 그래서 친구도 사귀지도 않았고 고교시절의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며 허송세월을 보냈어요.면담자 : 선생님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계속말씀하시죠.상담원 : 그 뒤 군대라는 새로운 사회를 접함으로써 저는 많이 변화했어요.힘든 군 생활은 저에겐 '끈기, 인내, 투지' 를 가르쳐 주었죠.제대 후 저는 군대에서 한만큼만 하면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복학 후 열심히 공부를 했고 학점도 물론 잘 받았어요. 그런데 저는 뭔가 허전한 걸 느꼈어요. 제가 진정으로 무슨 일이 하고 싶은가에 대해서요. 인터넷 관련의 일이 정말 제가하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생겼어요. 그래서 오랜 시간을 걸쳐 생각하다보 니 떠오른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바로 지금의 제 직업입니다. 상담원이죠.면담자 : 말씀도중 죄송한데요. 그럼 상담원은 자격 사항 같은 것은 없나요?선생님은 인터넷을 전공하셨다면서요?상담원 : 그건 복수전공을 해서 취득한 또 하나의 다른 전공인 셈이죠. 복수전공을하며 사회복지사 1급을 취득하였어요. 그래서 인터넷, 사회복지 양쪽의전공을 다 살릴 수 있고 사회에 대한 기여도 현대적인 복지 실현을 위해노력하는 회사를 찾던 중 지금의 이곳이 바로 그 곳이라는 것을 느끼고오게 된 것이죠.그리고 여기에서 제가 하는 일은 인터넷 채팅을 통한 실시간 면담, 게시판에 수록된 글을 종합 분석하여 결과 산출, 직접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한 직접 상담 등이 있어요.면담자 : 음.. 그런데 선생님의 성격이 확실히 변하게 된 것은 아직 말씀하지 않으 셨는데요? 언제 그렇게 바뀌신 거죠?상담원 : 그건 단기간에 그렇게 바뀐 건 아니에요. 중, 고 시절에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거나, 좋아하는 이성에게 사랑 고백, 처음 대하는 사람과의 인사등 많은 조건들이 지금의 제 성격이 있게 된 과정이죠. 저도 그렇게 되기위해 남들 보다 먼저 인사하는 습관을 길렀고요.면담자 : 그럼 저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인가요?(기대감에 젖어들어..)상담원 : 물론에서는 이 위원회가 NGO 참가의 창구 역할을 한다.사회를 구성하는 영역 가운데 정부를 제1영역, 기업 및 시장을 제2영역, NGO를 제 3영역으로 부르기도 하고, 입법 사법 행정 언론에 이어 제5부라고도 한다. 이런 NGO가 국내에만 2000개 많게는 1만개까지 있다고 한다.NGO의 말뜻=쉽게 말해 자발적 비영리로 운영되는 시민단체다. 영어 NGO(Non Government Organization)는 우리말로 비정부기구이다. NGO는 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비영리단체이며 권력과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그 대신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며 시민사회의 공공선을 지향하면서 시민사회에서 활동한다.NGO의 다른 이름=NGO가 정부를 주체로 한 명칭이라는데 반하여 CSO, NPO 등 20여개 별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장 많이 쓰이는 CSO(Civil SocietyOrganization)는 시민사회단체라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한 개념이며NPO(Non Profit Organization)는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NGO의 역할=공동의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특정목적을 위해 조직한 단체인만큼 각각의 전 문성을 살려 다양한 서비스와 인도주의적 기능을 수행한다. 정부정책을 감시하고 정보제공을 통해 시민의 정치참여를 장려하며 인권 환경 보건 성차별 등의 특정이슈를 다루기도 한다.NGO의 역사=NGO의 시작은 1863년 스위스에서 시작된 국제적십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공식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은 1948년 유엔이었다. 유엔은 당시 후진국경제개발을 지원하면서 민간기구에 감시를 맡겼고 이후 NGO는 유엔이 인정하는 민간기구 뿐 아니라 국제협력사업에 참여하는 민간단체를 총칭하게 됐다.NGO의 수=98 99 국제기구연감(Year of International Organizations)에 따르면 현재 3만8200여개. 80년전인 1909년에는 109개였다. 그러나 비공식 기구까지 합하면100만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유엔자료에 의하면 1968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질 것으로 예상하여, 손해를 감수하고 주식을 매입 가격 이하로 파는 일.Ex>환율의 계속된 하락으로 인하여 기업들의 대규모 손절매 현상을 들 수 있다.코스닥[KOrea Securities Dealers Auto- mated Quotation]전자거래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한국의 장외 주식거래시장.컴퓨터와 통신망을 이용하여 주식을 매매하며, 증권 거래소 시장에 비하여등록이 쉽기 때문에 주로 벤처 기업이나 중소기업이 중심이 됨.M&A경영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기업의 업무 재구축의 유효한 수단으로 행하여지는기업의 매수 합병.스팸메일PC통신이나 인터넷 ID를 가진 사람에게 일방적 대량으로 전달되는 전자우편.보통 일반인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필터링 방법을 이용하여 차단하는 방법이 있다.많이 사용하고 있는 한메일의 경우에도 환경설정에서 메일 자동분류(수신가능조건부여),메일수신거부(특정 단어 해당하는), 스팸메일 걸러내기 기능(4단계분류를 통한)을활용하여 차단할 수 있다.ECB(유럽 중앙은행, European Central Bank)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화(貨)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유럽통화동맹(EMU)의 '두뇌'로 1994년 1월 1일에 설립되었던 유럽통화기구(EMI)를 승계하여 1998년 6월 1일에 출범하였다.--> 물가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설정한 마스트리히트 조약 규정에 따라 ECB의 통화정책의 기본목표는 "물가안정 유지"이다.ECB는 통화정책을 수립, 집행하며 이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별 회원국의 경제 운용에 협조한다. 또 유로통화의 발권력을 독점하고 각국 중앙은행과 협의해 실제 화폐 제작과 공급을 담당하며 유로화 외환 거래와 유로 은행간 결제 시스템도 운영한다.미국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마찬가지로 단기금리 조절을 관장하는 것은 물론 2002년부터는 회원국의 금융정책의 집행권을 갖게 된다.--> ECB는 최대 출자국인 독일(24.4%)의 중앙은행 분데스 방크를 모델로 하여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정책위원회(Governing council), 통화정과와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이 불일치하자 IAEA는 이를 문제삼아 영변 핵단지의 미 신고된 2개의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였다.북한은 IAEA의 요구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였다.NPT 탈퇴 후 북한과 미국 간에는 전쟁 일보 직전의 긴장관계가 조성되었으나, 이후 양국은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북미고위급회담의 형식으로 진행된 양국 간의 회담은 3차례(1993년 6월과 7월, 1994년 8월)에 걸쳐 진행되었고, 1994년 9월 23일부터 10월 17일까지 제네바에서는 이제까지의 회담성과를 총괄하면서 정치적 타결이 이루어졌다.제네바 기본합의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① 양측은 북한의 흑연감속원자로 및 관련시설을 경수로원자로발전소로 대체한다.② 북한은 경수로 관련 핵심부품을 인도하기 전에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치를 포함하여 IAEA의 안전조치의무를 전면 이행한다.③ 북한은 핵활동을 즉각 중지하고 관련시설을 해체한다. 또한 북한은 IAEA의 핵동결 감시활동을 위한 모든 협력을 제공하여 장래 핵위협을 해소한다.④ 경수로 건설기간 중에 사용한 핵연료봉은 재처리하지 않고 안전하게 북한 내에 보관 하고 궁극적으로는 제3국에 이전한다.⑤ 북한은 NPT에 복귀하고 임시사찰 및 특별사찰을 받는다.⑥ 미국은 북한이 5MW원자로 가동 및 흑연원자로 건설을 동결하는 데 따른 대체에너 지로 중유를 경수로 완공시까지 제공한다.⑦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하고 남북대화를 재개한다.⑧ 미국은 북한에 대한 무역 및 투자 제한을 일부 해제한다.⑨ 이후 양국은 전문가회담을 열어 핵문제와 관련된 기술적 문제를 다룰 때 양측에 연 락사무소를 교환 설치한다.이러한 합의내용에 따라 북한은 핵문제를 카드로 하여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이끌어내고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에 경수로를 지원받게 되었으며, 미국은 경수로 건설비용을 한국과 일본이 부담함으로써 재정부담이 없이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특별사찰 수용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흔히들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되는 일본,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론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런 일본의 가정과 교육에 대해 살펴보겠다.일본의 가정과 교육에 대해 조사하면서 이런 점을 느꼈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선진화 되어 우리나라의 앞길을 미리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일본 여성·일본의 교육제도가 그것이며 노인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가정과 교육을 우리나라의 현재와 비교해 가며 서술해 보겠다.우리나라에서 이지메·왕따 등의 말이 생겨난 것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일치감시 있었던 일이었다. 일본은 1995년에 벌써 초등학교에 4000건이 넘는 이지메 현상이 있었다. 이때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 기억으론 이 때에는 왕따·이지메란 말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 초·중·고 모든 학교에서 그런 현상들을 듣고 볼 수가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우리나라는 아마도 일본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외의 교육제도는 일본과 우리나라는 매 한가지라 생각된다. 일본에서의 교육열 또한 우리나라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도쿄 집중화 현상을 보면 서울 강남 8학군에 밀집되는 그런 현상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일본·우리나라 양국에 지금의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잘 알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우리나라는 현재 고령화 시대이다. 일본은 이미 1970년대에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었다.일본은 우리나라의 현재와는 달리 노인복지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는 편이다. 서양과 비교했을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되어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노인에게 많은 일을 부여하고 있어서 노인들이 가족에 반영하는 비율 또한 전체가구 실수입의 80%에 상응하는 많은 수입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일본은 세계에서 최장수 국가이며 노인복지 정책 또한 아주 잘 되어있다. 우리나라 노인복지 향상을 위해 일본을 적국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일본의 이런 장점을 배우는 것이 어떨까 싶다.현대 사회는 고임금 여성들이 많이 있는 실태이다. 그 결과 여성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다. 결혼? 선택이지 뭐!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고 남녀평등을 외치며 집안일을 같이 하자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요즘 남자들이 결혼을 하려면 집안일은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 거기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아 선호사상의 산실로 여성들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어 지금의 초등학생 남아의 경우 짝이 없어 같은 성별끼리 자리를 같이 하곤 한다. 일본의 경우엔 이것과는 다르지만 여성들의 결혼관의 변화가 가장 큰 산실이 아닐까 싶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늘어나는 노인인구 이런 점에서 볼 때 일본의 노령화사회에 일본 여성들이 한 몫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역사에 관련된 조사처음 지역사에 관련된 조사란 레포트를 부여받고 나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다. '답사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인터넷을 이용한 자료 검색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몰랐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우선은 대구, 경산 지역이 생겨난 유래부터 살핀 다음 답사를 한 뒤에 레포트를 마무리지어야겠다는 것이다. 그 중 내가 살펴볼 것은 대구에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 등 문화 유적에 대한 것이다. 그 조사에 앞서 지금은 대구에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서 논하여 보겠다. 물론 답사가 이루어진 뒤에도 글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식으로 레포트를 해보긴 처음이다. 하지만 이 레포트가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의 끊임없는 탐구이기에 이런 식으로 레포트를 쓰고 있는 것이다. 서두가 너무 길었던 것 같다.그러면 대구가 과거엔 어떤 도시였으며 그 명칭 및 유래에 대해 알아보고 그와 관련된 유적지는 탐구활동을 마친 뒤에 첨부하여 서술하겠다.대구의 명칭의 유래는 이렇다.'大丘(대구)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에 나타나기는 신라 757年(경덕왕 16年) 주, 군, 현의 명칭을 중국식 이름으로 고친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 개칭은 다음 혜공왕 이후의 기사에 옛 명칭인 달구벌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동안 양쪽이 함께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達句伐(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통일 이후 唐(당)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신라가 모든 제도 문물을 중국식으로 정비해 가는 변화의 한 산물이다. 종래 여러 가지로 불리우던 벼슬 이름이나 지방 이름을 원칙적으로 2자의 한자로 개칭하였다. 개칭의 방법은 음을 딴 것, 뜻을 따르는 것, 아름답게 고치는 것, 글자를 줄이는 것 등이 있는데 달구벌이 대구로 바뀐 것은 음을 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丘』자가 『邱』로 바뀐 것은 조선왕조 英正(영정)시대부터이다. 1750年(英祖 26) 『丘』자를 다른 자로 고치자는 상소가 있었다. 『丘』자가 孔子(공자)의 이름자인 까닭에서였다. 영조는 이것을 신기를 좋아하는 경망한 풍化堂(선화당)이다. 선화당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써 1972년 지방문화재로 징청각(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과 함께 지정되었다. 그러면 경상감영공원에 관련된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 살펴보겠다.'경상감영공원은 1970년에 조성된 조그마한 공원이지만 대구의 중앙지에 위치하고 있어 시민의 긴요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중구(中區) 포정동(布政洞) 21번지에 위치하고 면적은 시유지 7필지 4,162평이다. 경상감영공원은 1601년(宣祖 34年) 경상도 관찰사영이 안동(安東)에서 옮겨와 1910년 한일합병까지 있었던 곳이다. 경상감영(慶尙監營)은 1670年 1730年 1806年 세 차례 큰 화재로 소실되었고, 1807년에, 선화당(宣化堂), 징청각(澄淸閣) 등이 중건되었다. 1910年부터 1965年까지 경북도(慶道道) 청사로 사용되었다. 1965年 2月 2日 건설부 고시 제 1387호로 공원으로 지정고시 되었다. 1970年 5月 1日 건설부 고시 제 199호로 지적(地籍)이 고시되었다. 이 후 1972년 선화당(宣化堂)과 징청각(澄淸閣)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1392년(태조 원년)에 설립된 경상감영(慶尙監營)은 여러 곳에 옮겼는데 1601년(宣祖 34年) 경상 좌·우도가 합치면서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안동(安東)에서 옮겨져 대구부사(大邱府使)를 겸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선화당(宣化堂)은 3차례 큰불을 만나 소실되었다. 맨 처음의 화재는 경상도 관찰사겸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민시중(閔蓍重)의 시대로 1670년(현종 11年) 3月 22日 감영 소속의 영리청(營吏廳)에서 발화하여 신구(新舊)의 문서 및 기록을 소진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성(京城)의 각사(各司)는 경상도 왕복문서를 등사하여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발화의 원인은 감영의 이서배(吏胥輩)가 공금을 횡령하였다가 문서를 소각함으로써 증거를 없애려고 방화한 때문이었다. 두 번째 화재는 관찰사겸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조현명(趙顯命)이 재직 중인 1730년(英祖 6) 7月에서 8年(1732年)99년 향교에 있던 역대관찰사의 선정비 등 석비(石碑) 27기를 이곳으로 옮기고 경상감영 설치 400주년을 기념하여 경상감영공원이라 이름하였다. 공원경내에 당시 정청(正廳)이었던 선화당(宣化堂)과 징청각(澄淸閣) 및 절도사이하개하마비(節度使以下皆下馬碑)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상이 '누정룩'에 기술 되어있는 문헌을 참고하여 서술한 것이다.물론 나는 이와 관련된 자세한 원인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살펴본 바와 같다면 이런 이유만으로도 나는 과거 경상감영이 있었던 이 곳 대구에 있다는 것으로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다.그리고 경상감영공원이란 명칭을 갖게 된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지난번 수업시간에 경상감영에 관련된 비디오를 보았었다. 그때는 경상감영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었던 터라 비디오 내용이 무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경상감영과 관련된 조사를 하면서 경상감영의 유래와 그 규모 등 많은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아울러 지난번 비디오 내용과 더불어 생각해 봤을 때 이해가 쉽게 되는 듯하다. 물론 추후 답사가 이루어진 뒤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서술될 것이라 생각된다.나는 이번 레포트를 기행문 형식으로 쓰고자 한다. 왜냐면 하루하루 생각나는 그때 그때의 감정을 서술하기 위해서다. 답사 또한 내가 가고자 한 시점에 정말 그 곳에 관련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는 결론적으로 보면 나의 의지와 함께 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사에 관한 의문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어 탐구를 한다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식으로 레포트를 쓰고 있는 것이다.그러면 지역사에 대한 오늘의 탐구는 이상으로 마칠 것이다. 추후 인터넷이나 책을 활용한 경상감영과 대구에 관련된 서술이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다른 문헌들이나 싸이트에서 나온 것들과의 비교 분석을 위해서이다. 그러면 지역사에 대한 오늘의 탐구는 이만 줄이겠다. (5월 13일)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관심을 가지게 된 주제는 대구에 어떠한 문화유적이 있는가에 대해서이주위 길이는 약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경상감영공원은 앞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이 번엔 생략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국채보상공원의 유래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국채보상공원은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대구의 중심부에 기념공원을 조성하여 일제치하 우리민족의 독립자존을 이룩하기 위한 선열들의 항일운동정신을 기림으로써 경제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의지를 결집하고 애국애족 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여 민족정기 선양에 기여 하고자 조성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국채보상운동이 어떤 운동인지 모르는 관계로 한 번 살펴보고 넘어가겠다.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그 취지는 일본의 경제침략에서 벗어나려는 항일 애국운동이다. 천주교 지도자인 서상돈이 당시 광문사라는 인쇄소를 경영하던 김광제 등 16명과 제휴하여 일으켜 2천만 동포의 애국심에 불을 질렀다. 이 운동은 일본이 우리에게 씌워준 1,300만원의 빚을 전체 국민의 의연금으로 갚자는 것이다.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한 후 한국의 묵은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1905년 6월 200만원의 빚을 통감부가 제멋대로 일본에서 빌어왔고, 1906년에 들어서자 전체 빚은 1300만원이 되었다. 통감부는 이 돈으로 우리를 탄압하기 위한 경찰 관계시설, 인건비에 썼으며 일본인들을 위한 여러 가지 일에 투자했다. 이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담배를 끊어 그 돈으로 갚자고 했다. 2천만 국민이 20전짜리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피우지 않으면 6개월 안에 다 갚을 수 있다고 하여 이 운동을 금연 국채보상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곧 전국으로 퍼져 각처에 기성회가 생기었다. 여자들은 반찬값을 아기거나 패물을 처분하여 이 운동에 참가하여 곳곳에 애국부인회가 생기었다. 평양, 진주 등지의 기생들이 패물을 바쳐 이 운동에 참여했다. 어린아이가 1전을 내기도 하고 돈 있는 사람은 1만원도 내었다. 이렇듯 많은 이들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운동이 시작되고 1년이 된 1908년에 들어서자 두었다. 전시실 외에도 강당. 세미나실 등이 마련되어 일반인을 위한 사회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전시 유물이 소개된 책과 엽서, 기념품 등을 박물관 입구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박물관 답사 후 자세히 논해 보겠다.마지막으로 약령시전시관이다. 이는 한 약업소가 즐비한 약전골목 안에 건립된 전시관으로 1978년부터 약령시 개장행사의 하나로 전시회을 열어오던 것이 그 모태가 되었다. 1993년에 첫문을 연 이 전시관 안에는 인삼, 산삼, 녹용, 해마 등 각종 한약재가 총망라되어 있고 동의보감, 동의 수세보원 등의 한의서와 약연, 약작두 등의 한방기구등 한방 관련 용품 3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이곳은 조선시대 대구 약령시의 한약재를 판매하는 특수 시장에서 유래도힌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는 옛날과 같은 약령시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워지면서 현재와 같이 속칭 "약전골목"에서 상설 한약방, 한의원, 한약도매(약업사), 인삼사 등으로 그 모습이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상으로 대구에 있는 대표적인 문화유적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대구에는 이외의 다른 문화 유적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번을 계기로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대구에는 이렇듯 많은 명물·유적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적어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땅에서 살아간다면 타지의 사람이 대구의 명물이나 문화유적 등 대구의 대표적인 것을 물어보았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된다. 각 지역마다 그 지역 특색의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도 빨리 대구의 문화유적에 대해 잘 알고 남에게 전파하여 대구를 문화의 도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본다.오늘은 대구의 문화유적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물론 내가 살펴본 것 외에도 많은 유적지가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유적지이지만 그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 같아서 앞에서 언급해 보았다. 물론 나도 이 레포트를 하기전엔 물론 몰랐다.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