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의 사랑을 읽고...전래 동화 속의 주인공이 흔히 왕자이듯 쌩 떽쥐베리의 이 상징적인 주인공은 왕자이다. 서양 전래 동화 속의 왕자는 흔히 의를 행하고 악을 쫓고 죽음의 잠에서 공주를 깨어나게 하는 신비한 힘을 지닌다. 어린 황자 역시 선의 상징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동심을 지닌「어린」왕자인 것이다. 이 왕자가 상징하는 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고독을 극복 할 수 있게 해주고, 무의미한 삶과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닳아빠진 말이긴 하지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인간 사이의 참다운 관계인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의미와 무의미, 이 테마들은 어린 왕자의 단순하고도 은밀한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인 듯 하다. 어린 왕자는 아주 조그만 별에서 혼자서 산다. 그는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슬픔」을 달래고 풀 몇 포기 돋아 있는 동그란 별의, 의자에 홀로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어린 왕자의 쓸쓸한 뒷모습, 우주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듯한 그의 삶의 조건은 애초부터 은은한 애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우주적 이미지에 우리는 쉽게 작가의 비행사로서의 체험을 연관시킬 수 있다.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삶을 한낱 무한한 공간, 황량한 사막, 그 앞에서 느꼈을 인간의 유대에 대한 절실한 욕구, 그런 것들을 우리는 떠올리게 된다. 어린 왕자의 작은 별, 그것은 그의 고독세계를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의 별에 나타난 장미를 지극히 사랑한다. 장미의 묘사는 여인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장미에 대한 어린 왕자의 성실성은 이기적인 남녀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장미를 이해하는데 서툴렀으므로 괴로움 끝에 다른 별들로의 긴 여행을 떠난다. 열행. 떠남... 그것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만나는 여러 혹성들의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별에서 혼자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의 고독에서 벗어날 진정한 방식을 외면한 채, 지배, 소유, 추상적 지식, 현실 도피, 혹은 타인에 의한 자기 확인 등, 그 모든 헛된 욕구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공터를 은폐시키려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신하를, 허영심 많은 사람은 찬양자를, 지리학자는 탐험가를, 사업가는 소유의 대상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러다 여행의 종착지 지구에서 그는 우정을 설법하는 여우를 만난다. 여우는 남과 친구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준다. 「 참을 성이 있어야 해.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꺼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 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꺼야.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참을성 있는 노력,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를 이 보다 더 단순한 표현으로, 이 보다 더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여우가 이린 왕자에게 친구가 되어 줄 것을 호소하는 장면은 내가 봤을 때는 이 작품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생활을 환하게 밝혀주고 심심함을 사라지게 해주고, 아무 의미도 없던 밀밭까지 사랑하게 해 준다. 이 장면에서의 여우의 가르침에는 실로 이 작품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거의 모두가 담겨 있다고 본다. 그리고 여우는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비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어린이, 어른의 대조는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테마이다. 어른들이 모자라고 하는 그림에서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보아 구렁이」를 볼 줄 아는 어린아이의 신선한 상상력, 순수 함 이야말로 생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도달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라 생각한다. 어린 왕자는 여우의 가르침을 받은 뒤 장미와 자신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었나를 확인하고 장미에게로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뱀에게 물려 형체 없이 사라진다. 지평선 너머 저쪽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그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기에 앞서 우리는 비중하고도 부드러운 감동에 젖게 된다. 어린 왕자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순수성의 상징, 어린 왕자의 죽음, 그것은 순수성이 이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일까? 나레이터가 어린 왕자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다시 현실의 메마름에 괴로워한다는 뜻일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모든 단언을 어린 왕자는 거부하고 있다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정을 키워 나간 것은 여우와 어린 왕자의 길들여진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한 어린 왕자의 순수한 동심의 철학은 내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를 보고 나서...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이 질문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을 나는 "봄날은 간다"에서 찾았다.나는 허진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스스로 가지는 사랑의 정의를 조금의 왜곡됨 없이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겼다고 믿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내가 느낀 사랑의 정의란 제목 그대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임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또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널 영원히 사랑해."영원히 사랑한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평생을 지금의 사랑하는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일까? 물론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이상적인 영원한 사랑은 분명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도전에 계속 실패해 오지 않았는가?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 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선뜻 강하게 응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사랑을 논하기 전에 한 번은 진지하게 고려해 볼 문제라고 확신한다."봄날은 간다"는 시놉시스에서 일반 관객들에게 조금 다가서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반적인 멜러 영화가 가지는 결말과는 차별을 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서히 식어 가는 사랑. 생각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통속적인 사랑의 결말,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결말, 혹은 사랑함으로써 결국은 함께 한다 는 이야기 구조에 익숙해 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랑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것들은 모두 사랑을 느끼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만을 어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변해버린 소위 사랑이라는 감정을 수없이 겪어 왔지 않은가?허진호 감독은 사랑을 지나간 추억에 비유하였다. 결국 변하는 것은 거부 할 수 없지만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감정을 느꼈던 그 순간을 추억 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은수 였지만 사랑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치매에 걸린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자신을 한없이 아꼈던 남편만을 기억할 뿐, 훗날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한 남편의 기억은 가지지 못한다. 결국 할머니는 여생을 남편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환상만을 가지며 살다가 어느 봄날 떠나간다. 사랑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그저 추억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면서... "봄날은 간다"에서 진정한 사랑을 한 사람은 오히려 할머니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