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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리단 -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
    일하며 논다, 배운다문화·예술분야 첫 번째 사회적 기업 노리단영등포에 위치한 하자센터 2층에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이번 홍콩 춘절(구정)축제에 서울시 대표로 참가하는 노리단은 출국을 하루 앞두고 리허설에 한창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오후 2시가 주는 나른한 기분과 긴 휴일을 앞둔 나태함도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신선하고 흥겨웠다.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머금은 얼굴들이 아름답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도 구지 예쁘거나 멋있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었다.지금의 노리단이 있기까지노리단은 이미 TV CF와 방송 출연을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공공적 문화예술 기업이다. 그러나 방송에서 비춰진 재활용 악기를 신나게 두드리던 모습만으로는 노리단을 전부 보았다 할 수 없다. 노리단은‘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자’를 모토로 하는 하자센터(서울시립 청소년 직업체험센터)의 빅 프로젝트로 출발했다. 이들에게 처음 영감을 준 것은 ‘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였다. 1956년 스페인의 실바 신부는 열다섯 명의 소년소녀들과 어린이 서커스단을 만들어 세계를 유랑한 것으로 유명한데, 노리단은 ‘벤포스타’를 통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배움과 노동, 예술이 하나가 된 공동체를 발견했다. 그 다음으로 노리단에 영감을 준 친구는 '사우스 마운틴 스토리(2006, 샨티)'였다. 사우스 마운틴은 미국 마서즈 비니어드 섬 공동체에 속해서 활동하는 건축회사로, 일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지난 30년간 적자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그들의 작업원칙은 노리단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리단에 가장 직접적인 영감을 준 이는 호주의 생태주의 퍼포먼스 그룹 허법을 이끌고 있는 스티브 랭턴(Steve Langton)이었다. 2002년 경남 산청의 간디학교에서 그와의 첫 만남은 2004년 6월 노리단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태어난 노리단은 1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세대들이 모여 ‘회사 같은 학교’와 ‘교육하는 공연단’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며, 해마다 생태주의 공연과 공공 디자인, 각종 워크숍 등을 통하여 우리 주변에 좀 더 가까이 와 있다.노리단은 사회적 기업이다노리단은 스스로를 ‘회사’이자 ‘학교’, ‘공방’이라고 부른다. 단원들은 모두 공연하는 배우이고, 워크숍을 하는 교사이자, 공장에서 악기와 놀이터를 만드는 장인이 되어보길 바란다. ‘아침에는 배우, 점심에는 장인, 저녁에는 교사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이 바로 노리단인 것이다. 노리단은 그런 꿈을 키우고 널리 확산할 수 있는 조직 모델이 무엇인지 찾던 중 사회적 기업을 알았다. 그들은 초창기부터 수익성보다는 청소년들의 사회진출을 돕는 등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이 낯설지 않았다. 그때부터 노리단은 사회적 기업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함께 일하는 재단'과 '사회적 기업 지원 네트워크'의 자문과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2007년 11월에 노동부로부터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최초로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을 받았다. 사회적 기업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지만 노리단은 일과 놀이와 학습을 같이 하는 것,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서 자기를 고용하는 것, 지도 바깥에서 세계를 새롭게 보는 것의 출발점 중 하나가 사회적 기업이라고 생각한다.일과 놀이의 경계를 허물어라노리단이라는 명칭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놀이’에서 온 것이다. 이름이 ‘노리단’인 만큼 일과 놀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그들의 생각도 남다를 것 같아, 안석희 공동대표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그는 ‘창의성이란 어디서 오는가?’를 음미하며, ‘창의성이란 매일매일의 노동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 갇혀 있어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얼핏 상반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둘은 충돌하는 개념이 아님을 강조한다. 일과 놀이가 어우러져 ‘일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일’이 되는,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란다. 결국 ‘일’과 ‘놀이’란 상당히 다른 개념인 듯 하면서도 인간의 삶을 다르게 부르는 용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과 놀이를 오가면서 성실한 노동을 통해 스스로의 자유로움을 드러내도록 돕는 것이 노리단의 공동대표로서 가진 그의 경영철학이다.노리단의 펴낸 책 ?일하며 논다, 배운다?를 보면 단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대목이 나온다. 학교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대안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마저도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지내던 이가 처음 노리단에서 악기 연주를 하고 해방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6개월간 단원으로 지내다가 훌쩍 무전여행을 떠나고 여행 끝에 “일상과 여행은 다르지 않다. 돌아가서도 여행 같은 하루를 살자”고 결심하고 더욱 일을 사랑하게 된 이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밥까지 먹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꿈꾸던 평범한 직장인이 입단한 경우도 있다. 그녀는 ‘얼마나 잘 연주하느냐’ 보다는 ‘자기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으냐’가 오디션의 통과 조건이었다고 회상하며, 이 매력적인 동네에 발을 들인 사연을 이야기 한다.
    예체능| 2009.12.06| 3페이지| 1,000원| 조회(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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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물관]새로 바뀐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고..
    새로 바뀐 국립중앙박물관을 보고용산에 새로 자리잡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2005년 말까지는 입장이 무료라 그런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단체 일본인 관광객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IT박물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안내를 위한 MP3와 PDA대여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관내에도 박물관 내부의 시설에 대해 안내하는 컴퓨터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1층 복도에는 경천사 10층 석탑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 부소산 경천사터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반출한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 경복궁에 옮겨 세운 것이다. 고려 충목왕 4년 (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은 이 탑을 본따 만든 것으로 높이가 13m 에 달하는 대리석 10층 석탑으로 네 면이 튀어나온 사면 두출성형의 3층 기단 위에 같은 평면을 한 탑신을 3층 올린 뒤 정사각형의 탑신 7층을 쌓았다. 기단과 탑신에는 불 보살 초화문 등을 양각했으며, 탑의 지붕인 옥개석의 처마 구조는 목조 건물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거의 3층 복도까지 닿을 높이로 천장이 하나로 뚫린 박물관 내의 가장 주목받는 전시품 중 하나처럼 보였다.박물관의 1층은 ‘고고관’과 ‘역사관’으로 되어있는데, ‘고고관’은 구석기시대부터 남북국시대(통일신라/발해)까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사관’은 한글실, 지도실, 문서실 등의 또다른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우리나라의 특정시대가 서양의 어떤 시대와 맞물리는지를 설명하는 표를 보면서 실내로 들어섰다. 각 시대의 생활들을 재현해 놓은 장식품들과 유물들에는 작은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뗀석기에서 간석기로 넘어가, 농경이 시작되고 원시신앙에 대한 숭배와 계급의 출현, 청동기로 만든 거친무늬 거울과 비파형 동검, 철의 생산과 함께 시작된 영토확장 전쟁에서 비롯된 3국의 출현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박물관은 그저 하나의 돌 조각에 의미를 부여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문명’이라는 단어와 문명이전의 시대를 쉼없이 오가며 어떻게 우리가 지금 여기 서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준다. 구석기 시대에 우리 조상은 무리생활을 하며 수렵과 채집으로 끼니를 잇고, 먹이감을 찾아 이동생활을 했다. 뗀석기는 처음에는 하나의 도구가 여러 용도로 쓰이다가 차츰 하나의 석기가 하나의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흑요석이라는 깨어짐이 유리와 같은 석기들이 전시된 모습도 보인다. 무디어진 석기를 갈아서 다시 날카롭게 세우는 방법을 터득한 신석기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는 바다로 낚시를 하기도 하고, 정착생활과 더불어 농경생활을 하였다. 유명한 서울의 암사유적지 등에서 보았던 화덕이 가운데 위치한 움집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도토리 모양으로 생긴 빗살무늬토기를 썼는데, 어떤 이들은 모래에 꽂기 편하기 때문에 토기의 모양이 뾰족한 끝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한다. 바닷가에 살았던 특성 때문인지 조개패 가면이나 조개껍질도 만든 장신구도 볼 수 있다. 장신구 뿐 아니라 식량으로서도 조개는 유용하였을 것이다. 농경이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전체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적었다고 한다. 농경이 본격화되고 쌀 재배도 시작된건은 청동기 시대였다. 이때부터는 배산임수의 구릉지도 청동기인들의 본거지도 이동한다. 부여나 여주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이 시대부터 쌀이 재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는 아주 귀해서 농기구로는 쓰이지 않았고, 무기나 제기로 쓰였다. 처음에는 북방식의 거친무늬거울이나 비파형 동검이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이때는 초기 철기로 보기도 함) 한국식이라 불리는 잔무늬거울과 세형동검으로 대체되었다. 전시된 거푸집은 우리가 단지 청동기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청동기를 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청동기는 우리가 단군신화로 익히 알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출현한 시대로 기록으로는 B.C 2333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농경에서 생긴 잉여 생산물로 빈부의 격차와 계급이 생겨났다. 이어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 중국의 유이민들이 철을 가지고 고조선으로 남하해 오면서 우리나라에 철기가 전래되었는데 철기는 농기구로 이용되면서 농업기술에 박찰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석기로 된 농기구는 우리나라 삼국시대까지 두루 쓰였다는 것이 종종 확인된다. (삼국시대 유물관에서도 석기로 된 농기구가 전시된 점.) 이때부터 각 부족이 연합해 나라를 세우고 세력싸움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경쟁관계의 전신이다. 서기를 전후해서 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나라를 세우고 경합을 벌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건국이 가장 앞선 것으로 표현되나, 이는 그가 신라의 후손으로 신라중심의 역사서술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문화의 패기와 정열은 남겨진 유물에서 볼 수 있다. 무덤양식에서 보이는 사신도의 화려함과 모줄임 천장구조는 발해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인의 생활을 엿 볼수 있는 부뚜막과 마굿간 등이 기억에 남는다. 금동신의 바닥에 못을 거꾸로 박아놓은 듯한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신발 사이즈가 매우 큰 것을 보아 다른 신을 신은 위에 신었던 것으로 보였다. 백제는 아주 화려한 문화를 특징으로 말할 수 있겠는데 화려한 장식구가 아주 많았다. 너무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는 생각보다 매우 컷다. 악취를 제거하고 부정을 없애기 위해 향을 피우던 도구로, 아래에는 다리 하나를 치켜들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고 그 위에 신선들이 사는 박산(博山)이 있다. 박산의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는 모습이다. 연기는 봉황의 가슴과 뚜껑에 뚫려 있는 12개의 구멍으로 피어오르도록 고안되어 있다. 국보 제287호로,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발굴 당시의 사진도 전시되어있었다.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도 여러점 전시 되어있었다.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지 못해 처음에는 향토적인 것이 특징이었는데 삼국항쟁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에는 삼국문화의 통일마저 이룩해 통일과 조화의 미를 특징으로 꼽는다. 뿔모양의 잔이나 유리잔이 출토됨으로 미루어 당시 그리스 등의 서방과 교역이 중국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금관이나 금 장식구가 무척 많고 연결통로에 마련된 금관은 매우 크고 화려해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불교국가로 화장이 일반화 되어 그런지 뼈단지도 전시 되어있었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발해의 유물은 고구려와 흡사한 면이 많았는데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했기 때문이리라. 사자인 듯도 보이는 석기 용머리와 발해기와가 기억에 남는다. 1층 고고관 맞은 편에 위치한 ‘역사관’은 한글실과 지도실 인쇄실,,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중에 ‘한글실’에 대해 소개하면 한글의 제자원리와 한글로 쓰여진 책들이 소개되어있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세종 28년 백성들에 반포한 훈민정음 해례본과 수양대군이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기위해 석가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한 ‘석보상절’에 세종이 찬사를 붙인 ‘월인천강지곡’을 합본한 ‘월인석보’도 볼 수 있었다. ‘용비어천가’의 불휘기픈 남간 바람에 아니 뮐세.. 글귀와 한글 소설의 효시 ‘홍길동전’
    독후감/창작| 2005.12.20| 2페이지| 1,000원| 조회(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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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람 , 답사]용산 국립중앙 박물관
    새로 바뀐 국립중앙박물관을 보고용산에 새로 자리잡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2005년 말까지는 입장이 무료라 그런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단체 일본인 관광객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IT박물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안내를 위한 MP3와 PDA대여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관내에도 박물관 내부의 시설에 대해 안내하는 컴퓨터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1층 복도에는 경천사 10층 석탑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 부소산 경천사터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반출한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 경복궁에 옮겨 세운 것이다. 고려 충목왕 4년 (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은 이 탑을 본따 만든 것으로 높이가 13m 에 달하는 대리석 10층 석탑으로 네 면이 튀어나온 사면 두출성형의 3층 기단 위에 같은 평면을 한 탑신을 3층 올린 뒤 정사각형의 탑신 7층을 쌓았다. 기단과 탑신에는 불 보살 초화문 등을 양각했으며, 탑의 지붕인 옥개석의 처마 구조는 목조 건물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거의 3층 복도까지 닿을 높이로 천장이 하나로 뚫린 박물관 내의 가장 주목받는 전시품 중 하나처럼 보였다.박물관의 1층은 고고관 과 역사관 으로 되어있는데, 고고관 은 구석기시대부터 남북국시대(통일신라/발해)까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사관 은 한글실, 지도실, 문서실 등의 또다른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우리나라의 특정시대가 서양의 어떤 시대와 맞물리는지를 설명하는 표를 보면서 실내로 들어섰다. 각 시대의 생활들을 재현해 놓은 장식품들과 유물들에는 작은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뗀석기에서 간석기로 넘어가, 농경이 시작되고 원시신앙에 대한 숭배와 계급의 출현, 청동기로 만든 거친무늬 거울과 비파형 동검, 철의 생산과 함께 시작된 영토확장 전쟁에서 비롯된 3국의 출현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박물관은 그저 하나의 돌 조각에 의미를 부여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문명 이라는 단어와 문명이전의 시대를 쉼없이 오가며 어떻게 우리가 지금 여기 서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준다. 구석기 시대에 우리 조상은 무리생활을 하며 수렵과 채집으로 끼니를 잇고, 먹이감을 찾아 이동생활을 했다. 뗀석기는 처음에는 하나의 도구가 여러 용도로 쓰이다가 차츰 하나의 석기가 하나의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흑요석이라는 깨어짐이 유리와 같은 석기들이 전시된 모습도 보인다. 무디어진 석기를 갈아서 다시 날카롭게 세우는 방법을 터득한 신석기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는 바다로 낚시를 하기도 하고, 정착생활과 더불어 농경생활을 하였다. 유명한 서울의 암사유적지 등에서 보았던 화덕이 가운데 위치한 움집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도토리 모양으로 생긴 빗살무늬토기를 썼는데, 어떤 이들은 모래에 꽂기 편하기 때문에 토기의 모양이 뾰족한 끝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한다. 바닷가에 살았던 특성 때문인지 조개패 가면이나 조개껍질도 만든 장신구도 볼 수 있다. 장신구 뿐 아니라 식량으로서도 조개는 유용하였을 것이다. 농경이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전체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적었다고 한다. 농경이 본격화되고 쌀 재배도 시작된건은 청동기 시대였다. 이때부터는 배산임수의 구릉지도 청동기인들의 본거지도 이동한다. 부여나 여주에서 발견된 탄화미 는 이 시대부터 쌀이 재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는 아주 귀해서 농기구로는 쓰이지 않았고, 무기나 제기로 쓰였다. 처음에는 북방식의 거친무늬거울이나 비파형 동검이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이때는 초기 철기로 보기도 함) 한국식이라 불리는 잔무늬거울과 세형동검으로 대체되었다. 전시된 거푸집은 우리가 단지 청동기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청동기를 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청동기는 우리가 단군신화로 익히 알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 이 출현한 시대로 기록으로는 B.C 2333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농경에서 생긴 잉여 생산물로 빈부의 격차와 계급이 생겨났다. 이어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 중국의 유이민들이 철을 가지고 고조선으로 남하해 오면서 우리나라에 철기가 전래되었는데 철기는 농기구로 이용되면서 농업기술에 박찰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석기로 된 농기구는 우리나라 삼국시대까지 두루 쓰였다는 것이 종종 확인된다. (삼국시대 유물관에서도 석기로 된 농기구가 전시된 점.) 이때부터 각 부족이 연합해 나라를 세우고 세력싸움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경쟁관계의 전신이다. 서기를 전후해서 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나라를 세우고 경합을 벌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에서는 신라의 건국이 가장 앞선 것으로 표현되나, 이는 그가 신라의 후손으로 신라중심의 역사서술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문화의 패기와 정열은 남겨진 유물에서 볼 수 있다. 무덤양식에서 보이는 사신도의 화려함과 모줄임 천장구조는 발해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인의 생활을 엿 볼수 있는 부뚜막과 마굿간 등이 기억에 남는다. 금동신의 바닥에 못을 거꾸로 박아놓은 듯한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신발 사이즈가 매우 큰 것을 보아 다른 신을 신은 위에 신었던 것으로 보였다. 백제는 아주 화려한 문화를 특징으로 말할 수 있겠는데 화려한 장식구가 아주 많았다. 너무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는 생각보다 매우 컷다. 악취를 제거하고 부정을 없애기 위해 향을 피우던 도구로, 아래에는 다리 하나를 치켜들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고 그 위에 신선들이 사는 박산(博山)이 있다. 박산의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는 모습이다. 연기는 봉황의 가슴과 뚜껑에 뚫려 있는 12개의 구멍으로 피어오르도록 고안되어 있다. 국보 제287호로,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발굴 당시의 사진도 전시되어있었다.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도 여러점 전시 되어있었다.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지 못해 처음에는 향토적인 것이 특징이었는데 삼국항쟁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에는 삼국문화의 통일마저 이룩해 통일과 조화의 미를 특징으로 꼽는다. 뿔모양의 잔이나 유리잔이 출토됨으로 미루어 당시 그리스 등의 서방과 교역이 중국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금관이나 금 장식구가 무척 많고 연결통로에 마련된 금관은 매우 크고 화려해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불교국가로 화장이 일반화 되어 그런지 뼈단지도 전시 되어있었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발해의 유물은 고구려와 흡사한 면이 많았는데 그들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했기 때문이리라. 사자인 듯도 보이는 석기 용머리와 발해기와가 기억에 남는다. 1층 고고관 맞은 편에 위치한 역사관 은 한글실과 지도실 인쇄실,,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중에 한글실 에 대해 소개하면 한글의 제자원리와 한글로 쓰여진 책들이 소개되어있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세종 28년 백성들에 반포한 훈민정음 해례본과 수양대군이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기위해 석가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한 석보상절 에 세종이 찬사를 붙인 월인천강지곡 을 합본한 월인석보 도 볼 수 있었다. 용비어천가 의 불휘기픈 남간 바람에 아니 뮐세.. 글귀와 한글 소설의 효시 홍길동전
    경영/경제| 2005.12.12| 2페이지| 1,000원| 조회(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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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하울의 움직이는 성 평가B괜찮아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견해.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이번에는 어른동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을 선사한다. 소피는 가업을 이어 모자를 만들고 있다. 이야기의 처음 부분을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유럽의 어느 마을 같은 배경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아주 특별한 로맨스가 펼쳐진다. 마법사 하울은 사람의 심장을 먹어버리는 잔인함을 가진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하울의 성이 자신들의 마을에 왔음에 술렁거린다. 어느날 길에서 소피는 불량해보이는 남자들을 맞닥뜨린다. 이때 한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와 하늘을 걷는 짧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와의 만남 뒤에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된 소피에게 그녀의 동생은 하울을 만나 심장을 빼앗긴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하울이 사람의 심장을 먹는다거나 하는 표현은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피와 하울이 하늘 위를 걷는 것은 사랑이 주는 느낌. 하늘을 나는 것 같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감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는 소피는 하울과 그녀가 만난 사실을 알고 있는 마녀에게 저주를 받아 할머니가 되어버린다. 그때부터 소피의 모험이 시작된다. (사랑은 낯선 세계로의 모험이다. 사랑에는 지도도 좌표도 없이 그저 표류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마법에 걸린 허수아비의 도움으로 하울의 성으로 찾아온 소피는 노파행세를 하고 하울에게 접근한다.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어리석고 비겁한 면도 보게 되지만 소피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마침 이웃나라와 전쟁이 일어나 마법사에게도 징집이 내려지는데 여러개의 이름으로 자신을 숨겨온 하울은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에게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사랑에는 필수적이고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랑은 겁쟁이를 용감하게 만들수도 있다.) 결국 전쟁은 끝이 나게 되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 중에서 사랑과 감정에 대한 묘사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해도 좋다. 그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평범함 곳곳에 숨어있는 환타지적인 요소와 로맨스가 적절히 잘 어우러져 있다. 이런 매력이 이 작품을 어른 동화로 승화시키는 요소가 아닐까?
    독후감/창작| 2005.09.09| 1페이지| 1,000원| 조회(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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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관람] 세계도자기축제(이천)을 다녀와서. 평가A좋아요
    이천 세계도자기 축제에 다녀와서..중국어를 전공하고 있어 작년 중국에 유학을 했던, 동생의 홍콩 친구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 가까운 이천 도자기 축제를 찾았다. 지금 경기도의 이천, 광주, 여주는 모두 ‘도자기’라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테마를 달리하여 ‘경기도 세계도자 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과 내국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특히 ‘이천’은 볼거리가 많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2005년 5월 22일, 그리로 향했다. 역시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무척 많아 주차를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장내에 주차장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주차장에서 행사장까지는 차로 10여분이 걸리는데 주최측은 셔틀버스를 운행해 이용자의 불편함을 최소화하려 배려를 하고 있었다.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야외옹기’였다. 역시나 외국인 친구는 이 커다랗고 푸짐한 장독대들이 한눈에 마음에 드나보다. 장독을 껴안고 쓰다듬으면서 사진을 찍느라고 난리가 났다. 입구의 ‘토야 교육관’에 들어서니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영상을 상영해주고 있었다.1. 흙으로 모양 만들기2. 그늘에서 잘 말리기3. 불에 굽기(초벌구이) 보통 800~900℃ 15~25시간 정도 굽는다4. 유약바르기5. 불에 굽기 (재벌구이)보통 1200~1300℃ 20~30시간 정도 굽는다유약을 초벌구이 전에 바르는지, 성형 후에 바르는지 조차 모르던 내게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만도 신기한데 유약을 발라 색깔을 낼 수도 있다니..나중에 알게 된 것이긴 하지만 외국의 도자기들이 우리 동양의 청자에 매료되어 그 푸른빛을 흉내 내기 위해 도자기 위해 푸른색을 채색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저히 그런 색깔을 만들어 낼 수가 없자 대량으로 중국에서 왕실도자기의 모조품을 수입해갔다. 당시 동양의 청자는 그들에게 부의 상징이었으며 지금말로 ‘명품’이었던 것이다. 도자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 토기를 만들어 썼던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를 언급할 수 있다. 흙을 불에 구우면 더욱 단단해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후에는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등으로 더욱 발전하면서 청동기 철기시대를 거쳐 다른 문명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오늘날의 도자기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늘 순탄하고 발전만 거듭한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에 조국이 일본의 야욕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우리의 도공들은 그들의 간섭을 받으면서 우리의 얼을 담아야 할 도자기를 그들의 눈요깃감으로 만들어야 했고 우리의 도자예술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이후에는 서구화가 발전인 듯이 포장된 시대를 살면서 역사의 외면을 받기도 하였다. 오늘날에 다시 이 지역들이 도자기의 고장으로 거듭나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들 고장에서는 도자기를 특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관련학과를 만들고 조상의 얼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전시장 밖에서는 도자기 만드는 모습을 시현하는 행사도 있었는데 흙을 만드는 기술자의 솜씨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연신 감탄사와 박수로 그를 격려했다. 우리가 TV에서 마술쇼를 볼 때의 기분과 흡사한 그것이다. 그저 평범한 흙덩어리가 그릇이 되고, 화병이 되고, 항아리가 되는 모습은 흙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그야말로 ‘창조’과정이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내가 아는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흙으로 지으셨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고 무언의 수긍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도자기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무료로 하나씩 나누어졌다.이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이천세계도자센터’로 입장했다. 이곳 외에는 모두 무료관람이다.‘이번 행사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전시는 ‘세계청자전’이다. 우리나라 국보 3점과 일본 중요문화재 6점, 중국 1급 문화재 18점 등 3개국의 국보급 청자 200여 점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 청자의 보험가액만 700억 원에 이를 정도다.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이 큐레이터를 맡았고, 청자는 내놓지 않았지만 미국 보스턴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등 5개국 20여 기관도 전시에 동참해 어느 해보다 볼거리가 풍성하다. 여기에 국내외를 망라해 작가·학자 등 전문가와 도자기 상인을 포함해 총 67개국 3,000여 명이 참여해 이번 행사가 ‘세계적 축제’임을 과시하고 있다. ‘문화를 담는 도자’를 주제로 한 올해 세계도자비엔날레는 관객들이 단순히 진열된 작품을 보는 것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작품 세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대형작품 중 일부는 관객들이 직접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게 설치됐고, ‘현대도자전’이나 ‘국제공모전’ 전시장에서는 작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영상 다큐멘터리가 상영돼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도자예술의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는 ‘세계현대도자전’에는 영국의 앤서니 곰리 등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30여 명의 현대도예 작가가 참여한다. 이들은 조각·회화 등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는 현대 도자예술의 흐름을 보여줄 예정이다.‘국제공모전’에서는 67개국 1,430명의 작가가 응모한 2,475점 가운데 선정된 190점이 생활도자 부문과 조형도자 부문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대상을 수상한 스위스 작가 필립 바드의 ‘얼굴 모양 용기’는 지름 15cm 크기의 용기 9개로 구성돼 있다.이천 세계도자센터 지하 전시장에 들어서면 수많은 토기가 가득하다. ?곰리의 ‘아시아의 땅’은 물론 중국 광둥(廣東)성 산골마을 주민이 빚은 토기인형 1만 9,000여 개가 바닥에서 관람객들을 쳐다본다. 머리와 몸통만 있는 15cm 크기의 작은 토기 인형들이지만, 거대한 군상이 바닥에서 들고 일어나는 느낌을 준다.‘ 네이버 뉴스의 이천 도자기 소개내용 스크랩전시관에서는 ‘세계도자축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러 국가에서 참가한 세계의 도자기들을 볼 수 있었다. ‘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도자기의 정형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시현했다. 도자기의 종조국인 동양의 정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주제들도 눈에 띄였다. 선으로 도자기의 형태를 만들어 형태는 도자기이되 매우 입체적인 작품도 있었고, 인간의 형태를 섹슈얼하고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인테리어 소품 가게에서 보일 법해서, 여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할만한 매우 모던한 디자인의 도자기 식기세트도 많았다. 세계의 가마모양을 전시한 미니어쳐도 매우 잘 만든 것이어서 주의 깊게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곰리의 ‘아시아의 땅’이라는 작품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동양인의 사진 옆에 그를 형상화한 토기인형을 사진을 붙여 연쇄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또 하나의 방에는 가득히 수많은 토기인형들이 한 곳을 응시하며 다양한 표정으로 관람객들을 향해 무어라고 외칠 듯이 전시되어 있었다. 진시황의 용마갱을 떠올리게도 하는 묘한 느낌의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흙과 아시아의 정서가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동양은 분명 흙의 그것과 닮아있다. 외국의 도자기들은 우리의 그것들보다 상업적이고 도전적인 것들이 많았다. 우리의 도자기가 과거의 유물이라면 외국의 것들은 도자기의 오늘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일본의 작품들은 상당히 개성적이고 독특했다. 나의 감상이 사대적인 것 일수도 있겠지만 내가 거기서 느낀 것은 ‘왜 우리의 도자기는 과거의 것에 머물러 현대적인 오늘날의 것으로 세계적인 주류가 되지 못했던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과거 고려나 발해의 도자기들은 중국에서 매우 진귀하게 여겨졌으며, 우리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서 많은 도공들을 인질로 잡아가서 그들의 기술을 익히기도 했는데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 계기였다. 서양의 동양의 자기에 대한 관심과 서양자기가 동양의 것을 닮으려 시도한 것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도 재미있었다. 16세기 스페인의 귀족들은 동양의 청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멕시코의 도공들은 그들의 요구로 청자를 모방하기 위해 도자기에 물감을 칠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산 도자기가 서양으로 수입되었고 그 증거는 카리브해 앞바다 산호초 아래 잠들어있다. 침몰된 배에서 수많은 중국산 도자기가 발견된 것이다. 이 도자기들은 모두 왕실도자기의 모조품들이었는데 이것을 주문했던 당시 귀족들이 상품구입서류등이 아직 남아있어 그때 이들이 얼마나 동양 청자에 열광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예체능| 2005.05.28| 3페이지| 1,000원| 조회(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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