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J. 허버트 케인(J. Herbert Kane) 서명: 세계선교역사 역자: 역자: 신서균, 이영주출판년도: 2007 출판사: 기독교 문서선교회총 쪽: p 2731. Author:: J. 허버트 케인 (J. Herbert Kane)은 미국 무디 성서 대학을 졸업하고, 브라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71년에 바링톤 대학에서 인문학 바사(L.H.D.)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일리노이 주에 있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저서로는 본서 이외에도 A Global View of Christian Mission, Winds of Change in the Christian Mission, The Making of a Mission: Today and Tomorrow(세계 선교의 오늘과 내일), Understanding Christian Mission(기독교 선교 이해) 등이 있다.2. The Thesis Statement:: 저자는 이 책에 대하여 현대선교의 개략을 써서 성령 강림 후 윌리암 케리(William Carry)까지의 선교를 파노라마식으로 기술한 저자의 책 “기독교 선교의 세계적 관점”(A Global View of Christian Mission)의 제 1부에 덧붙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의 논지는 선교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결코 양적인 성장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12제자로 시작하여 한 개인의 영혼과 회심, 구원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사회의 개혁이나 집단의 변화 경제적 능력 보다는 오직 한 개인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초대교회가 가진 미덕과 사랑과 순결을 강조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선교를 바라고 있다.3. Summary:: 이 책은 제1,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부는 A.D 20년의 로마제국의 기독교부터 A.D. 1850년의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까지 다루고 있다. 제2부는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확장부터 이슬람지역,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유럽아일랜드는 야만족들의 침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빛을 발하였다. 아일랜드의 교회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데, 패트릭 시대부터 거룩한 열심을 가지고 외국인들에 대한 복음화에 힘썼으며, 스코틀랜드의 픽트족, 영국의 앵글족과 색슨족, 네덜란드의 프리시안족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영국: 영국의 기독교의 기원은 모호한 상태이나 6세기가 되어서야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고올: 고올은 여러 경우를 통해 복음화 되었으나, 그렇게 노력할 때마다 이교도들은 자기들 신앙을 고집하였기에 복음화가 더디었다.화란: 네덜란드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은 윌프리드(Wilfrid) 감독이 여러 차례 로마로 여행을 하다가 프리시아에 잠시 머문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독일: 독일에 기독교를 전해 준 것은 아일랜드와 영국의 수도사들이다. 이중 독일의 사도로 불려진 유명한 보니페이스(680-754)가 있다. 그는 탁월한 학자요, 훌륭한 행정가이며 열렬한 전도자이다.덴마크: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제국 가운데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이다. 덴마크가 복음화 된 것은 1018년에서 1035년 사이에 덴마크와 영국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던 유명한 카누테 시대였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영국으로부터 복음을 받았다.동부 유럽 제국: 기독교가 거대한 두 물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나는 로마로부터 발산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흐르는 줄기이다.3. 이슬람교와의 대면(A. D. 600 - 1200)“지중해세계를 정복하여 절반이나 개종시킨 아라비아 반도의 폭발적 활동은 중세 역사상 가장 특이한 현상이다”라고 빌 두란트가 말한다. 7세기에 갑작스럽게 생성되어 확산된 이슬람교의 세력은 기독교교회가 가장 심각한 위협에 빠뜨렸다. 이슬람교는 전투적이며 선교적인 종교였다.이슬람교도는 어느 곳을 가든지 간에 피정복자들에게 코란경과 칼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다고는 하나, 기독교인들은 비잔틴 통치하에서 보다 더 큰 자유를 만끽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전파할 수 있는 음적 각성: 경건주의 운동에 있어 주요한 인물은 스페너, 프랑케, 및 진센돌프였다. 영국의 경우 복음적 각성에 있어 위대한 설교자는 웨슬레와 휘필드였고, 미국의 경우는 조나단 에드워드였다. 요한 웨슬레는 조지아 주에서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사업을 하다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후, 회심의 역사를 통해 변화된 모습으로 40년간의 전도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고, 그를 통하여 감리교회의 탄생과 종교적으로 파멸되어가던 영국을 건지고, 근대적 선교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초기 영국 선교회: 일반적으로 1792년에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윌리암 케리와 더불어 시작한 선교를 영국 선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미 그 이전에 세 개의 선교 기관이 이미 있었다. 첫째는 1649년에 창설된 뉴잉글랜드의 ‘복음 선포회’이고 둘째는 ‘기독교 이해 증진회’ 셋째는 ‘해외 복음 선포회’로서 SPG로 알려져 있다.6. 영국과 미국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A. D. 1750 - 1850)개신교 선교는 윌리암 케리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이교도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조사"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여 선교적 호소를 해 나갔으며,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하기 위해 이교도 복음 선교를 위한 특별 침례교 연합회를 조직하였다.미국의 선교: 미국에서는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 밀즈는 기독교선교의 준비를 위해 윌리암즈 대학에 입학하여 자신과 뜻이 같은 동료들과 함께 미국 최초의 선교사가 되겠다고 작정하고 메사추세츠 회중 목회자 총회에서 파송 되었다..미국의 선교는 1973년 현재 485개의 기관이 해외 선교 업무를 맡아 파송과 지원을 하고 있으며, 세계 개신교 선교사 숫자의 70%가 미국에 속한 사람들이며 또한 해외 선교 예산의 많은 비율을 담당하고 있다.제 2 부 세계적 선교활동7. 19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확장18세기 말엽에 개신교 선교활동은 영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미국 선교부는 1810년통신 학교에는 1940년대 이래로 100여 만 명이 등록하였다.교회 성장 운동: 맥가브란 박사에 의해 주도되었다.연장 신학 교육(TEE): 세 번째 발전은 연장 신학 교육이다. 1960년에 과테말라의 장로 교회에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은 랄프 윈터였다.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 IVF에 의해 개최되는 울바나 선교 대회의 영향, IVF, 네비게이토, CCC등이 대학생 사이에서 훌륭한 사역을 수행함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기독교 문서: 선교사들은 인쇄물에 대하여 매우 높은 우선권을 두어 왔다.제 3세계 선교: 오랫동안 선교는 백인의 책임으로만 생각해 왔으나 이제 바뀌었다. 한국, 일본, 필리핀 등에서 많은 선교사가 배출되었다.9. 이슬람세계 선교“아라비아 반도를 폭발시켜 지중해 세계의 절반 가량을 회심시킨 사건이야말로 중세사의 가장 특출한 현상이다” 라고 빌 두란트가 말했다. 확실히 기독교회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했던 것이 7세기 이슬람교의 갑작스런 출현과 급속한 전파였다. 이슬람교를 세계의 여러 종교 중 독특하게 만드는 몇 가지 요소들은, 1) 약 7억 정도의 신도를 가진, 비기독교 종교 중 최대규모의 종교이고, 2) 세계적이라고 주장하는, 비기독교 종교 중 유일한 것이며, 3) 기독교를 제외한 세계선교를 주장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4) 기독교보다 늦게 시작한 유일한 이방종교이며, 5) 기독교와 싸워 세계의 막대한 지역을 정복한 유일한 종교이며, 6) 수세기를 거치면서 비기독교 종교 중 가장 저항적인 종교임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1) 이슬람교 토양이 극히 메마른 이유모슬렘들에게 복음 전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어리다, 이슬람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죽음을 부인한다, 이슬람교의 배교자 취급, 이슬람교 사회의 고립성, 대중적인 종교 행위, 십자군의 기억 등이다.(2) 이슬람교 토양에 틈새가 나타나다.인권 운동의 시작, 계속적인 서구 세계와의 접촉, 정치적 분위기가 변화, 기독교 방송의의 예외 없이 그들은 서구문명이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선교사들은 ‘이방’ 종교에 대한 견해가 부족하였다. 셋째, 그들은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구별하지 못했다. 넷째, 선교사들은 복음과 함께 교단주의를 수출하였다. 다섯째, 선교사들은 기독교가 토착화하도록 격려하는 데 실패하였다. 여섯째, 선교사들은 간섭주의의 죄목이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초기 개종자들이 도망한 노예들과 부족사회의 무뢰한들이었던 아프리카에서 특히 그랬다. 일곱째, 선교사들이 서구에서 지원한 자금을 사용하는 데 현명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이 식민제도와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2) 선교사들의 공적: 첫째, 선교사들은 그들이 사역한 사람들을 사랑했다. 둘째, 선교사들은 토착문화에 대한 진실한 평가를 하였다. 셋째, 선교사들은 토착언어를 습득하였다. 넷째,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였다. 다섯째, 선교사들이 제3세계 사람들에게 근대과학적 교육을 시켰다. 여섯째, 선교사들이야말로 ‘원주민’들의 잠재력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일곱째, 선교사들은 병원, 보건소, 의과대학들을 설립하였다. 여덟째, 선교사들이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소개하였다. 아홉째, 선교사들이 동서양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상호관련을 갖도록 도왔다. 마지막으로 선교사들은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 교회를 세웠다15. 선교 전망몇몇 소심한 사람들은 우리가 선교활동의 쇠퇴기를 맞고 있다고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추수의 주인인 주님께서는 그의 선교 일꾼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20).1) 성장의 조류: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은 30년 동안에 그 이전의 30세기 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새로운 것들로서는 첫째, 단기 해외 선교의 보급, 둘째, 비전문적 선교사의 증가, 셋째, 선교 명령으로서 사회 활동의 강조, 넷째, 자치권의 요구, 다섯째, 교육 수준이 높은 선교사의 필요성, 여섯째, 마지막으로 대화의 실천, 서양 세계에 힌두교도, 불교도, 1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1994예배학 (Worship Old And New), 김지찬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p311본 저서의 주요목적은 예배의 성경적 근원과 그 역사적 발전과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는데 있다. 그리고 고대의 예배의식이 20세기, 특히 복음주의적 교회의 예배 의식으로 응용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한 방법들을 살펴보는 것을 본서의 부차적인 목적으로 삼았다.1. 서론최근에 발표된 예배학에 관한 주요 자료들을 소개하고, 예배의 역사와 예배의 신학의 이해를 통해서 예배 갱신을 일으키도록 각 교회를 권면하려는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저자는 고대의 예배 형식이 오늘날의 예배에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비록 예배 형식은 각 교회의 문화적 상황에 따라 토착화(contextualized) 되어야 마땅하나, 현대의 예배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예배 유산과 본질적으로 동떨어져서는 아니 된다(Robert E. Webber, 1994:7-8).우선 예배(worship)를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만남”(meeting between God and His people)이라는 광의의 의미로 정의한다많은 복음주의적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공중 예배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된 예배 상의 이유는첫째,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반역사적 편견(antihistorical bias) 때문이다. 이 같은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편견은 역사에 있어서 현재 순간의 규격화된 획일화(the uniformed normalizing of the present moment in history)를 몰고 왔으며, 그로 인한 피해와 손실 또한 가중시켰다.둘째, 예배가 합리주의(rationalism)나 감정주의(emotionalism)나 오락적인 요소(entertainment)의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쳤기 때문이다셋째, 균형의 상실에 있다. 즉 세상에서의 교회의 활동의 모든 측면을 균형 있게 강조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 교육, 선교Robert E. Webber, 1994:26).첫째, 성막(the tabernacle)과 성전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둘째, 성막과 성전의 상징성에 있었다. 즉 거룩한 공간 개념(a sacred sense of space)과 거루갛ㄴ 의식들(sacred rituals)과 거룩한 제사장(sacred ministers)에서 그 현저한 측면을 찾을 수 있다. 이 거룩한 상징들이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현저한 특징은 이 상징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정하셨다는 점에 있다(Robert E. Webber, 1994:27).마지막으로 성전의 특색은 거룩한 제사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룩한 예식을 집행하는 제사장들은 전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잇는 중재자(mediator)였다.3) 회당: 회당은 예루살렘 시와 성전이 파괴되고 그 결과로 바벨론 유수기 동안 유대 백성이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된 연유로 처음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Lewis Finkelstein, The Origin of the Synagogue, Proceedings of the American Academy for Jewish Research 1, 1929-30, 49-49; 2(1931): 69-81을 참조하라).회당의 가장 중요한 형성 요인은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하려는데 있었다. 결국 회당은 유대인 촌락 생활의 종교, 교육, 사회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회당에서의 예배는 성전에서의 예배와 현격히 달랐다. 회당의 예배에는 어떤 거룩한 의식도 없었으며 거룩한 제사장 제도도 없었다. 회당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었다. 회당예배는 신앙고백, 기도, 성경봉독과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앙 고백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쉐마(shema)로 했다. 그리고 회당예배는 기도를 중시한다. 세 세트(set)로 되어 있는 일련의 기도들인 테필라(tefillah)가 예배시 회중들에 의해 선 자세셋째, 그리스도 사건은 형식과 표징을 통해 공연된다는 것이다.7. 그리스도 중심교회가 성자를 통해 성부께 드리는 예배 행위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성자의 전사역에 대해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예배란 우리가 성자의 사역 안에서 그리고 성자의 사역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구속 사역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올리면서 성부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외에 별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다.8. 공연의 신학예배는 우리와 하나님간의 관계, 즉 역사적 사건들에 뿌리를 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극적으로 공연한 것(a dramatic enactment)으로 보아야 한다. 예배에서 공연(enactment)은 낭독(recitation)과 극(drama)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낭독(신앙고백, 찬송, 설교)과 드라마(혹은 의식(ritual))는 그 근거를 구약과 신약, 특히 유월절과 성찬에 두고 있다.1) 공연의 정의예배에서의 공연(acting out, act out이란 동사구의 뜻은 “사상이나 무의식적 두려움 등을 말보다는 행동이나 행위로 포현하다”의 의미를 가진다)의 원리는 우리의 삶의 다른 영역에서의 의식적 행위(acting out)의 원리와 유사하다.예배에서 우리는 한 실화(a story)를 재진술(retell)하고 또 공연(act out)한다. 여기서 한 실화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과 그 일에 대한 현재 우리의 반응을 의미한다. 예배란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 주는 사건을 공연하는 것이다.예배 공연의 원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다. 구약과 신약의 예배들을 연구해 보면 예배가 아무렇게나 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예배자들이 잘 조직화된 체험을 맛볼 수 있도록 예배가 세심하게 미리 계획된 것을 볼 수 있다.기독교 예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인한다. 설교 가운데서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실화를 다시 이야기하며, 성찬을 통해 그 사건을 극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2:20)고 선포했을 때의 심정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침묵은 초월의 감정을 유발시키고 실재의 초월적 특성과 접촉하게 만들어 준다.침묵은 내향성(inwardness), 묵상, 준비, 개방성(openness)과 관련이 있다(Robert E. Webber, 1994:149).11. 순서의 신학(성찬)Ⅳ. 예배의 배경12. 예배와 공간예배는 그 어떤 곳에서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공리나 다를 바가 없다. 이 같은 확신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에 근거한 것이다.교회사를 통해 살펴볼 때 신자들은 어디서나-들에서나, 지하 묘지에서나, 강가에서나, 가정에서나, 감옥에서나, 배 위에서나, 비행기에서나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통상적으로 예배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예배에서 공간은 세상의 구속이 공연되는 무대이다. 회중석, 성가대석, 집례자석, 그 밖의 복음을 공연하는 배우들의 좌석 등의 공간적 배치뿐 아니라 성찬상, 강대상, 그리고 세례반 같은 구속의 상징들을 통해서 구속의 진리가 표현되는 것이다. 즉 공간이 억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화할 수 있는 것이다(Robert E. Webber, 1994:192-193)1) 기독교 예배 역사에서 바라본 공간 사용사a. 회당: 예배와 공간과의 관계를 회당에서부터 시작해서 살펴보자. 물질적인 것이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원리는 성전에서부터 회당으로 넘어왔다.회당에서의 공간의 신학적 특성은 회중석의 위치와 회중석이 둘러싸고 있는 기구들에서 볼 수 가 있다. 회중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 가운데 자신을 드러냈던 수단들을 가리키는 물질적 상징들 주위에 앉도록 좌석이 배치되어 있다.b. 고대 수리아 교회: 회당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중들은 기독교예배의 상징들을 중심으로 모였다. 특히 회중의 눈의 초점이 모 말이나 행동뿐 아니라 소리에 의해서도 전달(표현)되는 것이다.일상 언어의 소리를 사용하는 또 다른 형태의 ‘리듬 있는 음악적 낭독’을 “선포”(proclamation)라고 부른다. 이런 선포는 기도, 성경봉독, 서언(preface), 축사(blessing), 축도, 설교 등에서 볼 수가 있다.둘째, 공식화된 어조 형태로 리드미컬하게 내는 억양(소리)은 묵상정신(the spirit of meditation)을 돕는다. 이 같은 억양(소리)는 주기도문을 노래할 때나 중보 기도에 대해 화답할 때, 특히 시편을 노래할 때 사용하는 억양이다.셋째, 영창(chant)이다. 소리의 형태가 말과 후렴구로부터 이런 식의 음악적 표현으로 발전한 것이다.넷째, 환호(acclamation)이다. 환호의 행동에서는 그 소리라는 행동 자체가 궁극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초대교회에서는 쥬빌루스(jubilus)라고 알려진 말없는 소리가 있다. 처음에 이것은 예배 공동체에 의해 자발적으로 계속되는 할레루야의 마지막 모음으로부터 발전되었다. 현대에는 쥬빌루스는 영으로 드리는 찬양이나 형식적인 악기 연주음악으로 대치되고 있다(Robert E. Webber, 1994:223).3) 예배에서의 소리의 역사a. 신약교회: 신약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히브리어는 물론 헬라어에도 “말하다”는 단어와 구별되는 별개의 “노래하다”는 단어는 없다(물론 후대에 노래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 초기 기초가 신약교회에 분명히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신약에서는 예배 시에 소리를 사용한 증거를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권면하였다(엡 5:19; 고전 14: 15; 행 16:25; 골 3:16; 약 5:13 참조). 신약 성경에서는 또한 아멘(the Amen) 할렐루야(the Alleluia),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Holy, 모델
A.W. 토저(A.W. Tozer)2009예배인가, 쇼인가(on Worship and Entertainment), 이용복 역, 서울: 규장, p222토저는 교인수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대중의 인기에 야합하고, 거대 기업의 경영방식을 무차별 차용하고,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방식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현대의 교회가 물량적 성장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순결성을 포기하는 듯한 자세를 보일 때는 그것을 좌시하지 않고 언제나 선지자의 음성을 발하였다. 듣든지 안 듣든지 이스라엘 교회의 세속화를 준열히 책망했던 예레미야처럼, 토저도 이시대에 아부하지 않고 하나님교회의 순정성(純正性)을 파수하기 위해 ‘강력한’(Mighty)말씀을 선포했다. 그래서 토저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토저가 신앙의 개혁을 위해 외쳤던 뜨겁고 강력한 메시지를 이 시대의 우리도 들어야 한다.”머리말“예배가 변질되면 교회가 변질된다.”평생의 사역이 끝날 무렵 A.W 토저(A. W. Tozer) 박사는 세상이 교회 속으로 침투하여 교회를 잔인하게 유린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기독교가 빈혈증에 걸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많은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에 물을 타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이 독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죽일 수 없고, 그것이 약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비판했다 토저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라는 큰 우상’이 예배를 타락시킨 주범이라고 진단한다(A.W. Tozer, 2009:4).1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신다.그 본래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심으로 참예배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예배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A.Wozer, 2009:37).일보다 예배가 먼저이다.사도바울 이후로 지금까지 영적으로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은 모두 영적인 체험을 통해 참예배자가 된 사람들이다. 만일 우리가 예배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기만 하다가 결국 아무 데도 이르지 모하는 ‘종교적인 춤을 추는 쥐’에 불과할 것이다.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예배자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선 우리가 예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일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A.W. Tozer, 2009:37-38).예배는 감탄과 경외를 겸손히 기쁨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배에는 ‘신비’라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만일 신비가 없다면 예배도 없다. 만일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분을 예배하지 않을 것이다(A.W. Tozer, 2009:38).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배는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예배가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소수의 사람만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그란 사실 예배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본래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A.W. Tozer, 2009:38-39).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분이 죽음의 고통을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을 예배자로 바꾸시기 위함이었다(A.W. Tozer, 2009:39).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신다. 그리고 뜨거운 예배를 통해서 힘을 얻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순서를 바꾸어서 먼저 일령님은 오직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는 일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예배드리지 않고 단지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면서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곧 거룩한 봉사의 책무를 강하게 느껴서 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순종과 선행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일보다 예배가 앞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이다. 이 순서를 뒤집어서는 안 된다(A.W. Tozer, 2009:67).내가 하나님과 영원한 것들에 대해 묵상해야 할 시간에 나의 주의를 다른 데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A.W. Tozer, 2009:67).4장 영혼의 눈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봉사, 일, 활동은 모두 선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적 습관이다. 이런 내적 관조가 있을 때 비로서 다른 일들도 의미를 갖게 된다(A.W. Tozer, 2009:68).영적인 집중력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을 감싼다고 느낄 때까지 그곳에 조용히 앉아 있어라. 불쾌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것을 듣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을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그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라.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지 말라. 하나님께 당신을 드려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당신 자신이 되어라. 당신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되지 말라. 당신이 관심을 두 세가지 일에만 국한 시켜라. 순간순간 마음 속으로 기도하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그러면 얼마 후 당신은 심지어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A.W. Tozer, 2009:68-69).성경을 묵상하는 기술을 연습하자. 그렇다고 밖에서 사람들을 모아다가 ‘성경묵상클럽’을 만들거나 하지는 말라. 우리는 이미 단체를 만들어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다가 철저히 실패한 사람들이 아닌가? 혼자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그분을 다시 찾지 않는다.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A.W. Tozer, 2009:95-96).부흥은 자정을 넘어서 찾아온다.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능력, 즉 ‘하나님에 대한 수용성’에는 어떤 한 가지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적 수용성’이란 영혼 안에서 몇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섞인 능력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수용성이 있다는 것은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에게 기울어지고, 그분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그분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A.W. Tozer, 2009:96)다른 것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영적인 것만 추구할 만큼 영적 갈망이 크지만 때때로 그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늘 기도 모임을 인도하는 사람들의 관습적이고 냉랭한 기도에 만족하지 못한다(A.W. Tozer, 2009:97(.8장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하나님에게 매료된다는 것은 그분을 숭모하는 것, 즉 그분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을 포함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숭모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을 숭모할 때 우리는 두려움과 경이감과 열망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A.W. Tozer, 2009:98).예배와 경외심감탄의 단계에 올라서지 못하는 예배는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배자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평안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그는 아직 어랜애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향한 고상한 존경심을 안고 그분에게 가서 닿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있는 복된 사람들이 가지는 이타적인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될 것이다(A.W. Tozer, 2009:98).예배의 신비적 요소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 닿도록 고양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드높이는 일이야말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기 위한 우리의 필요조건이다(A.W. Tozer다는 말인가? 참제자의 길로?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자기부정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믿음으로?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곳으로? 거룩한 삶과 성품으로? 세상의 좋은 것들에 초연해지는 성숙함으로? 엄격한 자기훈련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헌신으로? 유감스럽게도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노’(No)이다(A.W. Tozer, 2009:153).12장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인기를 숭배하는 작태를 그쳐라: 문제는 자신들이 그리스도바다 인기를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 사업상 거래처 사람들, 직장 동료들, 친목회 친구들의 호감을 읽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들은 친구들을 잃지 않으려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배신한다(A.W. Tozer, 2009:155).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고 애쓰지 말라복음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한 사람이 아닌 오늘날의 종교 스타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복음주의 운동은 신약의 교회 모습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용인하도록 애쓰는 우리의 노력은 딱할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못과 가시 면류관, 피와 고통과 버림받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거부하고 그것을 단지 상징으로만 해석한다.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편하게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분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십자가에 달린 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원활한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A.W. Tozer, 2009:157).프로그램의 독재우리 시대는 기독교가 복잡해진 시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단순성이 우리 가운데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프로그램, 방법, 조직화, 부산한 활동만 넘쳐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만 소모할 뿐 우리 마음의 깊은 소원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깊이 없는 내적 체험, 공허한 예배, 부끄럽게도 세상의 방법을 모방하여 일을4).
앤디 랑포드(Andy Langford)2008예배를 확 바꿔라(Transitions in Worship: Moving from Traditional to Contemporary), 전병식 역, 서울: kmc, p239들어가는 말오늘날 북미 전역의 세계의 회중은 새로운 유형과 형식의 예배를 실험하고 있다. 많은 회중이 그들의 현재 구성원들, 특히 ‘무엇인가 더’ 혹은 ‘무엇인가 덜 형식적인’ 혹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적합한 예배를 찾고 있다(Andy Langford, 2008:.13).1장은 현대 예배의 세 가지 유형(예전적인 예배, 찬양예배, 구도자 예배)을 설명한다.2장은 비전통적인 예배 모델까지도 최근 주류 교단들의 예배 갱신 상황에서 이해하고자 한다.3장은 예배 유형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근본 원인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즉 현 세대의 기독교 신자들과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구도자들간에 나타나는 상충하는 감수성들을 설명한다. 북미 문화의 변화하는 세대들은 전혀 새로운 예배 상황을 만들어 냈다.4장은 현대 예배에 의해서 부과된 “우리는 왜 예배하는가?”라는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또한 새로운 세대들과 예배하기를 원하는 기존 교회를 위해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5장은 예배를 강화시키기 원할 때 교회가 반드시 해야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설명한다(예배팀을 만들라, 올바른 질문을 하라, 비전을 세우라, 청중 이해를 분명히 하라).6장은 하나님의 말씀, 성례전, 기도, 친교라는 예배의 네 가지 기둥을 약술한다.7장은 젊은 세대, 소외된 사람, 구도자 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섬기려는 기존 교회들을 위해 두 가지 구체적인 방법(새로운 예배를 시작하고 세가지 예배 유형들의 요소를 혼합함)을 제시한다. (Andy Langford, 2008:.15-16).복음은 항상 구체적인 시간과 독특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예배, 즉 토착적인 예배로 전달되어 왔다. 예수가 옥외에서, 가정 집에서, 성전 뜰에서 가르쳤을 때, 그. 대부분의 가사들은 여전히 사람들이나 하나님에 대해 성 편향적인(gender-exclusive)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의 주된 이미지를 고대의 군주(Lord)와 가깝게 만든다.많은 언어들이 또한 하나님과 ‘나의’ 관계, 혹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지를 강조하며 개인적 체험에 초점을 맞춘다. 게다가 널리 사용되는 현대 음악과 복음성가들은 종종 전통적인 찬송가와 현대적인 찬송가에 대해 문을 닫는다. 찬양예배의 메시지에도 비슷한 모양의 비판이 적용된다.기존의 신앙인들이 볼 때 이 예배는 피상적이고 단순하며 현대 문화를 너무 많이 수용하고, 정작 중요한 내용들을 결여하고 있다. 찬양 예배는 자기 만족에 초점을 맞춘 채,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만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이다(Andy Langford, 2008:50)찬양예배 인도자들의 역할에 관해서도 엄중한 비판이 가해진다. 찬양예배의 흐름의 강사/설교자와 예배인도자/음악가에게 집중되어 개인 숭배가 조장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개척한 목사가 더 이상 강단에 서지 않을 때 우리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질문한다. 그러나 공평하게 말하자면, 이 질문은 예배 유형에 관계없이 독단적인 지도자들에게는 모두 적용된다. 예배 인도자의 개성에 따라 형성된 다양한 종류의 교회들이 있고 이들 모두는 통솔하는 목사나 음악가가 떠날 때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그러나 사실상 찬양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대다수는 그런 식으로 한 두 사람의 개성에 따라 인도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적인 회중의 대부분은 위계질서를 따지는 대신에, 예배팀을 구성하고 예배를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 특별히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도자를 갖고 있다(Andy Langford, 2008:51).3) 구도자 예배이들 구도자 예배는 우리 문화에 없던 새롭고 독특한 것으로 현대예배의 세 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흥미를 끈다. 이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나 혹은 교회에 나간 적은 있어도 교회에서 성장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종교 언어나이다(Andy Langford, 2008:98-99).예배는 새로운 세대에게 접근하는 열쇠다. 구도자들은 교회가 무엇인가 제공할 것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공동 예배를 찾아간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그곳에서 어릴 때 보고, 듣고, 경험했던 예배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의 연계점도 찾지 못한다. 그들은 예배의 부정기적인 경험을 기억한다. 지루한 설교, 느릿느릿한 음악, 목회자의 독주, 냉랭한 분위기, 교인들은 너무 불친절하고 불합리하게 보인다.새로운 세대는 오히려 표현적이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다양한 가족 모델들에 대해 개방되고, 가치 형성을 도울 의지가 있으며, 정장 차림이 아닌 옷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예배를 찾고 있다. 그들은 문화적, 인종적으로 포용적인 교회들을 환영한다(Andy Langford, 2008:100).4장 은혜의 통로로서의 예배1919년 감리교 감독교회의 한 위원회는 오하이오의 콜럼버스에 위치한 감리교 감독교회에 걸려있던 “와이언도트 인디언 선교”라는 제목의 그림을 미국에서 알려진 최고의 그림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감리교 감독교회의 첫번째 선교지인 오하이오의 산두스케 북부의 선교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존 스튜어트의 와이언도트 인디언선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Andy Langford, 2008:107).존 스튜어트는 인생을 방황하다, 자살하려고 강으로 가던 중 감리교 예배에 끌려, 그곳에서 예배하던 중 회개하고, 복음을 와이언도트 인디언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한 소명의식을 느꼈다. 그의 순회전도는 기존예배가 아닌 인디언들에게 맞추어진 예배, 즉 그들처럼 머리를 묶고, 검은 옷을 입는 등, 감리교와는 전혀 다른 예배였다. 존 스튜어트의 와이언도트 인디언 선교는 공식적인 선교조직을 만드는데 기여했다(Andy Langford, 2008:108).왜 예배를 드리는가? 왜 그것이 중요한가? 예배의 목적은 무엇인가? 웨슬리 신학의 전통에서 예배는 은혜의 한 통로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웨슬리 영감을 주며, 성서적이고, 영적이고, 초청하며, 선교하는, 눈에 띄는 사역의 목표를 세워야 한다. 비전 수립의 중요한 예배 팀, 지도자, 회중에게 예배가 선교적인 노력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를 새로운 사람들이 변화의 복음으로 양육되는 일차적 기회로 이해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Andy Langford, 2008:145).5) 청중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라섬겨야 할 청중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이 순종 잘하고 지속적인 운영에 기여하며, 어떤 사역이 제공되더라도 만족해하는 클럽 회원들이기를 여전히 기대한다. 교회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렸다.생동하는 예배를 드리려는 교회는 현재의 그리고 점재적인 교인들을 특별히 영적인 요구가 충족되어야 하는 사람들로 봐야 한다.기독교 언어로, 청중이 봉사자로 변했다. 마케팅 언어로 고객이 공급자로 바뀌었다(Andy Langford, 2008:147).어떤 교회의 예배든지 최소한 다섯 종류의 청중이 있다첫 번째 청중: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기존의 신도들이다. 효과적 예배는 일차적으로 기존의 신도들을 성화의 은혜로 양육하고 사랑의 완전을 향해 나가도록 인도하는 매개가 되게 계획해야 한다두 번째 청중: 평신도 지도자들이다. 이들을 위한 효과적 예배는 그들의 봉사사역을 인식하고 깊이를 더해줄 것이다세 번째 청중: 자원 봉사자들과 월급 받는 교회의 직원들이다. 직원들 위한 효과적 예배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해 준다네 번째 청중: 원거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단 본부의 임원, 감독, 감리사 급의 지도목사이다다섯 번째 청중: 지역의 구도자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전에는 다녔으나 지금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로, 모든 교회의 일차적인 청중은 이런 구도자들이어야 한다.예배 팀은 청중이 원하는 것과 필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했는지, 어떤 두려움에 부딪히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먼저 경청해야 한다 예배공간의 수용력이 배가되며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재정이 늘어나고, 채워지지 않던 영적 욕구 채워지며 기존 예배 유지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예배 유형에 대한 가능성 제공한다(Andy Langford, 2008:186-187).교회 목표는 매주 어떤 대안적 예배를 제공하는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모델은 매주일 두 세번의 다른 시간대에 각각 독특한 유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목적은 구도자 예배 통해 구도자들에게 다가서고, 찬양예배 통해 젊은이들을 섬기며, 예전적 예배 통해 오래된 기성 신앙인들을 돌보는 것이 될 것이다(Andy Langford, 2008:187).새로운 예배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종종 현재의 교인들과 지도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오고,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짐 부과, 기존의 상태에 도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강한 열정과 헌신이 없다면 새로운 예배를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Andy Langford, 2008:187-188).준비된 비전을 가지고 예배 팀은 진지한 장거리 계획 착수해야 한다.첫째, 새로운 예배를 책임질 사람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한다 지도자들이 그 일에 바칠 능력과 흥미와 시간이 있는가 판단하며 처음 비전을 세우면서부터 새로운 예배를 시작하기까지 6개월에서 1년 정도 소요 예상된다.둘째, 누가 대상이 될 것인가를 질문하라. 공동체를 조사하고 우선적 대상이 되는 청중을 결정하라. 필요가 무엇인가? 또한 계획을 돕고, 새로운 예배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청중은 누구인가? 특별히 복음에서 멀어져 있다는 이유로 다니지 않는 X세대와 Y세대를 목표 대상으로 삼는다셋째, 어떤 유형의 예배가 제공될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 결정된 특정한 청중과 함께 복음을 나누기 위한 예배를 계획한다. 새로운 예배는 전도의 노력이지 기존 예배인원의 증가목표는 아니다: 기존예배가 형식적이고 찬송가와 오르간을 사용한다면 새로운 예배는 탈형식적이며 복음성가와 키보드를 사용한다넷째, 각 주의 무슨 요일과 몇 시에 새로운 예배를
1. Johannes Nissen신약성경과 선교 – 역사적 해석학적 관점들(New Testament and Mission: Historical and Hermeneutical Perspectives), 최동규 옮김, CLC, 서울, 20052. Author:요하네스 니센(Johannes Nissen)은 1944년생으로 덴마크의 아르후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1971년부터 가르쳤다. 신약성경학자이며, 신약신학을 중심으로 선교학의 이해를 한다. “신약성경과 선교”는 그의 신약성경 연구를 토대로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입장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선교학을 이해야여 쓴 책이다. 저서로는 ‘빈곤과 선교’(Poverty and Mission, 1984)과 ‘요한복음 새로 읽기(New Reading in John, 1999)등이 있다.3. The Thesis Statement:본 서의 논지는 신약성경에서는 다양한 선교학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 배우는 바는 성경해석이 객관적으로 되어지지 않고 상황화를 통한 재고찰을 통해 해석의 확대를 이루어가야 하며,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작은 자들을 향해 성육신적인 상황화와 함께 유일성이 드러나는 순례자적 복음전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 서에서 요하네스 니센은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선교적 관점들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오늘의 선교적 문제들을 파악하고자 한다. 즉 저자는 본문과 경험으로 정의될 수 있는 성경 신학과 선교학 사이에 대화를 시도하며, 본문이 1세기에 의미했던 것을 발견하고, 현재에 의미하는 바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사적 비평 방법으로 본문에 나타난 선교학적 개념들을 이해하며, 해석학적 성찰의 통해 오늘의 상황과 대화하고자 한다.4. Summary:본서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된다. 서론은 연구 목적과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본론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2~8장은 복음서와 서신들, 그리고 계시록에 이르는 순서로 구성되었으며, 역사적 비평방법과 해석학적 성찰을 통해서 성경 안에 내재한 선교학적 통찰들을 현재적 경험과 융합하도록 한다. 특별히 2~8장은 서론의 연구 목적을 통해 저자가 밝히고 있는 본문과 상황의 융합이라는 대화모델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역사적 비평과 해석학적 성찰이라는 구성이 본문과 상황, 성경 신학과 선교학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제안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9장은 이책의 결론부라고 할 수 있는데, 신약성경을 통해 바라본 선교적 관점들을 통해 현재의 문제들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특별히 선교, 문화, 대화의 현대 선교의 주제들에 관해 신약 성경 속에서 바른 접근 방안을 찾고자 한다.본 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요약한다면, 1장은 서론으로서 그가 성경신학과 선교학을 접목하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본문의 주해와 선교적 상황화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며 현재적 경험과 본문의 다시읽기를 통해 성경의 이해를 넓히는 것이다. 2장은 마태복음의 대위임명을 재조명하는데, 그것은 가는 것이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세를 부여받은 제자들이 제자를 삼는 과정이며 그 대상은 작은 자들에게 집중되어진다는 것이다. 3장은 마가복음을 통한 선교의 이해를 하는데, 복음전파는 변두리에서부터 경계선을 넘어가며 수난화를 거쳐 이루어져야 하며, 승리주의적 선교 관점은 교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장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연결해서 선교의 이해를 하는데, 누가복음의 희년의 선포 구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과 공적 분배를 통해 이루어지며,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가 이를 증거해 주며 경계를 넘어가며 상황에 따른 접촉점을 찾는 것이 중요함을 알렸다. 5장은 요한복음에서의 선교의 이해를 하는데, 요한복음은 성육신적 선교방법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보편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해 복음의 진리들 드러내는 것이며 이것은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6장은 바울의 선교신학은 그의 경험을 통해 재조명하는 가운데 형성되었으며, 그리스도의 화해가 보편적인 것이며, 선교방식은 융통성의 띄어야 한다는 것이다. 7장은 골로새서와 에배소서를 통해 교회와 선교와의 관계성을 살피는데 교회는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고 복음선포의 수단 자체가 되며 교회가 도그마타 및 능력들의 횡포로부터 해방되어졌으며, 우주적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화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통해 교회 안에서 구체화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체로서 하나님의 선교의 임무를 띄고 있다. 8장에서는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 드러난 선교를 살피는데,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희망과 선행으로 살아감으로써, 요한계시록은 반문화적으로 적극 후퇴하는 가운데 우주적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가지고 역설적으로 살아감으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9장에서 저자는, 신약에 다양한 선교학적 모델들이 있다는 것은 선교의 성육신과 상황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며, 복음과 문화의 상관성을 살피고 순례자의 모델을 중심으로 한 찾아가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강조한다.5. Critique:필자에게 본 서는 선교학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아니라, 각각의 신약 성경에 나타난 선교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해석과 함께 해석학적 분석을 통해서 성경 본문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융합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유익이 되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결론부인 제9장에서 오늘의 상황을 좀더 다양하게 분석하고 그에 대한 성경적 관점들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교와 문화, 그리고 대화라는 세가지 주제는 오늘날의 복잡한 선교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서론을 통해 저자는 구약 성경의 선교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구약 성경에 대한 성찰 없이 과연 신약 성경의 선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월터 카이저의 “구약성경과 선교”를 통해 바울의 선교가 구약 성경에 기초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본 서의 저자는 “기독교 선교신학을 연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인 신약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 구약 성경을 배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또한 본 서에서 마가복음의 결말이 2세에 의해서 덧붙여졌다는 것에 대한 그의 관점은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마가복음을 제자의 수난화를 강조점으로 고찰하는 것은 타당하나, 그는 마가복음에서 나타난 기사와 표적의 강조성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제자들의 할 일 중에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 주된 사역 중 하나였는데, 이것이 결말과 연결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십자가를 짐에 대한 과도한 강조로 인해 부활의 복음을 믿음의 중요성을 간과한 입장을 취했다.그리고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이 성경을 역사적 관점과 해석학적 성찰을 통해 본문과 오늘의 상황의 통합을 이루려는 것이다. 하지만 2~8장의 내용 전개를 보면서 궁금한 것은 저자의 역사적 비평 방법이나 해석학적 성찰의 방법들이 일관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