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의 여성서론많은 사람들이 고려와 조선의 여성 지위에 관하여 같이 평가하고 있다. 즉 고려와 조선 둘다 여성의 역할이 비주체적인 존재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이념이 철저히 적용되던 조선 후기 여성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려와 조선 초기의 여성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위와는 다르게 살고 있었다. 과제를 하면서 새로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나는 고등학교때의 문헌, 수업내용에서 고려 여인들의 강인한 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새삼 이렇게 자세히 보고 듣게 되니, 무척 새로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지위와 역할을 갖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지위와 역할 뒤에는 어떠한 사회적 배경이 존재했는가. 전근대 여성들의 모습을 명확히 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본론1. 비디오 요약정리(1) 고려부인 염경애850여년전 염경애라는 한 여인을 통하여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와 역할, 혼인형태, 호주제, 결혼풍습, 재가, 재산상속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염경애의 남편 최루백은 고려사 열전에 실릴 만큼 효자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교과서에 해당하는 삼강오륜도, 오륜행실도 등의 책들에도 최루백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이 최루백은 47살의 나이로 죽은 아내를 위하여 묘비에 글을 남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흔하지 않은 일이다. 묘지에 글을 남긴 것이 총 220여개, 그 중 여자것은 34개,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위해 이렇게 정성들여 쓴 것은 단 두 개에 불과하였다. 그렇기에 남편 최루백이 쓴 묘비석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염경애는 개경의 권세 있는 귀족집안의 딸이었고, 남편 최루백은 수원 향리의 아들이었다. 어찌보면, 권세있는 여자 집안의 딸이 자기가문보다 못한 집안에 시집을 간 것인데, 이는 최루백이 과거를 합격하지 않았나 추측하게 한다. 사실 옛 여인들은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물론 어릴때, 아명은 있었겠으나, 결혼을 하고 난 후, 여성은 군 대부 딸을 두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나이로 추측해 본 결과 최루백이 재혼을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고려시대에서 여성은 재혼도 흔하게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의 결혼이 억압되어 있지 않고, 이혼을 했다는 여러 가지 사례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원래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이었다. 후에 원의 간섭 하에서 다처제가 상층 일부에 퍼지고 이를 법적으로 도입하자는 박유의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여성들의 집단적인 반발과 일부일처제의 전통에 의해 좌절된다. 이처럼 일부일처제가 유지됐다는 사실은 고려시대 여성들의 권리가 강했음을 시사한다.고려 사회에서 여성은 남편이 없는 경우 아들이 있어도 호주로 인정받았다. 또한 자녀의 호적등재는 성별과 관계없이 연령 순으로 이루어졌다. 남편과 아내가 소유한 노비도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이 역시 고려시대 여성들의 권리가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사실들이다.염경애의 묘지석에 나타난 자녀들에 대한 기록에는 넷째 아들이 출가하여 승려의 길을 걷고 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최루백의 묘지석에는 그 넷째 아들이 벼슬을 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도 신분상승을 위하여, 승과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동시에 주어지는 일이였기 때문이다.염경애의 묘지석을 통해서 고려시대 귀족가문의 3대에 걸친 가계도를 복원해 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도 알 수 있고, 두 주인공의 성품도 짐작할 수 있다. 묘지석의 내용이 그만큼 풍부하고 정확한 기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2) ‘조선판 사랑과 영혼’ 요약정리98년 4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400년된 무덤에서 한 여인의 편지가 발견되었다.서른한 살로 죽은 남편 이응태를 그리며 아내가 장례 전까지 써내려간 편지였다. 시신의 누운모습, 망자의 가슴을 덮고 있던 한지, 이것을 조심스레 돌리자 그 곳에는 한글 편지가 있었다. "원이 아버지께, 편지는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쓴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머리맡에서 나온 미투리였다. 유물을 꺼내는 과정에서는 무엇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던 물건, 바로 여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튼 신발, 미투리였다. 조선시대에는 관속에 신발을 따로 넣는 경우가 드물었다.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았던것인지 그 까닭을 밝혀줄 유일한 단서는 신발을 싸고 있던 한지였다. 한지에는 재미있는 글이 나온다. 내머리 버혀.... 머리카락을 잘라서 신을 삼았다. 끝에 보면 이신 신어보지... 이말은 자기남편이 신을 신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이런 애절한 내용을 쓴 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남편이 병환중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내는 병석에 누운 남편이 이 신을 신을 만큼 건강해지길 바라며 이 신을 만들었던 것이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자, 그녀는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었던 것이다.편지속에서 아내는 남편을 일러 원이 아버지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뤄 보아 둘 사이에는 원이라는 자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이 내용을 통해 당시 아내는 또한명의 자녀를 수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무덤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석마저 유실된 채 모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4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무덤속의 남편과 편지속의 아내, 만약 편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 둘간의 이야기는 영원히 과거속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무덤에서 나온 의복들을 통해, 그녀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이응태의 아내는 160cm의 키에 보통 체격을 가진 여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들 원이는 오륙세의 어린아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응태의 아내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라는 말로써 부부간의 금슬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는, 남녀 유별, 남녀 칠세부동석 등의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자유로운 남녀간의 애정표현은 점잖치 못한 일로 여겨, 양반이나 사대부 계층의 사람들은 터부시 했던 것으로 자제가 결혼후 처가에 얹혀 살았다는 것은 이시기, 사대부 가문의 일반적인 김성일 집을 통하여 유추하여 알 수 있었다. 이응태가 살던 시대는 결혼과 동시에 처가살이를 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왕조실록에는 고려시대, 임란직후까지도 사위가 결혼하면 처가에 가서 생활한다.‘ 이렇게 나와있다. 기록에 의하면 처가에서 아기가 장대하면, 친가에 온다. 이건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가정생활이지 조선후기의 처가살이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이응태 부부도 결혼 직후엔 처가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응태가 죽기 직전, 이들 부부는 본가로 돌아 왔던 것으로추측된다.편지 속에는 바로 '자네'라는 말이 나온다. '자내다려 내 닐오되...' 즉 당신에게 내가 말하기를, '자내 몬저 가시난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이처럼 이응태의 처는 남편을 가리켜 '자내'라는 말을 모두 열네번 사용하고 있다. 요즘의 부부라 하더라도 아내가 남편을 자네라고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편지에서 자내라는 말은, 분명히 이응태의 아내가 남편을 직접 호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자내라는 호칭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후에도 자료가 없다. 이 시기 씌여진 글속에서, 아내가 남편을 직접 자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다만, '그사람'이라는 의미인 3인칭으로는 간혹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응태 아내의 편지로써 자내 우리는 임진왜란전까지의 사회에서는 부부가 모두 자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하소체를 쓴다. 이는 아내가 남편에게 대등하다고 그렇게 판단해야 한다. 이응태 아내의 편지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남녀관계에 있어 대등한 사회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다. 이응태와 그의 아내가 살았던 시대는 법적, 제도적으로 남녀가 평등한 사회였다. 바로 이것이,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감정표현에 솔직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그러나 이응태가 죽은 후...두랑하며 또 존중할 수 있었던 시대, 이것이 이응태 부부가 살았던 조선중기의 모습이다.2. 고려와 조선의 여성고려 시대의 왕실에서는 신라 왕실의 족내혼과 유사한 동성혼이 성행하였다. 또한 왕실을 제외한 상층신분, 향리와 서인은 물론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이었다. 후에 중국에 인재를 막기 위하여 일부다처제를 하자는 박유의 주장과, 여러 가지 일부다처제설이 있었으나, 여성들의 집단적인 반발과 일부일처제의 전통에 의해 좌절된다. 이처럼 일부일처제가 유지됐다는 사실은 고려시대 여성들의 권리가 강했음을 시사한다.고려 사회에서 여성은 남편이 없는 경우 아들이 있어도 호주로 인정받았다. 자녀의 호적등재는 성별과 관계없이 연령순으로 이루어졌다. 남편과 아내가 소유한 노비도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이 역시 고려시대 여성들의 권리가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또한 서옥제의 풍속으로 가정 내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으며, 고려 여성들의 재가는 보편적인 것으로 불리한 처우를 받지 않았다. 상속에 있어서도 딸과 아들은 물론 출가한 딸에게까지 균등하게 재산이 지급되었다는 사실은 고려 시대 여성들은 나름대로의 경제권을 지닌 주체적인 존재였음을 보여준다.조선 시대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유교적인 사회윤리가 일반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인 조선 초?중기와 유교윤리가 지배하는 조선후기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아직까지 성리학의 이념이 일반민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인 조선 전기 여성들의 생활은 고려 시대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처가살이의 풍속이 계속되었으며 재산상속이나 제사상속에 있어서도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유지했다. 또한 아들이 없는 경우,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에게 재산을 계승시키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층은 성리학적 여성관을 확립하고자 여성의 상사와 사신 행위를 금하는 등 여성들에게 여러 가지 제재를 가하였지만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여성들은 고려 시대의 여성들과 같이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그 후 유교질서가 일반민에게까지 보급되고
협상사례보고서서론‘협상의 이해’라는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나 자신이 생활 속에서 협상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비록 아직까지는 많은 것을 배운것은 아니지만, 협상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속에서 끊임없이 계속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협상이라는개념이 그리 멀게 느껴지진 않아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교수님께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협상 사례를 과제로 내주셨는데, 며칠을 고민하다 나는 크게 세가지 주제를 정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본론사례1 쇼핑에서의 협상(1) 내용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겪게 되는 협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 또한 과 제를 처음 접하였을 때 이 협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옷을 구입하러 친구와 가게에 갔다. 물론 그 곳 주변에는 여러 다른 옷 가게들도 많 이 있었다. 처음 가게 주인에게 옷의 가격을 물었더니 옷의 가격이 칠만원이라 하였 다. 나는 옷을 구입하고 싶었지만, 한번에 사면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정 을 하기로 하였다. 좀 깍아 달라고 하였으나 주인은 이것도 많이 내려서 얘기한거라 며 흥정을 하기를 거부하였다. 나의 친구도 물건이 비싸다며 나를 거들어 주었다.나 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듯이 물건을 구입할까 말까 망설이며 가지 못했다. 주인은 그 럼 자기가 손해를 보고 거래하겠다며 육만 오천원의 거래를 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현재 가진 돈이 사만원 뿐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안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가게로 가기로 결심하고 가게를 나섰다. 다른 옷가게들을 둘러보며 나는 시간을 끌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 가게 쪽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다시 나는 그 가게의 옷을 보면서 아쉬움을 나타냈고, 나를 본 주인은 사만원에 거래하겠 다고 하였다. 정말 자신이 손해를 보고 거래하는 거라며 주인은 물건을 나에게 팔았 다. 그래서 결국 나는 육만원에서 이만원을 뺀 사만원으로 내가 원하는 옷을 구입하 게 되었다.(2) 비교·분석1) 상점주인에 본 협상·상점 주인은 소비자가 어느정도는 자신이 제안한 가격에 흥정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여 먼저 최대 가격을 요구하였다.·자신이 손해를 보고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생색을 내며 이로 인하여 나는 물건을제시된 가격에 구입하면 싸게 산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내가 물건을 구입하고 싶어하는 의사는 보이나 망설이는 것을 보고, 주인은 조금 낮은 가격을 제시하므로써 나의 소비욕구를 자극하였다.2) 소비자(본인) 입장에서 본 협상·상점 주인의 처음 제시된 가격에 나는 더 낮은 가격을 요구하였다.·사고 싶은 모습을 엿보이면서 시간을 지체하였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더 낮은 가겨을제시하도록 암묵적으로 요구하였다.·가격을 더 낮추어달라고 친구의 의견까지 합세함으로써 주인의 가격 제시가 제3자가보기에도 비싸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왜 주인이 제시한 가격에 구입할 수 없는지를 설명므로써 이에 대하여 거래를 마무리할 수 있는 자는 주인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물건을 구입하고 싶은 의사는 있으나 주인 때문에 구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남기고다른 가게를 감으로써 주인에게 아쉬움을 남겼다.·시간을 두고 주인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주인이 소비자의 입장에 맞추어팔지 않으면 거래를 할 수 없음을 다시한번 각인 시켰고 다시 그 가게를 찾아 가므로써 주인에게 거래를 제안할 기회를 주었다.3) 결과나의 협상은 성공을 하게 되었다.상점 주인과의 거래에서 단호하게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주인과의 거래에서 시간을벌면서 주인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던 것이 성공 요인이였다.사례2 친구사이에서의 협상(1) 내용나는 친구에게 가게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자고 제안하였다. 가게에 가서 음식을 시킬때 내가 먼저 가자고 제안하였고, 친구가 의자에 앉아 있길래, 음식값을 내가 지불하였다. 친구는 자기도 내겠다고 하였으나, 나는 다음에는 네가 내라고 하였고, 우리 그렇게음식을 시켜 먹었다. 다음에 또 친구와 만나게 되었다. 그 때는 친구가 돈 없이 나왔다고 하여 또 음식 값을 내가 지불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번에도 내가지불하게 된 것에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그 다음에도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는 이상하게도 나를 만날때만 왜 돈이 없다는 건지또 돈이 별로 없다며 우리가 지불해야할 밥 값에 1/5을 냈다. 친구사이에 돈을 가지고왈가왈부하는 것이 옹졸해 보이는 행동같고, 또 이 정도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서 할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번에도 그냥 아무말을 하지 않고 내가 지불하였다. 그러나문제는 그 다음이였다. 주위 다른 친구들 얘기로는 그 친구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는 항상 돈을 많이 쓰고, 선물도 많이 한다고 하였다. 다른 친구들 또한 그 친구와의 사이 에서 돈 때문에 문제가 많이 있는 듯 보였다. 그런 말을 듣다 보니, 그 친구에게서 느낀 약간의 불만사항이 정당한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번 그구와의 만남에서 나는 돈을 안가지고 나왔다고 말하고 이번에는 네가 내라고 하였다.그러나 그 친구는 너 카드가 있지 않느냐며 다음번에는 자기가 사겠다고 하면서 이번에도 나에게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번에도 내가 밥값을 지불하게 되었다.그 후부터는 그 친구와의 약속에 약간의 거부감이 생겨 약속을 기피하게 되었고, 예전 같으면 쉽게 넘어 갔을 금전 문제에서 옹졸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2) 비교·분석1) 친구의 입장에서 본 협상·한 두번까지의 친구의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어 질 수있는 모습이였다. 자신도 값을 지불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음을 설명하였고, 그로인하여 내가 돈을 지불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였다.·자신이 내지 못함을 미안해 하지 않고, 다음번에는 자신이 내겠다고 하고, 해결책을제시한 것이 결국 나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였다.2) 나의 입장에서 본 협상·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친구에 대한불만 사항을 정리하였다. 이번에는 네가 내는 것이 좋겠다고 장난스럽게 얘기하면서친구와의 사이가 불편해지지 않도록 하였다.(3) 결 과나의 협상은 실패하였다.친구와의 이런 상황 속에서는 처음부터 솔직히 얘기를 하는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 각이 든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 배운대로 나 한쪽에서만 계속 참는 것은 내가 계속지는 것을 의미하고 계속 이렇게 상황이 진행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서로 모두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한 쪽에서의 불만을 키우기 보다는 처음부터 친구에게 나의 입장과 상황을 설명하고,친구의 반응을 보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면 친구는 처음에야 기분이 언짢을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극단적으로 나빠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친구는 자신의 잘 못된 점을 깨닫게 될 것이고, 친구 또한 나와이 사이에 더 나은방법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참은 나의 행동이 친구와 나의 협상에서 잘못된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 같다.사례3 남자친구와의 협상(1) 내용남녀가 만나게 되면 처음에야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서로의 모든 것이 관심의대상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행동에 의아해하게 되고 나또한 남자친구와의 다른점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그 친구는 나에 비하여 잠을 무척 많이 잤고, 늦장을 많이 부리며, 또 게임을 좋아하였다. 그에 대하여 나는 불만이 커져갔고, 이에 대하여 불평하는 내 모습에 남자친구 또한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다. 크게 말다툼을 하기도 하였고,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가기도 하였다.그러나 나는 사고를 달리하기로 하였다. 그 친구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하였다. 나와는 다른 객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내가 억지로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그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 사실을 나중에 그 친구에게 말하자 오히려그 친구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미안한 마음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모습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행동을 보였다.
1. 아뢰야식과 여래장의 의의(!) 아뢰야식(阿賴耶識)''안.이.비.설.신.의'의 '육식'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칠식(七識)'과 '팔식(八識)'까지 이해할 수 있다. 칠식은 육식과 팔식의 중간 단계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팔식이다.팔식은 다른 말로 '갈무리 한다'고 해서 장식(藏識), 혹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멸식(無滅識), 무몰식(無沒識)이라고 말한다. 팔식은 육근과 육경과 육식에 의해 훈습(熏習)되어 온 온갖 것들이 갈무리되어 저장되는 곳이다. 그래서 팔식은 속 마음, 잠재의식, 무의식, 심층의식 등으로 불리운다. 그와 반대로 육식은 보고 듣는 것이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므로 겉 마음, 표층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의식하는 일체의 것은 하나의 종자가 되어 모두 팔식에 심어진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팔식까지 충격이 전해지면 거기서 싹이 터서 표면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이나 작업, 훈련, 연습 등의 일을 되풀이 하는 동안 그 모든 것은 팔식에 쌓이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우리가 복덕을 짓는 것도 팔식에 모두 갈무리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하나의 종자가 되어 팔식에 심어진다. 나쁜 습관도 팔식에 갈무리되기 때문에 자꾸 그 일이 반복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습관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좋은 종자를 심어 놓으면 좋은 싹이 나듯이 좋은 습관을 길들이면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된다. 우리가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볼 때는 아무런 잡념 없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대로 팔식에 박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내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공부할 때는 온갖 잡념을 다 일으키기 때문에 그런 뒤엉킨 상태로 갈무리되면 좋은 종자가 심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행한 일이 기억이 잘 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것을 훈습하는 일이 중요하다. 좋은 것은 익숙해질 때까지 훈습할 필요가 있다. 아는 것도 자꾸 듣고 보고 공부하다 보면 훈습이 되어 팔식에 좋은 종자로 갈무리 되는 것이다. 악한 지식과 악한 알음알이라는 뜻으로 악지악각(惡知惡覺)이란 말이 있다. 세속적인 잡다한 지식에만 치우쳐 있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이것저것 불필요한 지식으로 팔식을 가득 채우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좋은 종자를 갈무리할 틈이 없어지는 것이다. 팔식을 다른 말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팔식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대뇌가 아니다. 대뇌는 인식을 발동 시키는 조건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팔식에 좋은 것을 갈무리 해야만 대뇌를 통하여 좋은 것이 싹터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팔식에 갈무리된 것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현행(現行)이라고 말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뢰야식, 즉 팔식에 갈무리 되어 있는 것을 현행해내지 못하는 것도 엄밀히 말해서 뇌손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때는 팔식에 심어진 종자가 거의 백지에 가깝기 때문에 뭐든지 잘 기억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종자가 심어지면 먹물을 찍듯 선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기억이 잘 안되는 것은 팔식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마치 글씨가 가득 차 있는 신문지에는 그 위에다 무엇을 써 놓아도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훈습을 통해서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보다 분명히 심어질 수 있는 것이다. 팔식에 심어진 종자는 기억으로 되살아나지 않더라도 업이 되어 팔식 속에 모두 갈무리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짓거나 참선을 하거나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 놓으면 언젠가는 마음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팔식과 육식의 경계선은 명확하게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육식, 즉 표층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팔식, 즉 심층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심층의식 속에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 힘은 기도나 참선, 수행을 통해 개발이 가능하다.보통 사람은 육식의 작용에 그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수행력이 높은 사람은 잠재의식에 내재된 힘을 끌어내어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신.구.의 삼업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것은 전부 팔식에 갈무리되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엄청난 업장이 되기 때문이다. 팔식은 우리가 육신을 버릴 때도 없어지지 않고 다음 생까지 연결된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본능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전생의 업이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전생부터 익혀온 것이 팔식에 갈무리되었다가 현행한 것이다. 다음 생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부터 열심히 훈습할 필요가 있다. 생각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신.구.의 삼업을 통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일 때 그것이 저축이 되어 꽃 피고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나이를 인정하지 않고 항상 젊게 살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팔식에 갈무리 된 것은 인연을 만나면 언젠가는 움이 돋게 마련이다.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바로 시작해야 한다. 그 순간이 출발점이다. 가을에 추수를 하려면 봄에 씨를 뿌려야 하듯이 금생에 닦지 않으면 결코 거둘 수 없는 것이다. 팔식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서 이해하고 있어야한다.(2) 여래장 [如來藏]여래를 내장(內藏)한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중생의 청정(淸淨)한 본마음을 가리키는 말. 공(空)여래장이라고도 한다. 여래의 태(胎)를 가리키며 태는 태아를 의미한다. 인간은 본래 여래가 될 요인(여래의 태아), 즉 불성(佛性:부처의 본질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말한다 이러한 여래장 사상 형성의 배경에는 원시불교 이래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마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 및 진리와 사물을 동시에 의미하는 법(法)의 개념, 그리고 《화엄경(華嚴經)》의 미진함천(微塵含千:하나의 작은 티끌에 三千大千世界, 즉 전 우주가 포함되어 있음)의 비유, 《법화경(法華經)》의 일승(一乘:초기 대승불교에서 비판되었던 聲聞 ·緣覺은 보살과 함께 성불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설)의 사상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래장 사상을 최초로 논한 《여래장경(如來藏經)》은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고 선언하며, 번뇌에 둘러싸인 중생 중에 여래지(如來智) 여래안(如來眼)을 갖춘 여래가 단좌(端坐)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서는 중생계와 법계(法界)에는 증감이 없으며, 이 양자는 동일한 세계라고 한다. 단지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은 사견(邪見)을 가지게 되고 생사윤회의 바다에 침몰하고 있다고 하여, 여래장은 밖으로는 번뇌로 가려 있지만 안으로는 여래의 청정법, 상주불변의 법성(法性)이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승만경(勝經)》도 여래장의 기본경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여래장 사상이 집성된 것이 《보성론(寶性論)》인데, 여기에서는 여래장의 세 의미로서 ① 여래 법신의 편재(遍在), ② 진여眞如:진리)의 무차별성, ③ 종성(種姓:家系 ·동질성)의 존재를 열거하고 있다. 중국에서 특히 널리 알려진 《불성론(佛性論)》은 이 《보성론》의 개작 내지 이에 의거하여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대승의 《열반경(涅槃經)》에서 여래장을 불성의 의미로 해석하여,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한 말에 의해 중국에서는 여래장이라는 말보다 불성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열반경》은 일천제(一闡提:대승의 법을 비방하는 자, 세속의 욕망을 가진 자)에는 불성이 없다고 술하고 있어서 약간의 불일치가 있으나 종국적으로는 그런자의 성불은 인정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쇠붙이 ·와석(瓦石) 등의 비정(非情: 중생 有情의 반의어로서 의식이 없는 일체의 무생물)에도 불성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유식(唯識)계통의 법상종(法相宗)이나 선종에서는 각각 오성분별(五性分別:無性 ·不定性 및 성문 ·연각 ·보살의 定性, 즉 각기 그 본성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불성 및 자기의 본성을 깨우침으로써 성불한다는 것, 대개 성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을 주장하여 여래장 ·불성을 보편화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는 색(色:물질) 심(心)의 평등관에 근거하여 그 보편화를 개척하였으며, 길장(吉藏)은 초목(草木)에도 불성이 있다고 하여 최초로 초목성불을 주장하였다. 그 후 중국 및 한국 등지에서는 비정불성론이 일반화되었다. 상기한 여러 경론 외에도 여래장 사상을 다룬 것으로 《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 《대법고경(大法鼓經)》 및 《금광명경(金光明經)》 《능가경(楞伽經)》 등이 있다. 특히 《능가경》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여래장과 알라야식[阿賴耶識]과의 관계를 논함으로써 유식설(唯識說)과의 융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 신Ⅰ. 서 론독신이란 이혼, 사별 혹은 별거 등으로 인하여 현재 결혼하지 않은 상태. 즉 법적 배우자가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 그런데 미혼자나 별거, 이혼, 또는 사별한 사람들은 이유가 어떻든 현재 결혼하지 않았다는 합법적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과거에 결혼했던 경험이 있는 독신자와 미혼의 독신자 간에는 생활양식에서 차이가 있다.우리나라의 독신자 숫자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데 통계청이 5년마다 발표하는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전국 총 1439만 가구 가운데 독신가구는 222만여 가구. 1990년 102만 가구. 1995년 164만 가구였다. (이 통계자료는 독신 상태와 관계없이 혼자 살고 있는 1인 가구에 관한 자료이므로 독신자 숫자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아니며 실제 독신자의 수와는 차이가 있지만 독신자 수가 늘어나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부분에 결함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거나 심지어 결혼도 못한 주제라고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독신자들은 평범한 사회의 가치를 모르는 메마른 사람, 다른 이로부터 심한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 정서적 불구자, 혹은 지독한 출세주의자거나 이기주의자일 것이라는 편견에 부딪혀 무척 당혹스러워 한다. 이러한 독신에 대한 부정적 관념은 그 동안 우리 사회가 결혼에 대해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해 왔기 때문이다. 독신은 결혼문화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갖는 것으로 누구나 독신이라는 것을 늘 선택할 수 있을 때 결혼 역시 자유롭고 합리적일 수 있다. 독신이란 생각할 수 없다는 비타협적인 태도가 강박적으로 결혼을 앞둔 많은 이들을 꼭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며, 그 결과 불행한 결혼을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선택으로서의 독신생활과 독신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Ⅱ. 본 론1. 독신(1)독신의 정의‘독신’은 통상 ‘배우자가 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혼자 몸’으로 배우자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배우자가소비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자들이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20세에서 34세까지 독신자 중 상당수가 바로 이 기생독신자 명단에 끼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의존형 기생독신자 증가를 막기 위해 정부가 청년층의 독립을 위한 시스템을 강화하고 기업이 신규채용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다른 독신분류 방법으로는 나홀로족(솔로족), 싱글족(독신족), 홀로서기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① 앞으로 독립을 꿈꾸는 나홀로족혼자가 편해 솔로가 된 나홀로족은 '인터넷'을 끼고 사는 게 특징이다. 나홀로가 편해 솔로형 인간의 나홀로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PC중독증이다. N세대의 3명 중 한명꼴이 ‘혼자 PC를 조작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했을 정도다.응답률이 32.0%에 이른다. 친구를 만나거나 운동을 즐기기보다 집에 앉아 PC를 두드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PC를 통한 가상세계에서 친구도 대화도 즐거움도 모두 해결되는 것이다. 22.1%는 사이버섹스에 ‘흥미가 있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PC를 통해 음란물을 실제 접해 보았다는 경험률도 37.6%나 된다. 솔로형 인간들에게 고전적 의미의 남녀간의 사랑과 그것이 밑받침된 섹스는 여러가지 애정 방법 중 하나의 선택인 셈이다. 기존의 인간관계, 남녀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게다가 인터넷 중독증까지 보이고 있는 나홀로족의 45.9%가 '평생 혼자 살 수도 있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또 직장에 근무하는 것보다 ‘집에서 재테크하는 것이 더 좋다’는 비율도 49.8%나 돼 직장개념에도 일대 변혁이 예상된다. 하나의 평생직장을 갖고 싶다는 바람도 65.9%(81.4%)로 50세 이상층에 비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여타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조짐은 예외없이 나타나고 있다. ‘정규교육은 꼭 받아야 된다’에도 50세 이상층보다 20%포인트 가량 적은 75.6%(92.3%)가 동의해 공교육체제도 점점 위협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뭐든 한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의식은 년 이내의 이혼이 반 넘게 차지하지만 20년 이상된 부부의 이혼이 13.2%로 전해에 비해 2.7%포인트나 늘어난 것이다. 황혼이혼은 5,6년 점 일본에서 크게 늘어나 눈길을 끌었는데, 우리에게도 현실로 닥쳐온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의 경우 여성의 사회진출과 경제력 획득으로 인한 결혼 20년, 30년차의 '황혼이혼'이 증가하고 있는 점은 독신이 결혼 안 한 젊은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점점 나이대가 확산되고, 독신이 된 이유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을 내비친다.2. 독신 인터뷰(1) 대상자이민숙씨는 42살의 여성으로 목동에서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연세가 70이시다. 위로 남자형제가 하나 있으나, 그는 현재 미국에서 자신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는 홀어머니와 독신자 단 둘이 주거하고 있다.생계비는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고, 부양가족이 어머니 한 분 뿐이므로 큰 어려움은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미국에 있는 남자형제가 매달 약간의 생계비를 주고 있어 경제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2) 독신의 이유이 여성은 자발적인 독신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반 강제적인 요소가 없지 않아 있다. 어린 시절에는 독신으로서 살아갈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주변 여건과 상황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원래 어머니는 미국에서 남자형제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셨다. 그러나, 연세가 많으신 어머니는 낯선 미국 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셨고 그 때문인지 건강도 더 안 좋아지셨다고 한다. 거기다 며느리와의 불화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는 독신자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 갔다 어머니가 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정 내에서 많이 외로워하시는 것을 알고는 곧 바로 어머니를 한국으로 모시고 왔다.건강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하고 있는 미용실을 개업했다고 한다. 물론 집은 미용실과 함께 붙어있다.어머니와 살면서 결혼을 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접었게 될지도 모르고, 형제가 보내주는 것은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저축을 독신의 생활에서 필수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라 언급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수입의 60%를 저축하고 있고 되도록 돈을 아끼며 생활하려 한다고 한다. 그리하여야 자신의 불안정한 미래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다른 어려운 점은 외로움이라는 것을 꼽았다. 바쁜 낮에야 그런 생각이 들 여지가 없지만 늦은 밤이라던가 연인들이 함께하는 날들에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이 든다는 것이다.이 독신 여성은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이러한 날들이 싫다고 한다. 이런 날들에는 여러 대중매체에서 연인들을 위한 이벤트나 기사 내용이 많아 자신이 외로운 독신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스갯 소리로 이런 날들은 왜 없애지 않는 거냐고 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또 한가지 어려운 점은 어려움이라고 할 것은 아니고 모성애는 어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평소 아이들을 유독 좋아하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아이들을 갖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자신이 일하는 곳이 여자들이 주로 오는 곳이니 자연히 아이들도 자주 온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볼 때 자신도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럴 때는 결혼이라는 것에 약간의 필요성도 느낀다 하였다.성적 욕구에 관하여 질문하였으나 이는 개인적인 부분이라 쉽게 밝히기 곤란해 하였지만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자신은 현재 만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성적욕구에 문제를 느끼는 점은 없다고 하였다.(5) 마무리내가 만난 이 독신 여성은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올라온 여러 여성들의 입장과는 많이 대조적인 면을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많은 여성들이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밝히기를 꺼리거나 영원히 독신으로 살지는 않겠다고 지나치게 강조하곤 하는데 내가 만난 이 여성은 자신이 독신이라는 것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 유독 다른 부분 이였다. 이 여성은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고 있는 즉석식품들이 마냥 즐겁다. 요리를 못해도 문제가 없고 전자레인지 하나만 갖추면 웬만한 건 쉽게 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햇반이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2분이면 밥이 완성된다. 또한 삼각김밥도 인기가 매우 높다. 반찬도 마찬가지다. 북어국?육개장?미역국 등 국물요리는 물론이고 즉석 주먹밥?칼국수?수제비?피자 등 없는 게 없다. 그리고 주식개념 메뉴보다는 주말외식을 대체한다든지 이국적인 스타일의 즉석조리식품도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에 발맞추어 외식업체들도 테이크아웃(포장판매) 시장 선전 다툼을 벌이고 있다. 가정에서 직접 요리를 하기보다는 원하는 입맛의 완성된 요리를 사서 먹기를 원하는 맞벌이 부부나 독신자들이 점차 늘어나자 관련 업체마다 테이크아웃 시장 공략에 활발히 나서고 있다.또한 요리재료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가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직장인들 사이에는 식사 배달 서비스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한 달에 4만~7만원 정도만 내면 밥이나 죽은 물론이고 베이글?달걀찜?고등어자반구이에 신선한 샐러드까지 배달해준다.(3) 주 거독신자를 위한 시장이 새로 형성되고 있는데 주거와 관련된 것도 상당히 많은 변화가 생겼다.강남의 원룸 주택들이 밀집한 곳이 있다. 이곳은 원래 단독주택들이 모여 있던 곳인데 불과 1, 2년 사이에 급속히 원룸으로 바뀌고 있다. 전기밥솥부터 냉장고까지 완비해 놓고 몸만 들어오면 되는 이른바 풀 옵션 원룸이 요즘 유행인데 한달 임대료는 100만원이 넘는다. 이에 비해 한 달에 20만원, 2평 남짓의 고시원형 원룸도 형편이 어려운 독신자들에게 인기이다.그리고 국민임대아파트가 일반 아파트에 버금가는 구조를 가진 평면을 갖추게 되는데 대한주택공사는 10일 국민임대아파트 입주자 실태조사와 면담관찰조사 등을 통해 입주자들의 최신 생활패턴이 반영된 국민임대아파트 평면설계를 20여종 개발했다고 밝혔다.이번 개발된 평면은 3,4인 규모의 가족, 신혼부부, 노인가구, 독신가구 등 모든 계층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다.
21C의 희망과 절망-절반의 권리나는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자와 남자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관하여 불만을 갖거나 한적은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를 따로 심각하게 해본적이 없다 하여야 하겠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여성의 권리에 관한 비디오를 감상하고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왠지 나 자신이 뭔가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 비디오를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유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보라는 것 보다는 현재와 같은 가족 구조가 어떻게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알려주시려고 보여주신 것 같다. 그러나 이 비디오의 내용은 나에게 있어 약간의 자극을 주는 경험이였다. 비디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여자들은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하여 사회로 나가야만 했다. 가정에서 살림만 하던 여자들은 그런 상황을 잘 받아들여 열심히 사회에서 일하였다. 아버지, 남편, 아들이 일하던 사회 구조 속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평등하게 일할 기회를 가졌다. 정부는 여자들에게 무기 제조 기술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서구문화 이더라도 아직까지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여성은 집에 있어야 한다’라는 인식이 남성들 머리에 깊이 뿌리 박혀 있을 때였다. 대기업은 여성을 채용하지 않는 데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 당시를 릴리안 길렌은 이렇게 얘기한다. “저는 기증기 기사일을 하였는데 재밌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증기 기사가 되고 싶어졌어요” 이러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유럽(특히 영국) 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사회분위기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일시적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가령 영화같은 경우 영화 대사속에서 여자는 남편이 돌아오면 일은 그만하고 돌아가야죠 라고 말하거나, 광고 속에서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들은 예전의 일을 찾아갈 수 있다라고 하는등 여성들의 일이 한시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릴리안 길렌은 “자격증도 있으니 기증기 기사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으나, 그 관리인은 절대 안된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 이유는 여자이기 때문이였다.1940~1950년 남자를 위해 여자가 존재한다는 의식이 미국에서 다시 강조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돌보며 살아야 한다 라는 의식을 여자들에게 심어주도록 영화, 광고 속에서 암시적인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물론 여자는 당시 남자들 보다도 기술적으로는 뒤떨어졌다. 여자들이 실력이 더 나을때에도 남자들은 얏보는 투로 인정하였다. 여자는 의사가 될 수 없었고, 비행사가 될 수 없었으며, 교환원보다도 더 높이 올라 갈 수 없었다. 당시를 더스티 로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 얘기를 아버지에게 했더니 아버지는 여자는 채용하지 않아라고 하셨죠, 그래서 전 스튜어디스를 하기로 했어요” 그러나,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은 남성에게 잘만하면 데이트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비행기 조종사가 60세까지 할 수 있는 반면 스튜어디스는 32살에는 퇴직을 하여야 했다. 원하는 직장을 구해도 장애는 마찬가지였다. 승진은 할 수 없고, 자기의 부하직원이 곧 자신의 상사가 되어 자신에게 명령하는 일이 빈번하였다.미국의 작가이고, 여권운동가인 베티 프리단은 당시의 사회구조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가사는 지루한 일상이다, 만족 할 수 없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승진의 길은 막혀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여자들이 이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불만을 가진 여성들을 이해할 수 없어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콜린 페로같은 경우 자신은 가사일에 만족한다라고 하며 자신은 압박, 불안이 전혀 없고, 오히려 가사일만 하는 것이 즐겁기까지 하였다라고 하였다.1963년 미국사회는 급격히 변동하기 시작하였다. 흑인 인권 운동이 진격되고, 여성운동도 급격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소수인종이며, 흑인이며, 여성이며 모두가 권리를 얻게 되었다. 존슨 대통령의 민권법(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법)이 통과되자 여자들은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꺼번에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아직도 남성들은 여성은 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68년 포드사에서 일하던 여성들은 남성보다도 20% 더 낮은 급료를 받고 일하였다. 조이스 위든은 이에 대하여 불공평하다라고 주장하였고, 다른 여성들 또한 이에 동의하였다. 계속 불만을 쌓아온 여성들은 결국 분노하였고, 결국 187명의 여성들은 파업을 하였다. 3주간의 분쟁을 하고, 결국에는 회사는 여성들의 요구 즉 남성들과의 동등한 임금 요구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 사건은 국가적 문제가 되었고, 2년 뒤에는 동등한 임금법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이렇듯 여성의 권리가 향상된 것이 전쟁과, 여성들의 진취적인 추진력의 영향도 있었지만, 혁신적인것은 화학의 힘이였다. 먼저 피임약은 여성에게 임신을 조절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바로 성의 혁명이였다. 미국은 배란 억제 출생 제한정책으로 1966년에는 피임약을 600만명이 복용하였으나, 1978년에는 1800만명이 복용하게 되었다. 에이미 코엔은 그 당시의 자신은 어머니가 몰랐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동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피임약이 평등을 가져다 주었다 라고 하였다.피임약이 발명된 이후, 여성 운동가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대대적인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모든 남성주도의 일에 대항하였다. 이에 보수적인 사회 구성원들은 ‘당신들은 가장 잘사는 미국의 국민이다. 잘사는데 대체 뭘 원하느냐’라며 대응하였고 여성인권 운동가들의 동등한 책임에 관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특히 여성 운동가들에게 세계미인대회는 .가장 치욕적인 것이였다. 여성운동가들은 다 같이 모여 속옷과, 브라, 거들 등 여성을 압박한다고 여기는 물건들을 가져와 다 같이 모인 대로변에서 물건들을 버리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는데 이에 언론은 뜨겁게 반응하였다. 언론을 집중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평판이 문제였다.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미국의 여성운동가들을 보고 자극을 받기 시작하였다. 리타 헨드릭스는 당시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TV,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이용하였다. 이것은 즉각 모든 가정에 전달이 되었다. 한달안에 34000명의 회원수가 늘어났다. 제대로 된 사무실 조차 없었지만, 사람들이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나 어떤 남자들은 부정적인 행동으로 반응하기도 하였다. 거리에서 운동을 하면 휘파람을 불거나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우리들은 바꿔보기로 하였다. 노래를 하면서 시위를 하는 것이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시아의 여성들의 지위도 변하게 되었다. 이란은 1968년 국왕이 왕비를 황후로 추대하였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던 이란의 여성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초등교육도 받을 수 없었던 여성들은 동등한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인도에서는 여성수상이 나왔고, 이란 스리랑카도 마찬가지였다.사회에 남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 했던 선구자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용기와 성공을 보여줘야 했다. 서부여성들은 장애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일을 헤쳐나갔다. 자동차 경주도 하고, 야구도 하며, 투우사도 하였다. 그러나 전문직은 여전히 극소수였다.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는 셈이였다. 그러나 이론상 한계는 없었다.1980년 이후부터 광고 내용은 추진력을 가진 여성을 찬양하는 광고내용으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까도 언급하였다 시피 모든 여성들이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였다. 1979년 이란은 틀렸음을 증명하였다. 이란의 여성들은 베일을 다시 쓰기로 하였다. 변화에 앞장섰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제는 어린 여자아이도 베일을 쓰게 하였다. 코린이 정한 전통적인 사회로 돌아가길 촉구하였다. 호우메니가 베일 안쓰는 여자는 밖에 못 나오게 하자 이에 개혁을 원하는 여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을 원하는 이란 여자들은 다시는 베일은 쓰지 않겠다라고 시위를 하다 결국 경찰에 의해 해산하게 되었고, 이후 종교적 율법에 따라야 했다. 서부여성과 다르게 아시아 여성들은 훨씬더 불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다. 중국의 일반 국민들은 아들을 딸보다 더 가치있게 생각하였다. 국가가 산아제한을 하자, 오히려 이 문제는 더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낙태와, 기아, 유아살해는 이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아프리카의 야만적 행위도 마찬가지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순결을 지켜줄 것 이라는 믿음으로 할례를 시키는 것은 여자에게 길고 큰 고통을 남긴다. 수단의 여성들은 90%가 5살에 할례를 한다. 정부는 이를 불법화하지만 현재의 어머니의 어머니,또 그어머니의 어머니등, 남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 가치, 분위기가 이들을 할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아프리카는 200만명 이상이 할례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