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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 - 대안교육의 실태와 사례 분석
    -대안 교육의 실태와 그 사례 분석AGENDA서론Ⅰ. 한국 교육의 현실본론Ⅱ. 대안교육의 정의Ⅲ. 대안교육의 실태Ⅳ. 대안교육의 효과Ⅴ. 대안교육의 한계Ⅵ. 바람직한 대안교육의 방향Ⅶ. 실제 사례 분석: 간디 교육 공동체결론Ⅷ. 미래의 올바른 교육상을 위해Ⅰ. 한국 교육의 현실죽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숙제가 태산 같다. 난 그만 다니고 싶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故 정 모 군의 일기 중에서.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목을 매고 자살한 일이 있었다. 한국 교육의 틀 속에 갇힌 12살 아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었을까? 이것을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언제나 수능 시험이 다가올 때면 수능 성적에 대한 비관으로 자살을 택하는 학생들의 슬픈 소식이 들려온다.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공교육의 현실이다. 19년간의 삶을 몇 시간의 시험을 통해 판단 할 수 있을까? 학업만능주의와 경쟁사회로 물들어가는 대한민국 공교육의 오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하면 2류, 3류 인생이 되어버리는 이 사회. 한때는 이러한 교육열이 우리나라를 이끈 원동력이라 자랑스럽게 여긴 적도 있었다. 비단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의 교육열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국가에서도 이런 점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러한 교육열은 좋은 교육기관과 교육시스템 그리고 교육자까지 모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나아갈 때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교육열에 비해 아직도 해방 이후 도입된 미국형 낡은 교육제도와 기관. 성적만능주의와 맞물려 오로지 학생의 성적만 잘나오면 된다는 사고를 가진 일부 교육자들.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공교육이 운영될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겉으론 글로벌과 정보화, 지식기반 사회를 외치면서도 실상 안으론 무엇이 바뀌었있다. 대안교육은 19∼20세기에 개발 중심의 근대적 가치가 생존경쟁의 가치, 적자생존의 가치로서 인간간의 유대를 단절하고,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자연환경과의 친화력을 약화 시키고, 인간성을 비인간화하는 교육에 대한 반기로 나타난 운동이다.이러한 움직임 중 대안학교는 정규학교나 비정규학교에서 교육 이념 및 운영방식의 독특 성을 가지고 기존의 학교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도하는 대안적인 학교의 형태를 말 한다. 즉, 지식 위주의 기존 학교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모색되고 있는 다양한 실천운동의 하나로 볼 수 있다.Ⅲ. 대안교육의 실태(1) 대안 학교의 유형대안학교를 유형화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사람들마다 다름을 밝힌다. 특성화고교는 교지의 기준 면적에서 체육장의 기준 면적을 완화시켜서 학교설립을 보다 쉽게 하였다. 시/도교육감은 교육상 지장이 없다고 판단할 때에 운동장을 두지 아니하거나 기준 면적을 완화하여 인가할 수 있는데, 특성화고교는 실내체육시설이 있는 경우 그 바닥면적의 2배를 운동장면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교육부는 특성화고교/대안학교 설립 희망자에게 폐교 부지를 적극 알선하거나 매각하고, 특성화고교의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을 설득하거나 홍보하는데 지원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기존 학교가 특성화학교로 전환하고자 할 때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앞으로는 초/중학교 과정 대안학교의 설립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이다.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특성화고교가 농촌지역에 있는 기존 초등학교의 폐교를 활용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 속에서 체험교육을 하기 위해서 산천이 수려하고 농토가 있는 교지를 학보하기 위해서 ‘폐교’를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가족의 생활권과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오지에 학교가 위치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학령인구의 감소로 이전된 대도시 중심지의 학교 터는 업무용이나 주거용지 등으로 불하하면서, 교통이 불편한 산골의 ‘폐교’를 교육용으로 재활용한다는 것은 재검토되어야 한다.특히 대안학교는 ‘사제동행’을 이으며 현재까지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대안학교의 경우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가장 많았으며, 중고통합형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세부별로 나누어 볼 때 인가형 학교의 설립은 2004년 최고조에 달했다가 대폭 감소하였으나 서서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비인가형 대안학교는 중등-도시형 대안학교가 상대적으로 감소한 반면 중등-전원형 대안학교와 초등대안학교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대안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은 공교육과는 상당히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정규 교과서를 토대로 일련의 과정에 따라 배우고, 매 학기 시험을 통해 성과를 확인하는 공교육과는 달리 대안학교에선 다양하고, 자유로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소한의 필요한 지식 위주의 교육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다.영산성지고등학교의 경우 산악, 요가, 명상을 계속교과로 채택하고 있으며, 선택교과로 탈춤, 공예, 서예, 풍선아트 등 공교육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제천간디학교에선 힙합, 검도, 염색, 요리, 농사를 교과로 채택하고 있다. 다른 대안학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체험학습의 형식으로 국토순례, 생태기행, 유적답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반면 최근 급속하게 증가한 대안학교에 비해 정부의 지원은 상당히 미미한 것으로 드러난다. 인천광역시의 경우 학교를 그만둔 학생이 3000여 명을 넘었지만 시 지원을 받고 있는 도시형 대안학교는 두 곳뿐이다. 결국 예산부족은 대안학교가 나아가는 데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Ⅳ. 대안교육의 효과(1) 생태주의적 사고생태주의적 사고는 기존의 합리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서구에서 등장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과 합리주의는 오늘날 고도로 발전할 수 있게 만든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 지나친 믿음과 합리주의는 자연을 인간과의 공존이 아닌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제야 주위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구온난화, 줄어드는 동식물의 종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대안 교육은 지역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교육이 삶의 과정과 유리되지 않고 학생들이 폭넓은 경험을 하도록 하며 동시에 학교가 학부모와 지 역 주민의 참여 속에서 운영되게 한다.(3) 개인의 개성과 인격 존중국내 공교육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를 그 기원으로 꼽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공교육은 오로지 전시동원체제하에서 생산을 위한 단순노동을 배우기 위해 기본적으로 실시한 교육이었다. 또한 그들은 공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시키기도 하였다. 황국신민화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교육체계를 한국의 실정에 맞추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왔다.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실시된 공교육은 교육을 단지 국가 발전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결국 20세기까지 공교육은 철저히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기 보다는 단순히 지식함양의 목적으로만 이루어졌고, 이는 성적만능주의와 연결되었다 할 수 있다.대안교육은 이러한 전체주의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위와 같은 공교육의 문제의식이나 해경 방안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대안학교의 교육 방법은 학생들의 개성과 개인차를 중시하여 강의식의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화 학습’을 지향한다. 그리고 학습 조직에서도 공동 학습이나 소집단 학습, 프로젝트 방식을 선호한다. 또한 학교 외에도 주변의 자연 환경과 다양한 지역 시설을 교재로 삼아 활동과 체험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다.(4) 효과적인 학습대안학교의 교육과정은 각 대안학교들이 추구하는 교육이념이나 대상학생들의 성격에 따라 내용이나 형식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이 기존 일반학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점들을 극복하고자 효과적인 학습방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이 들은 전통교육이 가지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 교사중심학습, 단 순 암기식 교육, 자율성과 개성의 박탈, 일회성 지식을 측정하는 시험, 등급화 등의 문제 점등을 비판하고, 학생이 주체가 되는 학습, 집중적이고 개별화된 학습, 공사를 방해하기도 했다. 대안학교 치고 이런 과정을 밟지 않은 곳이 드물다. 일단 대안학교라 하면 ‘불량한 학생들의 집합 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안학교 설립취지에 중도탈락자 및 부적응학생을 대상으로 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11개 대안학교 중 중도탈락자 및 부적응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곳은 양업고?영산성지고?화랑고?원경고?동명고?두레자연고 등 6개교이며, 이 여섯 개 학교 중에도 순수하게 중도탈락자만 선발하는 학교는 몇 되지 않는다.(2) 졸업 이후의 사회화 과정졸업 이후의 대안학교 졸업생들의 사회화도 한 가지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대안학교의 특성 상 '작은 학교‘를 지향함에 있어서 학교 당 학생 수도 일반 학교에 비해 50%에서 심할 경우 1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모든 공교육을 대안학교처럼 만들 수 없는 현실 하에서 대안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사회에 나와 부딪힐 것은 분명 대다수가 공교육 안에서 졸업한 사람들일 것이다. 대안학교라는 좁은 틀과 공교육과는 다른 교육 방식은 분명 다수의 사람들과 차이를 보일 것이고 그러한 차이는 하나의 문제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정신적 성장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10대의 연령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할 수 있는 학교의 시스템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경쟁과 성적, 개인주의에 익숙해져있는 오늘날 우리들과 대안학교를 나오면서 조금은 다른 가치관을 획득한 사람들 중 분명 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가 조금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은 분명 대안학교를 나온 사람들에게 졸업 이후 학교라는 울타리 밖에 나와 사회와 맞닥뜨리는 데에 있어 문제가 될 수 있다.(3) 경제적 중상위 계층만을 위한 교육위 표에서 알 수 있다시피 대안학교 학생 1인당 연 평균 부담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장 높은 전원형 대안학교의 경우 1인당 연 평균 부담비는 약 7백여만 원이고, 가장 낮은 도시형의 경우 2백여만 원에 달한다. 전체적인 평균치를 계산해보면 연 평균 4백여만 원 가량 학생이 부담해야 한다. 요즘 대학생의 한 시한다.
    사회과학| 2011.04.17| 18페이지| 2,500원| 조회(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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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시시피 버블 ( Mississippi Bubble)
    AgendaⅠ. 금융버블의 기원Ⅱ. Mississippi Bubble의 배경Ⅲ. Mississippi Bubble의 전개과정Ⅳ. Mississippi Bubble의 결과Ⅴ. Mississippi Bubble의 의의Ⅵ. 유사 사례: South Sea Bubble & IT BubbleⅦ. 결론Ⅰ. 금융버블의 기원경제학에서는 버블경제의 정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버블경제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현실의 자산 가격 중에 펀드멘탈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 혹은 자산 가격이 펀드멘탈로부터 괴리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어느 자산의 가치가 경제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상황으로, 현실적으로 보아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이라는 말이다.다시 말해 투자, 생산 등 실물경제의 활발한 움직임이 없는데도 물가가 상승하거나 부동산 투기가 심해지고, 증권시장이 과열되는 등 돈의 흐름이 활발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즉 자산의 시장가격과 내재가치간의 차이로 정의할 수 있다. 내재가치는 자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래의 기대수익을 현재가치로 평가한 것을 말하는데 시장가격이 이 내재가치를 지나치게 넘어섰을 때 거품이 생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경기과열과 비슷하지만 돈이 생산적인 기업으로 몰리지 않고 투기나 사치성 소비 부문에 몰리는 것이 특징이다. 경제에 버블 현상이 일어나면 일시적으로 경제가 활기를 띠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기업생산이 위축되고 이에 따라 국민경제 전체적인 부도 축척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과거 미시시피 버블부터 닷컴 버블이라던가 IT 버블까지 현대 사회에서도 버블은 존재하고 있다.그렇다면 ‘버블’의 기원은 무엇일까. 투기에 대한 인류 최초의 역사기록은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 신전건립, 조세징수 등을 담당하던 법인체인 ‘Publicani’ 사의 주식매입 열풍으로 간주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는 로마법이 자유로운 자산이전을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리대금, 외환거래, 환어음 발행 등이 가능했던 시기였다는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이에 국고는 곧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이 때 존 로(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 사람이 등장한다. 로는 경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영국에서 결투와 관련한 사건에 휘말려 1716년 프랑스로 도망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루이14세가 사망하고 왕실재정과 국가 경제가 매우 혼란스런 상태였는데, 로는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 금융을 개혁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로는 경험으로부터 '가치의 근원은 사물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희소성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주식의 경우 희소한 주식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이 상승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화폐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돈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치가 있다고 국민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금, 은이 아닌 종이라도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로는 화폐가 증가하면 경제도 연동하여 증가한다는 이론의 선구자였다.Ⅲ. Mississippi Bubble의 전개과정로는 우선 은행을 설립하고 이 은행으로 하여금 은행권을 발행하여 유통되도록 하였다. 다음 단계로 이렇게 발행된 은행권 즉 지폐를 국민들에게 인정받게 하기 위하여 지폐를 사용하여 세금을 낼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정부에 건의하여 실행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금·은 본위제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은행권을 가지고 은행에 가면 언제든 금이나 은으로 바꿀 수 있었다.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의 교환이 보장된 은행권은 사실상 금이나 은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행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은행이 가지고 있는 금과 은의 규모보다 더 많은 양의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은행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교환을 요구할 리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비율’ 내에서는 보유하고 있는 금이나 은의 양보다 더 많은 은행권을 발행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은행들이 예금을 받아 일정한 비율로 지급준비금을 떼어 놓고 나머지는 대출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것 더욱 늘리도록 요구했고 이에 따라 그 ‘일정한 비율’을 지키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은행권의 발행을 늘리면서 통화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금 보유량을 늘릴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은 로는 미시시피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유럽에는 신대륙의 미시시피 강 주변인 루이지애나에 가면 엄청난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풍문이 있었는데, 바로 이 금을 캐다가 은행의 준비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금을 캐는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로의 명성으로 미시시피회사의 주식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주식을 판매한 막대한 자금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로는 이 자금을 금 캐는 데 사용하지 않고 정부에 대출을 해 주었다. 정부는 이 돈을 정부지출에 사용하였고, 민간으로 흘러들어간 돈은 다시 이 회사의 주식을 사는 데 쓰이게 되었다. 즉 지폐는 로의 은행이 마음껏 발행하고, 이를 미시시피 사에게 빌려주고 미시시피 사는 싼값으로 국채를 매입한 다음, 귀족들에게 미시시피사로부터 받은 대금으로 미시시피사의 주식을 사도록 권유하는 순환방식을 고안해 낸 것이다.이런 식으로 돈이 돌게 되면서 이 회사의 주식 값이 엄청나게 오르는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미시시피 사의 주식은 단기간에 1000루블에서 10000루블로 급등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미시시피 사와 그 주주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돈을 벌게 되었으며, 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재무장관에 오르게 된다.1720년 루이 15세 조카인 콩티 왕자가 인도 주식 추가 매입 불가에 따른 불만으로 은행권을 주화로 교체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미시시피 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의심을 갖게 만들었고, 이는 곧 신뢰성을 잃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에 뒤를 이어 프랑스 귀족들이 연이어 미시시피사의 주식을 팔고, 그 대금을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 챈 사람들이 미시시피사의 주식을 동시에 대량으로 매도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미시시피사의 주식은 급락하게 되었다.Ⅳ. Mississippi Bubble의 . 프랑스와 반대로 영국은 같은 버블 사태 후에 오히려 영국 은행으로 대표되는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반면, 주식회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주식회사의 설립은 의회의 승인을 얻도록 하는 소위 ‘거품법’ 이 탄생했고, 이 법은 이후 한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똑같은 버블을 겪고도 한 곳은 금융시장의 퇴보로, 다른 한 곳은 금융시장의 발달이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고, 이는 산업혁명이라는 중대한 사건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에서 심대한 영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또한 미시시피 버블이 프랑스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고 나서 서민들은 물가 폭등 때문에 빈곤에 빠지게 되었다. 로 이후에 프랑스에서는 세금제도를 개혁해 재정난을 극복하려 했으나 번번이 귀족층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계급 간의 위화감이 깊어지게 되었고 결국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Ⅴ. Mississippi Bubble의 의의미시시피 버블은 사물의 가치는 그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소성에 있다는 것을 도박으로부터 배운 로의 획책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투기에 참여하게 된 사건이다. 로는 사람들의 인지의 허상을 정확하게 간파, 이를 충분히 활용하였다 할 수 있겠다. 역시 이 버블의 뒤에는 다수가 유행처럼 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유행에 뒤떨어지면 손해라는 생각과 시세차익을 노리는 기대심리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로는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로는 신뢰성을 잃음으로 해서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국가 주도하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불태환 은행권 즉 종이화폐를 사용했다는 데에 의의를 둘 수 있다.Ⅵ. 유사 사례: South Sea Bubble & IT Bubble(1) South Sea Bubble사우스 시 버블이라고 불리는 버블은 18세기 초 영국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생긴 정부부채를 떠안기 위해 설립된 회사로 인해 일어난 버블이다. 설립 당시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와의 무역 독점권을 보장 받았고, 훗날 흑인 노예 공급의 독점권 바꾸는 것은 회사의 미래가 밝으므로, 회사의 자산이 커지면 주식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주식 투자자들에게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사우스 시는 채권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서, 주가가 오르면 오를수록 회사의 순이익이 커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우스 시의 주가가 오르면 오를수록 더 적은 주식으로 정부 채권을 인수할 수 있고, 주가 가치는 더 커지게 되는 것이었다. 주가가 오르게 되면 그 주식을 다시 되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점점 오르는 사우스 시의 주식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우스 시의 창립자 존 블런트(John Blunt)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가를 끌어올리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야 채권을 가진 사람들이 주식으로 전환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사우스 시의 블런트는 주가가 정점에 올랐을 때 보유주식을 매각하고, 심지어 보유하고 있지도 않은 주식을 팔아 이익을 챙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사람들은 사우스 시의 오르는 주가만을 믿고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였고, 결국 주가가 치솟으면서 버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우스 시의 주가가 상승되면서 나타난 버블 현상들을 모든 사람들이 믿은 것은 아니었다. 실질가치 이상으로 상승한 주가는 누군가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빠르게 깨달은 투자자들은 주가가 올랐을 때, 빨리 팔아치우기도 했다.이렇게 비상식적으로 오르던 사우스 시 주가는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결국 영국 경제는 파산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 떨어진 주가에 분노한 국민들은 사우스 시 회사 관련 인물들의 처벌을 주장했고, 결국 회사는 사라지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그리고 투기를 제한하기 위한 각종 법률을 제정하였다.사우스 시 버블은 결국 ‘황금 같은 꿈’으로 비유되며 몇 개월 만에 끝이 났지만, 몇 가지 의의를 남겼다. 그것은 여성 투기꾼들이 등장했다는 점에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다. 영국 사회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남녀 불평등이었다. 예를 들어, 토지는다.
    경영/경제| 2011.04.17| 7페이지| 2,000원| 조회(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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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이외 지역의 흑사병에 대한 고찰 평가A+최고예요
    경제사-유럽 이외 지역의 흑사병에 대한 고찰*유럽 이외 지역의 흑사병에 대한 고찰13세기 중반 유럽 전역을 휩쓸어 당시 인구의 절반정도인 약 4천만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 당시의 피해로 인해 유럽은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당시 유럽의 피해가 그 정도였는데 유럽과 육지 상으로 연결되어 있던 아시아 지역의 피해는 있었을까? 만약 그 피해가 있었다면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고, 어떤 경로로 아시아권에 퍼지게 된 것일까?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어떠한 영향이 있었을까?아시아권에서 처음 흑사병의 기록이 발견된 것은 중국 서기 617년에 발생한 흑사병 환자다. 이후 642년에 또 다른 흑사병 환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흑사병의 발생 위치다. 흑사병이 발병한 장소는 광동 성 지방으로 해안과 가까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마카오와 홍콩 등 대외해상무역이 활발하게 있었던 도시와 밀접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숙한 내륙지방에선 흑사병이 그리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중국의 흑사병이 퍼진 계기가 타국과의 해상교역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이 당시 중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상인들과 주로 거래를 하였는데 비단, 도자기 등을 수출하고, 황금과 백은 등을 수입하였다. 당시 중국은 회교국이나 이슬람 무역상과 주로 거래를 하였는데 이들은 아프리카 오지 깊숙한 곳까지 진출을 하던 민족이었다. 즉 중앙아프리카에서 흑사병에 오염된 상인들이나 상인들을 따라온 오염된 쥐, 벼룩 등이 흑사병 바이러스를 가지고 온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그렇다면 여기서 비유럽 권 지역의 흑사병 피해 사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중국의 경우 762년 이후 해안 지역에서는 페스트가 크게 유행했다. 산동 성 주민의 약 반 이상이 사망했으며 그 이후에도 이 병은 계속 되었다. 806년까지 절강 성에서도 약 반 이상의 인구가 사망했다. 1330년대 초에도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으며 1334년년 ? 1354년 동안 중국 각지에서도 흑사병 확산이 있었다. 당시 흑사병이 심했던 지역으로는 허베이 이외에 장시 성, 산시 성, 후난 성, 광동 성, 광시, 허난 성, 쓰이위엔 등이었다. 이 시기 중국의 역사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시대였으며 몽고와 비단길을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흑사병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30% 가량 감소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0년에는 중국 동북부의 눙안과 장춘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여 731 부대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흑사병의 영향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2세기부터 742년 사이의 인구 수 자료를 보면 중국의 많은 지방에서 급격한 인구의 감소가 나타나는 데 당시 사회상으로 보아 전쟁이나 자연재해보단 전염병의 영향일 확률이 높다.인도의 경우 1898년 처음 봄베이에서 발생하여 10년 간 600만 명의 사망자를 내기도 하였다. 흑사병은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도 발생하였다. 이 지역 역시 상당한 인구 감소와 이로 인한 사회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중동 지역의 흑사병 전파는 러시아 남부의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다. 1347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이는 콘스탄스노플의 흑사병이 확산된 결과로 여겨진다. 이 후 흑해 연안의 여러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1348년이 되자 흑사병은 가자,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확산되었다. 1348년 - 1349년 동안 흑사병은 안티옥까지 번져 나갔다. 당시 안티옥은 염료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이 때문에 중동의 여러 나라가 흑사병 확산 목록에 추가되었다. 메카 역시 1349년 흑사병이 퍼졌으며 같은 해에 모술에서도 발생하였다. 1351년 이집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예멘 국왕 일행은 흑사병에 걸려 있었으며 이로 인해 예멘에도 흑사병이 번졌다. 흑사병은 18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재발하였는데 1738년 대 흑사병은 튀니지의 상선에 의해 전파되어 아드리아 해와 우크라이나로 번져 나갔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티미쇼아라는 궤멸90년 캘리포니아에서 다람쥐도 흑사병에 감염된다는 사실을 발견해냈고 같은 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소규모의 흑사병 환자들이 발생했다. 1990년 이후 북아메리카와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이 흑사병에 자주 감염되었다. 1911년에는 만주 지방에서 대규모의 흑사병 환자가 발생하였다.13세기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은 몽고를 통해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몽고는 흑사병의 피해를 얼마나 받을까? 중국 남부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몽고까지 전해졌고 흑사병의 주 매개체 중 하나인 설치류들은 흑사병에 오염이 되었다. 몽고가 있었던 지역의 특성상 많은 수의 설치류들이 존재했는데 기록상으로 몽고에서 발생한 흑사병 피해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흑사병이 퍼지지 않은 이유는 몽골인의 생활방식에 있다. 유럽은 정착민족이며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따라서 집안이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이곳에 쥐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흑사병이 대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반면 몽골은 초원을 주기적으로 움직여가며 활동하기 때문에 흑사병의 피해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대개의 초원 민족들은 농업 민족처럼 모여 살지 않는다. 그들은 계절의 변화와 기후에 따라서 소수 단위로 뭉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런 생활양식이 흑사병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염을 방지하게 되는 이유였을 것이다.흑사병 바이러스는 원래 습하고 차가운 지역에서 창궐한다. 몽골을 포함한 초원지대는 스텝지역이며 대륙성기후와 건조한 지역에 위치해 있는 점에서 흑사병을 비켜갈 수 있었다. 또한 대도시보다는 원시에 가까운 자연환경이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즉 동일한 품종의 동식물이 밀집된 지역은 한가지의 병해충이 창궐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도시가 밀집된 지역 또한 그럴 수 있다. 게다가 몽골의 장례풍습과 일부에서 이루어지는 고려장 역시 영향을 미친 것일 수 있다. 시체는 야외에 버려서 동물들이 뜯어먹게 하는 독특한 장례 풍습 있었고, 늙고 병들면 버리는 점이 혹독한 환경에지지 않게 했을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건강한 먹이사슬이 이루어지는 지역은 전염병이 거의 없다. 병들거나 약한 동식물은 다른 천적에 의해 먹히기 때문이다. 농업, 대도시 등등은 인간의 입장에서 편리한 것이지만, 자연환경에서는 먹이사슬의 파괴인 것이다. 몽골이 지배했던 지역은 개발이 덜된 자연 상태가 더 많았던 점도 이유다.그렇다면 어떠한 경로로 비유럽 지역에선 이러한 흑사병의 피해가 발생한 것일까. 지구상에서 흑사병 바이러스가 가장 먼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총 두 곳이다. 첫 번째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의 언덕이고 두 번째 지역은 중앙아프리카의 호수 지역이다. 흑사병의 매개체는 주로 설치류 과의 동물로서 대표적으로 ‘곰쥐’가 있다. 흑사병에 감염된 쥐는 해상무역의 발달로 배를 통해 장거리 항해 교역이 늘어나자 수송물자나 식량 등에 숨어가는 방식으로 기존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흑사병 바이러스 역시 다른 지역으로 퍼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즉 해상무역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회교도 상인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 이미 흑사병에 감염된 설치류들이 배라는 수송도구를 통해 바다를 건너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살던 감염되지 않은 설치류들에게 흑사병을 전염시켰을 것이다. 중국에서 그렇게 발생한 흑사병은 몽골까지 전해졌을 것이고 당시 서방세계를 연결하는 거대 제국이었던 몽고는 실크로드를 통한 서양과의 무역을 통해 흑사병이 유럽으로 넘어간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중국에서 발병한 흑사병은 비단길이나 해상을 통해 다른 비유럽 국가로 전파되었을 것이다.위의 사실에서 보았듯이 대규모 지역에 걸친 장기간의 흑사병 발병에서 세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첫 번째, 1870년 이후 급격하게 발달된 기선의 항로 망이다. 각 대륙은 바다라는 거대한 장애물로 대륙 간 이동에 제약이 심하였다. 그러나 해상 항로망의 발달은 흑사병을 전파하는 데 매우 좋은 수단이었다. 실례로 페스트가 광주나 홍콩에서 발생한 후 다른 항구로 기간 같은 숙주에 머무르게 될 경우 숙주는 감염된 후 회복하면서 그 병에 대해 면역력을 보유하게 되기에 실제로 배 안에서 장기간 있을 경우 감염시킬 숙주가 사라지기에 바이러스는 소멸하게 된다. 즉 속도가 느린 돛단배가 항해에 주로 사용되던 시기에는 흑사병 바이러스가 한 항구에서 다른 항구로 그 생명을 유지하면서 가기가 무척 어려웠다는 말이다. 그러나 속도가 빠른 기선의 발명으로 인해 바이러스는 빠르게 그리고 대규모로 전차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 배를 통한 흑사병 바이러스의 전파가 단순히 각지의 사람들에게만 옮긴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감염되지 않은 설치류들을 감염시켰다는 것이다. 여러 지역에선 잠재적인 흑사병 숙주인 설치류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흑사병 바이러스에 노출이 되지 않았기에 큰 위협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배를 통해서 흑사병은 사람들뿐 아니라 각 지역의 설치류들까지 흑사병의 숙주로 만들고 말았다. 셋째, 몽고나 만주 지역에서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습관들이 흑사병 예방에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가령 흔한 설치류를 사냥 할 때도 덫을 놓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활 쏘아 사냥했고, 행동이 느린 설치류는 사냥하지 않았다. 또한 설치류 집단이 병에 걸린 듯 보인다면 천막을 거두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전통은 외부인들이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했고 결국 흑사병이라는 병이 퍼지게 된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이러한 흑사병은 당시 많은 인명 피해를 입히고 여러 가지의 문화적, 정치적 변화를 있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몽고의 경우 흑사병으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자 결국 중국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 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전염병으로 인한 군사력이 약화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당시 초원 지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그들에게 인구조달이 힘들다는 것은 곧 군사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비단길을 통해 서양과의 무역을 하면서 발달한 일부 도시들은 흑사병이란 장애물 때문에 몰락것이다.
    의/약학| 2009.05.12| 10페이지| 1,000원| 조회(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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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유산과 그 의미에 대한 고찰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유산과 그 의미에 대한 고찰Ⅰ. 서론Ⅱ. 비잔티움 건축의 정수, 하기아 소피아Ⅲ. 라벤나의 성당, 산 비탈레Ⅳ. 성스러운 평화, 하기아 이레네Ⅴ. 문화유산을 통해 알아본 비잔티움 문화의 의의Ⅵ. 결론Ⅰ. 서론(1) 비잔티움 문화의 역사적 배경비잔티움 제국은 324년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인 비잔티움에 들어선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시작으로 약 천 년 간 존속해온 지구 상 가장 오래도록 존재한 제국이다.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도교의 중심국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발전을 이룩했다.비잔티움 제국이 위치했던 지역은 지금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 당시 그 곳은 동서를 잇는 무역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문화적, 경제적으로 부흥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이다. 즉 로마-그리스의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신앙 체계가 만나면서 비잔티움 문화가 꽃 피우게 된 것이다.이러한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은 기준에 따라 최소한 네 가지로 정해질 수 있다. 지리적 기준에서 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동방정책과 콘스탄티누스의 천도 때부터이고 서방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상징적 기준에서 본다면 서로마 멸망 때부터라 할 수 있다. 문명의 독립성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부터, 동방의 정체성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610년 헤라클리우스 때부터 비잔틴 제국은 명실상부한 시작을 맞았다. 왕실에서도 그리스어가 사용되고 동방의 자생적 정책이 시도되는 등 비잔틴의 고유문명이 시작되었다.하지만 비잔티움 건축 양식의 시작은 제국의 시작보다 정의하기가 쉽다. 비잔티움 문화적 양식을 보이는 건축적 특징들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 시기는 정치사적으로는 비잔티움다운 모습을 보이지만, 건축적으로는 초기 기독교 건축 이상의 새로운 점을 보이지 않는다.(2) 비잔티움 건축의 특징비잔티움 교회 건축은 다음과 같이 발전해 왔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정주택을 거쳐 마우솔레움, 로마 건축의 연장인 바실리카, 비잔티움 교회 건축 양식에서 가장 전형적인 돔과 팬던티브 돔 형태를 거쳐 중앙 집중식 그리스 십자가 형태까지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마우솔레움이나 바실리카 양식은 둘 모두 로마 건축 양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비잔티움 양식은 돔의 형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돔의 형태가 가장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는 팬던티브 돔 형태는 6세기 하기아 소피아, 하기아 이레네, 산 비탈레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있다.팬던티브 돔 구성도하기아 소피아의 팬던티브 돔팬던티브 돔은 4개의 피어로 지지되는 4개의 아치와 상부 돔 사이에 생기는 구면의 삼각 형을 지칭한다. 즉 4면과 윗부분이 잘려나간 하나의 돔 위에 또 하나의 돔이 서 있는 형 상이 된다.이러한 팬던티브 돔 구성은 후에 이탈리아, 불가리아, 러시아 건축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팬덤티브 돔 외에도 중앙 집중형 공간 구조와 그리스 십자가 평면 형태의 구성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비잔티움 건축의 특징이다. 라틴식 건축으로 발전하게 되는 바실리카 양식과는 반대로 신자와 사제를 이분적으로 구분하기 보단 측랑이 신자들의 네이브를 감싸게 되는 포옹 측랑이 형성된다. 또한 이러한 건축 형태는 상징적이며 위계적 질서를 강조하는 비잔티움 문화와 잘 맞아든다고 할 수 있다.또 다른 특징으론 외부 장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부 장식이 무척 발달했다는 것이다. 또한 주두 위에 부주두를 얹은 주두 형태를 취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보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폭이 넓은 아치를 지지해야 되므로 더욱 장대하고 폭이 넓은 주두를 부주두로 첨가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Ⅱ. 비잔티움 건축의 정수, 하기아 소피아(1)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 배경과 특징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326년 콘스탄티노플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지어졌으나, 후대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5년간의 공사에 걸쳐 537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재건축하였다. 5년간에 걸친 짧은 건축 기간에도 불구하고 현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완성도로 볼 때 당시에 탁월한 건축 관리 능력과 많은 노동력을 동원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트랄레스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안테미오스와 수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당은 크로스 돔 형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불균등 내접형 그리스 십자가 형태를 기본 구성으로 삼아 이를 변형시켜 이루어졌다. 수평단면도로 보았을 때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3통로 바실리카 양식으로 나타난다. 수평단면도에서 튀어나온 반원형 공간, 연달아 지은 이중 현관, 아트리움 등은 전통적 방식이다. 그에 반해 단면도에서는 높이 56미터 이상의 둥근 지붕이 가장 두드러진다. 즉 바실리카 양식과 돔의 결합적 형태가 하기아 소피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하기아 소피아 성당 단면도하기아 소피아 성당 평면도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건축학적으로 보았을 때 그리 합리적인 형태의 건축물은 아니다. 일례로 지름이 30미터나 되는 반구 천장을 받치는 구조가 건축의 핵심 사항 중 하나였다. 중심공간의 네 귀퉁이에는 두꺼운 직사각형 벽기둥이 세워졌다. 돔의 무게는 팬던티브 위로 전달되었는데 팬던티브를 지지하는 방식이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이 서로 달랐다. 동서 방향의 경우 돔의 하중이 여러 갈래 나눠져 하중 부담을 적게 받도록 설계되었지만, 남북 방향은 팬던티브로 내려온 하중 가운데 벽체로 전달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아치형 수직벽으로 집중되었다. 그 결과 총 7번의 붕괴가 있었으며, 결국 바깥쪽의 버트레스를 최대한 늘림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이와 같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합리적 건축 양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전문 건축가가 아닌 물리학자와 수학자가 설계한 것에서 볼 수 있듯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 목적은 공간에서 물질적 특성을 제외하고 오직 하나의 정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은 하기아 소피아가 말하는 성스러운 지혜를 표현한다.하기아 소피아 대성당(2) 하기아 소피아의 의의하기아 소피아의 설계 당시부터 초월적 존재의 의미를 내포하도록 설계되었다. 둥근 돔은 천상이자 우주를 상징한다. 이는 하기아 소피아 공간의 정점으로 사방에서 들어오는 빛은 여기서 절정에 달한다. 이를 보고 유스티니아누스의 궁정 시인 파울로스실렌티아리우스는 “하기아 소피아는 스스로 빛을 낸다.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신적인 지혜의 태양으로부터 빛을 낸다.” 라고 말했다. 중앙의 볼트에는 모자이크나 프레스코를 사용하여 ‘만물의 지배자’를 상징하는 ‘판토크라토르’ 형상을 위치시켰다. 또한 내부 장식 역시 기독교적 위계질서에 따라 상징되고 배치된다.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비잔티움 문화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은 미술과 건축분야이다. 1453년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투르크 인들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모방했는데, 그 때문에 오늘날 이스탄불의 많은 모스크들은 이 성당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과 페르시아의 돔을 융합한 것으로 그리스 적 요소와 오리엔트 적 요소를 배합한 한 예이다. 하기아 소피아는 건축사의 경이로운 업적이라 평할 수 있겠다. 축의 방향을 따르는 바실리카 양식과 둥근 지붕 양식의 중앙집중식 양식이 하나로 녹아 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당 내부에서 물질적 특성과 무게는 최대한 없앴다. 그로 인해 공간은 정신이 될 수 있던 것이다.Ⅲ. 라벤나의 성당, 산 비탈레(1) 산 비탈레 성당의 건축 배경과 특징라벤나는 5~6세기에 세워진 많은 종교건축물과 그 내부를 장식한 화려한 모자이크 벽면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도시이다. 이 가운데 중심적인 존재가 산 비탈레 성당이다. 이곳에 비잔티움 제국의 총독부를 두었던 530년경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비인 테오도라의 뜻을 받든 대주교 에클레시우스가 유리아누스 아르겐타리우스를 시켜 착공, 547년경 당시의 대주교 막시미아누에 의해 헌당식이 행해졌다고 전해진다.건축의 외관은 간소한 집중식 팔각당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겨우 내진부에 해당하는 돌출부분에 변화를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부는 중앙의 원개와 탕부르를 들어올리는 8개의 큰 기둥과 그 주위를 굳히는 2층의 주랑부로 이루어져서 교묘한 역학적 구성을 나타내었다.큰 기둥의 강직한 선과 이를 지탱하는 아치와 반원개 등의 곡선과의 훌륭한 조화를, 리드미컬한 시각적 효과와 세련되고 상쾌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주랑의 일부에서 돌출하게 설치한 내진에는 안쪽 정면의 앱스의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를 중심으로 그린 한 쌍의 패널은 초기 비잔틴 미술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6세기 모자이크 예술의 최고 걸작이다.산 비탈레 성당은 하기아 소피아와 하기아 세르기오스 앤 바코스의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르기오스와 산 비탈레를 이어주는 공통점은 반지형 겹공간이었다. 성 로렌초의 구성이 하기아 소피아에 이르면 많이 달라진데 비해 산 비탈레에는 조금 더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방향성을 갖지 않는 구성이다. 산 비탈레도 출입구와 앱스형 성소를 가졌지만 이 둘은 서로 마주보며 축을 이루지 않고 각도를 달리하며 어긋나게 위치했다. 이 특성은 방향성과 위계성을 피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이는 공간을 성격을 초기 기독교 건축의 중앙집중성과 평등성에 머무르게 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이러란 상황은 초기 기독교 건축이 비잔티움 건축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성 비탈레 성당 A-A'단면도성 비탈레 성당 평면도(2) 산 비탈레 성당의 의의위에서서 보듯 산 비탈레 성당은 초기 기독교 건축과 비잔티움 건축 사이의 전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전환성에도 불구하고 산 비탈레 성당은 비잔티움 건축의 특성도 강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팔각형을 기본 형태로 갖는 기하주의, 기하주의를 바탕으로 삼은 부유공간, 수평-수직 방향으로의 확장, 허상적 공간감, 마지막으로 외관천리에서 비잔티움 건축의 특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공학/기술| 2009.05.12| 7페이지| 1,000원| 조회(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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