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정한 영웅의가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장이모 감독의 “영웅”을 통해 본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분석 -들어가며..올해 초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두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그 두 배우였는데, 이 영화의 감독이 장이모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무작정 극장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영웅이란 영화는 대서사시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스케일이 너무나 큰 영화였으며, 보는 내내 가끔씩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장면들과 중국 진나라의 통일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던 영화였다. 장르에 어울리지 않게도 여운이 길게 남았던 영화이기도 하며,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주제와 형식을 가진 영화라 이번 레포트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1. 영화적 배경에 관련된 생각들..학창시절 국사책 혹은 세계사책에서나 한번쯤 보아왔던 전국 7웅이라 불리던 국가들이 지배하던 춘추전국시대의 중국대륙이 이 영화의 주 배경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사막과 왕궁을 주무대로 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시기는, 끝없는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참혹한 시기였다. 전쟁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이었고, 평민들의 삶 역시 무법천지로 전락하였던 시기이다. 하지만 장이모 감독은 화려한 영상과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반면, 일반 평민들의 모습은 한번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것에 대한 추측은 그들의 대화에서만 간간히 느껴질 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진정 영웅이란 의미가 무엇이기에 자객들과 왕 그리고 그의 군사들만이 계속 비춰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 말이다.전통적으로 중국 무협영화는 무보다는 협을 강조했는데, 이 협의 사상은 남을 돕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 친구에게 충심을 다함, 용감성, 재물을 중시 여기지 않음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을 아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라는 근본적인 물음에는 충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전통이라 유지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2. 영화 속 캐릭터에서 느껴보자..무명은 가장 먼저 나레이션과 함께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주인공이다. 고아이기 때문에 자신의 본래 이름을 알지 못 한다. 동양사회에 이름이 없는 존재들은 꼭 등장을 하는 것 같다. 비슷한 문화권이라서 그러한 건지 말이다. 무명은 영정과 함께 영웅의 내러티브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이다. 무명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인생과 국가관을 알 수 있게 한다. 캐릭터 속에 숨겨져 있는 감독 혹은 영화의도는 결론부분에 가서 동시에 논하려고 한다. 파검은 우선 내가 참 좋아하는 캐릭터다. 그는 비설의 연인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작다고 볼 수 없는 반목이 존재하고 있다. 그는 천하를 논하고, 영정(진시황)의 존위를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는 뜻밖의 주장을 펼친다. 바로 천하 통일이 가져다 줄 민심의 안위가 그에겐 자신의 조국 조나라보다 소중하다는 것이다. 비설은 파검의 연인으로, 그녀는 진실로 파검을 사랑하지만, 나라를 위한 충절에 있어서만큼은 조금의 양보도 없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파검과의 반목을 불러오는 부분이다. 이러한 곧은 성격과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인 비설로 인하여 파검은 때로 혼란스러움을 겪기도 한다. 여월은 주인을 위한 충절과 사모의 정으로 가득한 비련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함과 동시에 만리장성의 건축으로 유명한 진시황 영정은 우리의 기억 속에 광폭한 인물로 기억되어 있다. 하지만 장이모의 영웅에 그려진 이미지는 전국시대 통일의 꿈을 알아주는 무사가 있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또한 그 무사들의 죽음에 충심으로 슬퍼할 줄 아는 성군의 이미지다. 이쯤이 되면 이 영화가 왜 그렇게 찬반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장이모 감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는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영화를 보고 받아들이는 관객의 몫일뿐이다.3. 색에 물들어버리다.영웅의 색은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영화나 생활에서 우리가 흔히 비교를 하고 연상할 수 있는 색들을 그대로 영화에 옮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색에 대한 찬사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눈에 띌 만큼 강렬한 조화와 대조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무명을 비롯한 진나라 군사들을 표현하는 색은 검정색이다. 영웅에서 검정색이 강력함을 위시하는 부분은 바로 진나라의 군사들이 진군하는 장면과, 무적 활 부대가 엄청난 양의 화살을 쏟는 장면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검정색은 악의 상징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진나라는 통일의 과업을 이루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존재하던 것의 파괴가 밑바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파괴하고 절대적으로 군림한다는 것은 검정색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다. 붉은색은 모두가 쉽게 떠올리듯 질투와 욕망 등 감정의 격렬한 변화를 잘 내보이는 색이다. 또한 중국의 전통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 붉은색의 의상은 조나라 학자들의 충절을 곧게 표현함과 동시에 파검과 비설 사이에 존재하는 엇갈린 감정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붉은 색에서는 감정의 변화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질투의 감정이 극에 달한 비설은 결국 파검을 찌르고, 그의 하녀 여월은 사모했던 주인의 복수를 위해 비설과 결투를 벌인다. 이 장면은 가장 화려하고 강력한 색감의 대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붉은 의상과 노란 은행잎의 강렬한 시각적 대비효과와 더불어, 노란색의 잎사귀들이 여월이 죽는 부분에 다시 붉은색 잎으로 바뀌는 장면은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영화에서 파란색은 헌신이며 희생이다. 그래서 숭고하게 다가온다. 연인의 사랑과 자신의 희생으로 조국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주고 있는 색이다. 흰색은 순결함과 역시 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흰색에서는 파검과 비월의 운명적 죽음과 고귀한 그들의 사랑이 표현되는데, 그것은 여월의 눈을 통해 슬퍼하고 통감할 수 있다. 파검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비월의 감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말이다. 무명이 영정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장렬한 죽음의 길을 택했을 때 교차장면으로 보여준 파검과 비월은 사랑을 위한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은 비장하기만 하다. 검정색으로 시작해 붉음과 푸름 그리고 흰색으로 이어져 오는 연결고리에서 장이모 감독의 메시지를 느낀다.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시각에 따라 역사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4.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다.끊임없이 내리는 빗물, 빗물 사이를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현의 소리, 장천과 무명의 결투에서 두 배우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정만으로 결투의 진행을 표현하며, 마음속의 결투는 흑백장면으로 교차해서 나타내었다. 아름다운 동양의 미를 표현하고자 한 장이모 감독은 심안무를 스크린으로 옮겨 동양적인 내공의 힘과 무명과 장천의 높은 무공의 수위를 표현하려했다고 한다. 또한 호수에서 무명과 파검의 대결 역시도 한편의 산수화를 감상하는 듯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중국이 한국은 아니지만 파검의 모습은 한을 승화시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들은 서로의 몸에 상처를 내어 승부를 내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이 역시도 끝장을 보지 않아도 되는 동양의 미덕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너무나도 중국적인 글씨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이건 한자에서만 가능한 세계이다. 서예와 무공의 동일한 이치 말이다. 황제는 그 깨달음을 일러주며 무명에게 칼까지 맡긴다. 이미 깨달음의 큰마음으로 무명의 마음을 제압했으니 그가 말한 검의 최고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무명은 영웅으로의 짧고도 장중한 걸음을 옮긴다.
- 한국문화론(韓國文化論)을 읽고 -조흥윤 저, 東門選現代新書, 2001휴학기간을 포함하여 대학생이 된지 5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문화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처럼 한마디로 정의내리기에는 문화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척이나 크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국문화론을 읽으면서 부족하기는 하지만, 문화라는 커다란 범주 아래 조금 더 범위를 좁히고 들어가 한국문화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에 어느 정도 명확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한국문화라 하면 항상 전통문화 즉 현재가 아닌 과거의 문화라는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던 내게 단절된 과거의 문화가 아닌 현재까지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언론학특강’이라는 전공수업의 오진환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이 난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던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라는 말이었다. 이 책에서 종종 언급되는 문화인류학이라는 말이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을 해본다. 이제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주는 소중한 연결고리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던 내용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풀어볼까 한다.문화는 한 민족이나 사회 전반적인 삶의 모습으로 한국 문화란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살아온 삶의 모습 전반을 일컫는다.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총체론적 관점과 관념론적 관점으로 나누어진다. 한 사회의 집단의 문화 현상 과정과 그 요소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알기 위해서는 총체론적 관점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총체론적 관점에서 문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문화상대주의라는 단어를 언급할 수 있는 건가란 생각을 해보았다. 문화를 총체론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체계로서의 전체 문화를 살피고 그 하위 문화가 전체의 얼개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을 헤아리는 구조적이고도 역동적인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책에서 문화의 속성에 대해 5가지 정도로 정리를 하였는데 그 맥락 속에서 어떤 사회의 문화전반을 바라본다면 자기 자신이 그 사회의 문화자체를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체질적인 구조로 보았을 때 한국인은 선천적으로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이라고 한다. 논리를 따지기보다 느낌과 깨달음에서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한국 문화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는 종교적이란 말이 나온다. 처음에는 왜 종교적인거지라는 반문을 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종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선입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저번 ‘한국의 전통문화’ 수업시간에 들었던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무(巫)에 관한 잘못된 인식처럼 말이다. 한국의 종교 문화는 한 종교의 절대 신념 체계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여러 다른 종교들이 서로 공존하는 그 특징.. 이것이 우리나라의 문화를 전적으로 잘 드러내는 특징이라는데 공감을 한다. 언젠가 한국의 문화는 비빔밥과 같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조화 속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과거부터 지금 현재 우리 사회 전반에 어떤 갈등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봄가을 무리지어 산이나 들로 나가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겨한다고 한다. 세시 풍속 전체를 통하여 같은 면모를 보이고, 일하면서 놀이를 곁들이는 놀이 문화로 드러나는 것이다. 일과 놀이와 삶이란 한국인에게 있어서 서로 떨어져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조화의 문화... 음양의 생성 원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것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무한한 창조를 가능케 하는 역동적인 기운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역사적으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보다는 현재 우리들의 삶에 비춰 생각을 해본다면 그 전통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이어져 내려오는 것 같다. 아무리 개인화되었다고들 하지만 누구나 그런 경험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공동체라고 일컬어지는 그 속에서 함께하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조화의 문화에 대해 이 표현을 몰랐던 알았던 크게 동감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 조화의 문화는 나아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다. 한국 문화의 역사적 전통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며 우리 민족의 맥이 절단당한 것이 아니라 저변에 깔려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역사 속에서 중간중간 시련도 있었지만 한국 문화는 외형을 달리하면서 그 정신은 계속 이어왔다는 생각이다.홍익인간의 사상의 연원과 의미에서는 정말 생각지 못한 것을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을 신화라고 생각하며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과 홍익인간이 그저 국사 시험지에 주관식 답을 쓰듯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라는 아주 피상적인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솔직히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얼마 전 MBC 모프로그램의 선정도서로 채택되었기도 했는데 졸업하기 전에 한번 읽어보고 생각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 책에서 말하듯이 홍익인간이란 말이 포함하는 의미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며 문화적 주체성이라는 것을 깨달아감에 있다는 것을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버림받고 낮은 데로 임하는 것이 결코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한국 신화 속의 여성문화라는 글을 읽으면서 단군을 비롯한 몇 가지 신화가 나오는데 사실 신화의 내용에 대해서 이해가 안 간다기보다는 신화라는 것 자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신화가 가지는 의의라던가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많이 든다. 그 안에서 여성문화를 찾아 열거를 하기는 하였지만 현재 내 상태로서는 머리 속으로 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튕겨져 나가는 것만 같기만 하다.이 책이 12가지 주제로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읽어보니 제각각인 듯해도 결국은 하나의 흐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민중 문화의 성격이란 글에서도 이런 것은 드러난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는 왕조 중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심지어 국사책에서도 민중의 역사는 가장 마지막 단락에 조금 언급되어 있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왕조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고질적인 정치사 중심과 지배층, 영웅 위주의 안목, 그리고 관념적 이해의 전통을 알고자 함이다. 민중이라 함은 한국 역사에서 피지배층과 생산층 또는 서민을 구성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어 온 사람들을 민중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민중은 역사의 주된 흐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한국의 민중 문화는 두 가지 특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놀이와 신들림이라고 했다. 이 둘은 모든 고대 굿판으로부터의 연원에서 서로 깊이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가서부터 사회가 점차 분화하여 전개되면서 민중 문화의 커다란 줄기로 각기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여 온 것이다. 이는 일제 식민지와 산업화와 서구화를 거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서구적인 가치관의 유입으로 민중 문화의 전통적인 특성들은 왜곡이 되고 뒤로 쳐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책에서처럼 결코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정말로 그것이 사회문화 전반의 주류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문득 살아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경우들이 종종 있을테니 말이다. 조화의 기운이 서서히 발동하고 있음에 믿음을 두는 것이다. 한국인의 얼굴이란 주제에서는 한국인의 얼굴을 체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하여 놓은 것을 보면서 상당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평소에는 상상조차 아니 의문조차 품어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자료가 있다는 것은 신문방송학에 대해서 배우는 나로서는 부끄러운 일일수도 있겠지만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상이라든가 탈에서 보여지는 얼굴에 대해서는 그나마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말이다. 또한 한국의 미인관은 얼굴의 각 부위가 주는 부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세계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우러나는 아름다움을 갖춘 것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고전적인 기준은 한국 사회가 서구화되면서 내가 생각해도 많이 달라진 듯 하다. 서양적인 기준과 동양적인 기준을 구분하는 게 어찌 보면 모호하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자 한국인의 얼굴이다. 우리의 얼굴을 되찾는 것은 자신을 알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존재하게 하고 성장하게 한 그 역사와 문화를 알고 그것을 아끼는데서 출발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다. 단순히 겉으로 보여 지는 모습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내면의 모습부터 만들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적 향토 축제의 정립, 한국 음식 문화의 형성과 특징, 무형문화재의 개념과 성격, 장황 문화의 뜻과 길이란 것을 주제로 한 내용들 역시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정해진 분량을 초과할 것 같아서 생략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하지만 장황문화의 뜻과 길에 대해서 읽으면서 그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초, ‘아! 고구려전’에서 보았던 여러 작품(이것들을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들이 생각이 났다. 그 때 보면서 감탄을 많이 했었지만 한편으로 제대로 보관되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도 컸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책이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앞의 내용들처럼 집중해서 읽기보다는 내가 가진 생각들과 경험들을 떠올리며 읽게 된 것 같다. 관광문화론 부분에서 관광 산업이 경영면에 치중한 사고방식으로서의 접근했다는 데 많은 동감을 한다. 그 문화 자체에 대한 외형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돈이 없으면 관광도 못 한다는 말이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것일 수도 있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며 이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를 단순히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논리들로 관광산업을 풀어나가서는 안 될 것 같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지배되는 인간 -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18세기 과학의 시대이자 계몽의 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이성에 대해 거침없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의 철학은 로크와 버클리의 영국 경험론 전통을 따르면서도, 과학의 시대와 많은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우리의 천부적 능력을 바탕으로 지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경험이 중심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였다.인과법칙은 습관의 산물이다. : 흄의 인성론흄은 인간에 관한 학문이 다른 학문들의 유일한 근거라고 주장하며, 인간성의 연구에서도 경험과 관찰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모든 다른 과학들이 인간학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인 인간학을 연구하는 것이 실로 모든 인간 지식의 기초를 연구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그의 연구는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인식의 한계는 무엇인가?’의 경험론의 물음을 하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형이상학이 원래 학문이 아니며, 오성이 절대로 다다를 수 없는 대상에게 다가가려는 인간의 허영심의 쓸데없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식의 기초는 무엇인가를 묻는 그의 의도는 감각지각에 의한 인식이 한 가지 종류의 인식으로 구성되는 오직 하나의 인식기초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종류의 인식이 있다는 오래된 철학적 신념을 파괴시켰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감각지각에 의한 일상적 인식과 그것을 뛰어넘은 이성을 원천으로 하는 일종의 다른 인식이 있다고 생각했다. 후자의 인식은 실재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게 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는 실재의 본질에 관한 이론인 형이상학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그의 형상이론에 집중되어 있었고,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정신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에 대한 이론에 집중되어 있었다. 흄은 두 종류의 인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이성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인식이 거짓이며 환상이라고 꼬집는다.인간의 마음은 지각의 다발이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다 : 흄의 윤리학흄은 인간에 대하여 “나머지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상호 계기하는, 그리고 끊임없는 흐름과 운동 속에 있는 오직 상이한 지각들의 다발 도는 집합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흄의 유명한 자아 이론이다. 흄은 인간본성의 개념에 대한 옹호자이지만 자아개념에 관해서는 부정한다. 흄의 경험론은 내가 경험의 객체이자 주체이기 때문에 경험에 한계가 생긴다. 즉, 나에 대해서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결국 인간본성에 관한 논쟁은 자아의 본성에 대한 문제와 따로 생각할 수 없으므로 흄의 주장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흄은 이성을 통해 우리가 사물들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반면, 행동의 원동력은 욕구라고 생각했다. 이성은 우리에게 목적을 정해 줄 수 없고, 다만 우리가 이미 욕구 하는 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기에 이성은 감성의 노예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성이 감성에 복종해야만 한다고 하는 흄의 관점은 우리가 두 가지 종류의 인식, 즉 수학과 논리학의 형식적, 추상적 진술에서처럼 관념들에 관계에 대한 인식과 감각 인상들로부터 나온 사실에 대한 인식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로 하여 행동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욕구, 감정, 정서무엇이 우리에게 즐거움 또는 괴로움을 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 등이다. 수학과 인과 관계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행위를 유발하는데 소용없다. 그러한 인식들은 단지 우리가 욕구에 따라 하고자 하는 것을 획득하는 일을 돕는 데 유용할 뿐이다. 또한 그는 실천이성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했으며 이성을 협소하게, 감정을 폭넓게 정의했다. 인간이성 능력을 격하시킴으로써 도덕의 영역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는 것은 없다. 흄은 도덕을 불변의 인간욕구에 기초시키면서 ‘나의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어떠한 욕구나 선호라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없고 이성에 의해 변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성은 주어진 목적에 대한 수단을 모색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하던 간에, 그것은 이성의 판단에 입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지 간주해야만 하는가를 묻지 않고 그 대신 사람들이 경험적 사실 속에서 승인하는 것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도덕적 승인과 승인된 행위들 사이에 어떤 끊임없는 접속이 존재하는지 않는지를 살펴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도덕적 보편심이 자비심에 기초한다고 결론짓는다. 이에 따라 그는 윤리학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성적인 도덕 규칙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합리론자들과 규범윤리학에 대하 다시 한 번 공격함으로써 윤리학이란 단지 우리들의 자비심, 동정심, 기쁨 ,유용성 등에 대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남겼다.인간본성과 윤리학에 대한 흄의 생각은 사회에 대한 생각으로 넓혀지는데 인간본성의 허약함과 고약함으로 인해 사회는 인간본성에서 나오는 일부 나쁜 결과를 최소화하는 체제를 마련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회계약의 개념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여론에 의해서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전적으로 사회에 의존적인 까닭은 서로 협력함으로써 우리의 허약함을 보상받을 수 있고 강력함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매우 불완전한 존재로서 멀리 있는 이익보다 가까이 있는 이익을 선호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정부가 세워지게 되고, 행정관들은 그런 이익의 증대를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그들은 이익 증대를 위해 때론 대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기도 하는데, 소수일 경우엔 법으로 규제할 수 있지만, 다수를 통제하려면 국가라는 강압적인 체제가 있어야 한다. 국가는 이익을 위해서 습관과 관습을 이용한다. 흄은 인간 공동생활에 있어서 습관과 관습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인간의 관습은 그것을 어겼을 때의 불이익을 겪게 됨으로써 단계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확립되어 왔으며, 이러한 관습은 명시적인 합의도 아니며 어떤 약속의 결과도 아니다. 상호협동은 점진적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관습이 확립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간 상호간의 신뢰는 쌓여 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사회의 습관과 관습을 만들고 그것에 의해 인간은 지배받게 된다. 이러한 흄의 견해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와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우리는 한결같이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갑지 않은 결과를 피하기 위해 점차 우리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고 스미스는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급진적 변화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인간 소외는 현재까지 계속 이어진다.-“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보고..-시작하기에 앞서..이 영화는 나름대로 꽤나 알려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비디오 가게에서는 볼 수 없었다. 한참을 구하러 다니다가 결국 흔히 사용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에서 찾아 CD로 굽는 것이었다. 흔한 영화가 아니어서인지 이것조차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며칠 전에 피디박스에 누군가가 올려놓은 것을 발견하고 바로 다운을 받았다. 3시간 정도 걸려 다운받은 영화인지라 더욱 애착이 많이 가게 됨을 느겼다. 밤에 모니터 앞에 앉아서 영화를 틀면서 했던 생각은 혹시 이거 공포영화인가라는 생각이었다. 제목은 많이 들어보았고, 또 영화에 대해서 안다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이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더군다나 이번 과제가 이 영화를 보고 독일 표현주의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교수님의 말이 떠올라 더욱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모니터에 영화는 시작되었고 1시간 30분 동안 지루하지 않게 영화를 봤다.(기존의 독일 영화들을, 파니핑크를 제외하고, 비몽사몽으로 보았다면 말이다.)“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음.. 이것이 아랍의 속담이라구?..”잠식이란 말의 뜻에 대해서 한참이나 다시 생각해보았다. 과연 잠식한다. 잠식해버렸다라는 표현을 나는 어떤 경우에 주로 쓰고 있는가 고민을 해보았다. 지배적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느껴졌다.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이 이 두 주인공의 영혼 혹은 마음을 지배해 버리겠구나라는 생각.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는 꼭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아니면 인간 대 인간의 순수한 마음이건 평화로움 마음에 불안함이 찾아왔다는 건 참 슬픈 일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엠미와 알리는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그 불안함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들의 표정, 행동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이 그 둘 사이를 가깝게 밀착시키기도 하고 때론 멀게 만들기도 한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일거다. 영화 후반부에서 그들이 느끼던 불안함으로 인해 그들은 전보다 더 강한 결속력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알리의 병으로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된다. 불안감은 사회가 급변하면서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번지는 바이러스다. 이것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엠미가 알리를 보낸 것처럼 숙제로 남는다.또한 아랍인으로 나오는 알리는 흔히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1960년대 이후 서독 경제의 고도성장의 뒷면에 존재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그들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단지 일하는 기계 혹은 하인으로 취급하기 일쑤다. 반면 엠미는 남편을 잃은 노부인으로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결혼시키고 홀로 살고 있다. 엠미는 늘 외로우며 누군가 말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엠미와 알리의 첫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은 백인 중심의 1960년대 서독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둘은 우연하게 아랍인 술집에서 만나 함께 춤을 추게 된다. 사실 엠미가 그곳을 찾은 것도 좀 의외이긴 했지만(나중에 영화를 다 보고 들었던 생각) 결국 외로움에 그곳까지 간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알리와 엠미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헤어지는 순간에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썩 어울리진 않지만 둘은 자신들에게 무관심한 세상에서 사랑에 빠져든다. 둘은 행복하고 싶지만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 주변의 시선에 의해 오히려 불행해진다. 전체적인 사회의 분위기도 이웃과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며 마침내 서로 불행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인간의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모습도 영화에서 드러난다. 주위의 비난 가득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여행을 다녀온 그들에게 주위 사람들은 알리와 엠미에게 갑자기 친절해진다. 가구를 옮겨 달라는 이웃의 부탁, 젊은 청년인 알리를 남편으로 둔 것을 부러워하는 직장 동료들, 가게 매상 때문에 친절해지는 잡화점 주인 등 모두 자신의 필요에 의해 타인에 대한 태도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의 감독 파스빈더는 영화의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비난하는 듯하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문제인 듯하다.표현주의 기법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면 표현주의란 한 프레임 안에서 모든 것들을 다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보면 주로 배경이 실외보다는 실내신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실내라는 공간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들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 소외라는 측면에서 실내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 즉,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단절된 소통구조를 보여주고자 한 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또한 외부에서 보여지는 씬들도 인간 소외의 단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소외의 현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인간다운 사회로의 외침으로 표현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
Ⅰ. 맥루한은 종이에 영상을 쓴다.시나리오 작가는 필름에 글을 쓴다. 맥루한은 종이에 영상을 쓴다.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책에는 뼈대가 있다. 즉, 줄거리가 있거나 차례가 있다. 내가 글자를 배우고 처음으로 혼자 읽었던 그림 동화도 그랬고 대학에 와서 중간고사 혹은 기말고사를 보기위해 읽었던 논문들도 그랬다. 그런데 이 책, 는 줄거리도 없고, 차례도 없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구성된 활자문화에 익숙해져 살아온 나로서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들에 비해 몇 배의 노력을 더 해야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책을 두 번, 세 번 읽고 맥루한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조사해 가면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내 머릿속에서 제작된 기분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 다큐멘터리를 시나리오로 옮겨 적는 일이다. 글을 영상으로 만드는 것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영상을 글로 쓴다는 것 또한 결코 쉽지 않은 작업임을 새삼 느낀다.. 맥루한은 은유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책 제목에서도 이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message라는 말을 massage로 바꾸어 표현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책의 주요 내용들은 미디어와 전자정보에 관한 맥루한의 예측, 예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1967년에 발표되었지만 책에 담긴 내용들은 2003년을 살고 있는 내가 느끼기에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미디어에 관해서 만큼은 맥루한을 노스트라다무스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맥루한이 현대에 와서 재조명을 받고 그의 이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진 것은 거의 예언에 가까운 이론의 내용이 현재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1967년 발표 당시로써는 맥루한의 이론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이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까? 무엇이 맥루한이 말한 미래사회의 모습일까? 이에 대해 맥루한이 제시한 해답과 나의 견해를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한다.Ⅱ.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맥루한은 말하고 있다. “the media is the message".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라는 말은 미디어 자체가 어떤 메시지를 만들어 낸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미디어는 커뮤니케이션과정에서 메시지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매개체 개념이다. 바로 이 매개체가 송신자가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를 형성하고 수신자에게 전달 할 수 있다고 맥루한은 말한다. 그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미디어 그 자체가 메시지를 형성할 뿐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미디어가 송신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옷을 입히거나 덧칠은 할 수 있지만 원래의 내용 자체는 무시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강력한 것은 인정하지만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는 될 수 없다. 그러나 맥루한의 이론을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만약 이론을 내 놓을 당시 그가 미디어와 메시지와의 관계를 적당히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설명했다고 하면 후대로 오면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가 지금처럼 활발해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제 중요한 것은 “the medium is the massage". 아직도 미디어를 맛사지에 비유한 맥루한의 의도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해석 과정을 거쳐 맛사지의 의미를 만들었다. 'massage' 는 피부에 자극을 주어 신진대사를 돕거나 병을 다스린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극’과 ‘신진대사’에 주안점을 두어 이 책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책에서 맥루한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둘러본다는 뜻으로 맛사지의 개념을 설명했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바퀴는 발의 확장이고, 책은 눈의 확장이고, 옷은 피부의 확장이고, 전자회로는 중추신경의 확장이라는 즉, 인간 기능의 확장이 미디어다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인간기능의 확장은 맛사지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미디어는 하나의 자극으로 설명된다. 미디어라는 자극을 받은 수용자들은 자극에 따라서 반응하는 신진대사 활동을 한다.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자극(미디어)라는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서 나온다.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미디어가 맛사지라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한 필자의 노력이 그만큼 많이 필요한 책이었다.Ⅲ. 미래사회와 미디어이제 맥루한이 미디어가 맛사지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장치로 사용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목차도 없고 형식도 없는 이 책에서 구조를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 책만으로는 맥루한의 이론을 이해하기 힘들어 그가 에서 언급했던 ‘미디어 기술 결정론’을 끌어들이기로 한다. 미디어 기술 결정론이란 수업 시간에도 배웠듯 테크놀러지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는 이론이다. 기술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라고 말해도 그른 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맥루한은 에서도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사회를 형성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미디어였다고 말하면서 미디어 역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미디어가 사회의 변화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렇게 변화된 사회를 미래사회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미래 사회는 미디어에 의해 변화되고 좌우될 것이라는 게 맥루한의 생각이다. 나는 맥루한이 말한 미래 사회를 세가지로 범주화해 보았다. 미디어와 전자정보, 미디어와 대중 사회, 미디어와 교육이 그것이다.ⅰ) 먼저 미디어와 전자 정보에 관한 맥루한의 생각을 살펴보자. 맥루한은 미래의 사회는 전자정보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권리와 정보를 공개해야할 필요성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60년대 발표된 생각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는다. 실제로 현재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가장 큰 적은 정보 유출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매개로한 정보의 동시성과 빠른 확산 때문에 사생활 침해가 점점 더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맥루한의 생각은 시대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침에는 내가 누구라는 걸 알았는데 저녁에는 모르겠다는 어느 인간의 말은 전자정보의 확산이 얼마나 빠른가를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맥루한은 이와 같이 미래사회의 전자정보를 장밋빛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 최신의 테크놀로지는 전쟁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지적하면서 진짜 전면 전쟁은 정보 전쟁이라고 했다. 사실이다. 그가 예측한대로 정보전쟁은 이제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이 되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정확하고 빨리 습득하는가가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로 던져지면서 이제 그들 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정보의 메갈로폴리스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정보 전쟁이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 지역간, 개인간의 전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맥루한의 말처럼 지구촌의 개념은 이미 오래 전에 형성이 되었지만 정보라는 민감한 사항을 두고서 국가간 정보전쟁을 할 만큼 지구는 차가운 세계가 아니다.ⅱ) 두 번째로 미디어와 대중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맥루한이 대중 사회를 이야기할 때 가장 앞서 언급되는 것이 인쇄술과 도안 복제술이다. 인쇄술의 발명은 인간을 점차 시각 중심적으로 만들었다. 문자가 없던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통합한 생활 영역에서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을 이용한 형식 없는 삶을 살았다. 문자가 발명되고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인간이 가진 감각이 시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인간이 점차 시각 중심적이 되었다는 것이 맥루한의 생각인 듯싶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사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개인주의화하기 시작한다.맥루한의 이론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대중 사회 이후 사회의 모습이다. 시각 중심적이던 사회는 대중 사회를 거쳐 전자정보가 확산된 사회로 감에 따라 오히려 원시에로 회귀한다고 맥루한은 지적했다. 이것은 즉, “전자회로 체계는 원시인들의 다원적 공간 개념을 재창조” 한다는 것인데 인간 감각의 확장이 미디어라는 개념에서 볼 때 전자회로는 시각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을 이용하게 하고 이것은 결국 사회에 원시 감정과 부족감정을 다시 건설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회가 시각 중심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에는 수긍을 하지만 아직까지 사회가 원시 감정으로 회귀한다는 것에는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과거의 원시사회와 미래의 원시 사회에 개념의 차이가 있다면 개인, 집단의 차이일 것이다. 과거 원시 사회에서는 개인이라는 개념보다 집단, 혹은 부족이라는 개념으로 개인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반면에 미래 원시 사회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미디어의 의무가 될지도 모른다. 사회는 이미 대중사회를 넘어 그 이상의 사회로 가고 있지만 개인이 다시 집단 중심으로 모일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실례로,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시초가 되었던 인쇄술도 이제는 개인화해 가고 있다는 것을 들겠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만을 위한 단 한권의 책을 만드는 작업같이 예전에는 대량 생산만 가능했던 항목들이 점차 개인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ⅲ) 교육에 관한 맥루한의 생각은 참 신선하고 개방적이다. 그는 진지한 것만이 배움은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미래사회에서는 미디어에 의해서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스스로 습득한다고 보고 그것이 반드시 경험에 의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현대의 아이들은 직접 경험한 것을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특히 텔레비전이나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 체험한 간접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극히 시각에 중심된 반응이다. 이러한 현상이 아이들에게만 한정되어 일어나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항상 교육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미디어에 의해 습득된 지식은 절대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서 남태평양 어딘가에 있는 섬의 아름다운 모습을 방영했다고 하자. 이것을 시청한 사람들은 섬의 아름다움을 실제로 보지는 않았지만 남태평양의 섬의 경치는 장관이라는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 섬이 정말 남태평양의 섬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은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미디어 자체”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