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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 대 여성들의 결혼의 성립
    제3장 결혼의 성립부모들의 무거운 짐결혼이라는 것은 단지 개인간의 결합만이 아니라 가족간의 결합이다. 아들과 딸들의 가족들은 사돈(결혼에 의해 맺어진 가정)을 앞으로의 친구나 동맹자로 생각한다. 그래서 재능있는 사윗감이나 평판이 좋은 집안 출신의 며느리감을 찾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인 면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집안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부모들은 도덕적인 가치관에 중점을 두고 결정을 내린다.가문의 결합은 동등한 가문끼리의 결합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 가문이 아들을 위해서 신부감을 구할 때는 딸을 위해서 신랑감을 구할 때와는 바라는 것이 다르다. 만약, 가족들의 관심이 단지 그들 자신의 가족과 후손에만 집중되었을 때, 부모들은 결혼하면 떠나야 하는 딸의 남편을 선택할 때와는 달리 자기들의 후손을 길러 줄 며느리의 선택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향은 부모들이 딸을 위해 남편을 찾는데 더욱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결혼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도 복잡한 문제였기 때문에, 어떤 가문에서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에 장래의 가능성이 있는 배우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어렸을 때 약혼시키는 것을 자랑스럽게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이것은 두 집안간의 강한 유대감의 표시로 여겨졌다. 흔히 지식인들은 자녀들의 남편이나 아내를 찾아주는 일을 향평(向平)의 부담 또는 향평의 희망 에 비유했다. 이것은 한대(漢代)에 어떤 남자가 자식들을 결혼시키는 임무를 다한 후에 산으로 들어가서 방랑했다는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술가들에 의하면 자식을 위해서 배우자를 선택할 때 여성들이 꽤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서 가족 전체의 결정을 내렸던 것같다.친구나 동료간의 사돈관계기록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네들의 가족 성원들간에 결혼을 제안함으로써, 친구를 친척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결혼문제에 관해서 중매인을 통하지 않고 서로에게 직접 접근할 수가 있었다.여러 학자들이 주목했던 것처럼 송대의 관료들은 흔히 가문의 출신 배경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자식을 다른 관료의 자식들과 결혼시켰다. 이러한 관습은 관습은 특히 북송대에 일반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남송대의 고위관료들은 북송대 보다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배우자를 찾는 것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남쪽 지역에서는 사투리가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또 유망한 관인가정들이 북송대에는 개봉에 정착해서 살았던 반면에, 남송대에는 항주에 정착해서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해 준다. 아마도 이러한 것은 관료를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지방에서 유력한 가문들과의 유대를 공고히 해야 할 새로운 필요성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남쪽지역의 경제적, 문화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유력한 가문들이 자기네 주위에서 합당한 배우자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아마도 딸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먼 곳으로 시집보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어머니들의 영향력이 커진 것을 반영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북송대에서 남송대에 이르는 변화가 결혼관습을 변화시켰다는 명백한 증거이다.친척들간의 사돈관계우정에 바탕을 두고 시작된 결혼관계는 관련되었던 가문들간에 계속해서 결혼하므로 이런 관계가 재확인되기를 모든 사람들이 원했던 것 같다. 중국의 족와혼 원칙에서는 성(姓)이 같은 사촌들간의 결혼을 금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여자형제의 자식이나 또는 어머니의 남자형제의 자식이나, 어머니의 여자형제의 자식과 같이 성이 다른 친척들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다. 여러 증거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친척들간의 결혼은 흔히 여성들에 의해 권장되었다. 여성들은 알지 못하는 여자가 동서든, 며느리든, 조카의 부인이든, 또는 손자의 며느리로서든지 간에 자기네 가정에 들어오는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여자들은 자기네 친정이나 또는 자기네들과 관련이 있는 다른 가정 출신의 여성은 완전히 낯선 사람보다는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사위보기송대에 과거제도가 중시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 이상적인 배우자상이 변하게 되었다. 당대에는 명망있는 가문들은 아들을 위해서 명문가의 딸을 원했다.송대에는 자기 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결혼 상대자는 재능있는 청년이었다. 이들 모든 사람들이 원했던 가장 유망한 사윗감은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고위직으로 승진할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집안에서 유능한 사돈이 될만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올 사돈과 인맥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중매쟁이에 의해 주선된 결혼만약 어떤 가정이 개인적인 연줄을 통해서 좋은 배우자를 찾아 낼 수 없으면, 일반적으로 여성이었던 중매쟁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두 집안이 결혼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중매쟁이는 형식적인 의사전달에 필요했다. 중매쟁이를 쓰는 것은 고전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예기(禮記)』에서는 중매쟁이없이 남녀는 접촉해서는 안된다. 고 말하고 있다.결혼연령자녀들의 배우자를 찾을 때 가족들은 딸의 나이와 남편감이 될 사람의 나이를 비교해 보는데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지식인 계층의 가족은 딸들이 사춘기를 지나자 마자 곧 결혼시켰다. 사료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의 평균 결혼연령은 19세이었고, 결혼연령의 범위는 꽤 짧았다. 여성들은 16세에서 19세 사이에 54%가 결혼했다. 그리고 15세에서 22세 사이에 89%가 결혼했다. 남성의 결혼연령은 이보다 2세 가량 높았다.부모들은 또한 아들이 일찍 결혼하기를 원할 때, 아들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여성을 허락하거나 선택했는데 이는 손자를 빨리 보기를 원하거나, 자기들이나 자기들의 자식의 건강을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자기 감정을 중시하는 젊은 남녀들젊은 남녀들은 흔히 부모들에게 장래의 배우자로서 매력을 느꼈던 상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젊은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부모들이 선택한 배우자를 반대하기도 하였다.서론송대(宋代)는 약 1천년전인 960년에 시작되어 1279년까지 3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이러한 송대는 중국을 연구하는 서양학자들 사이에서 선호하는 시기이며, 그 시기의 예술이 현재의 취향에 맞기 때문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많은 중국인들은 당대를 더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당대의 강력한 황제, 강력한 군사적 팽창, 열정적인 시, 문화적인 자신감과 관련지어 생각하고, 송대를 나약한 시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3.01.05| 3페이지| 1,000원| 조회(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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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부인의 방문 평가B괜찮아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 rrenmatt)의『노부인의 방문 (Der Besuch der alten Dame) 』작가 소개막스 프리쉬(Max Frisch)와 더불어 스위스 세계에 자랑하는 현대의 극작가요 소설가이다. 베른주의 코놀핑겐에서 신교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장과정은,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소요 주모자가 된 점이라든지, 화가를 지망한 점 등을 미루어 보아 향토의 대선배인 켈러(Gottfried Keller)의 경우와 비슷한 점이 있다. 쮜리히(Zurich)와 베른(Ber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문학고 자연과학 강의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그래픽커가 되었으며 틈틈히 주간잡지에 극시들을 기고하기도 했다. 25세 때 최초의 희곡 『그렇게 쓰여져 있다 Es steht geschrieben, 1947』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종교전쟁 시대에서 취재하여 재세례파의 광태를 그로테스크 (Grotesk)하게 그린 것으로서 초연 때 경찰이 제지할 정도로 큰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후부터 발표 작품마다 좋은 성과를 올려 오늘 날의 지위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가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기성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는 것을 거부한 점은 막스 프리쉬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폭로해 보이지만 해결의 방법을 절대로 암시하지 않는다. 또 감정이입을 철저히 배제한 우의극(寓意劇)을 쓴 점에 있어서는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직접적인 후계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관객으로 하여금 사회개혁의 희망망을 가질 수 있게 한데 반해, 뒤렌마트는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역으로 관객들에게 절망을 가르치려고 한다. 그의 극들은 현대에서는 비극이 불가능하다는 기본인식 아래 그로테스크한 취향과 기발한 파로디로 그리고 충격적인 즐거리로 현대사회의 모순을 극적으로, 풍자적으로 노정하고 있다. 그 속에서 간혹 무서운 환상이 그려질 때도 있고, 쇼킹한 상황이 전개될 때도 있다.그는 또 많은 방송극롭게 해학적으로 해부한다. 『재판관과 형리 Der Richter und sein Henker, 1952』, 『혐의 Der Verdacht, 1958』 등은 고급 추리소설이다.줄거리경제부흥에서 외면당하고, 급행열차도 쉬지 않는 귈렌 (G llen)이라는 소도시에 이곳 출신인 클레르 차하나시안 부인이 억만장자가 되어 나타나자, 이 도시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이 부인이 10억 마르크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제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그녀는 옛날 일 (Ill)이라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임신한 채 그 도시를 쫓겨났다. 일은 위증자를 내세워 아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춘부로 전락하였다가 석유왕의 눈에 들어 결혼하고,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대부호가 되었다. 그녀는 46년 전에 잃어버린 정의를 되찾기 위해 10억 마르크의 거금을 내놓는 대신 일의 처형을 요구한 것이다. 시장을 위시하여 온 시민들이 처음에는 인간성을 내세워 그것을 거부하였으나, 점점 그 돈의 매력에 이끌리어 드디어는 도시 전체가 공범자가 되어 일의 처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도망칠 궁리를 하던 일도 자기의 죄과를 인정하고 희생될 것을 승낙한다. 그는 축하연 석상에서 합법적으로 교살되어 심장마비로 진단이 내려진다. 귀부인은 보상된 정의의 대가로 수표를 주고 그 도시를 떠난다.작품 분석이 작품은 작자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희비극(喜悲劇)으로서 경제번영의 유혹이 도덕적인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과정을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희곡은 강렬하고 효과적인 연극수단과 전형적인 인물을 도입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하고 희비극적인 줄거리는, 재미있고도 카바레적인 착상과 위트있는 대화로 인하여 한층 더 생기를 얻는다. 뒤렌마트의 견해에 의하면, 단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이 이시대의 절망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극은 죄, 고난, 절제, 통찰, 책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관행으로 보면 이제는 더 이상 죄있는 자도, 책임로 그도 아이러니 및 패러디와 결부시켜 도덕에 대한 해부를 가하며, 시대문제와 인간의 무기력에 대한 묘사에 있어 확실한 어떤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역시 권력과 죄에 의한 압력 밑에서 인간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인간다운 면모를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떤 입장을 견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뒤렌마트는 연극과 현실이라는 테마에 대해 수차 언급하였다.인간은 연극이 없이도 그럭저럭 살아 나갈 수 있지만, 종종 연국과 더불어 지낸다는 사실은 인간 현실의 구조와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다만 연극구조와 인간 현실 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만이 어떤 의미가 있을 뿐이다. 라고 뒤렌마트는 결론짓고 있다. 뒤렌마트는 현실 자체는 바꿀수 없는 것으로 간주 한다. 이미 그의 초기 연극이 이런 경향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은 비극적 희극 으로서, 극이 진행되는 가운데, 명예의 허무함이 비천한 존재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복수형태를 겪으며 진행되는 냉혹한 행위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비극작품의 경직성과 냉혹함을 생각나게 하는 그 어떤 것을 느낄 수가 있다.참고 문헌도서출판 예니 - 최병준 옮김 「노부인의 방문」20세기 독일문학의 이해 - 한일섭 지음작가 연보(1월 5일) 베른(Bern) 주의 코놀핑겐(Konolfingen)에서 목사인 아버지 라인홀트 뒤렌마트(Reinhold Durrenmatt)와 어머니 홀다 침머만(Hulda geb. Zimmermann) 사이에서 출생.1933-35그로스획스테텐(Großhochstetten)에 있는 중학교에 다님.1935전 가족이 베른(Bern)으로 이사함. 베른에서 김나지움(Gymnasium)(인문계)에 다님.1941고등학교 졸업시험 통과 후 쮜리히대학에서 1학기를 마치고 2학기부터 베른대학에서 공부.1943작가생활 시작. "희극"(미발표 희곡), 단편소설 "성탄절", "고문 형리".1945첫 출판작품인 단편소설 "노인(geschrieben)" 집필 시작.1946"그렇게 쓰였느니라" 발표. 단편소설 "함정", "필라투스" 발표. 바젤(Basel) 시에 살면서 로티 가이슬러(Lotti Geißler)와 결혼.1947"맹인(Der Blinde)"과 "도시(Die Stadt)"(1952년 출판)를 완성.1948"로물루스 대제(Romulus der Große)" 집필. 비일러제에 있는 리거츠로 이사.1949"바벨탑의 건설"이 완성되었으나 폐기시킴.1950"미시시피 씨의 결혼(Die Ehe des Herrn Mississippi)" 집필 시작. 돈을 벌기 위해서 탐정소설인 "재판관과 형리"를 집필.1951두번째 탐정소설 "혐의"를 완성. 단편소설 "개", "터널"을 집필. 방송극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소송". 쮜리히에 연극비평 기고(주간신문 Weltwoche).1952"미시시피 씨의 결혼(Die Ehe des Herrn Mississippi)" 초연. 노이엔부르크(Neuenburg)에 집을 구입. "도시"라는 제목으로 산문 전집 발간. 방송극 "스트라니츠키와 국가적인 영웅", "멸시당한 사람과의 밤의 대화".1953"천사 바빌론에 오다(Ein Engel kommt nach Babylon)" 집필.1954방송극 "헤르쿨레스와 아우기아의 마구간"과 "직녀성의 계획"을 집필. 희극 이론서 "연극의 문제들"을 집필.1955"산문 희극"과 "남자 희랍인이 여자 희랍인을 찾는다" 완성. 희곡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 집필 시작.1956방송극 "사교"와 "늦은 가을의 저녁시간" 완성. "로물루스 대제"의 제 2 수정판 완성.1957"대낮에 이루어지다"라는 영화대본에 의한 장편소설 "약속" 집필.1958"하나의 송가" (쮜리히 시의 위탁으로)를 모티브로 갱단에 관한 연극인 "프랑 V(Frank der Funfte)" (파울 브르크 하르트의 도움으로)가 이루어짐.1959만하임에서 쉴러상 수상. 시상식장에서 자기와 브레히트(Brecht)와의 확실한 구분을 짓기Ehe des Herrn Mississippi)"이 대본으로 새로 쓰여짐.1961"물리학자들(Die Physiker)" 집필.1962동향 사람들을 위한 축제극으로 "헤르쿨레스와 아우기아의 마구간(Herkules und Stall des Augias)"을 새로 쓰지만, 동향 사람들은 이런 어처구니없고 쓸데없는 짓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1963년 3월에 상연되었다).1963카바레트(Kabarett)를 위해서 무대 교성곡 대본인 "수성과 스위스의 결혼"을 씀. 스위스인들에 대한 도전으로서 "플래카드 속에 있는 고향"이라는 책의 그림을 그린다.1964대표작인 "유성(Der Meteor)" 집필 시작.1965"유성"을 계속 집필. 장편소설 "추락"이 완성되었으나 발표를 유보(1971년 출간).1966첫번째 드라마인 "그렇게 쓰였느니라"는 "재세례파(Die Wiedertaufer)"라는 제목으로 희극형식을 취하고 있다. 에밀 슈타이거는 현대문학이 윤리적 성향이 부족한 것을 지적하였다. 뒤렌마트는 침묵했다.1967'발리 침묵하다'라는 제목 아래 슈타이거가 예술과 정치(신념)에 관해 혼동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글을 쓴다. "유성의 초상(Portrait eines Planeten)" 집필 시작.1968마인츠에서 열린 '정의와 권력에 대한 대강연회'에서 학생들에게 예술과 정치의 분리를 변호하였다. 바젤에서 뒤겔린과 연극작업을 시작. 세익스피어의 "요한 왕(Konig Johann)"을 개작.1969바젤(Basel) 시를 위해서 스트린드베리(Strindberg)의 "죽음의 춤"을 연극대본으로 개작. 주간신문 "쮜리히 일요저널"의 공동편집인으로 지명되어 공개적으로 사회적인 작업에 비판적으로 참여함. 계속해 온 바젤에서의 연극작업이 4월에 발병한 중병과 내부적인 의견의 불일치로 실현이 의문시된다. 10월에 '바젤의 실험'에 실망하고 돌아선다. '베른 시 최고의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상을 수여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정책의 차별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스위스인들다.
    인문/어학| 2003.01.05| 5페이지| 1,500원| 조회(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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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역사 서술의 특성과 교육적 적용을 읽고
    映像 歷史 敍述의 特性과 敎育的 適用을 읽고먼저, 이 논문은 대중들이 역사 영상 매체를 보고 별 생각없이 지나갈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다. 나는 이 논문을 읽고 그 내용의 대부분에서 많은 동의를 느끼지만 우선은 내가 논문과 다르게 생각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이 논문은 KBS의 《역사 스페셜》이라는 역사 영상물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논문 작성자의 말대로 역사 영상물은 대중에게 어떠한 매체보다도 더 크게 작용할 수있다. 나는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역사학도나 역사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교시절의 역사 지식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별도로 공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KBS의 《역사 스페셜》은 일반 대중들의 역사 인식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나는 먼저 이 프로그램이 어떠한 교육이나 학술적 의미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제작팀은 프로그램의 제작 취지를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사건, 사실에 숨은 의문을 추리기법 등을 사용하여 밝힘으로써 시청자의 역사를 보는 안목을 넓히고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갖게 한다 라고 밝히고 있다. 그 취지는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프로그램도 단지 역사를 소재로 한 오락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성자는 이를 하나의 교육적 목적이 있는 역사 영상물로 보고 있는 듯하다.모든 방송사는 시청률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어느 프로그램이고 시청률이 낮다면 그 프로그램은 살아남기 어렵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에서 단지 교육적 목적만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프로그램에 오락적 가치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컴퓨터 그래픽이나,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면만을 부각한다거나, 제작진 나름대로의 유추를 통한 재미있고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 해석등일 것이다. 즉, 오락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둘째로 작성자가 말한 것처럼 이 프로그램은 방송되기 몇 시간전에서야 편집이 끝나고 그로 인해서 전문가의 조언이 프로그램의 완성단계에는 낄 차리가 없다. 그리고 제작과정에서도 영상으로 전환할 수 없는 부분은 제외된다던지 하는 것으로 보아, 제작자들의 주관적인 부분이 많이 개입될 것이다. 이는 역사를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근거만을 가지고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재구성한 것일 뿐이다.이는 오락성과 상업성 두가지 목적으로 만들어진 역사 영화나 다를 바가 없다. 이는 시청자들의 오락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진정한 교육적 의미의 역사 영상매체라면 제작진들의 주관적이고 시청자들의 시청률을 의식한 영상물이 아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역사가들의 참여와 객관적인 태도로 제작할 수 있는 제작자들에 의해 제작된 영상물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영상 역사물의 개념보다는 오락성 짙은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이러한 프로그램은 자칫하면 책보다는 텔레비젼에 더 익숙할 지도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잘못된 역사관만을 심어 줄 수도 있다. 또, 우리역사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도 좋고, 과거의 자랑스러운 역사도 좋지만 수치스럽고 감추고 싶은 역사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수치스럽든, 자랑스럽든지 간에 우리의 역사이다. 그것을 다루지 않고 사장시킨다면,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단지 한가지 면만을 충족시켜주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인문/어학| 2002.12.24| 2페이지| 1,000원| 조회(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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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칸 분쟁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보고서
    발칸 분쟁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보고서1. 서론남쪽 슬라브 인의 나라 라는 뜻의 유고슬라비아. 이 발칸의 땅은 발 그대로 동서 양의 온갖 문명과 민족이 뒤섞인 곳이었다. 이처럼 많은 문명이 이질적으로 서로 뒤섞인 곳에서 일어나는 내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20 세기말에 일어난 비문명적인 살육전이 문명의 대륙이라는 유럽 대륙의 한 모퉁이에 서 일어난 것에 대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내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그들이 피정복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촉발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다시 말하자면, 유고내전은 한마디로 미국의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이 분석 한 대로 문명간의 충돌 이라는 것이 현실화된 것이다.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이래 한쪽은 그리스 정교와 동방 문화에 심취해 있었고, 또다른 쪽은 카톨릭 교회를 바 탕으로 한 서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한쪽은 근대에 들어서면서까지 터키 제국 에 짓눌려 정치 발전이 멈춰진 반면에 다른 한쪽은 르네상스와 산업 혁명, 과학 혁 명, 다원 정치 등 유럽의 발전사를 경험해 왔던 것이다.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한 국가로 묶여진 것, 그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유고 내전은 또 상대방을 포용하지 못하는 편협한 민족주의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중세 이후 세르비아 인의 정신을 지배해 온 대 세르 비아주의( A Greater Serbia)'는 그 첫 번째 원인이었다. 이 대세르비아주의는 시대 와 이념 그리고 체제까지 초월, 발칸의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야욕이었으며 계속해 서 발칸의 비극을 생산해 낸 주범이었다.나는 이 전쟁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봄으로서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해 비판해 보고자 한다.2. 본론세르비아 어로 유고 라는 말은 남쪽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라는 말은 사실 남쪽의 슬라브 인 이라는 얘기다. 슬라브 인이 발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한 때는 서기 6세기부터이다. 이들이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인의 직접적인 조상이 다.발칸은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터키 인의 세상이 되는데, 터키인에 대한 세 르비아 인의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무려 4백 년 동안 세르비아는 터키 제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는 그러나 터키 제국의 압제 하에 살면서도 그들 의 민족주의를 온전하게 보존해 갔다. 그리고 4백여 년이 지난 뒤 화려하게 이를 부활시켰다. 터키 제국의 지배 속에서도 세르비아 인이 그들의 종교와 전통을 이처 럼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개 세 가지로 크게 구분된다.첫째, 터키 제국은 국가 형성 자체가 이른바 터키 민족주의라는 이념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둘째,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종교다. 이슬람교가 아니면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제약이 있었지만, 이 정도의 불편을 감수한다면 사실상 종교의 자유는 제한적 으로 허용되었다. 터키 제국이 이 같은 정책을 취한 근본적인 배경은 바로 코란의 가르침 때문이다. 코란은 이교도에 대한 강제적인 개종을 금한다는 것이 종교 학자 들의 견해이다.셋째, 세르비아의 전통 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세르비아 인 대부분이 농 촌에서 경작을 하는 농민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깊다. 세르비아 인은 폐쇄적인 농촌 생활을 함으로서, 각각의 농촌 마을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 {) 비이슬람 교도들은 나름대로의 종교 단위를 유지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밀레트(Milets)라고 불렀다.밀레트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정교가 온전히 보존됨으로써 {) 네만야 왕조가 배출한 세르비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근원이자 민족 주의자들의 희망이라 불리고 있다.스테판 두산으로 귀결되는 세르비아 민족 주의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세르비아 교회는 창설 초기부터 세속의 권 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러써 그 인에 보존된 세르비아 민족주의 역시 전투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세르비아 인들은 터키 제국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크네제스(Kneels)라고 하는 자 치 조직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는데, 이 크네제스라는 것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한 일종의 영농 조직이었다. 이 조직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사람들을 크네즈 (Knez)라고 불렀다.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대변자이면서 사실상 세속 국가의 역할을 해 왔던 세르비아 정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터키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다. 게다 가 정교회는 18세기에 접어들어 세속의 이익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타락 해 갔고 자연히 터키 통치자들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세르비아 정교회가 담당해 왔던 민족주의 보존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크네제스로 넘 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이 자신들을 핍박하는 예니서리 계급에 항거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이 사건을 터키에 항거하는 민족주의적 사건의 초시로 보는 보아야 할 것이다.19세기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비전은 이론적으로 크게 세 가 지 범주로 나눠진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대세르비아주의였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고향인 스테판 두산에 의해 잠시 존재했던 중세 세르비아 대제국을 다시 건설하자 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는 세르비아 인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두 번째 비전은 이른바 발칸 통일안이었다. 발칸 반도 전역을 슬라브 민족이건 아 니건 관계없이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이 비전은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발 칸 전쟁 중에 각 당사국들이 첨예한 이해 대립과 영토 야욕은 사실상 발칸 통일이 불가능함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나오는 비전은 바로 유고슬라비즘의 출현이었다. 유고슬라비즘은 사실 세르비아에서보다는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에서 더 폭 넓은 인기를 얻었다. 겉으 로는 유고슬라비즘이 표명되었지만 결국 껍질을 벗기면 대세르비아주의가 존재했 다. 유고슬라비즘은 유고 민족들이 지향해야 할 이데올로기로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오늘날 전쟁의 씨앗이 되어 버렸다.세르비아의 극우 민족 세력은 블랙 핸드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했는데, 그들의 최 후 목표는 목숨을 바쳐 대세르비아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을 제공하였다.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는 처음으로 통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속성상 결코 융화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 점차 세르비아가 전권을 행사하는 정치체제로 변질되어 갔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 하자 대세르비아주의의 실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독재를 단행하며 반체제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행했다. 세르비아 인은 그나마 탄압 대상이 되더라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지는 않았지만, 세르비아 인 이외의 다른 민족은 엄청난 희생 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실제로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세르비아 인은 복수에 불타는 일단의 크로아티아 인 에게 조직적인 살육을 당했다. 크로아티아 인, 슬로베니아 인 사이에서 돌이킬 수 없는 반세르비아 감정이 무서운 속도로 번져 나갔던 것이다.2차 대전후 공산 정권이 들어선 유고슬라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 국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이 연방 공화국에서 1966년 민족문제가 본격적으로 분출되는데, 이때 유고 정권에서 가장 이슈로 떠오른 문제는 연방 공화국 내에서 다시 강화되고 있는 대세르비아주의와 이에 제동을 걸려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 아 두 세력의 각축전이었다. 한마디로 유고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민족주의 정서로 급격히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공산주의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멸 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문제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기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서서히 인정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민족문 제가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으로 치부될 성질의 것이 아닌 정치체제 자체를 위협하 는 변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1971년의 크로아티아의 독립 요구 시위 사태는 연방의 개입으로 무산되었으나 근 본적인 민족주의의 불길을 끌 수는 없었다. 1980년 5월 4일 티토 대통령의 사망은 세르비아 패권주의의 불길을 다시 지피는 계기도 되었지만, 크로아티아 인의 가슴 에 내재해 있던 불만을 밖으로 폭발시키는 역할도 했다. 티토의 사후 세르비아 민 족주의는 이부 지식인들의 주장에 힘입어 더욱더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 중심 인물 이 바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다.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신봉자로 모든 정권 을 장악해 나갔다.
    인문/어학| 2002.12.24| 5페이지| 2,000원| 조회(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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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오르그 뷔히너에 대해 평가C아쉬워요
    게오르그 뷔히너(Georg Buchner)의 작품 세계젊은 독일파에 속하지는 않지만, 사상적으로는 그 연장선상에 있고, 절규와 선동 대신에 정치적 틈바구니 속에서 빚어지는 인간의 비극을 차원 높이 예술적으로 조형한 극작가이다.그는 생전에 희곡 당통의 죽음 한 편을 발표하고, 24세에 요절하였으나, 그의 존재는 투철한 사실성과 근대성 때문에 독일 문학사상 찬연한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의 문학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사실성과 근대성은 말할 것도 없고, 깊은 역사적인 지식과 성실한 생활의식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소재들은 대체로 정치와 사회 현실에 관한 것이지만, 그 석에는 인생에 대한 지혜와 깊은 통찰이 있다. 그는 자연 과학적인 눈으로 사회 현실을 깊이 관찰하고, 현실의 사회고를 뼈저리게 체험하면서, 새로운 인간 존재를 창조해 보려고 하였다.뷔히너는 헤센의 다름슈타트 근교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슈트라스부르크와 기센 대학에서 의학, 철학, 역사를 배웠다. 1830년 7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그것에 자극을 받고 혁명사상이 싹트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다.그 당시의 헤센은 봉건 군주의 악정 때문에 혼란이 거듭되었고, 농민들은 매우 궁핍하였다. 뷔히너는 동지들과 압정 타도를 위해 비밀 조직인 인권 협회를 조직하여 악정을 폭로하는 팜플렛을 배포했다. 이것이 발각되어 관헌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망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5주 동안에 쓴 희곡이 명작 「당통의 죽음(Dantons Tod)」이다. 이 희곡은 구츠코의 추천에 의해 출판되었다.슈트라스부르크로 피한 뷔히너는 다시 동물학 연구에 몰두했다. 1836년 가을 스위스로 옮겨 취리히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강사가 되었으나, 다음해 2월 장티푸스에 걸려 급사했다. 「당통의 죽음」이후의 작품은 그의 사후 유고로서 출판된 것이다.뷔히너 문학의 서사성생전에는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뒤늦게 명성과 찬사를 얻게된 작가들은 문학사의 여러 페이지에 문학과 예술 등, 요컨대 19세기적인 모든 특징들이 오늘날까지 같은 맥락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뷔히너의 생애와 작품을 얼핏 훑어보더라도 그의 이러한 현실성 내지 현대성은 자기 시대의 당면 문제에 초연한 채, 보편적 가치나 초월적 진리를 추구한 결과라기보다는 자기 시대의 문제를 가장 절실한 개인적 문제로 받아들이고 성실하고 철저하게 그 해답을 탐색한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뛰어난 통찰력은 천재의 타고난 신통력으로 몇십년 몇백년 후의 세계를 예견하고 미래의 시점에 섬으로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며, 그의 문학적 형상력은 사후의 명성이나 미래의 독자를 의식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 결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애당초 작가라는 것을 직업으로 생각지도 않았고, 작가로서의 입신이나 성공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대를 뛰어넘는 뷔히너 문학의 새로움과 전위성은 '상황과 전달, 체험과 재현의 일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뷔히너 문학의 현대성은 이러한 인식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그의 문학은 그 속에서 제기된 문제의 현대성뿐만 아니라 그 문제 제기의 방식, 즉 문학의 소재나 주제뿐만 아니라 문학의 형식이나 양식에서도 혁신적인 새로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뷔히너의 현대성을 해명하기 위해서 그의 표현 방식의 새로운 점, 또는 전위성을 검토하는 한편 어떻게 해서 그러한 표현 방식이나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우리가 뷔히너의 생애로부터 받는 가장 강렬한 인상은 그가 불과 24년의 짧은 시간을 살면서 자기 시대의 문제들로부터 한치도 물러서거나 비켜서지 않고 성실하게 그러한 문제들과 대결하고 고민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성실성으로 자기 시대의 상황에 대해 동시대인들을 앞지르는, 깊이 있고 정확한 통찰에 도달했으며 그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은 고통과 긴장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뷔히너가 그의 작품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그의 시대가 그에게 제기스 혁명사」와 미네의「프랑스 혁명사」를 모체로 했으며 「렌츠」는 목사 오벌린(Oberlin)의 기록을, 그리고 「보이체크」는 법의(法醫) 클라루스 박사의 「살인범 요한 크리스토프 보이체크에 관한 정신 감정서」 및 재판 기록을 토대로 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들이다. 「당통의 죽음」은 전체의 1/6이 각종 기록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며, 이 중 공개적인 연설 부분은 기록의 내용을 전혀 수정 없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각종 자료들을 조금씩 필요에 따라 조립하고 나머지 부분은 작가의 창작으로 메우는 이른바 몽타주 수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신문 기사나 보고서를 쓸 때처럼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취재한 다음 자신의 관점에 따라 필요한 부분을 골라내어 적절히 배열하고 중간 중간에 자신의 의견을 집어넣고 있는 셈이다. 또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인 「레옹스와 레나」도 기본적인 작품의 구조는 역시 일종의 몽타주라고 할 수 있는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그는 이 작품을 만들 때 셰익스피어와 스턴, 뮈세, 괴테, 홀베르크, 티크, 브렌타노, 장 파울, F. 슐레겔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과 코메디아 델라르트의 기법 등 각종 자료와 기법을 조금씩 따오거나 변형시켜 사용하였다.그러나 이러한 몽타주 수법이나 편집 수법은 작가의 재능이나 창의력의 부족, 또는 표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러한 창작 방식에 의해 뷔히너는 독특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는 창작 과정에서 각종의 이질적인 자료와 자신의 창작을 교묘하게 조립하여 배열해놓았기 때문에 그 결과 작품에는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공존하게 된다. 이것은 연극의 경우 관점과 양식(어투와 문체)의 다양화로 나타나며 바로 입체적인 구조라는 서사적 연극 구조의 기본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그러면 뷔히너가 왜 이처럼 역사적 사실들을 즐겨 작품의 소재로 삼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루카치는 이러한 소재의 역사을 원형과 비슷해야 하는 역사화(歷史畵)처럼 생각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요컨대 뷔히너는 역사적 소재를 그린 그림처럼 그의 연극이 과거의 사실을 관객에게 되살려 보여주되, 되도록 역사적인 세부적 사실에 가깝도록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로나 그는 기록이나 사실 자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생한 현실을 재현하고자 했으며 이 점에서 작가는 단순한 사관(史官)과는 다르다고 말한다.그는 결국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되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나 관객이 그러한 현실의 의미를 '배울'것을 원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통의 죽음」은 정치적 의도가 깔린 작품이다.뷔히너의 작품들이 1830년대라는 과도기의 제반 문제들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그 해답을 추구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며, 이로써 종전의 연극과는 많은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사뭇 딴판인 새로운 형식의 '현대극'의 출현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뷔히너의 작품에는 자기 시대의 정치, 철학, 인류학적 문제들은 물론, 예술과 문학의 모든 문제 글까지 집약되어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이 "철저하고 급진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제기된 것처럼 그 대답도 철저하고 급진적인 동시에 근원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뷔히너는 현실의 총체성과 모순성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주로 작품 소재로 택했고,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 당대 사회 계층간의 갈등과 빈부의 대립, 그로 인한 가치와 도덕의 상대화, 인간의 무력감과 절망감, 대화의 단절과 권태 등 소외의 제반 현상들까지도 깊이 있게 파헤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와 문제의 제기에 의해 그의 연극은 구조면에서 이른바 개방적 형식과 입체적 구조라는 서사적 특징을 드러내게 됐는데 이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의 총체성을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도록 돕기 위한 극적인 장치인 셈이다. 결국 거칠게 정리하자면 뷔히너의 연극은 그 이념면에서 사실주의적이요, 형식면에서 서사적이라고 할 의 죽음」을 썼다던가 취리히의 망명 생활 중 "낮에는 해부도, 밤에는 책과 함께 앉아"(1836년 11월말 취리히에서 동생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씨름하면서 「보이체크」의 원고를 썼다는 것은 이러한 내면적 일치를 상징하는 것 같다. 또 그가 어렸을 적부터 작가를 지망한 적이 없고 의사나 자연과학자를 목표로 삼고 그 방면의 공부에 힘썼다는 것도 그의 문학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가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몸에 밴 과학적 분석 방법과 합리적 태도는 그가 정치 활동을 통해 습득한 현실 세계의 경험과 결합되어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그 때문에 뷔히너는 순수한 지식보다는 경험적 진실을, 추상적 관념보다는 구체적 사실을 우위에 놓았다.게오르그 뷔히너의 미학관게오르그 뷔히너의 작품들은 거의 다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전혀 가공적으로 창작된 부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뷔히너는 예술가가 현실을 작품에 재현하는데 있어서 '생명'과 '현존재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현실을 묘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차원의 있을 법한 사실을 신빙성 있고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는 뜻이다. 감정이나 격언 혹은 개념들로 작품을 쓰던 뷔히너 생존시 지배적이었던 관념주의 작가들을 뷔히너가 싫어한 것은 이들의 작품에 생명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가 괴테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민요를 좋아한 것은 여기에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뷔히너의 미학 원칙은 예술과 생명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는 '미천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에서 나온 인본적 사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의 미학관은 사실주의적인 관점과 인본적 사상이 결합된 인본적 사실주의라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뷔히너가 강조하는 추함도 '미천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과 현실을 바탕으로 정당화되어 진다. 뷔히너는 추하게 일그러진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여 인간을 짐승이나 사물로 비하시켰으며, 특히 특권층의 인간들을 희화로 표현하여 현실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미천한 자들의 희화적인 묘사로서다.
    인문/어학| 2002.12.20| 9페이지| 1,500원| 조회(1,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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