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구어( 印歐語 Indo-European language)란?인구어는 대부분의 유럽지역의 근동 및 북인도의 넓은 지역에 전파되어 있는 언어 군을 일컫는다. 이 인구어는 역사 비교언어학의 연구결과 인구어의 사용지역이 한 층더 확장되어 고대 인도와 서양의 문화권에 속하는 모든 언어가 여기에 속한다 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1. 인구어의 특성인구어는 B.C. 3천년대까지 서로 밀접한 친족관계에 있는 방언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방언들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서로 다른 개별어로 발전했기 때문에 외관상으로는 원래의 친족관계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각 언어간의 차이가 크다. 개별어의 근원이 되는 인구어족의 공통조어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Jones가 1786년에 처음으로 주장했지만 이러한 추정은 그 다음 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역사비교언어학의 정립을 통해서 명백하게 되었다.역사 비교언어학이 발전되면서 인구어 공통조어의 재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그에 따라 인구어가 지닌 여러 가지 특성이 밝혀졌는데 다음은 그 가운데 중요한 것들이다.▶명사와 형용사: 공통조어 시대에 이미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문법적인 성의 구별원칙이 존재했으며 이것이 다시 남성, 여성과 중성으로 구분되었다. 단수와 복수의 구별은 매우 오래되었으나 쌍수의 개념은 후기에 비로소 나타났다. 산스크리트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원시 인구어에는 주격, 호격, 대격, 속격, 여격, 탈격, 처격과 구격등 8개의 격이 있었다. 명사와 형용사는 어미변화를 했으나 초기에 어미변화가 없었던 단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는 풍부하다. 또한 초기에는 격변화 어미가 극히 단순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후기에는 형태론상으로 대단히 복잡한 다수의 격변화 유형이 나타난다.형용사의 어미변화는 원칙상 명사와 동일하며 그 수와 격도 명사와 일치한다. 대부분의 형용사는 생물과 무생물의 두 가지 성으로 구별된다. 이 외에도 가장 오래된 형태를 지닌 일군의 형용사는 성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다.▶동사: 동사체계를 분석한 구어의 분류Jones는 1786년 인도의 캘커타에서 개최된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산스크리트어가 라틴어, 희랍어 및 게르만어와 친족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Bopp는 1816년 어미변화를 토대로 하여 이 언어들이 서로 친족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비교 방법에 의해서 인구어 공통조어의 문법구조를 재구함으로써 역사 비교언어학의 길을 터 놓았다.Bopp가 현대 페르시아어가 독일어와 친족관계가 있음을 밝힌 후 Pott는 인구어를 5애의 어군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도어와 이란어를 두 어군으로, 리투아니아어와 슬라브어, 희랍어와 라틴어, 게르만어를 각각 하나의 어군으로 분류했다. Grimm과 Schleicher의 일련의 논문에 의해서 슬라브어와 리투아니아어가 게르만어와 매우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음이 입증되었다.그 반면에 Muller는 공통조어에서 제일 먼저 분기된 언어는 아리아어와 유럽의 언어들이라고 추정했다. Lottner는 이러한 견해를 한층 더 발전시켰고 인구어의 친족관계를 규명하는데 어휘상의 일치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Schleicher의 견해를 반대하고 수사, 대명사 등 기본어휘의 일치를 대단히 중요시했다.한편 Meillet는 당시 사용되고 있는 언어에만 국한되었던 방언지리학의 공시적 방법을 적용하여 작성된 등어선을 토대로 해서 인구어 방언의 상대적 분포도를 작성했다. Meillet는 등어선을 확정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는데 이것은 Schmidt와 Bradke의 견해와도 일치한다.1. 개별적인 방언에 나타나는 언어현상을 제외하고 인구어 전체에 나타나는 언어현상을 적 용해야 한다.2. 일반적이 아닌 특수한 언어현상이 되어야 한다.3. 언어상의 공통점은 이전에 서로 인접되었던 언어에서 발견되어야 한다.19세기 초반에 인구어족에 속하는 언어는 연달아 발견되었고 그 당시 인구어족에 관한 문제는 거의 완결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1908년 토카리아어를, 1915년 히타이트어를 발견한 후 인구어의 분류에 나 수형계통 모델도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음이 곧 밝혀졌다. 이 모델에서도 어족의 모델에서와 같이 언어를 생물의 유기체로 취급하는데 언어는 동물이나 식물과 같이 자율적인 존재는 아니다. 언어는 유행이나 스포츠 등 인간의 다른 행동방식과 같이 상호간의 약속으로서 언어변화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이지 언어 그 자체에 의한 것은 아니다. 수형계통 모델의 또 다른 큰 단점은 그 바탕을 이루는 언어변화의 본질에 관한 그릇된 견해이다. 만일 영어가 인구어의 원줄기에서 최근에 분기된 곁가지라면, 이미 오래 전에 공통의 원줄기에서 분기된 가지는 영어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어에 많은 불어 어휘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도 나타난다.Schleicher의 수형계통모델은 다음과 같다. 언어가 형태상으로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그만큼 더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다는 가설에 근거를 둔 수형계통 모델은 매우 단순하고 간략히 이해되므로 다른 모델이나 용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이 모델의 모순성은 연속적인 언어단계, 예컨대, 고대 영어, 중세 영어, 현대 영어를 표시하는 용어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고대영어가 현대영어의 직접적인 근원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현대 표준 영어는 런던 방언 즉 중부지방의 언어에서 유래되었고 고대 영어의 문헌은 서색슨어의 방언으로 기록되었으며 현대 표준영어가 Beowulf나 Alfred의 언어형태에서 직접 유래된 것은 아니다. 중세 고지독일어와 신 고지 독일어 등도 이와 비슷한 관계에 있다. 신 고지 독일어가 실제로 중부지방의 독일어 방언인데 반하여 중세고지 독일어는 고지독일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수형계통 모델에서는 이와 같은 언어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 언어변화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는 결함 때문에 수형계통 모델은 이러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모델로 대치되었으며 이 모델은 언어변화를 설명할 수 있으므로 명확히 이론이라는 명칭으로 표시되었다.Schmidt의 파형설은 특정지역에서 다)'에 대한 Avestan과 Latin어 이다. 일반적으로 satem언어는 동방에서 사용되었고 centum 언어는 서방에서 사용되었는데 전자에서는 인구어에서 서로 다른 연구개 /k/와 경구개 /k/가 별개의 음소로 남게 되었고 후자에서는 이 두 /k/가 하나의 음소 /k/로 남거나 /h/로 변하였다. 전자에 속하는 어군은 Indo-Iranian, Balto-Slsvic, Armenian, Albanian이 있고, 후자에 속하는 어군은 Germannic, Celtic, Italic(Latin), Hellenic, Anatolian(Hittite), Tocharian등이 있다(Pyles, T., 1993).4-1. 동방어군(Satem language)1) Indo - Iran어군가장 오래된 어군으로 B. C. 1500년경에 Sanskrit로 쓰여진 문헌이 발견되고 있다. 인도의 성전에는 종교 의식, 교리 해설 등을 담고 있으며 철학 이론이나 명상록도 이 언어로 쓰여졌다.인도 문법학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Panini이다. 그는 기원전 4세기에 산스크리트 문법을 작성했다. 이 어군의 다른 언어로 Prakrits라는 인도의 방언이 있었다. 이들 중 어떤것 - 특히 불교의 종교어인 파알리어 (P?li) -은 문학어로서 높은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 프라아크리트어에서부터 인도의 여러 非드라빗어들이 간접적으로 파생되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벤갈어(Bengali),힌두어(Hindi),우루두어(Urdu),집시어(Gypsy or Romany)등의 언어가 발달했다.이란어는 인도 서북부와 이란 대고원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동과서로 분류되는데 Avestan과 Old Persian이 그것이다. Avestan은 조로아스터 신도들의 경전인 Avesta의 언어이며 역시 두 분파로 분류되었다. Old Persian은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시(Persis)로 알려진 지역의 언어였고 여기서 Middle Persian 과 Modern Persian이 발달했다.2) Balto - Sla달되었다.4) Albanian 어군아드리아해의 동해안에 알바니아어라는 아주 소 집단의 언어가 있다. 이 어군도 이탈리아어, 슬라브어, 터어키어 등에서 많은 어휘들을 차용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4-1서방어군 (Centum language)5) Tocharian 어군19세기말 이 언어가 중앙 아시아에서 몇권의 불교 성전과 사원의 회계록에서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사어이다. 처음에는 이 언어가 이란어의 형태로 생각했으나 그 후 그리스 지리학자 Strabo에게 Tocharoi로 알려진 멸종된 이란인의 이름을 따서 잘못 지어졌다. 후에 토카리아인은 언어적으로 이란인과 아주 다르다는 것이 발견되었다.Tocharia 원주민은 B. C. 500년경 부터 중국 Turkestan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여서 지역방언 Tocharian A 와 Tocharian B 가 발달했다.6) Anatolian 어군인구어의 또 하나의 어군이 소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 히타이트인 (Hittite : 구약성서와 기원전 2000년 이후의 이집트 문서에서 언급된 민족)의 수도를 발굴할 때 왕실 고문서가 나왔다. 그것이 B. Hrozny와 J. Kurylowicz에 의해 설형 문자로 적힌 인구어의 일종임이 입증되었다. 이 어군에는 서로 관련된 Luwian, Palaic, Lydian등이 포함된다. 이 새로운 어군을 그 사용된 지역을 감안하여아나톨리아어(Anatoilan)라고불렀다.이히타이트어(Pahhuri:불)에는 인도-유럽어에서 소실된 인구어의 후두음(h로 음택됨)을 보존하고 있다.7) Hellenic어군과 현대 희랍어고대에는 많은 헬리닉(Hellenic)방언이 있었는데, 미케네어(Mycenaean : 최근에 B. C. 13세기경의 기록물이 발견되어 Sanskrit보다 오래된 언어), 이올리아어(Aeolic), 도리아어(Dorie), 아티카-이오니아어 (Attic-Ionic)가 있다. Greek라고도 불리는 이 어군은 그리스 본토와 에게해의 여러섬과 아시아에서 사용되는 그리스 여러 방언으달했다.
집강소1894년(고종 31)갑오농민전쟁때 농민군이 전주화약(全州和約)을 계기로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해 설치했던 일종의 민정기관 이다.1894년 6월 11일 정부로부터 폐정개혁의 실시를 약속받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농민군은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은 풀지 않고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와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서(原情書)를 보내 폐정개혁의 조속한 실시를 촉구했다. 관군은 농민군이 해산한 며칠 후에 강화병 200명을 남겨두고 대부분 전주에서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전라도 지역은 정부의 무장력이 상실되고 사실상 농민군이 장악한 상태였으나 정부에서는 계속 폐정개혁을 외면하고 있었다. 6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은 스스로 폐정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6월 하순에는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大都所 都所 大義所 行軍義所 등)가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집강소 시기가 시작되었다. 초기의 집강소는 분산적으로 운영되면서 관리 양반 부민의 약탈 등 억울함을 해소하는 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7월 17일경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開南)이 남원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어,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두어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집강소는 억울한 일을 해소하는 형태에서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행정기관의 성격으로 강화되어갔다. 이러한 성격의 집강소는 나주(羅州)를 제외한 전라도의 모든 지역 52개 고을에 설치되었고, 농민군의 의식 이념도 집강소의 경험이 축적되어감에 따라 점차 성장했다.조직집강소가 설치되면서 동학교도가 각 고을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집강소에는 집행기관으로 서기(書記) 성찰(省察) 집사(執事) 동몽(童夢) 등의 직책이 있었는데, 이들은 집강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세징수 등 행정관련 사무를 처리했다. 의결기관으로는 매 읍에 의사원(議事員) 약간을 두고 이를 통해 정책과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 한편 집강소에는 농민군의 무력으로 호위군을정 기관으로, 집강소의 장인 집강을 우두머리로 하여 행정 사무를 나누어 보는 소임을 두었는데, 이로부터 지방관들은 형식적으로 존재하였고, 모든 행정은 동학도의 손에 장악되어 치안 담당과 함께 동학 농민군이 제기한 폐정 개혁 12개조의 안을 내걸고 개혁을 추진하였다.집강소를 설치함에 있어서, 처음에는 이부 지방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나주와 남원, 그리고 운봉 등 3읍이 그에 해당하였으나, 전봉준이 이를 설득 또는 공격하여 결국 모든 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되었으며, 전봉준은 금구에서 전라 우도를 호령하고, 김개남은 남원에서 전라 좌도를 호령하여 동학 농민군의 혁명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동학의 교세는 날로 높아져 지방 관아의 아전들마저 동학에 입문하지 않고서는 그 자리를 보전하기가 힘들었으며, 동학의 세력은 경기, 황해, 평안도까지 확대되어 갔다.삼례 2차 봉기태인에서 서울로 서울로부터 내려온 밀서(密書) 로 사정을 알게된 그는 다시 일어나 9월 하순께 삼례로 집결하니 9월 봉기이다. 9월봉기에는 황해도 이남이 호응 하였으며 삼례에 집합한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1만여명에 달했다. 논산에서 충청도의 세력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해 가다가 충청간영이 있는 공주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10월 23일 이인(利仁)싸움으로부터 시작하여 11월9일 최후의 공주 우금치 싸움에서 패하고 후퇴하여 남하했다. 이때 선생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하러 하였으나 11월 16일 황화대싸움에서 패한후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그리고 11월 24일 금구싸움, 다음 25일 원평싸움과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동학 농민군은 해산하고 말았다.전봉준의 혁명의 목적전봉준은 1855년 고부(전라북도 정읍)에서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작아 녹두라고 불렸는데 훗날 '녹두 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봉준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던 고부 군사에게 항의를 하다가 매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자 전봉준은 나라를 개혁이 무렵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점점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자 전봉준은 1894년 8월에 다시 동학 혁명을 일으켰다. 전봉준은 남도 접주가 되어 12만 병력을 이끌고, 북도 접주 손병희의 10만 명과 함께 교주최시형의 총지휘아래 일본군에 맞섰다. 항쟁의 규모는 점점 커져 중부, 남부 전지역과 평안도까지 이르렀다.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동학군은 공주와 금구 등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순창으로 피신한 전봉준은 그 곳에서 옛 부하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끌려와 1895년 동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참고사항동학농민 운동이란?.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1894년 호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가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反封建 反侵略 투쟁. 농민전팽의 경과는 크게 古阜民亂, 제 1차 봉기, 執綱所시기, 제 2차 봉기의 4단계로 나누어진다. 고부민란은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군수 趙秉甲의 貪虐에 항의하는 민란이었는데, 사실 이 민란은 그 이전의 단순한 민란과는 달리, 농민혁명을 꿈꾸어 오던 全奉準과 그의 동지들에 의하여 농민전쟁의 序章으로서 준비되어 계회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그러나 민란 발생 이후 고부의 농민들은 전봉준등 지도자들의 농민전쟁에로의 확대계획에 반대하여 일단 해산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茂長의 동학접주 孫和中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여 전라도 일대의 동학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하니, 이것이 제 1차 봉기이다. 3월 21일 고부 백산에 모인 동학 농민군들은 輔國安民외 기치를 높이 걸고, 자신들의 투쟁목표가 민씨 정권 타도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농민군은 4월에 들어서 黃土峴 전투와 長城 전투에서 관군에 승리한 뒤 28일 全州城에 입성하였다. 이에 買辦的 민씨 정권은 당황하여 淸에 출병을 요청했고, 5월 5일 청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은 日本軍이 한반도 석권을 꿈꾸고 인천에 상륙하였다.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 등 농민군 진영은 관군과 和約을 맺고 전주성을 나와 일단 해산하였다(5월 7일). 그러나 농상의 사항들을 모두 실천하였으며, 흔히 논의되는 것처럼 신분제의 폐지는 개화파 정권에 의해 법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농민군 스스로 투쟁에 의하여 쟁취한 것이 었다.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민씨정권을 붕괴시키고 농민군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권을 성립시키거나 아니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듯하다. 또 대외적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외래 침략 세력에 대하여 맹렬히 저항하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군대를 파견했었는데, 농민군은 그 같은 일본의 침략야욕에 강력한 반발을 보인 것이다.이상 농민군이 농민전쟁을 통하여 드러내 보인 지향성은 '반봉건 반침략'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반봉건, 근대화'의 지향은 직접 생산자계급이 주체가 되어 '쁘띠 부르조아'가 되고자 하는 내용성을 가진 것이었다. 또 '반침략'은 당시의 세계사가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고, 일본은 그 제국주의 세력의 尖兵으로서 조선에 침입해 온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反帝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1) 교조 신원 운동(1) 삼례 집회(1892)-교조 신원, 교도 탄압 금지(2) 복합상소(1893)-박광호(3) 보은 집회(1893)교조 신원2) 동학 농민 운동(1894)(1) 제 1 기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② 전봉준의 농민군 관청 점령(2) 제 2 기-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① 정부 안핵사 파견 조사, 농민군 탄압② 농민군 봉기-전봉준 김개남 손화중③ 전주 점령④ 청 일 양군 출동(3) 제 3 기① 전주 화약(全州和約)-폐정개혁안 12조 제시, 집강소 설치② 일본의 침략적 행동 강화 청 일 전쟁♧참고상황남북접 갈등과 전투력 손상: 해월-전봉준 관계와 루터-뮌쳐관계의 비교필자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전투과정에서 남북접갈등의 본질을 집어보고, 동학농민혁명의 경우와 독일 농민전쟁의 경우를 비교해봄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의 특징을 다시한 번 확인해보려고 한다. 이현희교수의 논문 "동학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양 혁반일사상의 핵심세력인 동학의 진멸이 가장 중요하고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파병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파병은 조선왕조 척신들의 청나라 병사 파병요청과는 달리 이뤄진 것을 기억함이 중요하다. 전주화약(1894.6월14일) 이후, 조선정부는 청군과 일본군의 철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계속주둔과 추가 군사 정예부대 파병은 양국간 외교통로를 경유하여 충분히 논의된 일이나,조선왕권의 보호책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온전히 일본국 그들의 국익을 위해 남의 나라에 군대를 파병하여, '주권재민의 현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민중들의 의지를 잘라버린 무뢰배 같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일본인 보호명분으로 경성에 주둔시켜온 일본군 경성후비보병 제18대만이 아니라, 이노우에(井上馨)공사와 병참감 이토오(伊藤裕義) 요청으로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은 야마구치현 히코시마 정예 수비대제19대대를 동학농민군 살육목적이라는 특수임무를 부여하여 조선에 급파했던 것이다.이미 정부로서의 존립 의미와 능력을 상실한 정부군이 동학농민혁명군의 서울집입 군사행동에 대처하기전, 그리고 청국와 특히 일본군의 동학군진압 목적의 군대파병이 이뤄지기전, 동학농민혁명군이 속전속결로서 군사행동을 결행했더라면 혁명의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전라도 53군현의 동학농민군의 재기(1894년 9월)와 관병 및 일본군병의 대대적 반격(10월) 사이에는 전투상황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30일간의 시간낭비가 있었는데, 동학농민군의 서울진격의 발목을 잡았던 결정적 변수가 남북접 지도부간의 갈등내지 상황판단 시각차이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비록 남북접 지도부의 각각의 견해차이가 모두 양측에 일리가 있었고, 또 결과적으로 남북지도부의 화해와 대승적 단결로 남북접이 통일된 동학농민혁명군의 지휘부가 구성됐지만, 혁명적 전투상황에서 1개월간의 시간낭비는 관병과 일본군에게 전세를 역전시킬수 있는 충분한 병력동원배치, 신무기조달, 동학농민군의 전술과 전세파악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고 말았던 것이다. 신복룡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