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조선의 개항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중심으로 나타난 양국의 서 구세력 수용태도에 대하여....조선과 일본의 개화과정은 개항부터 그 전개까지 거의 흡사하다. 외국함대에 의한 무력시위와 이후에 이어지는 불평등조약, 외세배척세력과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거의 일치한다. 약 20여년의 차이를 가지는 두 나라의 개항은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20여년의 차이는 후에 조선을 식민화할 수 있는 배경이 될 수 있었고, 아시아의 열강으로 서구사회에 당당히 인정받게 되는 근원이 되는 기간이다.조선의 경우에는 북학파를 계승한 대외통상론자들의 활동과 조선후기 성장한 상업 세력들, 서학의 유포에 따른 학문적인 욕구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조선사회에서 이런 세력들이 기존의 이데올로기나 문화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즉, 기존의 유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서구인들을 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서구문물을 접할 때도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지 그것을 실생활에 도입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적었다.반대로 일본은 이미 전국시대부터 포르투갈 등과 교역을 제한적이나마 이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쇄국하에서 유럽의 말이나 지식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쇼군, 로퓨, 나가사키의 통역뿐이었으나, 8대 쇼군 요시무네때 크리스트교와 관계없는 한역양서의 수입을 허락하여, 18세기 양서연구가 활발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어본 해부서가 번역되었으며, 네덜란드어사전도 만들어졌다. 네덜란드어를 통한 서양학문연구를 난학이라 하는데, 이로서 의학, 생물학, 지리학, 병학 등 근대적인 학문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1823년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 의사였던 독일인 시볼트는 사숙을 열어 많은 난학자를 양성하였다.19세기 전반 막부는 쇄국정책을 비난하는 학자들을 탄압하는 한편, 네델란드서적의 번역을 담당하는 관청을 두고, 페리제독의 내항이후에는 외교문서 번역을 위해 양학연구기관 겸 외교문서 번역소를 설치하였다.이처럼 조선과 일본의 서양을 대하는 자세에는 차이가 컸다. 서양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인 주장하는 개화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중심인물은 박규수ㆍ오경석ㆍ유홍기 등이었 다.결국 정부에서는 이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일본과 수교할 것을 결정하고, 신헌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1876년). 이것이 곧 강화도 조약으로, 이로써 조선은 닫혔던 문을 열었다. 전문 12조로 되어 있는 강화도 조약은 조선으로서는 최초로 외국과 맺은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일본의 침략 의도가 담긴 불평등 조약이었다.1882년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 중 최초로 미국과 조ㆍ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미국과 국교를 맺은 조선은 청의 알선에 의하여 영국 및 독일과도 조약을 체결하여 수교를 하였으며, 이어 러시아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 등의 여러 나라와도 조약을 체결하였다.일본의 개항1840년대에 청이 영국에 패배한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이 약해지고 있었다. 1853년 6월,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M.C 페리 제독이 미국대통령의 개국요구친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으며, 이듬해 1월에는 함대의 위력을 배경으로 막부에 개국과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천황조정, 다이묘등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여론은 개국반대의 양이론이 우세하였으나, 페리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막부는 1853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어 시모다. 하코다테의 개항과 미국영사관의 일본설치를 인정했다.1856년에 총영사로 부임한 해리스는 중국정세를 막부에 설명하여, 1858년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일본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 치외법권인정, 최혜국대우인정, 관세자주권의 표기, 4개항(도쿄, 요코하마, 고베 등)의 추가개방이 주요내용이다. 이어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과도 비슷한 내용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개항은 했지만 위 조약들은 막부가 칙허 없이 독단적으로 체결한 것으로 반막부세력이 등장하는 원인이 되었다.2. 조선과 일본의 개혁반대 세력조선의 위정척사 운동조선의 개항은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무력에 의한 것이지만 이미 이전시기부터 개항의 필화 운동의 전개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일본이나 청나라가 침략 정책을 수행하기 이전에 국력을 기르려는 시도를 봉쇄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또한 위정척사 운동은, 부패한 양반 체제와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저항을 탄압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1869년 광양 농민 항쟁을 토벌한 기념비문을 지었던 기정진의 생각이, 그 생생한 보기이다. 기정진은 그 비문에서 농민군을 흉한 도적떼, 망령된 도깨비 등으로 표현한 반면, 농민군을 토벌한 지방 관리의 공적을 칭송했다. 그는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농민층이 개혁의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러한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위정척사 운동은 19세기 후반기 정치와 역사의 거센 파도 속에서 분명한 힘의 근원이 되었다. 대원군이 추진한 강력한 통상 거부 정책과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지주로 작용하였으며,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성과 약탈적 근성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그들과 맞섰던 위정척사 운동의 힘찬 정신은 칭송할만한 것이었다.결국,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 배격에는 충실했으나 낡은 구질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그런 맥락에서 개화 운동이나 농민들의 변혁 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일본의 배외운동 및 반막부운동1859년 본격적인 서양과의 통상이 개시되어, 생사나 차, 금등이 수출되고 모직물, 면직물, 함선, 무기 등이 수입되었다. 수출품의 격증과 대량의 금의 유출로 인한 경제의 혼란은 하급무사와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였다. 일부 다이묘와 무사들은 외세를 배격하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존왕양이론을 주장하였다. 막부의 타이로 이이 나오스케는 반대파를 처벌하여 막부독재를 강화하였으나, 반대파에 살해되고, 막부는 천황 조정과 결합하여 막부정치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1863년 이후 영국등의 함대와 전투를 통해 양이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 사쓰마번과 초슈번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실권을 잡고 영국과 제휴하여견하였다.② 제도의 개편1880년에 청의 제도를 본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12사를 두어 각기 해당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또한 군사 제도도 바뀌었다.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 하고, 별도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무위영 소속으로 창설하였다. 별기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대로서,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신식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③ 신사유람단과 영선사의 파견신사 유람단은 박정양ㆍ홍영식ㆍ어윤중 등과 그들의 수행원을 합쳐 6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시찰단으로, 1881년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약 70 일 동안 일본에 머무르면서 각기 분담하여 일본의 교육 제도, 경제 제도, 경찰제도, 외교ㆍ군사 제도, 공장 등을 두루 살피고 귀국하여 각종 보고서를 제출 하였다. 또 정부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양반 출신의 학생과 공장 수십 명을 거느리게 하여, 청의 톈진 기기창에 가서 근대식 무기의 제조법과 군사 훈련법을 배우게 하였다.3. 대원군의 개혁과 메이지 유신의 비교 및 결과 평가유사(有史)이래로 한·일 양국은 고대·중세·근세를 거치는 동안 서로 비슷한 국가형태와 발전 속도를 보이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양국은 18·19세기 들어 서양의 동방진출로 인해 불어온 근대(近代)로의 이행 과정에서 그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또한 근대화로 이행하는 과정 속에서 비슷한 시기 양국에서는 부국강병과 왕권 강화를 꾀하는 개혁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조선의 대원군 집정기의 개혁과 일본의 명치유신이다.그러나, 현재 이 두 개혁에 대한 평가는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전자는 개혁과 더불어 시행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를 저해(沮害)해 결국, 근대화를 이루는데 실패하고 마침내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킨 실패한 개혁으로 평가되는 것에 비해 후자는 개혁을 통해 일본을 근대화의 길로 이끌어,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시킨 성공한 개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① 대원군의 개혁고종이 즉위하자 정의 확충과 군비의 확충등에서 많은 개혁이 이루졌으며, 결과적으로 국가기강이 확립되고 양반의 수탈이 방지되었으며, 민생이 안정되고, 민심이 수습되었다.그러나 봉건적 사회체제를 재정비강화하는 복고적 개혁에 그쳤으며, 대원군의 강력한 내정개혁과 쇄국정책은 결국 민비와 유림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여 최익현의 상소로 인해 하야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대원군의 개혁의 기본은 세도정치의 청산, 즉 왕권강화와 이에 기초한 봉건적 통치 체제의 확립에 있었다. 즉 그 개혁은 봉건적 개혁의 성격을 띠었다.② 메이지 유신19세기 후반의 일본은 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마찬가지로 구미의 근대적인 군사력과 자본주의의 경제력 앞에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봉건사회가 해체되고 있던 일본에서는 배외주의적인 존왕양이(尊王洋離)운동이 표면화되었다. 이 움직임은 근대적인 군사력을 정비하면서 국가통일을 목표로 하는 토막운동(討幕運動)으로 전이 되어갔다. 이리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진행되어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실현되었고, 근대적인 개혁이 실시되었다.무진전쟁이 계속되던 1868년 3월 메이지(明治)천황은 천황친정(親政)과 여론의 존중개국화친등, 신정부의 기본 정치이념을 선언하였다. 신정부는 정부 조직을 정비하고, 에도(江戶)를 토쿄(東京)으로 고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하였다. 1869년에는 천황조정이 쿄토(京都)에서 토쿄로 천도하였다. 이후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 한다.개혁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1869년 신정부는 토지와 인민에 대한 다이묘(大名)의 지배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하고, 1871년에 신정부는 다시 번을 폐지하고 부(府)현(縣)을 두어 부지사와 현령을 파견하였다. 막부말기의 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했던 번들은 이 개혁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이로서 봉건제도는 붕괴하고 중앙집권정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신정부의 구성원은 대부분 사츠마쵸슈토사(土佐)비젠(肥前)의 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