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관과 관식, 관모의 형태와 성격신라의 금제 장식들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금관은 세계 전역에서 출토된 고대시대의 금관은 10점이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그중 6점)이 신라금관일 만큼 신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금관이다. 그러나 이 금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사용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여러 연구 성과가 밝혀지고 있다. 또한 그 모습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신라의 대표적인 유물인 금관과 관식, 관모의 형태적 특징과 그 성격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신라의 금관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했을까. 그에 대해 연구자들은 동로마기원설, 서역설 등 유럽이나 서역에서 기원하였을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유목민족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스키타이, 사르마트, 흉노, 선비, 거란 등의 무덤군에서 금관을 비롯한 머리장식이 종종 발견된다. 사르마트의 금관은 흑해 북안의 로스토프 지역 노보체르카스크 호흐라치 무덤군에서 출토된 여사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관이다. 넓은 관테 위에 나무와 동물(사슴, 염소) 모양의 관식을 달고 곡옥모양과 나무열매 모양의 장식 수십 개가 드리워졌으며, 그리스의상을 입은 여인을 조각한 수정이 붙어있는 모습이다. 그 연대에 있어서 논란은 있으나 신라 금관들보다 비교적 400~500년 정도 이른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형태에서 신라 금관과 유사한 면이 많이 발견된다. 신라 금관의 나무모양의 세움장식이나 녹각모양 장식, 곡옥 등이 바로 그것이다.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아 테페 6호분에서 출토된 역시 여성의 것이다. 서기1~2세기의 로만글라스와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테에는 얇은 금판에 이파리가 6개씩인 금꽃 20송이를 붙여 장식하였으며 5개의 나무모양 세움장식 역시 관테와 같이 꽃으로 장식하였으며 새한쌍이 표현되어 있다. 역 붙인 후 끝에 역시 달개를 달아 신라 금관과 또 비슷한 형태적 특징을 보인다. 모용선비북표 방신촌, 조양 왕자분산, 감초구 등에서 출토된 보요관 역시 그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방신촌 봉관은 내모난 판에 나뭇가지 모양이 붙어있는데 그 판의 장식으로 간략화된 인동초무늬를 하였는데 그것이 신라 금제 허리띠와 비슷한 모양을 보인다. 이 무늬는 원래 진나라시대에 크게 유행한 것이다.)고구려의 관은 신라와 가장 친연성이 강한 국가이다). 고구려의 관은 그 예가 많지는 않으나 평양 청암리토성 부근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얇은 금동판에 인동초를 중심무늬로 하였으며 입식으로는 화염문을 형상화 하였는데 그 모습이 백제 무령왕릉 출토 무령왕의 관식과 유사하다. 집안 출토의 금동관식은 가운데는 깃털의 모습을 양쪽의 부분은 새날개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신라 금관의 조익형 관식과 흡사하다. 중앙박물관의 금동관식은 전형적인 고구려 관식으로 세 개의 세움장식이 있으며 그 모습은 새의 깃털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있다. 이것 역시 황남대총 남분 출토 은관이나 혹은 의성 탑리 1곽출토 금동관의 모습과 유사하여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그러나 고구려의 금공예품이 신라 금관의 기원으로 판단하기엔 부족하다. 고구려에는 금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금동관에서도 화려한 세움장식이나 곡옥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흉노, 선비족의 금제관식 역시 마찬가지로 금을 재질로 하며 나뭇가지모양의 세움장식이라는 아이디어만 유사할 뿐이다. 이에 많은 연구자들은 시베리아게통의 영향을 추정한다.) 신라 금관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진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는데 이를 스키타이족의 쿠르간(Kurgan)과 연결시키면서 마립간시대 기마민족에 의한 왕족교체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공간적인 거리가 커 이를 따르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교동금관을 제외한 전형적 모양의 금관은 전면의 3개의 나뭇가지모양(出자형) 세움장식과 양옆에 1쌍의 사슴뿔(鹿角)모양 세움장알려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뭇가지 모양 세움장식 곁가지 수 역시 각 관마다 차이가 있다.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서봉총은 3단이고 금령총과 천마총은 4단이다.위 세 가지 예를 보았을 때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서봉총 금관과 금령총?천마총 금관은 서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3점은 약간 간소한 반면 뒤의 2점은 도안이 복잡하여 상대적으로 후대의 것으로 파악된다. 세움장식의 수와 고정못의 수, 달개의 수와 곡옥의 수, 볼록장식의 열, 볼록장식 수, 세움장식의 가지수 등을 봤을 때 5개의 금관의 상대 서열은 아마도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서봉총→금령총→천마총의 순서로 파악할 수 있다.)신라 고분에서는 금관 외에 이와는 형태가 다른 또 하나의 금관이 발견된다. 바로 고깔모양의 관모에 새날개모양의 관장식이 결합된 것으로 전자를 관모, 후자를 관식이라고 부른다.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중국이나 서역의 벽화에서 보이는 머리 정수리에 얹혀있는 작은 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금관과 금제관모?관식이 꼭 함께 출토되는 것은 아니다. 금제관모의 경우 금관총과 천마총에서, 금제관식은 금관총?천마총?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되었다. 관모와 관식이 결합되어 출토된 금제품은 없으나 황남대총 남분와 양산 부부총의 남자묘에서 출토된 금동제품이 조립되어 나온 예가 있어 관모와 관식이 세트를 이루는 것이 기본으로 생각되어 진다. 관식의 모습의 새날개의 모습이나 매미와 같은 모습이 많은데 특히 금관총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것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 관모와 관식이 출토된 3기의 고분은 모두 남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금제 관모와 관식은 남성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럼 금관과 금제관모의 용도는 각각 무엇이었을까. 출토상황을 통해 유물의 사용용도를 대략적으로 나마 유추할 수 있다. 금관은 1921년 9월 금관총이 발굴되면서 처음 그 존재가 알려졌다. 그러나 비전분가에 의한 무덤조사가 이루어져 유물의 정확한 출토위치 등 중요한 정보서봉총을 비롯한 모든 무덤에서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출토된다. 즉 이런 모습이 신라인들의 매장방식이었단 뜻이다. 즉 이마 위에 씌워준 것이 아니라 머리 전체를 감싸 매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금관 관테의 구멍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복원된 모습처럼 밖으로 벌어진 세움장식의 모양이 아니라 안으로 오므려진 모양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극에서 보여주듯 평상시 쓰고 다니던 것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실제로 금관은 실용품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지나치게 장식이 많아 실생활에서 사용이 가능하였을지 의심스럽고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버팀력이 매우 약하여 조금만 움직여도 휘어져버린다. 또한 제작기법에서도 귀걸이나 목걸이 등에서 보이는 고난도의 기술이 구사되지 못하였으며 마무리가 매끈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금관총 금관에 있는 관테의 빈 구멍은 제작 실수를 방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금관은 실제 사용된 것 이라기보다는 장례용품으로서 사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그럼 장례용품으로서 금관에는 어떤 상징적인 요소가 있을까신라 금관은 몇 가지 상징적인 도안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세움장식의 형태이다. 세움장식의 형태는 나뭇가지와 사슴의 뿔 모양을 하고 있다. 고조선의 단군신화를 보면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은 신단수라는 나무 밑이다.) 신라의 김알지 역시 경주의 시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한국 고대국가의 중요 인물의 출생에는 나무나 숲이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를 보아 한국 고대인들의 신앙세계 속에 수목신앙, 신수사상이 있어 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앞서 살펴봤던 사르마트 금관의 나무장식, 박트리아의 틸리아 테페 6호분의 관식, 선비족의 보요관, 가깝게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나무 등도 이와 비슷한 예로 들 수 있으며 이는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시베리아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수목신앙의 흔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생명수로서 하늘과 땅의 매개이며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나무를 중시하는 것이다.곡옥 역시 이와 비슷한 것으로 비슷한 예로 앞에서 서술한 흉노의 아로시등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이 있었다. 신라인들에게 새는 예언자의 기능을 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김알지의 탄생을 알리는 것은 닭이었고), 석탈해가 신라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도착을 알려주는 것은 까치였다.) 또한 변한에서 사람이 죽으면 새의 날개와 함께 묻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대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농경문청동기에 새겨진 도상에서도 샤먼의 지팡이 끝에 새가 두 마리 앉아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한반도를 비롯한 시베리아 전역에서 새는 중요한 의미의 동물로 생각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해의 상징으로 삼족오를 그려 넣었는데 태양은 음양론에서 이르는 음, 즉 남성의 상징이고 천강신화의 왕의 상징이다. 일본 아스카시대의 고분인 나라현 아스카무라의 기토라고분 벽화 중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 가는 배의 그림이 있는데 그 사공으로서 새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새는 탄생뿐만 아니라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신라 금관의 이런 장식은 고분을 축조하면서 가지는 생각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의 제왕들은 현세의 삶이 사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에 따라 그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물품에 더하여 새로운 물건을 제작, 부장하고 심지어 순장까지 했을 것이다. 이런 장례풍습은 뒤를 이을 계승자의 계승을 정당화하고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선조의 능묘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뒤이은 이의 입지가 불안할 경우 장례기간을 늘리기도 하였다. 이런 빈의 기간이 신라의 경우 1년 정도로 보이며 백제의 무령왕과 왕비는 27개월을 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정치형세가 불안할 경우 5년을 넘긴 예도 있다하니 그 의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그럼 관모는 어떠한 용도였을까. 유물의 부장 양상이나 수량, 구조 등으로 보면 관모?관식은 장례용품이라기 보다는 생전에 사용한 물품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등지에서 발견되는 신라인의 모습에서 관모를 쓴 모습이 등장한다는 것을 보면 이들이 평소에 쓰고 다녔기 때문에 중겼을까.
맥베스MacbethWilliam Shakespeare (1564-1616)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짧으면서도 다이나믹한 작품으로 여러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그 자체로만 보면 이 작품은 인간의 욕망과 절제의 미덕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작품 외적인 측면으로 볼 때 당시의 시대 -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종교개혁, 절대왕정 - 의 가치관과 정치적인 키워드가 숨겨져 있다.이 작품은 스코틀랜드의 역사극에서 모티브를 취재한 것으로 1606년 덴마크 왕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상연하기 위해 쓴 것이다. 외형상으로 볼 때 가장 짧으며 단일한 내용, 급속한 전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포와 절망 속에서 죄를 더해 가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고독이 잘 표현되어 있다.이 이야기는 살인에서 시작하여 살인으로 끝나며 피가 피를 부르고 무대 한쪽이 피바다를 이룬다. 맥베스는 애초에 야심은 있었지만 이를 실천할 능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약하여 고민한다.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 반역죄임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한 인간적인 번민에 사로잡히게 되나 그의 부인은 이와 반대로 양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욕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맥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된다. 양심이 남아 있던 맥베스는 미래의 상황에 불안을 느끼고 위험인물들을 처단하며, 그의 아내는 지난날의 죄책감에 시달려 결국 몽유병환자가 되어 비참한 생의 종말을 고한다.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은 마음속에 묻어 그 의지를 억제하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인간의 절제된 모습 역시 욕망, 야망을 지니고 적절한 시기에 외부로 표출될 수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맥베스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맥베스와 그의 부인은 착한 사람처럼 보여도 악해 질수 있는, 악한 사람처럼 보여도 착한 모습의 내면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극의 초반 마녀들의 ‘아름다운 건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선과 악이 분리 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선한 사람이다’, ‘악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맥베스가 왕을 살해 하는 동안 냉혈한으로 비춰지던 맥베스 부인 역시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술로서 잊고자 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여기서 완전히 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악하기만 해 보이는 인간도 선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비극은 욕망의 비극임과 동시에 양심의 비극이다. 장군인 맥베스가 던컨 왕을 죽이고 왕관을 쓰지만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양심의 반격과 신하들의 반란으로 무참히 죽는다는 인과응보의 비극이다.이처럼 인간이 자기 분수에 넘어 지나친 욕망을 갖게 되면 이것이 바로 인간파멸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맥베스는 흡사 오이디푸스와 같은 그리스 비극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스 3대 비극시인의 작품들 역시 공통적으로 인과응보의 원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 작품은 선한 사람이 내적인 결함으로 인하여 끝내는 파멸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작품 ‘맥베스’는 맥베스의 선에서 악으로의 성격 변화를 더 잘 나타내 주고 있어 이 작품이 4대 비극으로 꼽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맥베스의 성격변화는 가속화 되어, 영국으로 탈주한 맥더프의 처자와 혈연을 모두 죽이는 장면에서 악한 인간으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극의 끝부분인 영국군과의 전투장면 직전에서 신하들에게 행해지는 폭언, 부인의 사망 소식에도 슬픔을 보이지 않는 것과 전투에 패해 도망치면서 하는 독백에서 ‘살아있는 놈은 눈에 띄는 대로 베어버리겠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악의 극한까지 치달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악이 극한으로 차올랐을 때 그의 모습은 파멸 직전의 화광반조는 아니었을까.작품에서 벗어나 외적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면을 알 수 있다.이 작품은 17세기 초반. 엘리자베스 1세 ~ 제임스 6세 때 지어진 비극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초창기 왕권은 심히 불안했다. 왕권의 정통성을 놓고 논쟁도 많았죽음과 동시에 사그라지며, 다시금 교황 쪽으로 세력이 넘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 엘리자베스에게 있어서 절대적 왕권의 확립은 최우선적으로 풀어야 하는 과제였다. 다시금 정치와 종교에서 1인자의 권위를 스스로 창출해 내기 위해서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상적 근거였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의도를 잘 파악했다고 본다. 어쩌면 이 맥베스는 이미 사전에 계획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 비극 작품은 맥베스가 그러했듯이, 한 나라의 왕위에 대해 욕심을 부리면 그 결과가 참혹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당시 힘과 재력으로 반란을 꿈꾸던 많은 귀족들에게 절대왕정의 왕권신수설을 심어주기 위한 교육용이었을 지도 모른다.또한 영국의 역사에 근거해서 생각하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맥베스의 인물들은 대부분 실존인물로 11세기 스코틀랜드의 왕인 던칸1세(1034~40), 맥베스(1040~57), 멜컴3세 캔모어(1058~93)까지의 역사를 이야기로 각색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멕베스는 1040년에 즉위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케네스2세(971~995)의 손자였으며, 케네스3세(997~1005)의 후손 그루치와 결혼했다. 1031년경 아버지 팬드렉(작품에는 사이널)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북부 머리 성의 영주가 되었다. 1040년 8월 14일 엘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촌인 왕 던컨1세를 죽이고(작품에서는 던컨을 잠자리에서 죽이는 것으로 되어있음) 왕위를 차지했다. 던컨과 맥베스는 모두 모계를 통해 자신에게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맥베스는 1045년 던켈드(지금의 테이사이드 지역) 근처에서 반란군을 무찌른 적이 있는데,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후세 작가들이 던켈드 근처에 있는 버넘 숲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때문인 듯하다. 1046년 노섬브리아 백작 시워드는 맥베스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던컨 1세의 맏아들 맬컴(나중에 맬컴 3세 캔모어)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실패했다. 1050년경 맥베스는 이제 자신의 지위가 확고하다고 안심하고서 스코틀랜드를 받은 맬컴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맥베스는 이오나 섬에 묻혔는데, 그곳은 왕위 찬탈자들은 묻힐 수 없고 정통성 있는 왕만이 잠들 수 있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추종자들은 그의 의붓아들 룰라크를 왕으로 앉혔으나 1058년 3월 17일 그가 살해됨으로써 멜컴3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는 사실 일반 신하가 아닌 왕위계승의 명분을 가지고 있던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익스피어는 왜 이를 이야기 하지 않고 그저 일반 신하였다고 하였을까. 극적 효과를 위한 삭제였을까.계속해서 멜컴이 왕위에 오르는 시기부터의 영국의 역사를 보자. 맥베스의 뒤를 이은 말콤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면서 이곳에 서서히 잉글랜드 세력이 미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1296년 스코틀랜드 전역에 잉글랜드의 강제적 직접통치를 시도했을 때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터졌고, 이는 1328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반란의 지도자 로버트 브루스를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로 인정하면서 끝났다.브루스의 아들인 데이비드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스튜어트 왕조의 군주들은 잉글랜드의 적이었던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존 녹스가 지휘하던 스코틀랜드 개혁이 시작되어 프랑스와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에 대해 공격이 가해지게 되었고, 1567년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군주인 메리 여왕은 그녀의 어린 아들인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강요받았다. 그 후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지정되었다. 잉글랜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1603년에 죽자 그녀의 친척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었다. 청교도 혁명 때 왕이 폐위되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1707년까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1명의 국왕 밑에서 독립된 왕국으로 남아 있었다. 1707년에 연합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웨일스와 함께 두 왕국은 영국으로 통합되었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 즉 17세기 초반은 스코틀랜드 왕실과 잉글랜드 왕실이 결합하는 시기였다.스코틀랜드 사아들), 메리(Mary Queen of Scots. Mary Stuart(는 Stewart). 1542.12.8~1587.2.8, 스코틀랜드 여왕(1542~67), 프랑스 왕비(1559~60).제임스6세의 어머니)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베스라는 역사극에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궁극적인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음을 암묵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스코틀랜드 왕조의 부도덕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왕권의 전통성을 이어줄 수 있도록 도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인물 설정을 보다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인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직업이 극작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생계 유지 차원에서 귀족 및 왕족에게 밉보이는 행동은 스스로를 위협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작품에는 이미 잉글랜드의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왕권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전의 왕조나 왕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선제하게 된다. 급진적인 혁명과 피흘림 혹은 수많은 희생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정당성만 확보되면, 이미 그 모든 유죄는 무죄로 용서받아 질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피흘림과 희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잉글랜드의 도움이 침략적인 전쟁이 아닌 원조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전제를 내세운다면, 이는 모두 용납 받을 수 있는 것이다.우리나라가 조선이 건국 후 세종대에 왕조를 찬미하는 용비어천가를 만든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드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셰익스피어가 멕베스를 쓰면서 전제로 둔 것은 ‘주 고객층인 귀족들의 구미에 맞을 것’이었다. 즉 주 고객층인 잉글랜드의 고객들과 이제 막 모셔온 왕(스튜어트왕조, 제임스1세)의 또 다른 나라 스코틀랜드에 대한 병합정책이 맞물려 문학작품을 통해 스코틀랜드인들의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계산이 들어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또 기독교적 종교관과 윤리관을 통해서도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가.
-------------------------소나무재선충,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우리 조상들 ― 조선시대의 소나무해충 극복노력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재해의 원인을 신의 징벌로 여겨 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서 용서를 빌고 재앙을 벗어내기를 빌었다. 조선시대에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 거행한 해괴제(解怪祭), 논밭의 충해가 심할 때에 거행한 포제(·祭), 전염병이 발병했을 때 거행한 기양제(祈禳祭) 등을 각각 지냈다. 해괴제나 포제는 재해가 발생한 지방의 장계(狀啓)를 근거로 하여 그 시행여부가 정해지면 예조(禮曹) 등에서 향(香)·축(祝)·폐(幣)를 보내주었고, 지방관리는 그에 따라 제물을 마련하고 정하여 그 제사를 거행하는 것이 대략의 절차이다.1693년(숙종19), 예조에서는 《해괴제등록》이라는 책을 간행한다. 이 책은 1638년(인조 16)∼1693년(숙종19) 사이에 거행된 해괴제, 포제, 기양제 등 224건의 기록을 예조(禮曹)에서 등록(謄錄)한 것이 소개되어 있다.특히 이 책에는 1685년에 송충이 폐해가 극심하여 사직단까지 번졌다는 기록이 있다.1685년(숙종11) 9월 22일 영의정 김수항이 아뢰기를, ‘요즈음에 송충이 날마다 점점 심해져서 서울 산들에 두루 번식했을 뿐만 아니라, 사직단[社稷]과 인경궁(仁慶宮)까지 번졌습니다. 신(臣)이 동교(東郊:동쪽 교외)에서 궁궐로 들어오는 길에 들은 이야기인데, 충재(蟲災)가 덕릉(德陵)을 범했다고 합니다. 덕릉은 강릉(康陵)과 태릉(泰陵), 건원릉(健元陵)과도 서로 가까운 거리이므로 더욱 놀랍고 염려됩니다. 대개, 이번에 유행하는 송충은 아무래도 보통 재난이 아닌 듯하며 인력으로 제거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계속 이렇게 번진다면 온나라에 다 퍼질터인데, 그렇게 된다면 황장목(黃腸木)이나 선박 만드는 재목[舡材]까지도 그 피해를 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니, 이는 국가적인 재해로 참으로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이 상황은 최근 ‘소나무 에이즈’로 불리며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재선충 피해를 연상시킨다. 같은 시기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선 8월 21일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하교하여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오부(五部)의 방병(坊兵)들을 다 동원(動員)하여 경계(境界)를 분정(分定)하여 송충이[松蟲]를 잡아 없애게 하고 이어서 오부의 관원(官員)에게 엄하게 신칙(申飭)하였다. 이는 대개 수년(數年) 이래로 송충이가 너무나 극성스럽게 번져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에까지 원릉(園陵)과 사묘(私墓)의 다 자란 나무들이 송충이에게 껍질을 먹히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그로 인하여 말라 죽게 되었다. 이는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마다 쓸쓸할 뿐만 아니라 쓸만한 재목들이 모두 그 해(害)를 입었다. 이는 실로 재해(災害)로서 가장 큰 것이니, 어찌 우연히 발생한 것이겠는가? 고려말(高麗末)에도 이런 재해가 있었으므로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근심하였다.’)그해 9월 27일 ‘송충이의 재해(災害)를 비는 제사를 삼각산(三角山)·백악산(白岳山)·목멱산(木覓山)·송악산(松岳山) 등 여러 산에서 거행하였다.’)송충의 피해로 인해 소나무가 말라죽는 소나무재선충과 유사한 피해가 한성지역까지 미쳤으며 그 방안으로 재해를 비는 제사를 북한산과 북악산, 남산, 개성 송악산 등지에서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송충’의 기록이 약 100여 건이 있으며 그 시기는 태조에서 영조, 순조, 철종대에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물론 이 상황은 소나무재선충에 의한 피해로 생각도지는 않지만 그 형태의 유사함으로 볼 때 우리 조상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지 유추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미흡했던 시절 소나무 재해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을까.우선 세종대 송충의 기록을 보면 1421년(세종3) 4월 16일,‘제릉(齊陵) 바깥 산을 불태웠다. 작년 겨울부터 봄까지 송충이 솔잎을 먹어서 이루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불을 지르고, 안쪽 산은 백성을 동원하여 송충을 잡았다.’)이로 미루어 보면 송충이 발생했을 경우 모두 잡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최근 중국의 경우와 같이 재해지역의 외곽부분은 불을 질러 번식을 막는 방법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재해의 발생을 고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처벌을 내림으로서 재해 발생 시 신속한 대책의 마련이 중요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1607년(선조40) 6월 9일의 기록을 보면,‘좌승지 이선복(李善復)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사직단(社稷壇) 밖 남·서·북(南西北) 3면의 허다한 소나무를 송충이가 잎을 갉아먹어 보기에 매우 놀라운데, 본서(本署)의 관원(官員)은 시종 제조(提調)에게 말하지 않아 단수(壇樹)가 거의 고사(枯死)하게 만들었으니 그런 자들에게 위촉(委屬)할 수 없습니다. 장무 관원(掌務官員)을 먼저 추고하여 치죄하고, 벌레잡는 일은 해당 관원이 전혀 마음을 써서 거행하지 않으니, 한성부 낭청으로 하여금 방민(坊民)을 많이 거느리고서 본서의 관원과 함께 기어이 다 잡아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 내용은 사직단의 주변으로 송충의 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사직단의 관원들이 이를 보고하지 않아 그 피해가 극심해 졌으므로 이를 치죄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바로 송충의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즉각 신고하지 않은 것을 죄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송충을 잡는 일이 백성들에게 큰 노역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도 있다. 1736년(영조41) 5월 27일의 기록을 보면,‘판윤(判尹)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여 사산(四山)의 송충이를 잡도록 청하고, 또 아뢰기를, “도성(都城) 백성들의 방역(坊役)이 치우치게 고달프니, 청컨대 중신(重臣)과 재신(宰臣)의 집에서 한 사람의 장정(壯丁)을 내게 하여 그 역(役)을 균일하게 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송충이를 잡는 것은 한갓 폐단만 끼치게 되니 곤궁한 백성을 침해하지 말고, 그 역을 균일하게 하는 일은 청한 바대로 하도록 하라.”하였다.)이를 통해 보면 송충을 잡는 일이 백성에게 피해를 줄 만큼 고되고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로 인한 폐단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일이 역으로서 백성의 수취의 하나의 수단으로 서도 사용될 정도로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러한 송충 구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송충의 폐단이 끊이지 않고 목재의 남벌로 인해 재목 부족이 심각하게 되자 조선초기부터 벌채 억제와 삼양(森養)에 노력하는 한편 적극적인 식재조림을 실시하게 되었다. 태종 때에는 남산과 태평관산지(太平館山地)에 100만여 그루를 식목하였고, 세종 때에 와서는 연해에 송림재식하고 서울 사산(四山) 소림(疏林)에 잣나무와 상수리나무를 파종 조림케 하였다. 또 1447년(세종29)에는 서울 사산의 송충 피해처에 밤을 심게 한 일도 있었다. 세조 때에는 칠수(漆樹)를 키우게 하고, 성종 때에는 제주에 비자나무와 오동나무를 식재케 하였다. 최대규모의 조림사업은 1789년(정조13)에서 1802년(순조2)에 이르는 14년간에 파종 식재한 것인데 소나무 묘목 550여만 그루, 송자(松子) 75석여, 잣 93석여, 상수리종자 1,700석여, 가래나무 84석, 도토리 19석, 단풍나무씨 2두(斗), 밤 7석, 호두 6두 등에 이르렀다. 정조 때에는 이 외에도 많은 식림(植林)과 배 · 자두 · 살구 등의 과수재식(果樹栽植)도 실시하였고 송충 구제에도 힘을 썼다.
답사보고서제주도의 문화형성과 돌하르방한반도의 남부에 의치하고 있는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축에 위치하고 있어 예부터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유럽 등 많은 국가들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더욱이 한반도와도 교류가 원활하지 못한 섬 지방이므로 한반도의 문화와도 다른 문화가 파생되었다.본 답사보고서에서는 주로 관심 있게 답사한 혼인지와 관련한 삼성설화와 후발대로 도착하여 별도의 코스로 움직였던 시간동안 관심 있게 본 각 지역의 돌하르방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혼인지 전경제주도 문화의 형성제주도에는 수많은 신화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건국신화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국가에 의해 생성되어 전해 내려온다. 단군신화나 동명, 주몽, 혁거세, 김수로왕 신화 등은 국가의 지배이념으로서 생성되어 전해진 것들이다. 제주도의 수많은 신화들 역시 각 부족, 민족들이 지배이데올로기로서 형성되었고 그것이 한반도와는 달리 오랫동안 통일 국가체제가 아닌 독자적 문화를 유지해 온 결과 한반도와는 다른 독자적이고 원초적인 신화들이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제주도의 신화들은 공통점이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삼성신화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삼성이 땅에서 솟아올라 지내다가 함에서 여인들이 나타나 혼인하고 전달한 사자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사라지는 것으로 되어있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삼성은 지신족 개념의 토착종족이었을 것이고, 뒤이어 바다를 타고 등장하는 여인들은 이주민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들이 함속에서 나온다거나 그 모양이 새알과 같았다는 등의 내용, 사자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사라졌다는 등의 내용은 아마 그들이 천신족 개념의 이주민들이 아닌가 한다. 함속에서 알이 나타났던 석탈해나 김알지, 김수로왕의 내용과 그 형태가 비록 함의 내용물과 함의 모양이라는 차이는 있으나 대략적으로 그 맥은 비슷한 점, 또 하늘로 떠난 사자의 존재는 천신족임이 분명해 보인다. 더더욱 그들은혼인지오곡과 가축 등을 가져왔다는 이른바 선진 문물이 )보다 중심인물로서 서술되고 있으며 또한 그들에 의해 영역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삼성신화 이외에 다른 신화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특히 무속의 형태를 대부분 보이는데 이는 토착적인 세력이 강한 세력이 중심이 된데다 거친 자연적 환경에 의해 불교 유입과 더불어 무속적인 측면이 강해진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또한 제주의 문화는 해양문화와 대륙문화의 결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대륙적 문화는 이른바 삼성신화의 이주민들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신족의 개념은 중국과 한반도, 일본 등과 같은 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므로 이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지신족의 개념은 섬 지역에서 나타나는 바다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섬이란 육지가 가지는 중요성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대만이나 유구, 혹은 넓게는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혼인지 내부이처럼 제주도 문화는 토착세력이 선진 이주세력을 흡수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그 발전 방향은 제주도에서 가장 강한 환경인 바다의 영향과 밀접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문화와 생활에 있어서 여성의 지위가 한반도와는 다른 점, 독특한 방언, 풍습을 만들었다. 이는 문화의 유입이 한반도와는 다른 방향이 더 많았던 탓이다. 더욱이 일본이나 대만, 유구를 통한 남방문화의 유입이 한반도에서의 문화 유입보다 선행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은 유사하나 그 원초적인 모습에서는 차이를 보인다.제주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정중앙에 위치하여 해양을 통한 교류에 있어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그 문화의 변화모습이나 유입문화의 흔적은 복잡하게 유지되어 현재도 독특한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한반도의 국가제도 안으로 편입되면서 들어온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의 경험과 유교사회로의 급격한 진입은 보다 복잡하고 불분명한 구분의 문화성격을 이루었다. 따라서 제주도 문화의 분석은 주변 국가의 특성과 문화양식의 변천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문제일 것으로 여기는 설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비교 분석과 조선후기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생성되는 석장승과의 연관성과 문헌기록에는 소홀한 실정이다.돌하르방은 원래 대정현, 정의현, 제주목의 성 동?서?남쪽 성문 밖에 위치하여 있었으나 현재는 47기만 남아있다. 우선 제주목이 있던 제주읍성에 23기(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기 포함), 정의현성이 있는 성읍지역에 12기, 그리고 대정현성이 있는 대정읍 보성지역 등에 12기가 남아있다. 이들은 각기 지역적으로 크기, 양식상의 특징을 보인다.A:대정현 돌하르방(보성리입구, 남제주)우선 대정현의 돌하르방들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몇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어 제주도 돌하르방의 발전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첫째로 대정현의 돌하르방들은 평균 신장이 136.2cm으로 가장 작으며 정의현, 제주목의 돌하르방들과 다른 조각수법을 보인다. 제주읍성의 얼굴모습은 광대뼈가 돌출된 모습이지만 대정현의 것들은 볼살이 두드러진다. 특히 눈의 모습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다른 지역의 것들은 음각하여 표현한데 비해 대정현의 것들은 양각하여 돋을새김하고 있다. 또한 안경을 쓴 것처럼 그 안에 음각으로 다시 표현하여 주고 있다. 또한 언뜻 보기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것처럼 도톰한 볼과 살짝 들린 입꼬리를 지니고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조각수법들은 제주목?정의현성의 석상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특히 다른 지역과는 달리 측면에서 봤을 때 다른 지역과는 달리 눈?코를 제외하고는 평평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 제작양식이 다른 지역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두 지역은 제작양식상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A 참조)B:대정읍성 돌하르방(추사적거지, 남제주)둘째로 대정현성의 돌하르방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 남문 밖의 2기와 서문 밖의 1기의 석상(사진B 참조)에서 나타나는 목걸이 혹은 복장선(服裝線 흔히 말하는 옷의 깃 부분)이라 추정되는 ‘U’, 혹은 ‘Ω’자형의 장식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정의현이나 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돌하르방의 생성 혹은 변천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C:정의읍성 돌하르방(성읍마을, 남제주)셋째로 대정현의 돌하르방들은 다른 지역의 돌하르방들과는 달리 기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정의현(사진C)과 제주목(사진D)의 돌하르방들은 3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단을 가지고 있으나 대정현의 돌하르방(사진A,B)들은 예외 없이 모두 기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아마도 원래부터 없었다거나, 기단이 있었으나 없어졌다거나 혹은 기단이 있었다가 다른 곳에서 옮겨오는 탓에 소실된 세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넷째로 지역 내에서도 제작수법이나 크기가 각 작품마다 차이가 크다. 사진A와 B의 돌하르방은 그 거리가 대략 200m 정도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크기나 모양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양식의 차이는 제작 시기의 차이 때문으로 짐작되어진다.두 번째 지역으로 남제주군의 동쪽에 있었던 정의현 지역(현 성읍리)의 돌하르방은 평균 신장이 141.4m이며 현재 정의현성의 동?서?남문 앞에 각각 4기가 세워져 있으며 각 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동일한 제작양식을 가지고 있다. 눈의 모습은 제주읍성의 모습과 유사하다. 입가는 ‘-’자형으로 무표정한 느낌을 주나 볼이 부풀어 오른 듯 한 모습은 인상적이다.정의현의 돌하르방들은 손가락과 팔의 조각수법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이는데 손가락의 경우 다른 지역의 그것들보다 생략되어 간결히 표현되어 있으며 팔의 형태는 측면에서 보면 도포자락같이D:제주목 돌하르방(제주대학교, 제주시)넓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왕릉이나 양반 묘의 문인석의 팔 모양과 유사하여 돌하르방을 만든 석공이 문인석을 본떴다거나 혹은 만들던 사람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또한 마모의 정도가 제주읍성의 것보다 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제주읍성의 그것들보다 이전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E:제주목 돌하르방(삼성혈, 제주시)제주읍성의 돌하르방의한 우연으로 보인다.F: 훈촐로(동몽골 다리강가)제주읍성 돌하르방 역시 다른 지역과는 다른 양식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독특한 기단을 가지고 있는데 마주보고 있는 돌하르방 기단의 중앙부에 ‘ㅁ'자형과 'ㄱ'자형의 구멍이 파여 있으며 그 깊이가 모두 동일하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대표적인 제주도 연구자인 제주대학교 현용준 명예교수는 이 구멍을 '정낭'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표적인 몽골유풍설 학자인 주채혁 교수는 정주목에 걸친 정낭 역시 몽골의 유풍이며 이를 통해 돌하르방의 몽골영향을 주장하고 있다.)또한 한반도 남단에서 나타나는 석장승과의 친연성도 엿보인다. 돌하르방 모자의 챙의 크기에 의한 견해인데, 돌하르방의 모자를 몽골지역에서 출토되는 '훈촐로(사진F)'와 동일하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으나 다른 지역보다 큰 챙의 모습이 한반도 남단 석장승들이 쓰고 있는 모자(사진G)와 더욱 유사하여 그 정확한 생성연원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또한 그 모습에 있어서 남근석과도 유사한 특징을 보이므로 여자의 힘이 강한 이 지역 토속신앙에 의한 제작이라는 자생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이밖에 제주목 돌하르방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져 있는데 그에 의해 근엄하고 강한 인상이 생겨난다. 이것 또한 석장승과 유사한 모습이며 거기에는 눈과 코의 조각에 있어서도 깊게 조각하여 큼직하게 만듬으로서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G: 남원실상사석장승(전북 남원, 조선 영조대)그 모습이 남방계 인물들의 것과 유사하여 남방유입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간혹 있으나 이는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고 오히려 석장승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성연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돌하르방의 형성시기돌하르방의 건립목적 및 시기에 관한 문헌자료는 거의 없으나 淡水? 編, 『耽羅誌』 名勝古蹟 條에 의하면 牧使 金夢奎가 1754년(영조 30)에 제주읍성 동서남 3문에 건립하였으며 관덕정과 삼성사 입구에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통설은 영조30년에 건립된 것으로 이야기 되다.
William Shakespeare(1564~1616)---------------- MacbethStory AnalysisStory Analysis작가소개 | William Shakespeare(1564~1616) 작품소개 | William Shakespeare 작품소개 | Macbeth(1605~1606) 줄 거 리 | Macbeth(1605~1606) 작품배경 | Scotland, king Macbeth age(1040~57) 정치배경 | Scotland(BC.3000~1707) 정치배경 | House of Stewart(1603~1649, 1660~1714) 시대배경 | Absolutism(절대왕정), Reformation(종교개혁), Geographical discoveries(대항해 시대) 인물분석 | Characters #1, #2 장면분석 | Situation – 1~5장작가소개 | William Shakespeare(1564~1616)필명 : Bard of Avon, Swan of Avon. 영국의 시인·극작가. 1558년 | 엘리자베스 1세 즉위 (1558~1603) 1564년 | 잉글랜드 중부 소읍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4월 23일 출생추정(세례일:4월 26일) 1577년 | 가세가 기울어 그래머 스쿨까지만 교육. 1582년 | 18세에 8세 위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1582년 11월 28일자 보증인 연서의 문서) : 딸 수재나 출생(1583), 쌍둥이 남매 햄릿과 주디스출생(1585) 1585~1592년 | '잃어버린 연대(the lost years)' :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 전무, 1587년 혹은 1588년 런던 생활 시작 추정 1592년 | 젊은 시인·극작가로 주목, 사우샘프턴 백작과 교분 추정. 1592∼1594 | 페스트창궐, 극장 폐쇄, 런던 극단 개편. 셰익스피어 활동 시작 추정. 1594년 | 극단 '체임벌린스멘' 단원, 20년 이상 배우, 전속작가, 공동경영자로 참여 1599년 | 템즈강 남쪽에 글로브극장(The Gl면 : 인간의 욕망과 절제의 미덕 작품 외적인 측면 : 당시 시대 -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종교개혁, 절대왕정 - 의 가치관과 정치적인 키워드 스코틀랜드의 역사극에서 모티브를 취재 1606년 덴마크 왕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상연하기 위해 쓴 것 외형상으로 볼 때 4대 비극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 단일한 내용, 급속한 전개 공포와 절망 속에서 죄를 더해 가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고독이 잘 표현줄거리 | Macbeth (1605~1606)스코틀랜드의 장군인 멕베스는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다. 그는 반란진압에 성공한 후 귀환하는 길에 3명의 마녀를 만난다.그들은 맥베스에게 코다의 영주, 미래의 왕 , 뱅코우에게 자손이 왕이 되실 분 이라고 예언한다. 귀환 후 던컨왕이 그를 영주에 임명하자 그는 이 예언을 부인에게 이야기하고 부인의 부추김에 의해 던컨왕을 살해하고 도망친 왕자들에게 그 혐의가 돌아가게 흉계를 꾸며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마녀들로부터 자신의 자손이 아니라, 뱅코우의 자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예언때문에 불안감을 가진 멕베스는 뱅코우부자를 죽이려 하였으나 뱅코우만 죽이고 그의 아들 맥더프는 도망간다. 그후 뱅코우의 망령에 시달리고 귀족들에게도 의심을 사게 되어 불안감에 시달리던 멕베스는 다시 마녀를 찾아가 예언을 요구하고 그녀들은 맥베스에게 여자에게서 태어 난 자는 맥베스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며 버남숲이 던시네인 언덕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한 그를 패망시킬 수 없다고 예언한다. 맥더프가 잉글랜드에 있는 던컨왕의 아들 맬컴 에게 의탁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는 그의 식솔을 모두 살해한다. 이는 귀족들의 반감을 사고 맥베스의 부인은 뒤늦은 죄책감으로 인해 미쳐버리고 결국 자결한다. 마침내 맬컴을 옹립한 맥더프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이 쳐들어오고 귀족들이 동조하여 합세한다. 그들은 버낭숲의 나뭇가지를 베어 가지고 몸을 감추면서 멕베스의 성을 공격한다. 부인이 미쳐 죽었다는 소식에 멕베스는 절망하고 결사적으로 싸우지만 맥더프가 제왕절개로 출생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왕조 수립 1497년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 헨리 7세(1485~1509, 튜더왕조)와 평화조약, 1502년, 헨리 7세의 맏딸 마거릿 튜더와 결혼 1542년 제임스 5세 사망 :스튜어드 직계혈통 소멸 - 딸 메리여왕(스코틀랜드 여왕,1542~67, 프랑스 왕비,1559~60~1587) 1567년 장로교와 프랑스 로마카톨릭 간의 분쟁으로 가톨릭 군주인 메리 유폐, 어린 아들 제임스 6세(헨리 스튜어트) 즉위 1568년 메리 여왕은 친척인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로 도주했으나 18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감금생활 후 1587년 처형 스튜어트 왕조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1왕 2왕국 시대 (1603~1707) 1603년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없이 사망, 튜더왕조 소멸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이자 증조모인 마거릿 튜더의 혈통에 의해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 (잉글랜드 제임스 1세) – 1왕 2왕국 체제 1707년 연합법안 통과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통합정치적 배경 | House of Stewart(1603~1649, 1660~1714)역사극 속에서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궁극적인 힘, 도움이 되었음을 암묵적으로 강조, 스코틀랜드 왕조의 부도덕성 부각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왕실의 정통성을 이어줄 수 있도록 도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인물 설정을 보다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인물로 묘사 신 왕조의 긍정적 평가 → 그 전의 왕조나 왕권에 대해 신랄한 비판 정당성의 확보 : 급진적인 혁명과 희생의 면죄부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피흘림과 희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잉글랜드의 도움이 침략적인 전쟁이 아닌 원조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전제를 내세운다면, 이는 모두 용납 받을 수 있는 것이다. ※ 예: 조선 건국 후 세종 대에 왕조를 찬미하는 용비어천가의 저술 셰익스피어의 전제 - '주 고객층인 귀족들의 구미에 맞을 것' 셰익스피어의 입장 : 생계 유지 차원 주 고객층인 귀족 및 왕족에게 밉보이는 행동은 스스위해 자신처럼 다른 누군가도 자신을 살해, 찬탈할 것이라는 불신과 불안. 부당하게 획득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군이 되는 과정에서 권력의 속성인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인물 멕베스 부인 (30~35세) 남성성이 강함, 남성이 지닌 잔인함을 지니고 있다. 여성보다 무성 중성에 더 흡사. 예언을 했던 마녀와 유사. 맥베스의 숨은 야심을 부추긴다. 탐욕스럽고 권력을 탐한다. 그러나 나중에 죄책감에 자살한다. 던컨왕을 죽였다는 죄악에 의한 무게감 - 씻기지 않는 핏자국으로 상징되는 죄책감 때문에 고통 화려한 권력의 이면에 숨어있던 어두운 불안감과 공포에 서서히 잠식 맥베스에 비해 인간성을 덜 상실한 인물이다. “심상치 않은 악행은 심상치 않은 고민을 낳는 법. 독에 전염된 마음은 그 비밀의 고통을 귀가 없는 베개에다 말하는 법입니다. 왕비 전하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가 아니라 신부입니다.”(5막 5장) 자신의 죄를 사하여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고통 -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는 꿈 속에 대한 갈망인물분석 | Characters #2마녀들 단순한 악의 심부름꾼이 아닌 모호한 다양성으로 나타나는 혼돈과 무질서의 대리인 멕베스의 왕관을 향한 숨은 욕망을 자극. 극에서 예언을 함으로써 비극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인물 절대 악의 화신. 성경적인 관점 : 숫자 3과 7은 각각 '완전수'의 의미 - 세 마녀의 등장 : 절대적인 존재의 등장 → 절대적인 악을 상징 영국의 기독교 : 교리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 특히 루트와 칼뱅의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원리에 입각한 예정론을 지지 교회 정치와 예배양식은 가톨릭 방식의 이원적인 구도 하나님만이 오로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고, 이는 신만이 가지는 절대적인 권위이자 위엄. 세 마녀의 등장과 그들이 맥베스 및 다른 인물들에게 행하는 예언 행위는 신의 전능한 영역에 대한 침범과 도전 인간에게 허영 된 욕망을 동기화 시켜 도덕적 잣대에 대한 모호한 판단 기준 이성보다는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게 한다. ※ 셰익스피어 당시에 마법에 를 보낸다. 혼란의 유발. 맥베드와 뱅코우는 예언 때문에 점점 심난해 하고 또 야심을 키우게 될 것 같다. 말 한마디로 인해 커지게 될 재앙을 예언하듯 마녀들의 등장과 퇴장은 뭔가 미심쩍고 의심스럽다. 사건의 발단이 되며 극의 중심사건이 된다.장면분석 | Situation – 2막# 2-1 덩컨왕궁 인물들 간에 파바박 하고 전기가 튀게 되는 부분! 전쟁 후 좀 더 좋은 자리를 받게되는 맥베드과 그렇지 못한 뱅코우 이 두 사람간에, 멜컴왕자와 장군들간에 느껴지는 기운, 극의 사건을 만들기에 충분히 큰 발단이 되는 지점이라고 본다. 뱅코우가 맥베드를 부추기게 된다. #2-2 인버네스성, 맥베드부인의 야심 부인은 야심에 찬 여자로, 맥베드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가 덩컨왕을 살해하도록 자극한다. 부인의 감정은 선과 악의 대립을 보여주는 듯 하다. 특히 어둠으로 죄를 덮고 싶은 마음이나 스스로의 선을 억제하려는 모습이 보여 지지만 맥베드에게는 철저히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여 맥배드로 하여금 일을 저지르도록 만든다.장면분석 | Situation – 3막#3-1 인버네스성의 연회와 결심 연회가 열기고 있는 도중 부인이 맥베드를 다그쳐 결국 살인의 마음을 갖게 만든다. 밝은 분위기 속 어두운 마음을 보여주는 대립된 이미지. 덩컨왕과 귀족들의 대화 장면(밝음)과 맥배드 부부의 음모(어두움)가 장면으로 오버랩되면서 대립을 극명히 보여준다. #3-2 살인 후 맥베드가 왕이 됨 살인 후 맥베드의 공포를 표현하는 것은 맥배드가 스스로의 선을 버림과 동시에 악에게 무릎 꿇어버리는 이미지를 만든다. 다음날 아침 상황은 태연히 대처함으로써 그들의 치밀한 계획범죄를 보여준다. 인물간의 갈등묘사가 치밀하게 드러나는 부분임과 동시에 템포가 느리다가 빠르게 진행됨으로 사건의 진행을 처리했다.장면분석 | Situation – 4막#4-1 뱅코우의 반역 뱅코우는 폴리언스가 왕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맥베드가 왕이니 그 뒤를 준비, 차례(!) 어쩌면 이 이 목표를 위해 처음부터 준비한 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