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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오대산에 남겨진 삼국유사의 흔적을 찾아서
    제목 : 오대산에 남겨진 삼국유사의 흔적을 찾아...목차 : 1. 서문2. 오대산에 대해3. 월정사4. 상원사 가는 길5. 상원사6. 느낀 점본문 :[ 1. 서문 ]11월 3일. 같은 학교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문수신앙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단풍 지는 가을 산의 정취를 느끼면서 오대산에 남겨진 삼국유사의 흔적을 몸과 마음으로 느껴보리라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결정한 답사여서 나름대로 많은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팀원들은 나를 포함한 3명이었으며 8시까지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진부로 가서 거기서 월정사행 버스를 타기로 하였다. 늦는 사람 없이 8시까지 무사히 집합을 한 우리들은 8시 15분 행 시외버스를 타고 진부로 향하였다. 진부는 무척이나 외지고 한적해 보이는 마을로 우리가 갔을 때가 주말이고 매서운 추위가 몰아쳐서 그랬는지 사람들의 자취를 찾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월정사에 가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만 했기 때문에 역 뒤쪽에 있는 월정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골길을 털털거리는 낡은 버스에 몸을 기대어 있노라니 어느 샌가 낯설면서도 친숙한 산골에 닿아 있었다.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니 이곳부터 오대산국립공원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우릴 반겼고 곧 월정사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월정사의 상징으로까지 자리매김한 전나무 숲길의 반대편으로 월정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다. 오늘의 답사지 월정사에서 만나보아야 할 것들인 팔각구층탑과 석조보살좌상과 상원사의 상원사 동종과 문수보살상은 이미 머리 속 깊이 각인 되어 있었다.[ 2. 오대산에 대해 ]오대산은 강원도의 평창?홍천?명주 3군에 걸쳐 있고, 금강?설악에 이어 태백산맥의 중추에 자리잡고 있고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오대산을 신성시하여 그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 땅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재래의 산신은 불보살로 대체되고 곳곳에 사찰이 들어섰다.오대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러한 오대산은 들어와 숨게 된다. 이렇게 삼국유사와의 연을 가진 오대산중에 월정사는 자장법사가 처음으로 움집을 지었고 다음에 신효거사가 와서 살았으며 그 다음은 범일의 제자인 신의가 와서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후에 수다사의 장로 중 유연이 와서 살면서 점차 큰 절이 되었다. 절에 있는 오류 성중과 9층 석탑은 모두 거룩한 유적들로 땅보는 풍수의 말로는 국내의 명산에세 이 자리가 제일 좋아 불교가 길이 흥왕할 자리라고 하였다.[ 3. 월정사(月精寺) ]우선 월정사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면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14년(645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고찰로 코고 작은 사찰과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동대산에 있는 만월대에 떠오르는 보름달의 달빛이 유난히 밝고 아름답다고 하여 월정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월정사에는 조상들의 뛰어난 문화 유산이 많이 있는데 우리에게 제일 친숙하게 알려진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석조보살좌상 등의 문화재가 있다. 유래에 관해 「삼국유사」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 월정사는 자장의 개산(開山) 이후 문무왕 때 신의대사가 자장의 유지(遺址)를 찾아 암자를 짓고 수도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중수, 중건을 살펴보면, 1377년(충렬왕 33)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일(而一)이 중창하였고, 1833(순조 33)에 다시 화재로 전소된 것을 1844(헌종 10)에 영담, 정암 등이 중건하였으며, 이후 조선 철종 7년(1856)에 크게 중건되어 내려오다가 1?4 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하여 칠불보전을 비롯한 10여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거기다 당시의 참화로 인해 절의 귀중품이 모두 재로 변하였다. 양양의 선림원터에서 출토된 후 이곳으로 옮겨진 범종 또한 완전히 녹아버렸다. 이 범종은 804년에 제작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신종에 견줄 만큼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작품이었음에 안타까움이 더욱 컸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사찰이 거의 없었지만 월정사의 피해는 특히 처참했던 것이다. 따라서건만 공사중이라니… 탑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탑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 그 마음을 느끼고 싶었건만 아쉬웠다.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적광전 앞마당의 8각 9층탑과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예배하고 있는 석조보살상만이 타오르던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월정사의 성보들이었기에 석조보살좌상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더욱 컸다.월정사 8각 9층탑은 자장율사가 건립했다고 하나 시대적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8각형 탑은 고구려에서 유행한 양식으로 신라에서는 제작된 경우가 없고 신라 멸망후 옛 고토에서 백제와 고구려 양식이 부활하면서 다시 등장한 형식이다. 이 탑은 추녀끝마다 풍경이 달려 있어 바람이 스치고 지나면 아름다운 화음이 이루어져 부처님 앞에 소리공양을 올리는 듯하였다.석조보살좌상은 온몸에 가득 번진 미소로써 부처님 앞에 무엇인가를 바치고 있는 모습으로 하고 있는데 이 보살상은 흔히 오대산 문수보살이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라고 하지만 문수보살이 탑 앞에 공양하는 예가 없기 때문에 법화경에 나오는 약왕보살상으로 해석한다고 한다. 약왕보살의 전신인 희견보살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을 들고 삼매를 얻어 환희심에 가득 차 여러가지 공양을 올렸는데 부처님이 흡족해 하지 않자 1천2백년 동안 자신의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을 했다는 것이다.희견보살이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8만4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각종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미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두 팔을 태우는 공양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월정사 9층탑과 보살상의 모습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듯하다. 강릉시내 신복사터에도 이와 흡사한 형태의 보살상이 탑앞에서 공양을 올리고 있는데 같은 시대에 유행했던 작풍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월정사를 한 번 돌아본후 월정사의 상징이 되있는 전나무숲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빽빽히 들어선 전나무 숲에 들어서니 마치 나의 몸이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표소에서 이어지는 전나무와 잣나무의 길은 의 조그마한 노력으로 관광객들이 버스를 서서 기다리는 괜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과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상원사를 올라가는 길은 20여분 정도로 생각보다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는 곳곳에 야영장과 캠핑장의 편의시설이 있었는데 날이 추워서 인지 아니면 이곳이 수련장으로써의 인기가 적어서인지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상원사 들어가는 입구에서 제일 먼저 보게되는 것이 관대걸이 이다. 상원사 입구의 매점 옆에 조그마한 비석이 그것이었는데 상원사에 참배차 행차하던 세조가 목욕할 때 의관을 걸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헌데 그 모양이 너무 썰렁한 느낌을 주어서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하였다가 상원사를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관대걸이인지를 알게 되었다. 상원사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숲길은 조금은 가파른 길이었지만 산의 운치를 충분히 느끼기에 좋은 멋진 길이었다.축대 위에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상원사는 우람하게 올려다 보이는데 오른쪽 동산 양지 바른 곳에 부도 몇 기가 나란히 서 있었다. 답사 때는 누구의 부도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방한암스님. 탄허스님, 그리고 방한암스님을 모셨던 의찬스님의 부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속세의 인연을 끊는 것이 불가의 법도라고 하지만 생전 함께 지내셨을 세 분 스님의 기념비들이 가족 묘소같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아쉬운 것은 근현대 불교계를 빛낸 선승들의 부도가 크기만 컸지 조악한 조각 솜씨로 지어져 스님들의 풍모가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5. 상원사(上院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 원래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고, 통도사(通度寺) 등을 창건한 자장이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종각만 남고 건물은 광복 후에 재건한 것이다. 여기에는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오랜 된 동종(銅鐘, 국보 36호)이 있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신앙의 중심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보천, 효명 두 신라 왕자를 지킨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이 치열한 즈음 산 속의 절이 군사 거점이 된다 하여 월정사와 상원사의 소각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이르니 노스님이 혼자서 절을 지키고 있었다. 불을 놓을 터이니 비키시라 하자 방한암스님이 "그렇다면 이 법당과 함께 불에 타서 소신 공양을 하겠노라"며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의 굳은 의지에 군인들도 감화를 받고 한 걸음 물러났지만, 상부의 명령이었기에 불복종할 수는 없어 절의 문짝만 떼어내 불살라 절이 불에 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치의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세조는 영험하기로 이름난 상원사에 기도를 드리고자 오대산을 찾아와 먼저 월정사에 참배하고 상원사로 향했다. 도중에 더위를 식히고자 신하들을 물리치고 청량한 계곡물에 몸을 담갔다. 그때 마침 동자승이 지나가기에 등을 씻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시원스레 등을 씻는 동자승에게 세조는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하였다. 그러자 동자는 한술 더 떠서 "대왕도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하고서는 홀연히 사라졌다.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은 세조가 몸을 살피자 종기가 씻은 듯 나았다. 세조는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였으며, 이름을 상원사라 바꾸고 원찰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하였다. 정 중심에 위치해 있는 청량선원에는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세조와 관련이 깊은 문수동자상임은 물론이다. 전설도 재미있지만 단아하면서고 늘씬하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문수동자상은 조선 초기 조각의 걸작이라고 할 만하였다.상원사에 있는 문화재로서 문수동자상에 필적할만한 것이 또 있으니 청량선원 앞 종각에 갇혀 있는 동종이 그것이다. 절에 들어서 바로 왼편의 종각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이라고 한다. 종의 겉면에 새겨진 비천상은 다들 감탄을 자아낸다고 하는데 보호건물에 의해 갚혀있어 종을 자세히 보고자 고개를 비집고 보아 없다.
    인문/어학| 2004.11.13| 8페이지| 2,500원| 조회(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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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협상론] 협상의 법칙과 전략 평가A좋아요
    Ⅰ. 협상이란?◎ 협상은 내게 무엇인가를 원하는 상대로부터 나에 대한 호의 그리고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내는 일이다. 예전에는 뛰어난 능력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성공이라는 보상을 받았지만 오늘날의 승자는 협상을 해나갈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협상이 우리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와 가정을 비롯하여 사적인 생활에서나 직업과 일에 관계된 공적 생활에서나 줄곧 협상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협상에는 어떤 협상이든 관계없이 항상 정보, 시간, 힘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 협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는 주위 환경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협상 능력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상대방의 행동에 영향을 주기 위해 나 자신의 정보와 시간과 힘을 분석하는 행위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Ⅱ. 협상의 대상◎ 우리의 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백화점과 같은 정찰제 매장에서의 정보와 시간과 힘에 대해 알아보겠다. 정찰제 매장에서의 협상은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협상하려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이 매장에서 가격이 어떻게 결정이 되는지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판매원이 오늘 물건을 판 실적이 좋은지 안 좋은지 그리고 판매원이 수당제로 일하는 건지 아니면 정규 봉급직인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협상을 하려는 대상보다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정보력이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판매원은 느긋해 보이지만 우리는 필요에 의해 구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불리해지는 건 당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힘이라는 요소에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로 관행이 갖는 힘이다. 대부분 정찰제 매장에서는 흥정을 할 수 없다고 믿게 하고 흥정을 시도하지 않는다. 결국 정찰제 매장과는 협상을 하 환불은 안됩니다.' 라는 규칙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Ⅲ. 협상에 이용되는 테크닉들내가 어떠한 물품의 구매를 원하는 소비자라고 가정하고 물건의 판매자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며 협상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 기술들에 대해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경쟁의식을 유발하라나를 물건을 사야 하는 사람으로간주하지 말고 나를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팔려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돈'은 팔려고 내놓은 상품이 되는 셈이다. 내 돈을 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돈의 가치는 올라가게 되고 나의 돈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경쟁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다른 가계의 상품과 비교를 하면 된다.필요를 충족시켜라나에게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여지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데 본인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기본적인 축 위에 놓여 있다. 협상이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측면을 공격하라내가 살려는 물건의 다른 관련요인들에 대해 얘기하여 판매원의 약점을 잡아내는 방법이다.만약…?만약이라는 단어를 쓰는 방법이다. 상품가격에는 어떤 다른 요소, 예를 들면 배송비, 설치비 등이 포함될 수가 있는데 만약 내가 배송과 설치를 내 힘으로 하겠다고 하면 물건값을 깎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최후 통첩이 가격에 이 물건을 살수가 없다면 '다른 가계를 알아봐야겠네요' 하면서 극단적으로 판매원의 노력을 거품으로 돌리는 방법이다.미끼던지기미끼던지기의 성공여부는 소요된 시간에 비례해서 결정된다. 바로 이점이 협상을 하는데 있어서 상대측을 어떤 형태로든 그 상황에 투자하게 만들어야만 되는 이유이다.도와주세요어떤 상황에서는 절실히 도움을 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보다 유리하다.약점을 강점으로협상에서는 영리한 척 하기보다 우둔한 척 하는 것이 애써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더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고 많은 경우, 약점이 실질적인 강점이 될 수도 있다.이해가 안가는데요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판매원에게가게 되고 결국 그 목표에 근접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협상할 때에 우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합법성의 힘우리가 사는 사회의 사람들은 인쇄된 것은 무엇이든지 경외심을 갖고 대하게 되어있다. 인쇄된 문구, 서류, 그리고 표지들은 권위를 지니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쇄물에 대해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다.위험을 감수해서 얻는 힘협상을 할 때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서는 상식에 덧붙여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일에 도전을 하기 전에, 먼저 승산이 있는지 계산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충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자존심, 성급함, 또는 일을 성급하게 처리하려는 욕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지는 말아야 한다.동참에서 얻는 힘여러 사람의 동참을 유도하면 내가 감수해야할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될수록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게 된다.전문지식의 힘채권브로커를 예를 들면 펀드매니저 보다 채권브로커가 유통시장을 보는 힘이 더 강하게 되면 시장의 상황을 보다 더 정확하게 예측을 할 수 있어 호가체결을 시키는데 더 유리한 위치에 있게 된다.투자의 힘어떤 물건을 살 때 판매원이 나에게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한다면 결국 가격 협상에서 나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게 된다.그 외의 힘으로는 보상과 벌이 가져오는 힘, 동일시의 힘, 도덕성의 힘, 선례의 힘, 끈질김으로 인해 얻는힘, 설득력의 힘, 일에 임하는 태도가 갖는 힘등이 있습니다.2) 시간사람들에게 마감시간이라는 것은 시간으로 하여금 사람을 쫓기게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다. 협상에도 가장 중요한 양보행위나 해결 움직임은 바로 마감 직전에 이루어지고 마감시간이 다가올수록 압박감은 높아지고, 협상에서 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이용하는 방식은 성공에 필수적인 요인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시간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약속시간 보다 늦게 도착하는 것은 자신감이 적대감의 표시일 수 있고 일찍 도착은 이익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을 때에만 취해야 한다.3) 정보정보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성공이라는 창고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은 것이다. 협상을 하기 전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라면 그 협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정보를 얻는데는 아주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이런 관찰을 할 때 중요한 요소로는 암시가 있다. 대부분 무의식중에 중요한 메시지를 포착할 수도 있고 말의 억양이나 강세를 통해 얻을 수도 있으며 행동으로도 얻을 수가 있다.Ⅴ. 소비에트 스타일의 협상-(북한의 협상)소비에트 스타일소비에트 스타일은 이기고 지는 접근법인데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눈에 띄는 적을 희생시키고서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때 생긴다. 경쟁자를 눌러 버리려는 이런 시도는 위협이라는 뻔한 책략에서부터 미묘한 형태의 조종에 이르기까지 전영역에 걸쳐 벌서질 수 있다. 이 스타일의 방법은 여섯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극단적인 초기 입장항상 상대의 기대치를 무너뜨릴 만한 심한 요구나 어처구니없는 요구로 협상을 시작한다.제한된 권한협상은 하지만 그들에게는 협정에 허가를 할 권한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감정 전술얼굴이 벌개져서 목소리를 높이며, 분노한 듯 행동한다. 때때로 분개한 듯 회담장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도 한다.상대방의 양보는 약함의 표시로 인정한다.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물러나 무엇인가를 양보한다 해도 그들은 거의 답례를 하지 않는다..양보에서 인색함어떤 종류든 양보하는 것을 미루며 양보한다 해도 그때는 이미 그들의 입장이 약간 변했을 때이다.최종기한 무시끈질기게 시간을 무시하고 시간은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듯 행동하는경향 또한 그들의 특징입니다.Ⅵ.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협상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협상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 기록협상의 출발점에서는 늘 비단결 같이 부드럽게 다가가야지 사포처럼 거칠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 당신의 입장을 말할 때는 정중하게 해야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는 창조적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갈등개인과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의견이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 어디고,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지, 왜 그런 차이가 일어나는지 분석해야한다. 차이가 분석되고 진단되면, 양쪽 모두가 승리하는 협상을 위햄 힘을 모으기가 쉬워진다. 일반적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경험, 정보, 역할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서로 이익이 되는 협상 테크닉먹다 남은 파이 한 조각을 갖고, 오누이가 서로 큰 조각을 먹겠다며 다투고 있다고 하면 한 사람은 파이를 자르고 다른 한 사람은 파이를 먼저 고를 수 있는 권리를 주는 협상방법이다. 이러한 협상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신뢰형성, 지지획득, 반대자들 다루기라는 세 가지 활동에 역점을 두어야 제대로 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신뢰형성경쟁사회에서 신뢰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회에서 서로를 신뢰함으로써 양측은 상대편의 정직함과 신뢰성에 확인을 가질 수 있게된다. 그 관계는 상호 의존적인 것, 즉 불가피한 의견충돌을 서로 만족하는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동맹관계를 말한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갈등을 만족스러운 결과로 바꾸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지지획득어떤 개인도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당신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에 의해 힘을 보강 받는다. 거래은행원에서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신의 현재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지를 받고 있다.반대자들 다루기서로 맞선 상태가 삶의 모든 것이다. 맞선 상대를 다룸으로써 당신은 깨어나게 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맞서고 있는 상대와 직면해야 한다. 만약 적이 없다면 당신은 계속 앉아서 꼼짝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자들을 다룬다는 것은 반대자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반대자들로 하여금 나의 협상에 맞게 이끌어 내는 것이다.Ⅶ. 전화를 통한 협상 전략의 특징1. 오해가 일어나기 쉽다.전화로 이야기를다.
    경영/경제| 2003.09.18| 8페이지| 2,500원| 조회(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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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경복궁 답사기
    1. 궁궐 답사에 앞서...세계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수도를 대표할 수 있는 유명한 궁들을 가지고 있다. 가까이 보면 중국 북경의 자금성, 일본 도쿄의 일왕궁, 멀리 유럽을 보면 런던의 버킹엄궁, 파리 근교에 위치한 베르사이유궁, 오스트리아 빈의 합스부르크 왕궁,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등등. 각 나라의 수도에 있는 궁궐들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곳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00년 넘게 한 나라의 도읍지로 자리잡고 있는 우리 서울에도 그러한 궁궐들이 빠질 리 만무하다. 서울에는 궁궐이 다섯 있다.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그 가운데 경희궁은 거의 없어져 궁이라 부르기 힘들게 되었지만 이 고궁들에는 각각 그들만의 매력이 있고 또한 각각의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다.궁궐을 막연히 우리의 옛 문화 유적이란 점에 앞서 600년 수도 서울에 살면서 이 궁들에 대한 조그마한 이해를 가지고 답사를 시작하게 되니 새로운 기분으로 경복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5대 궁궐 중에 경복궁을 택한 이유에는 나름대로의 이유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궁궐을 알기 위해선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먼저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조선 최대의 명당 자리라는 경복궁 터가 과연 어떠한 자리인지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조선 창업 공신인 정도전이 지은 경복궁은 어떤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는지 자못 궁금해 졌기 때문이다.2.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으로예전에 경복궁을 견학해 본적이 없을리 없겠지만 이번에는 궁궐답사라는 명목하에 궁궐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접하고 오게 되니 약간의 설레임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경복궁역에서 하차를 하였지만 경복궁 답사의 기본은 광화문에서부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경복궁 안으로 연결되어 있는 출입구가 아닌 경복궁 외각을 걸으면서 광화문으로부터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선택하였다. 그 동안 궁궐 서적들을 읽으며 본 것이 광화문의 현판에 박정희 전대통령이 자신의 친필을 걸어 놓았다고 하여 약간은 씁쓸한 마음에 그 글씨라도 보고 광화문을 통과하려 하였으나 밖은 번잡한 도로이기 때문에 광화문을 한 눈에 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바짝 올리고 가까이에서 서야 간신히 바라볼 수 있었다.일제시대 광화문은 총독부를 짓는다고 주요 전각들을 뜯어낼 때 같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수많은 반대로 가까스로 살아남았었다. 당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이 장편의 글을 써서 반대 여론을 불렀다고 하는데 일본인이 파괴하려는 문화재를 일본이 지켜주었다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6.25때 폭격에 맞아서 대부분이 파괴 된 것을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모진 시련을 겪은 광화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알 수 없는 측은함 마저 느껴졌다.광화문을 지나 경복궁내에 들어서는 순간...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광화문 아치의 천장에 가려졌던 하늘이 드러나면서 왼쪽으로는 인왕산이 정면으로는 백악과 응봉이 경복궁을 병풍처럼 둘러 서 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이곳이 명당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답사를 하게 된 날이 하늘이 맑아서 더욱 뛰어난 경관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도 경복궁을 와 봤을터인데 지금 느낀 이러한 감흥을 그때는 느끼지 못한 걸 보면 역시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매표소에서 표를 구매한 후 흥례문을 지나 경복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근정전을 보기 위해 힘찬 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하였던가. 마침 근정전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중일 때였다. 근정전의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근정전의 넓은 뜰에 서서 주의를 둘러보며 옛 왕들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근정전 뒤로 가면 사정전, 강령전, 교태전 등이 나온다. 사정전은 임금님의 집무실인 편전으로 어전회의가 열리던 곳이었다. 강령천은 임금님 침전, 교태전은 중궁전으로 중전마마 침전이다. 교태전에는 다른 건물과 달리 용마루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설명이 있는데 교태전은 왕과 왕비가 동침을 하여 대를 이을 왕을 생산하는 곳이다. 왕은 용을 상징하는데 용을 다른 용이 내려 누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경회루의 연못을 파고 남은 흙을 쌓아 만든 나지막한 언덕인 아미산이 자리를 하고 있다. 아미산은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백두대간에서 한북정맥으로 갈라지고 또 백악 자락으로 갈라진 줄기의 끝부분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새싹이 피어나는 가지의 끝으로서의 아미산이라면 이 나라의 대를 이을 왕자가 만들어질 교태전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아마산은 어찌 보면 조그마한 언덕에 불과 할 수도 있으나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결코 쉽게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교태전 옆으로 들어서면 그 유명한 경회루가 나왔다. 경복궁의 모든 관람객들이 다 이곳 경회루로 왔구나 싶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정말 언제나 봐도 아름답고 훌륭한 선조들의 유산이었다. 많은 외국 관광객들도 아름다움에 매료된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일제시대의 궁궐말살 때 이 경회루가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연못은 원래는 작았다고 하나 태종이 현재의 규모로 확장시켰다 한다. 당시의 편액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하는데 지금 걸려있는 편액은 누구의 글씨인지 사뭇 궁금해졌었다. 다리가 있는데 원래 북쪽에 놓인 것이 6.25 이후 복원시 남으로 옮겼단다. 그리고 그 조금 북동쪽으로 가면 명성황후 시해지가 나온다. 한 나라의 왕이 머무는 궁궐에서 그것도 외국인에 의해 자행된 만행에 당해야만 했던 비운에 가슴 아플 다름이었다.근정전 뒤로 커다란 건물이 하나 우뚝 솟아 있는데 바로 국립 민속 박물관이다. 솔직히 처음에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는데 아마 그 전에 읽었던 책들에서 그 건물의 특이한 생김새를 달갑지 않게 봤던 글들을 읽어서 더욱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광복 이후에 정부가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하러 세운 건물인데 법주사 팔상전, 불국사 계단 등을 조합해서 만든 건물이라고 한다. 솔직히 경복궁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형상이 아닌가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인문/어학| 2003.09.18| 4페이지| 1,500원| 조회(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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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종묘 답사기 평가B괜찮아요
    종묘 답사기1. 종묘에 대해.서울의 어느 곳을 답사할지를 고민하던 중 세계문화유산으로 저정된 우리의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문화 유적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번잡한 종로3가 한 켠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 곳 바로 종묘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사당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무심히 종묘사직이라는 말을 많이 하거나 듣게 된다.우리 나라는 농업을 국가의 근본으로 하였고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그 결과 종묘와 사직, 즉 종사(宗社) 는 곧 국가의 기틀을 지칭하였으며, 국가의 흥망은 종묘사직의 존망 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의 존재는 정치이념상 국가 기틀의 완성과 왕조의 뿌리를 상징한다. 여기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대제(宗廟大祭)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국가적인 행사였다. 역대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왕조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의 으뜸가는 행사이자 통치 질서의 기본이었다. 종묘는 중국에서 비롯된 제도로 왕조 시대의 정신 세계를 지배한 예제(禮制)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역대 왕조는 종묘를 가장 중요한 제사 대상으로 삼았고 그 시설물에도 궁궐에 버금가는 정성을 쏟았다.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뒤 경복궁과 동시에 세운 곳이 종묘였다. 그 만큼 새왕조에게 있어 종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종묘는 궁궐의 동쪽에 지어야 한다는 중국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세웠다. 종묘제도는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건축내용에서는 우리 나라와 중국이 다르다. 중국의 건물은 옆으로 길게 늘어진 건축물도 아니고 단아하고 질박하지도 않다. 구성이 복잡하고 장식이 번잡하고 화려하다. 반면에 우리 나라 종묘는 고도로 절제되고 생략된 기법으로 일관되어 있다.그러나 종묘는 우리 현실에 맞게 수용되면서 한국 고유의 특성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단순한 구조의 재실을 길게 연결해 장엄한 엄숙미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는 군더더기 장식을 일체 곁들이지 않은 최소한의 공간 구성으로 제사 공간이 갖는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제격이었다. 유네스코는 95년에 종묘가 갖는 이러한 건축의 아름다움과 분위기를 높이 평가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현재 종묘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 정전 묘정 공신당에 83위의 신위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5대향을 지냈고 영녕전은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매년 춘추2회로 제례를 지냈다.2. 종묘의 주요 건물들정전임금의 도리로서 중한 것은 백성을 다스리고 신(神)을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위로는 종묘(宗廟)를 받들어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돕는 것으로, 유교 사회에서는 ‘나라의 큰일은 제사에 있다’고 하였다.종묘 정전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의 규모는 석실(石室) 다섯 칸을 갖춘 대실(大室) 일곱 칸, 좌우 익랑(翼廊) 각 두 칸, 공신당(功臣堂) 다섯 칸, 신문(神門) 세 칸, 동문 세 칸, 서문 한 칸 규모였다. 그후 명종 때 열한 칸으로 증축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 건물은 선조 41년(1608) 정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완공되고 몇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열아홉 칸 규모로 되었다.정전 감실 열아홉 실에는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열아홉 분의 신위와 왕비 서른 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조선시대에는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의 첫달과 섣달에 5회의 제향(祭享)을 올렸으나 현재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한번만 제향을 올리고 있다. 예기(禮記) 제의편(祭儀篇)에는 ‘제사는 자주 지내지 않는 것이나, 잦으면 번독되고 번독되면 공경스럽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영녕전영녕전은 조선 세종 3년(1421)에 정전의 감실이 부족하여 종묘 서쪽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영녕전은 정전인 종묘(宗廟)에 대한 별묘(別廟)로서 조묘라고도 한다. 영녕전은 정전과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고, 현 건물은 선조 41년(1608) 정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1608)하면서 완공되고 그 후 몇 차례 증축한 것이다.영녕전 건물을 보면 정전(正殿)인 가운데 네 칸은 좌우보다 지붕이 크고 높은데, 이 곳에는 용비어천가에도 그 행적을 노래한 태조의 선대(先代) 4조인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과 비(妃)의 신위를 봉안하여 모셨고, 그 좌우 건물 협실(夾室) 각 여섯 칸에는 정전에서 옮겨 온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셨다. 이는 ‘혈통이기는 하나 정통은 아니다’〔體而不正〕라는 예율(禮律)에 근거하고 있다.현재 영녕전에는 의민황태자비(이방자여사)의 신위를 끝으로 모두 서른네 분의 신위를 열여섯 감실에 모시고 있다. 영녕전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종묘 정전과 비슷한데,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는 점이 다르다.부속건물종묘에는 제례 및 기타 의식을 봉행할 때 필요한 부속건물과 시설이 있다. 종묘 정문 밖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꺾여 난 길에 망묘루, 향대청, 공민왕 신당 일곽이 있다. 망묘루란 이름은 제향 때 왕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 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부쳐진 것인데 현재는 종묘 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공민왕 신당은 고려 31대왕인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 때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두 번째 갈림길에 어숙실 일곽이 있다. 어숙실 일대는 왕이 목욕 재계하고 의복을 갖춘 뒤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종묘의 중심인 정전 일곽 주변에는 공신당, 칠사당, 수복방, 전사청, 악공청 등이 위치하고, 영녕전 일곽에는 제기고가 있으며, 담장 밖 서남쪽으로는 악공청이 있다. 수복방은 제사를 담당하는 노비와 관원들이 거처하던 방이었고,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祭需)를 준비하던 곳이다. 악공청에서는 종묘 제례때 악공(樂工)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였다.3. 종묘 답사를 마치며...종묘의 창건은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직후 경복궁과 같은 해에 만들어졌다. 종묘 건설은 궁궐 및 성곽 건설과 함께 조선 건국 초기에 시행된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태조는 1394년 10월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을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화를 면하지 못하고 모두 소실되게 되었으며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었다. 이 곳을 불지른 일본군 장수가 원인 모르게 사망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종묘를 불지르고 무사하길 원치 않던 우리 선조들의 뜻도 함께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종묘는 임란 이후 궁궐보다 먼저 복구된 곳이다. 얼마만큼 선조들이 이곳을 중히 여기고 숭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임금님들이 승하하실 때마다 자연스레 종묘에 모실 신위수는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곳의 정전과 영령전은 계속 길어지며 현재의 모습으로 된 특이한 건물이 되게 된 것이다. 수백년의 시차가 있는 신실들이 한 건물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신비스럽게까지 보인다.
    인문/어학| 2003.09.18| 4페이지| 2,000원| 조회(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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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대공황 전후 유럽의 경제에 대해 평가A좋아요
    대공황이란 1920년대부터 30년대까지 북아메리카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 산업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지속된 경기침체 현상을 말한다. 나는 그 동안 막연히 대공황은 막을 수 없었던 불가피 한 일로 천재와도 같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은 계속된 경제 정책의 실패와 국제 사회간의 협력과 신뢰의 결여가 만들어낸 비극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 비극 같은 일은 올바른 선택이 있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그 당시의 세계 여러 나라들은 금본위제에 집착함으로 그들 스스로가 보다 효과적인 경제 정책들을 시행할 수가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로 인해 경제에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가져오게 되었고 경기침체는 가속화되었다. 국제적인 협력의 부재 역시 문제였다. 협력의 결여는 결국 모든 나라들에게 긴축정책을 실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계경제에 디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키게 계기가 되었다.대공황은 이미 그 시작에 앞서 많은 징조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각 나라의 은행들이 공황에 빠지고 파산했다. 이러한 은행파산은 은행기관이 금본위제 규율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차례로 금본위제를 포기하였다. 금본위제 포기로 그 동안 경제정책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풀어버린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국제 협력으로 이어지게 되지는 않았다.금본위제의 해체와 국제적인 통화협력의 단절은 세계를 여러 개의 적대적 경제 블럭으로 나뉘어 지게 하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정치적인 의견차이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앞세움으로 서로가 협력하지 못하고 경쟁적인 관계로만 치닫게 되었다. 높은 무역장벽을 설치하고 외환통제를 실시하였다. 또 통화를 평가 절하해 각국간의 무역과 경제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대공황으로 발생한 엄청난 실업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고 그 개인들에게는 많은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다. 실업이 증폭됨에 따라 심리적인 공황도 확산되어 갔다. 대공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실업은 여러 해 동안 끈질기게 높은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계속된 수요의 침체상태는 생산과 고용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실업은 사회의 불안을 야기 시키게 되었고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정치적인 붕괴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독일과 이탈리아는 경제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군비 증강을 꾀하고 있었고 전체경제 회복보다는 군사활동 및 지원활동으로 자원을 옮겨가고 있었다. 중공업 생산에 큰 비중을 두었고 그 결과 강철생산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군비 증강은 정부지출을 크게 늘렸는데 군사장비의 대량 주문으로 과잉설비를 흡수할 수 있을 만큼 공산품 수요가 충분해졌다. 공업생산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고 실업은 대공황 발생 이전 수준으로 하락하게 되었다.세계 여러 나라들은 각 산업들에 대한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농산물 시장은 생산성은 증가하였지만 수요가 감소함에 따라 가격하락이 일어나게 되었고 농업부문의 일자리 감소가 나타났다. 그에 반해 새로운 사업들이 급격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자동차를 비롯한 레이온, 가전제품, 라디오 및 전기기계 등의 제품관련 산업들의 급격한 성장이 전통 산업의 문제들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게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경영/경제| 2003.09.18| 3페이지| 1,000원| 조회(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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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2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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