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직 관련 자기소개서 (LG필립스LCD지원)“항상 행동과 말을 함에 있어 신중하고, 말을 할 때는 상대에게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하여야 한다.” 사리분별할 나이가 된 이후로 저는 부모님에게 항상 가르침을 받으며 1남 1녀 중 장남으로 자랐습니다. 말과 행동의 중요성과 사람을 대함에 신중함을 가르쳐주심 때문인지 초?중?고 시절 저를 따르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생적부에 ‘신뢰와 책임감이 있는 아이’라는 평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이런 신뢰 때문인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부반장을 맡았고, 중학교 3년간 학급서기와 학년서기를 맡았습니다. 이후 상지대 진학하여 법학을 전공하며 사회조직의 전반적인 흐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 기독교 동아리인 CCM의 복지지원 활동을 통해 장애우들의 입장에서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남들과 다른 관점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자 ”이 말은 제 머릿속 깊숙이 각인시키고 있는 신조입니다. 하나의 관점으로는 하나의 생각밖에 할 수 없으며, 남에게 의지하는 모습은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게 되고 책임감을 상실케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대학생활 동안 ‘인간과 종교’ ‘동양사상의 이해’등 교양과목과 ‘남녀관점 차이’ ‘종교와 세계관’ 등의 서적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갖기 위해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 학창시절 내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맡은바 책임에 대해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더욱이 타인과 함께 하는 공동의 작업의 경우 문제 발생시 나로 인해 상대가 피해를 입으면 안된다는 책임감에 크게 작용하여 더욱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같은 신조 때문에 하나의 문제를 다르게 해석해 볼 수 있는 시각과 책임감, 공동사회생활에 있어서의 적극성을 함양하게 해 주었습니다.이런 저에게도 역시 단점은 있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자 하는 생각이 심화될 때 가끔 혼자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아리 그룹 활동 등을 통해 협력의 즐거움을 깨달으려 노력해 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문제점도 많이 완화되었으며, 사회생활은 서로 협력하고, 다른 사람과 유대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도 배우게 되었습니다.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모든 정보교환 및 의사소통이 창(컴퓨터 스크린, 모니터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최첨단 정보통신의 시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흔히 정보화 시대라 일컫는 현대 사회의 핵심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였다면, 앞으로의 미래사회는 처리된 정보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관심이 증대될 것입니다. 때문에 정보교환과 의사소통의 중심점이 되는 창의 중요성이 날로 증가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 귀사 LG필립스LCD는 2003년 세계 최초로 HDTV용 55인치 TFT-LCD 개발하고, 2006년 세계 최대 100인치 LCD를 개발하는 등 미래사회의 핵심인 ‘창’의 정상에 서 있습니다. 제가 항상 남보다 한발 빠르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창조하는 귀사의 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다면, 가진 역량을 모두 쏟아 부어,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창’을 창조하는데 앞장 서겠습니다.
여성고용할당제 (찬성)최근 우리사회는 급변하는 세계화의 흐름에 발맞추어 빠르게 변화해 나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의식도 우리역사에 유래없이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와같은 개방적인 우리의 현 주소에서도 유독 남녀의 평등에 대해서만은 인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남녀평등의 일환으로 시행된 ‘여성고용할당제’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시행된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남녀불평등에 관련된 사회 이슈가 야기 될 때마다 반대론자들에 의해 도마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여성할당제의 역차별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반대론자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흐름과 여성할당제의 긍정적인 측면이라는 큰 산은 보지 못하고 남성의 기득권만을 놓지 않으려 급급해하는 작은 숲에만 목매는 우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능력있는 인력활용은 현 세계의 흐름이다. 현대 세계사회는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격상되어 가고 있다. 이는 여성들의 지적능력 수준이 결코 남성들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점을 대변한다. 실제 이와같은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우방국이자 경제 선진국인 미국의 경우, 현 미 국무장관은 ‘콘돌리스 라이스’라는 여성이다. 2004년 미 국무장관에 오른 그녀는 지금까지 무리없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외교관계를 훌륭히 조율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 가까운 아시아 국가인 홍콩 역시 ‘안손 찬’과 ‘레지나 입’이라는 여성들이 정치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선진국들은 능력있는 여성의 실질적 활용을 통해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사회의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끼침으로서 상대적으로 고위직의 여성의 분포 또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남녀평등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세계화의 흐름에 보무를 맞추는 듯 보이지만 실제 고위 기득권층은 대부분을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UN이 발표한 인적개발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인적개발지수는 162개국 가운데 27위인데 비하여 여성권한척도는 선진국 64개국중 61위로, 인적개발지수와 여성권한척도의 순위폭이 근소한 선진국들에 비해 여성의 실직적 지위가 폄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여성고용할당제’는 우리의 고질적 사회문제인 여성차별을 타파하고 실질적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적극적 조치이다. ‘여성고용할당제’는 오랜 세월 구조화된 여성차별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다. 대게의 반대론자들은 양성평등을 남성과 여성이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형식적 평등으로 해석함으로써 ‘여성고용할당제’가 역차별 현상을 야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평등이 육체적?생리적 약자를 보호하는 상대적 평등인 실질적 평등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한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여성의 임신휴가’‘여성의 생리휴일’‘여성의 야업금지’와 같은 법도 차별이라는 말인데, 이는 누가 보더라도 웃을만한 명백한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우리 헌재의 판결(99.12.23. 98헌마 363)요지를 보면 “여성고용할당제는 잠정적 우대조치의 하나로써 종래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아 온 일정집단에 대해 그 동안의 불이익을 보상하여 주기 위한 조치이고 이는 차별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동양사상에서 본 생명의 가치와 이상적 인생사상이란 무엇인가? 머릿속에 두루뭉실한 개념은 가지고 있지만 말로 표현해 내기 참 모호한 단어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이념, 가치관이란 초등학생 수준의 정의밖에 나는 내리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동양이란 무엇이며 과연 어디부터 어디를 규정하는 것인가? 동양사상에 본 생명의 가치와 이상적 인생에 대한 거창한 주제로 과제탐구를 해 보기도 전에 동양사상이라는 단어에 먼저 의문을 가지고 말았다. 동양이란 단어는 일본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서 그에 따른 서양의 언어체계의 일부를 받아들이면서 생겨난 단어이다. 이 말은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 중심의 사고로 생겨난 정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동양의 권역은 어디부터 어디인가?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동양이라는 단어는 중앙아시와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우리가 있는 동북아시아를 모두 합한 뜻이겠지만 실제 흔히 우리가 말하는 동양사상이라는 것은 한국, 중국 그밖에 일본을 뜻한다. 이는 내게 과제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다. 정확히는 동북아시아의 사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서양인, 그들의 편의대로 동양이라는 말로 함부로 규정지었다는 것이 자유로운 언어의 표현에서도 힘의 원리가 적용함에 씁쓸함을 느낀다.동양사상은 앞서 말한 것처럼 동북아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등... 하지만 그 중에서도 주로 중국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와 일본, 대만 등 동북아의 다른 국가들은 과거 중국의 사상을 거의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될만큼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나는 동양사상의 이상적 삶을 서양사상과 비교해 논해보고자 한다. 아니 좀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동양과 서양의 종교라는 측면에서 논해보고자 한다. 그에 앞서 동양 사상의 철학적 기반은 현존실재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또 서양사상은 동양사상과는 다르게 대조적인 비현존실재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서양의 사상이 동양의 사상의 근간과 비교해 비현실적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앞서 언급한 종교의 근간 사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종교라는 것은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으로 어찌보면 사상이 곧 종교라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과거 서양의 대표적인 종교인 기독교와 동양의 대표적인 종교인 유교, 불교만 보아도 이 부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서구의 기독교의 종교적 사구 구조는 하느님과 인간은 같은 공간에 현존할 수 없고 합일될 수 없는 양립의 존재로 인식되는 이신론적(=이원론) 입장을 가진다. 또한 인간은 하느님에게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것으로 표현된다.(=원죄론) 그리고 원죄를 지닌 인간은 마지못해 자의적이 아닌 신의 의사로 현세를 이어나가고 있을 뿐 현세가 아닌 사후의 세계에 대한 구제의 길을 모색해나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사상이 나타내는 생명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결코 인간은 신과 같은 신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한계점을 나타내고 있는 이원론적인 입장이나 유일신인 하느님에게 죄를 짓고 현세를 살아가고 있다는 원죄론의 내용, 그리고 사후세계를 동경하고 구제받기위하는 갈구하는 모습에서 그들이 현세에서의 삶과 생명의 가치를 낮게 치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생명을 경시하는 사상은 과거 서구 역사 곳곳에 산재해했다. 금욕주의와 중세의 마녀사냥 역시 이와 같은 종교사고구조가 바탕이 되었다. 마녀사냥에서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당시 마녀로 지목한 사람에게 물 9.5리터를 한번에 마시기, 손톱 밑 찌르기, 발바닥 굽기, 고문대에 맞춰 신체 사이즈 늘리기 등의 잔인한 고문들이 마녀임을 증명하기 위한 고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중 특히 생명의 가치를 가볍게 나타내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한 대목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고문방법들로 자백받지 못한 마녀들에게 "여자의 몸에 돌을 매달아 빠뜨려라. 그녀가 죽으면 마녀가 아니니 다행이지만, 살아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은혜로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 이삭을 하느님이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하였을 때 망설임 없이 제물로 바치려는 모습은 비록 하느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이긴 하였으나 서양의 사상이 현세의 실제를 중시하기보다는 사후의 세계를 더욱 중시하는 비현세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예로는 중세 말기 카톨릭에서 발행한 속죄증명서, 즉 면죄부를 들 수 있다. 당시 카톨릭에서는 성당 건설과 포교를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형식의 면죄부를 발행하였다. 면죄부는 말 그대로 죄를 면해주는 증명서로서 태초부터 원죄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행한 수많은 죄들을 모두 사해주고 사후에 그들이 낙원으로 생각하는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자신의 재산을 무분별하게 기부하는 등의 폐해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거짓을 논한 면죄부가 아니라, 그 거짓 면죄부를 사기 위해여 수많은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였다는 것에 있다. 아무리 당시의 사회적 사상이 카톨릭의 종교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생활을 붕괴시킬 만큼의 피해를 감수하고 면죄부를 사기 위한 그들의 모습은 현세의 모습보다 사후세계를 더 중히 여긴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이런 비현세적이고 사후세계를 중시하는 서양의 모습은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인생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때문에 서양인들은 현세의 생활에 지나친 애착을 갖지 않는다. 동양사람들과 다르게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애착도 상대적으로 적다. 집과 자신의 반려자와 같은 가족적 유대관계도 약하다. 가족적인 유대보다는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에 개인주의가 발달했고 이혼과 같은 가족의 인연을 끝는 행위도 동양과 비교해 가볍게 행한다. 또 사람의 생명의 시작과 끝을 사후세계와 연관되게 행한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서양인들이 생명의 시작과 끝을 사후세계의 교통로로 여기는 기독교와 성당 같은 사후세계의 구원을 나타내는 곳에서 행한다.그렇다면 을 떠나는 데 그 사상의 기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영원한 존속을 희구한다는 말이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동양의 경우 대표적인 종교로 불교를 들 수 있다. 먼저 불교의 경우 서양의 기독교의 사고구조인 이원론과는 다르게 절대의 존재인 신적 존재가 인간의 내면, 즉 나의 내면에 존재한다는(=일원론)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 수행자는 인간의 삶속에서 겪게되는 괴로움을 명상수행을 통해 반추, 극복하고 결국은 모든 괴로움과 현세의 문제를 관조하는 절대적 신적 존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불교의 “내가 곧 부처니라”라는 말은 나의 내면에 절대적 타자인 신이 존재하고 나는 수행을 통해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수행을 통해 신적 존재에 이루어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혹자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지 모르겠다. “동양의 불교가 목표하는 열반이라는 것이 신이되기를 열망하는 과정이라면 서양의 기독교에서 신을 믿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말이다.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의 이원론과 동양 불교의 일원론은 명확한 차이가 있고 사고구조의 차이 또한 명확하다. 기독교가 말하는 이원론은 신과 인간은 영원히 조화, 합일될 수 없는 절대적 수직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은 절대적 존재인 신을 숭배하고 경배할 뿐이다. 신에게 숭배와 경배를 통해 그의 축복과 힘을 빌릴 따름이다. 이는 인간이 중심을 이루는 사고가 아니다. 불교의 일원론의 경우는 인간의 내면에 절대적 존재인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숭배하거나 경배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불상에 절을 하는 모습은 그 불상 형태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과 같은 개인 수행을 실체화 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외관상 우상으로 보이는 불상은 외적인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나의 내면의 나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 존재인 신과 인간이 수평적 관계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같은 종교적 사고구귀하게 여기라는 덕목이다. 물론 서양의 기독교의 경우에도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덕목에서 ‘사랑’이라는 덕목은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나타낸다. 둘다 똑같이 인간을 사랑하라는 덕목이다.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렇다. 차이는 존재한다. 작게는 생명의 가치의 대상의 범주에서 차이가 생기고 크게는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생명의 가치의 대상 범주가 기독교는 인간에 국한되고 불교의 경우는 인세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포한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해석의 따라서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덕목 역시 범주가 국한되지 않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관점의 차이는 어떨까? 두가지 덕목이 모두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덕목이지만 그 저변에 깔린 인간의 생명의 가치에 대한 무게는 다르다. 기독교는 인간이 최상의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다. 쉽게말해 인간의 존재는 2순위이다. 이를 예를 들자면 신에게도 생명이 있다고 가정하고 인간과 신이 생명의 놓고 경합한다면 신의 생명을 더욱 귀하게 우선시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이를테면 그렇단 소리이다. 하지만 불교의 덕목은 앞서 말했듯이 일원론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귀한 존재는 존재치 않는다. 인간이 1순위라는 말이다. 또 세상의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라는 말 역시 불교의 윤회사상을 근간으로 두고 있다. 윤회사상이란 인간이 죽으면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의 어떤 생물로 태어나느냐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곧 환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생의 최고점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이 윤회사상의 환생 때 최고의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이 윤회사상은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생명으로 세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곧 이 세상의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인간이었던 존재라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자비라는 덕목이 나온 것이다. 이는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고구조가 저변에 깔려있단 소리다. 또 윤회사상에서 동양의 현세적 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