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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카니스탄의 문화
    ⅰ. Arranging Business Meeting<br />Do not make business meeting on Friday<br />It is not too much to say, all the rules and cultural habits in Afghanistan come from Islamic base. The muslim place of worship is the mosque. Men congregate in the mosque particularly on Friday, the muslim holyday.
    생활/환경| 2006.09.16| 11페이지| 1,000원| 조회(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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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과 프랑스의 민영화 비교 평가A좋아요
    Ⅰ.서론공공 정책이 바람직한 사회 상태를 이루기 위해 정부 기관 주체가 되어, 공식적으로 결정한 정책 목표와 그에 필요한 정책 수단)임을 명심할 때 앞으로 다루어지게 될 민영화 또한 공공 정책의 하위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민영화는 민영화 정책 이전에 실시되었던 국유화가 경직성과 비효율성으로 인해 효율성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바람직하게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공공 정책 일련의 목표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공공정책 실행하는 주체가 정부(공공기관)인 만큼 민영화 또한 그것을 실시하는 정부에 따라 주체적이고 다양하며 독특한 실행 방향을 갖게 된다. 즉, 각 정부는 자신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국가적 특성, 혹은 정치적 의도에 따라 민영화를 실시하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민영화가 국가 이익 극대화라는 공공정책의 대의를 수행함에 있어 추진 정부의 이념성향과 정책 방향이 꼭 들어맞지 않을 때추진 정부의 이념 성향이 무시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민영화는 기업을 통해 국가가 경제?정치 문제를 해결하고 그와 더불어 정부가 중재자로 나서 노사간의 문제를 조정한다는 면에서 노사정의 공고화를 이루고 타협하는 노사문화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국유화 당시 고수준의 노동자 권리의 감소가 불가피 하게 요구되고 따라서 민영화로 인해 소위 하위 노동자 계층에서는 생계가 더욱 어려워지고 나아가 가족 해체현상을 일으키기도하며 비정규직의 증가로 인해 노동시장이 안정성을 상실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는 경우도 있다. 즉, 민영화는 공공정책의 수혜자와 비수혜자간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실례로 영국인들은 ‘병을 얻어 국립병원을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기다리는게 빠르다’고 푸념하고 있다. 이는 진료 진행속도가 빠른 사립병원에 가는 가진 자와 7개월을 기다려야만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국립병원에 가는 서민들, 즉, 민영화의 수혜자와 비수혜자의 격차를 알려주는 단적인 것이다.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본론에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각 국의 특성에 성, 자율, 자제를 원칙으로 하는 믿음을 통해 자본주의 성립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또한 서양에서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보수당을 성립했고 이것만 봐서도 기독교 전통적 경제는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을 중요시 하였다. )세번째로 대처는 “키스가 없었더라면 나는 야당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수상이 되어서 해낸 일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조셉은 나의 가장 절친한 정치적 친구였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대처 주변 인물의 성향이 대처에게 민영화에 관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그녀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로는 ‘섀도 내각의 사고의 장관’)이라고 불린 키스 조셉으로서 그는 당시 대다수의 평판의 반향에도 케인주주의젹 개입 경제 정치의 실패를 예상하고 자유방임 주의적 경제 정책의 중요성을 연설했으며 이의 연설 내용으로 보면 키스 조셉은 자유 시장경제 체제의 민영화를 신봉했음을 알 수 있다.키스 조셉 외에도 가장 근본적으로 대처에 있어 민영화를 실시하고자 생각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관료 그들 자체였다.) 즉, 관료들의 패배주의적 심정을 대처가 민영화를 실시함에 있어 침묵의 동의로 받아들이는 결과가 됐고 정책실행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마지막으로 대처 자신 역시 보수적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었고 기회의 평등을 중시하는 우파주의적 입장에서는 민영화가 필연적인 정책안이었을 것이다. 또한 대처의 민영화 정책은 히스와 마찬가지로 실패한 노동당의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이 정국을 잡으려는 하나의 전략 중 하나였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대처정부 시대 상황을 무시 할 수 없는데 이는 민영화 실시 주체보다 실시 연유에 더 가까우므로 후술 하겠다. )이렇듯 영국에 민영화는 대처 자신과 그리고 그에 영향을 주었던 키스 조셉, 경제문제연구소(IEA), 지난 정부에 지쳐버린 각료 기대, 부모님, 종교 등에 의해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2)왜 민영화를 실시했는가?- 민영화 실시 배경사실 19세기까지 영국은 Adam Smith의 자유방임주의 사상으로 공기그 예는 국영화물운송조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외에도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직접매각과 주식 공모이며, 주식공모의 경우에는 고정가격매각과 입찰방식,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혼합한 방법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네 번째로 특별주(Golden Share)를 도입하였다.영국은 민영화된 기업을 바람직하지 않은 기업인수로부터 보호할 필요성에 대해 특별주를 마련하였다. 특별주란 정부만이 보유할 수 있는 액면가 1파운드의 하나의 주식을 의미하는데 ‘특정인이나 집단이 주식의 15%이상 소유함을 금지’하는 정관이 내용을 지정해 놓음으로써 정부가 원하는 경우에 대해 민영화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게 대책을 마련해 놓았다.다섯 번째로 새로운 규제기구 및 규제방식을 마련해 놓았다.이런 정책 방향을 재규제라고도 부르는데, 공익사업처럼 기존 공기업의 시장지배력이 매우 강하여 민영화 이후에도 쉽게 약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경우에는 독점분야에서 민영화된 지배적 사업장에 대한 규제가 필요한데 정부가 규제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규제기관으로서 Office of Telecommunications(통신분야), Office of Gas Supply(가스분야), Office of Water Supply(수도분야), Office if Electricity Regulation(전력분야)등이 있다. 또한 공기업 민영화 이후 독과점 폐해 방지를 위해 독점위원회(Monopolies & Merger Commision) 및 공정거래실(Office of Rair Trading) 등을 설립했다. 이러한 규제기구의 특징은 경쟁이 아직 존재지 않는 곳에 규제를 통해 경쟁요소를 도입하려는 분명한 목표를 갖는다는 것이다.?민영화 실시 초기1979년 대처(Thatcher) 정권이 들어선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5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케인지언니즘이 영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한계를 드러낸, 바로 그 위기의 정점에 있었다.대처 정부는 통화정책과 그 일환인 민영화를 조심스럽게 계획?실시했는데 정책이 실시될 때도 당시 정부 수반은 우파의 드골(De Gaulle)이었으나, 좌우 연립정부로서 당시 경제?사회 분야에 실시된 정책을 보면 좌파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많은 정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1986년의 제1차 민영화, 1993년의 제2차 민영화는 우파 정부의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프랑스 공기업의 민영화 실시의 주요 요인의 하나로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요인은 최근 들어 그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다. 왜냐하면 민영화 정책은 1997년 6월 총선에서의 승리를 통해 출범한 좌파 정부에 의해서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좌파=국영화, 우파=민영화 등식이 더 이상 성립되지 않게 되었다.따라서 전술한 바와 같이 민영화 배경요인으로서 기존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아닌 다른 요인, 즉 경제적?재정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실 1986년 당시만 하더라도 이러한 측면은 민영화 배경의 주요 요인으로 등장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제 불황으로 인한 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으로 1993년에 민영화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다.여기에 유럽 통합의 움직임은 재정적?경제적 면에서 민영화 정책을 시행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1991년 마스트리치 조약의 협정과 함께 유럽경제?통화연합(EMU)은 유럽 제국에 대해서 회원국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준수해야 될 몇 가지 경제지표를 제시한다. 이 중에서 프랑스 입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GDP 대비 정부 재정적자 비율이다. 1993년 당시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318조 프랑으로 GDP의 4.43%를 기록하고 있었다. 반면 이 부문에 있어서 유럽경제?통합연합의 제시기준은 3%로서, 이러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민영화 정책이 적극적으로 고려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93년 이후의 민영화 정책 실시의 배경으로서 기존의 좌?우파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배경보다는 경제적?재정적식을 기관투자가에 매각함으로써 단기이익을 챙겨 대중자본주의를 표방한 원래의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생기기도 하였다. 새로운 주주그룹의 형성은 기업지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대중자본주의 이념 또한 단기적인 이윤추구행위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민영화이후 재산권문제는 소유구조를 분산시켰다기 보다는 경제력을 집중시켰다고 비판되고 있다.또한 민영화는 수혜자와 비수혜자간의 격차를 심화시켰다. 경쟁의 도입과 횡적 보조의 금지는 각 서비스의 가격재조정(price rebalanc- ing)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고소득의 가정에 큰 혜택이 돌아간 반면, 연금생활자들이나 저소득자들처럼 기존의 횡적 보조의 혜택을 간접적으로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불리해졌다. 영국의 경우, 사전지불제 미터기를 이용한 저소득자들은 연료가 가장 많이 필요한 겨울에 사전 지불한 요금이 다 소진되어 전력이나 가스가 끊기는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소비자단체에서 거센 항의를 해 왔다. 민영화와 시장개방 그리고 경쟁으로 인해 영국의 통신?전력?가스 산업은 그야말로 재탄생의 고통과 기회를 맞이하였고, 아직도 그러한 탈바꿈의 와중에 있다.다음으로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고용안정이 사라졌다. 영국은 민영화 이후 1997년까지 대략 265,000여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프랑스는 90만 명의 실업자가 생겼다. 이는 공기업 시절 종신고용과 고용안정이 보장되던 노동자들에게는 충격적이고 사기와 의욕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변화였다. 앞으로도 감원은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계속될 것이라 한다.한편, 보수당은 민영화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 주식의 보유가 확산되면서 득표활동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평가된다. 주식가격의 과소평가는 이득을 얻는 자에게 높이 평가되기에 민영화를 추진하려는 정당은 민영화 당시의 주가를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는 민영화계획이 미미하였기에 그 정치적 파급효과도 제한적이었다고 평가된다.유럽의 몇몇 정부는 민영화된 기업의 주식의 상당부분을 보유하여,통신)
    사회과학| 2006.09.16| 21페이지| 1,000원| 조회(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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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카니스탄 문화
    Ⅰ. Facts and FiguresOfficial name: Islam state of Afghanistan Capital: city Kabul Religion: Islam(99%)- Sunni Muslim (84%) Shi`a Muslim (12%) Sikhism, Hinduism(1%) Export Commodities: fruits and nuts, hand woven carpets, wool, cotton, hides and pelts, precious and semi-precious gems.Import Commodities: capital goods, food and petroleum products, most consumer goods.Industry: small-scale production of textiles. soap. furniture, shoes, fertilizer and cement, hand -woven carpet, natural gas, oil. coal and copperagriculture: opium poppies, wheat, fruits, nuts, karakul pelts, wool, muttonweekend: from Thursday afternoonMuslim holyday: FridayNew years day: 21st March Independence day: 19th AugustRestriction: Forbidden items include alcohol, narcotics, pork and pornographyⅡ. Business Tipⅰ. Arranging Business MeetingDo not make business meeting on FridayIt is not too much to say, all the rules and cultural habits in Afghanistan come from Islamic base. The muslim place of worship is the mosque. Men congregate in the mosque particularly on Friday, the muslim holyday. Furthermore, they have half day work on Thursday. so please do not make appointment on Friday or even Thursday afternoon. In the same aspect, prayer has taken the most important part in their life. If you made business appointment during their muslim holyday, they would consider as you ignoring their religion and invading someone`s holy life which cause our business into failure..
    생활/환경| 2006.09.16| 3페이지| 1,000원| 조회(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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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의 역사]군국주의페미니즘과 여성의 친일
    군국주의 페미니즘과 여성의 친일 -기독교 여성의 순응과 저항-사회과학부 02 김은희 02 박진이목차-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과 기독교 여성의 대응 - 1.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과 한국 교회의 대응 2. 황국신민화정책에 대한 기독교 여성들의 의식분화 (1) 황국신민화정책에 저항한 기독교 여성들의 대응논리 (2) 황국신민화정책에 순응한 기독교 여성들의 대응논리 3. 황국신민정책에 대해 저항 ․ 순응한 여성들의 비교 - 김활란을 통해본 근대 페미니스트적 행태와 반민족적 페미니스트적 행태 - 1. 김활란의 생애 2. 근대적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의 김활란 3. 반민족적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본 김활란의 행적들어가며1930년대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 저항과 순응의 여성으로 이분화, 각 분야의 평가 또한 이분화. 위와 같은 현상적인 분석에서 나아가 이들이 어떤 신념과 논리로 저항 혹은 순응의 길로 나아갔는가에 대해 살펴보고, 김활란을 예로 하여 보다 종합적으로 평가해 보고자 한다.일제의 황국신민화와 기독교일본의 황국신민화란, :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한민족을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일본은 이를 통해 한국을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병참기지화하였다. 천황제의 근간 : 1. 제국주의적 침략을 가능하게 한 군부 2. 신도라는 고대 종교적 이데올로기 3. 재벌로 대표되는 근대 자본주의 이와 같이 천황제를 뒷받침하는 국가신도가 하나의 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리와 대립 혹은 부정하는 어떠한 사상 체계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황국신민화와 기독교일본의 한국 기독교 박해 이유 첫째,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유일신을 숭상하는 기 독교와 조화, 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둘째, 기독교가 민족독립운동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기독교가 선교사들을 매개로 영 ․ 미 등 서구 제국과 연결되어 세계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한국 기독교의 대응교육계 기독교계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항의하다 더욱 강경일변도로 제압해오는 일제에 패망하고 하나 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이라는 신념. 기독교는 민족의식과 여성으로서의 자각 의식을 갖게 해주었으며, 당시 여성들이 택했던 길은 기독교 사상에 입각한 삶이었다. 그러므로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은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받아들 수 없는 폭력이었으며, 기독교는 그들의 삶에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절대가치였다.황민화정책에 순응한 여성들(2) 황국신민화정책에 순응한 기독교 여성들(김활란, 박인 덕, 모윤숙 등)의 대응논리 ① 황국신민화정책에 대한 순응 논리 ㄱ. 가정보국운동 - 구습을 타파하고 근로보국정신을 함양하여 의식주를 개선하는 운동으로 살림살이 긴축을 통한 보국운동이었다. 즉, 가정보국운동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절약하여 전쟁물자를 만들어 일본의 승리를 만들어 내자는 것이었다. ㄴ. 군국의 모성찬양 논리 - 여성들의 교육이란 식민지 체제를 지탱하는 군국의 어머니가 되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자식을 천황의 신민으로 바치는 것이 훌륭한 어머니라는 논리이다.황민화정책에 순응한 여성들의 특징과 주장1. 대표적 인물들 : 김활란, 고황경, 박인덕, 유각경 등 2. 특징 : 기독교 사립학교에서 중책을 맡음. 여성교육의 선구자적인 역할. 대다수 미국 유학 출신으로 식민지 체제하 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 받을 수 있는 제도 권내의 여성들이었음. 3. 주장 : 현실타협론 - 근대 여성교육을 위해 친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 4. 한계 : 대다수 소외 받는 여성이 아닌, 제도권속에 쉽게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여성들을 위한 교육 이었음.황민화정책에 순응, 저항한 여성 비교서구 모델화, 제한된 여성 혜택교육을 통 한 여성의 지위 향상 (선교육 후독립)현실타협론제도권 내의 여성순응한 여성들여성해방, 기독교 국가건설재림사상, 유일신사상제도권 밖의 소외여성저항한 여성들한계목적저항논리여성들의 특징김활란을 통해본 근대 페미니스적 행태와 반민족적 페미니트적 행태김활란의 생애 1899년 2월 27일 출생 1970년 2월 10일 사망 여성 교육 운동가였으며 자(字)는 기득파리에서 열린 UN총회 참석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재단이사장에 선임되어 YWCA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 ․1950년 대한공보처장 임영,1.김활란(金活蘭)의 생애-31951년 5월 웨슬리안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 취득했으며, 그 해 재단법인 흥한 이사, 문교재단연합회 이사,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집행위원에 선사, 교수자자격심사위원, 대한교육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 1956년부터 1959년까지 UN총회의 한국 대표로 파견 1959년 대한 적십자사 부총재로 임명- 일본 거주 교포의 북송을 반대하기 위해 제네바 국제적십자사 본부 방문 1963년 8월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상을 수상, 같은 달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10월에는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다락방상을 수여, ․1964년 5월 미국 웨스턴하우스의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편찬을 위한 교육부 위원으로, 세계적 편찬위원 33인 중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선임.2.김활란의 사상적 뿌리부르주아민족주의 고등교육은 부르주아민족주의 활동을 가능하게 만듦 당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 넉넉한 집안의 딸이었거나 아니면 공부를 아주 잘하는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실제로 당시 부르주아민족주의 활동을 하였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독교계 학교에 있었거나 기독교인이었다.) * 김활란의 경우는, 두 번째, 즉, 공부를 아주 잘하는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김활란이 기독교적 부르주아민족주의 사상을 갖게 된 배경 ㄱ: 기독교의 사상적 경향-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고 부르주아민족주의적인 입장임. ㄴ.사상적파에 용이한 학생수- 당시 학생수는 지금과 달리 매우 적은 수였기 때문에 기독계 학교이념이 각 개인에게 쉽게 흡수 될 수 있었음. 기독교적 평등사상은 사회주의적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주장했고 이런 의미에서 여성에 있어서도 남성들과 같이 기회의 평등의 주어져야 하고 그를 위해 여성의 교육과 권위신장이 필요하다는 것은 김활란의 여성교육운동에 사상적 배경이 되었음.2.근대적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요구사항 -부인 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급 -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간작업 폐지 노동자․동민 의료기관 및 탁아소 제정 확립 무조건적인 여성의 지위향상을 외친 것이 아니라 그 지위향상이 이루어지기 위한 선행 실안을 제시2.근대적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본 김활란-33.농촌계몽운동 당시 전반적인 농촌운동에 대한 생각 :민족주의계 여성들은 여성운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여김 왜 하필이면 농촌인가?? :기독교, 천도교의 기반이었던 농촌에 사회주의가 침투하자 크게 위협을 느껴 이들은 종교단체가 매개가 되어 농민들을 조직하고 그들의 이익과 관련된 활동을 통해 농민들을 자기 세력 내에 두려는 의도도 한가지 이유!! 김활란의 활동내역 미국에서 유학하고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을 같이한 박인덕 등과 더불어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를 만들어 농민여성의 생활개선교육에 직접 참여 브 나로드운동이라 불리는 문맹퇴치운동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참가하는 등 활동영역을 확장2.근대적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본 김활란-44. 8․15해방 이 후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여성운동 '독립촉성애국부인회' = 한국애국부인회+독립촉성중앙부인단 활동내역:해방공간이란 점을 이용하여 문맹 퇴치, 여성의 교육기회 확대와 여성 참정권 획득을 주장하고 이와 관련된 활동 '물산장려회'조직= 국산품장려운동, 반탁운동, 반공운동 *여성단체가 비단 여성의 권위 신장만을 주장하는 사적위치를 벗어나 나아가 정치권에 까지 제 목소리를 내는 공적 공간으로 발돋움 김활란은 초대 국회의원에 출마3. 반민족적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본 김활란ㄱ:당시 시대 배경 일본은 193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사안: 민족말살정책․황민화정책 내선일체 신사참배, 궁성요배.'황국신민의 서사'낭독 등 강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창시개명 강요,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명의 처녀들로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 처녀단을 조직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가 일본 YWCA에 가맹하였는데 바로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음. →이 사건은 일본 자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강대국까지 전쟁이 번져나가자 사상계까지 지배하여 식민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일본 기독교 단체의 통제 하에 두려는 것으로 해석 1939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착용 주장 →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동아일보와 학생·학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상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교복을 입게 하였다. 이것이 학교에서 한복이 사라지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3. 반민족적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본 김활란-3ㄹ.야마기카쓰란이 되어 학병․징병을 권유, 기득권을 누림 부인궐기 촉구 강연, 결전 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 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허둥지둥 감동에만 빠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지만 어쩔지를 모르 고 눈을 휘동그렇게 뜨고 갈래를 못 찾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만 일의 경우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유골을 조용히 눈물 안 내고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가져야 한다. … 즉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2. 반민족적 페미니스트적 입장에서 본 김활란-4뒷일은 우리가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제시된 연설문 외에도 1939년 6월 동양지광에 게재된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w}
    사회과학| 2005.05.29| 25페이지| 1,000원| 조회(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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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외교 동북아시아] 떠오르는 붉은 용 중국
    一. 서론“21세기 새롭게 부상하는 붉은 용”우리는 흔히 중국을 가르쳐 이런 수식어를 붙이곤다. 아시아에서 용은 이상세계와 인간세계를 맺어주는 신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고, 또한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볼수 없는 돋보적인 존재로서의 이미지를 가진 신비의 동물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는 것일까? 그 이유는 세계 무대에 있어 동아시아의 등장에서부터 찾아 볼수 있을 것이다. 냉전의 해체와 함께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국제사회의 중심에는 일본, 한국이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자리 자잡기 시작 했으며, 이를 계기으로 동아시아는 국제 사회의 눈길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더불어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표명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앞세워 중국은 동아시아의 핵심국으로 급부상 했다. 12억 8454명의 엄청난 인구, 한반도 면적의 약 43배의 영토를 가진 중국의 경제적 성장은 국제 사회에서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의 중국의 결정을 확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알아볼수 있는 단적인 예로는 21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의 고이즈미 총리 신사참배 중지 요구 발언이다. 중국의 GDP기준 경제지표가 세계 5위라는 사실은 남북한을 포함하여 일본 및 러시아 그리고 중요하게는 미국등 동아시아 국제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행위자들간의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은 지금 황맥시장이라고 불리오고 있으며 세계가 떠오르는 중국을 가만히 둘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계 골드만삭스사는 앞으로 중국이 2040년에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는 사실은 이같은 의견을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따라서 본문에서는 知彼知己라고 우선 중국의 경제지표와 시장을 알아보고 이들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을 고찰해 보겠다. 또한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영향을 끼친 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보다 자세함과 간결성을 높이기 위해 동아시아 각각의 나라를 중심으로 살펴 보겠다. 중국의 경제 발전이 남?북한6.1%가 감소한 걸로 보이지만 여전히 흑자행진을 계속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2)중국의 시장우선 중국의 자동차 시장 보자면, 2002년 300만대가 넘는 자동차가 중국에서 팔렸다. 이 중 승용차는 2001년 대비 60% 이상 늘어나 모두 110만대나 팔렸다. 고급 외제차 수입도 12만대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속도의 절반 정도로도 중국은 앞으로 3년 안에 세계 3대 자동차 시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다음으로 중국의 이동통신 시장을 보자. 중국의 이동통신 가입자는 이미 2억명을 넘어서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이에 따라 2002년 한해동안만 모두 1억개에 이르는 휴대전화기가 중국에서 팔려 나갔다. 한국의 삼성을 비롯해 외국의 휴대전화기 브랜드들이 중국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이동통신 가입자가 현재의 증가율을 유지할 때 오는 2005년에는 3억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심지어 프로젝션TV는 폭발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지 못해 품귀현상까지 빚고 있다.중국은 31개의 성(22개)과 직할시(4개), 소수민족 자치주(5) 그리고 특별행정구(2)가 있다. 다시 말해 31개의 나라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상하이 직할시와 귀주성의 소득격차는 12배까지 난다.3)중국의 군비 증강중국이 국방 예산을 증액하고, 군현대화를 추진함으로써 군사대국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특히 최근 중국의 군사력은 세계적인 추세와는 반대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4)중국 정부와 중국사회에서 중화민족주의적인 경향이 강화 되고 있는 현상2.중국 성장의 요인1) 정부정책의 측면에서 경제의 점진적인 시장화 자유화와 제조업 중심의 연해개발전략과 단계적 대외개방을 추구한 중국식 개혁 개방 정책의 성공에 연유하였다.2) 공급 측면에서 노동과 자본의 투입이 빠르게 증대됨으로서 성장이 촉진되었다.- 12억에 달하는 인구와 농촌의 충분한 잉여노동력으로 인해 노동력 투입의 증대가 용이했고, 높은 저축률(현재 GDP의 인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남중국해문제와 한반도 물제가 아태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잠재적 위협요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중국은 이들 문제들이 국제분쟁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다른 한편, 중국은 이들 국제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매우 빠른 경제 성장을 기록하는 등 여타 지역에 비해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으며, 세계 무역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에 보여주었던 중국의 태도는 향후 동아시아에서의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며, 앞으로도 동아시아의 중국경제 의존도는 더욱 심화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 또한 동아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한반도에서 발생할 지도 모르는 잠재적 안보위협을 최소한에서 관히하려는 것이 중국의 한반도 정책의 기조라고 할 수 있다.동아시아 실질 GDP 성장률에서 점하는 중국의 기여도 추이(%)80년대90년대9596979899동아시아 성장률7.926.718.567.055.67-2.286.88각국·지역별 기여도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1.761.170.600.280.530.260.660.121.430.560.260.290.400.260.450.101.970.770.260.320.670.370.750.161.490.280.280.280.420.340.720.201.110.250.320.30-0.090.300.430.17-1.28-1.15-0.310.06-0.66-0.31-1.21-0.022.260.970.180.220.270.220.020.11중국2.532.973.283.042.872.602.62(자료) 세계은행「WDI」, 臺灣經濟建設委員會, 「Taiwan Statistical Data Book」에 의해 작성*참고자료2)중국의 경제발전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강력한 중국(strong China)은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국 경제 활성화는 장기적으로 세계 경제에도 긍정적 역할을 하고 우리의 입장에서 위협적 요소보다는 기회의 측면이 더 많다”고 하였다. 필자 또한 이들과 맥을 같이 한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것이 또한 경제지표가 높아지면서 중국이 동아시아 3국 중 하나인 우리나라와의 국제관계에 영향을 증명해 준다고 생각한다.첫째, 동북아에서 미국 단일 패권에서 경제?강대국 중국은 동북아 세력 재편을 새로이 할 수 있다. 이유는 상당기간 중국은 중국 자체의 더 높은 수준의 경제 사회 발전을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 안정과 협력을 강조할 것이고, 한국의 경험과 기술, 자본의 효용성을 인정하고 활용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려고 할 것이고, 한국의 입장에서도 중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 안보상에서 미국이나 일본의 역할을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미국이나 일본의 패권적 행위를 견제할 수 있고, 또한 이들 강대국간의 세력균형을 통해 한국은 상대적 자율성과 상호협력을 확보해 낼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둘째,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대북정책에 관해 효과가 좋아질 수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휴전국, 북한이라는 변수를 항상 지니고 있다. 궁극적 통일을 목표로 대북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야 하지만 북한이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은 강한 중국이 관계를 원활이 해 줄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국의 패권이 지속되고, 미국의 강경한 대북 정책이 지속된다면 남북관계의실마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을 수 있다. 중국이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수준에 있고 북한이 이를 잘 이용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중국의 영향력이 가히 지대하다고 말하겠다.마지막으로 경제 성장으로 이룩된 중국은 우리와 경제적 교류의 증가를 꾀할 수 있게 된다. 중국에 있어서 앞으로의 성장에 한국의 필요성이 존재하지만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의 어려움을 겪었던 한국에게 중국은 제 3대 교역국으로서 국제관계증진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다.앞에서 중국의 경제성장이 한국 국제 관한편 일본의 대 중국 투자도 92년부터 급증, 외국의 대중 직접투자 총액의 11%에 달했다. 중국이 받아드리는 정부개발원조(ODA)에서도 일본이 제1위 제공국 자리를 차지했고, 92년에도 다국간원조를 포함 총액 29%, 전체 2국간 원조의 46%를 차지하면서 꾸준히 증가되었다.이렇듯 양국의 상호의존적 경제관계의 심화가 또 다른 면에서는 개별적인 경제이익의 충돌의 소지를 만들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간의 무역에서 계속적으로 일본이 수입초과를 이루면서 심한 무역 역조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이유이다. 일본의 상대국 적자로는 중국은 근래 계속하여 1위를 차지, 2위의 아랍 연방의 2배에 달하고 있다.이러한 양국관계의 새로운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90년대 후반 들어 두 나라 사이에는 서로간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시도가 양국 정상회담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1998년 11월 25일부터 30일에 걸쳐 이루어진 江澤民 중국국가주석의 일본방문에서 양국은 ‘평화와 발전을 위한 우호협력 파트너쉽 구축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함으로써 기존의 양국관계를 진일보시키게 했다. 공동선언에서는 평화와 발전을 위해 우호협력 파트너쉽 확립을 선언'했다.그 동안 중일 양국은 ‘선린우호’의 축적을 이어오면서, 두 나라만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 전체에 공헌할 수 있는 새로운 협력체제의 구축을 겨냥해 왔다. 그러나 그 동안의 양국관계는 이른바 ‘선린우호’를 내용으로 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대국외교의 관점에서부터 ‘파트너쉽’ 확립에 의견이 일치를 본 것이다.98년 양국 정상회담에서 이뤄진 ‘파트너쉽’관계는 1999년7월초에 있었던 小?惠三 일본수상의 중국방문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면서 양국관계의 전향적 발전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일본이 중국의 WTO가입을 지지했고, 중국에 대한 경협 확대를 약속한 한편 일본의 무장화에 대한 의구에 대해서는 ‘專守防衛의 견지, 非核三原則의 준수, 군사대국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기본 방침은 금후도 변하지 않을 것’
    사회과학| 2005.04.02| 11페이지| 1,000원| 조회(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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