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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 발달사] 중세 영어의 특징 평가A+최고예요
    중세 영어 시대1. Norman Conquest (1066) 전후Alfred 왕에서 Cnut왕에 이르는 고대영어시대에는 영국이 Scandinavia인들의 영향 밑에서 살던 시대 라고 한다면, 에드워드 참회왕(1002-1066)의 치하를 계기로 영국은 주로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기 시작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후 노르만 정복을 절정으로 하여 약 200년 동안 프랑스어가 영어를 물리치고 영국전토를 석권하게 되었다. 고대영어시대를 게르만적인 시대라고 한다면, 중세 영어 시대는 마땅히 프랑스어의 시대 라고 말할 수 있다. 노르만 정복이후 고대영어의 모습에서 급격히 탈피한 중세영어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프랑스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프랑스인들이 영국의 주인공이였고,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활동은 오직 프랑스어를 통해서만 이루어 졌다.노르만 정복 이후 고대영어의 모습에서 급격히 탈피한 중세영어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프랑스어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이 영국의 주인공이였고,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활동은 오직 프랑스어를 통해서만 이루어 졌다. 영어가 게르만어에 속하는 언어이면서도 게르만어적인 면모보다는 도리어 로만스어적인 성격을 가지게된 것은 노르만 정복의 결과라 할 수 있다.2. Normandy" 와 Normans"프랑스왕 Charls III세 (879-929)는 912년에 Rollo와 조약을 맺어 Normandy땅을 북방민들에 양도하기로 했으며, 이렇게 해서 Rollo는 마침내 Dukedom of Normandy의 초대 Duke of Normandy가 되었다. 한편, Sweyn의 뒤를 이어 영국왕이 된 Cnut는 영특한 임금으로 선정을 베풀어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계승할 후계자가 나오지 않아, 영국의 왕위는 다시금 Anglo-Saxon으로 넘어가, 드디어 1042년 Edward the Confessor가 영국 왕이 되었다. 1066년 Edward 참회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왕 등장 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바로 King John(1199-1216)이 1204년 Normandy의 땅을 상실하였다는 사건이였다. 영국이 노르망디를 잃음으로 야기된 부작용은 실로 막대한 것이였다. 영국과 프랑스간의 긴밀한 유대관계는 일단 단절되고, 영국이 프랑스 영토내에 가지고 있던 발판이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양국간의 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됨에 따라, 영국 귀족들이 대륙에 보유하고 있던 토지와 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의 귀족들은 따라서 완전히 영국 사람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 프랑스로 돌가가거나 하는 양자 택일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그러나, 이미 영국에 온지 되었고 영국 땅에서 굳건한 기반을 이룩한 귀족들은, 대부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기보다는 영국에 머물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이들에게 영국사람으로서의 자기자신을 재확인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해관계에서 상반되는 입장에 서게된 프랑스에 대해 일종의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적대감은 마침내 백년전쟁(1337-1453)이라는 혈전으로 몰고 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노르만 정복이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존재했던 두터운 우호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King John 의 노르망디 상실과 그 후에 일어난 백년전쟁 의 여파로, 13 및 14세기는 프랑스어가 과거의 기반에 힘입어 영국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던 시대라 하겠다. 더구나 14세기에 와서는 여러 가지 여건이 조성되어 영ㅇ국국민의 대다수가 사용하는 영어가 다시금 그 지위를 쟁취하게 되었고, 15세기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프랑스어의 모습이 영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어의 힘에 눌려 시련을 겪으며 천대를 감수하던 영어는, 다시금 열세를 만회하여 영국국민의 언어로 재등장하게 하였다.John왕이 노르망디를 상실한 후 백년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약 130년 동안 영국의 상류계층에서는 아직도 프랑스어를 쓰고 있었으나, 이들의 의식구조는 서서히 변화를 재촉하고 있었다.6. Henry II그 당시까지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해 주던 인적자원이 급속도로 고갈되었다. 사회전반에 걸친 극심한 노동력 부족현상은 영국의 경제구조에 막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노동력의 엄청난 부족은 두 가지 중대한 결과를 산출하였다.영국 전국을 휩쓸어 막심한 인구 감소현상을 초래한 흑사병은, 새로운 경제질서를 영국에 가져왔다. 경제적으로 노동계층의 중요성이 선명하게 부각되었고, 또 사회적으로는 농도들의 지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로계급과 농노들의 사회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향삼됨에 따라, 수입이 증가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 졌다. 이들의 사회생활이 향상되고 안정되면서 새로운 사회계층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안정을 바탕으로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게 되니 독특한 기술의 개발이 촉진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급속히 성장한 것이 바로 장인, 공인 및 상인들이다.이들이 차지하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점진적으로 향상되었고 안정됨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을 옹호하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길드 또는 동인조합 공제조합 등 조직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들 장인, 공인, 상인들 중에는 상행위를 통해 막대한 자본과 거창한 자산을 축적하여 경제계에서 무시 못할 지위에 오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것이 바로 상공벙을 통해 사회에 진출한 중산층 으로,14세기 이후 이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급속도로 비대해져서 영국사회에서 중견 적인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4세기를 계기로 영어가 다시금 세력을 가다듬고 영국사회에 당당하게 침투하게 된 것도, 이를 사용하는 중산층의 존재가 확고부동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9. 영어의 승리14세기를 거처 15세기에 이르는 동안, 영어는 프랑스어와 오래동안의 경쟁 끝에 드디어 최후의 승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대체로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여러 요인이 영어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승리하여 재등장하게 된 영어는 14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국어 로서의 위치를 되찾게 되었다. 영어가 자기 본래의 위치를 쟁취하게 되자, 프랑스어는 -ode, -de, -ed, -od, -d처럼 처음어미를 첨가하는데 그치는 변화형을 가지고 있었다.동사도 역점이 붙지 않는 음절의 모음 이 흩어지면서부터 어미부가 약화되어 단수과거형과 복수과거형이 같은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복수과거형과 과거분사형의 구별도 모호하게 되었다.강 변화 동사뿐만 아니라 약 변화 동사의 경우도 사정은 대동소이하였다. 역시 역점이 붙지 않은 음절의 모음이 탈락하거나 약화되는 바람에 모든 약 변화동사의 시제형도 간략한 방향으로 통일되고 말았다.11. 중세영어의 방언1 북부방언(Northern dialect): 북쪽에서 남으로 험버강까지.2 서중부방언(West Midland dialect): 험버강에서 템즈강 사이의 서쪽 지역.3 동중부방언(East Midland dialect): 험버강에서 템즈강 사이의 동쪽 지역.4 켄드방언(Kentish dialect): 템즈강 이남 켄트 지역.5 남부방언(Southern dialect): 켄트지역을 제외한 템즈강 이남 지역.14세기 말엽에서 15세기에 접어 들면서 여러 가지 여건이 성숙하면서 마침내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표준어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동중부방언 의 부상이라 하겠다. 동중부 방언은 모든 면에서 다른 방언 보다 탁월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입지조건은 수도 London이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런던은 정치적, 경제적,문화적, 사회적으로 급속도로 성장하여 이미 14세기말에는 이곳에서 쓰이는 런던방언 이 급속도로 퍼저나가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공통어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동중부방언은 유리한 지리적인 이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중부지방은 대체로 보아 북으로는 험버강에서 남으로는 템즈강 사이에 위치하면서 영국에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부당언 처럼 급진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남부방언 처럼 보수적인 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북부 사람들이나 남부 사람들이 다 같이 가까이 할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하고 있었다들어와서는 거의 모든 굴절형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현상 역시 역점이 붙지 않는 어미부의 음절이 약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사의 굴절형이 점차로 간소화된 것과 때를 같이해서 형용사의 굴절형도 간소화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중세영어에 들어어서면서부터 단수,주격형이 단수에서 모든 격형으로 쓰이게 되고, 복수, 주격형 역시 복수에서 공통적으로 모든 경형에 쓰이게 되었다.3 인칭 대명사명사나 형용사의 경우와는 달리 고대영어의 인칭대명사의 여러 형태는 중세시대에 들어와서도 비교적 잘 보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이들 인칭대명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데다가 인칭. 성, 수 등을 분명히 가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hit(=it), pæt(=that), pis(this), hwæt(=what) 등을 제외하면 이들 인칭대명사에는 주어와 목적어를 분간하는 격형이 뚜렷하다.4 지시 대명사고대영어의 지시대명사 s (=that;남,단), s o(여, 단), pæt(중, 단)등은 중세영어에 들어와서 간소화 되어 단수 that, the 와 복수 tho로 단일화 되었다. the는 se 대신 쓰이다가 후에 완전히 정관사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정관사와 지시대명사로 쓰이던 pæt와 p 에서 내려온 that, tho는 지시적인 기능만을 가지게 되었다.5 의문 대명사고대영어의 의문대명사 남, 여성형 hwa"가 중세영어에서 who가 되고, 중성형인 hwæt가 what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세영어에 들어오면서 hw 의 대격형이던 hwone는 자취를 감춰버리고, 대신 여격형 whom(고대영어 hwæm에서)이 득세하여 목적어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고대영어 hw , hwæt의 속격형 hwæs은 중세영어에서 whos가 되었고 현재의 whose로 낙착되었다.6 동사동사의 경우에도 간소화 경향은 계속 되어 이른바 유추작용에 의하여 많은 강 변화 동사가 약 변화동사의 활용을 따르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중세영어에 들어와다.
    인문/어학| 2005.02.16| 14페이지| 1,000원| 조회(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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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 발달사] 고대영어의 특징
    고대영어의 특징1. 원주민 Celts영국, 미국 등을 비롯해서 현재 세계 각처에서 널리 쓰여 세계어의 구실을 하고 있는 막강한 언어도 따지고 보면 본시부터 영국에 있던 언어가 아니라 기원 후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Anglo-Saxon족 들이 가지고 들어온 언어이다. 따라서 영어가 영국 땅에 들어온 지 줄잡아 1,50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Brirain섬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오래다.영국에서 가장 일찍부터 살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아마도 구석기인들 이였을 것이다. 영국과 유럽대륙에 한데 붙어 있어, 영국이 지리적으로 유럽의 일부분 이였을 무렵부터 영국 땅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구석기인들처럼 동굴에서 살았을 것이며, 초보적인 문화도 간직하고 있었겠지만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이들의 언어는 이들의 멸망과 더불어 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아, 구석기인들의 언어에 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구석기인에 이어 신석기인 들이 영국 땅에 거주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의 흔적도 매우 희미하여 약 5000 B.C.경에 그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나름대로 상당히 발달된 문호를 보유하였던 이들은 가축을 사육하고,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초보적인 농업에 종사한 흔적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던 언어 역시 이들과 함께 멸망하여 어떠한 언어였는지 알 수 없다. 일찍이 영국에 살았던 민족으로서 언어와 기타 생활에 관해 비교적 자세한 자료를 남긴 것은 켈트인 들이 효시하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언어는 인구어에 속하는 언어였기 때문에, 켈트어야말로 영국에 들어온 최초의 인구어라 할 수 있다.처음 이들 켈트인 들은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각지를 석권했다. 영국에 진출 한 켈트인 들은 두 개의 분파로 나눌 수 있다 600 B.C. 경에 들어온 일파는 Gaelic인과 Goidelic인들로, 이들은 Ireland와 Scitland에 정착하였고, 그 후에 들어온 Cymric인과 7년에는 앵글족들(Angles)이 들어와 동부 및 Humber강 이북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왕국을 건설했다.Vortigern의 청을 받고 영국으로 들어온 앵글로-색슨인들은 이곳 환경이 대륙에 두고 온 자기들 땅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의 청을 받고 그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영국에 온 이들은, 이곳에 눌러앉아 살기로 작정했다. 연달아 대륙에서 대거 건너온 이들은, 원주민인 켈트인들의 의사에 구애됨이 없이 그들의 땅을 강점하고, 반항하는 자들은 산간오지로 몰아내고 말았다. 이들 대륙에서 몰려온 침입자들은 영국 전역에 정착하게 되고, 약 1세기라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 영국은 앵글로-섹슨 일색으로 변모하고 말았다.2 Anglo-Saxon Heptarchy6세기에 접어들면서 앵글로-색슨족들의 영국정착이 대체로 마무리됨에 따라, 여러 부족들은 서로 뭉쳐 각기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 켈트인들이 순순히 굴복한 것은 아니다. 대륙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 침입자들은 도처에서 완강한 저항을 받았으며, 특히 Wessex에서는 일대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격렬한 저항을 계속한 후 중과부적 하는 수 없이 서부 Wales의 산악지와 서남부의 오지 Conwall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5세기에서 6세기까지 영국은 전국시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아직 윤곽이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은 정치적 단위로서의 여러 부족이나 군소 왕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힘을 겨루며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앵글로-색슨인들의 초기 정착 시절에는 싸움이 계속되어 혼란상태를 면치 못했으나, 이러는 동안 점차 다음 단계인 질서회복 국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여러 부족들과 군소 왕국들은 강력한 지도자의 영도 밑에 단합하여 뚜렷한 정치적인 단위로서의 독립된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고대영어시대의 7개 왕국인 Anglo-Saxon Hepatarchy 이다.1. Kingdom of Northumbria: Humber강 이북의e pronouns)에서도 성, 수, 격에 따른 변화형이 있었음은 물론, 형용사에도 강변화(strong declesion)과 약변화(weak declsion)의 구별이 있었다.품사 중에서 동사의 활용형(conjugation)이 가장 복잡하였다. 활용유형에 따라 모든 동사는 강 변화동사(strong verbs), 약 변화동사(weak verb)등으로 분류되어, 몹시 복잡한 활용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을 일부 소수의 불규칙동사(irregular verbs)와, 대부분이 규칙동사(regular verbs)로 구성되어 있는 현대영어의 동사와 비교하면 좋은 대조가 될 것이다.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사에는 또한 일정한 문법범주 (grammatical categoris)에 따르는 형태가 있다. 인칭(person), 수, 시제(tense), 서법(mood), 태(voice) 등을 나타내는 형태 이외에, 부정사(infinitive), 분사(participle), 동명사(gerund)등을 나타내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6. 고대영어의 문법1 발음과 철자철자를 보면 현대영어와 같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f], [v]음을 나타내는 데 f자를 쓰고 ( f t"=foot; "lufe"=love) [s], [z]음을 나타내는데 모두 s자를 썼다( suni"=son; " r san"=arise). "hat"의 [æ]음을 나타내는 æ자 (ash), "bath"의 [θ]음을 나타내는 p자 (thorn), "bathe"의 [ð]음을 나타내는 ð자 (eth)는 지금 쓰이고 있지 않는다.{모음발음실례ahabban(=have)의 a"n ma(=name)father 의 a"h m(=home)æhat 의 a"æt(=that)ædæd(=deed)의 ædæl(=deal)eset 의 e"stan(=eat)hate의 a"h (=he)itin 의 i"sittan (=sit)maxhine의 i"b tan(=bite)고대영어에서는 7개의 모음과 (vowel)과 3개의 이중모음(dipht분이며, 동사의 현재분사형인 -end에 기원을 두고 있다.4 형용사형용사의 굴절 유형에도 구가지 종류가 있어, 강 변화와 약 변화로 나뉜다. 형용사 앞에 지시대명사나 소유대명사 등 한정사가 붙지 않거나, 또는 형용사가 술어 적으로 쓰일 때는 강변화가 되고, 그렇지 않고 형용사 앞에 각종 한정사가 붙게 되면 약 변화가 된다.그러나 약간의 예외가 있어 eall(all), f we(few), manig(many), gen g(enough), per(other) 등은 언제나 강 변화를 하게 된다. 형용사에도 역시 남성, 여성, 중성의 구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격에 따라 일정하게 변화한다.5 지시대명사지시대명사는 단·복수의 구별이 있는 것은 물론 남성, 여성의 단수에서는 독특한 조격형을 가진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6 의문대명사고대영어의 의문대명사는 지시대명사와는 달리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여성형도 없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who, whose, whom, what 등은 모두 고대영어의 의문대명사를 충실하게 계승한 것이다.7. 고대영어의 동사고대영어의 동사는 대체로 주종을 이루는 1강 변화 동사(strong verb)와 2약 변화 동사(weak verb) 이외에, 상당히 불규칙한 변화를 하는 3과거-현재 동사(preterit-present verbs)와 4변칙 동사 등 네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고대영어의 시제에서는 게르만어의 특색이 반영되어 현재시제형과 과거시제형 등 두 가지 종류의 시제형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미래시제를 나타낼 때에는 미래시제형이 없었으므로 현재시제형으로 대치했다.1 강 변화 동사과거시제형을 만들 때 모음변화 를 일으키는 동사를 일반적으로 강 변화 동사 라 하는데, 이러한 모음변화는 게르만어 또는 인구어에 존재하던 현상이 계승된 것이라 하겠다.a Class I : 부정사의 어간이 [i]이며,유형을 판가름하는 동사의 기본형이 [ ]-[ ]-[i]-[i]로 되어 있는 동사{b tan(bite)b tbst Saxon 방언인데, 이 방언은 Thames강 이남의 서남부 지역에서 쓰였다. Northumbrian방언과 Mercian방언은 서로 닮은 점이 많아 이들 두 방언을 한데 합쳐 때로 Anglian방언이라 말하는 경우도 있다.이 방언이 다른 방언에 비해 상대적인 우위성을 지니게 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고대영어 시대에 전국적으로 널리 쓰인 대표적인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9세기 West Saxon 왕국은 Viking의 침략에 대항하여 현명한 통치자 Alfred대왕을 중심으로 영국 전체가 한데 뭉치게 되자, West Saxon 방언은 급속도로 표면에 부각되어 전국적으로 그 위치를 공고히 다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Alfred대왕은 학문을 장려하여 라틴어로 된 많은 서적을 West Saxon 방언으로 번역하게 했음은 물론, 이 시대의 중요한 작품들이 거의 다 West Saxon 방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9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West Saxon 방언이 일종의 문어(literary English) 내지는 표준어(standard English)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9. 고대영어의 어휘고대영어의 어휘는 한마디로 말해 '게르만적인 색채 를 짙게 띠고 있는 어휘이다. Anglo-Saxon족들이 영국에 침입하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이 땅에는 Celt인들이 살공 있었다. Anglo-Saxon인 들이 Celt인 들과 같은 땅에서 살게 되자, 전자는 후자로부터 극소수의 Celt 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Celt어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아 고대 영어에 미친 영향은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북유럽에서 쳐들어온 Viking들이 점차 영국에 정착함에 따라 영국은 강력한 Viking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 Viking들이몰고 온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영어는 몇몇 실용적인 Viking들의 어휘를 받아들였을 뿐 고대영어의 어휘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Viking들도 게르만족의 일분파이다. 비록 무력이 강다.
    인문/어학| 2005.02.16| 16페이지| 2,000원| 조회(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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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1.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 (‘02 김태형)2. 시 대 배 경 (‘02 최혜정)3. 일반적 특성 ('99 정오성)4. 문학 속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영1) 시와 소설의 특성 (‘99 김희열)2) Barthelme의 백설공주 (‘98 김도완)5. 분야별 특징 및 예술적 성과 (‘00 최재혁)6. 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 (‘99 이용신)7. 맺 음 말1.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1. 어원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1934년에 마드리드에서 출간된 『스페인 및 라틴 아메리카 시선집,1882-1932』이라는 책속에서 페드리코 드오니스가 '포스트모데리니시모'라는 말로 처음 사용했으며,1942년에 더들리 피츠가 자신이 편집한 『현대 라틴 아메리카 시선집』속에서 그 용어를 다시 한번 사용했다. 이들은 모두 모더니즘 그 자체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던 모더니즘의 한계를 미미하게나마 지적하고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또한 1947년에 소머벨이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요약하여 출판했을 때 제1권에서 사용한 바 있다. 소머벨이 굳이 토인비의 저서 속에서 그 말을 사용한 것은 토인비가 "서구와 대서양권의 지배가 이제 동양과 태평양권의 부상에 의해 새로운 시기로 옮아가고 있다" 고 하는 문명사가적 관점에서 이 말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후 1950년대에 들어와 찰스 올슨이라는 사람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는데, 이후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의 사용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2. 개념포스트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원성과 상대성 그리고 비결정성을 기본적인 철학적 입장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특징적으로 어느 한 개념으로 정의되기를 거부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양한 여러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이 아무리 변화무쌍할지라도 그 용어의 구성을 분석해보면 대개 중게임의 이질성을 보존하는 ‘사소한 이야기’ 들을 선호하게 된다. 그리하여 ‘작가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권위에 대한 이유에서 교과과정의 개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문화를 탈 경전화 시킨다.4. 자아의 상실, 깊이의 상실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소멸을 가장하면서 전통적인 자아를 거부한다. 즉 내부 외부가 없는 위장된 균일성을 지닌다. 비평가들은 근대문학에서의 ‘자아상실’에 주목을 했다. 그러나 ‘주체’를 ‘한낮 허구’에 불과하다고 선언한 사람은 본래 니체였다. 인간이 에고이즘에 대해 비난을 퍼부을 때 그가 말하고 있는 에고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은 심오한 낭만적 자아를 억압하거나 분산시키고 어떤 때는 그것을 재발견하고자 시도하지만 그 자아는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총체화 시키는 원리로서 상당한 의심을 받는다.5. 표현 불가능성, 재현 불가능성포스트 모더니즘은 반 리얼리스트이고 우상 반대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마술적 리얼리즘’조차도 영묘한 상황 속에서 분해되며 그 단단하고 평평한 표면은 모방을 물리친다. 특히 포스트모던 문학은 종종 그 한계점을 추구하고 그 ‘소모’를 즐기며 분명한 ‘침묵’의 형태 속에서 자신을 파멸시킨다. 칸트의 숭엄한 미가 절대적인 것의 무형성, 공허성 위에서 번영하듯이 “그대들은 절대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리오따르의 대담한 유추에 의하면포스트모던은 모던 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 자체로 나타내는 것이다.6. 혼성모방 또는 패러디풍자적, 조롱적 모방, 우스운 모방을 포함하는 것으로 장르의식의 붕괴와 혼합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다윈적이고 확산적이며 논리를 무시하는 유동적인 현 상황에 맞추기 위한 전략으로 문학에서는 ‘파라 비평’, ‘허구적 담화’, ‘뉴 저널리즘’, ‘논픽션 소설’ 등으로 나타나서 허구와 사실이 두드러지게 결합함을 볼 수 있다. 이런 특성은 전통에 대한 다른 개념을 보완한다. 지속과 단절, 고급문화와 저급문화가 혼합되고 현재 속에서 과거를 모방하는 것이소로서 기능을 담당해 온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주변적인 위치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문학에서 핵심적인 지배소로 간주되는 문제 중에서도 상호 텍스트성, 탈장르화나 장르 확산, 자기반영성,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등에 대하여 살펴보겠다.상호 텍스트성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이 본격 도입된 것은 모더니즘에 이르러서이다. 그리고 모더니스트 이외에도 그 동안 문학 텍스트에 나타난 신화적 원형을 밝혀내는 데 주력 해온 신화 비평가들 역시 비록 간접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상호텍스트성 문제에 관심을 보여 왔다. 그러나 상호텍스트성이 이렇게 그 동안 형식주의나 역사 비평 또는 사회 비평 이론가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논의되어 왔지만, 가장 핵심적인 지배소로 대두되고 체계적으로 이론화되기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이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상호 텍스트성은 주어진 어느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맺고 있는 상호관계를 의미하지만 그 개념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차지한다. 가장 제한된 의미에서 상호 텍스트성은 주어진 텍스트 안에 다른 텍스트가 인용문이나 언급의 형태로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상호 텍스트성은 텍스트와 텍스트, 주체와 주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지식의 총체를 가리킨다. 이 경우 주어진 텍스트는 단순히 다른 문학 텍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기호 체계, 더 나아가서는 문화 일반까지 포함한다.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태양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모든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해 있던 것을 다시 재결합시켜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정립한 프랑스의 이론가 줄리아 크르스테바에 따르면 문학이나 예술 작품은 마치 모자이크와도 같아서 이미 과거에 존재하여 있는 작품들을 다시 결합하고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진 어느 한 작품은 그 이전에 이미 쒸어진 다른 작품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비판적이사이에서도 과거 모더니즘의 대표주자인 T.S. 엘리어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창작과 비평을 엄격히 구분해야한다’는 간극 또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비평은 문학 창작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비평을 시의 형식을 빌거나, 원래 작품과 주인공은 같으면서도 비평가가 원래 작품과는 다른 스토리로 작품을 새로 쓰는 경우.→나라면 이렇게 쓰겠다., 문학작품이 비평을 모방하기도 한다.학제간의 교류도 활발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더 이상 허구성과 사실성이라는 관점에서 문학과 역사를 구분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명제성과 제시성이라는 관점에서 문학과 철학을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두 영역 사이를 가로막았던 확연한 구분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억압된 것의 복귀’와 대중문화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장르와 장르뿐 아니라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작업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모더니즘 시대에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 또는 엘리트 문화와 대중문화의 대결로 일컬어지는 높은 장벽이 존재하였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힐턴 크래머가 말하는 ‘속주들의 복수’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문학내부의 단독적인 진화과정이 아니라 가보장 제도적인 모든 권위와 힘이 상실되는 한편 그러한 권위 아래서 억압을 받아온 주변 세력들이 힘을 획득한 데서 비롯된 피치못할 결과였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 뿐만 아니라 건축음악미술 등 거의 전 예술분야에서 일어난 현상이다.레슬리 피들러의 경우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을 포스트 모더니즘을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였다. 그는 ‘경계선을 넘고 간격을 좁혀라’에서 ‘엘리트 문화와 대중 문화 사이의 차이를 좁히는 것이 정확히 말해서 오늘날 소설이 담당해야 할 기능’이라고 단적으로 주장했다. 포스트 모던 대중문화를 특징 짓는 문학장르는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① 서부개척소설 : 남북전쟁 발발~1890년대 후반까지에 이른 흔히 ‘와일드 웨스트’로 알려진 삶을 다루는 문학이다. 주로 카우보이와 보안관들의 영웅적 생각하는 용기 없는 사내다. 그는 오직 혈통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마지못해 우발적으로 왕자 역할을 해내는 위축된 현대인을 상징하고 있다. 사실 Bill이 왕자인지 폴이 왕자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인물묘사는 유동적이고 애매하다. 바셀미의 메타픽션인『백설공주』는 패러디의 대상인 동화(童話)『백설공주』처럼 작가가 독자에게 제시하려는 주제도 권선징악이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의 주인공도, 핵심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도, 성격묘사도 없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오직 현대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권태와 공허, 그리고 시대적인 혼돈을 느끼고 대응하며 살아가는 조크로 가득 찬 혼란스런 픽션이다. 즉 바셀미는 혼돈으로 가득 찬 현대 사회를 혼돈 그 자체로 대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소설 형식의 질서와 논리를 거부하며 파편적인 언어의 유희로 새로운 혼돈을 작품 속에 창조한다. 이것이 그의 작품의 특색인“와해된 언어”의 의도로 보인다.『백설공주』는 전통적인 소설 형식의 시각에서 보면 시작과 끝이 없는 픽션이다.「백설공주」에서 그는 내러티브 테크닉으로 ‘질문 시스템’과 ‘공백 시스템’ 을 제시하고 있다. Barthelme는 독자가 의식하고 있는 소설에 대한 반응이 문학적이거나 비평적인 가정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문체에 대한 새로운 기법을 시도한다. 따라서 Barthelme는 이미 판에 박힌 것이 아닌 새로운 내러티브 테크닉을 창조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므로 독자들에게 질문 시스템을 보여주고 있다.작품에 시작과 끝이 없으니 이야기의 뚜렷한 주제도 부각되지 않는다. 즉 작가의 주장이 없는 셈이다. 이렇게 분명한 단일 주제를 거부하고 여러 가지 상대적인 의미를 독자에게 제시하는 작가의 태도는 곧 단일한 성격을 강조하는 등장인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야기의 의미는 그것을 해석하는 독자에 따라 다른 것이지만 전체를 통합하는 하나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혹적인 백설공주의 검은 머리칼이 창밖에 드리워졌을 때에 그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각있다.
    인문/어학| 2003.12.18| 17페이지| 1,000원| 조회(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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