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라틴아메리카의 일반 개황1. 라틴아메리카의 자연 환경라틴아메리카의 총 면적은 2057만km2에 달하고, 33개의 독립국과 여러 나라의 해외 식민 영토로 구성되었다. 먼저 멕시코는 지리적으로 북미에 속하고, 면적은 약 196만km2이다. 해발 2000m이상의 방대한 고원에 수도인 멕시코시티가 자리잡고 있다. 중미 지역은 53만 3000km2의 면적에 7개의 독립국이 자리잡고 있다. 남미는 1782km2의 면적에, 12개의 독립국과 프랑스령 식민지 기아나가 있다. 남미의 안데스 산맥은 남미 대륙 영토의 1/5를 차지하며 토지는 비옥한 편이다. 카리브 해 내에 있는 서인도 제도는 총 면적 23만 4000km2에 이르고, 13개의 독립국과 많은 해외 식민지들로 구성되어 있다.라틴아메리카 대륙의 기후는 매우 다양하다. 아마존 강 유역은 열대 우림, 가이아나 고원은 아열대, 멕시코 북부와 칠레 북부 지역은 사막, 리오데쁠라따와 파라나 강 유역은 온난 습우,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지역은 아한대, 볼리비아와 에콰도르는 고산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남부 지역은 한대 기후이다.라틴아메리카의 방대하고 험준한 지세는 쿄통과 통신 발달의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각국에서 지세의 영향으로 고립된 지역들은 국가 통합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로인해, 국가 이익보다는 지역 이익에 집착하고, 경쟁과 적대 의식은 지역주의를 팽배시켜 정치적 해악으로 작용하고 있다.2.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과 고대 문명1. 멕시코와 중미지역멕시코 지역에서 원주민 출현은 B.C.24,000~21,000년경으로 추정하며, B.C.7000~5000년경부터 일부 지역에서 유목민과 정착민의 발생으로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B.C.3500년경에 출현한 옥수수 산지를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B.C.1000년경 올메카 족의 문화는 오늘날 Oaxaca, Chiapas 및 Guatemala 등 중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멕시코시티와 푸에블라 분지에서 발생한 도시형 Teotih다.차빈문화의 쇠퇴 이후에 트루히요를 중심으로 발전한 모체 또는 모치카 문화가 있었다.그들은 방대한 관개 수로와 사원, 그리고 호화스런 복장을 개발하였다. 모치카 주민들은 면화와 양모를 사용하고, 특히 옥수수를 연중 3모작으로 연작하였다. 또, 오아시스 토양에서 비옥도가 떨어지자 관개 수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모체 및 나스카 문화의 번영기인 A.D.600년경에 볼리비아 고원의 티아우아나코 주민과 아야쿠초 주변의 우아리 주민들은 인접 지역을 정복하여 문화권을 확대하였다.안데스 문명의 특색은 모든 자연 환경의 성공적인 극복에 있었다. A.D.1370년경 모체와 치카마 지역을 중심으로 고도의 행정력과 수확 기술을 갖고, 토기 제작과 관개 수로 건설에서 두각을 보이면서 인적 지역을 정복한 치무 족이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A.D.1477년경에 이들을 정복한 께츄아족은 치무 족의 직능인들을 쿠스코로 이주시키는 유용한 종족으로 활용하였다.(1) 잉카문명잉카 왕국은 1세기동안 남북으로는 콜롬비아로부터 칠레의 마울레강까지, 동서로는 태평양 연안으로부터 안데스의 동부 계곡 지대까지 방대한 지역을 정복하여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국명은 모든 방향 또는 4방향의 세계라는 의미의 타아안틴수요였다. 주민들은 쿠스코가 지구의 중심이고, 성지라 태양에 의해 빛나는 도시라고 믿었다. 잉카는 께츄아족의 족장으로 군주가 된 후, 최후에는 강력한 제국의 왕으로 변신하였다.각 지역 지배 계층의 자녀들을 쿠스코에서 집단적로 교육시켰다. 잉카의 교육은 경직되어 있었으나 효율적이었다. 잉카 제국의 정복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이며 또한 전체주의적이었다. 정복지의 모든 주민들에게 께츄아어를 교육시켜 방대한 지역에서 언어의 통일을 이루었다. 여러 방면에서 통일을 성취했으나 지속적인 재정적 지원의 결여로 서서히 여러 고셍서 새로운 사회 문화적 다양성이 표출되었다.이들은 기본적으로 아이유를 중심으로 연간 그들 가족의 생계 유지에 필요한 토지를 가족 대표들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주민들은 확실히 수학 지식에서 연안으 탐험함으로써 공식적인 브라질 발견지가 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의 아메리코 베스푸치오가 포르투갈에 봉사형 1502년 리우데자이네루 만을 발견하였다. 그 사이 가스파르 이 미겔 코르테 레알이 1501년 그린랜드까지 원정하였다. 영국의 헨리 7세 재임시 이탈리아 출신의 후안 가보토가 영국에 봉사하여 1497년 북아메리카의 라브라도 반도까지 도달한 후 글니랜드에서 플로리다까지 탐험하였다. 1509년 폰세 데 레온이 혈전으로 푸에르토리코를 정보갛였다. 이어 1511~1512년 사이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쿠바를 정복하여 산티아고와 하바나 시를 건설하였다. 1513년 바스코 누네스 데 발보아가 파나마 지협에서 태평양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1518년 페드리아스 다빌라가 파나마 시를 건설하였다.1517년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유카탄 반도를 발견하였다. 그후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스테카 제국의 정복에 성공하였다. 그는 1524년 페드로 데 바라도를 과테말라, 그리고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를 온두라스에 파견하여 정복을 실시하였다. 그 사이 1524년 파나마에서 출발한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니카라과를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에르난도 데 소토가 미국의 남부지역 탐험 원정에 참여하여 1541년 미시시피 강을 발견함으로써 아칸소 지역에까지 도달하였다.한편, 콜롬버스의 3차 여행시에 발견된 베네수엘라의 지역은 1528년 카를로스 5세가 독일의 벌서 회사에 개발권을 넘겼다. 베세수엘라 지역에서 독일인들의 착취 활동이 강화되자 카를로스 5세는 1546년 특권을 폐지하였다. 스페인인들은 1525년 사타마르타 연안에 도시를 세우고, 1532년 에레디아가 카르타헤나시를 세웠다. 칩차 족의 저항속에 히메네스 데 캐사다가 1537년 쿤디나마르카 고원 지대에 1538년 산타페 데 보고타시를 건설하였다.1532~1535년 사이 스란시스코 피사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잉카 제국 최후의 왕이 아타우알파를 격파하여 쿠스코에 진출함으로써 페루 지역을 정복한 후 1535년정복자들은 도시를 건설할 때면 먼저 시 의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시 정부의 규정, 재정, 교량, 도로, 및 위생 등 공공 사업 업무와 경찰 업무를 감독하였다.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사법 행정은 왕실 사법 행정원과 여러 특별 재판소를 통해 이루어졌다. 왕실 사법 행정원은 독자거인 업무 외에도 정부의 다른 업무들을 통제하는 기구로도 역할을 수행하고, 이에 따라 법적 권한과 행정 및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2. 식민지의 경제와 사회스페인은 아메리카의 경제 개발을 위해 고도의 기술을 지원하여 많은 것을 개선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은 먼저 풍부하면서도 획득하기 쉬운 희귀 금속 등의 광물에 관심을 두었다. 광산의 개발에서는 생산량의 10%를 공물로 제공토록 하고, 주요 금광과 은광들은 멕시코, 페루 및 누에바그라나다 지역에 있었다. 농업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농산물의 종자와 가축 동물 등을 소개하면서 아메리카에서 알려지지 않은 바퀴와 쟁기 등 새로운 경작 방법과 기술을 제공하였다.스페인은 식민지에서 본국과의 거래가 아니면 어떤 형태의 교역 활동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세비야 항구만이 교역항으로 승인되었다. 영국은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스페인으로부터 항해 허가 조항으로 500톤급 1척의 상선을 이용한 포르토배요와의 교역이 실행되었다. 또, 흑인 조달 조항으로 연간 4800명의 아프리카 흑인을 30년 간 아메리카에 조달하는 허가를 받았다. 이리하여 영국인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밀수활동을 강화하였다.정복과 식민화 과정에서 아메리카 식민지 사회에서는 수많은 인종 집단 간의 접촉으로 새로운 인종이 출현하고, 또 사회적 계층이 형성되었다. 스페인 인들은 수적으로 적었지만 특권 계층을 이루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요직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인 끄리오요, 백인과 원주민간의 혼혈일 메스티소, 백인과 흑인간의 혼혈인 물라토, 원주민과 흑인간의 삼보가 있었으며, 흑인들은 힘든 광산과 농업 활동에서 원주민을 대체할 노동 세력으로 소개되었에 이르렀다. 그리고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끄리오요들을 이념적으로 고무시켰다.3.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독립의 반향스페인이 영국과의 전쟁에 따른 전비 충당을 위해 아메리카에서 세금을 증대할 시기에 누에바그라나다 부왕청 지역에서는 농민반란이 발생하였다. 한편, 미국의 식민인들은 영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스페인을 지원하였다.18세기에 악정 폐지라는 구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발생한 수많은 반란의 공통된 용어였다. 반란의 원인은 감독관청의 설치, 새로운 명목의 세금 신설 및 증대에 따른 개혁과 관계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원주민들의 반란이고, 뒤를 이어 끄리오요와 메스티소들의 폭동이 있었다. 원주민 보호법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은 원주민들을 강제로 사역시키고, 지방의 관리들은 필요 없는 물건을 비싼 값으로 판매하였다. 주로 1780년대에 원주민 반란이 자주 발생하였다. 원주민 최대 반란은 잉카 제국의 후예로 교육받은 투팍 아마루의 반란이었다. 잉카 최후 왕의 모계 혈통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며 1년간 대대적으로 전투를 벌이다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비록 원주민들의 반란은 종족 방어와 식민지 사회 및 경제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사실은 스페인의 권력 남용에 대한 그들의 권리 주장이었다. 그러자 스페인 왕실은 즉각 분배 제도, 강제 사역 및 지방 관리들의 악정을 시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감독관을 지명하여 미타 제도의 개선과 지역 당국과 끄리오요들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원주민을 보호하려고 시도했다.6. 독립시의 라틴아메리카1. 독립 운동의 여러 요인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운동의 원인은 간접적인 원인과 직접적인 원인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간접적인 원인은 부르봉 왕조가 개혁 정책에 실패하여 식민지 주민들에게 귀속감을 강화시킨 데 있다. 그리고 직접적인 원인은 프랑스 혁명이었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식민 체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처음에 식민지의 끄리오요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