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란 무엇인가? - 사회심리학적 접근I. 서론한국인이 핑계를 잘 댄다는 일상적 관찰 (소위 과학적 방법에 따른 검증을 거치지 않은)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李圭泰(1991)는 한국사람이 ‘辨明’보다 ‘變明’을 잘하며, 이 후자의 변명은 사후변명식 핑계 의식구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한국에 오래 거주한 불란서인 呂東贊(1987)도 ‘異邦人이 본 韓國 韓國人’이란 저서에서 『핑계없는 무덤없다』라는 속담을 그 저서의 서두 제목으로 인용하면서, 핑계를 잘대는 한국인의 습성을 전통사회의 구조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부영(1988)은 한국인 심성의 부정적 측면으로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환경 탓, 부모 탓 등)으로 돌리는 투사의 기제를 지적하였다.비록 한국인의 핑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핑계심리와 관련된 한국인의 특성으로 지적된 것으로는 책임회피가 심하다는 점(한국인 診斷, 1991), 한국인은 ‘항복했다’라는 말을 하기 싫어한다는 점(가세히 히데아키, 1989), 공동체로부터 개인이 미분화되지 않은데서 오는 개인 책임감의 결여(최재석, 1989; 김재은, 1987)등을 들 수 있다.한국인에게 있어 책임회피와 핑계심리가 발달되었다는 또 다른 간접적 심증 준거로는 한국의 속담 속에 핑계와 관련된 속담이 매우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속담사전이 아닌 속담해석의 단행본(김도환, 1978)속에 수록된 핑계관련 속담의 수가 무려 26가지나 된다는 점은 핑계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주요한 관심영역의 하나였으며, 이에 대한 인지적 쉐마도 매우 발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몇가지 속담의 예를 보면, ‘여든에 죽어도 핑계에 죽는다’, ‘門裨 거꾸로 붙이고 환장이 나무란다’, ‘처녀가 아이를 낳고도 할 말이 있다’, ‘서투른 무당이 장고만 나무란다’ 등을 찾아볼 수 있다.핑계를 대는 행동은 한국인에게서만 나타나는 행동은 아니며, 또한 한국인에게 있어 핑계가 다른 문화권보다 더욱 발달되었거나 또는 한국인의 핑계심리가 독특하다는 주장을 일단 유보해 놓진다. 여기서 다시 실재적 책임추궁 또는 예상적 책임추궁은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상대에게 침해와 같은 부적 결과가 일어났을 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침해(offend)는 상대에게 물질적, 기회적, 지위적 손실을 가져 오는 것과 같은 실질적 침해는 물론, 상대의 감정을 해치거나, 화를 나게 하거나, 비위를 건드리거나, 불쾌감을 주는 것 등과 같은 심리적 침해를 모두 포함한다.핑계가 나타나는 계열적 단계를 보면, ① 상대에 대한 책임추궁 --> ② 상대로부터의 실재적 또는 예상적 책임추궁 --> ③ 책임추궁에 대해 핑계대기 (즉 변명이나 구실대기)로 구성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핑계대는 사람의 핑계대기의 직접적인 동기는 책임부과의 회피나 감소라 할 수 있으며, 다시 책임회피 및 감소의 기저에 깔린 심리적 동기는 여러 측면에서 설명해 볼 수 있다. 우선 자신의 과실로 인한 책임추궁 상황에서 책임추궁에 대한 적절한 변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사회적, 대인관계적, 상호작용적 측면에서의 자기손실이 있거나 예상될 수 있으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양자 간의 갈등유발, 상대로 부터의 비난과 같은 對 상대간 손실은 물론 자존심의 훼손, 부적 자아관 등과 같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지와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핑계는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부정적 결과를 회피, 감소, 제거하려는 동기에서 나타난 자기방어적 변명행위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핑계의 효과는 항상 핑계대는 사람이 기대하는 방향의 긍정적 효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핑계가 상대에 의해서 핑계로 지각될 때 그것도 자기변명이나 책임회피를 위한 핑계로 지각될 때 그러한 핑계는 안댄 것만 못하거나 잘해야 본전인 핑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핑계가 기대했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화자 쪽에서 대는 핑계가 청자 쪽에서 정당한 사유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로 수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핑계가 수용되는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먼저 핑계가 정당한 사유나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로 라고 말한다. 이 밖에 ② 생물적 추동 (biological drives; 예컨대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는 식의 생물적 숙명으로 돌리기), ③ 무효화에 호소하기(appeal to defeasibility; 예컨대 자신이 하는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변명), ④ 타인의 희생양화 (scapegoating; 예컨대 어떤 서류양식이 잘못되었을 때 자신의 비서가 잘못된 양식을 주어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으므로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고 비서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변명) 등을 들고 있다.정당화(justification)와 관련해서는 여섯가지의 하위유형을 들고 있다: ① 상해의 부정(denial of injury; accounter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시인하나 그 행위가 상대에 대해 피해는 주지 않았다고 주장), ② 비난자 희생의 부정 (denial of the victim; accounter가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은 시인하나 그 피해자는 비난자가 관심을 가질만큼의 그러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 ③ 충성심에의 호소 (appeal to loyalty; 집단에 대한 충성이 자신이 위반한 규칙이나 법칙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 ④ 자기-실현(self-fulfillment; 예컨대 대마초를 피운 가수가 노래를 보다 잘하기 위해 대마초를 피웠다고 정당화하는 것), ⑤ 비난자 비난(condemnation of condemner; 남들도 자기와 같이 규칙을 어겼으므로 자기자신이 질책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 ⑥ 연민의 자기 이야기(sad tale; 자신의 불행한 과거가 자신의 과오적 행동을 낳게했다고 주장). Scott와 Lyman의 이러한 변명과 정당화에 대한 하위분류는 핑계의 유형분류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고에서의 주안점은 이러한 핑계의 분류 자체보다는 핑계의 심리학적 기제와 과정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의 논의를 생략적 원인성과 행위 의도성을 혼돈하는 경향이 있으며(Anderson, 1983), 내적 원인성 여부의 판단은 의도성 판단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결과는 내적원인이 이루어지면, 의도성 귀인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결과적으로 책망이 뒤따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지금까지 위에서 책임귀인이 핑계의 선행과정이라는 전제 하에서 책임귀인에 대한 개념과 연구결과를 일별하였다. 그러나 핑계와 책임귀인의 관계는 보다 더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책임귀인은 행위자의 행위와 행위결과에 대한 책임성 판단이다. 그 판단은 행위자가 아닌 지각자 쪽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핑계는 지각자의 책임귀인에 대해 행위자가 역으로 책임을 모면 내지 감소시키려는 의도나 동기 하에서 이루어지는 책임해소 또는 책임귀인 무효화를 위한 언어적 방어행위이다. 이때 핑계를 대는 행위는 상대방이 실제로 책임추궁을 해오는 상황 뿐만 아니라 책임추궁이 예상되거나 기대되는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또한 핑계행위는 상대방의 책임귀인 과정에 대한 정보를 실제로 접한 상태에서 뿐만 아니라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의 책임귀인을 짐작, 추정하여 그에 대응하는 핑계내용을 구성하기도 한다. 전자의 상황은 재판의 변론과정에서 실제하는 상황이라면 후자는 동료 간의 가벼운 약속 불이행에서 나타나기 쉽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에는 잘못된 책임귀인을 전제로 부적합한 책임해소 귀인식 핑계가 나타날 수도 있다.자신의 과오행위에 대한 상대의 책임귀인을 전제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핑계를 제시할 때 상대방 즉 책임귀인자가 그 핑계를 판단하게 되는 바, 그 판단의 결과는 진정하고도 적합한 사유로 판단되어 핑계자의 기대효과에 부응할 수도 있으며, 기대와는 달리 핑계가 거짓구실 또는 부적합한 구실로 지각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핑계에 대한 연구는 핑계대는 사람의 핑계행위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그 핑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의 문제 즉 핑계 청자의 핑계판단에 초점을 둘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책임귀인의 문제와되는 상황이다. 반면, 책임귀속이나 책임귀인을 부정하는 즉 책임해소적 귀인상황에서는 정보의 우세가 위와는 역관계인 상황을 말한다. 책임해소에 기여하는 외적요인 정보의 특성은 행위와 행위의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외적사건의 불가피성 정보이다. 단순히 인과귀인에서는 외적요인이 행위 및 행위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한 외적귀인이 이루어진다.그러나 책임귀인에서 이러한 관계는 항상 성립하지는 않는다. 만일 수업에 늦게 들어 온 학생이 교통이 막혀서 늦게 왔다고 말하며, 동시에, 교수는 서울의 교통이 항상 막히므로, 그 학생이 그것을 미리 알고 이를 감안해서 보다 일찍 집을 떠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 학생에 대한 책임귀인은 외적이 아닌 내적귀인으로 이루어 진다. 이는 곧 예견성의 범주에서 통제가능한 것으로 해석되며, 불가피성의 상황에 해당되지 않는것으로 지각됨을 말한다. 따라서 책임귀인의 해소 즉 핑계의 지각에서는 지각자가 행위에 작용한 외적요인에 대해 불가피성을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그 핑계는 정당한 사유로서의 적합성을 갖게된다. 여기서 불가피성의 개념은 통제불능성(uncontrollability)이나 안정성(unstability)의 개념과 동일한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통제불능성이나 불안정성이 사건의 발생전에 예기되었거나 예기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즉 예측성범주에 속하는 사건이었을 때는 그 핑계사건을 통제가능한 사건으로, 또는 더 나아가 의도된 사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Weiner일파(1987)가 제시한 좋은 변명의 이유가 갖추어야 할 네가지 요인 즉 외적원인, 불안정성원인, 통제불가원인, 비의도성원인등의 평면적 나열은 ‘좋은핑계’를 설명하는데 결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핑계의 상황맥락을 보면, 핑계대는 사람이 사전에 자신의 과오행동에 대한 작용가능한 외적원인을 미리 알고 있었느냐가 결정적인 핑계성패의 관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핑계의 적합성 판단에 관여하는 요인으로 위에서 논의된 불가피성, 비의도성, 미기대성론된다.
일본 의회의 위원회 제도 및 운영의 문제점Ⅰ. 서론최근 어느 선거에서나 나타나는 투표율의 현저한 저하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의 정치이탈, 의회이탈 경향은 두드러지고 있다.그 원인으로, 첫째 국민의 정치가에 대한 불신을 생각할 수 있다. ①선거공약이 단순히 공약으로만 끝나버리고, 그 후의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 ②당선후 당적변경이 간단히 이루어지는 등 선거 결과를 뒤집는 것 같은 사태가 태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③정권의 수립이 정책의 유사성에 의한 정당간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획득용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④의원이 당선제일주의를 취하여 선거가 의원이라는 지위를 얻기 위한, 말하자면 "취직운동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 국민간에는 정당이나 정치가에 대한 불신이 존재하고 있다. 투표해도 현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굳이 투표하러 갈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된다.두번째는 국민의 의회정치에 대한 불신이다. 이제 거품경제의 붕괴와 소자녀화·고령화 사회의 도래로 불투명·불안정 시대를 맞고 있다. 의회에는 경제의 활성화, 재정위기의 극복, 사회복지의 충실이라는 곤란한 과제에 대한 해결책의 제시가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의회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여전히 행정부로부터의 제안만을 기다리고 이에 비판을 가하는, 소극적이고 매너리즘적인 태도를 고치고자 하지 않는다. 의회는 정치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자발적이고 책임 있는 심의를 행하여 국민의 의회에 대한 불신을 제거해야 한다.정치개혁의 일환으로서 지방분권의 추진도 주장되고 있다. 정치가 국민 가까이에 있기 위해서도 지방공공단체의 권한 강화는 바람직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치능력의 향상이 필요하며, 민주적 통제기관으로서의 지방의회의 질적 개선이 불가결하다.한편, 의회에 대한 불신은 행정감시를 위한 민간 옴부즈맨 활동이나 주민투표제도의 도입 운동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의회활동을 보완하는 것으로서 평가되어야 하며, 의회로서사항별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실태는 종할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중의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의안은 중·참 양원 모두 동일한 명칭의 위원회에 부의되고 있는 것이다. 지방의회는 조례에 따라 자유로이 결정하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집행부의 部局에 맞춘 종할위원회로 되어 있다.최근에는 종합행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의회 측에도 횡할사고가 요구되고는 있으나, 위원회가 현재의 심사방식을 취하는 이상 아무리 기구를 주물러 보아도 그것은 형태를 정비하는 데 불과한 개혁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일본과 같이 행정부측의 설명과 이에 대한 질의가 위원회 심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곳에서는, 橫割방식을 취하면 장관들의 쟁탈전이 시작되어 위원회 심사가 진전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 따라서 위원회의 자주적인 심사체제의 확립이 요구되고 있다.상임위원회에 대해서는 우선 상임위원 1인당 1개의 위원회로 한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국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의원은 적어도 1개의 상임위원이 된다. 중의원에서는 의원의 정수보다도 상임위원의 총수가 많아 2개 이상의 위원회에 소속되는 의원이 생기게 된다. 참의원의 경우에는 예산, 결산, 議院운영, 징벌의 각 위원회(제2종 위원회)를 제외한 다른 13개 위원회(제1종 위원회)의 위원 총수가 의원 총수와 같으므로, 우선은 모든 의원이 이를 1개씩 맡고 제2종 위원으로서 일부 의원이 겸무의 형태로 한 사람이 1개씩 더 맡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방의회의 경우에는 모든 의원이 1개의 상임위원이 되며 겸무는 인정되지 않는다.상임위원은 그 전문성을 살리기 위하여 겸무를 하지 않는 편이 좋다. 위원회가 동시에 개회되는 경우가 있는데, 겸무를 하고 있으면 위원회 출석에 지장을 주게 될 수 밖에 없다.상임위원의 임기는 위원의 전문적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장기간 고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있다. 국회에서는 위원의 임기를 의원의 임기종료까지로 하고 있다. 지방의회의 경우에는 조례로 정하는데, 예를 들면 1년 정도의 단기간으로 하고 있 그치지 않고 그후에 위원간 토의를 거쳐 필요한 입법조치나 정부에로의 요청의결을 행하는 것도 중요하다.본회의에서의 긴급질문 규정은 위원회에는 당연히 적용할 수 없지만, 위원회 개회일에는 처음의 일정 시간을 행정부측에 대한 질문에 충당하는 것도 좋은 운영 방법이다.3. 議院(의회)운영위원회의 특수성법률상 운영위원회도 심사 및 조사를 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議院운영위원회도 의회관계 의안에 대하여 심사할 수 있고, 의회운영상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조사할 수도 있으나, 그 역할의 대부분은 의회운영에 관한 협의이며, 교섭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심사 또는 조사에 대입해 보아도 그것은 일반 위원회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의회운영에 관한 의장의 자문 등은 議院운영위원회로의 회부절차를 취하지 않으며, 그 결정에 대해서도 의장에 대하여 보고서로 제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의회운영에 관한 결정도 이에 관한 의원운영위원장의 구두보고가 본회의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애당초 의원운영위원회의 결정에 관한 법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의원운영위원회의 전신이 각 회파의 교섭회이기 때문에 그 결정에 대해서는 전원일치에 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의원운영위원회도 정규 위원회이기 때문에 다수결 원리를 적용한다. 다만, 그 결정이 각 의원이나 각 회파에 대하여 구속력을 갖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므로 결국 일종의 신사협정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발언 등에 대해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면 의장은 이에 의거하여 발언 등을 허가하는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법규에 따라 본회의의 결정을 요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운영위 결정의 구속력에 대하여 규칙에 명기할 것이 요구된다.정·부의장의 운영위 출석에 관해서는, 의장의 위원회 출석권은 국회법, 자치법에 규정이 있으므로 문제가 없으나, 부의장에 대해서는 의장의 대행 이외의 규정이 없으므로 위원외 의원의 발언제도를 활용하여 이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의회운영에 . 참의원의 위원회 先例集에는 "위원회 개회후 일시 정족수가 부족할 경우에도 질의를 계속한 위원회가 많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국회법 위반이다. 이와 같은 경우는 사실상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위원으로부터 정족수 부족에 대한 지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루어진 것이지, 이의가 있는데도 先例集에 기재되어 있음을 이유로 그대로 회의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의사정족수의 감소 문제는 법 개정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또한 정족수를 계산하는 경우에 분모가 되는 위원 수에 대해서 본회의의 경우에는 정족수를 항상 일정하게 함으로써 결원의원을 포함한 의원정수로 하고 있는데 비하여, 위원회의 경우는 현재 존재하는 위원의 實數로 하고 있다. 實數主義가 더욱 합리적이고, 위원이 몇 안되는 위원회의 경우 위원의 파악도 쉽기 때문이다.4. 위원회에서의 발언위원회에서의 발언에 대해서는 국회의 규칙에나 지방의회의 규칙에 "위원은 의제에 관하여 자유로이 질의하고 의견을 진술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형식적인 본회의의 발언과 대비하여 규정된 것인데, 이 규정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첫째는, 위원회에서는 본회의와 같은 발언통고제도나 발언회수, 발언시간의 제한 등을 두지 않고 위원의 발언요구가 있으면 자유로이 발언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심사시간에 한정이 없는 것이나 회파간의 발언기회의 공평성을 확보한다는 관점에서 국회에서는 발언의 할당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규칙상으로도 위원회 결정에 의한 발언시간 제한이나 질의·토론 종료동의의 제출이 인정되고 있다. 발언통고제도는 대부분의 위원회에서 두고 있으나, 답변준비의 필요성도 있어 사실상 발언희망자의 사전 제시가 이루어지고 있다.둘째는, 위원회에서는 질의, 토론과 같은 단계 분류는 하지 않고, 의제에 대하여 자유로이 발언하게 하고 발언이 끝나면 의결하는 방법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질의와 토론을 분리시켜 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셋째는, 질의와 토론 단계를 분류할 경우에 질의단계에서도 은 매우 많아 모든 의안을 본회의에서 심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위원회에 제1차적인 취사선택권을 부여하여 필요한 것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수정하여 통합한 다음 본회의에 송부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영국 의회는 독회제를 채택하여 본회의 심의에서 통과되는 의안만 위원회에 송부하게 되어 있으므로 위원회에는 의안의 폐기권이 없다.일본의 경우 국회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의안은 본회의 심의에 앞서 위원회에 회부되도록 되어 있고, 지방의회의 경우도 위원회 회부 전에 본회의 심의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거기서는 취지설명과 질의만 이루어지고 제1차 의결은 하지 않으므로, 국회나 지방의회 모두 미국적 사고방식을 일부만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의안의 건수는 그다지 많지 않으며 의안의 최종적인 생사여탈권은 본회의가 가져야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위원회에는 최종적인 결정권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국회의 위원회에서 필요 없다고 인정된 의안에 대하여 본회의에 부의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는 의결권이 부여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원 20인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반드시 본회의에 부의하도록 되어 있다. 한편 위원회가 심사를 진행시키지 않아 회기중 의결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폐기의안이 되어 버리는데, 그러한 경우 국회에서는 본회의의 의결을 거쳐 위원장의 중간보고를 요구한 후 위원회의 심사에 기한을 정한다거나 곧바로 본회의에 부의하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지방의회의 경우에는 안건의 위원회 심사중 언제라도 위원회 심사의 기한을 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위원회 회부사건에 대해서는 본회의가 결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3. 위원회의 중간보고본회의는 위원회에서 심사 중인 안건이 현재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위원장의 중간보고를 요구할 수 있다. 국회의 경우 위원회에서 여야 대립으로 심사가 진전을 보지 못하는 의안을 본회의에 부의하는 수단으로서 이 제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중의원에서 장기이식법안을 심의하던 경우와 같이 위원회에서 의결을 하고 싶지 않을 경우.
日帝下 刑事法制의 歪曲과 그 遺産의 淸算問題Ⅰ.序論조선조 사회의 전통적 모습이 일제에 의해 단절되면서 그들이 만들 새로운 제도, 새로운 의식, 새로운 정신으로 조선을 개편하게 된다. 민족정기를 고수하려는 우리 민족의 노력이 강할수록 일제는 더욱 강한 탄압과 간교한 술책으로 조선통치를 효율적으로 해 가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우선 민법과 형법이 조선민사령과 조선형사령으로 되어 制令제7호와 제11호로 조선에 있어 일반법으로 위치하게 되었으나 친족·상속법 부분만은 조선 고유의 관습에 위임하는 술책을 보였다. 그러나 관습의 발견과 기록과정과 구체적 사건의 판결을 통해 관제관습을 창출하는 고도의 통치술을 발휘하여 우리는 관습법을 얻게 되는 무지의 행운을 안게도 되었다. 판례를 통해 선언된 관습법(조선고등법원 判例)은 현재도 대한민국의 법원으로 살아 있는 만큼 광복 이후 계속된 우리의 각성결여와 정치적 혼돈은 그러한 관습법을 수정할 기회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일제는 우리와 교섭을 맺은 이후로 지속적으로 우리의 전통사회의 모든 요소를 부정 또는 와해시키면서 정체적 사회를 근대화된 사회로 변화시켜 간다는 허명 아래, 일제의 이익을 위하여 조선을 기만적으로 근대화하였다. 특히 法의 영역에 있어서는 우리의 전통법 체계를 식민지배강화의 점진적 진행에 맞추어 필요법들을 수시로 제정·공포케 한 후, 1910년부터는 이러한 제정·공포권 마저 공식적으로 조선총독의 이름으로 주관하게 되는 체제와 형식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와 함께 1895년 3월 25일에 법률 제1호로 법관양성소법을 제정·공포한 이래 사법교육과 사법체제를 근대적으로 정비해 가면서 조선인들을 보다 법에 밀착시키는 정치과정을 형성해 간다. 이는 결국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변화케 하는 것이며 궁극에는 내선일체의 허구적 동화 아래 조선인을 열등과 착취의 수탈대상으로 삼아 어떠한 필요에도 사용하고 동원케 할 기본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조작하고 편성한 것이다.결국 점진적이면서도 지극히 교묘한 술책으로 지속해 온의 면과 소송절차에 중점이 두어졌다. 강제수사의 측면에서는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에게 예심판사에 준하는 정도의 독자적 강제처분권한을 부여한 점, 피의자에 대한 구속기간을 보다 연장하거나 사실상 무제한의 구속이 가능하게 한 점이 특징적으로 보여진다.1922년 일본의 독일법의 영향하에 종래의 프랑스 治罪法을 모본으로 한 명치형사소송법을 전면개정하였다. 이것이 소위 大正刑事訴訟法이다. 대정형사소송법의 개정에 즈음하여 같은 해 제령 14호로서 조선형사령을 개정하였고, 1924년부터 시행되었다. 이 개정에는 대정형사소송법상의 진보적인 개정안, 그 중에서도 특히 인신구속기간 단축에 대해 除外例{) 1. 검사는 형사소송법에 규정한 경우 외 사건이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고 급속의 처분을 요 하다고 사료될 때에는 공소제기 전에 한하여 압수·수색·검증·피의자의 구인·피의자 혹은 증인의 신문·감정·통역 또는 번역 등의 처분을 할 수 있다. 또한 이 규정에 따라 검사에게 허용된 처분을 사법경착관도 할 수 있다(조선형사령 제12조).2. 구인된 피고인에 대하여 대정형사소송법은 48시간 이내에 구류장을 발부받지 못할 때에는 석 방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조선형사령에서는 사법 경찰관이 피의자를 신문한 후 다시 그에 기해 공소제기에 이르기 전 10일간에 한하여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사법 경찰관에 의한 장기구금을 가능케 하고 있다(조선형사령 제13조).3. 피고인의 구류기간에 대하여 대정형사소송법은 2개월로 하며 특히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결정으로 1개월마다 갱신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조선형사령에서 그 기간을 고쳐 2개 월을 3개월로, 1개월을 2개월마다로 연장하고 있다(조선형사령 제16조).4. 대정형사소송법상 관선변호인을 붙이는 경우는 사형·무기 또는 단기 1년 이상의 징역·금고 에 해당하는 사건에 하하여 관선변호인을 붙이도록 한다(조선형사령 제25조).5. 파사 단독으로 유죄판결을 할 때에는 증거에 관한 이유를 생략할 수 있다(조선형사령 제26조).가 전반적으로 훨씬 가중되었다. 사형, 무기와 같은 처벌조항이 가미되었다. 셋째, 처벌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결사의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새로이 마련되었다. 목적수행죄는 공산당원·비당원의 구별 없이 제재를 가하기 위해 신설된 것으로, 공산당 활동 내지 공산주의 사상과 연계되어 있는 제반 민주적 활동을 탄압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이 되었다. 치안유지법 적용에 있어서 일본 국내의 그것과의 차이점은 일본의 경우 치안 유지법이 주된 탄압입법이었지만, 식민지 조선의 경우 그 이전에 탄압법령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던 까닭에 형사사법당국의 편의에 따라 각종 법령이 두루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즉, 학생들의 시위와 결사, 격문살포, 동맹휴교 등의 행위에 대해서 치안유지법은 물론 보안법, 출판법,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건, 제령 제7호 등 거의 20여 년 간에 걸친 여러 치안탄압법령이 구사되었던 것이다. 치안유지법의 적용은 따라서 조선민중들에게 기왕의 통제법령에다 중첩된 그물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도 그렇게 활용되었다.{년대保安法騷擾法出版法新聞紙法天皇에 대한 罪政治에 관한 罪治安維持法合計*************51-6*************11,491-1,6*************2134-2*************71-1*************18526-9*************1**************************33801,626정치범 처벌상황(1920∼1929)치안유지법의 집행에 있어서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는 轉向政策의 시행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전향이란 반정부적인 과격분자였던 자가 자기비판을 행하여, 국가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치안유지법은 이러한 전향제도와 결부됨으로써, 행위에 대한 통제와 아울러 사상까지 통제하는 사상통제법으로 비약했다. 사상범에 대한 조직적인 관리와 통제를 위해 일제는 1936년 思想犯保護觀察法을 제정하였다. 이 법안의 제안이유는, 기소유예·기소유보로 석방되고, 형기종 발견해냈다. 형사사건은 일제관헌에 의해 개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죄가 많거나 관헌이 정력적으로 검거·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양당사자의 자발적 제소가 있어야 하는 민사사건에서는 일제법정에 분쟁해결을 꺼려하는 경향을 확실히 보여준다{)그라즈단제브, 225면. 원자료는 東京官報, 「拓務統計」(1938)에서 나온 것임..{한국일본일본에 대한 한국의 백분비지방법원민사사건(천)56.1429.113.1지방법원형사사건(천)44.4105.142.2죄인 수19,32850,44238.3인구(천)34,32673,11433.2 한국 및 일본의 재판수(1938년)또 하나의 측면은 이렇게 감소된 민사소송조차도 경찰력이 직접 개입한 경우가 다반사였다는 사실이다. 당사자의 자율적 제소가 보장될 경우에는 이민족의 경찰, 법정에 자발적으로 의뢰하는 경우에 대한 불신감과 적대감이 깊이 깔려 있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소송기피경향은 결국 국가 및 국가법에 대한 민중의 신뢰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3) 監獄 및 行刑事務의 특성1905년 이후 한국의 감옥사무는 사실상 일제의 통제 하에 두어졌다. 조선시대까지는 감옥은 본형을 집행하기 위한 미결수용시설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감옥의 규모는 대단히 적었다. 일제의 식민지화는 곧 한민족의 저항에 대하여 거대한 규모의 감옥을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하는 것으로 가시화되었다. 1908년 監獄官制에 따라 전국에 걸쳐 8개의 감옥을 설치하고, 1909년에 9개의 分監을 설치했다. 1910년 식민지로 된 후 조선총독부감옥관제(칙령 제366호)가 공포시행되었고, 뒤이어 1912년 조선감옥령(제령 제14호)과 조선감옥령시행규칙(총독부령 제34호)가 공포시행되었다. 조선감옥령은 일본의 감옥법에 의하되 12개조의 특칙이 부가되었으며, 이 규정은 그 후 개정되지 않았다. 1912년 工費 30만 환을 들인 경성감옥이 준공되고, 종래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다. 서대문감옥은 보통가옥사무를 집행하고, 경성감옥은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장기 두는 것도 전부 폐지하였다. 또한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선언했으며 경찰의 사법권, 특히 경찰관의 즉결처분권을 박탈함으로써 경찰사법의 시대에 종언을 고한 것도 대단히 중요한 변화의 하나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5년 11월 2일자로 법령 제21호(법률제명령의 존속)를 통해 그간 폐지된 법령을 제외하고는 일제하의 법령들은 군정의 특수명령으로 폐지될 때까지 효력이 있음을 공포했다. 다시 말해 일제시대와 대한제국의 법령들의 존속을 원칙으로 확인한 것이다.일제하에서 사법권은 행정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었던 데 반해 미군정기부터 법원행정이 대법원으로 이관되었고 삼권분립의 원칙이 정립되게 되었다. 한편 법원의 일부였던 검찰은 법원으로부터 독립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고, 검찰의 경찰에 대한 지휘·명령권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중앙집권화 된 식민지 사법기구는 전혀 비판받지 않은 채 온존되었으며, 사법관료들의 압도적 다수는 일제하에서 판검사를 역임한 자들로 채워졌다. 민족성보다 법기술적 자질을 선호했던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이들로 사법인사를 충원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들 사법관료의 의식구조이다. 이들 입장에서 볼 때 일본법은 조선인들에 대한 약간의 차별규정을 제외하면 문명제국의 법제의 하나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식민지법체제와의 단절이 불철저한 가운데에서도 1948년 3월 20일 미군정법령 제176호로 공포된 형사소송법의 개정 이 불법구속에 대한 인민의 자유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일제식의 인신구속절차와의 중대한 법률상의 단절이 이룩되었다. 이 법을 통해 일제하의 악법인 행정집행령과 조선형사령 제12조 내지 제16조가 폐지되었다. 영장제도의 전면적 도입, 변호인선임권과 변호인접견교통권의 보장, 구속적부심사제도 및 보석제도의 채택 등 영미식 인신보호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식민지형 수사절차에 일대 변혁을 가하였다. 무엇보다도 형장주의의 확립에 의하여 조선형사령상의 독소조항들이 완전히 삭제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형사법사에서 특기항이다.
{{{{{{目 次{Ⅰ. 序{Ⅱ. 法歪曲의 주체였던 朝鮮總督府1. 朝鮮總督府의 地位2. 總督의 權限(1) 行政에 관한 權限(2) 立法에 관한 權限(3) 司法에 관한 權限{Ⅲ.日帝下에 歪曲된 法1. 民事法上의 法歪曲(1) 序(2) 財産關係法上의 法歪曲(3) 親族相續法上의 法歪曲2. 刑事法上의 法歪曲3. 國家總動員法{Ⅳ.日帝殘滓 淸算에 관한 문제1. 해방 후 한국의 상황2. 인적면에서의 문제3. 민사법상의 폐해4. 형사법상의 폐해5. 법생활과 법의식에 있어서의 폐해{Ⅳ.結日帝時代의 法歪曲Ⅰ. 序{法制史 Report - 日帝時代의 法 歪曲·····································································1889년 「大日本帝國憲法」의 제정으로 체제를 정비한 일본은,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 등 대외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주변 아시아국가를 식민지화하며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함께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어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했다.그 중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사실상 반식민지상태로 돌입했다고 본다. 일찍이 일본은 우리의 자주와 자립을 위해서가 아닌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적인 이권을 챙기기 위한 사전적 정지작업으로 조선에 대해 개혁에 대한 압력을 하게 되고 한국은 일제를 통해 19세기 말 감옥·경찰·군대·법원 등에 대한 개혁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지화 과정은 1905년의 을사조약을 통해 절정에 이르고 결국 1910년 한국은 일본제국에 「합방」이란 이름으로 강점당했다.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지배는 일본제국 본토에 예속된 식민지로서, 현지 식민지에 일본 천황을 대신하는 최고의 권력자로서 총독에 의한 지배였다. 따라서 일본 제국의 법령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의 최고 실권자로서 조선총독이 입법권과 집행권을 직접행사하고 총독 감독하에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이 사법권을 행사했다. 법령은 조선 총제의 식민지배를 위한 중앙기구는 다른 식민지 장관의 경우와는 달리 조선총독에 대해서는, 제도상 통제가 가능한 경우에도 그것이 일반적 감독 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약한 통제에 불과한 것이었다.이리하여 자의성이 조선총독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지배기구의 특성으로서 도출된다고 볼 수 있다.2. 總督의 權限(1) 行政에 관한 權限이러한 막강한 권력을 가지는 총독은 널리 제반의 정무를 통할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제반의 정무를 통할할 권한이란 행정전반은 물론 사법 및 입법 등 모든 사항을 포함하는 전 영역에 대한 권한이었다.총독은 우선 조선에서의 최상급 행정관청으로서, 소부관리를 통독할 권한과 소할관청의 명령이나 처분 중 제규에 위배되거나 고익을 해하거나 권한을 범하는 것을 취소 또는 정지할 권한, 소속관리에 대한 포상 및 징계를 할 권한 등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총독은 이러한 방대한 권한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앙정부의 지휘나 감독에 복종하지 않았다. 우선 총독은 행정재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것은 일제의 행정재판법이 조선에서는 시행되지 않았고 그것을 대체할 제령도 제정되지 않아 총독에 대한 행정재판에 의한 통제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일본제국헌법 제61조에 따르면, 행정소송은 행정관청의 위법처분에 의한 권리침해에 관한 소송이었으며, 그것은 별도로 법률로 정한 행정재판소로 하여금 재판하게 되어 있으나, 식민지 조선에ㅐ서는 바로 그 법률인 행정재판소법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의 인민들은 행정관청의 위법처분에 의한 권리침해가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다툴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또한 조선총독은 소원에 의한 통제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소원에 관한 일반법인 일제의 소원법이 조선에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각성대신의 처분에 대하여 소원을 제기할 수 있었는데 위의 법이 시행되지 않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의 처분에 대해 소원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소원은 상급이 행정관청에 대해서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앞에서 본의 民法과 商法이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었다.위와 같은 조선에 시행하고자 하는 민법전 편찬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우선 일제는 1910년 9월부터 조선총독부 취조국을 두어 관습에 대한 조사, 한국의 토지제도, 친족제도, 조선의 통치에 참고할 구미각국의 속령지 및 식민지의 제도연구, 조선에서 제정된 중요 구법전의 역 등의 업무도 담당하는 등의 조사작업을 통해 법에 의한 식민통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한편 일제는 재산법 분야와 친족·상속법 분야에 대해 달리 취급하여 친족·상속법에 관하여는 조선 고유의 관습을 존중하여 조선의 관습에 위임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식민통치를 위한 물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기반으로서 재산관계 법률은 일본법과 동일한 체제를 유지하여 착취수단으로 활용하였으며, 가족관계 법률은 민족감정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고도의 술책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함이 더해갈수록 몇 차례에 걸친 개정을 통해 가족관계의 관습에 대한 인정범위도 축소하여 한민족의 전통과 주체성을 말살시켜 일제에 동화시켜나갔다.(2) 財産關係法上의 法歪曲우선 재산관계법과 관련하여 토지조사령에 대해 살펴보면 조선에서는 토지법제 등이 근대화되지 못한 관계로 토지소유권을 제도상으로서도 확립하는 것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이 토지를 손에 넣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1912년 토지조사령에 의해 한국의 모든 토지를 조사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법에 의하면 제 4조{) 토지조사령 제4조 : 토지의 소유자는 조선총독이 정하는 기한내에 그 주소, 씨명 또는 소유지 의 명칭과 소재지 목자번호, 사표, 지적결수를 임시 토지조사국에 신고할 것의 규정이 「신고」에 의한 토지소유권의 인정인데 그 당시의 농민은 근대법에 관한 경험도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신고를 게을리한 사람이 많아 토지조사에서는 경작자의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았고 집조권자에게 토지소유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제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왔던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소작인 또는 화전민·자상속분을 제외한 재산을 자녀전원이 균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균분상속제는 또한 강력한 법적 보장을 받았고 유언으로서도 이에 반하는 처분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제사상속 즉 가계승계에 있어서도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의 제사를 그 자손들의 남자뿐만 아니라 출가녀도 제사를 윤행하여 18세기까지의 한국가부장제는 제사·재산균분의 상속이 조화된 제도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일제는 천황제적 가족국가의 이념에 의거하여 1차적으로 자녀균분상속제를 파괴하여 여식의 상속권을 박탈하였고 상속분은 형제에 한하였다. 이는 부의 유산을 호주인 장남이 일단 상속한 후 차남 이하에게는 법적으로 분가시에 비로소 분재청구하게 되었으므로 분가동의권이 있는 호주로서의 장남이 분가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차남 이하는 그들의 상속분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사실상 호주단독상속을 인정하였다.능력에 관한 규정은 일제민법이 의용되었으므로 성년남자의 능력자의 미성년자· 금치산자· 준금치산자·처 등의 무능력자를 명백히 구별하였다. 이것은 거래행위에 관한 권리범위를 명백히 함으로써 재산상의 거래를 원활하게 함을 그 정책적인 초점이 있었다. 당시의 거래원활이란 주로 1910년대와 1920년대는 불법·무도한 토지침략을 하였지만 이때부터 법률적인 구실을 남기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무능력자인 금치산자·준금치산자·미성년자 등에 관한 친권자와 친권자의 보충인 후견인은 결국 호주의 지배 아래 있게 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조치는 앞으로의 가·호주·호적을 통한 일제식 가족제도의 침략을 위한 기초적인 포석이라고도 볼 수 있다.또한 조선고등법원은 가장 중요한 상속권이었던 제사상속권을 단지 관습상 또는 도의상 조상을 제사할 의무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여 그 법적 성격을 부정하였다. 이는 호주의 권한을 강화하여 일본의 정책을 추종한 것으로서 한국의 가족제도를 일본식 가부장제인 가독제도화하고, 나아가 절대적 천황제의 이념이 반영된 가제도의 도입을 한국 민족의 동화가 궁극의 목적이었다.더 나아가 일제는 1939년 11월외교와 군사의 기밀에 관한 문서 도화를 출판하는 것」 등을 처벌하는 것이며 이들 법률들은 실질적으로 일본인이 제정했던 것들이다.형법의 경우「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에 의하여 1912년 4월에 제령 제11호「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을 시행하여 한국인에 대한 형사사건은 조선형사령 기타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형법, 형사소송법이 원칙적으로 적용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형사령 중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본형사소송법 중의 인권보호에 관한 규정의 적용을 배제하는 차별적 특별규정을 둔 것이 적지 않았다. 즉, 1920년의 개정 때까지는 총독부경무총장이 사법경찰관으로서 범죄를 수사할 때에는 검사와 같은 직권이 부여되고 검사에게 비현행범에 대한 영장발부권을 인정하고 검사의 피고인구류기간이 일본은 3일인데 형사령에서는 20일이며 일본에서는 변호인이 피고인을 대리하여 상소할 수 있는데 형사령에서는 상소할 수 없게 하고 사형 무기 상당자 이외는 관선변호인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1년 이하의 징역 금고 또는 300원 이하의 벌금을 언도한 제1심의 판결에 대하여는 증거에 관한 이유를 생략할 수 있게 하고 일본형법보다 형이 중한 형법대전 중 모살인, 고살인, 친속살인, 강절도상해, 강절도강간, 강간 등 피고에게 불리한 규정은 계속 적용하였다.이러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존한 것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군대와 경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경찰의 광범위한 권한과 혹독한 취체는 당대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큰 악영향을 미쳤다. 위와 같은 식민지 통제법령을 통해 일제의 형사정책은 본국과 식민지민중의 저항과 세계적 환경변화에 영향 받으면서 본질적으로 수탈과 통제기능의 극대화를 위해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3. 國家總動員法만주사변이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어 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제는 인적, 물적 자원의 확보를 위해 1938년 5월 전시통제의 기본법으로서 국가총동원법 을 공포하였다.먼저 노동력의 수탈과 착취를 위해 이를 위한 전제다.
{{{{{{.한국정치론 - 의회정치의 바람직한 방향 .Ⅰ. 序오늘날 의회는 사회통합과 민주주의의 실현 및 정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제도로 인식되고 있으며, 또한 민주적 제도의 분석을 위한 중요한 경험적 준거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규모의 국민국가체제하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므로,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직접 선출한 대표를 통해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상반되는 견해들이 의회 내에서 자유롭게 토론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정치적 반대세력의 공존을 합법적으로 제도화하고있기 때문이며, 바로 여기에 의회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의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다른 어떠한 정부기구보다 중요한 제도라고 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 정치형태는 필연적으로 의회를 통해 정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지는 의회정치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우리나라도 역시 헌법상 의결기구로서 국회를 두어 의회정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의회정치는 그 길이 그다지 순탄치 많은 않았다. 국회는 군부세력에 의해 종종 그 문이 폐쇄되기도 하였고, 헌법적 권능을 박탈당한 채 통법부로서의 역할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시대가 변하고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의회정치 역시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국회는 여전히 행정부에 정책주도권을 빼앗긴 채 주변적 존재로 밀려나 있으며, 대표기능이나 사회통합기능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권위주의 시기보다 오히려 낮아졌을 뿐 아니라 국회무용론 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회는 포기되어질 수 없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그처럼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의회라 할지라도 그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그에 따라, 이하에서는 의회정치의 전반적정은 정책의제설정, 정책형성, 정책집행, 그리고 정책평가의 여러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는데 의회는 이 모든 과정에서 행정부를 비롯해서 다른 제도적 행위자와 더불어 참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반적으로 법안이나 예산안을 제안·심의·의결하는 정책형성의 단계에서 의회의 역할이 가장 강조되고 있지만 의회는 국정감사·조사, 결산심사, 대정부 질문 등의 절차를 활용하여 정책의제설정, 정책의 집행 및 평가단계에서도 중요한 활동을 한다.(3) 통합기능(갈등의 관리기능)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사회집단간의 이해대립은 불가피하며, 이는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의 본질상 의회정치과정에 필연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나게 된다. 더욱이 정당정치하에서 이러한 갈등은 정치집단(원내정당)간의 대립이라는 보다 격화된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따라서 의회가 하나의 제도로서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회 내에 반영된 갈등을 조정·통합할 수 있는 원내 갈등의 관리기능 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할 것이며, 의회는 이러한 원내 갈등의 관리 및 통합을 통해, 의회 내에 반영된 대립적 이익과 의사를 하나의 합의된 국민적 의사로 융합해내는 기능을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통합」을 달성하게 된다.(4) 행정부에 대한 감시·통제 기능현대국가가 복지국가화되어 감에 따라 행정의 역할은 중요시되고 상대적으로 의회는 그 중요성이나 권한이 뒤떨어져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권의 우위현상은 국가에 따라서는 행정부의 독주 나 행정부의 독재 로 전락하여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국정조사나 국정감사 등을 통한 의회의 행정부에 대한 감시·통제 기능은 의회제도를 정치적으로 가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척도이기도 하다.(5) 리더십 양성기능리더십 양성기능이란 의회활동을 통하여 대의민주주의 리더로서의 능력을 양성하는 기능을 말한다.Ⅲ. 한국의 의회정치에 관한 고찰1. 한국정치의 변동과 한국의회정치의 특성우리의 의회정치를(1981.4.11∼1985.4.10)에 진출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12대 총선 직전 정치규제가 해제되자 그들은 신한민주당으로 결집하였고 제12대 국회(1985.4.11∼1988.5.29)가 꾸려지고 난 후에는 원외 반체제세력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그 결과 1987년 6월항쟁으로 개헌이 되기에 이르렀다. 헌법이 개정되면서 제12대 국회는 중도에 임기가 종료되었다.ⅵ) 제6공화국 : 제6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법제적 측면에서는 국회의 자율성이 신장될 여건이 마련되었다. 헌법상,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은 철폐되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회복되었으며, 임시회의 소집을 요구할 수 있는 요건도 재적의원 1/3에서 재적의원 1/4로 환원되었다. 정기회와 임시회를 합하여 연 150일을 초과할 수 없도록 했던 종전의 회기 규정도 변경되어 연 회기일수 제한이 철폐되었다. 특히 제13대 국회(1988.5.30∼1992.5.29)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에서 여당이 처음으로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국회법이 국회의 권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면 개정되었다(제23차 개정). 예컨대 국회가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청문회와 같은 장치가 마련되었고, 유신 직후에 의장이 단독으로 행사하도록 삽입된 권한들 중 상당부분이 삭제 또는 축소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13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의 자율성이 제고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예를 들자면 1988년 7월에 대통령이 제출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4·5공화국 시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잠시, 1990년 초 여소야대로 어려움을 겪던 여당인 민정당이 민주당 공화당과 더불어 민자당으로 통합하여 거대한 원내 다수세력을 형성하게 되엇다. 제13대 국회 후반기에 여당은 행정부의 국회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전위대의 역할을 자임하였고, 국회의 제도적 자율성은 다시 훼손되었다.제14대 국회(1992.5.30∼1996.5.29)에 이루 십여년간의 통계를 보아도 제14대 37% : 92%, 제15대 40% : 81% 등으로 의원안의 가결률은 정부안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역대 국회의 법안처리실적은 뚜렷한 행정부 우위 상황을 보여준다. 민주화 이후(제13대 국회∼) 입법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대하고 의회의 입법활동이 활성화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여전히 의회는 제출법안 중 53%, 통과법안 중 33%를 점하는 데 불과하였고, 따라서, 행정부의 주도권은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이처럼 의원입법활동이 저조한 이유는 입법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의원들의 인식부족, 법치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해를 입법 을 통하기 보다는 청탁 등의 방법으로 관철시키려는 이익단체나 지역구민의 태도, 입법요구가 국회보다 정부로 향하는 현실, 정책정당·이념정당으로 자리잡지 못한 정당체계의 후진성 등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ⅱ) 법안심사절차상의 문제점법안심사의 절차를 보면, 제헌국회부터 제5대 국회까지는 의안이 제출되어 본회의에 보고되면 상임위원회에 회부되어 예비검토를 거친 다음, 본회의에서 삼독회 후 의결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제3공화국의 제6대 국회 이후 독회제도는 폐지되고, 법률안이 국회에 접수된 후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일차 심사되고 법제사법위원회의 형식심사를 거쳐 본회의가 최종적으로 심사하고 의결하게 되었다.결국, 법안의 성립 여부는 물론 그 내용은 사실상 상임위원회에서 결정되고 있는데, 상임위원회의 법률안 심사과정은, 위원회 상정→제안자 취지설명→전문위원 검토보고→대체(大體)토론→소위원회심사→축조(逐條)심사→찬반토론→표결 등의 순서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지만(국회법 제58조), 국회의 실태를 보면 충실한 심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상임위의 전문성 부족이다. 교체율 50%를 상회하는 상임위원의 빈번한 교체로 인해 의원들의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심도 있는 전문적 검토가 원칙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또한, 법안 심의의 나쁜 관행도 문였다. 예산결정과정이 다른 어떤 의정활동보다 고도의 정치적 협상능력을 요구한다고 볼 때, 의정경험이 적은 초선의원 위주의 예결위 구성은 결국 심의능력의 저하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국회 예결특위 위원 중 초선의원 비율{) 국회사무처. 『국회경과보고서 - 제15대』(2000) 『국회경과보고서 - 제14대』(1997){구분초선의원 비율전체 의원 중초선 의원 비율연도여당야당계제14대199368.9%66.6%68%43.1%199473.3%70%72%제15대199669.2%41.6%56%45.8%199773%58.3%66%4 정책집행 감독기능국정감·조사, 대정부 질문 등은 국회가 행정부의 정책집행을 감독하는 수단이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의회의 정책기능 중 정책집행 감독기능과 관련한 문제점을 살펴보겠다.ⅰ) 의회의 행정부 감독권한의 변화의회의 행정부 감독권한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페지되었던 것이 부활되거나 새로이 신설되는 등 민주화 이후 큰 변화가 있었다. 먼저 1972년 유신헌법에서 폐지되었던 국정감사권이 1987년 6공화국 헌법에서 부활되어 198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국정조사권의 경우,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80년대까지 사실상 사장되어 왔었는데, 민주화 이후 조사권 발동요건 완화(1/3에서 1/4로), 예비조사제도 도입, 불출석이나 위증에 대한 벌칙 및 고발요건 완화 등의 제도개선이 이루어졌다. 한편 1999년 도입된 특별검사제 역시 국회의 행정부 감시기능을 강화시키는 조치로 볼 수 있다. 또한 제15대 국회에서는 정부 인사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획기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는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되었다. 대정부 질문제도에 있어서도 제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발언지수 확대, 일문일답방식 및 보충질문제도의 도입 등이 이루어졌고, 정부로부터 필요한 정보수집의 수단이 되는 서면질문제도도 제11대 국회에서 부활되어 이후 활성화되고 있다.ⅱ) 의회의 행정부 감독 제도의 실태와 문제점위와 같이 제도상으로는 많은 개선이 있었으나, 그러한 의회의 행정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