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 論신자유주의는 우리 시대의 정치ㆍ경제를 정의해주는 패러다임이다. 정확하게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이익집단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분야에서 사회를 지배하도록 허용한 정책과 조치를 가리킨다. 레이건과 대처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지난 20년 동안 핵심 정치 세력이 채택해왔고 우익뿐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좌익까지 동참하면서 전세계를 지배해온 정치ㆍ경제의 흐름이었다. 핵심 정치세력과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은 상상을 초월한 거액 투자자와 1천 개가 못 되는 거대기업의 즉각적인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를 반대하는 세력을 억누르면서, 단순한 경제 시스템을 넘어 정치와 문화까지 지배하는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능동적인 사회운동을 인종차별과 민족주의에 근간한 것이라 비난한다.이번 논고에서는 우리시대의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개념과 등장배경에 대해 살펴보고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本 論1. 신자유주의의 개념과 등장배경신자유주의의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으로 1970년대부터 케인스 이론을 도입한 수정자본주의의 실패를 지적하고 경제적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다. 1970년대 초에 초정부론과 초국가론이 등장하였고 이어 상호의존론이 등장하였으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국제정치상황은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을 설득력있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신현실주의 이론이 등장하였다.그러나 현실주의 혹은 신현실주의 이론의 분석과는 달리 1980년대의 국제정세는 1950년대의 냉전시대로의 복귀나 나아가 1930년대와 같은 국제체제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고 국가 간의 협력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또한 1990년대 중반부터의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 즉 소련의 개혁시도와 동구의 급격한 변화는 국가들 간의 상호의존을 강조하게 하였으며 미ㆍ소간에 중요 군축문제의 합의로 협력관계가협력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나 국가가 유일한 통합된 합리적 행위자이며 무정부 상태가 국가행동의 동인(動因)이라는 현실주의의 가정을 따른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에 있어서 권력과 국제제도가 국가행동의 중요한 결정요인이다.둘째, 신자유주의 이론은 신기능주의와 같은 과거의 자유주의적 제도주의 이론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이상주의적이었다는 약점을 보완하고 현실주의적 패권안정이론의 약점을 보완했다는 점이다. 즉 이 두 이론을 통합한 것이 신자유주의적 제도주의 이론이다.셋째, 신자유주의는 국가 간의 협력을 가져다주는 조건을 발견해 내는데 있어서 과거의 자유주의 이론들과는 달리 협력과 같은 용어를 좀 더 엄격하게 개념화하고 있으며 또한 좀 더 과학적인 엄격한 테크닉으로써 분석하고 있다.3. 현실주의와의 비교신자유주의는 국가 간의 협력이 이기적인 국가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이러한 협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국제기구와 같은 국제제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제정치에서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가 각 국가의 협력행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국가 간의 협력과 불화는 제도적 변수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고 본다.현실주의는 국가 간의 협력을 힘들게 하는 두 개의 주된 장애요인으로서 타국의 배신(cheating)에 대한 우려와 상대적인 이득의 성취에 대한 우려를 지적한다. 신자유주의도 배신을 국가 간의 협력에 대한 가장 커다란 장애라고 생각하지만 국제제도가 공동행위에 대한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도록 도와준다고 본다.현실주의가 국가들이 상대적인 이익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이익이 있어도 협력이 일어나기 힘들다는 논리를 전개하는데 반해 신자유주의는 국가들이란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며 다른 국가들이 얻는 이익에는 무관심하다고 본다. 즉 국가들은 절대적인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보며 상대적인 이익이 협력을 방해한다는 것을 부정한다.4. 신자유주의의 확장무한경쟁의 시장경쟁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사상은 정치ㆍ경제ㆍ문화의 모든 면중간층이 루아얄을 지지하는 지지계층의 양분화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본디 공산당을 지지하던 서민층이 극우파 지지자로 돌아선 결과이다. 그러나 사르코지가 상ㆍ하층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앞으로 서민층은 외국인 배척 감정의 확대 속에서 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사르코지는 상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펼칠 것이다.프랑스의 전후세대 우파를 대표하게 된 사르코지, 그는 미국 주도 정책에 체계적으로 줄서는 유럽 우파의 보편적 경향을 따를 것이다. 사회ㆍ경제 정책에서는 금융자본 등이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펴면서 미국식 차별 제도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는 뉴라이트 운동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지금부터는 뉴라이트 운동의 성격과 목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며 앞의 사르코지 당선과 뉴라이트 운동에 대한 비판은 뒤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뉴라이트 운동은 그동안 ‘말 없는 다수’로 머물러 있었던 국민들 사이에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확산시켜,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가로막는 정권의 좌편향 개혁과 인기영합주의를 배격하고, 기존 우파의 자성과 혁신을 추동하여,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이끌 새로운 사회적 토양과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출발한 운동이다.뉴라이트 운동은 자유민주주의의 성숙은 정치선진화의 선결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주체들이 먼저 헌법을 존중하고, 법치주의의 원칙과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제 아래 권력분립의 정신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돼는 정치 시스템을 추구한다.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는 포용만이 상쟁(相爭)이 아닌 상생(相生)의 정치를 가능케 하며, 민의를 중시하되, 포퓰리즘의 유혹을 물리쳐야 민주주의는 성숙한다고 믿는다. 뉴라이트 운동은 국정원, 검찰, 국세청 등 국가 공권력의 정치 예속 및 사유화를 반대하며, 이를 위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견제의 노력을 지지한다. 특히 뉴라이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요시한다.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 높은 도덕성과 책임하나라 할 수 있다. 기업제일주의, 경제성장 우선 정책은 분배의 원칙을 무시한 채 서민층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조하고 사회복지 분야의 축소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뉴라이트가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혹은 신보수주의는 그 내면에 커다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보수주의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면 국가(공동체)의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자유방임주의가 된다. 자유방임주의는 일견 개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자유방임이라는 말은 곧 무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무한한 방종이 허용되는 무책임한 체제에서 약육강식의 논리 외에 과연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될 수 있겠는가? 자유방임주의가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천부인권과 자기책임하의 자유를 전제로 하는 보수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 뉴라이트의 주장이 내 주장이라는 말에서 뉴라이트의 정체성이 들어난다. 뉴라이트가 바라는 신자유주의는 그 장점인 최소투자에 의한 최대이윤의 추구, 그에 따른 효율성의 증대, 성취욕의 자극을 통한 국부 창출이 아니라 과거 군부독재 시절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인권과 자유,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은 솔직히 관심 밖의 문제인 것이다.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발언을 쏟아내는 뉴라이트 그들이 자유방임주의를 통한 국력의 신장을 주장할 때 대다수 국민들은 배고픔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들이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아니 완전한 포기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올바른 길일 것이다. 현 정권을 극단적 좌파로 분리하고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피아를 구분하며 대중선동을 통하여 극우파적 수구적 정권을 성립시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대한민국의 진보는 요원한 길일 것이다.2)동은 시장주의를 지향하여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 역동적인 시장’의 원칙을 추구한다. 국민 개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자유 경쟁이 만들어내는 높은 효율성과 역동성을 신뢰하며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이 훨씬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사회를 진보시키고, 성장을 지속할 때만 진정한 분배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사유재산권과 기업 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각종 제도 및 규제가 과감히 혁파되어야 우리 경제의 활력이 되살아날 것이며 노사관계에 있어 노사 자율주의를 지지하고, 법과 원칙이 엄정하게 지켜지는 노동정책을 옹호한다. 세계적인 경제통합 가속화에 한국의 성장기회가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지속적인 시장개방을 통한 경쟁력 향상과 구조조정을 적극 지지한다.뉴라이트 운동은 정부 경제정책운용의 방향이 한편으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론 기업은 물론, 근로자, 자영업자, 소상인, 주부 등 모든 경제 주체에게 경제 의욕을 불어넣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② 비판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자유무역협정’이라고 하지만, 이 말에는 함정이 있다. 그 자유는 강요된 자유이니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 협정에는 또 무역만이 아니라 투자, 방송, 문화, 법제, 정부 역할 등 경제를 넘어선 영역에서, 한국을 미국화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국민 중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글로벌 경제에 직접 간접으로 연결돼 있는 사람은 이익을 보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은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농업이다. 농업은 이제 고려장의 장지로 향할 지개에 올랐다. 당국자들은 농민에게 피해보상을 한다고 하지만, 지개 위에 올라 있는 노인에겐 피해보상이 쉽지 않다. 피해가 얼마이며, 보상은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납득할 만한 계산을 할 방법은 없다.? 경제만을 본다고 하더라도 자유무역협정의 문제는 많다. 그것은 내수산업의 쇠퇴를 통해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며,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인적 물적 인프라를 마련할 책임을 진 정이다.
비스마르크의 대외정책Ⅰ.序 論1871년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행한 독일제국의 선포는 유럽사의 새장을 열었다. 19세기 전반, 독일이 아직 약하고 분열되어 있는 동안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가 대륙에서의 주된 세력들이었다. 디즈렐리가 ‘독일혁명’이라고 부른 보불전쟁 이후 이 세력 관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1870년대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전국으로서 세력균형의 극적인 변화에 그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맞추어 가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와 같이 중앙아시아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영국은 고립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들이 독일이 유럽에서의 지배적인 국가로 성장하는 것을 도와주었다.비스마르크가 독일외교 정책을 근 20년간이나 독점했기 때문에, 독일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국제 관계를 단순히 힘의 행사로 보는 그의 비교적 좁은 관점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독일의 ‘민족적 영웅’은 이 민족주의 시대에 있어서, 러시아의 가혹한 지배하에서 고통을 겪는 발틱해 연안의 독일인들의 호소를 무시했으며 또한 대독일을 만들자는 선전에도 단호하게 반대했다. 로마노프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민족 국가들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고려 내부의 고정된 점들이었으며, 이 시대 착오적 국가들은 독일의 이익을 위해서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민족주의적 밀렵꾼이 제국주의적인 사냥터지기로 변신한 것이다. 그의 목적은 이제 단순히 1866년과 1870년의 승리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1871년 독일의 통일을 달성한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럽 대륙에서의 평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유럽 국제 질서의 현상 유지와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을 그의 외교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그는 유럽에 중대한 분쟁이 발생하여 독일이 이에 휘말려들거나 독일이 새로운 마찰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극력 피하고자 했으며,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유럽에 분쟁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여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헝가리는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 러시아는 독일을 견제하는 것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5월에 영국과 러시아 대사는 베를린에서 독일의 전쟁기도를 경고하는 공동 외교조치를 취했다. 쯔아와 그의 수상인 고르챠코프공은 이 경고를 보강하기 위해서 베를린을 방문했다. 비스마르크는 그의 방문객들에게 예방전쟁의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만족하여 귀국하였다.그리하여 전쟁임박 위기는 독일의 패배와 프랑스의 외교적 승리로 끝났다. 실제에 있어서 영국과 러시아는 유럽의 신질서에 아주 만족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을 공격하다고 할지라도 프랑스를 돕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두 강대국이 독일의 프랑스 정복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 위기를 통해서 명백해 졌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사태의 역전에 노여워했다. 그는 이 외교전(外交戰)에서 패배한 것을 참을 수 없었고, 따라서 이에 관여한 고르챠코프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수상에 대한 적의(敵意)가 그의 러시아에 대한 태도에 아마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위기는 양면전쟁의 진정한 위험을 뼈아프게 느끼게 하였으며, 따라서 비스마르크로 하여금 미래에 있어 매우 조심성있게 처신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도록 하였다. 위기로 인하여 3제 협약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1877~1878년의 극동지역의 위기로 인해 그것은 완전히 깨어졌다. 오토만 제국내의 기독교인들은 19세기 후반기에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발칸지역에 깊히 관여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그의 제국에 미칠 민족주의의 충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러시아는 경제적?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보스포러스 해협 때문이었다. 두 나라는 처음에는 3제협약내에서 상호간의 경쟁관계를 자제했다. 그래서 1875년에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술탄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쉽게 협력할 수 있었다. 때문에 택했다고 그가 생각하는 정책의 중대한 위협성을 엄숙하게 경고하였다.아마도 비스마르크는 상황이 마침내 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여하튼 쯔아의 협박적인 편지가 도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가시타인 온천장으로 가고 있었고, 그 것에서 그는 안드라시와 만나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공식적인 동맹을 논의하였다. 처음에 비스마르크는 양국의 의회가 비준해야 하는 것이지만, 공격에 대비한 전반적인 동맹의 야심적인 제안을 내 놓았다. 그러나 안드라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독일과 프랑스사이의 분쟁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혹은 프랑스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양보했다. 1879년 10월에 2국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그것은 바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로 하여금 러시아의 침략에 저항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방위동맹이었다. 전쟁을 할 때에는, 러시아가 개입하지 않는 한 상대편 국가는 중립을 지켜야 했다. 실제에 있어서 러시아가 공격할 때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원조하게 되어 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프랑스에 대항해서 독일을 도와주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었다.그의 회고록 속에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1866년이래 가슴속에 품어온 대 계획의 달성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가 1879년 이전에 이러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진실은 오히려 그가 그 자신이 주로 만들어 낸 위기상황을 넘기기 위해서, 다시 한번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러시아에 경고함으로써 발칸지방에서의 세력균형을 불안정하나마 유지하도록 하는 임시적인 방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스마르크가 양 국가 중에서 한 국가를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세 나라 사이의 동맹이 독일을 구원하는 길이라는 그의 신념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협상과정 중에 실제로 그는 러시아도 이 동맹에 끌어들이자고 안드라시에게 제안을 했은 민족주의적인 불가리아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독립 노선을 추구하고 나섰다. 1885년 9월 알렉산더는 그의 사촌인 러시아의 쯔아와 상의하지도 않고 동루멜리아와 불가리아의 합병을 기도했다. 러시아는 이 일방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원상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11월에 세르비아는 알렉산더공의 야심이 커지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불가리아를 공격했다. 불가리아 군대는 슬리브니짜에서, 세르비아인들을 신속히 격파하고 세르비아에의 침입을 준비했다. 이 당시 비스마르크에 의해 짜여진 국제 관계에는 강대국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사소한 국지전이라 할지라고 쉽게 큰 전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만약 불가리아가 국경을 넘기만 한다면 대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군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단호히 경고했다. 이 경고가 불가리아의 공격을 중단시키기는 했으나 그것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극도로, 긴장시켰다. 비스마르크는 두 국가와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를 바랐으므로 오스트리아에게 독일이 이 문제 때문에 러시아와 싸울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해야 했다. 결국 세르비아는 영토의 손실없이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개인적 통합이라는 명목하에 동루멜리아와 불가리아의 통합에 합의했다.그러나 이것으로 불가리아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1886년 8월에 알렉산더공이 친(親)러시아계 장교들에 의해 납치되었고, 그후 쯔아는 그의 퇴위를 명령하였다. 알렉산더는 그에 따라 퇴위하고 은퇴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알렉산더가 발칸반도를 교란시켰다고 하여 끝내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알렉산더와 프리드리히 황제의 딸인 빅토리아 공주와의 결혼제의에 매우 심하게 반대했다. 알렉산더를 내몬 후에 러시아는 불가리아의 총독으로 한 장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농민 출신의 수상인 스탐블로프의 지도하에 러시아의 명령에 저항하였다. 11월에 쯔아는 불가리아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고, 러시아가 체면을 살리기 위해 불가리아에 최초의 식민지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전에 독일이 식민지를 얻는 것은 어리석은 폴란드귀족이 셔츠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비단이나 털가죽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 적이 있듯이 식민주의에 반대해 왔다. 그러나 1880년대에 와서 사정이 바뀌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하게 됨으로써 식민주의가 유행을 일으키게 되었다. 모든 나라에서 열광적인 압력단체들이 생겨나서 경제적인 이유와 국가의 위대성의 표시로서 식민지를 요구하였다. 독일에서는 1882년에 실업가들의 지원을 받아 식민협회(Kolonialverein)가 창설되었고, 이 단체는 여론을 해외팽창 쪽으로 이끌어갔다. 이미 국가에서도, 자유무역으로부터 보호무역으로의 전환의 필연적 결과로써 해외무역에 광범한 간섭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비스마르크의 정책변화에 있어 한 역할을 했다. 그외에 정치적 고려들도 아마 마찬가지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식민주의는 1884년 선거에서 급진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물리치는 편리한 도구였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 반(反)영국적 감정을 고취시킴으로써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 황태자의 친영국적인 조언자들은 불신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 늙은 황제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정책전환이 어렵게 되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정부는 토착민 추장으로부터 토지를 얻어내려는 독일상인들을 지원했다. 1884년에서 1885년 사이에 독일은 서남아프리카, 토코랜드, 카메룬, 독일령 동아프리카와 태평양상의 여러 섬을 얻었다. 비스마르크는 새로운 식민지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독일 상인들을 고무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 그의 생애 동안에는 결코 군사기지가 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식민지 경영에 드는 모든 행정 비용은 국가가 아니라 특권회사들이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서 그는 독일이 해외에서 대식민지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프리카 지도는 유럽에 있다. 이것에 프랑스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타나는 정치사상目次Ⅰ. 序論Ⅱ. 시대적 상황과 마키아벨리의 생애1. 시대적 상황2. 마키아벨리의 생애Ⅲ. 마키아벨리의 국가철학 - 현실주의 정치사상1. 마키아벨리가 본 인간의 본성1) 부정적 인간관2) 이중적 인간관2.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정치사상1) 정치영역의 자율성과 독자성: 서양 근대 정치시상의 시작2) 마키아벨리의 정치기술Ⅳ. 공화주의자ㆍ법치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1.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2. 법치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Ⅴ.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1. 이중적인 상황의 가정2. 평가3. 국가권력의 문제와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즘의 현대적 의의Ⅵ.結論? 參考文獻Ⅰ. 序 論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태도를 일컫는다. 그리고,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특히, 정치인)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부른다. 그외에도 “권모술수의 화신” 등 마키아벨리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의 저작을 살펴보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그리 단순하고 속류적인 것이 아니며, 다름의 체계와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이론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과 “통상적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물론 전자를 다루려고 한다. 일상적으로 잘못 인식되어 있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실제로 어떠한 것이었으며, 이는 “법치국가 사상”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한다.본문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마키아벨리가 골방에 틀어박혀 책을 써낸 이론가라기보다는 현실정치 속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실천가라는 점을 감안하여,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우리는 이를 통해 마키아벨리가 왜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을 펼쳤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다음으로는 그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부정적 인간관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일종의 神政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러한 神政을 통해 모든 시민이 기독교 신자다운 생활의 재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철저하게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혁을 꿈꾸었던 것이다. 또한 사보나롤라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중요시했고, 실제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로마교황청과의 불화, 피렌체 내부의 반대파 등장,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파탄나게 된다. 결국, 1498년 사보나롤라는 화형대에 오르게 되고, 시민들은 죽은 시체에 돌을 던진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하나는 훌륭한 도덕심(도덕적 이데올로기)과 정신력만으로는 강력한 국가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또 한가지는 민중의 지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민중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하던 바로 그날,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로 드디어 공직(제2정무처장)에 오르게 된다. 이때는 프로렌스공화국의 소델리니 정권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마키아벨리의 임무는 주로 외교분야였다. 그는 중요한 외교임무를 띠고 동분서주했다. 그는 주로 외국에 나가 활동하면서 상세하고 정확한 현지보고서를 많이 제출하는 등 성실하게 일했다. 그는 적은 봉급에 오랜 외국생활로 가난과 싸우면서,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 이때 외교사절로서 겪은 수많은 경험들은 나중에 “군주론” 등의 저작을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1512년에는 새로운 시련이 시작되었다. 스페인군이 이탈리아에 진격하여, 피린체를 정복한 것이다. 그리고 피렌체에는 소데리니가 축출되고, 18년만에 다시 메디치 가문의 왕정이 복원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되고, 설상가상으로 1513년 2월에는 메디치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기에 이른다. 1513년에 특사로 석방되자,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로 하여금 자신이 쓸만한 인물이며, 그냥 놔두기에는 아까운 전문가라는 점을 명확별적으로 지켜야하는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마키아벨리 인간관의 실천적 결론은 인간의 보편적 욕망과 본성이 공동선을 지향하도록 “법과 제도의 확립”이라는 조건을 마련하고, 이 속에서 인간의 “제2의 본성”, 즉 “공동체 전체의 복지와 선의 유지를 위한 공동적 삶의 영위라는 후천적 본성”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기에 마키아벨리는 확고부동한 민족국가를 건설함으로서, 바람직한 인간본성(제2의 본성)이 구현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도 이러한 목적 하에서, 시급히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2.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정치사상1) 정치영역의 자율성과 독자성: 서양 근대 정치시상의 시작① 도덕·종교·윤리와 정치의 분리마키아벨리를 서양근대정치사상의 시조라고 보는 이유는 그가 정치영역을 윤리, 도덕,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해 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에게 던져진 핵심적인 문제는 “정치와 도덕의 관계”였으며,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정치의 탈도덕화”로 대답하였다.그리스 사상가나 중세의 정치사상가들은 정치를 윤리, 도덕, 종교의 하부구조로 보았으며, 그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영역에서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를 구현하려고 했으며, 정치현상을 이러한 원리에 따라 규율하고자 했다. 그들은 도덕과 정치가 일치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정치는 어디까지나 도덕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플라톤의 경우 정치권력은 선의 이데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 정당성 역시 철학적 지식에서 나온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란 언제나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 “예외적인 통치방법”을 비판하였다. 키케로는 “도덕적인 것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도덕과 이익이 근본적으로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절절함은 도덕적 올바름에 필수적이고, 따라서 관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 모든 비행익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유덕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즉, 마키아벨리는 대부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국가공동체와 인민은 사적인 개인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치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었다.그리고 되도록 정치행위자는 통상의 윤리를 좇아서 행동하라고 주문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독자적인 정치적 윤리 보다는 통상적 윤리가 우월하고, 우선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사악함 그자체로는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영광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가 언제나 윤리적인 도덕과 상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안정되고 확고한 상황에서 운영된다면 정부는 연민, 신뢰, 정직함, 인륜, 그리고 종교와 같은 기존의 덕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공적인 도덕과 사적인 도덕이 일치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2) 마키아벨리의 정치기술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나감으로서, 정치적 공동체의 확고부동한 토대, 즉 국가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치기술” 또는 “통치술”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악명 높은 마키아벨리즘의 유래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는 정치를 기독교 윤리의 틀 속에서만 고려하던 중세적 한계를 벗어나, 군주의 세속적 행위기준을 제시하고 독립적 주권을 옹호함으로써 독립국가를 보존하고자 했다. 이제 군주는 더 이상 신법이나 자연법과 같은 상위법의 제약 없이 오지 국가의 보존과 유지만을 지상목표로 삼으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군주는 종교와 도덕이 명령하는 당위성에 따르기보다는 항상 본심을 감추고 운명과 상황변화에 따라 적절히 처신해야 한다.ㆍ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군주는, 특히 신생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유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단의 선악여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정리하면, 수단은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며,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단이 되도록 통산의 도덕(善)에 일치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 또한 마키아벨리의 주문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결과주의적인 사고와도 관련이 깊다. 물론, 비상상황에서만 그러하다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군주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다. 국가의 존립에 위기에 처해있다면,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그 과정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외양과 상징 같은 기만술이 정당화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Ⅳ. 공화주의자ㆍ법치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1.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ㆍ군주는 인민으로부터 미움받거나 경멸받는 일은 무엇이든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ㆍ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인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요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인민이 당신을 미워하면 요새가 당신을 구출하지는 못할 것이다.마키아벨리는 근본적으로 공화주의자였으며, “메디치의 군주정”을 지지했던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마키아벨리는 메디치의 복귀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위기의 상황에서의 국가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바람직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메디치가의 복귀를 새로운 역사적 환경의 도래로 이해했고, 그러한 때에 신군주의 신국가 건설에 요구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조국 피렌체가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정치적 안정을 누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일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실제로, 마키아벨리가 메디치의 군주정에 참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결국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공화제가 정치형태상 이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가 분열된 상태에서 통일국가를 형성·유지하는데에는 군주제가 오히려 유문이다.
루터 95개조 반박문의 내용과 의미目次Ⅰ. 면죄부 판매에 대한 루터의 대응1. 1차 대응2. 95개조 반박문 발표 직전의 상황Ⅱ. 95개조 반박문의 발표1. 95개조 반박문의 대략적 구분과 내용2. 95개조 반박문의 주요 내용3. 95개조 반박문의 성격과 의미? 참고문헌 및 사이트Ⅰ. 면죄부 판매에 대한 루터의 대응1. 1차 대응? 작센의 프리드리히 현인공에게 만성절(萬聖節:11월) 전야에 연례적으로 면죄부 를 발매할 특권이 주어짐 → 1516년에 루터는 2차에 걸쳐 그 관행을 비난? 비난의 이유-면죄부란 성자들의 잉여 선행이라는 거짓된 과정에 근거하며 이는 백성을 기만하는 것임? 일차적 동기가 금전적 착취에 대한 분개에 있지 않음을 실증2. 95개조 반박문 발표 직전의 상황? 교황은 알베르트에게 사례금을 제공하면 마인츠 대주교직을 제공하겠다고 제의? 교황은 현금 지불의 대가로 영토 내에서 8년 동안 면죄부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 면죄부 판매 수익금의 절반은 알베르트에게 나머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데 사용하도록 함? 1517년 2월 24일 마태복음 11장 25절)이하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면죄부의 해악에 대하여 설교? 각 도시의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에게 면죄부의 성 격과 효과, 그것이 교회에 미치는 심각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토론할 것을 요청→ 그 누구도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편지에 대한 답장도 없었으며 교수들 은 교황청을 두려워하여 토론에 참석하지 않음Ⅱ. 95개조 반박문의 발표? 반박문의 사본을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흐트에게 보냄면죄부는 영혼의 구원과 성화에 공헌하지 못하고, 다만 교회법에 부과된 일시적인 형벌을 사면할 뿐이다. 그리스도는 어디에도 면죄를 증거하라고 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주교들이 복음보다 면죄를 더 중히 여기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면죄만 뻔뻔스럽게 선포하도록 용납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루터는 로마 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한『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문밖에 게시함? 그는 누구와도 토론을 원했으며 선동이 아닌 토론을 통해 그릇된 관행을 고치 고자 함? 이러한 루터의 항거는 로마 천주교에 대한 선전포고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봉 화를 드는 사건이 됨1. 95개조 반박문의 대략적 구분과 내용? 제01조∼제07조 - 서론? 제08조∼제29조 - 연옥)에 있는 자의 사면 문제? 제30조∼제80조 - 살아있는 자의 사면 문제? 제81조∼제91조 - 평신도로서의 면죄부 반대? 제92조∼제95조 - 판매 동기의 잘못 지적2. 95개조 반박문의 주요 내용? 첫째, 베드로 성당 건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루터는 성도들이 건축하여야 할 것은 일차적으로 마음의 성전이요, 그 다음으로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교회당이며, 마지막 순서가 로마의 베드로 성당이라고 생각하였다. 루터는 독일과 로마는 무관하며 독일인이 로마에 가서 예배할 수도 없으므로 로마의 성당을 위해 헌금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하였다. 오늘날 최고의 부자인 크라수스보다도 부자인 교황은 가난한 신자의 돈이 아닌 자신의 돈으로 성 베드로 사원을 지어야 한다 (제86조)고 주장하면서 독일 교회가 이 일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둘째, 교황의 내세권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교황이 내세 문제에 대하여 간여할 권세가 없고, 죄의 면책권도 없음을 내세웠다. 내세권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도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므로 교황에게 사죄권과 연옥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하는 로마 천주교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며 교황은 그 직권으로 교회의 권위를 이용해서 징계나 그 어떤 벌도 용서할 권세를 갖지 못한다.(제5조) 죽음을 맞이하는 자에게 연옥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의 속죄를 응용하는 제사들의 행위는 아주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위인 것이다.(제10조) 라고 하였다.? 셋째, 면죄부 제도의 해악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므로 죄를 용서받을 것을 교훈 하셨지만, 교황청에서 발부하는 면죄부는 회개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며, 거짓 확신을 준다고 하였다. 그는 면죄 설교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고 하셨을 때(마 4:17) 이는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하는 생활이 되어야함을 말씀하신 것 이라고 하였다.(제1조) 교황도 죄의 영향아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형벌을 사면하거나 사면하도록 기원할 수 없으므로 면죄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도 위배되고 이론상으로도 그릇된 것임을 강조하면서 꾸고자 하는 자에게 꾸어주고, 필요한 자에게 빌려주는 것이 면죄를 사는 것보다 선한 일 (제43조)이라고 주장하였다.3. 95개조 반박문의 성격과 의미1) 성격? 루터는 논쟁적인 어투로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참 회개를 중요하게 지적하고 있다.? 루터를 첫 종교개혁가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로마 카톨릭적인 요소를 갖고 있 음을 보여주고 있다.
立憲運動과 革命運動目 次Ⅰ. 머리말Ⅱ. 淸의 개혁(新政)(1)관제의 개혁(2)新軍의 조직과 훈련(3)産業의 진흥과 장려(4)재정의 확충(5)과거제의 폐지와 학당의 설립Ⅲ. 帝國主義의 침략 확대(1)러시아의 동북 진출과 拒俄運動(2)拒法(프)運動과 反美運動Ⅳ. 立憲運動의 전개(1)國外에서의 立憲運動(2)國內에서의 立憲運動(3)淸의 立憲推進Ⅴ. 保皇運動의 전개(1)保皇運動(2)唐才常과 自立軍Ⅵ. 革命運動의 전개(1)孫文의 革命運動과 興中會①손문과 흥중회②홍콩흥중회와 광주봉기③혜주봉기(2)留日學生革命運動의 성장(3)中國同盟會의 성립Ⅶ. 立憲派와 革命派(1)立憲派와 革命派의 초기관계(2)立憲派와 革命派의 대립(논쟁)①민족혁명문제②정치혁명문제③토지국유, 사회혁명문제④혁명과 내란간섭문제⑤논쟁의 의의Ⅷ. 맺음말Ⅰ. 머리말입헌운동(入憲運動)은 청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서구식 정치제도인 의회제(議會制)나 헌법(憲法)의 도입을 정치적 목표로 한 개혁운동(改革運動)이다.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적인 중국영토 분할점령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촉발되어 부강(富强)을 목표로 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다. 이러한 입헌운동은 변법운동(變法運動)의 실패 후 신축신정(辛丑新政)과 러일전쟁이 던져 준 충격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위기에 처한‘중국의 부흥’이라는 데는 같은 맥락이지만 그 방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에 초기에는 연합을 위한 움직임도 있었으나 종국적으로 갈수록 대립경향이 심화되었다.이들의 대립은 동맹회(同盟會)와 보황회(保皇會)의 기관지인 민보(民報)와 신민총보(新民總報)간의 논쟁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양자의 논쟁은 이들의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볼때 혁명운동의 사상적 기반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여기서는 입헌운동과 혁명운동의 각각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들 두 파간의 논쟁을 통해 청말 위기의 중국을 재건하기 위한 양대 운동의 관계와 성격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淸의 개혁(新政)(1)관제의 개혁청정은 신정의 하나로서 관제의 개혁에 착수하였다)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규모가 그렇게 크지 못하였으나 상공업을 경시하는 사회적 풍토를 서서히 깨뜨리게 되었다.이밖에도 1903년 4월에 북경에다 은전주조총창(銀錢鑄造總廠)을 설립하고, 신전(新錢)을 사용하려면 은행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여 1905년에 호부은행(戶部銀行)을 설립하고(중국 최초의 은행은 성선회의 건의로 1897년에 중국통상은행을 상해에 설립). 1908년 12월에 우전부 교통은행을 설립하였으며, 1908년 2월에 「대청은행칙례(大?銀行則例)」를 반포하여 호부은행을 대청은행으로 바꾸어 국책은행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보통은행, 저축은행, 식산은행의 칙례를 제정하여 민간은행이 등장하게 되었다.1902년부터 1911년 사이에 중국 스스로가 설립한 공장과 광산이 약 330여 개로 자금이 7,000여만량(군사공업 제외)으로 19세기 70년대까지의 20년과 비교하면 약 두 배, 자금은 한 배 정도가 증가된 것이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가 최고조에 달하여 자금이 경공업에 집중되어 25%, 다음이 광공업이 18% 차지하고 있었으며, 공장은 대부분 長江하류에 몰려있었고, 직예?산동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과의 경쟁이 되지 못하였다. 이밖에도 국내의 저명한 실업가와 화교 실업가를 우대하여 처음으로 회사를 창립한 장건을 한림원수선(翰林院修選)에, 商部의 일등 고문관인 3품의 자리를 주었으며, 화교 거상인 장진훈에게 고찰상무대신겸 민광농공로노광 독판으로 임명하였다.(4)재정의 확충청정에서는 신정을 추진하면서 군대를 훈련하는 이외에 이에 필요한 군비 조달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당시 청은 태평천국의 진압과 열강에 대한 배상금 등으로 재정 적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유일한 보완 방법은 이금의 징수와 외국으로부터의 차관이었으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세제가 파괴되어 청정에서는 지방정부가 스스로 징수권을 갖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 없어 청정은 해관수입과 지방으로부터 올라오는 세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축조약 과 러시아는 다시 교섭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02년 10월에 동북을 중국에게 돌려주기로 하며, 러시아 군대는 세 차례에 나누어 철수하기로 하고 동삼성에 있어서 러시아인의 사업은 보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기간 안에 철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철도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게 되자 오히려 철도를 수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증파하였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청에게 7개 항목에 달하는 무리한 요구까지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은 다음날로 일본에게 보고되었으며 후에 영?일 양국은 공동으로 러시아에게 경고하였다. 그리고 이 소식은 중국인들에게도 분개를 자아내어 상해의 애국학사는 애국인사를 모아 ‘拒俄大會’를 개최하고 청정의 외무부에게 승인하더라도 우리 국민은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 일본에서 거아의용대가 조직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들도 거아의용대를 조직하기로 하였으며, 곧 군국민교육회(軍國民敎育會)로 이름을 고쳤다. 다른 지역에서도 잇따라 봉기가 일어나 이리하여 거아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의 군중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이 소식은 일본의 유학생들에게도 분개를 자아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의용대를 조직하였고, 유일 여학생으로 조직된 공애회(共愛會)에서도 의용대의 협조문제를 의논하였다. 그 후 의용대를 학생군으로 고쳤는데 참가자는 모두 121명이었으며 5월 6일부터 훈련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거아는 청조를 무너뜨리는데까지 미치지 못하고 대다수가 아직도 청정에 대하여 미련을 갖고 있었다는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2)拒法(프) 運動과 反美運動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광서로 진출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광서 인들은 배상금을 지불하기가 어렵게 되자 1902년 이래 무장으로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를 진압 회유하기가 어려웠던 은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대의 협조를 얻어 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회당의 기의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진정시키게 되면 광서의 철도부설권과 광산채굴권을 프랑스에게 청조가 입헌추진의 의지를 표명하자 입헌으로써 혁명을 저지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이 섰고 따라서 정문사 조직이나 정론(政論), 국풍보(國風報) 발간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운동을 추진해 갔다.양계초는 정문사의 확대 및 국내 거점 마련, 그리고 국내 입헌파와 광범위한 연대의 필요성도 있어 1908년에 상해로 본부를 옮겨 출판을 통한 선전 및 세력확대, 그리고 고관, 기타 입헌단체와의 연대강화에 중점을 두었다.양계초 등 보황파의 입헌 운동은 물론 정문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국내 굴지(屈指)의 입헌 선전기관지 중 , , 등의 보황파와 직 ? 간접의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을 통한 선전활동이 미친 영향도 대단하였다. 그러나 정문사의 국내에서의 급성장이 도리어 정정으로 하여금 우려를 낳게 하여 치안에 해가 된다는 명목 하에 이를 봉쇄하는 조치를 받게 하였다. 1908년 정문사(政聞社)와 정론(政論)의 금지 후에도 양계초는 국풍보(國風報)를 발간하고 3차에 걸친 국회청원운동을 지워하는 등 입헌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만 운동의 주도권은 국내 신사층(紳士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2)國內에서의 立憲運動초기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입헌파 신사층(紳士層)의 장건이 1901년《변법평의(變法評議)》에서 일본의 것을 모방한 지방의회(地方議會) 설치를 주장한 것을 들 수 있다.이들 신사층의 입헌주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운동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 것은 러일전쟁 후 일본의 승리에 자극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04~1905년간에 걸쳐 장건은 장지동, 원세개등 유력 관리에게 입헌을 주장하도록 권유하고 일본의 일헌관계 출판물을 서태후를 포함한 조정의 유력 인사들에게 배부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오대신을 파견 일본과 유럽을 시찰 후 이어 예비입헌의 방침이 1906년 선포되자 입헌파 신사층은 각지에서 입헌을 고취하는 단체를 조직하여 지역별로 활동하는데 장건이 1906년 상해에서 예비입헌공회를 1907년에는 호남에서 헌정공회(憲政公會), 1907년에 귀주의 자록 하였다. 그런데 결국 이 문제는 서태후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自立軍이 거사를 일으켰을 때에도 보황회에서 작용하였으며 미국에서는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근대화된 군대를 훈련시켰다. 1900년에 보황회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지에 체육구락부(體育俱樂部)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실질적으로 보황회의 군사조직이었으며 미국인 군사가인 리(Homer Lea)를 장군으로 초빙하여 보황회의 군대를 훈련시켰다.(2)唐才常과 自立軍당재상(唐才常 1867~1900)은 중국 청(淸)나라의 혁명가로 자는 불진(佛塵). 호남성 류양현 출생이다. 청일전쟁(淸日戰爭)의 패배에 분기하여 고향 친구인 담사동(譚嗣同)과 함께 변법운동(變法運動: 청나라 말기의 개혁운동)에 참가하여 장사에서 시무학당(時務學堂), 남학회(南學會)를 설립하고 변법사상 보급에 진력하였다. 무술정변(戊戌政變)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손문 등 혁명파와 통하고, 양쯔강 유역의 비밀결사와도 연락을 취하며 재기를 획책하였다. 의화단(義和團)이 북방에서 발생하자, 청나라 정부가 그 대응책에 부심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上海에서 국회를 여는 한편, 武漢에서 자립군기의(自立軍起義)라 하는 개량주의와 혁명주의의 성격을 가진 거병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장지동(張之洞)의 군대에 의하여 진압되고 처형되었다.의화단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동남지역의 독무들은 비록 서태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으나 군사관계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강유위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 유신파나 손문을 대표로 하는 혁명파는 의화단에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의화단운동 기간을 이용하여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무술정변(戊戌政變)으로 영국과 일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한 강유위와 양계초는 입헌 보황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의화단이 일어나자 영국의 지지아래 남쪽에 국회를 성립하고자 정부를 조직하여 광서제를 남쪽으로 모셔와 군주입헌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때 호남의 유신파로 이름이 알려진 당재상이 일본으로 오자 그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