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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기화학실험] 고체추출-결과보고서 평가D별로예요
    1. 실험장치 및 시약Soxhlet 추출기, 알코올 램프 또는 가열 맨틀, 원통여과지, 콩, 벤젠{2. 실험방법{(1) Soxhlet 추출장치를 조립한다. 이 때 반드시 벤젠의 하부쪽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의한다.※ Soxhlet extractor용매 플라스크 위에 추출관, 그 위에 환류냉각기가 연결된 장치이 다. 추출관 속의 원통형 여과지 또는 여과관에 시료(試料)를 넣고 플라스크 속에 있는 용매를 가열하면, 용매의 증기는 화살표처럼 왼쪽 관을 지나 환류냉각기에서 응축되어 추출관에 괴어 시료 속 의 가용(可溶) 성분을 녹이고, 괸 액체는 오른쪽 사이펀에 의하여 그 꼭지점에 이르면 전부 용매 플라스크로 돌아오고, 새로운 용매 는 또 추출관에 괸다.(2) 추출하고자 하는 화합물을 원통여과지에 약 7g정도 넣고 하부플라스크에 용매를 넣은 다음 가열한다. 이상 과열을 방지하기위하여 끓임쪽 2~3개를 넣는다. 이 때 들어가는 용매의 양도측정한다.(3) 벤젠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벤젠이 B의 관을 따라 이동하는데 D에 떨어지면 추출을시작한다. 벤젠이 F의 상단에 닿게 되면 아래로 떨어져 A에 모이는데 이 때를 1회 추출이라고한다.(4) 1회 추출이 끝난 다음 여과지를 꺼내어 건조시킨 후 무게를 측정한다.(5) 추출하고자 하는 화합물을 원통여과지에 다시 약 7g정도 넣고 추출횟수를 다르게 하여 실험을반복한다. 끝난 후 건조시켜 무게를 비교한다.(6) 추출율, 추잔율, 추제비를 계산하여 추출의 효율을 비교한다.3. 실험결과(1) data{추출횟수추출전 추료의 무게추출후 건조된추료의 무게추제의 양1회7.01g6.53g100 ㎖3회7.03g6.46g100 ㎖5회6.97g6.39g100 ㎖(2) 추제비, 추잔율, 추출율 계산우선 추제비는 전체적으로 가한 추제량(V)을 추료에 붙은 추제량(v)으로 나누어 준 것으로 위 의 data를 다음 식에 대입하면α = {V over v이고, 추잔율은 처음 추료속의 추질의 양({)과 n회 추출후 남아있는 추료속의 추질의 양 ({)과의 비를 의미하며 아래의 식으로 정의한다.추잔율 = {/ {= 1 / (α + 1)n{추 출 횟 수추 제 비추 잔 율1 회0.0740.9313 회0.0290.9195 회0.0170.917추출율은 처음 추료 속의 추질이 얼마만큼 추출되었나를 알려주는 척도로서 다음의 식을 이 용하여 추출율을 구하면추출율 = 1 - 추잔율 = 1 - 1 / (α+ 1)n{추출횟수추잔율추출율1회0.9310.0693회0.9190.0815회0.9170.083(3) 횟수에 따른 추출율의 그래프{2. 고 찰이 실험은 고체 원료의 혼합물로부터 액체 용제로 처리하여 특정성분을 추출해내는 방법에 대 하여 알아본 실험이었다. 실제 실험 결과 추출횟수가 증가하면 추출량은 점점 더 많아지게 되 나 변화율은 점점 줄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험시 콩을 빻아 가루로 만들 때 그 크기 가 크게되면 추료에 접촉하는 추제의 양이 적어지므로 더 적은 양의 추출이 되었을 것으로 예 상된다. 이번 실험으로 공장의 추출공정에서 장치운용비용과 추출횟수증가당 효율과의 관계를 고려한 적절한 추출횟수 결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향류 다단 추출장치의 원리와 사용 방법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공학/기술| 2003.07.23| 2페이지| 1,000원| 조회(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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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 페스트 감상문
    전후 프랑스 문학의 거성 알베르 까뮈의 작품에는 부조리와 반항의 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까뮈는 빈곤과 병고를 철저히 체험한 소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죽음의 관념에 위협당하며 삶과 죽음, 자신과 세계와의 모순, 그리고 대립에 괴로워했다. 그러한 그에게 인간 세계의 모든 존재가 모순으로 가득 차게 보였던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지중해에 위치한 알제리에서 언덕과 태양, 바다를 늘 대하며 자란 그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숨쉬는 삶의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지중해적 사상과 감정의 형성은, 알제리 풍경의 강한 인상을 정열적으로 묘사하여 인생과 자연의 결합을 주제로 한 서정적 에세이 이나 최초의 에세이 에 잘 나타나 있다.모순된 인생에 대한 명철한 자기 사색 과정을 거친 그는 절망 속에서도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숙명적인 부조리의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인간이 삶과 죽음의 모순 속에서 살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하며, 죽음이 있기에 삶의 가치가 있으며 삶은 사랑스러운 것이 된다고 했다. 그것은 어둡고 괴로운 현실과 극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세계, 즉 삶의 희열을 느끼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을 괴로움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어둠과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빛의 세계에서 작가 까뮈는 탄생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삶과 죽음, 긍정과 부정, 예스와 노 사이에서의 긴장과 분열이야말로 까뮈 삶의 터전이었다.사실 부조리는 실존주의 철학 용어로 사르트르나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작품에서 먼저 사용된 개념이었다. 부조리란 본질적인 관념이고 제 1의 진리이다.라고 하며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태도를 부조리라고 규명했다. 즉, 까뮈 자신에 의하면 이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에게는 합리를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에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 어떤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인간이 지닌 합리의 욕망과 세계의 몰합리라는 두 개의 상극적인 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모순이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부조리의 문제이다. 이러한 부조리한 세계에 대하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맞이하게 되므로 좌절을 각오하고라도 인간적인 노력을 거듭하여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까뮈의 부조리에 대한 주장이다.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까뮈의 반항적 인간의 출현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부조리는 아무나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정체된 인간, 관습에 얽매여 일상 생활에 매몰된 인간은 단순히 기계적인 삶을 영위할 뿐 인생에 대해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즉, 그러한 삶으로부터 깨어나 명철하게 부조리를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지게 되며, 까뮈의 말에 의하면 부조리의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인 것이다.까뮈의 부조리 사상은 전쟁, 점령, 수용소, 저항 운동 등 극한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더욱 다듬어진다. 따라서 인간성을 빼앗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럽히는 일페의 비인간성에 과감히 나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것은 사회악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표출되어 나타나게 된다.1947년에 발표한 장편 는 인간을 전멸시키는 악에 대한 집단적인 투쟁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까뮈는 페스트라는 병명에 실제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시키고 있다. 제1,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인간성을 말살하는 모든 체제에 과감히 대항하여 맞서 왔던 그는 무엇보다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분노했다. 즉, 페스트는 수많은 인명을 하루 아침에 무참히 빼앗아 가는 전쟁을 비롯해 폭력이나 부정, 악과 억압을 의미하고 있다.이 소설은 연대기식의 말투로 되어 있다. 화자는 최근에 페스트가 휩쓸고 간 오랑시에서 자기가 목도한 바를 얘기한다. 쥐들의 무리가 닥쳐와서, 거리고 사람의 집이고 할 것 없이 도처에서 죽어간다. 병이 발생하고 처음에는 몇 사람 안되는 소수의 의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이 무슨 병인지 알아내지 못한다. 오랑시 당국자들은 차츰 엄중한 조치를 취한다. 마침내 시는 완전히 격리되고,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않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서로 분리된다. 의사 리외와 산의 피서지에서 요양 중이던 그 아내, 신문기자 랑베르와 파리에 머물러 있는 그 애인. 의사 리외는 아내에 대한 근심 걱정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큰 비참에 대한 연민 때문에, 자기 직무에 대한 애정과 성실 때문에 자기의 최선을 다하여 전염병과 싸운다. 그 사람 주변에 또 다른 선의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랑베르, 그도 감히 행복을 선택하려 들지 않고 탈출을 단념한다. 타루,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성자가 되려고 한다. 하급관리 그랑은 크나큰 비탄의 밥이 되었고 부조리한 꿈에 사로잡히고 만다. 신부 파늘루, 그에게 있어서 페스트는 시초에는 당연한 징벌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한 어린애의 죽음이 그것을 뒤집어 놓았다.동기는 각각 다르지만 페스트라는 악과 부정과 폭력을 앞에 두고 강한 결속을 이루어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의사 리외와 지식인 타루는 지극히 윤리적이고 실천력이 강한 인물로 제시되고, 나머지 평범한 시민들은 비윤리적이고 타산적인 인물로 제시되어 있다. 이에 비해 신문사 특파원인 랑베르는 좀더 관념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랑베르의 성격이 이기적인 단계에서 이타적(利他的)인 단계로, 관념적이고 회의적인 단계에서 실천적이고 주체적인 단계로 변해 가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희생과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연대 의식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부조리한 상황을 피하려는 자세에서 탈피하여 이에 맞서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자세로 변모해 가는 인물인 랑베르야말로 이작품의 주인공이자 입체적 인물(devel-opin character)이다. 작가 까뮈는 랑베르라는 인물을 통해 무의지적(無意志的)인 한 인간이 진정한 실존(實存)을 획득해 가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부조리 문학 속의 한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하였다.결국 오랜 투쟁 끝에 페스트는 물러가고 시는 해방되지만 타루는 희생자가 되고 만다.가장 처절하게 대항했던 타루와 종교적 귀의 속에서 해결을 바랐던 신부의 죽음에서 우리는 작가의 허무주의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는 페스트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사망률도 낮아갔다. 사람들은 시의 문을 열었다. 격리도 풀린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변했다. 리외 자신도 피로와 고뇌에 가득 차서 자기 아내의 죽음을 스토익(stoic)한 냉정성을 가지고서 듣는다. 그는 자기의 일을 계속한다. 환자들에게는 휴가가 없다. 의사에게도 없다. 그는 자기가 이 연대기의 저자임을 고백한다. 그는 인간속에는 경멸하여야 할 것 보다도, 찬탄하여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증언하고 싶었고 또 항상 경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상징하는 악은 결코 멸망하지 않고 또다시 어딘가의 행복해 보이는 도시에서 불쑥 나타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가의 부조리의 철학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점이다.
    독후감/창작| 2003.05.23| 3페이지| 1,000원| 조회(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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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음악사] 서양음악사 레포트 평가A좋아요
    {- -{< 서 양 음 악 사 >{과 학년학번 이름년 월 일Ⅰ. 고대음악고대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등에서 이미 상당히 고도로 발달한 음악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그림이나 조각·기록·전승(傳承)·악기 등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단지 음악작품 그 자체는 한 곡도 남아 있지 않아 그 음악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추정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 고 있다. 고대 유대의 음악에 대해서는 성서에도 많은 기록이 있어 유대교의 제사와 음악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음악은 사회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찬가·무도가·결혼가·조가(弔歌) 등 여러 종류의 가곡이 쓰여졌다. 호메로스, 사포, 아나크레온 등의 시(詩)도 본래는 낭창을 위한 가사였으며,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 스 등의 고대극도 무대 출연자나 코러스(chorus)에 의한 낭창, 기악연주자에 의한 반주 등에 의해서 연주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17세기 초 근대 오페라의 탄생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 다. 또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등은 각기 음악의 본질·윤리성·물리성에 대해 논하여 음조직·선법(旋法)·리듬 등에 관한 그리스의 독특한 음악이론을 확립해 그 후의 유럽 음악이론의 발전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다.Ⅱ. 중세의 음악중세 유럽의 음악사는 그리스도교의 전례(典禮)에 연결되었던 성가의 성립에서 비롯된다. 초 기 그리스도교성가는 기본적으로는 고대 유대교성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거기 에 여러 지방적 요소가 가해져 여러 동방교회성가 및 서방교회성가가 성립되었다. 특히 로마 가톨릭교회가 서유럽세계에 세력을 뻗침과 더불어 로마성가가 큰 발전을 보여 그 후의 유럽 음악의 기조(基調)가 되었다. 이 성가의 성립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이룩한 업적이 컸다고 전하여 그레고리오성가라고도 불리며, 오늘날에도 로마교회의 가장 정통적인 전례음 악으로 쓰이고 있다. 한편 세속음악분야에서도 11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프랑스의 트루바 두르·트루베르, 독일의 미네젱거 등의 음유시인되었다. 현존하 는 최고(最古)의 다성음악의 실례는 9세기경의 음악이론서 《무시카엔킬리아디스》에 기록되 어 있는 단순한 형태의 오르가눔이나, 실제로는 더욱 복잡한 형태의 것이 이루어졌으리라 생 각된다. 그리고 유럽의 다성음악이 이 이론서에 의해서 창시된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그 이전부터 다성음악은 민속적·즉흥적인 형태로 연주되었을 것이다. 초기 다성음악의 자료는 극히 적고 기보(記譜)도 해독(解讀) 불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면 프{랑스의 성마르시알 수도원이나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중심으로 발전 을 이루고 특히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걸쳐서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중심으로 레오 니누스·페로티누스 등의 2성(聲) 내지 4성의 오르가눔이 나타났다. 또한 클라우술라·모테트· 콘둑투스 등의 악곡도 나타나 중세 유럽음악의 정점(頂點)이라고도 할 발전을 보였다(노트르 담악파). 14세기에 들자 신생(新生)에의 시대경향을 반영해 사랑·자연미 등을 노래한 세속작 품의 수가 증대하고 2박자가 도입되었으며 리듬도 다양해져 아르스 노바(신예술)의 음악이 이루어졌다. 특히 프랑스의 기욤 드 마쇼(1330경∼77경)의 음악에서는 13세기 아르스 안티 콰(고예술) 음악의 세속화와 새로운 표현에의 지향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이탈리 아의 자코포 다 보로냐(14세기 중반), F. 란디니(1325∼97) 등의 세속작품에도 새로운 경향 이 나타났고, 영국에서도 3도·5도 등을 중용하는 독특한 다성음악 기법에다 종래에는 없던 참신함을 보였다. 그리고 15세기 초의 J. 던스터블, L. 파우어 등의 영국음악은 그 후의 대 륙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Ⅲ. 르네상스 음악15세기 초에서 중반에 걸쳐 부르고뉴공국(公國)의 속령인 플랑드르 출신의 음악가들은 중세 말의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의 요소를 종합해서 새로이 꾸민 국제적인 음악을 형성하여 갔 다. 그 가운데 특히 뒤페의 활약은 괄목할 만하며 그에 의해 음악의 르네상스가 비롯되었다 네상스음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피엘 드라류, A.빌라르트, 필립 데 몬테, 라소 등이 1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배출되어 플랑드르악파의 성악양식 을 바탕으로 한 대위기법(對位技法)을 확립, 이는 국제적인 음악어법으로 적용하기에 이르렀 다. 한편 다른 나라에서도 플랑드르의 기법을 기조(基調)로 해서 각기 민족적인 경향을 반영 한 음악을 발전시켜 나갔고, 이탈리아에서는 C. 페스타, 루차스키, 마렌치오, 제수알도, 몬테 베르디 등의 세속적인 마드리갈과 팔레스트리나의 교회음악을 낳기에 이르렀다. 또 상업도시 베네치아도 그 기풍을 반영한 색채적인 교회음악을 발전시켜 가브리엘리 등의 작품은 다음 대의 바로크음악의 성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의 C. 잔캥, 세르미시 등의 다 성샹송, 에스파냐의 모랄레스, 빅토리아 등의 교회음악,밀란, 카베손 등의 기악음악, 영국의 T. 탤리스, W. 버드, T.몰리, O. 기번스 등의 교회음악과 마드리갈 등도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에 걸친 르네상스음악의 대표적인 악곡들이다. 독일도 16세기에 들어서자 플랑드 르, 그 후반에는 이탈리아의 영향 아래 향상을 지속하여, 특히 악기제작과 기악음악면에서 독자적인 면을 개척하여 그 후에 오는 독일음악의 황금시대를 다졌다. 또 16세기 전반에 시 작된 종교개혁운동에 대응해서 새로운 종교이념에 의한 종교음악이 성립되어 특히 독일 루 터파의 코랄, 프랑스 칼뱅파의 시편가, 영국교회의 성가 등은 그 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 다. 다시 이 세기에는 악보 인쇄술이 발명·보급되고 또한 많은 음악이론서, 계몽적인 음악입 문서가 간행되어 폭넓은 음악보급에 도움이 되었다.Ⅳ. 바로크 음악17세기 이전의 음악과 르네상스 이전의 음악은 데이비드 먼로 등의 주도로 많은 발굴이 이 루어지고 있고 현재의 정격연주의 출현은 보다 많은 고 음악분야의 작품이 발굴되고 연주되 고 있는 추세지만 1천 년이 넘는 서양 음악사의 역사에서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클래식 음 악은 아주 작은 부분에 해당된다 고전주의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퇴색되고 보다 음악가 자신의 주관이 나타나는 음악으로 발전하게 된다.주요작곡가로는 비발디(1678-1740), 바하(1685-1765), 헨델(1685-1759) 등을 들 수 있다.Ⅴ. 고전파 음악18세기중반부터 18세기말까지의 음악으로 하이든(1732-1809), 모차르트(1756-1791), 베토 벤(1770-1827)등의 작곡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낭만주의로 가는 과도기의 음악으로 모차 르트라는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가 출현하기도 했다. 음악가들이 보다 일반 대중의 취향에 맞는 이해하기 쉬운 곡을 쓰기 시작하고 전문적인 직업으로 음악가가 대두되는 시기의 음악 이다.Ⅵ. 낭만주의 음악18세기말의 프랑스 혁명 이후 귀족계급의 몰락과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인해 음악가들은 더 이상 예전의 귀족 계급에 예속된 생계 방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적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시민대중을 위한 보다 이해하기 쉬운 음악 을 만들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음악가의 자유로운 신분에 따라 자신의 내면의 개성 이 드러나는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 출연하고 음악가 스스로 인기 있는 작곡가가 되기 위한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된 시대의 음악이기도 하다. 베토벤 이후의 낭만주의는 슈베르트 (1797-1828), 멘델스존(1809-1847), 슈만(1810-1856), 바그너(1813-1883), 차이코프스키 (1840-189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 등의 작곡가가 대표적이다. 또한 낭만주의 시기에는 19세기 중반에 민족주의의 발로로 출연한 동구와 북구를 중심으로 한 국민주의 음 악이 나타나게 되었다. 보로딘(1833-1887), 무소르그스키(1839-1881) 등의 러시아 오인조 의 음악과 핀란드의 시벨리우스(1865-1957), 노르웨이의 그리그(1843-1907) 체코의 스메타 나 (1824-1884), 드보르작(1841-1907) 등이 국민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낭만주 의는 의한 가곡과 표제음악의 절정기를 이루었다는데 있다.Ⅶ. 근대-현대의 음악낭만주의의 위대했던 승리가 지나간 후, 여기 변전의 세대, 우리 자신들이 속해 있는 시대- 이른바 '현대' 음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쇤베르크(1874-1951)의 12음 기법을 필두로 한 현대음악은 베베른(1883-1945), 스트라빈 스키(1882-1971)등의 작곡가로 대표된다. 현대 음악은 무조음악에 의한 기존의 조성의 파괴 등의 혁신적인 시도와 복잡한 현대의 세계만큼이나 난해함, 존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 거시 윈의 재즈 음악과의 접목 등 다양한 실험정신이 돋보이고 다양한 형태의 음악 양식이 존재 하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인들'은 감상을 본질적인 적으로 간주하며, 여기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을 취한 다. 그들은 낭만주의의 호사스러움과 방대한 악기군을 사용하는 것, 황홀경을 자아내는 음 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낭만 음악의 육감적인 효과를 증오한다.후기 낭만주의의 마지막 두 사람으로써 가장 날카롭게 대조되는 2인의 대표자들 말러와 시 트라우스에게도, 우리는 좀더 친근한 스타일의 묘사로 향하려는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실내 관현악(chamber orchestra)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교향악적 관현악의 축소판이 아니라, 새로 운 표현적 의도를 위한 새로운 기관이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양식과 기법으로된 작품, 그 러니까 현대적인 의미에서 다성음악적인, 즉 화성음악(homophony)을 피하고 리듬의 더 큰 다양성을 채택하는 작품들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말러는 다른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옛 세계 와 새 세계 간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는 그의 시대의 2중성, 낭만주의의 과장된 감상성과 그것의 첫 거부 반응을 비극적으로 강렬하게 펼쳐 보여 준다.거부 반응은 여러가지 형식을 취한다. 그중 가장 뚜렷한 것은 감상성에 대한 풍자와 의식적 으로 사소한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고전적 형태의 선율과-실제 고전에까지 거슬러 올라 가지는 않지만-전통적 방식의 관현악법에 대한 야유로부터준다.
    예체능| 2003.05.23| 6페이지| 1,000원| 조회(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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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와 유교에 대하여
    불교는 불타를 섬기는 종교이다. 불타는 인도의 고대어인 신크리스트 어로는 붓다(Buddha)이다. 붓다는 ‘깬 사람’, ‘각성하는 사람’, ‘스승’이란 뜻으로, 한자말로 부처라고도 한다.불교라는말은 붓다(부처, 불타)를 섬기는 종교이지만, 붓다는 신이 아니다. 뒷날 석가모니를 일컬어 부처라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석가모니는 불교에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이상적 존재이지만, 결코 신이 아니다. 신이 없는 종교, 이것이 바로 불교가 다를 종교와 크게 차별되는 특징이다.한때 불교는 인도대륙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융성하였지만 곧 힌두교에 의해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고, 인도 밖으로 퍼져나가 동양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일어난 종교이기 때문에 힌두교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블교에도 힌두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업의 개념이 있고, 그로 인한 환생과 윤회사상도 힌두교와 일치한다. 불교는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라는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 그리고 운명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체념작인 힌두교에 반발하여 그 교리를 부정하고 인간 자신과 인류를 구출하기 위한 인도 종교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 이슬람교가 절대 신에 의지하여 구원을 바라지만 불교는 스스로의 노력과 수행에 의하여 극락에 이르는 정신의 종교이다. 불교 신자들이 떠나는 여행은 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같이 넓은 자신의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극락을 찾아 떠나는 멀고 먼 여행이다.석가모니의 본 이름 고타마 싯다르타로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인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자리잡은 샤카족의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싯다르타는 16세에 아쇼다라 부인과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어느 날 궁전밖을 산책하다가 성 밖의 굶주리고 병들어 고통받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후로 크게 바뀌게 되었다. 그가 29세 되던 해 그는 삶의 본질과 그 해결책을 얻기 위해 출가하였다. 그는반의 경제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네번째, 마가(올바른 길),도성제이다. 즉 팔정도, 여덟 가지의 올바른 방법을 따르면 안간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석가는 제자 외 중생들이 열반에 이르는 것을 돕기 위하여 8정도를 정해주었다. 이는 신자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꼭 필요한 자비와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돕는다.8정도란 첫째, 정견: 사물을 올바르게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라. 둘째, 정사: 생각을 올바르게 하여야 한다.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고 부처님 말씀에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 셋째, 정어: 말을 올바르게 하여야 한다. 말로써 나을 해치지 말며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넷째, 정업: 행동을 올바르게 하여야 한다. 선한 행동을 하라. 다섯째, 정명: 올바른 생활을 하라. 남을 속이거나 해치는 직업을 갖지 마라. 여섯째, 정정진: 올바른 노력을 하여야 한다. 정당한 노력으로 살라. 일곱째, 정념: 올바른 기억을 한다. 자신이 행한 행동의 결과를 분명히 알라. 여덟째, 정정: 올바르게 정신집중을 하여야 한다.석가는 뜬구름 같은 철학논쟁을 배척하고 실천을 중요시 하였고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아는 카스트라는 신분제도에 얽매여 철저한 차별대우를 받던 인도사회에 있어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석가의 평등사상은 넘녀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이모이자 어머니인 마하르프라야파티가 비구니가 되도록 허용한 것은 불교가 출발부터 여성 성직자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어떤 세계종교보다 앞서 남녀 평등을 구현한 것이다.석가는 8정도와 함께 다섯 가지 간단한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 자비심을 가지며 사람과 짐승을 해치거나 죽이지 말라. 이 첫번째 규칙 때문에 대부분의 불교 신자들은 채식주의자이며 절에서 결코 짐승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살코기를 얻기 위하여 짐승을 도살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둘째, 도둑질을 하지 말며 네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말라. 곤궁한 사람에게 항상 관대하라. 이 두번째 규칙은 승려나 비구니가 왜 선행을 베풀며 살아야 가르침에 바친 위대한 존재이나 석가 혼자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는 없다.석가의 아래에 위치하여 중생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보살이라 한다.기독교로 본다면 성자들과 비슷한 정신적이 지도자들이다. 보살은 지혜를 가진 사람, 지혜를 본질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뒷날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로 자리잡는다.보살은 다른 이들의 고통과 번민을 가엾이 여겨 이들을 구원하는데 헌신한 부처의 후예들로 옛날에는 불교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소승불교에서 최고의 이상적 수행자는 ‘아라한’으로, 나한(羅漢)으로 음역되는데 원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후에는 불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가 되었고, 대승불교의 보살과 유사한 개념이다.불교는 신을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다.그런말큼 불교에는 정복자도, 창조자도, 정복자도, 파괴자도 없다.그러나 무한한 자비와 관용, 대가없는 애정을 추구하며 원한과 증오를 떨칠 것을 요구하지만, 맹목적인 믿음과 광신을 배척하며 지혜로써 마음속의 탐욕과 번민을 몰아내 평화를 얻으라 가르친다.이상과 허상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도록 이끌며 뜬구름 같은 이론보다는 조그만 실천을 더욱 소중하게 여진다.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도록 촉구하며 구체적으로 그 실천방안까지 단계별로 마련해 놓고 있다.슷로의 노력과 깨달음을 통해 누구나 열반의 경지에 올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길을 현실적으로 열어놓은 종교, 불교는 매우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종교이다.동양의 다른 세계종교와 다른 것이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이 힘에 의한 인류의 구제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사후의 세계나 영생의 세계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선과 악을 규정하고 선행에만 힘쓸 것을 강조하는 것은 같다.그래서 특히 유교에 대해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 사상이라 평가한다.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서양식 잣대에 맞추어 유교를 평가하는 것이어서 옳다고 할 수 없다.유교가 동양사회에 미친 영향은 참으친다는 자연주의 사상과 그 자연에서 벗어나 모든 것의 주체가 되는 인문주의 사상으로 구별되어 동양사상과 철학의 역사는 바로 이 자연주의와 인문주의를 오가는 수평적인 관계였다.인간이 역사와 문화의 주체로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제시한 최초의의 대가가 바로 공자이다. 그에 의해 창시된 학파이자 뒷날 종교차원으로 발전된 것이 유교이다.고대 은나라는 부족 신, 조상신인 제(帝)를 숭배하던 나라였다. 그러니까 제는 신(神)을 일컫는 말이었다. 은나라는 문왕이 일으킨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속국과 같았으므로 이는 반란과 같았다.주나라가 섬기는 신은 천(天)으로 은나라의 제(帝)를 대신한 것이다.주나라는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새 왕조를 일으킨 것은 신의 뜻, 즉 천명에 의한 것이라 하여 반란 행위를 정당화 하였다. 은나라 군주는 덕 없었으므로 덕이 있는 무왕으로 하여금 새 왕조를 열어 백성을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명을 내렸다고 주장하였다.덕을 가진 자가 천명을 받으면 더 이상 신하가 아니요, 군주가 덕을 잃으면 천명이 거두어지니 더 이상 군주가 아니다. 결국 민심은 곧 천심이요, 덕을 가진 자는 덕 잃은 군주를 내쫓고 새 왕조를 세울 수 있다는 논리이다.이것이 중국 역사를 꿰뚫고 내려오는 왕조 흥망의 이유인 대의명분을 앞세운 역성혁명을 가능케 했다. 강자가 지배한다는 현실을 합리화 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군주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 덕이라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이 덕을 해석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에서 뒷날 유교가 탄생하였다.새로운 군주가 된 무왕은 바르고 튼튼한 국가를 만드는데 힘 썼다.무엇보다 조상신을 섬기고 정성 들여 제사를 지냄으로써 기강과 품의가 있으며 예를 존중하는 나라임을 강조했다. 주나라는 조상신과 함께 땅의 신과 곡물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또한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종묘도 중요한 곳이었다. 조상의 덕으로 풍년을 비는 제사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에 신과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자체가 곧 국은 인이다.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야 말로 이상적인 지배 방법이다. 덕 중에서도 최고의 덕은 바로 인(仁)이며, 인이란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공자가 주장한 것은 차별적 사랑이다. 정쟁과 혼란에 휩싸였던 당시 시대 상황으로는 가족 보호가 무엇보다 시급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인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이 정치 지도자가 되어 인애의 정치를 해야만 세계는 질서를 찾고 안정될 수 있다고 공자는 가르쳤다.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것이 인의 출발이다.또 위계질서를 중히 여겨 충(忠)을 중요하게 여기고, 서로 믿고 감싸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恕)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기 위해 인이라는 형식이 매우 중요하다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 규범이기도 한데 유교에서 형식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자의 사상은 이처럼 사회,정치적으로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김을 이루고 있으며 이상사회를 꿈꾸는 인간 중심자였던 것이다. 많은 제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퍼뜨렸으나, 제자백가들의 다양한 주장에 그 교세가 약해졌다.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맹자와 순자이다.맹자는 도덕정치와 성선설을 주장한 사람이다. 전국시대의 ‘힘의 세상’에서 그는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을 강조하였다.인간은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하면서 수양을 통하여 욕심을 덜어 본래의 선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맹자 사상의 핵심이다. 왕도 정치란 성선설에 입각한 정치로 군주는 백성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차를 해야 하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해 주고 도덕 교육에 온 힘을 쏟아야 올바른 정치,올바른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순자는 맹자와 반대로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맹자의 이론이 지나치게 자기 주장에 빠져 객관성이 부족하다 비판하고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유교를 객관적 입장에서 재정비 하였다. 그는 공자, 맹자가 도덕의 기초로 삼은 하늘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순자가 주장하는 성악설은 악한 인성을 그대로다.
    인문/어학| 2003.05.23| 6페이지| 1,000원| 조회(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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