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에 대한 고찰1. 묵가의 생애2.「경」「경설」「대취」「소취」6편의 시대3. 조직단체로서의 묵학도4. 공리주의의 묵자 철학5. 무엇이 인민의 큰 이익인가?6. 겸애7. 종교적 제재8. 정치적 제재1. 묵가의 생애묵자(墨子, 475?~ 396? B.C. )는 중국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전국시대부터 한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흔히 공묵(孔墨)으로 병칭했다. 다만 묵자에 대한 『사기(史記)』의 기록은 극히 간략하다. 아마 사기천이 『사기(史記)』를 저작할 당시 사상계는 이미 유가의 천하였기 때문에, 공자는 세가(世家)에 모셔졌으나 묵자는 열전에도 끼지 못한 것이다. 청말에 이르러서야 묵학 연구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고, 묵자에 관한 고증도 점차 늘었다.『사기』에 따르면 “묵적(墨翟)은 송(宋)의 대부로서 방어술에 능했고 비용절약을 주장했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도 하고 그 이후 사람이라고도 한다.” 묵자는 공자 이후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구설(舊說)은 묵자의 성은 묵(墨), 이름은 적(翟)이라고 했다. 근래에 이르러 “고대에 이른바 묵(墨)은 성씨가 아니라 학술에 대한 지칭이었다.” 고도 하고, 또 묵이란 고대 형벌의 하나로서 그 형을 받은 무리 즉 노역하는 부류였다고 한다. 묵자의 절용(節用), 단상(短喪: 복상기간의 단축), 비악(非樂: 음악 반대) 등의 견해는 모두 극단적이어서, 당시의 대부나 군자들의 생활양식과 상반되었고, 그의 생활은 검소하여 노동자와 한가지였다. 따라서 그의 학설을 추종하는 이들을 당시에 묵자(墨者)라고 일컬은 것은 형을 받은 무리로서 노역하는 부류라는 뜻일 뿐이었다.『묵자』「귀의편(貴意篇)」에 따르면, “초나라 헌혜왕(獻惠王)의 목하(穆賀)를 보내 묵자를 만나게 했는데, 묵자가 목하에게 그의 주장을 말하자, 목하는 크게 기뻐하면서도, ‘그대의 말인즉 참으로 훌륭합니다. 하지만 군왕이란 천하의 대왕이십니다. 따라서 당시의 주장은 천인들이나 하는 행위이니 채용할 수 없다고나 하시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즉 묵자약, 검소하고 각고면려한 것으로 유명했음은『논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묵자는 즐겨 우임금의 덕목을 제창했던 것이다. 따라서 묵자가 꼭 옛 것과 하를 본받았다고 말한다면 “ 어리석음이 아니라 거짓”인 것이다. 즉, 묵자의 학설은 평민의 입장에서 주제(周制)를 반대한 것이다.2. 「경」「경설」「대취」「소취」6편의 시대『묵자』 내의 「경(經)」상·하 및 「경설(經說)」상·하 등의 편은 전국시대 후기 묵학도(墨者 : 墨子의 추종자)의 저작이다. 전국시대 후기는 유학(遊學)의 풍토가 극성하여 암송 및 학습용 죽간(책)을 간다하고 암기하기 쉽도록 만들 필요가 있어서 각 학파마다 ‘경(經)’을 제작했다.『묵자』의 「대취(大取)」「소취(小取)」편 등은 모두 제목을 달고 논술한 저술체로서, 묵자 당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경」「경설」「대취」「소취」등의 편에 나오는 “견백동이(堅白同異)”, “우마비우(牛馬非牛)” 따위의 논변은 모두 나중에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처럼 논변을 좋아한 사람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측면들을 고찰할 때 이 여섯 편은 전국시대 후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3. 조직단체로서의 묵학도『묵자』의 「공수편(公輸篇)」은 말한다.공수반(公輸般)이 초나라를 위해서 운제(雲梯: 구름사다리)라는 공격용 무기를 만들었는데, 완성되자 송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묵자가 이 소식을 듣고, 공수반을 만났다. …… 공수반이 성을 공격하는 술책을 아홉 번이나 바꿔가며 시도했지만 묵자는 그때마다 여지없이 막아냈다. 공수반의 공격용 무기의 성능은 바닥이 났어도 묵자의 방어술은 여유가 있었다. …… 그리하여 묵자는 초나라 왕에게 말했다.“…… 저의 제자 금활리(禽滑釐) 등 300명은 이미 이와 같은 방어용 무기를 가지고, 송나라 성 위에서 초의 군사(적병)들을 기다라고 있습니다. 비록 저 한사람은 죽인다고 할지라도 저들을 다 멸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좋습니다. 우리가 송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겠다.”이 이야기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고, 그의 제자 300명은 송에서 성을 수비했던 것이다.「노문편(魯問篇)」은 말한다.묵자가 승작(勝綽)으로 하여금 항자우(項子牛)를 섬기게 했다. 그런데 항자우가 세 차례나 노를 침범했을 때 승작은 그때마다 추종했다. 묵자가 그 사실을 듣고 고손자(高孫子)를 통하여 퇴임시키도록 주청했다.또한 보건대 묵자의 제자들을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등의 행동을 할 때 모두 묵자의 지휘를 받았다. 제자가 벼슬에 나아간 후, 만약 섬기는 군주로 하여금 묵가의 진언을 실행하게 하지 못할 경우 스스로 사직해야 했다. 만약 제자가 벼슬에 나아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면 묵자는 해당 군주에게 “주청하여” “퇴임시키도록 했는데”, 승작의 경우가 그것이다.제자들은 벼슬로 인해서 얻은 수입은 나누어 묵학도의 소용으로 제공해야 했다. 『회남자』에 따르면 “묵자의 심복 180명은 모두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고, 칼날도 밟을 수 있었으며, 죽음 앞에서도 돌아설 줄 몰랐다.” 묵자의 제자들은 스스로 스승에게 절대 복종했음을 알 수 있다.묵학도의 수령은 “거자(鉅子: 혹은 巨子)”라고 했다. 『장자』「천하편」에 따르면 묵학도들은 “거자를 성인으로 받들어 수령으로 삼았고, 저마다 묵자의 정통 후계자일 것을 원했다. ” 묵학도의 초대 “거자”는 물론 묵자이다.『여씨춘추』에는 그 밖에 맹승, 전양자, 복돈이라는 세 사람이 더 나온다.『여씨춘추』는 말한다.묵학도의 거자 중에 복돈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진(秦)에서 살았는데 그의 아들이 살인을 했다. 진나라 혜왕(惠王)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선생은 나이도 많고 또 다른 아들도 없으시니, 과인이 이미 관리에게 죽이지 말도록 했습니다. 선생은 이런 과인의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묵학도의 법은 살인자는 죽이고, 상해를 입은 자는 형벌을 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을 살상하는 행위를 금하려는 것입니다. 무릇 사람을 살상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大義)입니다. 대왕께서 설령 사면하셔서 관리로 하여금 죽이지 말도록 하시더라도.『묵자』에는 유가를 반대한 곳이 매우 많은데, 묵가 철학은 유가 철학과 근본관념이 다르다. 유가는 “ 그 옳은 도리를 바룰 따름이지 그 이익은 꾀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힐 따름이지 그 공(성과)은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묵가는 오로지 “이익(利)”을 중시하고, 오로지 “공(功)”을 중시한다. 즉, “공(功: 성과)”과 “이(利: 이익)”는 묵가 철학의 근본 관념이다.『묵자』「비명상(非命上)」은 말한다묵자가 말했다.“모든 주장은 반드시 표준에 입각해야 한다. 주장에 표준이 없으면, 돌림판(運鈞: 돌아가는 쟁반) 위에 해시계를 올려놓은 격이어서, 시시비비와 이해득실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주장에는 반드시 세 표준이 있다.”그러면 세 표준이란 무엇인가? 묵자가 이렇게 언명했다.“첫째, 그것의 근거; 둘째, 그것의 실증성; 셋째, 그것의 응용성이다.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위로 옛 성왕의 사적(事: 과거에 경험한 역사적 교훈)에 근거해아 한다. 어디에서 실증되어야 하는가? 아래로 뭇 사람의 이목의 실제 경험에서 실증되어야 한다. 어디에 응용할 수 있어야 하는가? 정치제도에 응용하여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에 적중할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주장에는 세 표준이 있다’는 말이다.”이 세 표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셋째이다.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은 바로 묵자가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표준이다. 모든 사물은 반드시 쓸모가 있고, 주장은 반드시 행할 수 있어야만 가치가 있게 된다.5. 무엇이 인민의 큰 이익인가?모든 사물은 반드시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에 부합해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은 바로 인민의 “부(富)”와 “인구증가(庶)”를 말한다. 인민을 부유하게 하고 인구를 증가시킬 수 있는 것이면 모두 유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부 무익하거나 혹은 유해한즉, 모든 가치는 이것에 따라서 평가된다.인민의 부와 인구증가가 국가와 모든 인민의 큰 이익인 만큼, 이 이익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거나 유해한 것들은 전부 폐기 배척대열에 들어 있다. 음악과 미술은 모두 정감의 산물이고 단지 정감만 감동시킬 수 있으므로 묵자는 쓸모없다고 여겨 배척했다. 묵자의 극단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온갖 정감이란 모두 쓸모없을뿐더러 무의미한즉, 마땅히 억압하여 우리의 행위에 장애가 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기쁨, 노여움, 즐거움, 슬픔, 사랑, 미움 등은 모두 정감의 측면에 속하므로, 묵자는 “여섯 가지 병폐”로 여겨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반드시 스스로 “침묵할 때는 항상 사색하고, 말할 때는 항상 가르치고, 움직일 때는 항상 일하도록”하여, 우리의 모든 일거일동이 이지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상태 속에 있게끔 해야 한다. 이것이 묵자의 정감배제 명문(明文)이다.6. 겸애모든 호화스러운 형식과 겉치레는 국가와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아직 큰 해악은 아니다. 국가와 인민의 큰 해악은 국가나 인민들의 상호 투쟁하여 평화가 없다는 데에 있다. 이런 상호 투쟁의 원인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겸애하(兼愛下)」는 말한다.“가령 모든 사람이 남의 나라 위하기를 자기 나라 위하듯이 한다면, 누가 자기 나라를 동원하여 남의 나라를 공략하려고 하겠는가? 남의 나라를 위하는 것이 곧 자기 나라를 위하는 것인데 말이다. 남의 도읍 위하기를 자기 도읍 위하듯이 한다면, 누가 자기 도읍을 동원하여 남의 도읍을 정벌하려고 하겠는가?…… ” 그러면 각 나라와 도읍들은 서로 공벌하려고 하지 않고, 모든 사람과 가(家)들도 서로 분란을 일으켜 해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천하의 해악인가, 이익인가? 틀림없이 “천하의 이익이다.” 그러면 이러한 온갖 이익이 발생하는 근원을 한번 추적해 보자. 이 모든 이익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발생했는가? 남을 미워하고 남을 해친 데서 발생했는가? 틀림없이 “그렇지 않다” 즉 틀림없이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데서 발생했다." 분명히 말해서, 이 세상에서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차별주의(別)인가 아니면 겸애주의(兼)인가다.
鏡說(거울에 관한 이야기)이규보어떤 거사가 거울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이 마치 달빛이 자욱하게 비추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거사는 아침저녁으로 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가다듬곤 하였다. 한 나그네가 거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거울이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니 그렇지 않으면 군자가 거울을 보고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거사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고 때가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항상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거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얼굴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맑고 아른아른한 거울을 좋아하겠지만, 얼굴이 못생겨서 추한 사람은 오히려 맑은 거울을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습니다. 만일 한번 보기만 하면 반드시 깨뜨려 버리고야 말 것이니 먼지에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겉뿐이지 거울의 맑은 바탕은 속에 그냥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만난 뒤에 닦고 갈아도 늦지 않습니다. 아! 옛날에 거울을 보는 사람들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오히려 흐린 것을 취하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이를 이상하게 생각합니까?”나그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이해와 감상-이 작품에서 거사는 이 세상에는 흠과 티끌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지나치게 결백하고 청명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시대 상황에 따른 작자 자신의 처세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박절하지 않은 인간관계와 상대방의 허물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처세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이규보의 12개 說 중에는 客(나그네)이 반드시 나오고 子 = 居士 =이규보 자신을 이야기한다.-한문 원본-居士有鏡一枚 塵埃侵蝕掩掩 如月之?雲 然朝夕覽觀 似若?客貌者客見而問曰 “鏡所以鑑刑 不則君子對之 以取其淸 今吾子之鏡 ?如霧如旣 不可鑑其刑 又無所取其淸 然吾者尙炤不已 豈有理乎”
한국소설문학의 역사Ⅰ. 개화기~1910년대의 소설1. 개화기(1) 이 시기의 특징이 시기는 ‘갑오개혁(1894)’에서 한일 병합(1910)에 이르는 시기로, ‘개화기’ 또는 ‘신문학기’, ‘애국계몽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구 열강과 일본, 중국이 이 땅에서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였던 시대로, 일본이 침략의 마수를 노골적으로 뻗쳤으며, 이에 저항하는 독립, 의병운동이 전국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보수와 개화 세력의 대립이 더 심해지고, 새로이 유입되는 서구의 문화가 하나의 신문화 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갔다.이 시기의 문학은 고전 문학에서 현대 문학으로 이행하는 시기이자, 주변국과 서구 열강의 침입에 맞서 민족 문학의 사명을 다해야 했던 중요한 시기이다. 즉,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고 ,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민족 국가를 수립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여 근대 지향의 문학이 싹트고, 개화 ? 계몽과 자주 독립, 애국 등이 문학의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2) 이 시기 소설의 경향1)신소설1906년 신소설「만세보」에 연재된 이인직의 ‘혈의 누’ 등 신소설은 고전 소설에 비해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가진다. 신소설은 현실에서 소재를 취하고, 현실적 인물을 등장시켜 자주 독립, 신교육, 남녀평등 등 개화사상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또한 언문일치에 접근하고 자유로운 장면 묘사로 시작하는 등 형식상으로도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고전 소설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고전 소설에서 현대소설로 이행하는 교량 구실을 하는데 머물렀다.① 내용상 특징 : 당시의 현실적 인물이 등장하고 자주 독립, 신교육, 남녀평등, 자유 결혼, 미신 타파 등 개화사상을 소재로 취하는 내용을 주로 하였다.② 형식상 특징 : 작품의 서두가 종래의 전기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장면 묘사로 시작되고, 언문일치 문체에 접근하였으며, 역순행적 구성 또한 보인다.③ 한계 : 등장인물의 성격이 평면적이고, 사건이 우연성을 띠며, 상외국 영웅의 전기를 번역하거나 을지문덕, 이순신 등 우리나라의 민족적 영웅들의 전기를 창작하였다. 신소설의 친일적인 경향과는 달리 주체적 저항 의식을 표출하고 있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저항 문학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작품작가특징을지문덕전신채호애국심 고취를 위해 지은 을지문덕의 전기로, 을지문덕의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 그것을 바탕으로 한 고구려의 국난 극복 과정을 그린 소설.애국 부인전장지연잔 다르크의 일생을 전기화한 소설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잔 다르크의 애국심과 용맹성을 그림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함.2. 1917년 이후 -근대 소설 ‘무정’의 등장일제 총독부의 기관지만 남고 나머지 모든 신문은 강제로 폐간 당하고 소규모의 잡지만 발행되던 어려운 상황에서 최초의 근대 소설 ‘무정’이 발표되었다. 이광수의 ‘무정’은 구어체 문장을 통한 세밀한 묘사, 구체성을 띤 시공간적 배경 설정과 함께 개화와 계몽이라는 주제 의식, 근대적 인간형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Ⅱ. 1920년대 소설1. 특징3·1운동 이후 일제는 유화적인 문화 정책을 펴게 되고, 이로 인해 문학의 창작과 소통이 활발해지고 각종 문예 동인지들이 생겨나면서 한국 문학사를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1920년대의 소설은 일제 강점기 현실에서 민족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으며, 개성의 자각과 시대 현실의 어두운 면을 포착하는 사실적인 단편소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후반기에는 러시아 혁명 후 계급 사상이 도입되면서 카프가 결성되어 계급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2. 소설 경향1)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혼합20년대 초반에는 감상적이고 퇴폐적인 낭만주의 소설이 유행하였다. 한편 인간의 생태를 자연 현상으로 파악하는 자연주의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사실주의 경향의 소설도 많이 창작되었다.작품작가특징배따라기김동인운명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과 회한을 낭만적으로 유미주의적으로 형상화한 소설.감자김동인환경으로 인하여 파멸해 가는 인간상을 사실주의 기법을 소재로 삼아 결말에서 살인, 방화 등을 통해 궁핍을 초래한 현실을 부정하는 양상을 취하였다. 최서해의 소설에서 시작된 신경향파 문학은 1923년을 전후하여 전파된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면서 본격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하였다.- 신경향파 : 빈궁을 소재로 한 소설로 사회주의적 성격이 짙으나 사회주의적 이론에 기반하지 않고 있으므로 ‘신경향파’문학으로 불린다. 대표작으로 최서해의 ‘탈출기’, ‘홍염’, 주요섭의 ‘인력거꾼’ 등이 있다.- 프로 문학 : 계급 의식을 일깨우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경향 문학이다. 대표작으로는 박영희의 ‘사냥개’, 조명희의 ‘낙동강’ 등이 있다.Ⅲ. 1930년대 소설1. 특징일제가 조선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삼으려 함에 따라 억압과 수탈이 더욱 심해진 시기이다. 1931년 일제가 반체제적 성격의 조선 문학가 동맹을 해체하고 여기에 관계된 작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함으로써 현실 비판적인 소설 창작은 상당히 위축된다. 이에 따라 소설가들은 이념 지향성보다는 다른 활로를 모색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순수소설, 농촌소설, 역사소설 등이 출현하였다.2. 소설의 경향1) 도시 문명에의 관심도시적 삶과 현대 문명에 대한 소설적 접근이 이루어졌으며, 도시적 삶의 병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세태· 풍속 소설이 창작되었다. 이상의 ‘날개’,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유진오의 ‘김 강사와 T교수’ 등이 있다.2) 농촌 소설러시아에서 유행했던 ‘브나로드’ 운동의 영향을 받아 농촌을 소재로 하거나 농촌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그린 소설이 등장하였다. 계몽적 성격이 강한 심훈의 ‘상록수’, 농촌의 궁핍한 삶을 다룬 박영준의 ‘모범 경작생’ , 향토색 짙은 농촌을 그린 김유정의 ‘동백꽃’ 등이 있다.3) 역사 소설의 재조명역사에서 제재를 취하여 허구성과 통속성을 부여한 소설로,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쓰여 졌다. 이광수의 ‘마의 태자’, 현진거의 ‘무영탑’ 등이 있다.4) 한국적인 것의 추구1938년을 전후로 40년대 - 암흑기조선 문학가 동맹으로 다양하게 시도된 한국 소설계의 실험은 일제의 군국주의 체제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인해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아예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말로 된 소설은 거의 발표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주제 의식이 모호한 복고풍의 몇몇 단편만이 명맥을 유지하였다.Ⅴ. 해방이후 (1946~1949)1. 특징해방 직후 한국전쟁까지 우리 문학계는 민족 문학의 건설이라는 공동 목표를 설정하고서도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에 묶여 갈등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계급 이념 문학을 주도한 임화 중심의 ‘조선 문학가 동맹’과 민족주의 이념을 내세운 박종화, 김동리 중심의 ‘전조선 문필가 협회’ 사이의 대립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1947년 정치적 선택에 따라 ‘조선 문학가 동맹’ 작가들이 월북함으로써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후 분단의 고착화와 더불어 남과 북에 이질적인 문학사가 공존하는 원인이 되었다.2. 소설 경향1) 식민지적 삶의 극복일제 강점기를 반성하고 그 기간 동안 체험을 바탕으로 해방의 참된 의미를 모색하고자 한 작품들로 채만식의 ‘논 이야기’ 등이 있다.2) 귀향 의식과 현실적 삶의 인식해방 직후의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지식인 문제와 귀향 의식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김동리의 ‘혈거 부족’, 이무영의 ‘굉장 소전’등이 있다.3) 분단 의식의 형상화남과 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의 군정으로 인한 문제와 분단 문제를 다룬 작품들로 염상섭의 ‘삼팔선’, 채만식의 ‘역로’ 등이 있다.4) 순수소설과 역사 소설의 부각보편적인 삶을 다룬 순수 소설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소설이 창작되었다. 염상섭의 ‘임종’, ‘두 파산’ 등이 있다.5) 해방 이후의 사회적 혼란 반영해방 직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사회적 혼란을 다룬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 이태준 ‘해방 전후’는 일제 때 친일파로 행세하던 자들이 해방을 맞이하면서 겪어야 했던 당혹감을 다루거나 양심적인 문논 이야기, 민족의 죄인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풍자의 기법을 사용하여 형상화하였다.황순원목넘이 마을의 개, 독 짓는 늙은이간결한 문장을 사용하여 사물을 서정적 분위기로 표현하였으며, 해방 직후의 현실을 중도적인 입장에서 형상화였다.Ⅵ. 1950년대1. 특징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분단을 고착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남한과 북한은 각자 전쟁의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체제와 이념을 굳혀 나갔으며, 이 분단 상황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3년간에 걸친 전쟁 이후의 분단 상황은 문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전쟁 체험과 전후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서구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간 존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전후의 신세대 작가들은 전쟁의 참화에 대한 문학적 대응을 활발하게 보인 가운데, 옛 가치관이나 윤리 의식에 반발하여 현실의 밑바닥 삶을 밀도 있게 그리기도 하였다.2. 소설의 경향1) 전후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전후의 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민족 분단의 비극적 상황, 전후의 가치관 혼란 등을 형상화하였다.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학’ , 이범선의 ‘학마을 사람들’, 안수길의 ‘제3인간형’, 손창섭의 ‘비 오는 날’, 하근찬의 ‘수난이대’ 등이 있다.2) 부조리한 현실 고발과 참여개인과 시회의 갈등 문제를 다루면서 소외된 삶의 문제, 부조리한 현실 인식, 행동을 통한 현실 참여 문제를 형상화하였다. 김성한의 ‘바비도’, 전광용의 ‘꺼삐딴 리’, 선우휘의 ‘불꽃’ 등이 있다.3) 인간의 본질적 삶 추구문학의 현실 인식과 참여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삶을 형상화한 순수 소설이 창작되기도 하였다. 오영수의 ‘갯마을’ 등이 있다.작가작품특징황순원카인의 후예해방 직후 토지 개혁에 의해 지주 계층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안수길제3 인간형전쟁으로 인해 피폐해 있다.
시조1. 명칭시조는 원래 음악의 노랫말로 전승 ? 발달되어 왔기 때문에 시조를 가리키는 명칭들은 음악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즉 시조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단가, 가곡, 가요, 신성, 시절가 등이 모두 음악과 관련이 있다. 시조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전까지 시조를 지칭하는 말로 비교적 많이 사용된 것은 ‘단가’라 할 수 있다. 이 ‘단가’는 ‘장가’에 대비되는 짧은 노래를 의미한다. 오늘날 시조창을 의미하는 ‘시조’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것은 영조조 이후라고 보아지며 시조라는 창조 명칭이 문학 장르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시조부흥운동이 본격화되었던 1926년 무렵부터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시조라는 용어는 음악적으로는 ‘시조창’을 의미하고 동시에 문학적으로는 ‘4음보격 3행시’형식의 시조 장르를 지칭하는 두 가지 개념을 함께 지니고 있다.2. 갈래1) 평시조· 엇시조 · 사설시조로 나눈다.‘3행 4음보격’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작품을 평시조라 하고 평시조에서 어느 한 구가 길어진 것을 엇시조, 두 구 이상이 길어진 것을 사설시조라 한다.2) 문학적 명칭으로는 단시조(단형시조) ·장시조(장형시조)로 나눈다.‘평’, ‘엇’, ‘사설’ 이라는 말은 음악적 특징인 창법· 장단 등의 차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 문학적인 특징인 정형· 중형· 장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문학적 측면에서도 엇시조는 한 개의 독립된 갈래로 내세울 만큼 뚜렷하지 않으므로 시조의 갈래는 정형시조와 파형시조 즉 정형시조를 단시조, 파형시조를 장시조라 일컬어 두 갈래로 분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3. 기원1) 외래기원설외래기원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시의 영향을 받아 시조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시조의 3장 형식이 한시의 기·승·전·결의 구성과 동일하다는 점을 주요 논거로 삼으면서 시조의 발생을 한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시조와 한시가 유사하다는 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첫째, 한시를 시조화 할 때 기· 승· 전· 결에서 ‘전’이 일정하지 않다.둘째, 시조를 한시화 할 때 5언6구 형태가 많다.셋째, 시조의 형성을 한시와 관련지을 때 종장의 제 1음보는 감탄사의 잔형이며, 제2음조는 5음절 이상의 파격이 되어야 한다는 종장의 특이한 율성을 해명해 낼 수 없다.2) 재래기원설재래기원설은 노랫가락, 민요, 향가, 고려가요, 무가 등 여러 가지 시가 장르에서 찾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향가기원설과 고려가요기원설이다.? 향가기원설첫째, 향가가 의미상 3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진다는 점둘째, ‘3구6명’이라는 말이 시조의 형식인 ‘3장6구’와 흡사하다는 점셋째, 향가의 낙구와 시조 종장 제1음보의 감탄구가 서로 비슷하다는 점 등을 제시한다.그러나 향가의 낙구가 시조 종장 제1음보와 동일하다는 것은 시조와 향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경기체가, 악장 등 우리 시가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므로 시조가 향가에 나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고려가요기원설고려가요기원설은 고려가요의 분장이 독립하거나 고려시가가 붕괴되면서 시조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고려가요 가운데 시조형식에 가까운 등을 그 예로 들고있 다. 고려가요기원설은 시조 형식과 가까운 시 형식을 고려가요 속에서 찾아냄으로써 시조는 고려가요의 분화·발전에서 형성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4. 형성시기(발생시기)1)고려중엽 발생설고려가요와 시조가 형태적으로 많은 유사성을 가지며 가집 등과 같은 문헌에 실려 있는 고려시대의 작가를 고려할 때 시조는 고려 중엽에 형성되어 고려 말엽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식으로 고정되었다는 주장이다. 즉, 시조의 형성계층인 신흥사대부의 대두와 그 세력의 신장 그리고 주자학의 발달 등 시조는 원지배기에 형성되어 정형시조로써의 형식과 율격을 완전하게 갖춘 것은 조선 초기 라는 것이다. 이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2) 조선중엽 발생설첫째 시조집에 적힌 작가와 시대를 그대로 믿을 수 없으며, 둘째 시조라는 명칭이 고려시대의 문헌에는 발견되지 않으며, 셋째 고려말 같은 불안한 시대에는 시조와 같은 안정된 시 형식이 나타날 수 없고, 넷째 고려의 노래에는 시조의 가락이나 짜임새를 지닌 노래가 거의 없다는 점을 들어 16C에 시조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그러나 와 을 살펴보면 형식· 내용 등 모든 면에서 매우 세련된 작품이므로 이 같은 작품이 16C에 나올 수 있었다면 그 형성 시기는 훨씬 앞으로 소급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5. 장시조의 발생시기장시조는 실학사상과 산문정신을 배경으로 대두했던 평민문학의 일환으로 17C에 나타나 18C에 크게 성행한 장르라는 주장이 학계의 통설로 되어있다. 그러나 장시조는 16C 양반사대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그 근거자료로는 두곡 고응척의 작품 6수와 정철의 작품 2수등이 있다.이처럼 장시조의 형성과 발생시기에 관해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것은 장시조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작가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자료의 제한성 때문이다.6. 작가와 향유계층시조작가는 양반 사대부층이 절대 다수이다. 이는 시조가 고려말 원지배기에 신승 사대부에 의해 형성되어, 그 향유 계층이 신흥 사대부의 세력 신장과 함께 꾸준히 발달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 그 형식적 완성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조 작가층 가운데 기류 작가가 있다. 기녀들의 시조는 대체로 연회석이나 풍유장에서 지어져 음악의 창사로 그 구실을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아 전하는 시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시조 문학에 일반 여류 작가가 없고 기녀만이 유일한 여성 작가층이라는 점과 여성 특유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시조문학의 주제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점 등에서 기년 작가들이 시조의 작가층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시조문학의 향유계층은 양반 사대부계층이 중심이었고 직업의 특성상 양반 사대부의 문화를 가까이 할 수 밖에 없었던 기녀층에게 시조가 수용되면서 시조는 그 주제 영역을 확장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향유계층이 중인 가객에게까지 확대되어 시조문학의 주도권이 양반사대부에서 중인 가객층으로 넘어가고, 시조문학도 단시조는 그 세력이 약화되어 위축되는 반면 장시조는 매우 발달하여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7. 형식과 율격시조를 가장 시조답게 하는 형식적 특징은 3장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이라는 말이 음악적 용어이므로 문학적으로는 ‘행’이라 하여 시조의 형식적 특징을 ‘3행시’라 하는 것이 좋다. 시조는 ‘3행4보격’의 정형시로 규정한다.8. 내용시조문학의 향유계층은 양반 사대부 계층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 내용도 이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1) 강호가류자연속에서의 유유자적한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시조 가운데 작품수가 가장 많다.이는 사회와 당쟁이 거듭되던 16·17C에 크게 성행하였다. 강호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노래하던 강호가는 그 속에 은거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연미를 발견하고 심성을 길러서 즐기는 삶을 노래하는 강호가도로 발전하게 되었다.강호가도는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 조화 상태인 천인합일을 주로 노래하였다.강호가도는 이현보, 송순에게서 비롯되어 이화, 이이, 정철, 권호운 등이 그 뒤를 잇고 윤선도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했다.2) 오륜가류유교적 윤리덕목인 오륜을 실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백성들에게 교화하는 내용의 노래로 사대부들의 경국제신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륜가류의 특징 중 하나는 명령법을 대표적인 어법으로 삼고 있는데 오륜이라는 도덕적 당위의 내용이 명령의 어조와 결합됨으로써 백성들에게 더욱 강력한 실천을 권고하게 되는 것이다. 오륜가류의 작품은 주세붕· 송순의 를 그 시발점으로 하여 박선장 ·박인로 등이 그 뒤를 잇고 정철의 에 이르러 높은 문학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眞伊柳夢寅嘉靖)初, 松都)有名娼)眞伊者, 女中之倜?任俠)人也. 聞花潭)處士)徐敬德), 高蹈不仕, 學問)精邃, 欲試之, 束?帶, 挾大學), 往拜)曰 “妾)聞禮記)曰 「男?革, 女?絲 )」, 妻亦志學), 帶?絲而來” 先生笑而誨之, 眞伊乘夜)相?, 如摩登之?摩阿難)者累日), 而花潭終不小撓.眞伊聞金剛山)爲天下第一)名山), 欲一辦淸遊), 無可與偕, 時有李生者, 宰相)子也. 爲人)跌宕)淸?, 可共方外之遊). 從容)謂李生曰 “吾聞中原)人, 「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 況我國人, 生長)本國), 去仙山咫尺), 而不見眞面目), 可乎? 今吾偶配仙郞), 正好共做仙遊), 山衣野服), 去討幽勝而還, 不亦樂乎” 於是使李生, 止童僕)勿隨, 布衣)草笠), 親荷衣糧?, 眞伊自戴松蘿圓頂), 穿葛衫), 帶布裙, 曳芒鞋), 杖竹枝), 而隨入金剛山, 無深不到). 乞食)諸寺, 或自賣)其身, 取糧於僧, 而李生不之尤, 兩人)遠步)山林), 飢渴)困悴, 非復舊時)容顔), 行到一處, 有村儒)十餘)人, 會宴)於溪上松林), 眞伊過拜焉. 儒曰 “女舍長, 亦解飮乎?” 勸之酒, 不辭), 遂執酌而歌, 歌聲)淸越, 響震林壑), 諸儒)深異之, 飼以盃肴, 眞伊曰 “妾有一僕飢甚, 請饋餘瀝)” 呼李生, 與酒肉). 時兩家), 各失所往, 不得壽影響者, 殆歲餘), ?衣)?面而返, 隣里)見之大驚).宣傳官)李士宗善歌), 嘗出使過松都, ?鞍)天壽阮)川邊), 脫冠)加腹而臥, 高唱)數三曲, 眞伊有所如, 亦歇馬于阮, 側耳)聞之曰 “此歌調甚異, 必非尋常)村歌俚曲. 吾聞「京都)有風流客)李士宗, 當代)絶唱)」必此人也.” 使人往探之, 果士宗也. 於是移席相近, 致其?, 引至其家, 留數日), 曰“ 當與子, 六年同住)” 翌日)盡移家産)三年之資于士宗家, 其父母妻子, 仰事)俯育之費, 皆辦自自家), 親着臂?, 盡妾婦禮, 使士宗家, 不助?銖). 旣三年, 士宗餉眞伊一家, 一如眞伊餉士宗, 以報之者過三年, 眞伊曰 “業已遂約, 期滿矣” 遂辭而去, 後眞伊病且死, 謂家人)曰 “吾生時), 性好紛華), 死後)勿葬我山谷), 宜葬之大逵邊” 今松都大路邊), 有眞伊墓, 林悌)爲平安都이 뛰어났다는 말을 듣고 한 번 시험해 볼 생각이 일어났다. 그래서 선비처럼 끈으로 허리를 졸라매고《대학(大學)》을 옆에 끼고 서경덕을 찾아갔다.“첩이 듣자오니,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남자는 가죽띠를 두르고 여자는 실끈으로 띠를 한다고 합니다. 첩도 배우에 뜻이 있어 실로 띠를 두르고 찾아왔습니다.”선생은 웃고 받아들여 가르쳤다.진이는 밤만 되면 몸을 가까이 기대는 등 교태를 부리면서, 마치 옛날 마등가의 음탕한 여인이 아란을 유혹하듯 며칠을 두고 수작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서화담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다.? 진이는 천성이 놀기 좋아하는 성미이다. 금강산이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놀아 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어울려 짝될 사람을 구하던 중에 마침 장안에 이생이란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재상의 아들로서 사람이 칠칠하지 못해서 명예나 재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그래서 함께 멀리 놀이를 가도 탈이 없을 것 같았다.진이는 조용히 이생을 구슬렸다.“제가 들으니, 중국인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친히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라는데, 장차 우리나라 사람으로 이 나라에 태어나서, 그것도 신선이 산다는 금강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 구경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이제 이 몸이 우연히 선랑(仙郞)을 따르게 되었으니 같이 신선처럼 놀기에 마침 잘 되었습니다. 산과 들을 거닐 간편한 옷차림으로 그 그윽하고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온다면 또한 기쁜 일이 아닙니까?”이생이 하락하자, 사내로 하여금 일체의 시동이나 종도 따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명옷에 초립을 쓰고 양식 주머니까지도 몸소 젊어지게 하였다. 진이는 여승처럼 덩굴로 고깔을 만들어 쓰고, 몸에는 갈포로 지은 장삼, 무명 치마에 짚신, 거기에 죽장까지 들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깊은 골짜기와 절벽을 오르내리는 동안 양식도 다 떨어졌다. 이 때부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절간마다 찾아다니며 비렁뱅이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이는 절간의 중에게 둘러앉아서 주연을 베풀면서 술이 거나해 있었다. 진이가 지나치면서 그 앞에 가서 절을 하자, 선비 하나가 말을 걸어 왔다.“여사장도 술을 마실 줄 아오? 한 잔 드시오.”진이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허기진 배에 술이 들어가니 곧 취했다. 진이는 술잔을 들고 옛날의 가락을 한 곡조 읊었다. 고운 목소리 맑은 노래가 숲 속의 구석구석에 퍼져 울렸다. 모든 선비들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다투어 술을 권하고 안주를 먹여 주었다.“첩에게 하인 녀석이 하나 있는데 몹시 주린 모양이니, 청컨대 남은 음식이 있으면 먹여 주십시오.”진이는 이렇게 해서, 다시 이생을 불러 배불리 먹였다. 두 집안에서는 이들이 간 곳을 알 까닭이 없었다. 팔도에 수소문을 해 보아도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이렇게 한 해가 거의 다할 무렵, 다 떨어진 옷에 얼굴은 시꺼멓게 말라 가지고, 파리한 거지꼴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집안은 물론, 이웃에서도 크게 놀라 마지않았다.? 선전관 이사종은 노래를 잘 불렀다. 일찍이 사신으로 가는 길에 송도를 지나다가 천수원 냇가에서 말을 쉬게 되었다. 갓을 벗어서 배 위에 덮고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다가 저절로 흥이 솟구쳐 두어 가락 큰 소리를 읊었다. 때마침 진이도 그곳을 지나치면서 천수원 밖에서 말을 쉬게 하다가, 청아한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한참 동안 듣고 나더니 혼자 중얼거렸다.“이 노래 곡조가 참으로 이상하다. 보통 시골 구석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듣자 하니 서울에 이사종이라는 유명한 풍류객이 있다. 하던데, 당대의 절창이라, 아마 그 사람일게다.”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더니 과연 이사종이 틀림없었다. 진이는 자리를 옮겨 가서 이 사종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서로 자기의 심정을 이야기한 끝에 사종을 집으로 모셔 왔다. 며칠 동안 사종은 진이의 집에서 유숙했다. 하루는 진이가 말했다.“당신과는 마땅히 6년을 같이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자기 집 재산 가운데에서 3년 동안 먹고 지낼 재산들을 사종의 집으로 옮겼다. 이정성을 다하여 갚았다. 다시 3년이 흘렀다."이제 마침내 약속의 만기가 되었나 봅니다. "진이는 이렇게 말하는 미련도 없이 떠나갔다. 뒤에 진이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집안사람들을 불러 놓고 유언처럼 한 마디 했다."내 평생 성품이 분방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거든 산속에다 장사지내지 말고 큰길가에 묻어 다오. "송도의 큰길가에는 진이의 무덤이 있다.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송도를 지나는 길에 제문을 지어 진이의 묘에 바쳤다. 이 일에 해서 그는 조정의 말썽거리가 된 바 있었다.- 이해와 감상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다. 따라서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하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 정교하게 공작함)하였다고 한다.황진이는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 임협(任俠) : 의협심이 있음. 용감함.) 화담(花潭) : 서경덕(徐敬德)의 호.화담이라는 호는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처사(處士) : ? 세파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 거사(居士)) 서경덕(徐敬德) : 조선중기의 유학자(1489~1546).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 · 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이며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황진이·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됨.) 학문(學問) :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일.) 대학(大學) : 유교(儒敎) 경전에서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정통(正統)으로 나타내는 사서(四書) 중 중요한 경서(經書)) 왕배(往拜) : 윗사람을 찾아가서 만나 뵘.) 첩(妾) : 여자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던 말.) 예기(禮記) : 유교(儒敎)의 경전(經典)으로, 예의(禮義) 이론(理論)과 실제(實際)를 풀이해 적은 오경(五經)의 하나. 한 무제 때 하간의 헌왕이 공자(孔子)와 그 후학들이 지은 131편의 책을 모아 정리한 뒤 , 선제 때 유향이 214편으로 엮었고, 대덕이 85편으로, 대성이 49편으로 간추렸음.) 남반혁 여반사(男?革, 女?絲) : ‘남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여자는 실로 된 띠를 두른다’) 지학(志學) : 학문에 뜻을 둠.) 승야(乘夜) : 밤을 탐.) 아난(阿難) : 석가모니의 제자.) 누일(累日) : 여러 날.) 금강산(金剛山) : 태백산맥 북부 강원도(북한) 금강군·고성군·통천군에 걸쳐 광범위하게 펼쳐진 산.계절에 따른 아름다움이 각각 달라,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고 한다.) 제일(第一) : 첫째, 가장 훌륭함.) 명산(名山) : 이름난 산.) 청유(淸遊) : 풍취 있는 놀이, 속유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