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학교 건축을 통해 바라본 서양건축-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광주광역시 학교 건축물을 통해 바라본 서양 건축 양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광주광역시 교육청을 통하여 알아본 결과 광주 시내에는 총 281개의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 중 초등학교 140개, 중학교 80개, 고등학교 61개가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281개의 학교 중에서 저희 조가 조사한 학교는 초등학교 15군대, 중학교 10군대, 고등학교 9군대로 총 34곳의 학교를 조사하였습니다. 많은 서양 건축 양식 중 Arch, Column, Pediment, Buttress와 기타 원화창이나 Clear-story를 중심으로 알아보았습니다.ARCH 구조물ARCH는 메소포타미아에 처음 존재했었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완전한 ARCH구조는 에트루스카 건축과 그것을 이어받은 로마 건축에서 널리 일반화 되었습니다.앞에 보이는 사진은 광주고등학교 홍익관의 모습입니다.로마에서 사용되던 ARCH구조는 조적식 구조물에 주로 사용되었었는데 사진에서 보시 다시피 광주고등학교에서는 조적식이라기 보다는 대리석의 외장재를 단순히 ARCH형식으로 마감하였고 가운데에 키스톤을 형상화 한 모습을것을 볼 수 있습니다.다음은 전남여고 식당 입구의 모습입니다.넓은 개구부를 만들기 위하여 ARCH구조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많은 인원들이 동시에 출입할수 있도록 ARCH를 연속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넓은 ARCH를 연속적으로 사용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금호고 입구의 모습입니다.먼저 왼쪽 사진의 위쪽을 보시면 연속적인 ARCH를 보실 수 있는데. 블라인드 아치로써장식적인 기능을 위하여 사용되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건물의 단조로움을 보완하기 위하여 되물림기법을 사용하였음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아래쪽으로 내려와 입구의 모습을 보시면 3면에 ARCH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 Cross-Arch인줄 알았는데 밑에서 보니 천장이 평평함으로 봐서 단순히 ARCH를 연속적으로 사용한 구조물이라 생각하였습니다.북성중학교에서 찾은 ARCH형식의 구조물 모습입니다.건물의 옥상 부분을 보시면 3면이 ARCH로 된 구성된 구조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조사했던 학교 건축물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곳에서도 역시 단순한 장식을 위해 사용된 ARCH구조물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오른쪽 사진은 일곡초등학교의 ARCH구조물의 모습입니다. 이곳에서 사용된ARCH는 결언ARCH로써 장식적인효과는 물론 기둥과 함께 상부 구조물의하중을 효과적으로 지지하기 위하여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왼쪽 사진은 일곡초등학교 체육관의모습입니다. 대부분 초등학교 건물의옥상은 평지붕 형식이 보통이었는데이곳에서는 특이하게 ARCH형식의지붕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가운데부분은 키스톤을 형상화 하였습니다.로마시대의 ARCH 구조물은 크고 넓은 공간을 얻기 위하여 사용되었고 조적식 구조물에 적용되었었는데. 위 사진에서 보시듯이 저희가 조사한 광주시내 대부분의 학교들이 구조적인 기능보다는 ARCH를 형상화 하는 등 장식적인 기능을 위하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조적식 외의 구조물에도 사용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ARCH형식의 구조물은 구조적 기능보다 의장적 기능이 중점적으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COLUMN광덕고등학교 입구의 모습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 개의 기둥이 열주 형식으로 늘어서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광덕고의 기둥에서 특정한 양식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초의 모습은 매우 단조롭고 주두는 전혀 없이 격자형 천장에 바로 연결이 되어있었습니다. 격자형 천장은 판테온에서 사용되었었는데 자중을 줄이면서 빛에 의한 효과를 얻으려고 하였던 반면 이곳에서는 단순히 자중을 줄이기 위해 사용된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장과 기중과 만나는 부분은 원모양의 주두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주두라기보다 기둥과 안전하게 연결되게 하기위하여 디자인 한 것 같았습니다. 딱딱하고 어려운 학교의 이미지를 벗기 위하여 전면을 열주형식으로 개방하면서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은 그리스의 파르테논에서 사용한 열주랑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광주 동신고등학교의 모습입니다. 이곳에서는 기둥과 박공 등의 모습에서 로마의 판테온과 거의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게 열주랑을 사용하여 민주정치의 이념을 형상화 하고 있습니다. 주초의 모습을 보시면 스코티아와 토러스가 번갈아 사용되면서 몰딩형식을 띄는데 때문에 이오닉이나 코린티안 오더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는데 플루팅이 없고 주두의 형상이 단조로운 것으로 보아서 전혀 짐작을 해볼 수 없었습니다.삼각초등학교에서 찾아본 기둥의 모습입니다. 상당히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기둥이 베이스 없이 바로 기단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도릭 오더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주두의 모습에서 형상만 놓고 본다면 도릭 오더일 듯한데 캐피탈의 크기가 샤프트보도 작아서 특정한 오더의 형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듯 했습니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러하듯 이곳 또한 열주랑 형식을 함으로써 개방적이고 접근성 있는 입구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포인티드 아치로 보이는 아치형식을 연속적으로 사용하고 전체적으로 성과 같은 모습을 함으로써 초등학교의 이미지를 잘 형상화 한 듯 싶었습니다.서석고등학교에 사용된 기둥들입니다. 먼저 왼쪽의 사진은 벽기둥으로써 로마시대에 사용되었던 벽기둥과 같은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층층이 나눠진 모습은 마치 그리스 건축 중에서 시각보정을 위해 사용되었던 각도배분법에 의해 나눠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르네상스 시대에 외벽이 다층(중층)일 경우 매층간마다 돌림띠인 코니스를 사용하여 수평성을 강조하였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그러한 방법이 쓰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르네상스 시대에는 또한 인위적으로 질감을 다르게 하여 벽면의 미를 살리는 러스티카 수법을 사용하였었는데, 이곳에서 사용된 방법 역시 르네상스의 러스티케이션 수법일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벽과 질감을 다르게 하여 기둥과 같은 형상을 나타내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기둥은 저희가 조사한 학교건축의 기둥 중에서 가장 터스칸오더와 가까운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베이스와 캐피탈의 단조로운 모습과 샤프트의 플루팅이 없는 모습에서 로마시대의 터스칸 오더와 흡사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광주고등학교와 방림초등학교에서 찾아본 특이한 기둥들의 모습입니다. 광주고등학교에서는 서양건축의 특정한 양식을 띄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스 건축에서 기둥의 가운데를 약간 볼록하게 하여 시각보정 효과를 주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배흘림 기둥을 찾아볼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각보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국 고전 건축에서처럼 배흘림을 사용함으로써 부드럽고 곡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방림초등학교 체육관 기둥의 모습인데, 대부분의 기둥들은 원통형이나 사각형 형태인 것에 반해 이곳의 기둥은 8각형의 모습이었습니다. 각진 모서리 부분이 플루팅처럼 보이기도 해서 기둥이 더 길어 보이는 듯 했습니다. 윗부분은 주두 없이 바로 천장과 연결이 되어있고 베이스는 특정한 양식 없이 기둥을 대리석으로 감싸 놓은듯 했습니다.Pediment방림초등학교 체육관 측면의 모습입니다.포스트 모더니즘의 건축 특징이 나타나고있습니다. 상자형태의 건물과 지붕에서는박공형식을 취하고 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자세히 보시면 박공형식의 지붕은 후에추가적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평지붕에서 박공지붕을 추가함으로써 단열, 보온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앙초등학교 > < 서석초등학교>서석초등학교나 중앙초등학교 모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교로써 그 건물들도 상당히 오래된 건물입니다. 언뜻 보기에 일본식 건물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박공형식의 지붕을 보면 서양건축물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양건축의 박공에서는 조각과 같은 장식물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는데 비해 이 두 학교에서 사용된 박공은 장식이 전혀 들어 있지가 않다. 서석초등학교의 Ranking Cornice 부분을 살펴보면 목구조 양식에서 변화된 석구조 모습이다. 벽돌의 질감 및 조적조 건축의 조형미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벽면을 보면 돌출된 부분과 들어간 부분을 명확히 하여 질감의 차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질감의 차이로 건축물 전체적으로 심미성을 같게 하고 부각 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BUTTRESS< 경신여자고등학교 > < 계림초등학교 >
삼국지(三國志) 고사성어(故事成語)비육지탄(脾肉之歎)《직역》넓적다리에 살이 붙음을 탄식함《의역》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고 허송세월하는 것을 한탄하다.《유래》유비(劉備)는 198년에 조조(曹操)와 협력하여, 한 마리 이리와 같은 용장(勇壯) 여포(呂布)를 하비(下?)에서 격파한 다음, 한(漢)의 임시 수도 허창(許昌)으로 올라가 조조의 주선(周旋)으로 헌제(獻帝)에게 배알(拜謁)하고 좌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그대로 조조의 휘하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허창을 탈출하여 각지로 전전한 끝에 황족(皇族)의 일족인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표에게 초대되어 형주성(荊州城)에 갔을 때,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일어서던 유비는 문득 자신의 넓적다리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물을 흘렸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유표가 유비의 눈물 흔적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묻자, 유비의 대답은 이러했다."나는 지금까지 항상 말을 타고 전장을 돌아다녀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말을 타지 않고 너무 빈둥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살이 들러붙었습니다. 세월이 가는 것은 빨라 늙음이 이르는데도, 아직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슬플 뿐입니다."수어지교(水魚之交)《직역》물과 고기의 사귐《의역》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出典》'三國志' 蜀志 諸葛傳《유래》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스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백미(白眉)《직역》하얀 눈썹《의역》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유래》백미는 흰 눈썹이란 뜻이다. 제갈량, 즉 제갈공명(諸葛孔明)과도 친교를 맺었던 마량(馬良)은 형제가 다섯이었다. 다섯 형제는 모두 자(字)에 상(常)이란 글자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 형제를 가리켜 ‘마씨오상(馬氏五常)’이라 일컬었다.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그 고장사람들은 말하기를 “마씨오상은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흰 눈썹이 가장 훌륭하다(馬氏五常 白眉最良)”라고 하였다. 즉, 마량은 어려서부터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던 것이다. 이 때부터 같은 또래, 같은 계통의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백미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사람만이 아니라 뛰어난 작품을 이야기할 때도 백미라 부른다.《삼국지》 에 그 유래가 전한다.계 륵(鷄肋)《직역》닭갈비《의역》먹자니 먹을 것이 별로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갈비란 뜻.곧 쓸모는 별로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의 비유.《유래》삼국 시대로 접어들기 1년 전(219)인 후한(後漢) 말의 일이다. 위왕(魏王) 조조(曹操)는 대군을 이끌고 한중(漢中)으로 원정을 떠났다. 익주[益州:사천성(四川省)]을 차지하고 한중으로 진출하여 한중왕을 일컫는유비(劉備)를 치기 위해서였다. 유비의 군사는 제갈량(諸葛亮)의 계책에 따라 정면 대결을 피한 채 시종 보급로 차단에만 주력했다. 배가 고파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하자 조조는 어느 날, 전군(全軍)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계륵(鷄肋)!"'계륵?' 모두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주부(主簿) 벼슬에 있는 양수(楊修)만은 서둘러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한 장수가 그 이유를 묻자 양수는 이렇게 대답했다."닭갈비는 먹자니 먹을 게 별로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권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지(戰地)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券]' 학문에 정진했다. 그 후 중신(重臣) 가운데 가장 유식한 재사 노숙(魯肅)이 전시 시찰길에 오랜 친구인 여몽을 만났다. 그런데 노숙은 대화를 나누다가 여몽이 너무나 박식해진 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니, 여보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자네는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의 여몽이 아닐세(非復吳下阿夢)' 그려."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무릇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눈을 비비고 대면할[刮目相對]' 정도로 달라져야 하는 법이라네."파죽지세(破竹之勢)《직역》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의역》① 맹렬한 기세. ② 세력이 강대하여 적대하는 자가 없음의 비유.③ 무인지경을 가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군함의 비유.《晉書》〈杜預專〉《유래》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를 진(晉)이라고 했다(265년).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다.이듬해(280년) 2월(음력),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에서 떼지 않고(手不釋卷) 부지런히 공부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郞)이란 벼슬에 올라 임금님의 글공부의 상대가 되었으나, 조조(曺操)의 의심을 받아 한직으로 쫓겨났다. 각처에서 동우의 학덕을 흠모하여 글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나에게 배우려 하기보다 집에서 그대 혼자 책을 몇 번이고 자꾸 읽어 보게. 그러면 스스로 그 뜻을 알게 될 걸세.”하고 넌즈시 거절하였다.(魏略) 곧 부지런한 학문을 닦게 되면 저절로 성취함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도원결의(桃園結義)《직역》복숭아 동산 밑에서 결의를 맫다.《의역》'의형제를 맺음'이란 뜻.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욕을 버리고 목적을 향해 합심할 것을 결의하다.《출처》전한(前漢)은 외척(外戚)에 의해 망했고 후한(後漢)은 환관(宦官)에 의해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황건적(黃巾賊)의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문란한 국정에 거듭되는 흉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태평도(太平道)의 교조 장각(張角)의 깃발 아래로 모여 들어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수는 무려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한 관군은 이들 난민들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했다. 당황한 정부에서는 각 지방 장관에게 의용병을 모집해서 이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주(幽州) 탁현(?縣)에서 의용군 모집 공고문을 본 유비(劉備)는 나라 걱정에 깊은 한 숨을 쉬었다. 그때 유비를 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장비(張飛)였고, 그 다음에 관우(關 羽)를 만났다. 그들 셋은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나라 걱정을 하다가 의기가 투합 하여 나라를 위해 함께 일어서기로 결심을 했다. 장비의 요청(要請)으로 그의 집 후원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의형제(義兄弟) 를 맺고 천하를 위해 일하기로 맹세를 했다.[桃園結義] 이어서 세 사람은 3백 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 후, 제갈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여 유현덕(劉玄德)은 조조[魏], 손권[吳]과 함께 촉(蜀)나라를 세워 삼국시대를 이루었다.삼고초"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후 제갈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저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나이도 젊다던데…‥.""그까짓 제갈 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 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魏)나라의 조조,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황제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었다.읍참마속(泣斬馬謖)《직역》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의역》①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림의 비유.②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없이 버림의 비유.《三國志》〈蜀志 諸葛亮專〉《유래》삼국시대 초엽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자는 중달(中達), 179∼251]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만큼 군량 수송로의 가정(街.
1. 산성비의 정의환경 대기 중의 성분은 표준상태에서 질소(N2)가 약 78%, 산소(O2)가 약 21%, 기타 약 1%로 구성되어 있다. 20세기 초에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CO2) 농도는 0.029% 존재하고 있었으나 오늘날은 화석연료(석탄, 석유)의 사용증가로 이산화탄소(CO2)가 건조 공기 중에 0.035% 존재하게 되었고 오염되지 않은 우수 중에는 이산화탄소가 용해된 탄산이 우수 중에서 분해된다. 이때 pH는 5.5 ~ 5.6 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우수의 pH가 이 보다 낮을 때 산성비라고 할 수 있다.2. 산성비의 분석이산화탄소는 물에 녹아서 약산성을 나타내므로 pH5.7 이하의 강산성물질이 녹아서 나타내는 경우를 산성비라 한다. 이런 산성비의 수소이온농도를 결정짓는 주성분으로는 황산이온, 질산이온, 염소이온 등의 음이온과 수소이온,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암모늄이온 등의 양이온이 있으며 이들 간의 이온 평형에 의해 산성비의 pH가 결정된다.산성비에 영향을 주는 황산이온은 대기 중에서 이상화황이 산화한 것이고, 질산이온은 일산화질소, 이상화질소가 산화한 것이다.3. 우리나라의 산성비의 현황우리나라에서 산성비에 관한 연구는 신대현 등이 1979년도에 우리나라 11개 특정지역의 산성비 현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전원권 및 전원도시지역의 산성도는 우려할 정도가 아니나, 대도시인 서울과 주요 공업지역인 울산의 비는 매우 높은 산성도를 나타냈으며 서울의 경우는 pH의 연평균과 최저치가 각각 5.16과 4.15 그리고 울산의 경우는 4.68, 4.28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우리나라의 산성비는 1987년에 오염발생원이 없는 청정지역인 백령도에서 산성비가 내린 것이 확인되어 더욱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이래 환경부가 산성비를 측정하고 있는데 연평균 pH는 5.0 ~ 5.4 정도이다. 그러나 pH 4.5 이하의 산성비도 많이 관측되고 있다. 특히 대도시지역과 공단 주변지역에서 산성비가 많이 내리고 있고, 겨울철에는 난방용 연료가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이러한 형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우리나라의 주요 도시별 강우중의 pH는 다음과 같다.서 울부 산대 구인 천광 주대 전*울 산춘 천*여 수*포 항제 주20014.75.06.04.75.04.95.14.45.26.34.520025.06.25.64.85.15.1-5.4--4.620034.84.94.84.75.04.7-5.5--4.820044.55.05.34.75.24.85.04.9--4.720054.44.85.34.54.84.65.24.5--4.5평 균4.685.185.44.685.024.825.14.94--4.62*자료출처 : 통계청 (http://kosis.nso.go.kr/cgi-bin/sws_999.cgi)?? ???2006.1211 월10 월09 월08 월07 월06 월05 월04 월03 월02 월01 월서울?4.64.14.04.44.74.74.96.14.94.26.0부산5.65.45.85.75.85.75.75.75.65.75.85.8대구6.35.85.95.75.35.55.35.65.55.45.75.3인천?4.64.74.14.54.74.64.96.64.84.44.6광주4.75.86.14.65.95.15.56.15.25.74.55.0대전4.14.44.44.14.45.14.45.15.25.95.94.7울산4.95.14.95.25.15.05.05.25.24.64.44.2춘천6.24.54.65.26.35.65.05.15.95.8?5.1제주4.04.03.84.8?4.44.84.34.34.54.34.2평균5.14.94.95.45.25.05.05.35.55.24.94.9증감률 표 (전년대비)?? ???2*************022001서울-2.2-6.3-4.06.4-2.1부산-4.02.0-21.024.02.0대구0.010.4-14.3-6.73.4인천-4.30.0-2.12.1-6.0광주-7.74.0-2.02.0-3.8대전-4.22.1-7.84.14.3춘천-8.2-10.91.922.7-8.3제주-4.3-2.14.32.2-4.3표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큰 산도의 변화를 나타내지 않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 산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해안쪽 보다 서해안 쪽의 산성도가 더 높은 것으로 봐서 중국의 영향 또한 적지 않게 작용하는 듯하다. 대구의 경우 삼림이 많아서 공기의 정화가 잘 이루어지기 때문에 산성도가 다른 도시에 비해 낮은 듯싶다. 일 년 중 산성도가 가장 높은 달은 1,2월이고 가장 높은 도시는 제주도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공업화에 의한 피해와 더불어 인접한 중국대륙의 산업화에 따라 산성비의 영향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향후 여기에 대한 중요한 환경정책상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 예상되며 아울러 적절한 조치가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6. 결론산성비 피해를 열거하면 삼림이 파괴되고 호흡기 손상과 기관지 계통의 호흡기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먹이사슬을 통한 중금속이 몸속으로 들어와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토양이 산성화되어 미생물의 번식이 멈추게 되고 식물성장에 영향을 주게 되어 식량생산의 저하를 유발한다. 호수를 산성화시켜 미생물의 종류와 수에 큰 변화가 생기고 물고기가 살지 못하게 된다. 인공석조물의 부식을 촉진하며 문화유적과 예술품에 큰 손상을 입힌다. 산성비는 이처럼 치명적인 피해를 일으키는데 그 피해범위가 한정되지 않고 전 지구적인 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산성비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산성비의 주원인 물질인 산화질소, 이산화질소, 아황산가스, 삼산화황가스 등의 배출량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저유황 및 청정연료의 공급 확대, 저공해차의 보급, 대형 배출 업소 등의 점검강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하며, 황사에 의한 월경성 대기오염의 저감을 위한 지역협정의 체결 및 환경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고정 오염원의 배출제어기술 개발 및 체계적인 상호정보 제공 및 공동연구가 필요하며, 산성비의 심각성 등에 대한 활발한 계몽 활동으로 전 인류가 환경보호를 생활화하고, 깨끗한 지구를 만들어 영원히 보존해야 할 것이다.
실내 디자인리모델링 전후 비교목 차아파트 리모델링 사례 단독주택 리모델링 사례베란다 리모델링 거실 베란다를 확장하고 안방과 연결되어 있던 곳에 중문을 달고 미스트창을 넣었다. A.거실과 연결된 베란다 부분 확장 난방 시공으로 겨울철에도 사용 가능 B.안방과 연결되어 있는 발코니에 중문을 설치하고 수납장을 설치. 확장된 부분은 세탁 건조실로 활용서부 이촌동 한신 APT주방 리모델링 오래되고 어둡고 단조로운 느낌의 주방을 개선해서 깨끗하고 공간 활용이 잘 될수 있도록 함. 거울처럼 반짝이는 흰색 타일과 노란색 타일로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의 주방을 연출.서부 이촌동 한신 APT화장실 리모델링 샤워커튼과 욕조 등 공간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샤워부스를 설치하였고, 새로운 분위기 연출을 위해 타일을 교체 함. BLUE. 가족욕실은 공간활욜을 위해 욕조 대신 샤워부스 설치. 밝고 시원한 분위기 연출. GREEN. 부부욕실은 심플하고 편안한 느낌 연출.서부 이촌동 한신 APT부천 상동 105㎡ APT거실 아트월부천 상동 105㎡ APT주방 리모델링 전체적으로 흰색 싱크대를 사용해서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옆의 문과 같은 색의 타일을 사용하여 균형감 있고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하였다. 빈 공간을 활용하여 수납장을 두었고, 천장과 바닥도 교체함.부천 상동 105㎡ APT장전 현대2차 APT장전 현대2차 APT단독주택 리모델링 사례침실 리모델링 모습단독주택 리모델링 사례단독주택 리모델링 사례외관 리모델링 모습 어두운 철문과 낡은 대리석 대신 벽돌과 속이 비치는 문으로 교체. 페인트도 밝은색으로 다시 칠함단독주택 리모델링 사례외관 리모델링 모습 이층으로 올라가는 외부 계단을목재로 하고 밝은색 벽돌을 사용하여 계단과 어울리게 함. 계단참을 넓게 만들어 테이블을 둚.{nameOfApplication=Show}
바실리카 양식 계승에 대한 연구- 기독교 건축 중심으로 -…………………………………………………………………………………………………………………………………Abstract시대가 변하고 건축 구조와 양식이 변함에 따라 교회건축도 변하였지만, 신랑(nave)과 측랑(asile)을 이용한 직선형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교회건축양식은 크게 바실리카 양식을 따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명동성당이나 성공회 대성당의 경우처럼 신랑과 측랑에 의한 구조는 현대의 기독교 건축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공간 도입의 연유는 교회공간의 핵이 되는 제단에 이르는 통로가 그리스도교와 친교를 이루는 구제의 통로로 상징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키워드 : 바실리카, 교회건축양식, 신랑, 측랑, 통로,…………………………………………………………………………………………………………………………………Ⅰ. 서론기독교는 히브리인의 일신교에서 발전된 종교로서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B.C. 4 ~ A.D. 7)에 의하여 창시되어 그의 사후 사도들의 포교로 로마를 중심으로 교세는 굳어지고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되었다. 세계주의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게 된 기독교는 귀족이나 노예도 동일시하고 로마인들이 즐기던 잔혹한 투기나 호탕한 대욕장을 비난하고 우상숭배를 부정하고 로마의 관습에 따르지 않았다. 초기에는 비교적 관대했던 로마제국도 그들의 통일정책에 장애가 되는 포교를 하기 때문에 점차 단속하기에 이르렀으며 네로 황제 때부터 박해가 본격화하여 10차례에 이르는 대박해가 A.D 64년에서 311년에 걸쳐 일어났다. 박해를 받을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냈으며 박해를 받을수록 더 많이 전도되어 신자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어 결국은 교도들과의 타협이 필요하기에 이르렀다.콘스탄틴(Constansine, A.D 324 ~ 337) 황제는 당시 제호를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 324년에 통일된 제국의 황제에 오른 콘스탄틴은 초대 교황 베드로가 순교했던 네로 경기장 북벽 밖에 첫 번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옛 비잔티움으로 330년에 수도를 옮기고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창건했다.)Ⅱ. 바실리카 양식● 역사적?종교적 배경 - 기독교는 300여년의 오랜 박해를 거쳐 313년에 공인되고 그 후 국교로 인정됨으로써 교회가 지상에 뚜렷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지금까지 교회로 이어진 전물의 모형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에 이미 지어진 건물 가운데서 교회의 의식과 전도에 적합한 건물을 물색하여 우선 사용하였는데 이는 원래 법률과 정의를 존중한 로마인이 재판이나 상업교역소로 지은 바실리카였다. 이렇게 초기 교회당 건축은 바실리카의 평면과 구조를 기본으로 하여 형식화 되었기 때문에 바실리카식 교회당으로 불리웠다. 또한 이 당시 교회 유형은 바실리카식 교회당 이외에 중앙집중적인 마르티리움이라는 건축형태 즉, 로마의 황제 영묘에 근거를 둔 건축유형으로 발전하게 되며 이렇게 해서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두 가지의 건축형태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기독교 건축의 두 가지 유형바실리카식 교회 : 바실리카식 교회는 제단을 위한 앱스(apse)가 한쪽 끝에 붙어있는 직사각형의 건축물로 형태상 통로로서 해석되는 직선축상에 위치한다. 바실리카식 교회의 일반적인 형식은 입구, 열주랑, 아트리움, 나르텍스, 신랑, 측랑, 수랑, 앱스의 순서로 구성되며 각 공간 모두 교회의 전례에 적합하도록 세심하게 고려되어있다. 우선 입구를 들어가면 열주랑이 있는 아트리움의 전정이 있다. 그 중앙에 분수가 있으며 교회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거나 세례를 받기 위한 세례당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트리움을 지나 교회당으로 들어가면 나르텍스라는 현관부분이 나온다. 여기는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자들을 위한 공간으로서 세례를 받아 공식적으로 교회에 헌신하기까지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아트리움과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의 무덤 위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않다. 로마 신전 기단인 포디움 위에 그리스의 프로필라에아형 입구, 로마 주택의 아트리움형 안마당, 콘스탄티누스 바실리가의 측면에 있는 나르텍스 그리고 바실리카를 앉힌 다음, 네이브를 가로지르는 트란셉트를 덧붙인 형태를 갖고 있다. 그 시대에 맞는 교회의식의 필요성과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건축 유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즉, 바실리카(집회), 신전(교회의 상징성)과 주택(기능)을 조합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집중식 교회 :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바실리카식 교회당의 다른 평면형식 즉, 원형, 팔각형, 육각형, 정방형 등의 집중식 평면의 교회가 건설되었다. 이들 건축은 중신에 제단을 설치한 경우가 많았으며 일반 미사전례를 행하기에는 그다지 적합지 않은 평면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집중식 평면의 건물은 죽음을 이미지로 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집중식 건축도 그리스도교 단압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었던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건설된 순교 성인 기념당이 대부분이었다. 집중식 평면의 건축은 영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 세례방을 설치한 세례당으로도 많이 건립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는 상징적으로 죽음과 결부되었으며, 세례당과 분묘 건축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산타콘스탄차성당 : 집중식 교회의 원형으로, 본디 콘스탄티누스의 딸 콘스탄차를 위한 무덤 건축을 겸한 세례당이어서 그 크기는 인잔적 스케일로 만들어졌다. 1256년 교회로 바뀌었다. 입구 부분인 나르텍스를 지나면 배럴볼트로 된 회랑인 앰뷸라토리가 제대가 있는 가운데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 이것은 의식에 알맞은 기능적 요구와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는 상징성을 함께 담고 있음을 뜻한다.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돔과 그 아래에 있는 클리어스토리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하늘의 빛은 앰뷸라토리의 어두운 부분과 뚜렷한 명암을 만들어내면서 제대공간신과 법사상에 따라 법정과 상거래 역할을 하며 포럼에 부속하여 건설되었다. 재판소가 거래소였다는 것은 공정한 재판이라는 개념과 군중의 목전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이는 시민 집결의 상가로서 병용되도록 기능화한 건축이다.바실리카의 평면구조는 장방형으로 길이는 폭에 대하여 두 배가 되었다. 내부 장변길이에 열주를 세워 중앙에 신랑(nave)과 이 양쪽에 측랑(asile)으로 구획되었다. 포럼에 면한 방향에 출입구를 내고 그 반대편에 법관석으로 사용되는 반원형의 후진(apse)을 설치하였다. 신랑의 천장은 높고 측랑의 천장은 낮아 신랑과 측랑의 고저차를 이용해 고측창(clearstory)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통해 내부공간에 채광을 하였다. 내부가 대?소?고?저로 분할되면서 3방향적인 유동성 있는 공간으로 변화한다. 이 건물의 형식은 후에 기독교 교회당의 모체가 되었다.)Ⅲ. 기독교 건축의 역사● 바실리카 양식의 변천사 - 초기 기독교 건축인 바실리카 양식이 비잔틴 양식으로 넘어가면서 평면형태가 장방형에서 정방형으로 바뀌고 중앙 집중형으로 변했지만 신랑(nsve)과 측랑(asile)로 구성되어 있고 후진이 있는 점에서 여전히 바실리카 양식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로마네스크 양식의 평면 형식은 초기 기독교 시대와 같으니 11세기에 들어와서는 구조법의 발달과 교회기능의 확대에 따라 동측 평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3랑식 바실리카 평식의 규준적 평면에서는 신랑과 수랑과의 교차에 의해서 생기는 중앙의 사각평면을 기준해서 동측으로 돌출시킨 후진을 갖는 사각평면을 두게 된다. 남과 북에는 수랑의 정방형실을 두며 서쪽으로의 신랑은 몇 개의 정방형으로 구획이 이어져 나간다. 로마 바실리카식 평면에 수랑과 후진(apse)이 첨가되어 완전한 십자형이 발달하였다. 대부분이 로만크로스 평면으로 후진의 성가대석을 한 장소에 넣어서 내진으로 칭하게 되었고 오늘날도 이러한 평면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고딕양식의 교회는 배치나 평면에 있어 제단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조직되있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이며 프랑스 고딕을 대표하는 것으로 파리의 발상지인 세느강의 시테 섬에 있으며, 1163년에 착공되어 1250년에 완공되었다. 평면의 특징은 아일은 네이브와 앱스를 포함한 2중으로 둘러짐으로써 5랑식이며 트란셉트는 거의 돌출되어 있지 않다. 평면의 폭은 51.5m, 길이 140m의 대건축물이며 중앙의 네이브의 천장높이가 37.7m에 이른다. 내부의 입면구성은 네이브의 바닥면에서부터 아케이드, 트리포리움, 클리어스토리 등으로 완전한 3층 구성형식이다. 네이브의 높은 천장을 볼트구조로 했기 때문에 생기는 횡압을 직접 공중으로 띄어 넘어 아일의 외벽으로 이어지는 플라잉 버트레스가 최초로 창안되어 이곳에 사용되었다. 서측정면에는 원형창이 당당히 자리잡고 좌우로 쌍탑이 우뚝 솟아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다. 또한 3개의 출입구는 첨두아치이고 반원부에도 조각으로 장식되어있다.● 근대 이후의 기독교 건축명동성당은 한국에서 고딕식 성당건축의 모범이며,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대성당이다. 벽체와 기둥은 벽돌 조적조이며, 지붕 트러스, 종탑의 종축 지지 구조, 뾰족 탑 구조 등은 목구조이다. 벽돌조는 적벽돌과 회색 벽돌을 혼용하였는데, 다양한 이형 벽돌을 사용했다. 입면 창과 개구부는 뾰족 아치(pointed arch)이며, 창 윗부분은 판격자(板格子)와 유사한 형상으로 처리되었다.건축 당시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대리석의 주제대(主祭臺, high altar)와 벽돌조 부제대(副祭臺, side altar)는 다른 곳에서 제작되어 설치되었다. 내부 천장은 고딕식 리브 보올트(ribbed vault)이며, 내부 입면은 1층 아케이드(arcade), 2층 공중회랑(空中回廊, triforium), 3층 고측창(高側窓, clearstory)으로 구성되었다. 종탑은 정면 중앙에 서 있으며, 4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아래부터 나르텍스(narthex, 전실) 구실을 하며, 3면이 개방된 포치(porch) 형태의 현관부(玄關部), 파이프 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