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를 읽고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1985년 어느 날, 이 책의 저자인 황대권 씨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로부터 13년후 인 1998년, 사건은 안기부의 조작이었음이 밝혀져 서른 살의 청년이었던 그는 사십대의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보통사람 같았으면 절망과 비통의 세월이었을 13년2개월간의 억울한 수형기간동안 그는 야생초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생태학적인 눈을 뜨게 된다. 처음에는 만성기관지염과 요통을 고쳐보기 위해 야초를 뜯어먹기 시작했다는 저자... 그러나 한번 두 번 야초를 맛봄에 따라서 온몸에 느껴지는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사전적인 의미로 ‘쓸모가 없고 원치 않은 장소에 난 모든 풀’ 이란 뜻이 담겨있는 잡초란 말 속에는 다분히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사고가 개입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잡초가 아닌 야초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교도소 안에서 야초를 기르게 된 것도 야초에 대한 이런 그의 관심과 열정 때문이었다. 운동장 구석에 제멋대로 나있는 풀들을 한쪽으로 옮겨 심어 두 평 남짓한 공간에 화단을 가꾸기 시작했다는 그는, 교도소 측의 제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회참관이라는 이름으로 일년에 한두 차례 소풍을 나갈 때마다 산에 있는 여러 야초들을 옮겨 심어서 화단을 가꿨다. 그런 식으로 어렵게 조성한 화단이 청소부들과 몇몇 짓궂은 죄수들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힐 때는 정말 화도 많이 나고 속도 많이 상했지만 그런 야초들이 정성과 사랑 속에서 쑥쑥 자라 화단이 풍성해지면 그의 마음도 풍성해지고 기뻤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수확한 야생초들로 물김치도 담구고 무침도 해 나누어 먹으면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작은 행복 일지라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그에게 있어서 야생초는 그냥 풀이 아니었다. 야생초들을 달여 먹고 기관지염과 요통이 나아졌으니 ‘특효약’ 이었고 삭막하기만한 옥중생활을 풍요롭게 했으니 귀중한 ‘옥중동지’ 이기도 했다. 또한 야생초는 그의 ‘스승’ 이기도 했다. 자신의 마음이 ‘만’ 으로 인해 어지러울 때도 늘 겸손한 듯이 피어있는 야생초를 보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이 책은 저자의 옥중 서간집이자 교도소에서 가꾼 야생초들의 관찰일기이다.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편지 한장 한장이 볼펜으로 직접그린 정겨운 야생초 그림들과 여동생에게 쓰는 자상한 말투가 정감 있게 쓰여 진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정겹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유인이면서도 교도소에 갇혀 있는 작가만큼의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교도소에 있더라도 그는 진정한 자유인, ‘마음의 여유’ 만큼은 잃지 않았던 것 같다.‘감옥에 가본 사람은 안다. 할 일이 얼마나 없는지, 독방에 앉아서 자기 몸의 일부를 붙들고 흔드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다.’ 이런 김남주 시인의 말처럼 그는 지겨운 옥중생활을 견디기 위하여 사마귀, 거미, 개구리와도 친구가 되고 편지쓰기와 야생초 밭 가꾸기를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고 삭막하기만 한 교도소에서 100여종에 달하는 야생초들을 가꾸면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이 세상에 필요 없는 것들을 신께서 만드셨을 리 없다는 책 속의 그의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절망감 따위의 감정보다는 생명사이의 존재의 가치가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잘 것 없는 야생초들을 자기 몸처럼 아낄 수 있었고, 곤충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가 감방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자연을 보듬을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위에 항상 있어 왔던 모든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토종이 사라지는 사회, 토종이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사회’. 책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지금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며느리 밑씻개, 뽀리뱅이, 조뱅이, 방가지똥, 닭의 덩굴, 닭의 장풀, 땅빈대, 박주가리, 수까치깨, 쇠비름, 참비름 등등, 생소하기만한 이런 이름들이 익숙하고 정겹게 느껴지는 것은 이 야생초들이 우리나라 전통의 토종 풀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우리의 사회는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물질문명이 팽배해지고 있다. 소비자들의 선택 여하에 따라 인기 없는 농산물들은 재배조차 되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 ‘슈퍼마켓 시스템’, 수많은 동, 식물들의 종을 멸종 시키고 세계를 단품종의 시대로 몰고 가는 ‘기업형 농업’, 그 폐해로 인해 우리의 토종풀인 야생초들도 사라져 가고 있다. 점점 황폐해져만 가는 지금 이 사회를 청산하고 ‘지역 생태 공동체 연합’ 으로 사회를 재편성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런 그의 생각에 우려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지만, 생태주의적인 그의 생각이 우리 사회의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방책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