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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의 실태와 현황
    3. 이혼1)현사회의 이혼현황“부부 3쌍 중 1쌍이 이혼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에선 2000년 기준 하루에 215쌍이 결혼하고 70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90년과 비교해 결혼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이혼은 2.6배나 늘어난 수치다. 이러한 수치에서 볼 수 있듯이 현 우리의 사회에서 이혼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로 향하고 있다.2)이혼의 증가 원인이혼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이후 제도적으로 이혼을 허용하게 된 사실, 그리고 이혼에 대한 태도가 허용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점 등으로 이혼은 더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들을 크게 나누어 5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1) 산업화와 도시화산업화와 도시화는 개인의 성취성, 특이성, 자기중심성의 가치를 보편화시키고 익명성과 사회적 이동성을 증가시키므로 이혼율을 상승시킨다. 특히 도시지역은 단절된 인간관계를 지닌 이질적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므로 이혼의 기회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어 도시지역의 이혼율이 시골지역보다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2) 이성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변화높은 이혼율은 부분적으로 남녀평등에 기인된 여성의 지위상승에 그 원인이 있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단체, 대중매체의 홍보 등으로 인간의 권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으로써 남편의 부당한 대우를 참고 견디는 여성이 줄어들게 된 것도 이혼 증가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여성의 취업기회의 증가로 인해 여성의 경제적 자립도가 보장되면서 남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약화되고, 이혼 후 생활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혼을 결심하기도 한다.(3) 가치관의 변화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자유 및 평등,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형성으로 결혼생활에 대한 관점이나 기대에서의 변화가 초래되어 이혼에 대한 태도가 허용적이 되어가고 있다. 가족관계에서 부부관계로 바뀜에 따라 부부자신의 정서적 만족을 중요시하게 되어 결혼생활 에서 부부관계로 바뀜에 따라 부부자신의 정서적 만족을 중요시하게 되어 결혼생활에서 기대했던 욕구충족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혼도 가능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가족이나 자녀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개인의 행복이 우선시되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이혼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과거에는 자녀들이 부부사이의 불안정성을 줄이는 역할을 하였지만 오늘날은 소자녀 또는 무자녀 추세에 의해 자녀출산기능이 약화되어 자녀들 때문에 이혼을 삼가는 경향도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4) 이혼법의 변화배우자에게 어떠한 사유나 결점이 없더라도 조정의 가망이 없을 때 이혼을 허용하는 무결점 이혼법은 이혼율을 과거보다 높이는 법적 장치가 되고 있다. 또한 9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현행가족법에서는 이혼 후 주로 아버지에게 주어졌던 자녀에 대한 친권이 부모가 공동으로 행사 할 수 있게 바뀌고, 재산분할청구권이 인정됨으로써 자식이나 재산문제로 인해 받은 불이익이 감소되어 과거보다 쉽게 이혼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특히 90년대 이후 재판상 이혼율의 급속한 증가와 여성의 이혼제소율 증가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5)이혼에 대한 시각의 변화이혼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의식이 약화되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부부는 '백년해로' 해야 하는 것으로 여자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고 사는 것이 미덕인양 생각했으나. 최근 이혼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되도록 이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있지만 '불행한 상태에서는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보다는 새로운 삶을 찾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정차 많아지고 있다.3)이혼의 원인이혼의 가장 큰 원인은 남녀의 갈등(부부불화)이지만, 이혼을 보는 시각에서 남녀의 차이가 존재한다. 2002년 전국의 성인남녀 65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이혼급증 원인'에 대한 남녀의 견해가 달랐다. 여성 응답자는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와 의식의 성장'(39.9%) '남성중심적 관습 및 사고방식'(22.9%) '배우자 사이의 배려가 없어서'(18.9%)로 꼽았으나, 남성 응답자는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와 의식의 성장'(34.2%) '가족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없어져서'(30.8%)를 가장 중요하게 꼽았고, '남성 중심적인 관습 및 사고방식'이 원인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5.3%에 그쳤다.이러한 이혼의 원인은 지난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다음으로 지난 몇 년간의 이혼사유별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94'96'00계100100100부부불화80.283.683.5가족간 불화4.13.02.8건강문제1.61.20.9경제문제2.92.02.9기타11.210.29.9(단위%)(3)평균 이혼연령 및 연령별 이혼 구성◆평균이혼연령- 남자:38.6세, 여자:34.9세94년에 비해서 각각 2.5세, 3.0세 높아졌는데, 그 이유는 혼인연령이 높아지고 동거기간이 긴 부부들의 이혼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연령별 이혼구성▷30대-이혼이 가장 많은 연령층은 남녀 모두 30대로 남자는 49% 여자는 50.4%를 차지.▷20대-남자 13.5% 여자 27.7%로 아직도 높긴 하지만 구성비는 점점 낮아지고 있음.▷40대-남자 27.4% 여자 17.3%로 계속 높아지는 추세임.▷50대 이후-남자 9.6% 여자 4.3%로 계속 높아지는 추세임.[남자 평균 이혼연령 및 연령별 이혼구성비](단위:세 %)'94'96'00평균이혼연령36.137.638.615~190.10.00.020~243.62.01.725~2921.113.911.830~3428.328.223.435~3920.724.526.140~4413.114.717.345~496.88.410.150~543.04.55.455~591.52.02.360+1.81.81.9[여자 평균 이혼연령 및 연령별 이혼구성비](단위:세 %)'94'96'00평균이혼연령31.933.734.915~190.90.40.320~2413.58.76.825~29
    사회과학| 2003.08.30| 4페이지| 1,000원| 조회(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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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법률] 주택 임대차 보호법
    주택임대차보호법 왜 만들었나?무주택 세입자가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얻어 사는 경우 이에 관한법률관계는 민법상의 전세권이나 임대차규정에 의해 규율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민법상의 전세권이나 임대차에 관한 규정은 계약자유의 원칙에입각하여 쌍방(집주인과 세입자)끼리 자유의사에 의한 계약을중시하며 당사자 사이의 법률관계를 형식적으로 평등하게 규율하고 있다.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강자인 집주인의 횡포등으로 인하여 경제적 약자인 세입자가 부당한 요구를 강제당하고 피해를 입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어 결국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게 되었다.이에 주택의 이용관계를 규율하는 민사법규를 계약자유의 원칙이적용되는 시민법의 차원에서 벗어나 세입자의 주거생활안정과 경제적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사회법적 차원으로 전환할 필요성이절실하게 대두되었다.이 결과 1981년 3월 5일 무주택세입자의 권익과 지위를 보호하는내용의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특별법으로 제정되게 되었다.제1조 【목적】 이 법은 주거용건물의 임대차에 관하여 민법에 대한 특례를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주거생활의 안정을 보장함을 목적으로 한다.제2조 【임대법의 적용범위】 이 법은 주거용건물(이하 "주택"이라 한다)의 전부 또는 일부의 임대차에 관하여 이를 적용한다. 그 임차주택의 일부가 주거외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또한 같다. (개정 83.12.30)제3조 【대항력등】임대차는 그 등기가 없는 경우에도 임차인이 주택의 인도와 주민등록을 마친 때에는 그 익일부터 제3자에 대하여 효력이 생긴다. 이 경우 전입신고를 한 때에 주민등록이 된 것으로 본다.임차주택의 양수인(기타 임대할 권리를 승계한 자를 포함한다)은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 것으로 본다. (신설 83.12.30)민법 제575조 제1항 · 제3항 및 제578조의 규정은 이 법에 의하여 임대차의 목적이 된 주택이 매매 또는 경매의 목적물이 된 경우에 이를 준용한다.민법 제536조의 규정은 제3항의 경우에 이를 준용한다.제3조의2 【임대보증금의 회수】임차인이 임차에 임차권 등기명령을 신청할수 있다.임차권등기명령의 신청에는 다음 각호의 사항을 기재하여야 하며, 신청의 이유 및 임차권등기의 원인이 된 사실은 이를 소명하여야 한다.1. 신청의 취지 및 이유2. 임대차의 목적인 주택(임대차의 목적이 주택의 일부분인 경우에는 그 도면을첨부한다)3. 임차권등기의 원인이 된 사실(임차인이 제3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대항력을취득하였거나 제3조의2제2항의 규정에 의한 우선변제권을 취득한 경우에는 그 사실)4. 기타 대법원규칙이 정하는 사항민사소송법 제700조 제1항, 제701조·제703조·제704조, 제706조 제1항·제3항·제4항 전단, 제707조, 제710조의 규정은 임차권등기명령의 신청에 대한 재판, 임차권등기명령의 결정에 대한 임대인의 이의신청 및 그에 대한 재판, 임차권등기명령의 취소신청 및 그에 대한 재판 또는 임차권등기명령의 집행 등에 관하여 이를 준용한다. 이 경우 가압류는 임차권등기로, 채권자는 임차인으로, 채무자는 임대인으로 본다.임차권등기명령신청을 기각하는 결정에 대하여 임차인은 항고할 수 있다.임차권등기명령의 집행에 의한 임차권등기가 경료되면 임차인은 제3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대항력 및 제3조의2제2항의 규정에 의한 우선변제권을 취득한다. 다만, 임차인이 임차권등기이전에 이미 대항력 또는 우선변제권을 취득한 경우에는 그 대항력 또는 우선변제권은 그대로 유지되며, 임차권등기이후에는 제3조제1항의 대항요건을 상실하더라도 이미 취득한 대항력 또는 우선변제권을 상실하지 아니한다.임차권등기명령의 집행에 의한 임차권등기가 경료된 주택(임대차의 목적이 주택의 일부분인 경우에는 해당 부분에 한한다)을 그 이후에 임차한 임차인은 제8조의 규정에 의한 우선변제를 받을 권리가 없다.임차권등기의 촉탁, 등기공무원의 임차권등기 기입 등 임차권등기명령의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 정한다임차인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임차권등기명령의 신청 및 그에 따른 임차권등기와 관련하여 소요된 비용을 임대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본조신갱신거절의 통지 또는 조건을 변경하지 아니하면 갱신하지 아니한다는 뜻의 통지를 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 기간이 만료된 때에 전임대차와 동일한 조건으로 다시 임대차한 것으로 본다. 임차인이 임대차기간만료전 1월까지 통지하지 아니한 때에도 또한 같다.(단서신설 99.1.21)제1항의 경우 임대차의 존속기간은 정함이 없는 것으로 본다.2기의 차임액에 달하도록 차임을 연체하거나 기타 임차인으로서의 의무를 현저히 위반한 임차인에 대하여는 제1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제6조의2 【묵시적 갱신된 계약의 해지】제6조제1항의 경우 임차인은 언제든지 임대인에 대하여 계약해지의 통지를 할 수 있다.제1항의 규정에 의한 해지통지는 임대인이 그 통지를 받은 날부터 3월이 경과 하면 그 효력이 발생한다.(본조신설 99.1.21)제7조 【보증금등의 증감청구권】 약정한 차임 또는 보증금이 임차주택에 관한 조세·공과금 기타 부담의 증감이나 경제사정의 변동으로 인하여 상당하지 아니하게 된 때에는 당사자는 장래에 대하여 그 증감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증액의 경우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에 따른 비율을 초과하지 못한다.(본조신설 83.12.30)-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 제2조 (보증금등 증액청구의 기준)법 제7조의 규정에 의한 차임 또는 보증금(이하 "차임등"이라 한다)의 증액청구는 약정한 차임등의 20분의 1의 금액을 초과하지 못한다.제1항의 규정에 의한 증액청구는 임대차계약 또는 약정한 차임등의 증액이 있은후 1년이내에는 이를 하지 못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제8조 【소액보증금 우선변제】임차인은 보증금중 일정액을 다른 담보물권자보다 우선하여 변제받을 권리가 있다. 이 경우 임차인은 주택에 대한 경매신청의 등기 이들의 각 보증금을 합산한다.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령 제4조 (우선변제 받을 임차인의 적용 기준) 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한 우선변제를 받을 임차인의 범위는 보증금이 특별시 및 광역시(군지역을 제외한다)에서는 3,000만원이하, 기타의 지역에서는 2,000만원이하인 임차인으로 한다.(개정 95.10.19)-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제9조 【임차권의 승계】임차인이 상속권자없이 사망한 경우에 그 주택에서 가정공동생활을 하던 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자는 임차인의 권리와 의무를 승계한다.임차인이 사망한 경우에 사망당시 상속권자가 그 주택에서 가정공동생활을 하고 있지 아니한 때에는 그 주택에서 가정공동생활을 하던 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자와 2촌이내의 친족은 공동으로 임차인의 권리와 의무를 승계한다.제1항 및 제2항의 경우에 임차인이 사망한 후 1월이내에 임대인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표시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제1항 및 제2항의 경우에 임대차관계에서 생긴 채권, 채무는 임차인의 권리 의무를 승계한 자에게 귀속한다.(본조신설 83.12.30)제10조 【강행규정】 이 법의 규정에 위반된 약정으로서 임차인에게 불리한 것은 그 효력이 없다.제11조 【삭월세】 이 법은 일시사용을 위한 임대차임이 명백한 경우에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제12조 【미등기전세의 적용】 이 법은 주택의 등기하지 아니한 전세계약에 관하여 이를 준용한다. 이 경우 "전세금"은 "임대차의 보증금"으로 본다.(본조신설 83.12.30)제13조 【소액사건심판법적용】 소액사건심판법 제6조·제7조·제10조 및 제11조의2의 규정은 임차인이 임대인에 대하여 제기하는 보증금반환청구소송에 관하여 이를 준용한다.(본조신설 99.1.21) [ 해설]부칙(시행일) 이 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경과조치) 이 법은 이 법 시행후 체결되거나 갱신된 임대차에 이를 적용한다. 다만, 제3조의 규정은이 법은 1999년 3월 1일부터 시행한다.(존속중인 임대차에 관한 경과조치) 이 법은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 시행당시 존속중인 임대차에 대하여도 이를 적용한다.(임대차등기에 관한 경과조치) 제3조의4의 개정규정은 이 법 시행전에 이미 경료된 임대차등기에 대하여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주택임대차보호법과 상가임대차보호법의 차이점임대차라는 것은 특정의 물건을 일정기간동안 빌려 쓰면서 그 대가로 임차료를 지불하고 기간 만료 시 그 목적물을 반환하는 계약의 일종이다.따라서 목적물의 종류에 따라서 임대차의 종류가 나누어지고 성격이 달라진다.특히 부동산에 있어서는 그 목적물에 따라 토지의 임대차와 건물의 임대차로 나눌 수 있다.한데 건물은 그 용도에 따라 주거를 목적으로 하는 임대차의 경우는 주택임대차, 기타 건물의 임대차는 일반적으로 상가임대차라고 부르고 있는데 계약상의 절차는 동일하지만 일정한 범위에서의 효력이 다르다.주택임대차 보호법이란?무주택 서민들의 주택이용방법에 있어서 전세 및 월세계약시의 위법, 부당계약을 방지하여 무주택 전(월) 세입자들의 주거생활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하여 제정된 특별법인 주택임대차 보호법에 의거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적용대상 : 주거용 건물의 전부 또는 일부의 임대차 경우- 사무실점포, 공장, 창고 등 비주거용 건물제외- 임대차라함은 등기하지 않은 전세계약 및 월세계약을 포함.건물의 일부(50%미만)가 주거외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주거용 부분의 면적이 전체의 절반을 초과하면 전체에 관하여 적용된다.대항요건 : 세입자가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임차한 주택에 실제로 입주하여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마친 그 다음날부터 보호된다.임대차 계약의 승계: 임대차 기간중에 집이 매매 또는 상속에 의하여 소유자가 바뀐다 하더라도 임대차 계약은 주택의 양수인에게 승계된다.임대차 계약기간: 2년기간의 정함이 없거나 기간을 2년미만으로 정한 임대차는 그 기간을 2년으로 본다- 계약기간 만료일에 집주인은 보증금을 돌려줄 의무가 있고 세입다.
    인문/어학| 2003.07.01| 12페이지| 1,000원| 조회(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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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이해] 성공담
    나의 손에 실패는 없다.한번 보기 시작하면 꺼버리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보는 재미를 추구하는 일본 TV 프로그램, 그리고 그 많은 방송 중에서도 최고의 히트 제조기로 불리우는 그를 아는가?그의 이름은 오치 마사토(越智 眞人).어지간한 일본 젊은이들은 적어도 한번은 그의 이름을 들어보았거나, 그와 같이 되기를 동경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이미 일본 방송계에선 대명사로 불리운 지 오래 되었다.그를 소개하기 전에 그의 작품들을 한번 둘러보기로 하자.「天才たけしの元氣の出るテレビ ; 천재 다케시의 건강해지는 텔레비젼」,「進ぬ,電波少年 ; 전진하는 전파 소년」,「ガチンコ!」,「學校へ行こう; 학교에 가자」,「東京戀人 ; 동경 연인」,「仕立屋工場 ; 맞춤 공장」,「百万男 ; 백만엔 사나이」,「24人の加藤あい ; 24 인의 가토우 아이」,「プレゼンタイガ; 프레젼 타이거」,「世にも奇妙な物語 ; 세상에도 기묘한 이야기」,「天國に一番近い男 ; 천국에 가장 가까운 사나이」 등등.몇몇 프로그램은 이미 한국서도 모방해 히트하기도 했다.오치 마사토는 이 많은 작품들의 기획, 프로듀서, 진행자, 방송 작가, 드라마 작가로서 간여해왔다.그럼 이제 그를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영화 감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기타노 다케시는 원래 일본 코메디언 출신이다. 그런 그가 독설과 입심의 힘으로 일본 내의 여러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방송 제작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1965년에 태어난 오치 마사토는 이런 기타노 다케시의 팬으로서 그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일념에서 1986년 「天才たけしの元氣の出るテレビ-니혼 TV ;천재 다케시의 건강해지는 텔레비젼」의 방송작가로 데뷔하게 되었다.방송 작가로 일하는 그의 기획력은 히트 프로그램으로서 증명되었고 점차 방송작가로서만이 아니라 기획자, 방송 프로듀서로서도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방송 진행자로서 나서기도 하고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기까지 한다.더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도 30대 줄인 그가 이미 연극의 연출을 경험하였고 의류 디자이너로서 숍을 차리기도 하였으며 잡지에 고정 칼럼을 투고하기도 하는 엄청난 팔방미인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일 중독자이려니 할 만 하다.또 일본 유명 그룹인 「TOKIO」의 히트곡인 「カンパイ!!」의 작사도 하였다. 음악에도 프로듀서의 욕심을 느껴 「YeLLOW Generation」이란 그룹을 배출해놓았다.도대체 그의 능력의 끝은 어디인지 감탄을 멈출 수가 없다.공부를 못해도 하나만 잘하면 살아남는 다는 이 세상에서 그 하나의 재능도 못 찾는 우리들에겐 구름 위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진다. 하지만 그는 여러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성공 비결에 대해 자신에게 재미있는 것만을 해왔기 때문에 성공하게 된 것 같다며 말한다. 자신이 방송 일을 꼭 하고 싶다기 보다도 기타노 다케시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염원에서 방송 작가로 데뷔하게 된 것도 그렇고,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든 일들은 '이런 건 어떨까?' 하는 끝없는 호기심에서 기획되고, 기회가 주어지면 가고 싶은 또 다른 길에 나서게 된 덕택이라는 것이다.나는 그를 알면서 공부를 잘하는 것과 머리가 좋다는 것은 별개라는 지론을 재확인하게되었다. 공부를 잘해서 성적이 좋은 것과 머리가 좋아서 호기심이 끝없는 것과는 더러 현실 속에서 혼동되기도 하지만, 정작 이 세계에서 더 필요로 하는 것은 호기심으로 인해서 더 재미나게 사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한다.결국 오치 마사토도 그 자신 스스로가 세상을 보는 호기심에서 그 많은 히트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것이 그가 재미나게 세상을 살아올 수 있는 비결이 되기도 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오늘은 그의 간판 프로그램에 한해서만 안내하기로 하고, 그의 작품으로써 그의 세계를 엿보기로 한다.「進ぬ, 電波少年 - 니혼 TV ; 전진하는 전파 소년」지금은 전파소년적 방송국까지 개설해버린 일본 방송계의 대표적인 히트작이다.「 Every Little thing」도 이 프로그램으로 데뷔했을 정도로 이제는 이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마저 대중의 히어로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을 가진다. 얼마 전에는 한국인 여성 보컬과 함께 재일교포, 일본인 3인으로 된 한,일 혼성 그룹을 결성시켜서 동남 아시아로 라이브 여행을 보내기도 해 한국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기획도 대단히 신기하고 재미난 아이디어로 가득 차, 외국어로 외국인을 웃길 수 있을까? , 하루에 최저 얼마로 장을 볼 수가 있을까?, 현상공모만으로 생활할 수 있을까? 등등으로 새 기획이 시작될 때마다 장안의 화제를 부른다. 한마디로 온갖 호기심의 실험 프로그램이라 하겠다.「學校へ行こう-TBS ; 학교에 가자, 의 원조」이 프로그램은 등교 거부로 인한 아동들이 10만명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일본 사회의 현실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이지메와 따돌림 등으로 등교 거부를 하고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재미나게 학교 생활을 하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이 기획안은 일본 중, 고등학생들의 NO.1 프로그램이 될 정도로 지금도 인기다. 이 점에서 오치 마사토는 매스 미디어의 사회적 역할을 잘 인지하고 있고 대중의 호기심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덕분에 예전 같았으면 이상한 성격이라고 따돌림 받았음직한 개성을 학교 옥상에서 분출하도록 해 오히려 모두에게 주목받는 인기자로 변하는 일들도 많이 생겼다.「24人の加藤あい- TBS 종영 ; 24인의 가토우 아이」영상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목 대상의 프로그램이였다.아쉽게도 종영되었고 원래 심야 1시가 넘어서 시작된 30분짜리 프로그램이지만 매회 가토우 아이라는 일본 아이돌 스타를 주인공으로 유명 광고 감독이나 뮤비 감독, 심지어는 에반게리온의 감독인 안노 히데아끼(庵野秀明)씨마저 나와 각각의 키워드에 맞추어 그녀의 매력을 전하는 영상 작품을 찍게 하는 프로그램이였다.유명 광고 감독쯤이면 상당히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오치 마사토라는 인물의 매력과 저명도에서 선뜻 나서 주었다. 개중에는 로 불리우는, 뉴욕 페스티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가와노 요시타케(河野 良武)씨도 보인다.완성된 작품을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찍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장점. 그야말로 영상 제작에 관련된 산 공부가 되는 것이다.오치 마사토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 원래 세계적 레벨의 광고 감독이나 뮤비 감독들과 함께 일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들을 일반 대중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었다 했다.「東京戀人-후지 TV 종영; 동경 연인」
    인문/어학| 2003.06.30| 4페이지| 1,000원| 조회(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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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역사] 실존인물 황비홍
    "황비홍"그는 누구인가? 과연 그는 중국사에서 남아 현대의 사람들에게 영화로 부활 할 정도의 인물이었는가?....홍가권의 종사 황비홍(사진)은 한때 청나라 해군제독 유영복 장군의 간청으로 수군의 무예를 지도하는 교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연유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당시 황비홍은 제자들에게 무예교습 외에는 중국고전 민속놀이인 사자춤에 능하여 인근에 명성이 높았다 이 사자춤은 사자의 탈을 두 사람이 들어가 뒤집어쓰고 사자와 똑 같은 흉내를 내는 특이한 놀이인데 한 마리의 사자와 한명의 선잽이로 한팀이 되어 중국의 큰 행사나 명일에 인기종목의 하나로 등장된다. 또한 용의 춤놀이도 있다. 어느 날 황비홍은 제자들과 같이 광주 하남의 유명한 명승지인 금화묘 앞 넓은 공지에서 사자춤을 시작하니 수천의 구경꾼이 모였다. 황은 사자춤 외에 자신의 무예와 제자들의 시범도 보였는데 이때 구경꾼 중에 광주 관청의 무예훈련원 사범인 진태균이란 사람이 있었다. 진은 만주사람으로서 기골이 장대하고 무술이 뛰어나 그 재주를 청조로부터 인정받아 훈련원 대장직을 보게 되었다. 진이 보니 황의 무예가 높음을 알고 동행했던 부하를 시켜 황을 관청으로 초대하였다. 포리의 안내를 받아 관청에 들어가 진을 만나 초대한 연유를 묻자 진이 말하길 "선생의 시범은 잘 보았소. 선생의 무예에 높은 공이 있음을 보고 무예수업을 하는 나로서 한수 배우고자 하여 시합을 청하는 바이요"하며 도전해 왔다. 황은 말하길 "나는 아직 공이 깊지 못하니 사양하겠소"하고 사양했으나 진의 강권에 못 이겨 시합을 허락하였다. 진은 자신의 무예를 과시하려고 관청의 전용 도장에 자기의 상관 총독부 최고 책임자와 부하를 모아 놓고 시합을 시작하였다. 시합이 개시되자 진은 선수를 차지하고자 먼저 전수로 일초를 공격하였다. 황은 진의 선제공격을 홍가 무예의 한 수인 수교를 써서 진의 팔목을 잡았다. 수교는 홍가 무예의 중 가장 위력 있는 초식이다. 진은 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잡힌 팔은 놔두고 다른 한 손으로 황의 정면을 치자 황은 호학쌍형권의 한 수인 요룡귀동의 초식으로 재빨리 막자 진은 물러나는 수법으로 대마보의 기술을 쓰니 황은 진을 따라 들어가며 삼성작탄각의 연속 쓸어 돌리기를 써서 진의 마보를 치니 진은 이 수에 걸려 나가 떨어졌다. 진은 깜짝 놀라며 떨어지는 순간 이제는 죽거나 크게 다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은 다음 공격을 거두고 빠른 몸놀림으로 접근하여 쓰러지는 진을 받아 일으켜 주었다. 이러한 황의 행동에 진은 무사로서 크게 감명 받아 정식으로 자신의 패배를 자인함과 동시에 황의 처사에 감사했다. 이어서 진은 자신의 상관에게 황을 소개하고 황의 무예와 좋은 점을 소개하니 상관도 황의 무예를 보았으므로 황을 치하하고 곧 잔치를 열어 황을 즐겁게 하여 주었다. 이튿날 관청의 상관은 자신의 상관인 광동과 광서를 지배하는 양광의 총독인 오전미 장군에게 황비홍에 관하여 보고하니 오총독은 황을 초청하여 유장군 휘하의 수군 무술교관직을 맡겼다. 그 후 군의 총사령관인 유영복 장군이 무예수련 중 실수로 다리의 뼈를 크게 다쳐 여러 의원이 백약을 썼으나 효험을 못보던 중 황의 의술이 높다는 말을 듣고 황을 불러 치료를 부탁하니 며칠 만에 상처를 깨끗이 낫게 하였다. 이 일로 유장군과 군대의 사람들은 황의 의술은 신술이라고 불렀다. 유장군은 보답의 뜻으로 술예비정(術藝비精)이란 4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금판을 상으로 주었다. 그 후 황은 광동지방과 광서지방 두 곳에 위치한 군대의 교련을 맡게 되었고 그 밖에서는 제자를 양성하며 의술로 여러 사람들을 치료하니 그는 바쁜 몸이 되었다. 광주시 제일의 큰 시장인 삼란시장의 상인 모두가 자신들의 체력 단련을 위하여 황의 무명을 듣고 지도해 줄 것을 간청해 왔다. 그러나 황은 홍가문의 종사로서 여러 일이 많아 대신 자기의 유능한 고제자 양관을 시켜서 삼란의 상인들을 지도하게 하였다. 황은 제자를 많이 양성했고 유명한 인물도 많이 배출하였다. 그는 홍가의 무술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고제자들에게 각지에 도장을 세워 홍가무예를 가르치니 2대 3대 4대 5대에 걸쳐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홍가권은 단연 남해파 중의 제일 큰 문파로서 번창하게 되었다. 황비홍은 자신의 1대 제자 중 최고의 고단자들을 모아 한방을 만들어 그 이름을 용호방이라고 하였다. 황비홍은 말년에 홍콩의 보지림 지관 주인 육정강에게 무술을 지도하였다. 그때 홍콩에서는 육정강이 개설한 지관이 하나 있었는데 근처의 타 문파의 도장에서 쳐들어와 싸움이 일어났는데 육정강의 제자들이 다치고 도장이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난 황은 단신으로 찾아가 관주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으나 황이 늙고 혼자 온 것을 알고 얕잡아 보고 불손하게 굴었다. 또한 오히려 무리를 지어 황을 공격하니 황은 대노하여 수십 명을 일시에 쓰러뜨렸다. 이 일로 말썽이 나자 광주로 피신하여 보지림 총관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한편으로 인술도 펴면서 지내던 중 1923년 광주에서 상단사건이 일어나서 체육관아 모두 불타버렸다. 그 후 황비홍은 1924년 향년 70세로 죽으니 홍가문의 많은 제자들이 각처에 도장을 세워 계속 제자를 양성하여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교육학| 2003.06.30| 2페이지| 1,000원| 조회(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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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역사] 일본중세역사
    일본의 역사中 世헤이안 시대가 끝나고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중세가 시작된다. 군사 독재 정권인 바쿠후가 생기면서 부시(武士)계급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고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이어진다. 정권을 잡기 위한 부시들의 전란이 끝없이 일어나던 시기로 일본역사에 있어서 그 유명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바로 이 시대의 인물들이다. 일본 역사상 전란이 가장 많았던 시기로 140여 년 간에 걸친 일본의 전국시대 역시 이 시대에 속한다.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초상1)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겐페이 내전에서 승리한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가마쿠라를 거점으로 바쿠후(幕府)를 연 1185년부터 1333년까지의 약 150년 간을 가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가마쿠라 바쿠후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무신정권으로 요리토모는 쇼군(將軍)의 자리에 올랐고, 교토에 천황의 조정을 그대로 둔 채 가마쿠라를 거점으로 새로운 정부인 바쿠후를 세움으로써 이원정치를 열어간다. 지방으로 고쿠시와 군시를 대신하기 위해 지방관인 슈고(守護)와 슈고의 밑에서 직접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지토(地頭)를 파견하여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천황을 비롯한 조정의 귀족들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고, 천황은 종교적인 상징적 의미만을 갖도록 제한하였다.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사후 그의 아들인 장남 요리이에가 쇼군이 되었지만, 그의 어머니인 호죠 마사코는 아들인 요리이에의 권력 독점을 막고 마사코의 아버지 호죠 도키마사를 중심으로 하는 13명의 원로 무사에 해당하는 고케닌(御家人)의 합의제를 통해 정치를 폈다. 1203년 도키마사는 2대 쇼군 요리이에를 폐하고 차남인 12살의 어린 나이의 사네토모를 쇼군으로 세움으로서 실권을 움켜쥐었고, 헤이안 시대의 섭정·관백과 같은 지위에 해당하는 싯켄(執權)의 자리에 올랐다.하지만 1219년에 요리이에의 아들인 구교(公曉)에 의해서 쇼군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쇼군의 살해범인 구교(公曉) 이르러서는 집권을 사임한 후에도 호조가문의 상속자인 도쿠소(得宗)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아들인 도키무네(時宗)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력한 전제 정치 체제가 이루어 짐으로서, 도쿠소 전제 정치가 이루어지게 된다.이는 곳 고케닌들로부터 반발을 샀으며, 1274년과 1281년에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침입이 있었으나 때마침 불어온 태풍의 영향으로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원과의 전쟁을 준비로 재정이 궁핍해졌고, 신하인 무사들에게 은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불만은 높아져 갔다.1318년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하면서, 고다이고 천황은 호죠의 독재정치로 불만에 찬 무사세력을 이용, 칸토우(關東)의 대 슈고인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손을 잡고 군사를 일으켜 1332년 가마쿠라 바쿠후를 점령, 호조가문을 멸함으로써 가마쿠라 바쿠후 시대는 끝이 난다.가마쿠라 시대에는 막부에 의한 군사독재가 이루어졌던 만큼, 무사의 기풍을 반영한 문화가 발달하였다. 전란이 계속되었던 불안한 시대였으므로, 신란( )에 의한 누구나 나무아비 타불만 외우면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정토종(淨土宗)이 발전하였다.문학으로는 무사들의 싸움을 그린 군기물(軍記物)이 발달 하였으며, 그중 헤이케이 모노가타리(平家物語)가 대표적이다. 그림 면에서는 헤이안 시대 후기에 발달한 에마키가 계속 유행하였다. 특히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와 초오쥬우기가(鳥獸戱畵)등의 뛰어난 에마키 모노가 만들어졌다.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源氏物語繪卷)의 그림들.일본의 역사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초상. 1358년 남북조 내란의 대책으로 규슈 원정을 계획하다가 병사하였다.2) 남북조(南北朝) 시대1336년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북조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교토를 피해 요시노(吉野)에 들어가 남조를 열게된다. 약 60여년 동안의 시대로 1392년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주도로 남·북 양조가 합쳐질 때까지를 남북조 시대라고 하며, 넓은 의미로는 무로마치 시대에 포함되기도 한다.1333년 5월,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손을 잡음으로써 호입성함으로써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은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고다이고 천황은 규슈로 빠져나가 요시노를 거점으로 하여 남조를 열었고,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고묘(光明)천황을 옹립하며 북조를 열고 가마쿠라 바쿠후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일본에서 최초로 두 개의 조정이 존재했던 시기로 60여 년에 걸쳐 내란이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군사적으로 북조가 압도하였으나, 바쿠후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면서 분열세력이 남조 측에 가담했다. 무로마치 바쿠후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에 이르러 쇼군의 지위가 강화되었고, 바쿠후에 의한 정치도 안정을 찾았다. 결국 1392년에 남조의 고카메야마(後龜山)천황이 북조의 (後小松)천황에게 양위하는 형태로 남북조는 합일되었다. 한편 내란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쓰시마·이키·마쓰라 지방의 주민들은 한반도와 중국 북부 연안을 습격해서 쌀 등을 약탈을 일삼기 시작했다. 이들 해적 집단을 왜구라고 하며, 이들은 14~16세기에 걸쳐 활동하였고 명과 조선의 요청에 따라 일본측에서 왜구를 토벌했다.일본의 역사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초상. 금각사를 건립하며 화려한 기타야마 문화를 발저시키기도 하였다.3) 무로마치(室町) 시대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텐노를 몰아내고 고묘(光明) 텐노를 세워 정권을 장악한 뒤 교토에 바쿠후를 세웠지만 내란의 상태였기 때문에 막부의 힘이 강력하지 못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츠에 이르러 남조와 북조가 통일되었고, 쇼군의 권위가 강화되었으며, 전란 중에 지방 무사의 세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지방 무사세력을 장악하고 억제하기 위해 슈고다이묘(守權大名), 즉 다이묘(大名)를 지방으로 보냈다. 지방의 무사세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지방의 무사들보다 슈고의 힘이 더 강했어야만 했기에, 자연히 슈고에게 많은 권한을 줄 수밖에 없었다.사실상의 봉건체제로 영토를 부여하고 자치하게 하였으며, 그 대가로 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슈고에의 권한은 더욱 증대되어 요시미츠대에 이르러서는 이들에게 한제이켄(半濟權)을 부여함위한 전제정치를 강행하였고 그 결과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을 진압한 이듬해에 또 칸토우(關東) 지방의 호족들간에 분열되어 혼란을 겪었으며, 바쿠후의 지배력이 현저하게 그 밑바닥을 드러냈다.계속적인 쇼군에 의한 전제정치를 강요한 결과 지방의 슈고다이묘들의 불만이 쌓였으며, 1441년에는 3개 국(國)의 슈고다이묘였던 아시카가 미츠스케가 쇼군을 암살해버리는 "가키쓰의 난'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막부의 권위가 현저히 실추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며,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불과 8살의 어린 나이로 쇼군이 되었고, 이미 실권을 모두 잃어버린 그는 오로지 취미 생활에 전념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좋아해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은각사를 짓는 등, 과도한 토목공사로 바쿠후의 재정은 극도로 궁핍해져, 허수아비나 다름없게 되었다.더욱이 요시마사는 후계자를 두지 못해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를 후계자로 지정하였지만, 뒤늦게 아들인 요시히사(義尙)가 태어나면서 이를 번복하게 되었고,일본의 역사긴카쿠지. 원래 킨카쿠지를 모방하여 외면에 은을 입힐 예정이었던 까닭에 이러한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이 문제에 대해 지방의 슈고 다이묘들이 개입했고, 교토에서 2대 유력 다이묘인 서군의 야마나소젠(山名宗全)·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의 동군으로 나누어져서 전루를 벌이는 "오닌의 난 ( 仁の亂)"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이후로는 줄 곧 대치만 하고 있는 소강상태였으며, 지방의 병력이 전쟁에 참가한 틈을 타 각지의 영국 내에서도 고쿠진(國人)층의 반란이 발생하였다.오닌의 난에서 전쟁은 많지 않았지만, 각지에서 모여든 무사들에 의해 교토는 황폐화되었고, 쇼군은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결국 오닌의 난 6년째에 접어들어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쇼군의 자리에 올랐고, 전쟁을 그만둘 것을 공표 하였으나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5년이나 더 지속되었다.무로마치 시대의부터 일본 고유의 전통문화가 발달하기나가에 의해 무로마치 바쿠후의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교토에 입성한 1568년까지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일본의 역사 중 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기에 해당한다.이 시대는 오닌의 난에 있어서 지방의 슈고 다이묘들이 교토에서 대치하고 있을 무렵,이들의 영지에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하여 영지를 차지한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가 출현한다. 이들은 농촌 조직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쿠니를 세우고 영토를 관리하였고,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기도 하였다.중앙에서는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쇼군 요시타네(義植)를 추방한 이후 호소카와(細川) 집안도 분열하고 한때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國)와 오우치 요시오키(大內義興)의 연합 세력이 중앙을 제압하지만, 마침내 마사모토의 양자인 스미모토의 아들 하루모토가 교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1550년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 )가 입경하여 하루모토와 싸우고 경기 지역의 토호들을 조직해 나가면서 교토·사카이를 제압했다. 1560년을 전후해서 나가요시는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이 또한 얼마 뒤 쇼군 요시테루(義輝)를 살해한 마쓰나가 이사히데(松永久秀)에게 세력을 빼앗겼다.중앙에서 이처럼 바쿠후의 쇠퇴와 권력 교체가 빠르게 진행되는 동안, 관동 방면에서는 오다와라를 거점으로 하는 호죠씨가 점차 세력을 뻗어 무사시의 우에스기(上杉)씨를 몰아내고 이즈·사가미·무사시에 걸치는 대 영국을 형성했다. 호죠씨는 관동관령 우에스기 집안을 계승한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가이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함께 3파전을 전개했다. 도카이 방면에서는 스루가의 이마가와(今川), 미카와의 마쓰다이라(松平), 오와리의 오다(織田), 미노의 사이토(齋藤)씨가 각각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이마가와와 사이토를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가 1567년 기후에 진출했다. 주고쿠 지방에서는 전국시대 초기 이래 아마코씨가 산인에 세력을 뻗어, 스오·나가토에서 세력확대를 꾀하고 있던 오우치씨미차 아키의 재지 토호 영주에서 전국 다이묘가 된 모리 모사
    인문/어학| 2003.06.20| 9페이지| 1,000원| 조회(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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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