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한의 경쟁을 거치고 태어난다. 하나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를 만나는 과정에서는 약 90억의 정자들 중 단 하나만 난자와 만나게 된다. 즉, 90억이라는 엄청난 수의 정자가 탄생이라는 축복을 받기위해서 태어나기 전부터 18cm라는 짧고도 긴 여행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중 하나의 정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죽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는 태어나기전 부터 경쟁이라는 환경속에 놓여지고 동시에 선택된다. 90억분의 1. 이 시작부터 우리들은 얼마나 특별한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이 짧은 동화에서도 인간의 특별함을 강조하고 있다. 나무 마을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사람들을 평가하기 위한 사회적인 도구로 스티커를 사용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별과, 벌점 스티커. 금별스티커는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벌점 스티커는 허둥되고 멍청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금별과 벌점이 주어지는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에 따라 평가된다. 예로 동화 속에서 온몸에 금별로 휘장을 한 나무마을 시장이 금별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한 나무사람에게 벌점을 주면서 말하길 "벌점을 주니 기분이 참 좋구먼, 잘못을 하면 벌점을 주어야지 그래야 나의 금별이 더욱 빛나 보이지" 이라고 한다. 이것처럼 한 나무사람을 규정하는데 있어 그 사람의 고유한 성격이나 성질에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해 놓은 결과를 보고 주변사람들이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별점이 많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내려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자본주의, 물질 만능주위와 부합하는 것 같다. 나무 사람들 모두가 별을 받기위해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듯이 현재의 인간은 좀더 많은 물질, 돈 등을 얻기 위해 부단히도 애쓴다. 그것이 결국 헛되고, 진정한 삶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 한채로 조금 더 많은 금별을 받기위해 위험을 맞서며 공중곡예를 한다. 이것처럼 우리들 또한 모든 물질의 제왕인 돈에 그리도 연연해 한다. 이런 한 물질 만능주의의 대표적인 예를 현 사회에 찾는다면,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성행하게 된 로또복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다 한번쯤 복권을 사서 일확천금을 꿈꾸어 보았을 것이다. 일등복권이 천국으로 가는 예약석이나 삶의 질적 풍요로움을 보장하는 티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토요일 밤을 기대하면서 작은 돈 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다시 동화 속 이야기로 들어가서, 언제나 허둥대고 실수 많은 주인공 폰치넬로는 온몸을 휘두를 정도로 많은 벌점만 있을 뿐 금별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 비하하고 주위의 질타를 당연하게 받아드린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루시아가 다가온다. 멀리서 펀치넬로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등장은 펀치넬로에게 의문을 던져주게 된다. 그녀의 몸에는 나무사람들이 그토록 받기를 마다하지 않는 금별도 펀치넬로가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벌점스티커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 그녀의 몸은 자신처럼 똑같은 나무로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무사람들의 잣대가 되는 스티커가 붙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녀가 말한 '엘리'라는 거인 목수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루시아는 폰치넬로에게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행동해야하는 나무마을 세계가 아닌, 또한 그런 시선의 피하기 위한 유일한 안식처로서 그의 집이 아닌 스티커로부터 자유로워 질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해 폰치넬로는 궁금해 하고, 그런 세계의 존재 인식으로 인해 더 이상 스티커를 받는 일과 붙이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폰치넬로는 그를 만나게 된다. 자신이 처음으로 그와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것 처럼 대하며 이런 말을 던진다. "너는 특별하단다. 내가 널 만들었기에 특별하고 난, 잘못된 것은 만들지 않는단다." 여기서 폰치넬로는 자신을 만든 절대자와 대화고 자아를 찾아 가기 시작한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찾으려는 의식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금별과 벌점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그것을 겉어내 버리자 자신의 주위에 붙어있던 스티커 들이 조금씩 떨어지게 된다. 이야기를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여기서 "그(엘리)"는 절대자인 신을 말한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루시아"는 이러한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선교사쯤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존재를 말하고 그 믿음과 깨달음을 설파하는 안내자. 즉, 사회성이 강한 인간 사회에서 인간들이 만든 잣대에 휘둘려 불행하다고 믿고 헛된 욕망에 휩쓸려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음으로서 진정한 행복과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또한, 종교와는 상관없이 남의 시선에 의해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하며 신경 쓰고 불안 해 하는 것들은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 동화가 주는 교훈일 것이다. 이와 같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취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인식하여 올바른 삶을 살아 가도록 하는 것과 삶의 질적 풍요로움을 증진 시키는 것이 건실한 종교 생활이 아닐까?
< Zebrafish을 이용한 인간 피부색 유전자 규명>언제인가 인터넷으로 피부색에 관련된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는 ‘백인이 된 흑인 남자’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아프리카 북동부출신의 터케스트 카흐사이(59) 흑인 남성은 간장 약품 부작용으로 얼굴 일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신체부위가 하얗게 탈색되었다는 것이었다. 한 평생을 흑인으로 살다가 한순간 백인이 되어버린 그는 과연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논란이 꼬리를 물고 있는 가운데 어떤 부작용이 있었길래 피부색깔이 한순간 탈색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정확한 메카니즘을 찾기란 힘들지만 그와 관련한 하나의 논문을 발견하였다.2005년 12월 16일자 美-Science 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zebrafish를 이용하여 인간의 피부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찾았다고 한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의 ‘케이스 챙’ 박사는 zebrafish 중 황금색을 띠고 줄무늬가 더 얇은 것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다른 zebrafish와는 비교되게 황금색을 띤 zebrafish는 멜라닌 색소의 발달이 지연되거나 절감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이유를 분석한 결과 멜라닌 세포조직을 촘촘하게 만드는 ‘slc24a5l’이라는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다르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slc24a5l'유전자가 인간의 유전자에게서도 발견되며 미국의 흑인과 카리브해 연안의 흑인의 유전자와 백인들의 유전자를 비교해본 결과 백인들에게도 이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염기서열이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백인도 golden-zebrafish처럼 유전자의 변이로 인해서 멜라닌 세포가 줄어들면서 피부색이 엷어졌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피부색에 관한 연구가 계속 되어진다면 위에서 고통받는 그러한 사람들은 물런 이거니와 나아가서 피부색을 원하는 대로 조절하게 될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머리카락을 염색하듯이 피부의 색깔 또한 개성있게 바꿀 수 있는 시대가 곧 도래하지 않을까? 이러한 시대를 구현하게 만드는 기술중 model organism이라는 이론이 그 한목을 할 것이다. 진화상으로 비슷한 종에 관해, 하나의 종에 대한 유전자를 확인하고 규명함으로써 다른 종을 좀더 쉽게 이해할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model organism은 위에서의 실험과 같이 인간보다 간단하지만 인간의 유전자를 다 가지고 있는 zebrafish을 이용함으로써 인간의 피부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찾을수 있게 되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zebrafish뿐만 아니라 Xenopus, Chick, mouse, Drosophila등을 이용해 노력한다면 인간의 모든 유전자 기능을 규명할수 있게 될것이고 나아가서 유전적인 질병이라든지 인간의 수명까지도 치료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런, 그러한 과정에서는 생명윤리, 실험윤리가
< 대한민국 史를 읽고>들어가기에 앞서 이 책을 읽고 난 후 중,고교시절 역사와 정치에 대해 고찰 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을 소홀히 하여 올바른 역사관이나 정치관 하나 없는 자신에 대해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물런 우리나라의 교육체제나 제도적인 측면에서 대입과 수능에 목숨을 걸고 교육을 하는지라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 따위는 전혀 중요시 않은 점도 있지만 달리 보면 책에서 말했듯이 물불 안 가리는 중고생이 그러한 관점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정책적으로 손을 써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해보게 하였다. 그러한 관점이야 어찌되었건 이 나라에서 태어나서 20년 넘게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할 입장에서 그동안 나라가 어떤 시간을 거쳐 왔는지 일말의 관심을 두지도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게 느껴졌다. 또한 현,근대사에 대해 주변에서 누가 그렇게 심도있게 말한 사람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던가 역사는 계속 순환하는 그 과정속에서 발전한다고 그러기에 과거를 알면 다가오는 미래를 내다볼 안목이 생긴다고,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예의로서도 내 자신이 살아왔고 살아갈 땅의 역사를 제대로 알게 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주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정치판국이나 역사를 비주얼적으로 보여줄수 있는 대중매체들은 대표적으로 책, 신문과 TV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가 바로 옆에 있는 오늘날에는 수많은 자료를 원하는 시간에 누구든지 원하는 정보를 찾아 볼 수 있게 되어 좀더 사실적으로 이러한 정보를 접할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최근에 있었던 탄핵 소추건이나 선거도 그렇고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인터넷이라는 양방향 대중매체를 통해서 많은 사회적인 이슈를 나았다. 그리고 그 광활한 공간에서 수많은 의견들이 오가고 네티즌이라는 새로운 계층의 등장으로 인해 사회의 기득권들만이 행해 진 듯한 정치판에 일반 서민들이 조금씩 그 힘을 불어 넣을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그러한 연유로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여지껏 살아오면서 정치란 나와는 별개의 세상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그렇기에 방송 매체를 통해 정치상황이 이야기되면 채널 돌리기가 일쑤였다. 간혹 촛불시위나 정치적 성향을 띤 모임에서 중,고생들이 참석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적지 않게 놀라는 것도 나 보다 어린나인대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던 그르던 간에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그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여지껏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 내가 모르던 세상을 보게 해준 이 책 한권과 책과는 상관없지만 교양과목인 ‘한국철학의 이해’를 담당하셨던 김성범 교수님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책속에는 많은 현?근대 한국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교과서 같은 책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고루한 이야기가 아니라 좀더 민감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충분히 설득력 있게 여러 사실들을 기술하였다. 여지껏 의심없이 믿었던 교과서에 실린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좀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그러한 사건이 생긴 연유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길 바란 듯 하였다. 책 서두에 라쇼몽이라는 영화를 소개하면서 한 가지 사건을 여러 가지 관점으로 해석했는 것을 볼수 있다. 이처럼 역사라는 것 역시 지난 시간을 기술해놓은 것인데 그것을 기술한 사람의 관점에 따라 과거의 일들이 달리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기술자의 입장이 아닌 자신만의 눈으로 볼 수 있을때 애국심이 어떤 것인지 나아가서는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돌려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가치 판단의 기준이 서는 것이 아닐까? 물런 이러한 눈을 가진다는 것이 이 책 한권을 읽음으로 인해 단숨에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하나 하나 쌓이게 되어 궁극적으로 그 목표를 달성하지 않을까? 스스로가 이 책한권을 읽고 수업시간에 배운 독일의 역사와 연관지어 감상문을 쓰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만 그래도 단편적이나마 보고 느낀바를 몇자 적어본다.1부. 승리의 짜릿한 감격은 없었다.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일제 강점기를 시점으로 하여 그 당시 부와 권력을 축적했던 이들은 광복이후 에도 여러 가지 방편으로 살아남아 여전히 그 대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야 살아 남기위해 어쩔수 없는 선택 이였겠지만 힘없고 우둔했던 민중들이 조금만 더 나라를 생각했더라면 우리 나라 역사는 다시 쓰여 졌으리라 물런 이렇게 된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기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게 협조했던 프랑스인들은 그 국민들의 선택으로 인하여 공원전체가 피바다를 이룰 만큼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하였다. 프랑스에 비해 타국에 의해 지배받은 기간도 훨씬 길고 수탈당한 것도 비교 할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남한 내에서는 전혀 그러한 작업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간단히 짚어보면 그 당시 미국과의 이해 관계에 의해서 기존의 세력을 전부교체 하는 것이 그들에게 비효율적이었기에 그냥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은근슬쩍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처럼 힘있는 애국열사자들이 좀더 있었다면, 당시 민중들이 좀더 생각이 있었더라면 뭔가 달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2부. 우리는 무덤위에 서 있다.모든 전쟁이 그러하듯이 전쟁 중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극히 미약해 진다. 밥 먹고 하는 일이 적군을 죽이는 일인데 말 안 듣고 힘없는 민간인을 죽이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한국은 특히 수많은 전쟁을 치뤘고 그 전쟁터 역시 다른 나라가 아닌 이 땅이었다. 전쟁 당시 이 땅위에 살고 있던 힘없는 민중들은 세력이 뒤 바뀔때 마다 한차례 홍역을 앓듯이 죽어 나가야 했고 그로인해 수많은 사상자들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노근리 학살사건인데 너무나 많은 사상자들로 인해 유골은 있되 유족은 나타나지 않는 현상까지 대두되었다. 특히 연좌제니 국가 보안법이니 하는 그런 정치적인 유물로 인해 빨갱이라는 표딱지를 잘못 쓰게 되면 가족은 물런 이거니와 친인척은 숨죽여 살아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히틀러가 집권한 당시 독일 민족주의가 부흥하고 파시즘이란 단어가 이곳 저곳에서 불려질때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열차를 타여야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3~4살 어린아이들도 부모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가스실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민주주의든 파시즘이든 그러한 사상들간의 갈등으로 인해 수탈되어지는 사람들의 입장은 한결같지 않을까?4부.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여지껏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은 독립자주국가 였다. 헌데 이 책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서 주어듣다 보면 아주 웃기는 것을 알수 있다. 전쟁시 국군 지휘권이 미군한테 넘어간다는 것이다. 평시에는 한국군 한테 지휘권이 있던 것이 전시가 되면 미국한테 그 지휘권을 양도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웃긴 말인가? 말이 독립국가이지 긴급한 전시에 국군 통수권이 다른 나라한테 넘어 가는 것이 무슨 독립국가란 말인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었던 것은 군에 갓 입대하였을 때다. 그 당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병사가 소모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나 의야해 했는지 모른다. 또한 군견 보고 경례해야 하고 끼니를 제때 챙겨주지 않으면 영창에 간다고 우스개 소리로 하는 것을 들었다. ‘사람이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개에게 경례하라니 그럼 개들은 상관을 보면 경례를 하는가?’하는 생각에 처음에는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당연시 느껴지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살아왔는데 책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정말 무한에 가까운 병력 공급으로 인해 병력의 귀중함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원래 소요는 적은데 공급이 많다보면 그 상품의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과연 군에서 그토록 정신교육을 받았던 주한미군이 한국의 인계철선 역할을 하고 있고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빠져 나간다면 그로인한 국방력손실을 채우지 못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까? 3?8선이 그어진지 어느덧 5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러한 시간동안 우리의 경제와 국방력 역시 많은 발전을 거듭 해왔는 것이 자명한데 50년 전과 후가 같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어찌되었건 남북의 전쟁을 종식이 아니라 휴전시킨 것은 미군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 당시 어수선한 정치체제속에서 기득권들간에 정권획득의 일환으로 미국에게 손을 벌리게 되었다. 그로 인해 미국은 한국의 형님국가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전쟁에서 패전국이 되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독일 역시 1차 대전이후 많은 책임으로 많은 국채를 지게 되고 여러 나라들로부터 보상을 강요받게 된다. 자체적인 해결이 불가능해지자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게되고 미국의 경제 공항으로 인해 더 이상 원조를 받지 못하게 되자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이 독일내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악 조건속에서 히틀러가 등장하고 파시즘의 대두, 극우 민족주의가 판을 치게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볼 나라는 우리의 큰형님 나라인 미국인데 원래 미국은 세계강국의 축에 속하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의 진가를 발휘하여 세계열강중 하나로 급부상하게 된다. 지금도 국가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곳에는 언제든지 미국이 연관되어 있고 어떻게 분쟁이 잘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자본 창출을 위해서 다른 분쟁에 연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 역시 남과 북이 대치된 상황이기에 그들의 좋은 먹이 감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두눈 뜨고 그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기 위해선 국민은 상황을 똑바로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우고 나아가 나라는 국력을 키워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는 자신의 의사결정을 제대로 판단하기 미숙한 6세 가량의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는 병에 걸려 치료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악행금지(Nonmaleficence)의 원칙과 상당히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반적인 이야기는 아이의 병을 치료하기위해 약을 복용시키게 되는데 병의 차도는 보이지 않고 악화되고 부작용만 증가하게 된다.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 명확한데도, 또한 약을 복용시키는 것 이외도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다른 약으로써 병을 통제 해보려 한다. 이러한 것이 윤리원칙 중 악행금지에 지극히 위배되는 행위로써 문제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다음으로 미성년자의 자율권을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간은 침해되어도 좋다는 자율성 원칙에 입각해서 그의 부모가 아들을 위해 약 투여를 결정하고 의사는 그러한 동의로 병과 관련된 약들을 복용시킨다. 치료받는 아이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이 순조롭고 우리들의 일상에서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우리들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경우 직면한 고통에 시달려 무조건적인 의사에 대해 신봉한다. 치료제가 무엇인지든 간에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약품을 선뜻 받아들이거나 처방된 약을 복용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나, 복용시 체내에서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측면에서 하나 짚고 넘어 가야할 것은 약을 투여하기 전에 그 약의 부작용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전혀 제공받지 못한 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피부의 붉은 반점이라든지 성격장애, 불면증, 변비, 치질, 잇몸질환 등 다양한 증상이 생긴 후에야 다일랜틴, 마솔린, 드레놀하이드등 태어나 한번 들어볼까 말깔 할 정도의 약품들에 관한 부작용임을 시간이 더해 갈수록 보여준다. 즉,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Informed consent)가 아니라 환자를 위한 것이니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약을 담은 플라스틱 컵이 녹아버릴 정도의 강한 독성을 띤 약도 환자에게 투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런 FDA로부터 승인을 받은 약이라서, 임상실험을 거친 약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의학이라는 전문적인 분야에 무지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마치 이건 좋은 물건이니 써봐야 한다는 식의 상업주의와 약품 하나하나 설명을 어떻게 다 하느냐는 마치 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인양 생색내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또한 의사들이 개발된 약을 투여하기에 앞서 환자에게 일어날 부작용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문제점도 있지만 그들이 하는 행위 자체가 이중결과의 원칙(Double Effect)에 위배되는지부터 확인했어야 한다는 점에도 문제가 있다. 즉, 근본적인 병을 치료하기 위한 선한 동기를 가진 행위가 지체장애, 발달저하 등 정상인으로써의 삶을 영위하는데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부작용을 동반할 수도 있을 경우 진행과정에 의구심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런 이러한 문제들이 실제 발생시 누구의 잘못이라고 규명 짓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은 알고 있지만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은 더욱 고심해야할 문제임이 마땅하다.끝으로 흑인간호사가 아이를 위해 자신의 휴가까지 써가면서 아이 후송을 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사회에서 본다면 정말 정 많은 간호사라며 고마워 할 것이다. 후송도중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의 모든 경력과 직업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친척도 아닌 단지 특이병으로 입원한 아이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 누가 쉽사리 위험을 무릅쓸 것인가?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은 선행의 원칙 중 적극적인 온정주의(Paternalism)에 해당하겠다. 자기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아이를 위해 누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도움을 주기로 결정한다. 그러한 온정어린 마음으로 그녀가 동참하지 않았다면 기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응급상황에 기민하게 대체하지 못할 것이므로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영화 “피아노”와 사랑이론1.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의 줄거리19세기말. 뉴질랜드 미개척지에 20대의 미혼모 에이다는 9살짜리 딸 플로라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위해 도착한다. 어린시절부터 스스로 침묵을 선택하여 말을 하지 못하는 에이다는 피아노와 딸 플로라를 통해 세상과 의사소통을 한다.낯선 땅에 찾아온 에이다와 플로라를 데리러온 남편은 에이다가 목숨같이 소중히 여기는 피아노를 길이 험해 가져갈 수 없다며 버리자, 여자는 아쉽게 돌아본다. 남편이 없는 날 모녀는 이웃 남자 베인즈에게 청하여 해변가로 나와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는 어릴 적부터 말을 못하던 그녀가 자아에 갇히지 않고 사회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그녀의 자존심이었고, 그녀가 기대어 삶을 영위하는 환상이었다. 그러기에 해변가에 버림받는 순간부터 그 물건은 숭고한 광휘를 얻는다. 그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녀의 삶도 함께 가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여러 의미를 띠고 주체의 자리를 움직이는 기표가 된다. 여자에게는 없으면 살 수 없는 환상이요, 남편에게는 돈 가치가 없는 귀찮은 물건이요, 연인에게는 그녀의 영혼에 이를 수 있는 통로이다.버려졌던 피아노를 다시 에이다의 곁으로 끌고 온 것은 베인즈이다. 그러나 이전처럼 에이다의 것이 아니다. 베인즈가 에이다의 남편인 스튜어트에게 땅을 주는 대신 피아노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인즈는 에이다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도록 할달라고 한다. 그는 피아노를 매개로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지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사랑을 얻지 못했다. 그는 분노로 피아노를 그녀에게 돌려주고 그 일은 엉뚱하게 그녀의 가슴에서 움트던 사랑을 끌어낸다. 이를 통해 이다와 베인즈는 복잡한 감정과 성적 욕망에 휩싸이고 결국 그들은 비밀스런 사랑에 빠진다. 즉 피아노는 에이다에게 그전과 달리 부재한 채로 존재하며 그녀가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있어 매개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남편은 그녀의 소 그 후 에이다가 자신의 마음의 소리인 피아노에 대해 귀를 기울이며 갖는 피아노와의 관계는 에이다와 그녀의 피아노 소리(점차 에이다의 베인즈를 향한 마음의 소리로 변해가는)에 귀를 기울이는 베인즈의 관계로 대치된다. 건반 하나를 떼어 내어 ‘사랑하는 죠지, 내마음을 당신께 드려요, 에이다’라고 쓸 때 피아노는 마침내 베인즈와 동격이 된다. 아내의 밀회를 훔쳐보는 그는 땅에 대한 욕심으로 아내가 연인의 품에 안기는 것을 묵인한다. 아니 묵인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장면을 훔쳐보며 자기 스스로 성적만족을 찾는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관음이요, 정욕을 넘어서지 못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된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에이다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에디다를 베인즈에게 보낸다.베인즈와의 새로운 삶을 선택한 에이다는 피아노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피아노를 찾았고 연인을 얻었는데 그녀는 왜 피아노와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드는가. 여자와 피아노를 묶은 밧줄이 물 속에서 풀어져 다시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녀의 이런 자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편에 의해 손가락이 짤리웠기에 그녀는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출구가 닫혀버린 것이다. 피아노는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닌 게 아니고 그녀가 그것을 칠 수 있을 때만이 그녀에게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녀의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이요, 그것 없이는 살수 없는 환상이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미하기에는 사랑보다 앞선다. 정체성을 잃지 않았을 때만이 진정한 사랑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섬을 떠나 넬스라는 마을에서 베인즈와 함께 하는 삶에는 새로운 피아노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피아노이다. 그녀는 마을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언어를 배운다. 이렇듯 에이다 스스로 “피아노를 장사지내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지만 그녀는 밤이면 “바다 밑 무덤 속의 자신의 피아노를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녀 자신이 그 위에 떠(1) 에이다의 페미니즘적 분석‘언어적 상징'을 거부한 에이다는 '아버지'에 의해 '새로운 남자'에게 '돈'과 '교환'된다. 서양적인 '외디푸스의 신화' 속에서 '여성의 교환'(레비-스트로스)과 '음소의 교환'(소쉬르)이 ‘재화의 교환'(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을 폭로한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폭로에 머물지 않는다. 에이다는 '언어'를 거부했지만 언어로서 표현되지 않는 것을 글 쓰기로, 수화로, 그리고 피아노(언어와 언어적으로 표상되지 않는 가장 징후적인 예술 형태로서의 음악)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성 불구자'(상징적인 팔루스의 거세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한 외디푸스 콤플렉스=서구 문명)인 남편 스튜어트에게는 그녀의 언어적 침묵은 가부장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며, 이는 그녀의 손가락을 자르는 데서 드러난다.에이다의 본질적 자아와 관련을 맺는 “바다 밑 피아노”는 여성의 억압이라는 차원으로보다는 아직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존재의 근원이라는 영역의 탐사를 가리킨다는 차원에서 이해된다. 그것은 욕망의 새로운 형태로, 언어에서는 아직 침묵으로, 혹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성은 성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물밑에 숨겨진 욕망의 진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들을 서로 내적으로 은밀히 연결시켜 주는 구실을 한다. 영화는 에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틈 사이로 바깥세상을 쳐다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손바닥 안쪽의 붉은 기운은 어머니의 자궁을 떠올린다. 모태를 떠나 자아의 근원을 찾아가는 가운데 함께 하는 피아노, 그것은 단지 여성, 남성이라는 성적인 차이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에서 공통적으로 소외된 것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여성성, 성의 구분을 떠나 모든 인간 존재의 잃어버린 시간과 관계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말을 배우고 말을 지워나간다. 그러는 가운데 침묵은 이따금 자신의 완전한 형태를 세상에 내보인다.피아노는 6살 이후 벙어리가 된 에이다의 ‘마당시 사회의 여성 억압과 관련된 것이다. [피아노]는 억압으로 인한 쇠약함보다는 거부와 저항의 강인함에 더욱 무게가 실려 있다. 거부와 저항의 방식으로 에이다는 원주민을 땅을 사서 백인 문명화시키려는 스튜어트 대신 원주민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수용하며 그들의 충고까지도 받아들이는 베인즈를 택한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자아이기도 한 피아노를 장사지내고 새로이 갖게 될 피아노는 자신을 벙어리로 만들었던 절대적 권위를 지닌 신, 아버지, 그리고 남근을 숭배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성립되고 고착화된 언어와 가치체계를 거부하고 해체시키는 기원의 언어인 동시에 미래의 언어와 관련을 맺게 됨을 말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피아노에 발이 묶여 가공할 수압이 짓 누르는 바다 속에서 에이다는 억압 속으로 자신을 넣으려 하는 자기 의지의 정체에 대해 질문한다. 수면 위로 올라온 에이다는 자신에게 가장 비문명적인 교환행위(성욕과 피아노의 교환을 가능케 하는 일반적 등가물이란 사랑이다)를 요구한 원주민 베인즈를 선택한다. 에이다와 베인즈의 공동체적 유대는 에이다가 '말하는 여성' 혹은 '여성으로서의 말하기'를 암시한다.(2) 성에 초점을 맞춘 에디다의 남편‘스튜어트’의 분석그에게 드러나는 성적 일탈은 물신숭배, 관음증, 사체 애호증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성적 일탈들이 성적으로 억압받는 빅토리아 시대에 살아온 많은 사람들의 문제였음을 이 영화는 말해준다. 그는 우선 처음에 에이다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베인즈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왜소해"그는 에이다를 성적 대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는 왜소한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땅을 늘리기 위해 베인즈에게 아내가 그렇게도 중시하던 피아노를 넘겨줄 정도로. 심지어 그는 그 만족감에 도취되어 에이다에게 베인즈를 개인교습 해주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던 스튜어트가 에이다와 베인즈의 성행위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에이다의 딸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나무에 키스를 할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 것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념을 심어주려 한다. 그러한 억압은 변태적인 성적 일탈성이라는 형태로 어른이 되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스튜어트가 관음증 환자처럼 그 장면을 지켜보는 것도 그러한 시대의 반증이다. 그리고는 에이다가 성적 대상으로서 결코 열등하지 않음을 알게된다. 그로부터 갖게 되는 에이다에 대한 집착.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물론 에이다가 성적으로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에이다에 대해 집착을 한다는 점에서도 그것은 드러나지만 스튜어트가 직접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될꺼요."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그것은 드러난다.관음증 자체를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관음증 환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 충동은 일반적으로 암수 교배를 하는 시각을 가진 동물들에게만 나타난다. 더구나 성 충동에의 만족이 성기를 통한 성 행위에서만 이루어지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대뇌를 통한 상상으로 성 충동에의 만족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는 구분된다.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엿보거나 다른 사람이 옷 벗는 것을 보고 성적으로 흥분을 느끼는 증상이 관음증이라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성 충동이 상상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관음증임을 알 수 있다. 이성의 상당 부분이 노출된 장면을 보면서 성적으로 전혀 충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아내와 성적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베인즈와 성행위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성적 충동을 만족시킨다. 즉, 그의 훔쳐보기는 성적 만족의 주요한 혹은 유일한 수단이 된다. 그는 그 자신의 관음증에 갇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성적 일탈로서 스튜어트는 사체 애호증을 가진다. 이는 손가락을 잘라버린 후 에이다가 의식을 잃고 있을 때(이 때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에이다의 몸은 살아있는 몸이 아닌 사체로 간주된다.) 자신의 성기를 에이다에게 삽입하려 하는 행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는 바로 다음 순간 그녀가 깨어나 의식을 갖게 되자 바로 정신을 차린다. 이는 물신 숭배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