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서 독자의 역할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니, 막상 생각처럼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작가의 역할이라는 주제였다면 쉬웠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문학을 쓰는 사람의 위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독자의 역할이란 주제를 공부하면서 1년전 들었던 문예비평방법론 수업내용도 찾아보고, 교재나 비평이론에 관련된 책을 보고나서 문학에서의 독자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작가의 역할에만 주목했던 나의 관점이 고전적인 문예관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전통적인 작가관에서 작가는 작품을 쓰는 사람이고 독자는 쓰여진 작품을 읽는 사람이다. 따라서 주고 받는 관계라는 일방향적 소통체계는 자연스레 작가의 권위를 부각시켜 주었고. 독자는 작가가 텍스트 안에 숨겨놓은 의미들을 작가가 만들어 놓은 표시를 따라 읽어내는 수동적인 역할 밖에는 수행하지 못하였다. 텍스트 안에서 작가는 신처럼 군림하고 독자는 신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아야 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전통적인 작가관은 18세기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최정점에 다다르는데, 그들은 작가(예술가)를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신에 의해 선택된 특권적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작가와 독자의 쓰는자 와 읽는자 라는 전통적인 역할 분담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복되기 시작한다.20세기에 유행했던 신비평이나 러시아 형식주의는 전통적인 독자의 역할을 그대로 인정하는 이론이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 텍스트는 작가나 독자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자기완결성을 지니는 미적인 가치 체계였으며, 미국의 신비평가들은 작품을 절대적이고 자족적인 실체로 생각했다. 이러한 신비평에 반발하면서 등장한 여러 비평 중, 가장 혁신적인 것이 소위 '독자반응비평'이다. 이 비평방식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독자의 반응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이 방식은 작품이 독자에게 끼치는 심리적인 효과나 작품의 인상을 배제한 신비평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독자반응비평에 따를 때 작가에 의해서 창조되어 이 세상에 주어진 텍스트는 작가의 생산품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독자를 만나지 않으면 작품이 될 수 없다. 작품은 오직 독자의 독서행위에 의해서만 탄생하고 따라서 작품의 생산자는 독자라는 것이다. 또한 독서를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관계로 생각할 때 독자는 작가가 만들어낸 텍스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작가가 만든 텍스트와 독자가 받아들인 텍스트 사이에는 정보량이나 정보의 질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선 작가와 독자는 동일한 언어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두 사람은 공통 코드를 사용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갖는 언어에 대한 경험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자가전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인물이 동일한 것을 바라볼 때도 시간적 차이에 의해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러한 차이는 대체로 대화 상대방이 다른 코드를 사용하기 때문으로 생각될 수 있다.작가는 세계와 사물을 보고 세계를 언어라는 매개체를 사용하여 허구적으로 창조해낸다. 허구화된 텍스트는 독자에게 작가가 생각했던 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독자는 작가가 만든 텍스트를 읽고 구체화 과정을 거쳐 작가가 의도한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이 구체화 과정에서 독자는 허구화 과정에서 생략되고 압축되었던 부분들을 상상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자 자신의 언어경험이 작가의 텍스트에 덧붙여지게 된다. 여기서 독자가 받아들인 텍스트는 작가가 만든 텍스트와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독자는 작가가 만든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상적으로 자신의 언어적 경험을 덧붙이면서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텍스트가 작품이다. 작품은 작가가 만든 텍스트에 독자의 상상력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또 다른 텍스트인 것이다. 독자는 작가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자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폭군적이었던 작가의 권위에 도전하여 독자에게도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 또한 해석의 가능성을 확대시켰으며, 텍스트에 기존해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찾아내도록 독자에게 동기유발과 창의력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공헌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독자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문학도, 작품도, 작가도 결국 독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는, 즉 독자없이 이들의 존재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작품이란 인쇄된 그 자체로 존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읽혀지는 가운데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텍스트의 이해가 이와 같이 텍스트를 읽고 소화시키는 독자의 반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작가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며 작가의 의도는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 역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작가가 의도하고 형상화해 내는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저질의 독자일 경우, 작품은 온전히 그 독자의 수준으로 구체화되고, 또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그 진가가 밝혀지지 않은채 사장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 자체가 독자 역할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워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는 것은 시인의 의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지적인데, 이것은 그 시인 자신이 시인의 의도 라는 고전적인 견해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한편 시인의 작품 자체가 그의 의도와 시적 형상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시인이 그의 의도와 시적 형상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통찰한다면, 독자의 인식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서 자신이 쓴 시의 이해에 되돌아와 성찰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시에 대해 무식한 비평을 했을 경우 시인은 독자로서 그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것들이 바로 비평의 가능성을 넓힌다는 독자반응비평의 장점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독자반응비평은 독자의 각기 다른 수준과 배경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점을 지적 받았다. 그래서 제시된 것이 유식한 독자 이다. 유식한 독자란 첫째 텍스트에 사용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하고, 둘째 그 언어로 쓰여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춘 사람을 의미하며, 셋째 문학적 능력과 소양이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은 반론을 위한 반론으로 보인다. 유식한 독자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고서도 위대한 작품이란 누구에게나 전률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작가의 형상화가 수많은 암호로 되어있고, 텍스트 읽기에서 고도의 지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런 작품을 읽고자 하는 사람 역시 작품이 요구하는 지적 능력을 어느 정도는 갖춘 사람이 아닐까.심리학자들은 정신병 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치료효과가 얻어지기 위해서는 환자가 사건을 말로 번역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환자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의사가 환자에게 무엇이 일어났어야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환자가 스스로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이코 드라마에서 의사들이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환자들에게 연극을 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환자들은 연극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 장애를 가져오게 한 옛날의 사건을 재연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치료효과가 얻어진다는 판단 때문이다. 문학 텍스트의 독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우리는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텍스트를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