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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감상문]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나는 부끄러웠다.그리고 몇 해 전 책 서문을 읽다가 바쁜 일을 핑계로 읽지 못하고 그대로 책방에 반납했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내가 성장하고 커 나가면서 아무도 내 의식이 잘못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없었고, 나또한 그런대로 의식 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안에서 그 환상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저자 ‘홍세화’씨가 에서 언급한 세 개의 똥을 모두 먹어야 한다는 판단 개념조차 내겐 정립되지 않았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필자는 책에서 프랑스의 ‘똘레랑스’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 맥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서가 ‘정’이라 하듯이 그리고 그 개념을 명확히 문장으로 만드는 것에 한계가 있듯이 ‘똘레랑스’ 또한 몇 단어로 정의를 확립하는 것은 어렵지만 몇 가지로 정의 내려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서기보다 연대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하고 권력의 강제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한다.’ 등으로 ‘똘레랑스’의 개념을 정리 해 놓았다. 단어 자체를 말하자면 ‘관용’이라 사전에 나와 있겠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핵심은 바로 ‘다름에 대한 인정’이라고 본다.‘너와 내가 다르고, 사상과 사상이 다르고, 사회와 사회가 다르고, 나라와 나라가 다르고... ’우리는 끊임없는 유형? 무형의 ’다름‘ 안에서 살고 있다. 다름의 인정을 개성 존중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개성의 존중을 그토록 외치면서 유행이 휩쓴 거리에는 아류의 아류만이 넘실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스타일이란 없고 단지 유행 스타일만 존재한다는 것인데 나 또한 그 점에 대해서는 반성한다. 솔직히 나는 내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안다. 그리고 짧은 치마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구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짧은 치마를을 일깨워 준 것이 아니고, 무식하리만치 무지했던 나의 사고에 대한 일종의 대수술과도 같은 것이었다.나를 되돌아 보건데, ‘운동권’이라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쓸데없는 투쟁을 무엇 때문에 하나... 자신의 부모와 가족은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걸만큼 대단한 것일까... 그냥 조용히 살다가 실질적이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는 없나?’ 그런 생각을 해왔었다. 그래서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학교 방송국’ 시험 면접에서 운동권적인(?)인 냄새를 풍기자 나는 그냥 뛰쳐나왔었고, 나는 그 이후로도 선배들이 집회나 무슨 운동이다 하는 것에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다. 나는 그랬다.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입장은 부모님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겠다. 독재를 한 것은 잘못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우리 경제가 이 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긍정적으로 말씀 하셔서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 또한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폐허 속에서 국민이 먹고 살기 용이하게 끌어 주었고, 그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카리스마있는 대통령이 필요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그 시기가 과연 우리나라를 위하여 정말 ‘행운’ 이었던 것일까? 오히려 불행의 시작이라는 슬픔을 잠재우기 어렵다. 우리의 사고가 경직되고, 그 아름답던 ‘情’의 본질적 의미도 상실하고, 그야말로 ‘똘레랑스’는 무참히 살해된 채 살아야 하는 그 아픔의 역사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참 견디기 힘들었다. 카리스마는 절대 독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본래 뜻의 유래는 은혜이다.저자 홍세화씨는 경기고 시절 시위에 참가 하였다가 경찰서 신세를 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가 다시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에 입학하여 학교생활을 할 때도 끊임없이 당 없었다. 왜? 대화라는 것은 상대방과 나와의 서로에 대한 존중에서 가능해지고 토론이라는 것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본적인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대화를 하려 해도 상대방이 칼을 갖고 내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면 나는 방패로 막을 것이고, 살기위한 몸부림을 할 것이다. 그때의 대화란 이미 무의미 해지고 의미를 상실한다.사회라는 공간은 무수히 다른 의식들과의 공유이다. 개개인의 얼굴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생각하는 사고가 다르듯이 온전한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의식들이 융합되기도 하고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갈고 닦아 지면서 더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프랑스는 매우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는 그들의 문화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단일민족 국가이다. 하지만 분단국가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달라? 그래! 그러면 찢어지자.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나만의 생각인가.이미 우리의 역사는 흘렀고, 그런 과거를 가지게 되었고, 홍세화씨와 같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림 당해야 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눈물과 희생을 만들어 냈다. 단지 당시의 권위와 권력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달랐다는 이유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생각을 입 다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강요는 있었지만 자유는 없었고, 탄압은 있었지만 배려는 없었던 것이다.책을 읽은 후 돌이켜 보건데, 프랑스인들의 상대방에 대한 자유롭고 유연하게 열린 사고는 아주 사소한 일상생활 장면에서도 연출되는 듯하다. 대학생이 되어서 유럽배낭 여행을 2달 동안 떠나게 되면서 나는 프랑스에 1달, 체코?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를 돌면서 1달을 여행했다.나는 프랑스는 막연히 생각했던 ‘알랭 드롱(?)’ 같은 백인들이 주를 이루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막러 해서 결론은 무조건 도와 달라는 것이다. 도와 줘야겠다는 의미도 무뎌지고 지나간 자리에는 뭔가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함과 우울함이 자리 잡는다. 프랑스서는 처음에는 참 신기하게 생각되었는데 전철 안으로 한 낡은 옷을 입은 남자가 들어오더니 전철의 손잡이와 손잡이에 검은 천을 두르기 시작했다. 참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저 남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나 바라보고 있는데 다름 아닌 그 남자가 시작한 것은 인형극이었다. 검은 천의 위로 손에 낀 인형들은 춤추듯이 날아다니며 다른 언어권의 사람인 나도 참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짧은 인형극이 끝나자 정리를 하고 모자를 돌렸는데 자신의 인형극이 재미있다고 인정되면 거기에 돈을 넣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돈을 넣었고 나도 몇 프랑을 넣었던 기억이 난다.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구걸이 아니었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였다. 전철뿐 아니라 광장이나 공원 등에서도 공연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돈을 강요하진 않았다. 다만 즐겁게 구경하고 그 즐거움을 즐긴 돈을 사람들은 지불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프랑스의 ‘똘레랑스’의미에서 해석해 본다면 거기엔 자신의 것을 주장할 최소한의 양심이 있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있다. 프랑스가 훌륭한 관광국가 이기 때문에 그런 진풍경이 벌어진다고 논리를 대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세계 여러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하는 나라일 수 없고, 그런 즐거운 장면이 우리나라에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인가? 자격지심의 변명이라 생각된다.프랑스나 유럽 같은 경우에는 공중 화장실이라는 개념이 없고 돈을 내고 들어가는 길거리 화장실이 있는데 꽤 깨끗하다. 처음에는 정말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회 자체가 치사하지는 않다는 또 재미있는 경험을 겪게 된다. 에펠탑 축제를 구경하면서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경우가 생겨 길거리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동전이 없어 바꿔야 했다. 옆으로 조금 옆으로 걸어 가다보니 까페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 했다. ‘양보와 허용’...그들에겐, 그들 자신은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는 특별하게 느끼는 그런 것들이 있었다.내가 직접 본 프랑스 문화와 일상에서 느낀 점을 이야기 하고 싶어 너무 파편적인 것에 몰입한 것은 아닌지 염려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일상에 자연히 배어있는 날아 갈듯 한 자유로운 개개인의 의식들이 조금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문화가 100% 올바르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또한 완벽하다고 볼 순 없지만 꽤 이상적임을 인정해야 한다.곪을 대로 곪아 있는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 단지 정책의 변화로 해결 될 것 같지가 않다. 그것은 의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홍세화씨는 에서 왕따 같은 문제도 사회적 소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 포장된 집단 이기주의가 왜곡된 역사를 만들고 있음을 정확히 짚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각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은 권위가 휘두르는 경직된 영혼을 강요당하며 유행에 허덕이는 이기주의와 획일주의의 합체를 비웃는다.그래서 프랑스는 다름과 다름이 부딪히는 의미에서 쎄느강은 좌우를 가른다고 표현을 한 것이고, 우리나라는 권력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지배와 피지배, 그것이 상?하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며 부딪히는 의미에서 한강을 남북을 가른다고 표현했다.또한 교육을 비교해 보자면 사회구성원 전체를 그 자원으로 삼아 모두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프랑스에, 한국은 엄청난 교육비를 각 가정에 부담시키고 진정한 자원으로 구성원 모두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학업 성적에 의존된 인재를 양성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수학을 못해도 된다는 인식. 그래서 수학을 잘하면 이과에 가고, 국어를 잘하면 문과에 간다는 너무나도 단편적인 발상... 나 또한 그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받았고, 지금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글을 잘 쓰고 토론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조직적이고 분석적이고 정확해야 하는지, 그래서 수학과 글쓰기의 연관성은 상당히 높고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시험에서의 수확의 위치것이다.
    독후감/창작| 2007.02.20| 5페이지| 1,000원| 조회(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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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게바라 영화감상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하지만, 또한,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얼마나 순식간인지....짙은 눈썹을 가진 체 게바라의 생각에 찬 눈매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너무나 딱 맞는 배우를 캐스팅한 것인지, 배우가 연기를 잘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 순간 그도 완벽한[체 게바라]임을 스스로 느꼈으리라는 짐작을 해본다.이 영화에서는 게바라라는 이름을 갖기 이전 [푸세]로 나온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의대생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부럽지 않은 안정된 미래와 삶이 보장되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르헨티나를 출발해- 칠레- 페루- 콜럼비아- 베네수엘라의 긴 여정을 선배 알베르토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문명권의 사람을 이해하고,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시야의 확장은 단지 ‘여행’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행의 여정 속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게바라는 답답하리만치 정직하고 소신을 지키는 성격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궁지에 몰린 상황에 있어도, 때로는 소위 말하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행동할 법 한 상황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푸세에게는 좋고 싫음을 가르는 눈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자신의 분명한 안목이 있었으며 정의를 위해서는 열려진 가슴을 보여줄 수 있는 열정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변화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마치 불이 켜진 초나 불이 켜지지 않은 초나 우리는 모두 초라는 공통적인 사물로 보지만, 그 불의 본질을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종이나 나무를 만나 불 켜진 초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여주는 대신에 불이 켜지지 않는 초는 침묵하며 적막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푸세는 불이 켜진 초처럼 자신의 내면을 명민하게 밝히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자신의 의식과 주관을 다양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푸세는 여행의 긴 여정에서 그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경험하면서 많은 적법하지 않은 선입견을 경험하게 된다. 얻어 타고 가는 트럭 안에서 낯선 칠레 소년과 나누었던 대화가 참 인상 깊었다. 푸세는 의대생이어서 그런지 소를 보면서도 소의 눈 안에 고여 있는 눈물을 관찰하면서 소 주인인듯 한 소년에게 말을 건넨다. “저 소는 눈이 멀었네요.” 그러자 소년 은 말했다. “볼 것도 없는데요, 뭐.”누가 볼 것이 없단 말인가? 소가? 그럼 소가 볼 것이 없다는 증명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 소는 말을 할 수 없지만 소 스스로도 볼 것이 없어서 눈이 먼 채로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할까? 소는 볼 것도 없다는 선입견을 소년은 언제부터 갖게 되었을까? 그 적법하지 않은 선입견은 끝내 소의 눈을 치료해 주지 않을 것이다. 소가 죽는 날까지..하지만 혹시, 소년이 바라본 고달픈 삶과 비참한 현실이 얼마나 지독한 세상이었으면 볼 것도 없다고 표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그 말을 던진 소년의 말에 대한 내 선입견도 생각해 보게 한다.칠레 추키카마타 광산에서의 경험은 푸세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라는 정치적 이념 때문에 집을 잃고 전 재산을 거의 몰수당하며 비참하게 유랑하는 부부를 만나게 된다.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 광산촌에서의 하루 일당이라도 벌 수 있기를 바라면서 노예 시장을 연상시키듯 공허한 눈빛으로 선택되어 지기를 바라는 그들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바스락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공산주의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로운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적법하지 않은 선입견은 이토록 끔찍한 삶을 초래할 수 있다. 푸세는 그들에게 물 한 모금 먹이지 않고 일터로 떠나는 명령을 내리는 관리자뿐만 아니라 그 이념, 그 사회에 대한 불합리와 적법하지 않은 선입견에 그 토록 흥분하며 반발한 것이다.아메리카 대륙의 심장부 페루. 수도 꾸스꼬에서는 마추피추로 가서 옛 잉카 제국의 자취를 살피면서 푸세와 알베르토는 문명과 사회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평화로운 잉카 제국의 무너진 옛 터에서 기행일기를 한가롭게 적으며 알바트로는 자신이 이 고장의 여자와 결혼하고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만들고 한 사람 한사람마다 투표권도 주면 어떨까라고 푸세에게 농담처럼 말을 건네는데 푸세는 “총 없는 혁명은 성공못해.”라고 대답한다. 그 말은 반드시 혁명에는 총, 즉 무력과 무력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총 없는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참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인간 문명의 슬픈 현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잉카 문명의 옛터만 남은 그곳에서 푸세는 탄식한다.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어떻게 이렇게 짓밟을 수가 있느냐고.........공생이 아닌 점령을 통한 이익이 눈에 먼저 들어올 때 문명과 문명은 상호 교류하는 관계가 아닌 정복 전쟁을 감행하고, 강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는 약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의 지배 국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횡포에 가까운 권위와 탄압을 하게 되는 것이다.무엇보다 웃음이 슬며시 나오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 있었는데 페루 리마에서 만났던 의사 선생님의 소설에 대한 평가를 하는 대목이다. 여행의 피곤에 지친 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주고 풍요로운 자료와 서적을 제공해 주면서 자신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이 그 의사 선생님 이었다. 그 분이 아주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는 직접 지은 소설을 조심스럽게 내밀며 독후감을 쓰고 비평을 원했을 때 알베르토나 푸세는 읽어보기 전까지는 모두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그렇지만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독후감을 쓰지 않았고 비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떠나는 순간 부두에서 작별 인사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소설에 대한 평을 원했을 때 알베르토는 매우 당황해 하면서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 과장된 표정에서 읽혀지고 있었다. 하지만 푸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의 솔직한 견해를 말한다. 실망했다는 말과 함께 글 쓰는 데에는 소질이 없으신 것 같고, 자신의 분야인 의학에 더욱 매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다. 오....그랬다.......우리는 공경이라는 미명아래 적합하지 않은 선입견으로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연장자를 대했던 적은 없었던가... 권위 앞에 주눅 들며 앞뒤를 생각하며 순간의 개인적 이해를 도모하는 발언을 한 적은 없었던가.... 누군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의와 수용. 그것은 자신의 주체적 견해를 스스로 살해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노예와 다름없다고 배웠다.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서 노예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절대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 성별, 권력, 인종 등 그 어떤 이유로도 각 개인의 삶과 생각은 무시되어지고 억압되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더욱이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개인적인 어떤 도움이나 불이익 또는 사적인 친분 여부로 그 사람과의 공적인 일에까지 그것을 개입시킨다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지만, 우리는 사실 그런 적법하지 않은 선입견에 사로잡혀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기도 한다.어쨌든 푸세는 그 헤어지는 작별의 순간에 그 동안의 신세짐에 고마워하는 감사의 마음을 절대 소설의 평가에 반영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얼마나 자주 망각하며 사는 오류인가. 하지만, 푸세의 그 솔직한 발언을 더욱 빛낼 수 있었던 것은 의사 선생님의 진지한 성찰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 순간 노발대발 화를 내며 몰아세우지 않았고, 오히려 고마워하는 진심으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또한 얼마나 성숙한 태도인지.... 비록 어법도 엉망이고 소설가로서의 재능은 제로지만 그 열린 가슴과 이해는 그의 생활과 의사로서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살찌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푸세에게 모든 인간의 가치로움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고 인류 화합의 신념을 진지하게 키워준 것은 페루 산파블로에서 나병 치료를 했던 기간이었던 것 같다. 나병 환자촌의 정해진 규정은 적합하지 않은 선입견이 내재되어 있었다. 장갑을 끼고 나병 환자를 대하는 수녀와 의사들...알베르토와 푸세는 그 장갑을 거부한다. 무서운 전염병이지만 신체접촉을 통해서는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굳이 환자를 괴물이나 벌레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직접 손과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고, 함께 몸을 부대끼며 축구를 했다.인간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 또한 얼마나 당연하고 지당한 일임에도 우리는 신체가 온전하지 않는 다른 사람에는 얼마나 차가운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가. 아니면 얼마나 동정으로만 가득 찬 측은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는가. 장애인들은 그 두 가지 시선 모두 부담스러워 한다. 자신들은 비장애인들과 다를 뿐 틀리지 않다고 말한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나리를 한 개만 가지고 있다면 두 다리를 가지고 있는 한 명은 정상이 아니라고 세상은 판단 할 것이다.모든 생명체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완벽하지 않다. 아주 여린 새싹은 놀라울 만큼 강하게 자신의 고개를 내밀며 땅을 뚫고, 작고 귀여운 토끼는 그 새싹이 자란 풀들을 사정없이 먹어 치우지만, 인간은 그런 토끼를 사냥한다. 하지만 인간도 병에 걸리고 늙어가며 죽음에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땅에 묻혀 흙속에 분해된다. 결국 그런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장애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은 모순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누구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외의 한계가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것은 인간으로서 틀린 모델이 아니라 다른 모델일 뿐인 것이다. 장애에 대한 적법하지 않은 선입견은 생명체에 존재하지도 않는 절대적인 틀이 있다고 믿는 적법하지 않은 선입견 때문이다.
    독후감/창작| 2007.02.20| 4페이지| 1,000원| 조회(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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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정보처리 이론과 신경망 이론 비교
    Ⅰ. 서론1. 문제제기Ⅱ. 본론1. 논문 요약1.1. 정보처리 관련 이론1.2. 신경망 관련 이론Ⅲ. 결론1. 필자의 분석 및 견해Ⅰ. 서 론1. 문제제기 및 목표정보처리이론은 인간학습의 모델을 컴퓨터의 원리에 의지하여 정보를 기호에 의해 처리하며 선형적, 객관주의 수업설계를 지향한다. 처리의 형태도 순차적이며 특정 정보를 용이하게 검색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에 비해서 뒤에 나온 신경망 이론은 기호처리이외에 다른 형태로도 정보처리가 가능하고 비선형적, 구성주의 수업설계를 지향한다. 처리 형태는 병렬적이며 정보 일부를 검색하며 모든 정보가 자동적으로 인출될 수 있도록 저장하는 특징이다.본고에서는 인간의 인지과정을 서로 상이한 시각으로 바라본 정보처리 이론적 배경과 신경망 이론적 배경을 가진 논문을 비교하여 언어학습에서 두 이론의 접근 방법을 짚어보고 각 이론의 한계점을 분석? 확장하여 인간의 인지과정을 가장 이상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한 고찰과 모색을 목표로 한다.Ⅱ. 본 론1. 논문 요약1.1 정보처리 관련 이론정동빈(2001)은 언어학습에 따른 정보처리이론의 접근 방법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따라서 논문의 목적을 제2언어 습득과 정보처리과정을 파악하여 언어학습지도와 기계언어처리에 적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여기서 정보처리 접근이란 복잡한 사고와 행동을 간단한 인지적 언어과정의 처리에 관한 일련의 언어터득 절차를 규명하는 것이고, 이에 인지언어과정에서 제안된 기계적인 터득과정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발달되는가를 연구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인지언어과정들은 단계적으로 발생함으로 인간이 언어를 학습하고 그 학습은일정하고 절대적인 정보처리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데 이것은 인지심리학적으로부터 이러한 과정들을 분리시키는 것을 인정하는 관점으로 이것 자체가 바로 정보처리 접근과정이다. 즉, 이를 통해 어떻게 언어를 학습하는지 해석할 수 있고 확대하여 체계화 할 수 있다. 이에 정보과정 접근법에 대한있어서 유연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학습에 있어서 포함된 것의 상당부분이 연습에 의한 언어의 증가를 통해 습득되어 질 수도 있고, 증가하는 정보의 양이 자동적 과정에 응하게 됨에 의해 학습자들이 전략을 이동하고 목표언어의 내재적 표시들을 재구성함에 따라 질적인 변화가 성취 될 수도 있다.언어 습득에 대한 정보처리이론의 기저로 Schmidt(1992)는 언어의 유창성에 관한 보고서에서 제2언어 유창성에 포함되는 인지 학습능력을 기저로 하는 심리적인 기계주의적 학습형태에 대하여 확인하기 위해 여러 번의 실험연구를 통하여 비교했다. 그가 논하는 정보처리의 기계적인 연습에 관한 두 가지는 자동성(automaticity)과 재구성(restructuring)이다. 그는 기계적인 연습은 학습의 과정화, 일반화, 식별화를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Anderson의 인지 이론인 ACT(Anderson, 1982, 1983)에서, Bialystok(1990)의 제어의 범위까지 포함한 것이고, Logan(1988)의 자동화에 대한 예시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Anderson의 ACT이론은 개념, 명제, 도식(선언적 지식)에 대한 지식과 방식을 구분하고 감지하는 방법,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확실한 단계들을 따르는 방법(절차적 지식)에 대한 지식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다. 전에 습득된 과정들을 재조직하는 새로운 절차들의 성립을 포함하며 다각적인 기계훈련 형태를 강조하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언어습득기관은 일반화, 식별, 그리고 강화를 포함하는 절차적 지식의 조절에 몰두하도록 요구되어진다. Bialystok은 지식범주와 제어요소를 구분했다. 지식범주는 언어지식이 인지적으로 어떻게 표시되고, 표시변화가 언어발달과정에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관련이 있다. 제어요소(control factor)는 지식 정보를 입수해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적절한 정보를 선택, 조정, 통합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높은 통제 및 제어(high control)가 있는 곳에 수도 있다. 이런 언어학습에서의 용어는 수동적 저장이 완화됨에 따라 단기기억의 전통적인 이해와는 구별되고, 이것은 과정기능 뿐만이 아니라 저장기능 모두를 갖는다. 그것은 집행과정을 위해 그리고 이 과정들의 생산을 저장하기 위해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학습과정에서 학습자는 음운학적, 통사론적, 의미론적, 화용론적 정보를 저장해야만 하고, 이 정보들을 발화를 계획하고 집행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이 정보는 수많은 방법에 의해 작업 기억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교육적 함축의 측면에서 언어학습 정보과정은 다른 인지적 기능들처럼 인지적 기능이고, 연습을 통해 능력제한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보처리 기술의 내면화를 포함한다. 언어 기능습득은 더 많은 작업용량 표준과 주의를 요하는 첫 제어작용을 통해 자동적 과정의 축적을 포함한다. 정보과정 접근법은 제어과정을 통해 과제 부문들의 반복수행이 자동화된 방식의 유용성을 이끈다는 점을 강조한다.결론적으로 이 논문에서는 제2언어습득과 정보처리이론의 관계를 언어 학습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정보처리과정의 언어학습이란 인간의 심리구조는 기계적인 작동 절차에 의하여 언어터득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작동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심리 절차와 과정으로 실행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언어 학습과 자동, 언어 연습의 역할, 언어 재구성, 여러 정보처리 과정의 이론, 단일적인 언어 학습 구성, 언어습득에 대한 개인차의 근원요소, 교육전략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인지언어 심리학적인 견지에서 정보처리이론의 다양한 책략과 인지과정에 의하여 언어습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었다.1.2 신경망 관련 이론이신동(1994)은 정보처리이론의 한계와 신경망 이론)이라는 주제로 연구하였다. 그는 교육심리학의 연구를 주도해 온 패러다임인 인지 심리학의 핵심인 정보처리 이론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정보처리 이론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정보처리 이론에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신경망 이론을 살펴보면서 신경망 이론이 인간의 사고과정과 학습을 어떻 문장들을 생산해 내고 있으므로 이런 추상적 규칙들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거의 모르고 있다. 언어에 대한 상징적 수준의 설명-정보처리 이론에 의한 설명은 인간이 거대한 양의 문법 규칙들을 분명하고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경망 연구자들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문법의 규칙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생산이나 이해에 포함되어 있는 노드들 사이에 연결강도로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Rumelhart, 1989). 둘째, 인간의 마음이 계열적인 정보처리를 하는가? 컴퓨터는 계열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정보를 이렇게 빨리 처리하지만 시각적인 장면을 지각하거나 이해하는 과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정보처리 과정모형과 신경망처리 과정모형 비교를 통하여 이런 과제에서는 인간의 두뇌가 컴퓨터보다 훨씬 우수함을 증명하였다. 인간의 두뇌는 병렬로 정보를 처리하는 느린 컴퓨터를 여러 대 묶어 놓은 것과 유사하며 각각의 컴퓨터들은 구체적인 각자의 과제를 수행한다. 셋째, 인간의 마음이 선형적인 정보처리를 하는가? 유기체가 경험한 내용을 보존하는 과정을 우리는 간략하게 기억이라 한다. 기존의 정보처리 이론에서는 경과되는 시간에 의해서 기억을 감각기억, 단기기억, 장기기억 등으로 분류한다. 유입자극은 감각기억 속에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 머문 후에 주의를 받아 단기기억으로 이동을 하게 되고 이곳에서 시연과 정교화를 통해 장기기억으로 넘어간다. 장기기억의 정보저장 용량은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정보가 이곳에서 영구적으로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 활동은 이렇게 선형적이지 않다는 입장은 인간의 기억은 뇌파의 공명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정보가 유입되면 그 정보는 뇌파를 유발하게 된다. 이 뇌파는 친숙한 패턴이나 공명을 일으킨다. 친숙한 자극에 의해서 유발된 뇌파일 경우 뉴런은 이전의 경험에 의해서 뉴런의 화학적 구조에 저장되어 있는 친숙한 패턴들 중에서 그 뇌파의 패턴과 동일한 패턴을 발생시킨다. 그러므로 뇌에서 일어나는 공명현상은 비선형적이다. 이런 기억모형을 우리는 뉴런의 협 영역만을 국지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언어 습득의 학습은 어휘 5000여개를 외우고 문법적인 규칙을 명확하게 알고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보다 고차원적인 문학과 그 감상에 있어서는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더불어 문맥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부호화가 불가능한 그런 감각을 어떻게 정보처리이론으로 학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인간의 모든 학습이 언어를 기초한다는 과점에서 언어학습에 대한 모든 부분이 정보처리과정으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학습심리를 정보처리이론으로만 경도되어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더욱이 인간의 언어학습은 일정규칙을 통하여 무한한 추상적 문법 규칙을 생성하며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언어의 학습 과정 자체가 정보처리라는 일정한 규칙과 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반대방향으로 호환도 이루어져 구사하는 언어에 대한 추상적 문법 규칙 분석도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학습에 있어서 이러한 문법 규칙에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는 컴퓨터의 부호화 입력을 통하여 일정하게 내는 신호음이나 음악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규칙성은 있지만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으며 창조적이다. 때문에 언어학습 역시 기본 바탕을 채우는 규칙성은 일정부분 정보처리과정을 통하여 습득되지만 그 이상의 학습에서는 정보처리이상의 과정을 거쳐야 함을 짐작할 수 있다.또한 정동빈이 학습과 자동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은 정보처리 이론에서의 장기기억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유입자극은 감각기억 속에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 머문 후에 주의를 받아 단기기억으로 이동을 하게 되고 이곳에서 시연과 정교화를 통해 장기기억으로 넘어가게 되면 장기기억의 정보저장 용량은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정보가 이곳에서 영구적으로 머무르게 되어 산출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정보처리 이론의 핵심 과정이다. 그러나 유입된 정보가 결과물로 산출되지 않았다고
    교육학| 2007.01.13| 8페이지| 1,500원| 조회(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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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이상화
    선구자의 노래이 상 화나는 남 보기에 미친 사람이란다.나는 내 알기엔 참된 사람이노라.나를 아니꼽게 여길 이 세상에는살려는 사람이 많기도 하여라.오, 두려워라, 부끄러워라,그들의 꽃다운 사리가 눈에 보인다.행여나 내 목숨이 있기 때문에그 살림을 못 살까 - 아, 괴롭다.내가 앎이 적은가 모름이 많은가,내가 앎이 너무 어리석은가 슬기로운가.아무래도 내 하고자함은 미친짓 뿐이라남의 꿀듣는 집을 무늘지 나도 모른다.사람아, 미친 내 뒤를 따라만 오너라.나는 미친 흥에 겨워 죽음도 뵈 줄테다. 59호 1925년 5월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한 이상화는 초기에는 관념주의적이고 퇴폐적인 시 경향을 보이다가 1925년 이후 현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쓴 현실참여적인 시를 주로 표현한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사적인 흐름과도 맞물리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일본식민 지배하에 대항하면서 거국적인 민족자주독립운동, 3. 1 운동의 실패를 목도한 문학도들이 그 실망감과 비극을 현실 도피적인 허무주의로 표현하였고, 2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런 감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인식하고 당시의 문학인으로서 사명의식과 함께 사회 참여적이고 민족적인 시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상화의 위의 작품은 1925년 작품으로 그 과도기의 정점에서 시대정신과 적극적인 현실 참여의 굳은 의지를 보이고 있다.현실적으로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크게는 두 부류의 성향이 나타났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끝났다. 융통성에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친일적인 성격과 반대로 자주 독립을 기필코 이루어 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불길처럼 솟는 부류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제목 ‘선구자의 노래’에서 선구자는 모두가 ‘예’라고 해도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몽매한 일반인을 깨울 줄 아는 선각자이어야 한다. 즉, 일제 지배하의 민족의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그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자의적이면서도 선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작품의 내적인 측면으로 들어가면 1연에 ‘나는 남 보기에 미친 사람이란다/ 나는 내 알기엔 참된 사람이노라.’라고 말한다. 당시에 일본과 타협하는 대부분의 무리 속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선구자는 미친 사람일 뿐이다.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진실과 옳음을 아는 선구자는 자신의 의지가 참임을 외치고 싶다. 1행에서는 ‘남보기에 ~란다’ 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르고 뜬소문일지도 모른다는 식의 어투로 종결되지만 2행에서는 ‘나는 ~이노라’라고 종결되면서 자신의 신념을 거룩하게 공표하고 확정짓는다. 더욱이 1행과 2행이 대구를 이루면서 2행의 의지적 내용을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전달시킨다. 2연에서는 1연의 그런 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과 그 세상에 속물처럼 수긍하는 무리에 대한 비꼼이 엿보인다. 그 비꼼은 3연의 ‘오, 두려워라, 부끄러워라/ 그들의 꽃다운 사리가 눈에 보인다.’ 에서 반어법을 통하여 심화된다. 진정으로 꽃다운 사리가 아니라 사실은 ‘똥같은’ 사리가 눈에 보인다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겠지만 ‘꽃다운’ 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러한 부류에 대한 조소를 보내고 반성적 자각을 촉구하는 일침을 가한다. 그러나 4연 부터는 시선을 자신으로 끌어오면서 스스로를 바라본다. 살기위해서는 또는 잘 살기 위해서는 어쩌면 합의해야하는지도 모르는 현실과 의식의 모순에서 시적 자아는 너무나 괴롭다. 절로 탄식이 쏟아져 나오며 괴롭다고 외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그는 질문을 던진다. ‘내가 앎이 적은가 모름이 많은가/ 내가 앎이 너무 어리석은가 슬기로운가.’ 이 대목에서는 선구자로서의 고뇌가 엿보인다. 분명 앞선 무엇인가를 가지고 선구자로서 역할 그대로, 앞에서 이끌고 싶지만 지금 자신의 그 앎이 진정한 진실이냐는 것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 앎의 폭과 깊이에 대한 자각적 의문. 시적 화자역시 절대적이라고 단정 짓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앎이 부족한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통용되지 못하는 자신의 신념과 의지,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불만은 그렇게 물음을 던지며 되묻고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가’로 반복되는 의문형의 종결은 시적자아의 고뇌와 답답한 심경을 강조하면서도 시적자아를 바라보는 독자에 대한 생각을 묻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6연에서 부터는 자신의 표면적인 또는 인식적인 문제가 어찌됐든 결연한 행동력을 보일 자신의 의지를 피력한다.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은 어쩌면 미친 짓으로 치부되고 남의 꿀통을 무너뜨리는 짓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7연에서 그 행동력과 능동성은 비로소 구체화 된다. ‘사람아, 미친 내 뒤를 따라만 오너라/ 나는 미친흥에겨워 죽음도 뵈 줄테다.’ 결론적으로 나는 현실의 어두운 껍질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친 사람이 아니다. 사실은 선구자이다. 그러니까 나를 믿고 따르라. 나는 당신들 앞에서 죽을 수도 있는 각오로 당신들의 선구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즉,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과 대결하며 대립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에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려는 강력한 행동력을 가진 선구자로서의 모습이 완성된 것이다.표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탁월한 비유나 상징적인 표현미는 절제되어 있는 편이다. 그것은 이상화의 시가 초기의 상징성에서 벗어나는 시점이기도 했지만, ‘선구자의 노래’라는 제목처럼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서 내용의 직접적인 전달과 선동적 성향을 내비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종결 어미가 ‘~다. ~라. ~가’ 등으로 마무리 되면서 전체적으로 유약하지 않고 강직한 시의 어조를 조성시키고 있다. 이 시의 주된 낱말로 등장하는 ‘미친-’ 에 대한 의미도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미친사람’, ‘미친 짓’, ‘미친 내 뒤’, '미친 흥‘ 이것들 은 국어의 사전적인 의미로써 내용을 전달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진정으로 미치지 않은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미친 무엇’은 결국 ‘참된’ 것이다. 그것은 남들은 나를 ‘미친 사람’으로 보지만 나는 ‘참된 사람’이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바로 선구자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미친’은 ‘잘못된 현실’ 속에서 미치게 보이는 것일 뿐 사실은 ‘참된 무엇’인 것이다. 때문에 그 미친 시각으로 보면 현실에 수긍하며 사는 부끄러운 무리들에게 ‘꽃 다운 사리’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참 된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사리도 아닌 ‘더러운 무엇’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미친 시각으로 보면 내가 하는 행동이 ‘남의 꿀 뜯는 집을 무너뜨리는 미친 짓’으로 보이겠지만 참된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일제가 우리 민족과 우리 땅을 수탈하는 현실의 불합리에 항거하는 의식적 행동일 수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문/어학| 2007.01.13| 4페이지| 1,000원| 조회(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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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삼국의 언어
    Ⅰ. 서 론1. 문제제기2. 연구목적과 방법Ⅱ. 본 론1.1 삼국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보는 견해1.2 삼국의 언어를 동일 언어로 보는 견해Ⅲ. 논의 및 결론국어사 고대 삼국의 언어는 달랐는가?Ⅰ. 서 론1. 문제제기향가를 공부하면서 원문 자체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워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본래 어떤 의도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내가 이것을 환하게 해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마치 어렸을 때 에서 이집트 문명에 대한 것을 읽고 쐐기문자의 해독에 깊은 호기심을 가졌을 때처럼 말이다.그래서 국어학개설 책에서 제 6 장 국어사 [고대국어]에 해당되는 부분을 선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우선 국어사에서 고대국어는 신라어로 대표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가 함께 쓰이고 있었지만 현존하는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서 안타까웠다. 자료의 부족 때문인지 국어학개설 책 안에서도 [고대국어]에 해당되는 부분은 2장 남짓으로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이어서 깊이 있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하지만, P283의 3째줄 “국어가 애초부터 단일 언어가 아니라는 저 앞의 이기문 교수의 추론도......”라는 부분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고대국어의 어휘적 측면과 더불어 고대국어의 근원과 뿌리의 실체에 대해서 탐구심을 갖게 되었다.2. 연구목적과 방법국어가 애초부터 단일 언어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실상 고대국어의 ‘국어’라는 말 사용 자체에 의미 차질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때문에, 우리 국어학사에서 고대로 분류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 언어들의 근원적 뿌리는 어디서부터 생겼는지 그리고 고대국어의 범주는 어디까지로 정의해 볼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또한 등 국내의 역사서나 문헌을 통하여 그들 각각의 어휘적 측면을 분석해 삼국의 언어를 동일성과 이질성에 대한 견해를 비교했다.먼저 국어가 단일 언어가 아니라고 추론한 서울대학교 이기문 교수의 을 읽고, 그 추론의 근거를 찾아보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선행 연구나 후행 연구들의 문헌이나 매체 자료들은 없었는지 조사하고 그 반론의 근거도 간과하지 않는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 언어들의 어휘적 특징과 문헌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현재 해독되고 되어 있는 그 한계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발전시켜 보고자 했다.Ⅱ. 본 론1.1 삼국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보는 견해이기문은 그의 여러 논저에서 삼국의 언어가 서로 달랐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 언어는 북방의 부여계 언어이며, 신라어는 남방의 한계 언어라고 주장하며, 신라어와 백제어는 서로 유사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통일 신라이후 경주 중심의 신라어가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역에까지 파급되어 한반도의 언어 통일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의 한자 문화와 접촉했을 것이니 고구려에서도 한자를 이용하여 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발달되었을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구려어는 고대 일본어·만주어·몽골어 등에 비하여 어말모음(語末母音)이 탈락한 모습을 보이며, 고대 일본어, 몽골어와의 대응에서 볼 때 제2음절 이하에서 t구개음화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난다.백제어의 자료는 고대 삼국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적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해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백제어 지명은 '夫里'로 된 것이 많다. 이것은 신라어 지명의 ‘伐',火'와 같은 계통의 것이지만 고구려어 지명의 '忽'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어말의 모음을 더 유지하고 있는 점은 신라어와 다르다. 백제어에서만 발견되는 어휘도 없지 않다. 성(城)을 뜻하는 '己'나 '只'는 신라어나 고구려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인데, 고대 일본어에도 차용되어 쓰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런 몇 가지 점을 제외하면 백제어의 어휘는 신라어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백제어는 고구려어와 신라어의 완충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특히 t구개음화가 고구려어는 제2음절 이하에서만 실현된 데 비해 신라어에서는 어두에까지 일부 파급되어 있는데, 백제어는 그 중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백제어에는 어중(語中)의 'k'가 탈락되는 현상도 보인다. 이것은 중세국어 단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신라어 자료도 모두 한자를 이용한 차자표기로 되어 있다. 이 한자는 음으로 읽는 표기[音讀表記]뿐만 아니라 국어로 새겨 읽는 표기[釋讀表記]로도 되어 있다. 이 방식은 지명·인명·관직명 등의 고유명사 표기, 이두문, 향가 등에 다 나타난다. 신라어 자료는 백제어나 고구려어의 자료보다 많이 전하고 있는 편이지만 〈삼국사기〉 지리지 권3의 몇 예와 신라 이두문에 사용된 이두 글자 30자 내외, 향가 25수의 자료 정도밖에 없어 그 성격을 정확히 밝혀내기에는 미흡한 면이 많다.2003년 10월 주간조선에 실린 백제어와 신라어에 대한 칼럼은 삼국의 언어의 이질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백제어는 한계어가 아닌 부계어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며 백제어와 신라어는 계통적으로 다른 출발을 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 언어사적 배경과 어휘도 매우 달랐음을 증명한다.백제어와 신라어의 단어를 비교하면 상호간의 같고 다른 관계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백제인은 왕을 ‘어라하ㆍ건길지’라 불렀다. ‘어라하’는 지배층이, ‘건길지’는 토착인들이 사용했다. 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언어가 달랐던 사실을 예증하는 단서이다. 신라인은 왕을 ‘거서한, 니사금, 한’이라 불렀다. 이처럼 왕의 호칭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백제어 ‘바혜’가 신라어는 ‘고개’로 다르게 쓰였다. 또한 신라어 ‘바달’이 백제어 ‘나미(內米)’로, ‘솔’이 ‘부사’로 달리 쓰였다. 수사체계도 신라어 ‘셋, 다섯, 일곱, 열’이 백제어 ‘밀(三), 우ㅊ(五), 나는(七), 덕(十)’과 같이 달랐다. 마한 54국명 중에 ‘비리(卑離)’가 무려 여덟 번이나 나타난다. 그런데 이 ‘비리’는 백제어 ‘부리(夫里)’로 계승됐다. ‘소부리(부여)’를 비롯해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그 수가 ‘비리’와 거의 비슷하다. 이 ‘부리’는 신라어 ‘벌’에 해당한다. 공주의 옛 이름 ‘고마나리’의 ‘고마’는 북(北)ㆍ후(後)의 뜻이다. 이 단어에 대한 신라어는 ‘뒤’이다. 백제어는 진(津)ㆍ천(川)의 뜻이 ‘나리’인데, 신라어는 ‘나~내’이다. ‘일본서기’에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백제어의 ‘나리’가 신라어 ‘내’로 줄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이런 이질성으로 두 나라가 황산벌 전투를 했을 시기에는 거의 700년 동안이나 서로 다른 언어발달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서로 몰라보게 다른 언어로 변천했었을 가능성을 가지고 의사소통이 거의 힘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1.2 삼국의 언어를 동일 언어로 보는 견해박병채는 고대국어의 하한선을 훈민정음 제정 시기인 1443년까지로 잡는다. 중국 고사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국어의 뿌리와 줄기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북부의 원시 부여계어는 한계어와 방언 이상의 차이가 있었으리라 추정되지만, 고대 삼국의 언어는 대체로 방언적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한 언어가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한만 대륙과 한반도를 무대로 흥망성회를 거듭한 한민족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한국어의 뿌리와 줄기가 남북의 간단없는 접촉을 통하여 단일 언어로서 성장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했다.김동소는 한때 우리 학계에서는 삼국의 언어, 특히 고구려와 신라의 언어가 아주 다른 언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현존 자료의 면밀한 검토는 이들의 언어가 방언 정도의 차이만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고 했다. 8세기경부터 형성된 공통어는 신라 방언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나 고려 왕조 성림이후 서서히 중앙 방언 또는 북서부 방언의 영향을 받아 온 것으로 믿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통적으로는 서로 동일언어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즉, 그들의 언어가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설명할 때 예로 들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어간의 지명접미사의 대비를 살펴보자.▶북방계: 고구려어(忽) ▶남방계: 백제어(夫里), 신라어(伐, 火)여기에서 이른바 백제어 ‘夫里’와 신라어 ‘伐’ 또는 ‘火’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그러나 고구려는 위서 동이전의 고구려 조항에서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언덕과 못이 없었으며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였고 산골의 물을 먹었다.”라고 했듯이 산골짜기에 취락을 이루었으므로 그 취락명은 ‘골짜기’를 뜻하는 접미사 ‘忽’을 갖게 되었으며, 신라의 경우는 “토지가 기름지고 좋아 오곡을 심기에 알맞은” 벌판에 취락이 형성되었으므로 그 이름에는 ‘벌판’을 뜻하는 접미사 ‘伐’이 붙게 된 것이다. 여기에 고구려어 ‘忽’을 대비시켜 남북방언 간의 언어 차이가 이만큼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하겠다.
    인문/어학| 2007.01.13| 5페이지| 1,000원| 조회(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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