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近代國語(1) 근대국어의 시기임진란이 지난 직후 17세기 초에서 19세기 말까지 3세기 동안.(2) 시대적 특징① 새로운 학문과 문학이 대두(상업, 수공업, 농업의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서양 문물을 점차 접하게 되는 사회적인 변화를 겪음)② 서민 문학(소설(대표적), 사설시조의 출현으로 새로운 문학어(文學語) 형성. 이때의 작품들의 표현은 지나치게 한자어에 의존한 흠이 있기는 했지만 일상어를 대담하게 도입하는 실험도 행해짐.)③ 서양 문물의 수용 : 기독교 전래. 천문, 지리, 과학 등에 대한 지식이 유입으로 사람들의 의식세계와 언어에 영향을 끼침.④ 근대국어는 중세국어에서 현대국어에 이르는 하나의 ‘과도기적 형태’.⑤ 현대국어의 제반 특징이 이 때에 드러나기 시작했으므로, 이 단계에 대한 정밀한 연구는 현대국어의 이해에 직접적으로 공헌하게 되면서 보다 진지한 연구 필요제 1절 資料근대국어의 자료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초간본(初刊本)이고 중간본(重刊本)인 경우에는 그 초간본과 비교하여 변개(變改)된 부분에 한해서 이용할 수 있다. 그 중요한 자료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⑴ 17세기 전반① 언해등창집요(諺解痘瘡集要)(1608),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1608) : 의서(醫書). 현재 발견된 임진란 이후의 최초 문헌. (서울대 규장각 소장)② 동의보감(東醫寶鑑)(25권, 1613) : 의서(醫書). 향약명(鄕藥名:우리 나라의 약초 이름)이 언문으로 표기. (규장각 소장)③ 악학궤범(樂學軌範)(1610),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1612), 훈몽자회(訓蒙字會)(1613) : 고전 중간 사업으로 간행된 중간본.④ 연병지남(練兵指南)(1권, 1612),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18권, 1617) (각각 국립도서관, 규장각 소장)⑤ 가례언해(家禮諺解)(1632),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1635) : 현재 이들의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그 중간본만 전한다. (가람문고 소장)⑥ 두시언해(杜詩諺解)(1632) : 영남 지방에서 간행된 중간본으로서, 않고 정조 연간의 중간본만 전한다. (규장각 소장)⑧ 왜어유해(倭語類解) : 간행 연대와 저자가 확실치 않으나 대략 18세기 초엽, 홍순명(洪舜明)의 작으로 추정.⑶ 18세기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1729),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1729), 경민편언해(警民編諺解)(1730), 어제내훈(御製內訓)(1736),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1797) : 언해(諺解)로서, 전대의 저작을 중간 또는 개찬한 것.② 어제상훈언해(御製常訓諺解)(1권, 1745),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5권, 1755),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2권, 1772), 속명의록언해(續明義錄諺解)(2권, 1778), 자휼전칙(字恤典則)(1권,1783), 무예도보통지언해(武藝圖譜通志諺解)(1권, 1790),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3권,1792), 동몽선습언해(童蒙先習諺解)(1권, 1797) : 새롭게 간행한 언해.③ 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1권, 1776) : 경상도 합천 해인사에서 개간, 그곳 방언 반영.④ 명의록언해(明義錄諺解)(3권, 1777) : 궁중의 특수어를 보여준다.⑤ 역어유해보(譯語類解補)(1775) : 한학서(漢學書)⑥ 개수첩해신어(改修捷解新語)(1748) : 왜학서(倭學書), 그 중간본(1781)이 간행.⑦ 청어노걸대신석(淸語老乞大新釋)(1765), 중간삼역총해(重刊三譯總解)(1774), 팔세아(八歲兒)(1777), 소아론(小兒論)(1777) : 청학서(淸學書). 숙종 30년(1704)에 간행된 팔세아(八歲兒)(1권), 소아론(小兒論)(1권), 삼역총해(三譯總解)(10권), 청어노걸대(淸語老乞大)(8권) 등은 현재 전하지 않고, 그 개간본으로 이들이 전한다. (대영 박물관 소장)⑧ 동문유해(同文類解)(2권, 1748)⑨ 한청문감(漢淸文鑑)(15권) : 한어(漢語), 청어(淸語), 국어(國語)의 사전으로 청나라 증정청문감(增訂淸文鑑)을 대본으로 한 것. 간행 연대는 영조 말년, 정조 초년 무렵으로 추정되며, 이조 청학의 최후 최대의 업적. (파리 동양어학교, 일매우 소중한 학적 업적. 사본으로 전한다.③ 규합총서(閨閤叢書)(1869), 경신록언해(敬信錄諺解)(1880), 과화존신(過化存神)(1880), 죠군령적지(?君靈蹟誌)(1881), 척아윤음(斥邪綸音)(1881), 화어유초(華語類抄)(간년 미상)⑸ 문학 작품 자료① 시조집 : 청구영언(靑丘永言)(김천택 엮음, 1728), 해동가요(海東歌謠)(김수장 엮음, 1763).② 소설 : 방대한 양의 사본이 전하는데, 대부분 19세기 자료들이며 그 중 오랜 것은 18세기에 소급. 경판본(京板本), 완판본(完板本) 등은 19세기 중엽 이후 것, 그 중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 소설들은 그 방언을 반영하는데,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도 이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③ 일기 :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순조 29-32년간), 계축일기(癸丑日記), 산성일기(山城日記) 등이 있는데, 이 중 의유당일기는 연대가 확실하고 내용이 정확하여 좋은 자료가 되며, 계축일기와 산성일기는 궁중 생활을 묘사하고 있어 그 특수어 자료로서 주목.④ 신한첩(宸翰帖) : 숙휘공주(淑徽公主)에게 보낸 효종(孝宗), 인선왕후(仁宣王后), 현종(顯宗), 명성왕후(明聖王后), 숙종(肅宗),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언간(言簡)을 모은 것. (김일근 소장)⑹ 기타 자료① 박성원(朴性源)의 화동정운통석운고(華東正韻通釋韻考)(1747), 홍계희(洪啓禧)의 삼운성휘(三韻聲彙)(1751), 정조 명찬(命撰)의 규장전운(奎章全韻)(1796) 등의 운서(韻書)와 최석정(崔錫鼎)의 경세정운(經世正韻)(1678),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1750), 황윤석(黃胤錫)의 이재유고(이齋遺藁)와 이수신편(理藪新編)(영조 연간), 유희(柳僖)의 언문지(諺文志)(1824), 정약용(丁若鏞)의 아언각비(雅言覺非)(1819) 등은 한자음과 문자체계 및 국어의 음운, 어휘에 관한 소중한 자료.② 일종의 백과사전인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1795)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헌종 연간) 등에 합류. (‘ㅇ’이 위치에 따라 상이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현대와 동일한 상태에 도달)③ ?의 소멸 : 표기상으로는 16세기까지 근근히 유지되다가 17세기에 들어서 폐용. 17세기 문헌에 간혹 ‘?’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대개 동국신속삼강행실, 중간두시언해, 노걸대언해 등 중세국어 문헌의 영향을 받은 책들에 한정되어 있다.이와 같은 변화로 17세기 문자 체계는 사실상 25자 체계.⑵ 정서법의 혼란① 어두 합용병서의 혼란첫째, 17세기에 들어 ‘ㅴ, ㅵ’ 등이 소멸의 운명을 걷게 된다. ‘ㅴ’의 이체(異體)로서 15, 16세기에 이미 ‘?’가 나타남에 이어 17세기 초에 ‘?’가 등장하여 공존 상태를 형성하고, 같은 때에 ‘?’도 ‘ㅵ’의 이체로서 등장. 그 예로 ‘?뎌(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3.43), ?디니라(同 4.29), ?디니라(同 2.84), ?려(同 충신도 1.46), ?리오고(同 효자도 8.8), ?려(同 6.44), ?(동국신속삼강행실 충신도 1.78), ?(同 효자도 1.34)’ 등이 보인다.둘째, 동일한 된소리에 서로 다른 두 가지 표기가 자의적으로 선택되는, ‘?, ?’, ‘?, ㅆ’ 표기의 혼동이 보인다. ‘?(意)’이 ‘?’(중간두시언해 3.49, 7.11, 7.24 등)으로 나타난 예들을 제외하면, 그것은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이다. 그 예로 ?나셔(첩해신어 5.3), ?나셔(同 5.11), ?, 쑥(艾, 박통사언해 上 35), ?고(使, 同 下 28), 씀이(同 中 2) 등이 있으며, 이 혼동은 18세기에 이르러 극심해진다. 여기에 각자병서가 일부 부활되어 사용된 ?여(挺,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3.9), 빼여(同 열녀도), ?리(권념요록 6), ?리(중간두시언해 4.15) 등의 예가 있으므로, 사실상 된소리는 세 가지 표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된소리 표기는 19세기에 들어와서 ‘?, ?, ?, ?’ 등의 예처럼 모두 된시옷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그러나 ‘ㅅ’의 된소리는 ‘ㅆ’이 아니라 ‘?’, 흘너(流) 등의 예가 나타난다.모음 사이의 된소리 또는 유기음을 표기하는데 있어서 깃?(悅,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6.27), 무릅피(언해두창집요 上 35), 곧?(同 下 49), 곳츨(박통사언해 中 43), 븍녁킈(노걸대언해 上 15) 등의 경향이 나타난다.근대의 정서법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표음적인 방향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중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 정도 그 전통을 유지하는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그 나름의 표음적이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리고 체언과 조사를 분리하여 표기하려는 의식이 뚜렷하다. 그 예가 박통사언해, 명의록언해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덧붙여 동사에 있어서도 어간과 어미를 분리하여 표기하려는 의식이 뚜렷하지는 않으나 간혹 드러남이 보인다.제 3절 音韻⑴ 자음 체계의 변화① ‘ㅎ’의 된소리가 ‘ㅋ’에 합류17세기 문헌에 ‘?’의 표기 사실로 미루어 17세기에 ‘ㅎ’의 된소리가 존재. 15세기 ‘?-(引)’에서 17세기 ‘?-’를 거쳐 17세기 후반에 ‘켜-’로 합류된 것으로 추정. 그 예로 ‘여러 모시븨 살 나그내 켜오라(引將幾箇買毛施布的客人來)(노걸대언해 下 53)’가 보인다.② ‘ㄹㅇ’이 ‘ㄹ’형으로 일반화16세기에 ‘ㅇ’은 ‘ㄹㅇ’에 남아 있었으나, 그 말기에는 동사의 활용형에서 ‘ㄹㄹ’로 변화. 이것이 17세기에 오면 명사에서도 ‘ㄹㄹ’로 변한다. 중세어의 ‘놀애(歌)’는 ‘놀내’(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6.27), ‘놀래’(첩해신어 6.8, 9.6 등)로, ‘몰애(沙)’는 ‘몰래’(가례언해 7.23, 중간두시언해 3.54, 6.25)로 표기되었고, ‘노?(獐)’의 속격형 ‘놀?’가 ‘놀릐 고기’(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7.4), ‘놀? 고기’(역어유해 上 50), ‘놀?삿기’(同 下 39)로 표기. 그러나 한편 ‘노래’(박통사언해 上 26), ‘모래’(가례언해 7.24, 왜어유해 上 8) 등도 보인다. 이로 미루어 ‘ㄹㅇ’은 ‘ㄹㄹ’과 ‘ㄹ’의 두 갈래로 발달하다가 18세기에 와서 ‘ㄹ’형으로
10.1 서론근본생태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최근에는 주로 네스와 드볼, 세션즈의 저작에서 발전된 환경문제에 대한 접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된다. 근본생태주의는 ‘환경 안에 인간’이란 관점을 거부하고 천체주의적이고 탈인간중심적인 접근에 동조해 ‘관계적이고, 전체장적’인 관점을 취한다. 근본생태주의가 철학적 접근인 이유는 현재의 환경위기는 근본적인 철학적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그들의 신념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위기에 대한 치료책은 철학적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꿀 때만 가능하다. 드볼과 세션즈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태의식을 계발하는 것이며 인간과 식물, 동물, 지구의 통일성을 인정하는 ‘생태적, 철학적, 영성적 접근’이다. 그러나 철학적 세계관의 급진적 변화에 대한 요구는 곧바로 중대한 반론에 직면하게 되는데 근본생태주의는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용한 전략은 아마도 일반원리에 관한 ‘강령’에 우선 합의하는 것이다.10.2 근본생태주의의 강령근본생태주의자들은 현재의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현재의 위기에 책임 있는 지배적인 세계관을 대신해 대안적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하며 특히 네스는 그런 문제를 다루고 대안적 세계관을 모색하는 분야를 생태철학으로 그리고 그 중의 특정 움직임을 생태지혜라 불렀다. 근본생태주의자들의 의도와 취하는 형태가 다양하다는 점을 감안해 네스와 세션즈는 강령을 그들이 가진 공동의 원리로 이해하고 발전시켰다.강령1. 인간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번성은 본질적 가치를 지닌다. 생명체의 가치는 협의의 인간의 목적에서 나오는 유용성과 무관하다. ▶ 자연 보존의 원칙2. 생명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은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인간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삶이 번성하는 데 이바지 한다. ▶ 생물 다양성 보존의 원칙3. 인간은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명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축소시킬 권리가 없다.4. 현재 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은 과도하며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5. 인간의 삶과 문화의 번성은 인구의 근본적인 축소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연계의 반영도 인구 축소를 필요로 한다. ▶ 무간섭 원칙6. 더 나은 삶의 조건의 중요한 변화는 정치적 변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정치적 변혁을 통해 기본적인 경제적, 기술적,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7. 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생활수준의 향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다. 큰 것과 위대한 것의 차이에 대한 심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8. 이점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변화를 위해 각자에게 요구되는 행동을 할 의무가 있다.이들 원리들은 실제 환경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구체적 주장을 설명하고 지지한다. 또한 강령은 생태학이 근본생태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준다는 점도 중요하다. 생태학은 비환원주의,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뒷받침한다는 의미에서 생태철학에 중요하다.10.3 생태학과 생태철학근본생태주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생태학에 의존한다. 생태학은 자연 생태계에 대한 이해의 기반인 동시에 여러 평가와 추천이 이루어지는 기반이다. 따라서 생태학은 철학에 많은 공헌을 한다. 생태학적 이해는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에 생태학에 기반한 윤리학은 새로운 가치 평가와 처방을 내릴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네스는 생태학에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생태학을 궁극적 과학이하고 보는 입장을 네스는 생태학주의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생태학주의는 두 가지의 서로 관련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는 생태학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관으로 볼 위험인데 이것은 마치 생태학이 모든 환경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볼 때 발생한다. 두 번째는 우리가 개별 문제에 개한 해결책을 생태학에 과도하게 의존할 때 발생한, 환경문제에 대한 신속한 기술적 처방을 바라는 피상적 희망으로 말미암아 생태학을 개별문제에 대한 과학적 답변을 제공해 주는 또 다른 과학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즉 네스는 생태과학이 단순히 하나의 피상적인 접근을 또 다른 피상적 접근으로 대체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려한다.10.4 형이상학적 생태학생태학에서 영감을 얻어 근본생태주의자들은 다양성, 전체주의, 상호의존성, 관계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생태학으로 통찰하는 대안적 세계관을 추구한다. 따라서 근본생태주의는 환경위기의 뿌리를 근본적인 철학의 원이에서 찾는 입장이라고 규정된다. 근본생태주의자들은 현재의 환경문제들 중 상당 부분의 원인이 근대 산업사회의 지배적인 철학에 전제되어 있는 형이상학에 있다고 본다. 근대 산업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배적인 형이상학은 기본적으로 ‘개체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이다. 지배적인 세계관은 인간을 자연의 나머지 부분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며 ‘형이상학적 전제주의’를 거부한다. 지배적인 세계관에 대한 거부가 근본생태주의의 형이상학에서 핵심이고 근본생태주의의 형이상학은 개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관점(자연 안의 이간)을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형이상학적 전체주의를 신봉한다. 그것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주변 환경의 일부이지 그것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관계적, 전체-장적 이미지’에 대한 네스의 주장에서 보듯이 그는 우리 인간이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고 본다. 인간을 사회적,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개체로 환원시키는 철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근본생태주의자들은 개체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인간의 본성은 자연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인간을 개체로 보는 관점은 지배적안 세계관이 인간을 보는 관점이고 이것은 실재에 대한 왜곡으로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형이상학이다. 근본생태주의의 내용은 철학과 관련되며 확실히 서양철학의 주류로부터의 급진적 일탈이다. 개별 유기체가 다른 실체와의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형이상학적 결론은 생태학은 ‘제안하고, 고치하며, 강화한다’. 끝으로 ‘개체주의’의 개념을 살펴봄으로써 형이상학적 생태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경험을 특정 방식으로 결정하는 형이상학 또는 세계관을 채택한다. 그러나 개체인간은 더 큰 개체의 부분이거나 더 작은 개체의 집합체로 볼 수 있다. 이것의 의미는 세계는 개체와 전체 같은 범주로 처음부터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본생태주의에 따르면 지배적인 세계관은 개체와 주위환경의 인위적 구분을 전제한다. 이 형이상학은 그것이 환경 파괴를 결과함으로써 위험한 것임이 판명되었다. 생태학에 의해 고취된 대안적 형이상학을 통해 우리는 환경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10.5서양의 철학적 전통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구분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구분이다. 근본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구분이 자연을 이해하고 가치를 평가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객관적인 기술은 합리적이고 참일 수 있지만 주관적인 판단은 그럴 수 없다. 이러한 구분을 정교화 하기 위해 17세기 철학자들은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한다. 제 1성질은 대상 안에 존재하는 성질로 대상을 참되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제 2성질은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제 3성질에 대한 판단은 자연물에 대한 한층 더 복잡한 기술로, 제 2성질에 대한 기술보다 덜 객관적이고 덜 참되다. 근본생태주의자들은 인간 주체가 본질적으로 자연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주관과 객관 실재적인 것과 지각된 것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의 근거는 취약해진다. 이런 점에서 지배적인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종종 환경론자를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감상주의자로 취급한다. 지배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그러한 입장은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 생태철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환경에 대한 판단이 참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조건을 규명 하는 것이며 이 문제는 네스의 접근 관계적 속성과 게스탈트의 개념과 관련해 설명할 수 있다. 근본생태주의의 개념, 규범, 가치, 형이상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언어를 통해 근본생태주의의 이념을 설명하고 설득시킬 수는 없다. 근본생태주의의 인식론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고무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와 관련된다.10.6 자아실현과 생명중심적 평등추상적, 철학적 수준에서 근본생태주의의 가장 궁극적인 규범은 자아실현과 생명중심적 평등의 원리이다. 자아실현은 자기를 자연과의 상호연관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자기반성을 통해 사소하고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이익을 넘어 더 깊고, 더 핵심적이고, 지속적인 이익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자아실현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피상적 이익과 근본적 이익을 구분해야 한다. 필요, 이익, 욕구에 대한 구분을 하자면 필요는 생존에 필요한 요소라고 이해하면 되고, 이익은 복지에 이바지 하는 요소이며 욕구는 직접적인 욕망이요 원하는 목표이다. 필요, 이익, 욕구는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으며 충돌하는 부분도 있다. 많은 철학적 전통은 이러한 구분에 기초해 윤리를 설명한다. 다양한 윤리적 전통에 따르면 일시적인 욕구와 이성적 존재로서의 근본적인 이익은 서로 다른 것이다. 좋은 삶은 근본적이고 참된 이익을 추구하는 삶이다. 결국 참된 자기이익이 인간의 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들에서는 두 개의 자아를 구분한다. 하나는 자기의 의식적인 신념, 용구, 내용들로 구성되는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자아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참된 본성이다. 자아실현은 근본생태주의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담당한다. 근본생태주의에 있어서 배후의 큰 자아는 자연과 함께 있는 자아이다. 큰 자아는 형이상학적 전체주의에서 말하는 자아이며, 큰 자아실현은 자기를 더 큰 전체의 일부로 인식하는 자기반성 과정이다. 큰 자아실현은 자연과 나의 하나 됨을 인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제 5장도덕교육의 도덕철학적·교육학적 기초1.소크라테스·플라톤 : 선에 대한 참 지식으로서의 덕 계발을 위한 도덕교육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바로 이러한 도덕적 무지와 혼란에 빠져 있던 당시의 사회 상황에서 무엇이 선과 진리에 대한 참된 지식인지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개개인이 자기실현을 이루고 사회적으로는 바람직한 정치적·도덕적 삶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열망하고 욕구한다는 사실 그 자체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사람이 원하고 바라는 바가 곧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선과 가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옳고 진정한 이익인지는 그의 주관적 욕구와 열망에 비추어서 결정될 일이 아니라 그것을 진정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성 또는 영혼의 지적 부분의 활동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성적 숙고에 의해 그의 삶의 진정한 선과 가치를 아는 참된 지식이며 이를 획득할 때 덕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덕은 무엇이 선인지를 무조건 믿게 하거나 무작정 강요 또는 주입하는 것으로는 가르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선을 알 수 있는 내면의 싹으로서의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 바로 이를 일깨워 선에 관한 참 지식을 사람의 내부로부터 깨달음을 통해 이끌어 냄으로써 가르쳐 질 수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덕은 선에 관한 지식이요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 바 이는 비판적 지성과 이성적 숙고 그리고 이치와 증거에 입각한 탐구를 통해 선에 관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가르쳐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렇듯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선은 우리의 경험과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높은 수준의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으며 덕은 바로 그러한 선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 구성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플라톤에우리는 도덕적 덕이란 인간의 도덕생활을 잘하게 하는 탁월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는 기쁨, 슬픔, 쾌락, 고통, 열망 등 인간의 감정, 정서, 욕구가 작용하는 부분에 도덕적 덕을 위치 시켰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도덕적 덕은 먼저 인간의 감정, 정서, 욕구를 적절히 다스리는 일과 관련 맺으면서 나타나는 바 그것은 과부족이 없는 중용을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도덕적 덕은 중용을 잘 실천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덕은 그것에 대응하는 활동에 의해 생긴다고 역설하면서 따라서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어떤 습관을 들이느냐 하는 덧은 아주 큰 차이를 가져오는 매우 중대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은 쾌락과 고통에 관하여 최선의 행위를 지향하는 것이요 그런 만큼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에 기쁨을 느끼고 마땅히 괴로워해야 할 일에 괴로워 할 줄 알아야 하며 또 그렇게 되도록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아야 하는 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올바른 교육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도덕적 덕은 도덕생활과 관련하여 인간의 이성적 부분과 감정 욕구의 정의적 부분 그리고 행동 부분을 통합적으로 성숙시켜 갈 때 비로소 얻어 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공동체의 삶에 현명하고도 책임있게 참여하는 가운데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현과 공동체의 복지 실현에 기여하는 그러한 정치적·도덕적 존재를 길러내는 것이었다.3. 칸트 : 자율적 도덕인의 육성을 위한 도덕교육칸트의 의무론적 도덕철학은 공리주의와 함께 근대 규범윤리학의 양대 지주를 이루면서 오늘날의 다양한 윤리사상의 발전에 기초하고 있다. 그에 있어 어떤 행위가 선하고 옳은 지의 여부는 그것이 타당한 도덕법칙에 일치하는가에 따라 여부가 결정된다. 나아가 칸트에게 있어 이러한 도덕법칙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의무로 간주된다. 타당한 도덕법칙으학교에서는 학교집단이 가지고 있는 강제적 성격 연령과 지역에 있어서의 성원의 동질성 그리고 교육적 작용의 합리성으로 말미암아 가정이나 시민사회가 가질 수 없는 독특한 도덕교육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도덕규범을 몸에 배게 하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존재의 규칙성에 대한 선호이며 다른 하나는 욕구의 절제와 극기이다. 반면에 아동들에게는 규범을 몸에 배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본적이고도 선천적인 요소들이 또한 존재한다. 그 하나는 습관의 피조물로 형성될 수 있는 특성이며 다른 하나는 암시를 수용할 수 있는 성향 특히 명령적 암시에 대한 개방성이다. 그러면 이러한 통로를 이용함에 있어 방법적 원리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 뒤르껭은 교사의 정당한 권위와 애정 그리고 벌과 보상의 적절한 사용을 제안하고 있다. 교사의 권위는 학생들이 습득하여야 할 도덕 행위의 규칙성과 자기규제의 근원이 된다. 아동들의 습관 지향성과 암시에의 수용성이라는 통로를 매개함에 있어 사용될 또 다른 방법적 원리는 교사의 애정이다. 이 애정은 아동들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성장 가능성에 대한 신뢰로부터 오는 것이다. 교사의 애정은 권위가 억압으로만 작용하는 것을 막고 합리적 도덕성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방안들을 강구하도록 작용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교사의 권위와 애정은 도덕교육의 방법적 원리로서의 벌과 보상에 관한 논의로 연결된다. 권위와 애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듯이 벌과 보상 역시 같은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벌리 도덕규범의 권위를 보호하고자 하는 소극적 제재라면 보상은 그 권위를 수용하여 이를 몸에 배게 하는 보다 적극적인 조치라 할 수 있다. 학교는 바람직한 도덕적 정서와 의지를 내용으로 하는 사회집단에의 애착으로서의 도덕성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뒤르껭의 도덕교육 이론은 도덕사회화로부터 원리적 도덕성의 발달로 도덕적 행동 습관의 형성으로부터 도덕적 정서와 의지 그리고 도덕적 이성의 계발로 발전해 도덕교육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 학자다. 따라서 그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인격교육, 덕교육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프랑케나는 원리의 도덕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원리를 지향하거나 그에 따른 행위를 가능케 하는 어떠한 성향이 아울러 계발되지 않고는 그것의 발현이 어려워지고 또 단순히 그러한 원리만을 알고 행위 할 경우 그것이 이해타산 적이거나 충동적 이타심에 의거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그러한 원리에 합당한 덕과 품성 역시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프랑케나는 도덕교육이 수행하여야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으니 그것이 멕스와 메이다. 이 때 멕스는 선·악에 관한 지식을 전수하는 것 또는 어떻게 행위 해야 할지를 알게 하는 것을 과제로 하며 메이는 자라나는 우리학생들의 행위가 그 지식에 일치하여 이루어지도록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멕스에 해당하는 도덕교육을 하고자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것은 윤리가 표상하는 그 무엇을 내용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학생들이 부딪히는 상황에서 그들의 행위를 안내 지도하여 줄 어떤 원리 또는 목적들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도덕교육에서는 도덕적 지식이나 규범을 이해하고 내면화하게 하는 일 외에 도덕적 의사결정 능력을 기르도록 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지식과 지적능력의 육성이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의무의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도덕교육이 하는 일의 또 다른 하나는 의무가 충돌 내지 갈등을 일으킬 때 원리를 결정하는 능력과 그것을 수정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넷째 도덕적 방향감 또는 도덕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덕 윤리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지는 도덕교육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 학생들로 하여금 선악에 관한 지식에 일치하는 행위성향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다. 둘, 학생들에게 습득시켜야 할 덕을 멸료히 도덕적 습관, 인습적·타율적 도덕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를 고착화시킴으로써 합리적·자율적 도덕성으로의 발달을 저해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건전한 인습적·타율적 도덕성의 형성을 거쳐 합리적·자율적 도덕성으로 발전되어 가도록 하는 일에 관하여 피터스는 또한 도덕교육에 있어 내용의 학습과 형식의 학습 사이의 연계와 통합을 강조한다. 피터스는 우리가 도덕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습득시켜야 할 도덕규칙과 원리들을 이렇게 제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가르침에 있어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 내지는 방법까지도 제시하고자 하고 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한다면 도덕 규범의 합리적 이해를 통한 내면화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피터스는 도덕규칙과 원리를 습득시키는 일과 관련하여 그러한 규칙, 원리에 대한 신념화를 도모하고 이의 실질적인 실천을 담보해 내기 위한 정의적 요소로서 이른바 합리적 열정을 계발하는 일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그는 바람직한 인격 특성을 지닌 인간을 기르기 위해 계발되어야 할 덕으로서 네 가지를 들고 이를 형성시키기 위한 도덕교육을 논하고 있다. 결국 피터스의 이론에서 볼 때 도덕교육의 본질과 목적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자율성을 지닌 인격인을 육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8. 콜버그 : 도덕 단계의 발달과 자율적 도덕인으로의 성장을 위한 도덕교육먼저 콜버그의 이론이 등장한 배경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도덕성 발달 및 도덕교육에 관한 인지발달적 접근이 콜버그에 인해 본격적으로 시도되기 이전에 심리학계는 프로이트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과 스키너로 대표되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크게 융성하고 있었다. 이들 두 이론의 공통점은 도덕이란 한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행위 기준으로서의 그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따라서 문제는 그러한 도덕을 받아들여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느냐 하는 도덕 학습의 적절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도덕 및 도덕성의 본질은 무엇이며 도덕적 인간의 형성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는가? 콜버그
『현대시론 및 시교육론』알 수 없어요한용운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언뜻언뜻 보이는 푸른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1. 들어가며만해(萬海)는 승려요, 혁명가이다. 그의 시의 밑바닥을 이루는 기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승려, 곧 선사였기 때문에 불교사상에서 인도사상으로 접근되었고, 거기서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시와 그 산문 형식에까지 접근되었으며, 한편으로는 혁명가이기 때문에 독립 운동의 애국사상으로 이어져 불변의 광망(光芒)을 내뿜기에 이른다. 그의 시가 명상적·철학적·신비적 경향을 띠고, 대자연의 조화의 묘(妙)와 그 섭리를 고요한 관조로써 뛰어난 수준을 갖게 된 것은 전자의 발로요, 그의 시를 일관하는 정신적 주체로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애국 애족적인 이념이 구상화하여 나타나는데, 이것은 후자의 발로다. 이 두 가지는 구원의 세계를 동경하는 점에서 일치점을 보인다. 즉 불교적 깨달음의 염원은 조국의 구원으로, 조국 광복에의 열망은 종교적 피안(彼岸)사상으로 결합된다.만해의 『님의 침묵』을 보는 견해가 매우 다양한 이유는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인간적이며 정감있는 시들도 있고, 민족적 대아의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대국적인 시도 있으며, 불교 특유의 사상과 철학적 바탕이 짙게 깔려 있는 시들도 있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에 실린 작품들 가운데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들이면서, 민족적 대아의 정신을 고취하는 시라고만 하기도 힘든 작품들을 불교적 안목으로 바라보면 보다 선명하게 해명되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시 『님의 침묵』을 해석하는데는 불교적 입장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알 수 없어요」는 그 대표적 예에 해당된다고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다.2. 비유·상징 체계 설명라는 제목과 더불어 이 시의 화자는 먼저 노래 불리워질 대상을 고정시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되풀이되는 '누구의 ∼입니까' 라는 의문문의 반복은 이 시의 구조 전체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물음은 곧 해답이다. 사실은 '누구'라는 대상을 스스로 설명하기 위해 모든 어휘가 동원되고 있으면서, 화자는 오히려 누구의 ∼입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제목을 비롯하여 '알 수 없는 향기',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 등 알 수 없다는 얘기는 이 시에 세 번씩이나 등장하는데, 그것은 곧 이 시의 물음이 간단히 해답을 얻기 어려운 인간 본성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누구'라는 대상은 단순한 설명 논리를 벗어난 존재이다. 의문문의 대상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그리하여 한용운 시의 중심어 중의 하나인 '침묵'과 '비밀', 서술어인 '숨는다', '가린다'와 연관되고 있다. 즉, 그것은 이상적 대상의 님과 진리, 애인인 동시에 佛이며, 그것 모두를 포함하는 다의적 이념이다.실제로 한용운의 시는 비유 또는 상징적 형상을 창조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체계를 설명하지 않고는 그의 시의 본질을 밝힐 수 없다. 이런 대표적인 예로는 그의 시에 형상화된 '당신', '님'이 '조국', '부처', '연인'으로 해석된다는 견해이다. 물론 이런 해석에는 그의 삶과 관련된 문학외적인 정보가 방증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비유나 상징 체계에 한용운이 나름의 의미를 첨가하여 독자 나름의 해석체계를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타고남은 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에서처럼 '나의 가슴 = 약한 등불'이라는 비유체계에 '누구의 밤을 지키는'이라는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체계에는 바로 앞 부분의 설명인 '타고남은 재는 다시 기름이 됩니다.'도 이 체계의 해석에 깊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점들은 열린 독서의 가능성을 막고 있다고 할 수 있다.또한 그의 시를 논의하는 많은 글들은 이런 비밀을 밝혀서 이를 도식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도식화로 대표되는 구조화는 복잡한 체계를 간단하고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장점이 때문에 도입되는 것이다. 아울러 도식화는 어떤 시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획일적으로 재단할 위험도 있다. 그런데 그의 비유나 상징체계를 설명하고 있는 도식화가 그렇게 쉽게 우리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식 자체가 비유체계보다 더 어려운 시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오히려 도식화의 장점도 살리지 못하고 단점만을 부각시키고 있다.이런 점들에서 우리가 암시 받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먼저 그의 시에 나타난 비유체계를 너무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의미는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확대되고 나아가서는 인류, 우주적으로도 확대가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적인 관계를 밝힌 후에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용운 시를 읽는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무조건 민족이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의 시가 주는 의미를 확대하고 시작한다. 다음으로 한용운이 자신의 시에 밝힌 비유와 상징 체계에 대한 의미부여에 너무 매달리지 말자는 것이다. 물론 시인의 설명은 중요하다. 원칙적으로는 그런 이해와 감상이 가장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체계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요구된다. 꼭 신비평가들이 지적한 '의도의 오류'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런 한계를 극복해야만 그의 시에 대한 열린 독서가 가능 할 것이다. 아울러 너무 낯섦에 매달리지 말고 전통적인 아니면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 차원에서 비유와 상징체계를 이해하고 인간이고자 했던 한용운의 인간적인 면모에서 출발하여 그의 비범함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문화 전통에서 가장 기본적인 '임'의 의미는 '연인'이 아니었던가?3. 역설구조화자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라고 하고 있는데 재가 기름이 된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물질적으로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될 수는 없지만 가슴 속에서는 가능하다. 화자는 자연 현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부재한다고 생각했던 님이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하며 여전히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가슴은 그칠 줄 모르고 타는 것이며 화자는 님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통해 님이 부재하는 어두운 공간을 님에 대한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님의 작은 등불이 될 것을 맹세하고 있다. 일회적으로 타는 것이 아니라 타고 타도 가연성의 마음으로 극복한다는 것이며 재-죽음, 기름-삶을 암시한다. 극복의 몸부림을 통해 '재'가 되는 현실을 부정하며 새로움 극복과 생성의 힘을 보여준다. 이는 시인의 불교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며 '無'로부터 '有'로의 적극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다.또한 이 행은 이 시의 주제 행으로 님을 만나는 미래를 위해 끝없이 구도하는 화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재가 기름이 되는'은 '지칠 줄 모르고'를 끌어내고 있으며 이것은 또 '약한 등불'로 이어지는데 '약한'이란 표현은 앞의 '강함'에 대한 이질성을 나타냄으로 하여 강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병치비유의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등불은 절대적인 님의 존재에 비해, 또 님과의 이별이라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당장은 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이 나의 가슴은 끊임없이 타올라 그 등불이 언젠가는 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비추어줄 횃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님과의 이별이 보다 더 큰 만남을 위한 일시적인 형상이라는 불교적 변증법의 원리를 보게 된다. 또한 이것은 현상적으로 님원히 남아 있으므로 떠난 것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그러면 만해의 시에서 '이별'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그리고 타고 남은 재가 어떻게 기름이 될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것은, '포도주가 눈물이 되고 한밤을 지나면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된다.' 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별이 님의 존재를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세상이 온통 타락했을 때, 그 거짓된 세상을 부정함으로써만 진실을 얻을 수가 있다. 이별은 곧 위대한 부정이며 더 큰 긍정을 얻기 위한 전제이다. 그것은 염무응 교수가 지적했듯이,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고 그것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보다 더 큰 긍정에의 길을 준비하는 불교적 변증법]의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것은 이별, 즉 임의 不在가 참된 '님'의 존재를 깨닫는 계기가 된다는 이치다.4. 불교적인 내용의 신비스러움1행의 '오동잎'은 바람도 없이 떨어지는 것인 바 자기 의지로 낙하하는 죽음의 이파리로서 적극적인 죽음, 즉 재가 기름으로 화하는 순환과정을 지닌 식물적 이미지이다. 여기 나타난 죽음의 형태는 수직으로 떨어지고, 조용히, 스스로 죽는 죽음이다. 고통과 타인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병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죽는 죽음이나, 바람에 휘날려서 떨어지는 꽃잎, 즉 바람에 이리저리 산만히 떨어지는 낙하와는 다른 것이며, 깨끗하고 결연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죽음이다. 몸부림을 치거나 하는 법도 없이 오동잎의 낙하는 조용히 윤회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한다. 오동잎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소리도 없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상태의 적막감, 그 잎이 지닌 모습처럼 한용운 시의 죽음은 늘 크고, 단호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이런 죽음이 갖는 犧牲祭儀는 최초의 희생 제의를 반복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동일한 시기 및 공간을 차지한다. 오동잎(가을) - 떨어짐(죽음·겨울) - 잎의 시체(거름) - 새싹(봄) 의 순환 과정은 『님의 침묵』의 골
현대시론 및 시교육론승무(僧舞)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1. 시의 구조분석「승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중첩된 시조라고도 할 만큼 전통적 시형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시형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전통시가가 근대 자유시형으로 계승 발전했을 가능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총 8연 15행으로 된 「승무」는 형태적인 측면에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2연을 합친 첫부분과 그 나머지 연을 합친 두 번째 부분이 그것이다. 이중 첫부분은 우선 평시조 시형에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 즉 제1연이 초장에 2연이 중장·종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초장:3/6/5/4)파르라니/깍은 머리/박사 고깔에/감추오고(중장: 4/4/5/4)두볼에/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서러워라.(종장:3/5/7/4)도식적인 음수율에 의하면 위의 인용시행은 규범적 음절수에서 벗어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평시조의 도식적 음절수는 항상 지켜지는 것이 아니며 조선조의 시가에도 그 예는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용된 이 시의 첫 부분은 종장의 두 번째 귀를 제외 할 때 각장의 있을 수 있는 음절의 최대치 이내에 있다. 다만 종자의 두 번째 귀가 평시조의 평균치인 5-8음절을 벗어나 11음절로 된 것이 지적될 수 있으나 이 역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평시조를 논함에 있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태상의 특징이 각 장이 4마디로 되어있고 종장의 첫마디가 항상 3음절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장의 두 번째 마디도 규범적으로는 5음절이지만 이 역시 예외가 많아 어떤 것은 8음절로 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위에 인용된 「승무」의 첫 부분은 원칙적으로 평시조 형식을 취한 것이다.「승무」의 두 번째 부분은 분명 사설시조 형식의 변형이다. 그것은 시행의 원문과 달리 다음과 같이 배열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빈 대에/황촉불이/말 없이/녹는 밤에(초장:3/4/3/4)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는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중장)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종장:3/6/5/4)사설시조란 여러 논의가 있음에도 일반적으로 초장과 종장은 평시조에 따르되 중장은 자유롭게 길어지는 시조의 한 유형이다. 중장이 자유롭다 하지만 그 율격은 대체로 4음절이 한 마디를 두 마디의 중첩형식을 띠고 있으며 종장의 첫 귀 역시 평시조의 그것을 가능한 지키고자 한다. 특히 종장의 첫마디는 항상 3음절을 고수한다. 그 의미 단락에서 장 구분은 명확치 않으나 원칙적으로는 사설시조의 시형을 빌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자유시라고 생각해 왔던 이 시는 그 기본 틀에 있어서 평시조 시형과 사설시조 시형을 각각 하나씩 결합하여 만들어낸 우리 전통시의 변형 혹은 자유시화 된 전통시가의 셈이다.2. 시상전개의 특징「승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시상전개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춤의 연속되는 동작을 계기적으로 서술하지 못하고 몇 개의 장면만을 중첩시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선조적(linear form) 서술의 네러티브가 아닌 시는 필연적으로 공간적(spatial form) 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 경우 '춤'이라는 이 선조적, 연속적 행위의 공간화는 그 단절된 국면들을 중첩 혹은 병치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행위의 그 단절된 국면 즉 단면은 시적 형상화에 있어서 모두 유용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하나의 단면이 전체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제시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승무」에서 시인이 묘사해 보여주는 몇 개의 장면들은 그 전후 관계에 있어서 연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승무'의 전체 의미를 함축한 것 즉 지배적 인상을 지닌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순서적으로 열거하면 1춤추기 직전 무녀의 모습과 무대 정황(1,2,3연), 2본격적으로 춤을 추는 무녀의 한 모습(4연), 3춤사위가 정지된 상태의 무녀의 한 모습(5,6연), 4그리고 다시 끝마무리로 춤추는 무녀의 모습(7연), 5무대의 정황과 춤을 끝낸 직후의 모습(8연) 등이 될 것이다.둘째는 이 지배적 인상을 지닌 장면들을 무질서하게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병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뒤에서 논의될 이미지의 이원적 대립과 함께 이야말로 이 시가 감각적인 언어 묘사라는 소박한 개념의 시적 수준을 넘어서 하나의 고급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위에서 지적한 바 연속된 춤동작의 지배적 인상의 국면들은 시에서 1과2, 3과4로 서로 병치되어 있다. 그것은 1과3이 각각 행동이 정지된 상태의 무녀의 모습을, 2와4가 각각 움직이는 상태의 무녀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동시에 1과3은 신체 부위에 있어서 모두 얼굴 즉 머리에 관한 묘사인데, 2와4는 모두 손과 발의 묘사이다. 머리는 항상 하늘 혹은 정신적인 세계를 두고 상부공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손과 발은 반대로 지상 혹은 본능을 따르고 하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대립된다.3. 이원적 대립의 체계「승무」는 황촉불, 달빛으로 제시된 상상력과 먼 밤하늘의 별로 제시된 상상력이 서로 대립됨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이 지상적임 삶, 혹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망 속을 헤매다가 덧없이 소멸해 가는 중상의 삶이 있다. 그러나 후자는 초월적인 삶 또는 혹은 천상적인 삶의 세계이며 거기에서 존재는 영원성 혹은 완전성을 실현한다. 이 시가 기본적으로 불교적 상상력에 의해서 쓰여진 것을 감안한다며 우리는 이 지상적 혹은 일상적 삶의 세계를 중생의 세계, 천상적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깨달음의 세계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그런데 이 대립된 두 세계 사이에 춤추는 무녀가 위치한다. 그는 황촉불이 밝히는 가을 늦은 밤에 홀로 외롭게 승무를 추고 있다. 춤사위를 만드는 그의 손짓과 발짓은 이 지상에 있지만 다른 한편 까만 눈동자는 '살포시 먼 하늘의 한 개 별빛에 모두'운다. 이야말로 황촉불의 세계와 별의 세계, 달리 말하여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와 깨달음의 경지 혹은 색계와 무색계의 경계에 있는 존재를 묘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군다나 그가 추는 춤이 흥에 겨워서 추는 춤이 놀이춤이나 단순한 예술적 춤이 아니고 문자 그대로 '승무', 즉 구도의 염원과 보살행의 몸짓으로 나타낸 춤임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