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이가 찢어지다‘가랑이가 찢어지다’라는 표현은 본래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다리)가 찢어진다.”나 “촉새가 황새를 쫒아 가다가는 가랑이 찢어진다.”라는 속담에서 앞부분이 생략된 것이다.몸집이 작고 다리가 짧은 ‘뱀새’나 ‘촉새’가 몸집이 크고 다리가 긴 ‘황새’를 쫒아가는 것은 물리적을 불가능하다.하지만 ‘뱁새’나 ‘촉새’가 짧은 다리로 무리하게 ‘황새’를 쫒아 가다가는 탈이 나기 마련이다. 결국에는 ‘다리’나 ‘가랑이’가 찢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힘에 겨운 일을 억지로 하면 도리어 해만 입는다’는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분수에 넘친 행동은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그 일을 잘 하려면, 정말 가랑이가 찢어지지.”에 쓰인 ‘가랑이가 찢어지다’는 ‘힘에 부쳐 일을 해 나가기가 몹시 벅차다’는 의미를 보인다.더 나아가 ‘가랑이가 찢어지다’는 ‘몹시 가난하다’는 의미로도 쓰인다.▷간이 붓다(간덩이가 붓다)‘간’이라는 한자는 ‘외부인’ ‘月’과 ‘성부’인 ‘干(방패)’으로 구성된 이른바 형성문자이다.‘간에 기별도 안가다’ ‘간에 차지 않다’ 등은 ‘간’이 에너지를 만드는 기관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관용 표현이다.한편 (간이 작다, 간이 크다, 간이 붓다)등은 ‘간’ ‘마음’이나‘정신’을 관장하는 기관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관용 표현이다. 대담하지 못하고 겁이 많은 것을‘간이 작다’라도 하며, 겁이 없고 매우 대담한 것을 ‘간이 크다’ 라고 한다. 간이 커지다 못해 부은 것이 ‘간이 붓다’이다간이 부으면 지나치게 대담해져 통제가 불가능해지고 결국 사고를 치게 된다. 그래서 ‘간이 붓다’에 ‘지나치게 대담해지다’라는 의미가 결부된 것이다.▷갈매기살‘갈매기살’은 바다에 날아다니는 ‘갈매기’의 고기가 아니다. 이것은 돼지 내장의 한 부위인 ‘횡격막’에 붙어 있는 고기이다. 그러니 ‘돼지고기’인 것이다. ‘횡격막’은 포유류의 배와 가슴 사이에 있는 근육성의 막인데 수축과 이완을 거듭하면서 폐의 호흡 운동을 돕는다. 이 ‘횡격막’을 로 되었다가 다시 로 변하였다. 의 가 의 로 변한 것은 우에 오는 음이 이기 때문에 모음의 어울림 현상이 일어난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가계→가졔→가쟤→가재)지금도 일부 지방 사투이에서는 또는 라는 말을 쓰고 있다.▷가죽은 으로 이루어진 단어로서 이라는 말은 , 등에서 쓰이는데 을 의미하던이 변한 것이다.가죽은 거죽과 같은 어원의 말인데 으로 변하면서 접미사 이 붙어 이루어졌다. 은 에 어원을 둔것으로서 본래 겉을 의미하였댜.갓 - 갇 - 갖 + 욱 → 가죽?것 - 걷 - 겆 + 욱 → 거죽결국 은 동물의 겉을 싸고 있는 부분을 말한다.▷가타부타는 가 줄어든 말이다. 가타는 원래 옳다는 뜻을 가진 가하다의 어근 가하에서 하의 가 준것이고 부타는 아니하다는 뜻을 가진 옛날 한문투의 말인 불하다에서 불하의 가 준 것이다. (가하다→가하→가타, 불하다→불하→불타→부타)그러므로 라는 말은 하는 뜻을 가진다.▷거죽물체의 겉 부분 [어원 √겆[表,皮]+옥[접사] 변화 거족(역어보 40)> 거죽]▷거지란 말은 가 변한 것이다. 의 은 빌거나 달랜다는 뜻의 한자말이고 는 작다는 뜻을 가진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이다. 를 , 라고 하는 것은 옛날말인데 오늘은 사투리로 되었다. 의 에서 이 빠져 가 되었다. (걸어지→거어지→거지) 란 빌어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감쪽같다‘갑접’일 가능성이 있다. 이 ‘감접’이 변하여 ‘감쪽’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감접’은 ‘감나무 가지를 다른 나무 그루에 붙는 접’을 뜻한다. 대체로 감접은 ‘고염나무’를 이용한다접을 붙일 때 그 바탕이 되는 나무를 대목이라고 하는데 ‘감접’의 경우는 바로 이 ‘고염나무’가 대목이 된다. ‘고염나무’ 동아리 대목을 날카로운 칼로 벗긴 다음 눈이 달린 감나무의 가지를 붙이고 끝으로 칭칭 감아 두면 ‘고염 나무’와 ‘감나무’의 수액을 붙인 표시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감접을 붙인 것처럼 흔적이 없는 상태’를 ‘감접같다’라고 표현한다.▷개떡 같다‘겨떡’에서 온 말로 본다. ‘겨떡’은 ‘겨로 만든 떡’이라는식만 봤다 하면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먹어댄다▷게거품‘게’는 생활 환경이 맞지 않거나 위험에 맞닥뜨리면 괴롭거나 흥분되어 입에서 거품을 품어낸다. 일종의 스트레로 인한 자각 증세이다. 그것이 바로 ‘게거품’이다.‘게거품’은 본래 ‘게가 토하는거품’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의미보다는 ‘동물이나 인간이 괴롭거나 흥분하였을 때 입에서 나오는 침’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경치다‘경을 치다’의 준말인 ‘경치다’는 ‘경을 치르다’에서 온 것이다 순포막에 끌려가 경을 치르는 동안 큰 곤욕을 당했기에 ‘경치다’에 ‘벌을 받다’라는 의미가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경’이라는 형벌 자체가 없어지면서 ‘경’이라는 단어의 본뜻도 사라진다. 그 대신 그 본뜻에서 파생된 ‘호된 꾸지람이나 심한 고통’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자리를 굳힌다.▷고주망태이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은 무엇인가? ‘주’를 한자로 보아‘술’일 것이다 그리하여 고주를 매우 독한 술이나 머리끝까지 마신 술로 이해한뒤 ‘고주망태’의 유래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에 근거한 유래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고주’가 옛문헌에 ‘고조’로 나오므로 ‘주’가 술 자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고조’는 ‘술, 기름 따위를 짜서 밭는 틀’을 가리킨다. ‘쳇다리에 그릇따위에 체를 올려놓는 데 쓰는 기구나 술을 거르거나 짜내는 틀’등과 같은 의미이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먹고조,술고조’ 등과 같은 단어 속에서 ‘고조’라는 단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가물치물고기 중에 '가물치'가 있다. 이 중에 '-치'는 물고기 이름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천자문을 배울 때, "하늘 천, 따 지, 가물 현"이라 하는데 물론 지금은 "검을 현"이라고 한다. '가물'은 오늘날의 '검을'에 해당한다. 옛날엔 '검다'를 '감다'라고 했었다. 그래서 '가물치' 는 '감-+ -을 + -치'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검은 고기'란 뜻이다.▷감기지금은 감기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모두 '고뿔'이라고 했다. 이 '고뿔'은 마치 '코'에 '뿔'이 난 것처럼 진행된다.) 는 두 의미적 요소 과 로 나누어진다. (만+오라)은 , 의 뜻을 가진 에서 왔다.은 과 같은 것이다. (조선어에는 교체도 있다.는 본래 을 지금은 이라고 하지만 에서는 이라고 하였다. 이러고보면 는 가문 또는 집에서 다시 말하여 (집어른)의 뜻이다. 결국 라는 말은 나이가 지긋한 여자를 이르는 말인데 여기에는 원시사회의 모권의 흔적이 담겨져 있다.▷마루영마루라고 할 때의 는 에서부터 기원한 말이다. 는 으로 변하여 , 에서와 같이 즉 라는 뜻을 나타내며 또한 로 변하여 , 에서와 같이 를 나타낸다.▷마리짐승의 마리수, 소 한 마리 할 때의 는 본래 를 의미하였다. 마리와 머리의 어원은 인데 이것이 변하여 두 단어가 생겨났다. 는 15-16세기에 , 등을 의미하고 있었으나 그 후 음의 소멸로 이 단어가 와 로 분화되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어로 되었다.할 때의 는 결국 를 의미한다.▷망나니란 말은 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곧 을 이르는 말이었다. 원래 이 말은 지난날 봉건지배층들이 인민들을 멸시하면서 쓰던 말이다. 17세기 전반기 농민투쟁의 지휘자 고망난은 이름도 없는 노비였다. 그는 가라는 성은 가지고 있었으나 이름이 없었는데 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양반놈들이 그럴 천대하고 멸시하여 지어낸 이름이었다. 인민들도 막 낳은 놈 곧 못된놈들을 라고 하였다. 봉건사회에서는 사형수의 목을 베는 놈을 라고 하였다. 오늘날 이 말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멸시하여 이르는 말로 쓰인다.▷모래란 말의 옛날 말은 이다. 몰[?]+개[접사], 변화 몰개〉몰애〉모?〉모래의 옛날말 는 여러곳에 널려 있는 것을 한곳으로 합친다는 뜻을 가진다. 는 동사를 명사로 만들어주는 접미사로 , , ,나래(날+애)>에서 것과 같은 것이다. 란 말은 본래 여러 곳에 널려 있는 것을 한곳으로 이라는 뜻인데 오늘은 바윗돌이 풍화작용에 의하여 잘게 부서진 작은 알갱이들을 말한다.▷미꾸라지는 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란 뜻이다. 를 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옛날부터 불리 우는 이름이다. '물'이 합쳐져서 생긴 말이다. '실'은 '곡(골 곡)'의 뜻이다.(아직도 고유 지명에 '실'이 쓰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내'는 '천(내 천)'의 뜻이다.(그런데 이 '내'도 원래는 '나리'였다.). 결국 '시냇물'은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이란 뜻이다.▷아기어린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 [어원 √앗[始,初,小,幼]+이[접사]. 변화 *앗이> 아기(석보 9:25)> 아기] ※중세어의 ‘아?[弟], 아?[叔], 아지[指小稱], 이?[初], 아기[幼兒]’ 등은 ‘앗[始,初,小,幼]’을 공통 어근으로 하여 발달한 형태라 하겠다.]▷아버지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남편. [어원 √압[父]+엇[親]+이[조사]. 변화 *압엇이> 아버지. *‘엇’은 ‘친(親)’ 또는 ‘시(始)’의 뜻이고 주격이나 서술격을 만나면 ‘어?’의 형태를 취하여 그대로 명사형으로 굳어졌다.]▷앉다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상반신을 세우다. [어원 √앚-[坐]+다[어미]. 변화 앚다(석보 19:6)> 앉다(용가 1:11)> 앉다. * ‘앚다’는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문헌에 나타나며, ‘앚다’의 활용형 ‘아자, 아?니’와 같은 형태에 ‘ㄴ’이 첨가되어 ‘앉다’의 형태가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ㄴ’이 첨가되는 어휘로는 ‘더디다> 더지다> 던지다’를 들 수 있다.]▷어리-보기얼뜨고 투미한 사람. [어원 √어리-[愚]+√보-[見]+기[접사]. * ‘어리다’는 현대어에서 ‘나이가 적다’의 뜻으로 쓰이지만 중세어에서는 ‘어리석다’의 의미로 쓰였다.]▷어버이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 [어원 √업[父]+엇[母]+이[접사]. 변화 *업엇이> 어버?(월곡 142)> 어버이.]▷어설프다꼭 짜이지 못하여 조밀하지 않다. [어원 √얼[迷惑]+설-[未熟]+브[접사]+다[어미]. 변화 *얼설브다> 어설프다. * ‘얼’과 ‘설’의 결합시에 ㄹ이 탈락함.]▷우두머리물건의 꼭대기. [어원 爲頭+머리[頭]. * ‘위두> 우두’에 ‘머리’가 다시 붙은 것은 일종의 강조형 조어법으로 ‘처가집, 역전 앞’ 등과
문학과 시장- 한국 현대 문학의 상업성을 중심으로1. 들어가는 말2.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논란2-1.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낙관주의2-2.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비관주의3. 베스트셀러 만들기4. 나가는 말1. 들어가는 말인쇄 기술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면서부터 문학은 인간 삶의 정신적인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작가는 자기의 진실한 체험, 사상, 느낌을 녹여 전달하고 독자들은 여기에 정서적 반응을 나타낸다. 즉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독자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이나 현실세계를 발견하면 기뻐하고, 자기 삶에도 당당한 의미가 있음을 작품을 확인하며 안도하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만나면 놀라거나 분노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문학은 다른 예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친숙한 대상으로 머물러 왔다.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이러한 문학에도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문학작품을 비롯한 인쇄매체가 제공하던 재미와 지식을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의 화면이 대신하면서 문학의 기능이 눈에 띄게 저하되었다. 뿐만 아니라 저속함과 상업성에 굴복한 다수의 문인들이 문학의 총체적 위기를 불러왔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해 최상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생산물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상품화될 수밖에 없으며, 생사자인 작가와 소비자인 독자 사이에 돈을 매개로 한 교환구조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작가는 문학성과 상업성, 좋은 소설과 잘 팔리는 상품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이처럼 현대의 문학은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더 이상 순수문학)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내용의 문학이 독자에게 더 사랑받고 있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그로 인해 기업형 서점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러한 서점들은 새로운 생각이 담긴 책보다 상품적인 가치가 있는 ‘확실한 물건’을 선호하게 되었다.본고에서는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긍정, 부정의 의견과 문학의 상업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논란김성곤은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은 상아탑과 은둔 지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과 거리로 나왔고 이런 상황에서 대중문학의 부상은 필연이다.”고 했으며, 이남호는 “최근에 본격문학이라고 발표되는 대부분 작품들은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곧 모든 문학은 대중문학이 될지 모르겠다.”며 문학적 풍토 자체를 수긍했다. 이런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논의의 발단은 작가 이용범이 대중소설이란 기치를 내세운 장편 『열한 번째 사과나무』가 출간 1주일만에 『가시고기』(조창인),『국화꽃 향기』(김하인)와 나란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부터였다. 한번도 문단의 중심에 서 본 적은 없지만, 나름대로 인정받는 작가였던 이용범이 “작심하고 쓴 대중소설”은 본격작가의 상업주의 전향이라는 종전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대중문학 수용문제를 근본적으로 재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 버렸다.이런 견해에 대하여 서영채는 (『문학동네』2000 여름호)에서 “어느 시대에나 키치(Kitch))는 있게 마련이고 그것(상업주의 문학)은 비판이라기보다 조소나 경멸의 대상일 뿐”이라며, “다른 문화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문학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상품의 하나 일뿐일 현실”이기에 “무인도로 표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인도를 찾아가는 사람들”로 비유했다.더구나 작가 이용범이 자신을 ‘통속적 대중작가’로 떳떳하게 선언하며 “대개 문학엘리트 집단은 대중소설을 저급하고 타락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선은 이미 지워져가고 있다. 요즘 문예지에 발표되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스토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멜로드라마이거나 비현실적인 변설과 가벼운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소설에는 아무런 감동도 없으며, 겉멋과 치기만이 ‘문체’라는 포정지에 가려 있을 뿐이다. 작가자신조차 소설 속에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작품들이 본격문학의 본령을 따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문학엘리트 집단은 이런 작품들을 적극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업주의를 혐오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라고 함으로써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논쟁을 가속화 시켰다.)2-1.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낙관주의문학의 상업화는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우수한 작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고 그 작품을 전 세계에 보급하는데 유희한 환경을 조성했다.문학의 상업화에 힘입어 작가들은 작품의 판로를 가능한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독자의 자유로운 선택은,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작가의 작품도 지원하지만, 동시에 걸작품 시장을 형성하기도 한다. 작품을 ‘팔아먹기’의해 수준을 떨어뜨릴 생각이 없는, 재능 있는 작가들은 백만장자는 못 될지언정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다. 출판사는 독자의 흥미를 끄는 책이라면, 독자 소가 아무리 적어도 그 책을 발굴해서 세상에 내보낸다.또한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생산 관계를 이루게 도면서 작가는 다른 사람들의 인간적인 도움 없이 자신이 쓴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 작가도 더 이상 개인적 취향이나 경험을 표현하는 데만 몰두할 수는 없게 되었으며 그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소비해주는 독자를 생각해야만 했다. 자신의 글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대중 독자들의 취향과 요구를 충족시켜 줄 필요도 있었다.)이처럼 문학의 상업화는 돈벌이에 급급한 몇몇 작가들의 문학 남용이라고 하기보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나가는 독자와 작가의 은밀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이 진보하고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사람들은 이념적이고 문학성 있는 작품을 원하기보다는 흥미위주와 가벼운 내용의 작품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요즘 한참 인기를 얻고 있는 환타지 소설이나 귀여니, 트각트각 등의 인터넷 소설들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물론 문학적 진지성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나 독자들에게 유쾌한 웃음과 흥미, 스릴을 주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많다.미국의 경제학자인 타일러 코웬(Tyler Cowen)은 그의 저서인 『상업 문화 예찬』에서 “돈은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는 작가들을 타락시킬 뿐, 창조적인 작가들에겐 결코 독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마음껏 창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된다.”라고 하여 문학이 갖는 사업성을 긍정적으로 복 있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부로 인한 문학의 상업화는 작가들이 창작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토양이 된다고 한다.2-2.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비관주의문학이 상업화되고 상품화되고 있다는 현실이 인식되면서부터 작가나 독자들 사이에 문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상업성의 논리는 문학이 가진 진실성과 진지함을 해치기 쉽다. 상업성과 결탁한 문학은 자연히 문학의 가치를 포장하고 기만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의해 문학적 판단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솔직한 언어로 작품의 온당한 평가를 유도하지 못하고 천박하고 감각적인 선정성에 주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한국 소설의 반성’이라는 세미나에서 소설가 신상선은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내고 있다.하나의 대작을 만들기 위해서는 작가와 발표매체, 평론가 이 삼자의 유기적 긴밀한 협조가 절실하고 작가들에게 세계성의 명작을 잉태하여 출산하도록 하기 위해선 그런 문학적 우량아가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실정은 어떠한가. 작가들이 온 몸을 용광로에 던져 아무리 명작을 만들어 낸다 해도 그것을 전달시켜 줄 발표매체가 외면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평론가들도 영업점포인 발표기관의 요구를 묵살해 가며 순수문학의 명작성만을 높이 추겨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문제는 상업성에 열연하는 발표기관인데 그들은 다수 독자들의 대중성 욕구에만 혈안이 되어 베스트셀러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언제까지 ‘옷 벗는 얘기’ 또는 ‘시류적인 대중성’만을 거론하여 약장사식의 가짜 책 팔기만 반복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냉엄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반성해야 합니다.문학이 상업화되면서 그 틈새를 파고 든 대형 출판사나 기업형 출판사들은 소위 잘 팔리는 상품에 작가의 손을 들어 주었고, 나아가 광고로 작가들을 더욱 부추겨 왔다. 그리하여 작가의 상업주의적 욕망과 평론가들의 정실비평, 독자들의 경박한 인기가 영합되어 순수문학은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더군다나 후기 산업사회의 문화논리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고급소설과 대중소설의 한계를 모호하게 하고, 고급 문화의 대중화를 가져와 독자의 수준을 낮추었다. 물론 이러한 상업성은 순수문학으로부터 떠난 독자를 다시 불러 모이게 한 순기능도 있지만 오늘의 문학이 상업성에 전락된 역기능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문학과 생태주의「수퍼마켓에서 길을 잃다」)1. 들어가며한 여성이 능욕을 당하는 것과 지구가 능욕을 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페트라 켈리에코페미니즘은 생태학과 페미니즘의 관계를 검토하는 논의이다. 생태학 운동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주관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우리 문명내의 ‘타자’인 자연을 이론과 실제의 측면에서 옹호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내의 원초적 ‘타자’인 여성이 더 이상 침묵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계속 ‘타자’이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즉 대상화되고 종속되어야 할 원초적 ‘타자들’로 받아들여진 자연과 여성에 관한 관계를 검토하는 논의이다.서구 산업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연은 지배되고 극복되며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여성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대상화되고 종속되어 왔다. 계몽주의 시대, 18세기 말까지 계속된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유럽의 여성대학살 이후 부르주아 계급 남성에게 의지하는 여성,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감성의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이 이상형으로 등장한다. 이 이상적 여성상은 자본축적을 위해 세계를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한 부르주아 백인 남성들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성적ㆍ사회적 분업 그리고 생산과 재생산, 생산과 소비, 노동과 삶 간의 분리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이성적 남성에 대비되어 자연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유약하고 감상적인 여인에 대한 예찬은 대개 환상과 상징적 구조물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남성들은 살과 뼈를 지닌 현실적 여성이 아닌 환상적 여성상에 그들의 욕망을 투사하기 시작한다.「수퍼마켓에서 길을 잃다」는 여성만의 사적영역으로 여겨지고 구분되어지던 가정에까지 자본의 논리가 보다 고도의 방식으로 내밀하게 침투되어 소비욕망으로 중독된 여성들의 닫힌 현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소비욕망의 주체이며 객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상황을 설득력 있고 섬뜩하게 전달한 이 작품을 통해서 생태학과 페미니즘의 관계인 에코페미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각각 20대 30대 40대의 여성이다. 여성은 대지, 모성, 몸, 자궁, 아름다움, 부드러움, 따뜻함, 흡인력 등의 명사로 그리고 그 명사들이 호명해 내는 이미지들로 설명되어 왔다. 여성에 대한 이런 정의들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장에서 살고 있는 많은 여성들을 제거하고 오직 아름다운 소위 ‘부드럽고 싱싱한 몸’을 지닌 젊은 여자들만을 여성으로 전제하거나 ‘아이를 낳은 어머니만’을 여성으로 상정한다.) 그래서 여성은 젊거나 어머니라는 개념을 형성해 왔다. 이런 젠더 정체성에 의존한 여성의 정의를 따라가 볼 때 오인자의 몸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모성과 대지로 대표되는 여성의 몸이다.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는 그들의 ‘불안정한 몸’이 ‘나약한 정신’을 지배하고 위협한다고 규정하려는 시도들에 의해 끊임없이 훼손되어 왔다. 특히 18세기 들어 여성들의 육체적 연약함에 대한 주장들은 건강/질병 모델로 구체화되었는데 이 모델에서는 생활방식과 사회적 지위가 개인의 육체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았다. 이 모델로부터 여성들은 그들의 몸 때문에 자녀의 출산과 양육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자연적 도덕성을 창조하는데’만 적합하다)는 교훈이 만들어졌다.오인자는 이런 몸에 대한 관점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대학교수인 남편 뒷바라지와 두 딸의 어머니로써 가정에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큰 딸을 시집보낼 때는 경제학교수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돈 문제에 관한한 부족사회를 사는 것처럼 오불관언인 남편을 뒤로하고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명문가와 사돈을 맺는다. 그렇게 해서 결혼한 딸이 사위와 보스턴에 정착하기 위해 돈을 요구할 때도 남편에게 속물 취급받는 것이 두려워 강원도에 있는 땅을 남편의 제자인 경민의 도움을 받아 남편 모르게 처리한다.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인생을 꿈꾸는, 그래서 대학원도 가야하고 유학도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둘째딸의 뒷바라지도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제자인 경민과 닫아 둔다.새끼를 등에 업었다가 뜯어 먹히는 어미 거미 같은 삶을 사는 그녀의 헌신적인 몸이 대량 소비사회에서 암암리에 정의된 젠더 이데올로기의 시선을 받으면 용도를 다한 폐물 취급을 받게 된다. 이 부분은 오현수와 함께 오인자를 납치한 중근이 오인자의 입을 막기 위해 성폭행 하는 부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야, 맞아죽기 싫으면 가만있어. 젊은 남자 맛 좀 뵈주겠다는데 무슨 지랄이야? 이런 때 아니면 너 같은 폐물을 거들떠나 보겠냐? 니 남편도 이젠 늙었다고 손도 안대지? 넌 이제 폐물이야. 요즘은 전자제품도 일년만 지나면 폐기처분 하는데 넌 몇 년이냐? 오십년은 됐지? 곧 가야겠구먼. 지랄하지 말라니까. 너 같이 늙은 년은 돈을 쌓아다 줘도 젊은 남자 맛보기 힘들지...”자녀출산과 양육이라는 생물학적인 기능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여성의 역할을 충실히 행한 오인자의 몸은 가부장 사회에서 이중으로 착취당한 채 오현수의 욕망의 인질이 되어 용도를 다한 상품처럼 버려지고 처분된다. 그런 그녀의 몸은 인간에 의해 지배당하고 조작당하고 파괴되는 자연을 닮아있다.2-2. 보여지기 원하는 몸 - 오현수현대 소비사회는 대중매체에 의한 이미지 보급으로 본래는 가가 집단이나 문화마다 다르게 재현되던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미지가 동질화되었다. 오현수가 꿈꾸는 몸은 남성 시선에 포박 당한 여성적 아름다움의 이미지이다. 오현수는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의 얼굴이 예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에서 짱돌이 되는 ‘작은 키’를 인식한 때부터 그녀의 몸에 대한 몸살은 시작된다. 현대소비사회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신화에 그녀의 몸을 맞추기 위해서 그녀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키크나’를 구입한 것이다.오현수는 상업고교를 입학하던 봄에 20개월 후면 10cm이상 클 수 있다는 ‘틴에이지’에 난 광고를 보고 키크나를 구입한다. 일 년 동안 밤을 낮 삼아 아르바이트하며 무리하게 구입한 기계 키크나를 가지고 눈물나게 노력하지만 20개월 후에도 그녀의 키는 그대로이다. 자연적파를 무기로 자신의 욕망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일자리(댄서직)도 하이힐을 신고 춤을 추는 것이 너무너무 아파 미소를 지을 수가 없어서 결국 그만두게 된다. 오현수는 키 때문에 자신이 욕망 하는 것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오인자를 납치해서 한번에 인생의 따분함을 바꾸려고 한다. 그 과정에 이르는 동안 그녀는 치마만 두르면 껄떡대는 남자들의 생태를 경험하고 그 곳에서 세상을 배우고 나중에는 그들을 갖고 놀기도 할 정도로 닳고 닳은 웃음과 맹수 같은 눈빛을 지니게 된다.고등학교 시절부터 스테레오 타입으로 규정된 여성성에 (날씬하고 마르고 키가 큰) 분류되고 체화(?化)되고 싶었던 오현수는 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키가 걸림돌이 되어 그 분류에 세팅되지 못한다. 보여 지길 원했고 가치(상품성)있는 몸이길 원했던 오현수는 결국 소비사회가 외면하는 불량품으로 남게 된다.2-3. 불모지의 몸 - 나(김선영)나는 서른 다섯의 김선영으로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단둘이 서울 근교 도시에서 살고 있는 중산층 주부이다. 나에게 있어 가정은 스스로를 유폐시켜 놓은 고립의 장소이다. 그리고 일상은 권태롭기만 하다. 남편과는 양식화되고 기계적인 관계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는 굳이 소통을 위해 애를 쓰지도 않는다. 남편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어이’이며 문화적인 코드도 맞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재즈를 그는 ‘뭐 이런 노래’를 듣느냐고 핀잔을 준다. 반면 나와 불륜관계에 있는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니나 사이먼의 팬이다. 절박함의 구심력과 자유자재의 원심력)으로 상징되는 재즈의 이미지가 그렇듯 그와 나는 일탈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재즈의 성격이 현장의 일회성)에 있듯이 돌아서면 허전한 나는 그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나는 진실로 사랑했지만 추문을 견디기 힘들어 옛 애인인 경민을 떠났고, 남편에게서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쇼핑을 하고 그 욕망의 정점으로 백화점에서 절도를 한다. 또한 오인자가 오현수에게 납치되는 것을 본 유일한 목격자임적인 나의 모습은 사물화 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보통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제스춰 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의 몸은 창조력과 생명력을 경험하지 못한 척박한 땅과 닮아 있다.3. 소비, 동일화, 소외이 작품은 작품 사이사이에 인물들이 욕망하는 삶과 연관지어 광고카피가 삽입되어 있다. 광고는 소비자를 기분 좋게 함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욕망을 부추긴다. 그리고 소비자는 광고에서 제시한 사물을 소비하고 그 세계로 끊임없이 진입하고 싶어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광고 카피도 의식주를 좀 더 세련되고 고차원적으로 할 것과 사랑받을 수 있는 몸을 위해 변화하라고 강조하고 있다.이 작품의 세 여성들은 제시하는 상품을 구입할 것을 유혹하는 무수히 쏟아지는 광고의 포화 속에서 쇼핑을 한다. 그들은 하루하도 거르면 불안할 정도로 쇼핑에 중독되어 있으며 쇼핑에서 생의 기쁨과 위안을 찾고 있다. 나(김선영)는 진열대 위의 상품들이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질 때면 상품들을 몽땅 소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닐 정도로 쇼핑에 병적이다. 그런 나의 강박증은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나타난다.몇 번 드나들지 않고도 나는 수퍼마켓에 갈 때면 헐렁한 옷을 입는 게 좋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크레딧 카드로도 지불할 수 없는 상품들은 쇼핑카트가 아닌 옷깃 사이에 숨겨서 나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대개 주차장을 벗어날 즈음이면 수퍼마켓에서 흐르던 배경음악을 흉내 내어 무심코 중얼거리고 있다. 몸의 모든 세포가 남김없이 잠깨어 활짝 열려 있다.오인자도 별 목적 없이 백화점과 수퍼마켓을 돌아다닐 때가 가장 마음 편하다. 그곳에선 늙은 여자도 주부도 아닌 ‘고객’으로 제대로 대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리를 해가며 필요 없는 악어가죽 핸드백을 사기도 한다. 오현수도 오인자에게 빼앗은 신용카드로 위험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최고급 브랜드를 드러내 주는 로베르타의 이니셜이 박힌 수영복을 살 정도로 쇼핑에 중독되어 있다. 이들의 이런있다.
문학과 도시Ⅰ. 서론1960년대 후반기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국의 근대화는 산업화와 밀착되어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 과정은 우선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으로 나타난다. 산업화는 과학화이면서 동시에 도시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1960, 1970년대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아주 판이한데, 이것은 건축물의 높이로서 일단 가시화된다. 한강변에 나타난 고층 아파트 단지들과 도심의 고층 건물 군이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확연하게 바꾸어 놓았음은 물론이고 도로망이 확충되어 육교 등으로 인해 교통의 입체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바둑판무늬의 넓은 도로는 자동차들이 메우기 시작했다.도시의 외형상의 변화는 주민들의 내면 풍경과 조응 관계를 가진다. 하늘을 덮은 스모그는 사람들의 내면에 쌓이는 혼란의 부피와 비례하며, 주거 양식의 변화는 윤리와 풍속의 변화를 수반하고, 거리를 메우는 자동차의 행렬은 공해, 소외 등의 병리적 현상과 조응한다.따라서 1970년대의 문학은 문학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도시 문학(urban literature)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갈등의 심화, 공해와 질병, 범죄와 폭력, 세대 간의 갈등, 상업주의의 범람 등이 핵심적 주제를 이루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현대 문학에서 도시가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소인은 현대 문명 자체가 물질주의적 기반 위에 세워졌다는 데 있다. 물질만능의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채택한 사업 사회의 필연적인 귀결이 소외와 절망, 폭력과 속임수가 판을 치는 부정적 도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양상은 문학 속에 침투하여 문학의 정신적 영역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학은 도시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 속에서 주로 인간사의 부정적인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학이 그저 도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도시를 향해 제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다.따라서 본고에서는 ‘문학 속의 도시’와 ‘도시 속의 문학’이라는 골격을 세워 보기로 하였다. 전자는 도시가 문학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으며 인간의 생활과 정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후자는 문학이 도시 속에서 그가 본질적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과정에서 결국 문학과 도시는 끊임없이 서로를 용납하며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Ⅱ. 문학과 도시1. 문학 속의 도시문학이 그려내는 도시는 어떠한 모습인가. 인간의 본성이 상실되며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비롯하여 많은 부정적인 양상이 나타난다.먼저 도시의 도시적 특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① 인구의 밀집성② 주민들의 이질성③ 행동의 동시성④ 무명성, 익명성⑤ 소외⑥ 비정성(非情性)⑦ 공포와 불안⑧ 불모성⑨ 혼돈⑩ 인공성박완서의 의 경우, 이러한 도시의 전반적인 성격이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볼 수 있다.① 올가미가 있는 곳 - 자유가 침해됨② 적의를 고두세운 빛의 덩어리 - 비정성③ 인공적인 질서 - 공포와 불안을 느낌④ 사람과 건물의 밀집성 - 혼돈⑤ 무질서와 미로성 - 추악하고 무서움⑥ 주민들의 이질성 - 동질성의 상실⑦ 소외와 격리 - 고독과 무료함⑧ 불모성 - 생기 상실⑨ 무명성 - identity의 상실⑩ 인공성 - 골목, 계단, 방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모든 요소들은 도시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적절할 것이다. 급변하는 도시 한복판에서 현대인들은 상실감과 소외감으로 괴로워진다.(1) 인간관계의 단절위에서 제시한 도시의 도시적 특징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인간관계의 단절”이라 생각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음은 물론이며, 혹 살아간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의 재미나 생기를 만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자를 대고 그어 놓은 듯한” 도시적 구도 속에서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봐 아이들을 가두는 것은 물론이고, 획일적인 아파트 안에 고립되어 스스로 고독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1) 이웃과의 관계최인호의 「타인의 방」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집 초인종을 여러 번 누르고 문을 쾅쾅 두드리다가 이웃과 언쟁을 하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그가 시끄럽게 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지만 정작 언쟁의 내용은 그가 집주인임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믿어주지도 않는 이웃들의 일방적 공격이라 할 수 있다. 인간적인 유대가 전혀 형성되지 못한, 그저 생존의 공간인 아파트이기 때문에 이웃은 3년 이상을 살면서도 주인공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초래한 결과이다. 바쁘고 조급하게 살다보니 서로를 돌아볼 겨를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어느 소설에서는 아예 ‘아파트는 사람 사는 동네가 못 된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하기도 하였다. 도시는, 아파트는 이러한 공간인 것이다.2) 가족과의 관계(부부)부부 간의 단절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것 같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 곧 도시인들에게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타인의 방」의 주인공은 아내의 따뜻한 눈길과 반김을 기대하며 초인종을 누르지만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다. 이들 부부가 대화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 게다가 아내가주인공에게 종이를 통해 남긴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로 향해 있는 아내는 남편의 출장 날로부터 부부 간의 도리를 져버렸다. 아니, 그 전부터 아마 이미 그래왔을 것이다. 이들에게서 서로에 대한 애착이나 신뢰를 찾아보기 힘들다.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하고 있으니 심한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친밀감과 믿음으로 이루어져야 할 부부 관계를 지속하는 것도, 찾아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도시의 그림자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2) 소외감소외감은 결국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는 ‘인간은 본래 혼자이며 고독한 존재’라는 말만으로는 위로받을 수 없는 문제이다. 나 자신의 존재조차도 인식되지 않을 정도의 소외감은 「타인의 방」의 주인공이 안고 있는 가장 커다란 고통이다. 그는 심한 고독 속에서 아내가 씹다가 붙여놓은 껌을 발견하고는 낄낄거린다. 이미 말라버렸으나 그는 그것을 입에 넣고 아내를 조금이나마 느껴보려 한다. 그것에 유일한 위안을 얻고 노래까지 부르게 되는 것을 통해 그가 얼마나 극심한 소외감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 있다.아주 쓸쓸하고도 허무맹랑한 고독감을 달래려 술을 마셔보지만 술맛은 짜고 싱겁고, 달고도 쓰다. 그를 달아오를게 하는 술기운의 격려를 받아 노래를 불러 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2. 도시 속의 문학문학을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여유롭게 맛보는 것도 상당한 기쁨이겠으나 그 진가는 도시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모를 고독감과 쫓기듯 바쁜 생활, 그리고 늘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꿀 때 문학은 어김없이 그 속에서 자신의 맡은 바를 수행한다.(1) 위로“문인이 문학을 한다면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쓰는 것이 좋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문학사에 남을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내 곁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웃을 위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글도 필요하다.”)이 세상에는 문학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다. 사진이나 음악 등으로는 어려운 삶의 진실한 고민이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밀한 감정과 느낌을 문학은 좀 더 쉽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학 속에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간의 모습들이 반영된다. 그리하여 문학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이는 아주 세련도고 풍성한 향수에서 뿜는 향 같을 수도 있으나 때로는 치열하게 살이 찢기는 피비린내 혹은 노동에 찌든 땀 냄새일수도 있다.문학에는 많은 사람들의 많은 삶이 존재한다. 소외감으로, 불신으로, 복잡함으로 혼란한 도시에서 만나는 문학은 그의 가까운 이웃이 되어 그와 비슷한 삶을 발견하게 하거나 혹은 그보다 못한 삶을 보게 하여 위안을 얻게 하기도 한다. 또는 따뜻한 말들로 직접 아픔을 달래 회복을 꿈꾸기도 하며 자신이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는 강퍅해진 마음을 자꾸만 건드려서 그를 유하게 하고, 상처를 보듬어 주는 귀중한 작업일 것이다. 물론 도시화되기 이전에도 아주 오래 전부터 문학은 이러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나 지금 현대인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그에 비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2) 여유도시인들은 바쁘다. 늘 시간에 쫓긴다. 한발 늦으면 그만큼의 손해가 뒤따르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습관처럼 끊임없이 마음이 분주하기도 하다. 이런 쉼없는 도시인에게 문학은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을 제안한다.「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서는 바쁘다 못해 이기적 이기까지 한 현대인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내 생활이 너무 조급하고 바쁘기 때문에 도움을 주어야 마땅한 사람을 뒤로 하고 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문학과 개인- 김승옥의 과 최윤의 를 중심으로문학과 개인에서의 ‘개인’의 의미를 문학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성, 내면성, 자의식 등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내면성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후 인간 내면의 표현이라 볼 수 있는 두 작품을 통해 문학 속에 나타난 개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Ⅰ. 내면성의 문학한 개인이 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가 자서전의 주인공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더욱이 그러한 자아의 존재는 개인으로 하여금 그의 삶을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형태로 인식하게 한다. 개인의 자아는 실제로는 자연적, 문화적 규정 아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의식은 개인적 삶의 저자는 바로 개인이라는 생가, 개인적 삶에 대한 주권은 바로 개인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개인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문화에서는 자아의 존재가 불가결한 인간 조건으로 간주되곤 한다. 라고 노래한 것은 18세기 독일의 개인주의 문화가 길러낸 시인 휠덜린의 말이다.근대적 자아의 구축에 기여한 문학은 내면성의 문학이다. 내면성의 문학은 서양 근대문학 자체에서 중요한 전통으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서양의 경계를 넘어 문의 보편적 특징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서양 근대문학이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을 때 특히 유혹적이었던 것은 서양 작가들이 정밀한 관찰과 묘사로 보여준 개인의 내면이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영문학을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작가들이 인간의 심리 묘사를 통해 내면성의 문학을 실현하였고 한국에서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문학사의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문학이 일차적으로 개인의 내면에 관여한다는 생각이 문학에 대한 근대적인 관념의 주요 요소라는 것이다.이처럼 내면성을 중심으로 문학 본연의 책무를 생각하는 관행이 한국문학에 자리자보 있음을 생각하면, 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문학 고유의 글쓰기가 장려된 90년대 문학에서 내향화 경향이 우세하게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대의 변화가 낳내면적 초상이든, 나르시시트들의 열광적인 자기 현시든, 현대 문학의 주류를 형성한 소설에서는 특히 민족적, 민중적 정체성의 오랜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의 자기성찰과 표현이 다채롭게 나타난다. 그 반성적이고 표현적인 개인의 풍모는 다원화된 정체성의 정치라는 새로운 상황이 도래하였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자아 정의 혹은 구축의 자유에 대한 욕구가 확산되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민음사.Ⅱ-1. 김승옥의 후기 소설은 초기 소설에서의 열정 대신 꿈이나 환상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허무의지로 가득하다. 그리고 김승옥의 후기소설은 산업사회의 한 기호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실감을 주로 형상화하여 도시화로 인한 인간소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중 이 작품이 후기 작품에서 보이는 인간 소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도시화로 인한 인간의 개별성과 그로 인한 인간소외, 60년대 도시의 모습은 문체에서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자기소개들은 끝났지만 그리고 나서는 서로 할 얘기가 없었다. 잠시 동안은 조용히 술만 마셨는데 나는 새카맣게 구워진 참새를 집을 때 할 말이 생겼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군참새에게 감사하고 나서 얘기를 시작했다.“안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아니오, 아직 까진......” 그가 말했다. “김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예” 라고 나는 대답했다. “날을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을 수 있는 것으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을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본 적이 있으세요?”“가만 계셔보세요.” 그는 안경 속에서 나를 멀거니 바라보며 잠시동안 표정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없어요, 나도 파리밖에는......”“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그가 내게 물었던 것이다. “사랑하구 말구요.” 나는 갑자기 의기양양해져서 대답했다.우리는 발밑에 굴러 있는 페인트라는 간판에 불이 붙고 있었다. ‘원’자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김형, 우린 우리 이야기나 합시다.” 하고 안이 말했다. “화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일 아침 신문에서 볼 것을 오늘밤에 미리 봤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저 화재는 김형의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이 아저씨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 돼버립니다. 그러나 화재는 항상 계속해서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난 화재엔 흥미가 없습니다. 김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나’ ‘안(安)’ ‘사내’ 등으로 익명화 되어 있다. 이는 현대 도시인의 삶의 자기중심주의, 언어 단절을 암시하는 문화적 의도이며 그들의 신원만 단편적으로 제시될 뿐, 개개인의 개성이 서술되지는 않은 것도 소외의식을 심화시키는 문체적 특징일 것이다. 이처럼 도시 속의 개인은 고립되어 소외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60년대의 서울의 상황을 김승옥은 그의 화려한 문체적 특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이 소설은 ‘나’ 와 ‘안(安)’ 이라는 25세 동갑내기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결코 자신들의 진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는 것, 느꼈던 것만을 주고받는다.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 일방적인 혼자만의 독백인 것이다. 이처럼 두 사내는 철저한 개인주의로 무장되어있다.이 두 사람에 비해서 삼십대 외판원인 사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얘기하면서 자신의 고뇌와 비애를 공유할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나’ 와 ‘안’ 은 받아 주지 않으며 부담스러워한다. 세 사내가 여관으로 와서도 각각 다른 방을 쓰게 되고, 또 안의 경우 외판원 사내가 자살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이를 말리지 않는 사실에서 인간적 유대가 없는 소외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보여 지는 1960년대 서울은 철저한 개인주의로 무장된 상막한 곳이다. 이에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축한 자기세계는 결국 남과의 철저한 대립과 소외를 바탕으로 하는 이기적인 세계역점을 두고 묘하는 것은 사회적 현실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세계이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내면세계는 습기 찬 지하실처럼 축축한 환멸과 번뇌가 베어있는 음습한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여기서의 아름다움이란 사실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실체라기보다는 이미 현실에서 사라지고 없는 삶의 어떤 진실을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 못 잊어 하는 한 자의식 강한 절박한 심사와 관련된 태도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 아름다움에는 그래서 방황하는 청춘의 심적 고통과 소외감이 짙게 스며있는가 하면, 또 이미 이상화된 삶에 대한 저망적인 기원이 알게 모르게 베어있다.그러나 이 세계는 대부분 곧 잊혀져야 할 몰락하는 존재로 그려지기 일쑤다. 즉 무의미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한 자각된 개인의 세계가 현실과 싸워 스스로를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 세계를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 엷은 주관성이 다만 자기 자신 안에 제한된 채 스스로를 지탱해 나가다가 천천히, 그러나 끝내 현실에서 소멸되는 것으로 그려 나간다. 독자들이 그들 개인의 세계가 발하는 분위기에 접하면서 강한 동참의식과 투쟁의지를 불태우기보다 한 걸음 떨어져서 그 세계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만을 갖게 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김승옥의 작품세계가 갖고 있는 일말의 아름다움은 곧 소멸할 운명에 처한 존재가 내뿜는 비장한 아름다움의 성격을 가진다. 그의 대표작인 , , 등이 모두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화려하게 개화된 한 내면적 개인의 감성과 영혼들을 만나게 되거니와, 거기서도 주로 발견되는 것은 평화롭고 안도감을 주는 서정적인 아름다움보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언제 그 주변에서 위협을 가하는 현실 앞에 무너져 내릴지 몰라하는 일련의 불안감과 위기감이다.작가 김승옥에게는 무엇보다 사회적 현실의 벽이 너무 견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그 입지가 형편없이 축소된 삶의 어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역이 한 개인을 통해 그야말로 극히 진실 된 삶에 대한 자기 나름의 고통스런 모색을 내보이면서 여리게 연명해 가는 한 미약한 내면의 존재와, 또 그 같은 내면적 개인이 무모한 현실의 시간에 휩쓸려 산산이 풍화되어 가는 비감한 생의 과정, 그 두 가지 것이 바로 김승옥이 주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주된 주제라고 할 수 있다.김승옥의 작중인물들은 바깥세계에서보다 한 개인의 내면 공간 속에서 훨씬 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갖게 되는 인물들이다. 즉 내면의 세계에서만 비로소 이들은 감가적인 탄력을 띠게 되고 또 가벼운 재치나마 놀이의식을 갖게 된다. 김승옥으로 말하면, ‘거리’보다 좁다란 방으로 구획 지어진 ‘여관’의 세계가 보다 친숙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내면세계는 그러나, 화사한 빛깔의 왕국으로서보다는 현실에서 끝내 소멸되고 말 음습한 지하실의 성격을 더욱 많이 지니고 있다. 이들 세계의 특징은 힘들여 지켜 온 자기 몫의 삶을 현실에 스스로 반납하고 환멸과 자조 속에 기존의 사회 속으로 아무 반성 없이 되돌아 걸어 들어가는 데 있다. 이들은 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숱한 고뇌와 번민을 드러냄으로 끊임없이 개인이 갖고 있는 자기 세계의 내밀함을 섬세하게 그려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에 그 감정의 깊이를 잃어버린 채 세속적 현실의 질서 속으로 몰락해 들어가게 된다.Ⅲ. 와 저자 최윤의 작품세계를 통해 보는 ‘개인’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는 1994년 문학사상 6월호에 발표되어 1994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무역회사의 직원인 타자(他者)의 시선에서 소외된 하나코를 찾아 베네치아를 여행한다는 내용으로 삶의 미로 속에 갇힌 ‘너’와 ‘나’의 관계를 익명성을 통해 격조 높게 그린 작품이다.최윤의 또 다른 작품인 에서 우리가 자신의 내면 때문에 쉽게 동화 될 수 없는 인간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면, 반대로 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타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인간사의 한 국면을 만나게 된다. 는 작가 자신의 표현대로 ‘우리 주변에서 보편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