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분야 교과서 비교1. 근, 현대의 경제 단원구성7차 국사 교과서6차 국사 교과서1.외세의 경제 침략과 국민 경제의 모색1)개항과 불평등 조약2)외국 상인의 침투와 확대3)각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침탈4)정부와 식산흥업 노력5)자주적 근대화의 좌절6)경제적 구국 운동의 전개Ⅱ. 근대 사회의 전개3. 근대의 경제와 사회(1) 개항 이후 열강에 의한 경제 침탈1)일본 상인의 무역 독점2)제국주의 열강의 경제 침탈3)일본의 토지 약탈(2) 경제적 구국 운동의 전개1)경제적 침탈 저지 운동2)근대적 상업 자본의 성장3)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2.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 경제 운동1)식민지 수탈 정책2)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수탈3)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과 군수 공업화4)민족 경제 운동5)전시 총동원 체제와 식민지 경제의 파탄Ⅲ. 민족의 독립 운동2. 민족의 시련(2) 경제 약탈1)토지의 약탈2)산업의 침탈3)식량의 수탈4)대륙 침략과 총동원령4. 사회 ? 경제적 민족 운동(2) 경제적 저항 운동의 전개1)민족 기업의 육성2)물산 장려 운동3)농민 운동4)노동 운동3.현대의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의 발달1)8.15 광복과 새로운 경제 질서 형성2)6.25 전쟁의 피해와 원조 경제3)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과 고도성장4)경제 위기 극복과 경제력 집중5)산업화의 지전과 경제적 갈등6)세계 속의 한국 경제7)21세기 선진 복지 경제를 향한 노력분석2. 단원의 개요와 연구과제7차 국사 교과서6차 국사 교과서개요5. 근? 현대의 경제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서구 문물을 수용하고 새로운 경제정책을 펼치면서 자주적인 근대화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청을 비롯한 외세의 경제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으로 경제 발전이 왜곡되어, 우리 민족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광복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새로운 경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도 대단히 컸다.196을 특정적으로 서술, 7차에서는 수정삽화비교대안7차 국사 교과서6차 국사 교과서2)외국 상인의 침투와 무역 확대①...1880년대 이후에는 청에서 온 상인이 가담하여 경쟁하였다.②이 과정에서 해외 소식에 밝지 못하고 근대적 운송 수단이 부족했지만, 조선상인 중에서도 개항장을 중심으로 무역 활동에 참여하는 상인이 등장하였다.③또 일본으로 쌀의 유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쌀 부족과 쌀값 인상에 따른 전반적인 물가 인상이 나타나 도시나 농촌의 가난한 사람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④...부유충을 중심으로 사치 풍조가 확산되었다⑤그러나 일부 지주와 상인은 쌀 수출에 적극 가담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고, 이를 다시 토지 매입에 투자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토지를 획득함으로써 대지주로 성장해 갔다.①...그러나 임오군란 이후로는 조선에 대한 청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청국 상인들이 대거 침투하여...② 無③1880년대에 일본 상인들은 농촌에까지 활동무대를 넓혀 갔고, 곡물 수매에 주력하였다. 당시,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 과정에 있던 일본은, 농촌의 피폐에 따른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곡물을 대량 수입해 감으로써, 조선 내에 곡물 가격의 폭등 현상을 일으켜 도시 빈민층과 빈농층의 생계에 위협을 주었다.④ 無⑤ 한편, 외국 상인들의 내륙 시장 침투로 인하여 종래 수입 상품의 내륙 판매를 담당하던 조선 상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서울 상인들은 철시로써 외국 상인들의 침투에 항거하기도 하였다. ...분석①6차에서는 청국 상인들이 대거 침투하게 된 것에 대한 배경이 제시되어 있으나 7차에서는 삭제됨②7차에 새로 첨가된 내용이나 의미부여③6차에는 일본이 쌀을 적극적으로 유출해 간 배경이 제시되어 있으나 7차에서는 삭제되어 개연성이 떨어짐④7차에 새롭게 추가⑤6차에서는 상인들의 피해 사실과 항거 내용 등이 소개되어 있으나 7차에서는 일부 지주와 상인들의 반국가행위를 지적하면서 반성적 역사인식이 엿보임삽화비교대안7차 국사 교과서6차 국사 교과서3)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 설립에도 적극적이었다. 토지나 광산 개발을 외국인에게 넘기지 않도록 한 뒤 독자 개발을 시도하였으며, ...③농기구나 일용품을 만들던 철기 및 유기 제조업, 정미업, 직포 공업 등에서 공장을 늘리고 새로운 기계를 외국에서 들여오거나, 자본을 모아 합자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④상인끼리 또는 상인과 관료가 함께 상회사나 금융 기관, 근대적 공장 설립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無① ...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 자본으로 은행들을 설립하였다.② 개항 이전에 이미 발달하였던 유기 공업과 야철 공업을 계승하여 서울에 조선 유기 상회라는 합자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개항 이전에 농가 부업 단계에 머물러 있던 면직물의 생산은 외국산 면직물의 수입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민족 자본에 의하여 대한 직조 공장, 종로 직조사 등의 직조 공장이 설립되어, ...③ 서울의 시전 상인은 특권 상인으로서 전통적인 상업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외국 상인들이 도시로 침투해 옴에 따라 그들과의 항쟁 과정에서 근대적 상인으로 변모해 갔다. 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여 독립 협회와 더불어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고, 근대적 생산 공장의 경영에 투자하기도 하였다.분석①식산흥업이란 용어가 7차에 새로 등장②7차에서는 식산흥업의 노력을 정부, 민간으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는데, 6차에서는 정부 주도의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7차에서 정부 주도의 정책이 추가된 것인데 이는 무기력한 정권으로 평가되던 대한제국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성과물로 추정됨③내용상의 큰 변화는 보이지 않으나 분량이 감소함④6차에서는 상인들이 변모하는 모습이 인과관계를 통하여 설명되어 이해하기 쉬우나, 7차에서는 내용이 크게 줄면서 개연성이 떨어짐삽화비교대안7차 국사 교과서6차 국사 교과서5)자주적 근대화의좌절①러ㆍ일 전쟁 중에 일제는 일본인을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강요하였다.②이후 일제는 국가의 모든 수입과 지출 과정을 장악하였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세)식민지수탈정책?1910년에 시작된 토지 조사 사업은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이 사업은 토지의 소유권, 토지가격, 지형 및 용도를 조사하는 것이었다.?총독부는 지세부과 대상을 크게 늘리고 토지가격을 높이 책정하여 토지세를 더 많이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거둔 토지세의 대부분은 식민 통치를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었다.?읽기자료- 토지조사령제 1관 토지의 조사 및 측량은 본령에 의한다....... 중략 ......제17관 임시 토지 조사국은 토지 대장 및 지도를 작성하고, 토지의 조사 및 측량에 대해 사정(査定)으로 확정한 사항 또는 재결을 거친 사항을 이에 등록한다.④표- 쌀 생산량과 수출량 및 소비량?추가- 그래프-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소유지 증가?국권 피탈 후, 각종 산업은 일제의 식민지 경제 체제로 개편되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 부문에서 단행된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으로 그 목적은 전국적인 토지 약탈에 있었다. 국권 강탈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서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법령을 제정한 바 있었던 일제는, 이어서 토지조사령을 발표하고 막대한 자금과 인원을 동원하여 전국적인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다.?조선 총독부는 탈취한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회사나 개인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였다.?삭제-표- 민족별 연해 어업상황?삭제-표- 민족별 가동 광구 수 및 광업 생산액?표-미곡생산량과 일제의 수탈량?삭제-표- 미곡 생산량과 강제 공출량분석?토지조사령이 행한 구체적인 조사항목(토지의 소유권, 토지가격, 지형 및 용도)을 나열해 놓았다.?토지 조사 사업 후 토지세를 더 많이 거둬들인 구체적인 방법(지세부과 대상 늘림, 토지가격을 높이 책정)에 중점을 두고 기술했다.?6차에는 없던 토지조사령에 대한 읽기자료를 추가했다.앞서 본 것처럼 결국 토지조사령에 큰 비중을 둔 듯하다.?1910~3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반출된 쌀을 6차에선 수탈량으로 표현했다가7차에선 수출량으로 표현이 바뀐다. 한국과 일본의 일인료 생산지대로 만들고, 한국은 경공업 중심의 중간지대로 만들기 위해 조선 공업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일제의 경제 침탈은 193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는 산미 증식 계획이 어려움에 부딪히자, 공업 원료 증산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면화의 재배와 면양의 사육을 시도하는, 이른바 남면북양 정책을 수립, 이를 우리 농촌에 강요하였다.분석?추가된 해설로 총독부의 만주와 한국에 대한 정책의 차이를 설명한다.한국에 경공업 중심의 중간지대로 만들기 위한 공업화 정책을 펼친 것으로 기술한 것이 새롭다. 남면북양 정책의 설명을 삭제 하였다.삽화비교대안7차 국사 교과서6차 국사 교과서4)민족경제운동?일제 강점기에 농민은 높은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기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쌀의 반출을 위해 지주를 지원하고, 일본 자본의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자를 탄압하였다. 이에, 농민과 노동자는 소작 쟁의나 노동 쟁의를 일으켰는데, 이는 생존권 투쟁이자 경제적 민족 운동이었다.?한국인이 경영한 기업이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인 대자본과 경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기업활동은 경쟁이 심하지 않은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거나, 가내 수공업과 연계를 맺으면서 중소 규모의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사진- 물산 장려 운동(시가행진)?추가- 도표- 광복 직전 공업에서 민족별자산 총계?일제의 토지 수탈로 인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한 우리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에게 수확량의 50% 이상을 소작료로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온갖 세금과 비료 대금까지 부담해야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 농민들의 소작 쟁의가 자주 일어났다.노동운동은 주로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추진에 따른 가혹한 노동 조건 때문에 일어났다. 노동 쟁의는 값싼 임금문제와 열악한 노동조건이 주요 쟁점이었다.?이러한 민족 기업은 1930년대에 들어와 식민 통치 체제가 강화되면서 일제의 교묘한 탄압으로 해채되거나,
역사과 지도법 2002012785 하정문학습지도안1. 단원설정의 이유가. 사회적 관점, 과제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도 휴전상태이다. 남북 간의 관계는 언제나 지대한 관심사이고 또한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이 단원에서는 6.25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들을 학습하면서 남북 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미래의 통일에 대해 사고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나. 학습자의 생활, 경험과 결부학습자 자신이 전쟁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등의 연세 높으신 분들과의 대화를 유도하는 자리를 마련해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고 국민이 져야 할 국방의 의무의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다. 사회과의 교과 체계상의 위치사회과 교육은 종합적ㆍ통합적 교과로서 그 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6.25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역사과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지만 국어나 사회, 도덕 등의 과에서도 많이 다루는 주제이다. 그만큼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고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다루어지므로 상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2. 딘원의 목표가. 지식 ㆍ 이해ㆍ6.25전쟁의 원인이 된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ㆍ전쟁의 건개과정을 설명 할 수 있다.ㆍ전쟁의 결과가 무엇인지 설명 할 수 있다.ㆍ다큐멘터리 도입부를 이용해 학생의 공감대를 끌어서 역사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한다.나. 기능ㆍ동영상을 보면서 역사적 사고력을 적용 시킬 수 있다.ㆍ편지쓰기를 통한 감정이입의 기법을 알 수 있게 한다.다. 가치 ㆍ 태도ㆍ전쟁의 결과를 보고 평화적 사고를 기를 수 있다.ㆍ북한국민도 우리의 가까운 이웃임을 알 수 있다.3. 단원의 구성?인명 피해?재산 피해?정신적 피해6.25의 발발 배경?중국의 공산화?에치슨 선언?북한의 군비 확장?북한의 기습남침?인천상륙작전?중공군 개입?휴전 협정6.25의 결과와 영향6.25의 전개4. 단원의 지도계획중단원명소단원명학습내용차시지도상 유의점자료학습형태광복과 대한민국의 수립6.25전쟁?6.25전쟁의 발에 적절히 몰입하도록 한다.?전쟁의 승자가 없다는 것과 앞으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교과서탐구용지PPT강의식문답식탐구식발표식5. 주제 해석의 관점6.25전쟁은 분명히 북한이 남한을 선제공격한 남침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자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두 쪽 다 패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전쟁은 인명과 재산뿐 아니라 양국의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증오와 불신을 가져다 주었다. 실제로 그어져 있는 휴전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벽을 깨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6.25를 공산주의의 침입에 적절히 대응한 자유민주진영의 승리라고 볼 것이 아니라 가장 큰 피해자는 한반도의 주민들이었음을 인식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비극이라고 해석을 한다.6. 주제의 교육 내용6.25전쟁이 발발하게 된 국제적인 배경과 북한의 군비증강에 대해 교육한다. 전쟁 발발 후 정전협정까지의 전쟁기간을 주요 사건, 사진으로 다루고 6.25의 인명피해, 재산피해, 정신적 피해를 가르친다. 곳에 따라 적절한 자료를 제시해서 전쟁이 먼나라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일임을 인지시켜주고 잠재적으로 전쟁의 무서움을 알게해서 평화적 사고를 함양한다.7. 본시 수업의 흐름도역사과 지도법 2002012785 하정문본시 교수 ? 학습안단원1.광복과 대한민국의 수립소단원주제4. 6.25전쟁지도교수권오현 교수님학과역사교육과일시3월 7일교생하정문학습목표1. 6.25전쟁의 발발배경을 말할 수 있다.2. 6.25전쟁의 결과를 다양한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3. 여러 자료를 통해 전쟁에 대한 생각을 발표할 수 있다.교수학습자료교사학생탐구용지, ppt자료, 교과서탐구용지, 교과서단계(시간)교수?학습 요항교수 ? 학습과정수업 형태 및 자료도달점 및 유의점교사학생도입(5분)수업준비전시학습 상기동기유발학습목표 제시학습구조도 제시▶인사 및 출석을 점검한다.자 여러분 인사합시다. 반장! 인사합시다.▶전시학습에 대해 질문을 한다.전시간에 대한민국의 수립과 분단에 대해서 배웠죠. 그로 굳세어라 금순이예요. 굳세어라 금순이란 드라마에서 금순이로 열연한 한혜진 씨입니다. 그리고 현인씨가 부른 굳세어라 금순이란 노래에서 흥남철수와 일사후퇴에 관한 가사가 나옵니다. 그럼 우리 함께 노래를 들어볼까요?▶굳세어라 금순이를 들려주고 다같이 부르게 한다.여러분 어때요? 흔히 듣던 익숙한 노래가 이렇게 슬프고 시대를 표현한지는 몰랐죠?자 그럼 이번 시간의 학습목표를 알아봐요.▶학습목표를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읽힌다.자 그럼 여러분 학습목표를 하나씩 읽어볼까요?▶학습구조도를 보여준다.오늘 배울 학습의 개괄적인 구조도예요. 6.25의 배경과 전개, 영향 등을 배우게 될거예요.그럼 이제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 봅시다▶인사를 한다.선생님, 반갑습니다.▶전시 학습내용 상기한다.▶사진을 보고 유추하여 발표해본다.▶노래를 다같이 불러본다.▶학습목표를 읽는다.문답식수업 준비 상태 확인선생님의 문제를 풀고 지난 시간의 학습 내용을 상기시킨다.너무 크지 않게 적당한 소리로 부르게 한다.전개(40분)수업의 전개 시작사건의 배경사건의 전개자료읽기탐구활동사건의 결과▶다큐멘터리 ‘전쟁과 인간’도입부를 보여준다.이 화면은 전쟁과 인간이라는 KBS 다큐멘터리 도입부분이예요. 6.25에 대해 배우기 전에 도입부 조금 보고 갑시다.▶소감발표를 하게한다.여기에 나오는 학생의 입장 있죠? 과거를 모르는 6.25라는 것은 먼나라의 일인것만 같다는 생각 여러분들은 어때요?▶6.25하면 떠오르는 것을 학생에게 질문한다.6.25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것들이 생각나는지 발표해볼까요?▶6.25전쟁의 발발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먼저 6.25가 발발하게 된 국제적 배경을 살펴볼까요? 중국에서는 1949년 모택동의 공산당이 강개석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전역을 공산화 시키게 됩니다. 또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이 철수하고 미 국무장관 에치슨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면서 북한등이 침략을 노리게 됩니다.▶에치슨 라인을 그려보게한다.그럼 교과서 269p지도에 에치슨 라인을 그려봅시다. 다 그려보셨북한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북한군이 먼저 남한을 선제공격한 단어를 무엇이라고 할까요?남침과 북침이란 용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쪽으로 침입했다고 해서 남침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답니다. 유의하세요.▶낙동강 전선까지 국군이 밀린것을 설명한다.전쟁 이틀후 27일에는 북한군의 남하속도를 저지하기위해 한강철교를 폭파하게 되고 그 다음날에 북한군은 서울에 입성하게 됩니다.7월 7일 미군의 개입으로도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못해서 남한은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 까지 밀리게 됩니다▶인천상륙작전으로 대대적 반격에 들어감을 설명한다.하지만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가게 됩니다. 9월 28일에는 서울을 재차 수복하게 됩니다.▶압록강변까지 진출한것을 설명한다.이어서 38선을 넘고 북한의 원산과 평양을 함락시키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 강변까지 진격해 통일을 목전에 두게 됩니다.▶중공군의 개입과 그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하지만 미군의 북진에 따른 위기감과 미국의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확보에 따른 파급효과 저지등의 목적으로 중공군이 개입하게 됩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대적 반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이듬해 1월초에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한강 이남으로 밀려나게 됩니다.▶38도선에서 전선이 고착화 된것을 설명한다.다시 3월에 서울을 재차 수복하고 38도선까지 진격해서 전투는 38도선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양상을 띄게 됩니다.▶정전협정이 맺어진 것을 설명한다.전선이 고착화되고 1951년 6월부터 유엔군과 공산군의 휴전회담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나 포로송환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대립이 심해서 타협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간 양군은 점령지를 조금이라도 확보하기위해 소모적인 전투를 계속 해왔습니다. 결국 협상개시 2년후인 1953년 7월에서야 휴전이 성립하게 됩니다.▶소년병 이우근의 일기를 읽게한다.이 일기는 포항전투에서 사망한 소년병 이우근의 주머니에서 나온 일기예요. 자 한번 읽어봅시다.▶학생들에게 6.25때로의 상황을 가정해▶6.25의 영향중 인명피해 부분을 설명한다.숫자가 짐작이 잘 안되죠. 남북한을 합쳐서 총 500만의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유엔군과 남한군은 48만명이 사망했고 북한군은 52만명이나 사망했습니다. 중공군의 경우는 100만명이 참가해서 사상자가 90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전쟁고아는 10만이 되었고 이산가족은 1000만명이나 되었습니다. 남한의 민간인은 약 90만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자료에서는 북한의 민간인수가 큰 차이를 보이는데 한국정부발표로는 20만명인데 북한의 발표는 2백 60만명이네요. 민간인 수치가 부풀려져 북한의 피해가 크다는걸 강조하고 있습니다.▶경제적 피해를 설명한다.경제적 피해로는 민간가옥이 약 61만여채가 차괴되었고 철로, 교량, 전선, 공장등의 산업시설 또한 50%내외가 파괴되었습니다.▶정신적 피해를 설명한다.인명과 재산피해도 심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에 남아있는 정신적 피해가 또 있죠.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조선일보 사설을 읽게한다.여기 신문에 게재된 사설을 읽고 한번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느낌을 발표해봐요.▶다큐멘터리 ‘전쟁과 인간’의 엔딩부분을 보여준다.여러분 오늘 수업을 듣고 아까 수업시작때 동영상을 보고 느꼇던 것과 지금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발표해볼까요?▶시청한다.▶소감발표를 한다.▶떠오르는 것을 발표한다.▶교과서에 라인을 그려본다.▶일기를 읽어본다.▶편지를 써본다.▶정신적 피해에 대해 발표한다.▶사설을 읽고 느낌을 발표한다.▶동영상을 본 후 소감을 발표한다.동영상문답식탐구식탐구식문답식발표식전원이 바르게 시청하도록 환경을 조정한다.지리적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편지를 숙연한 분위기에서 쓰도록 한다.현재와 연관지어서 생각할수 있도록 유도한다.정리(5분)내용정리형성평가차시예고과제제시인사▶6.25전쟁의 배경과 전개, 영향을 정리한다.자 그럼 오늘 배운것에 대해서 정리를 해볼까요?모두 탐구용지를 보면서 따라오세요▶형성평가중 기본문제를 풀게 한다.자 그럼 형성평가를 풀어볼까요? 낙동강했죠.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의 삶-참고 자료 모음-두산 EnCyber 백과사전1492년 콜럼버스에 의하여 발견된 신대륙의 원주민(에스키모·알류트 등은 제외).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동양의 인도의 일부로 착각하여 원주민을 인디오(Indio:에스파냐어로 인도인이라는 뜻)라고 불렀는데, 뒤에 본래의 인도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아메리카의 인도인', 즉 아메리카인디언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메린드(Amerind) 또는 아메린디언(Amerindian)이라고도 한다. 발견 당시의 인구는 아메리카 전체에 약 1,300만 명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내역은 북아메리카 100만 명, 중앙아메리카 300만 명, 남아메리카 90만 명이다. 16세기 이후에 일어난 유럽인의 침입은 그들의 급격한 인구 감소와 문화의 파괴를 초래하였다.핵(核)아메리카라고 불리는 메소아메리카(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대에는 유럽인의 도래에 앞서 문명이라 할 만한 고도의 원주민문화가 존재하였으나 멕시코의 아스테크 문명과 유카탄반도의 마야문명은 1521년 코르테스에 의하여, 안데스 지대의 잉카문명은 1532년 피사로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어 멸망하였다. 이후 중앙·남아메리카의 인디언은 에스파냐·포르투갈인 밑에서 광산·대농장의 노예로 혹사당하고,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은 서부개척의 희생자로서 점점 그 수가 감소되었다. 한편 중앙·남아메리카에 사는 아메리카인디언에 한해서 인디오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1. 기원아메리카인디언의 기원에 관해서는 대별하여 구대륙으로부터의 이주설(移住說)과 신대륙 독립발생설의 2가지 설이 있다. 구대륙으로부터의 이주설도 초기에는 노아의 자손 또는 아틀란티스에 살았던 주민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었다. 한편 독립발생설은 아르헨티나의 인류학자 아메기노가 주장한 것으로 이것도 인디언뿐만 아니라 전인류 발생의 고향을 아메리카로 보는 설이다. 처음에는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그 근거가 되는 인골(人骨)이 전부 최근의 인디언의 것으로 판명되어 결국 소멸하였다.신대륙에서는 유인원(類人猿)은 물론파치족 등이 있다.② 북대서양 인디언: 일명 평원(平原)인디언. 수렵 ·어로에 종사하는 호전적(好戰的) 종족으로 로키산맥의 동쪽, 대서양 연안의 광대한 삼림초원의 주민이다. 백인의 서부개척으로 그들의 소유지에서 추방당하자 격렬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역부족으로 백인에게 패배하여 ‘보류지(保留地)’에 수용되었다. 이로쿼이·슈·샤이엔·휴런족 등이 유명하나 현재는 거의 절멸하였다. 키가 크고 근육질(筋肉質)의 체구에 피부는 황색을 띤 담갈색이며 모발은 직모(直毛), 중두(中頭)에 코가 크고 매부리코이며 몽골인종과는 다른 많은 형질을 가지고 있다.③ 남태평양 인디언:중두이며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보다 신장이 작다. 체구와 얼굴 생김새는 일반적으로 날씬하고 가냘프며 광대뼈는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고, 피부는 갈색이다. 아메리카 고대문명의 담당자는 이들 종족이었다.④ 남대서양 인디언: 주로 브라질 우림지(雨林地)의 주민이다. 키가 작고 피부는 짙은 황갈색이며 광대뼈는 돌출하고 중두에 모발은 직모이며, 체모는 없다. 아마존강 상류에는 다른 부족의 머리를 베어 오는 것으로 유명한 히바로족, 브라질·파라과이에는 투피 가라니족이 있다.제2차적인 2군은 남아메리카의 팜파스 인디언과 팔레오 아메리카 인디언이다.① 팜파 인디언: 강한 단두를 특징으로 하고 키가 크고 튼튼한 체구를 가지고 있으며 피부는 황갈색, 모발은 직모, 코는 넓적하고 융기가 현저하다. 차코·팜파스 평원, 파타고니아를 형성하는 스텝지대에 거주한다. 파타곤·테웰체족 등이 있고, 차코 지대의 인디언과 백인과의 혼혈 중에는 가우초라고 불리는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자가 많다.② 팔레오 아메리카 인디언: 원시적 타입으로 장두에서 중두를 특징으로 한다. 남아메리카의 남단 티에라델푸에고섬 및 인접한 여러 섬에 거주하며, 야간·아라카르프족 등이 있다. 키가 작고 장두이며 넓적한 코, 황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모발은 파상(波狀)을 이루기도 한다. 현재는 거의 절멸하였다.4. 문화발견 당시의 아메리카 인디언 사이에는 원시채집수렵민으 계속한 지역 이외에는 대체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져 오늘날의 미국인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5. 현황미국에서는 1824년 군(軍)의 관할하에 인디언국(局)이 창설되었고 1849년에는 내무부에 이관되었다. 오랫동안 인디언과의 전쟁을 방지하고 그 생활을 개선하는 데 실패하였으나 지금은 농업·산업·건강에 관한 원조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교육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왔는데, 1890년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에 인디언 학교가 설립됨으로써 교육이 진지하게 고려되었다. 현재 젊은 세대는 급속히 진보 향상되었으며, 특히 남부에서는 직업적인 지식·기능을 몸에 익힌 자가 많아졌다.최근 수십년 사이에 남부에서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남부의 인디언은 매우 유복해졌으며, 지금도 가난한 북부의 종족과는 현격한 차이가 생겼다. 미국 시민은 대체적으로 다른 유색인종에 대하는 것보다 많은 동정심을 가지고 그 토지의 원(元)소유자라는 점에서 그들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권은 1924년에 비로소 주어졌다.인디언을 위한 보류지(保留地)의 대부분은 미시시피강의 서쪽에 있는데 200개 이상을 헤아린다. 또 로키산맥과 셰라카스케이드산맥과의 사이에 있는 서쪽 대지의 남부에도 보류지가 설정되어 있다. 캐나다의 인디언은 ‘인디언 법령’에 의하여 관리·보호되고 이 법령에 의하여 참정권을 얻을 수 있지만 참정권을 획득한 인디언은 인디언으로서의 특별한 보호는 받을 수 없게 된다.아메리카 인디언의 인류에 대한 공헌으로서 옥수수·감자·고구마 등의 재배식물을 구대륙에 전파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건조하고 메마른 땅에 견디기 때문에 미맥(米麥)을 기조로 한 구대륙의 식량사정을 호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토마토·칠레겨자·담배·땅콩 등도 인디언이 만든 것들이다.북아메리카 원주민:시사초점:세계 연감 1996시사초점북아메리카 원주민론 매코이(RON McCOY) 미국 엠포리아주립대학교 Center for Great Plaines Studies 소장. 저서로〈카이오와족에 대한 회의 종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쪽으로 굽기는 했으나 옛날부터 전해져온 믿음은 부러지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교회 등과 같이 조직화된 종교는 부족을 초월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토지 및 무수한 영물에 대한 믿음 등과 관련된 여러 숭배의식 역시 번창하고 있다. 성지를 보존하고 성스러운 물건을 돌려받으려는 법적인 투쟁은 주로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캐나다 인디언 부족 역시 미국에서 진행되는 현상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세계의 모든 종교는 교리에서 신성시하는 성지를 갖고 있다. 선사시대 때부터 애리조나 동북부에서 살아온 푸에블로인 인디언 일파인 호피족 중 상당수는, 플래그스태프 인근 샌프란시스코 봉이 황량한 대지에 비를 내리게 하는 초자연적 존재인 카치나스의 집이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호피족은 또 그랜드캐니언의 콜로라도와 리틀콜로라도 강 합류점 근처의 사파푸에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곳이 조상이 살던 지하 주거지가 홍수로 물에 잠기자 피신해 나온 곳으로 믿고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지 중 일부는 부족 영토 내에 위치해 있는 것도 있으나 몇몇은 국유지나 사유지에 위치해 있는 곳도 있다. 성지의 위치에 관계없이 이를 성지로 믿고 있는 부족들에게는 성지의 보존상태와 주변 환경이 여전히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호피족 중 상당수가 샌프란시스코 봉에 스키장이 들어서 있는 것에 분개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성지와 마찬가지로 신성시하는 영물을 갖고 있는지 여부가 부족 신앙의 생명력을 좌우한다. 유물 반환작업은 기본적으로 고고학적 탐사 등의 과정에서 발굴된 유골이나 정교하게 짠 태피스트리(벽걸이나 실내 장식용 비단) 개인 소장품 등과 같이 문화적으로 민감한 사물을 부족의 손에 되돌려주는 것이다. 라코타족의 흰색 버펄로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여성용 파이프와 아라파호족의 평면 파이프, 샤이엔의 성스러운 화살 등은 이미 원래 이를 소유했던 부족들에게 반환되었다.북아메리카의 정부기구와 박물관측은 이제까지는 성지와 으로 간주했다.NAGPRA는 인디언 부족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단체에 대해 특정 유물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이를 제한하는 법령은 없다. NAGPRA를 통해 인디언 부족에게 반환된 유물 중에는 호피족의 코옘시(진흙머리) 마스크, 나바호족의 독전의식에서 사용하던 탄띠, 주니족의 전쟁의 신 조각품, 블랙푸트족의 큰사슴 혓바닥 턱가리개, 포니족이 신성시하는 장례용품 3만 1,651종 등이 포함되어 있다.NAGPRA에 따른 유물 반환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으나 성지문제는 그 장소가 인디언 부족이 통제하는 바깥 지역에 위치할 때 해결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예를 들어 지난 1980년 미국 정부 대(對) 수(Sioux)족 사건에서 연방 최고법원(대법원)은, 정부가 1877년 라코타 7개 부족으로부터 사우스다코타의 블랙힐스 지역을 취득한 것은 법 영역 밖의 행위였다고 판시했다. 라코타족에게는 상당한 금전적 보상이 제안되었지만, 7개 부족 모두가 성지로 간주하고 있는 땅을 반환해줄 것을 고집하며 이의 수용을 거부했다.성지를 놓고 벌이는 갈등은 서로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는 물론, 단일 부족 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애리조나 북부 나바호족 중 일부는 추스카 산맥을 성지로 숭배하고 있으나 또다른 일부는 추스카 산맥에서 목재를 조달하는 부족의 벌목회사에서 벌채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영적인 중요성을 갖는 또다른 장소인 블랙메사에서는 나바호족 정부의 지지를 받는 회사에 의해 노천탄광이 운영되고 있으나, 부족 내 일부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혹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 헌법 수정 제1항이 성스러운 장소를 보호해줄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오늘날까지 그렇지 못했다. 대법원은 지난 1987년 ' 링 대(對) 노스웨스트 인디언 묘지 보호협회 소송사건'에서 인디언 부족이 성스러운 장소로 생각하고 있는 연방정부의 땅을 정부가 사용하는 것은, 비록 토지 사용으로 인한 물리적 파괴가 초래되더라도 종교적 자유에 어긋나는했다.
'야쿠자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쉽게 말해서 일본의 조직폭력배하지만 한국의 그것과는 다른것이 일본의 야쿠자 이다오락실에 가보면 더 킹오브 파이터즈 란 대전격투형식의 게임이 있는데 거기에는 야쿠자 캐릭인 야마자키 가 나온다. 이렇게 야쿠자 캐릭터까지 존재할정도로 야쿠자란 일본에서 깊숙히 자리잡은것이다.「조용히 두목의 얼굴을 응시하는 여자의 단호한 눈빛, 뭔가를 결심한 듯한 결연한 표정, 이내 칼을 집어들고 약지 손가락을…」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가시나무」에 등장하는 야쿠자의 모습이다. 언뜻 우리나라의 '조직폭력배'(이하 '조폭')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냉혹한 조직의 모습이라든지 그 조직을 배반할 때 따르는 잔혹한 형벌등이 그렇다.얼마전 한국 영화계에는 이른바 조폭 바람이 불었다.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공전의 히트를 치기 시작했고 덩달아서 나온 영화들도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즐비차게 나왔다.나름대로 일본과 한국에서 주가를 높이고 있는 조직폭력배.일본의 '야쿠자'와 한국의 '조폭'. 일면 비슷해 보이는 그들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그 차이에는 분명 한일 양국의 역사 및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야쿠자에 대한 설명을 중심으로 야쿠자와 조폭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1. 야쿠자란?어원은 8 (야)·9(쿠)·3(자)에서 유래되었다. 화투판에서 이 숫자에 해당하는 화툿장을 받으면 끗수가 0, 즉 망통이 되어 가장 쓸모가 없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에서 도박으로 생활을 하는 자를 야쿠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차츰 일정한 직업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등쳐먹는 건달이나 조직폭력배를 지칭하게 되었다. 야쿠자는 일본 사회의 그늘을 상징하는 존재이다.일본에서 수세기 동안 전통적으로 이어온 범죄 집단의 구성원으로 야쿠자 조직은 20세기에 들어 마피아와 같은 조직을 갖게 되었다. 야쿠자들은 흔히 사무라이와 같은 의식을 치르기도 하며 때로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그들은 일본의 주요 도만명에 가까운 조직원을 거느린 집회결사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2. 야쿠자의 역사초기의 야쿠자는 쇼군의 봉건적 법률에 의하여 통치되는 사회에서 반즈이인 조베이가 죽은 지 100년이 넘어서야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중세 지하 세계의 전문적인 구성원들로서 오늘날 이들이야말로 현대 야쿠자의 전신으로 널리 인정을 받는다. 이들은 전통적 도박꾼인 바쿠토와 행상인들인 데키야들이었다. 이 두 집단의 습관들은 너무나 특이하여 오늘날에도 경찰은 이들을 바쿠토 혹은 데키야들로 분류한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제 3의 집단인 구렌타이, 즉 불량배들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이 두 집단 구성원들의 출신은 대체로 가난한 자들, 농토가 없는 자들, 범죄자들 및 사회 어디에서나 소외받고 있는 탈락자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각 집단은 제각기 특정한 분야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아주 같은 활동지역 내에서도 서로 충돌없이 지낼 수 있었다. 바쿠토는 내왕이 잦은 대로변과 옛 일본의 읍에서 활동하였으며 데키야는 점점 늘어나는 시장터에서 움직였다.후지타 고로는 그의 "백년사"에서 이 거친 행상인들과 대로변의 도박꾼들로부터 야쿠자의 기원을 찾고 있다. 후지타는 야쿠자 원로들과의 대화와 일본 내 도서관 소장 자료 및 심지어 옛 야쿠자의 묘소 방문을 통한 연구 속에서 오늘날 두목들의 범죄 계보가 1700년 대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지타의 저서에서 주장되는 계보는 각종 야쿠자 분파들간의 선입견들을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이 분파들 사무실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위대한 두목들의 사진 옆에는 그 집단을 옛날의 고귀한 무법자들과 어떻게든 연결하여 만든 족보가 걸려 있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세습적 연결이 혈연이 아닌 입양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이러한 야쿠자들은 1867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근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설 현장과 하역장으로부터 회원들을 모집했다. 그들은 심지어 인력거 사업에까지 관여했다. 그러나 경찰이 바쿠토갱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옥으로 보내졌다.2차 대전후, 미점령군은 야쿠자를 자신들이 하는 일에 반하는 주요 위험대상으로 보았다. 그들은 야쿠자의 활동을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1948년, 미군정이 그들의 조사는 끝이 났고 위험 집단이 사라졌다고, 아니면 적어도 줄어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작업을 멈추었다. 그러나, 점령군이 실시했던 식량배급제는 결과적으로 갱들이 부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암 시장을 형성했다. 시민 경찰들은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갱은 방해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다. 몇몇 점령군의 관리들은 야쿠자를 돕기까지 하였다.점령군은 야쿠자가 강력한 조직체이고 익명의 정부고급관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두 오야붕 아래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미군정은 그들이 야쿠자로부터 일본일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1950년 그들의 패배를 인정하게 됐다.전후시대에 야쿠자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더욱 폭력화되었다. 칼은 과거의 유산이 되 었고 총이 새로운 무기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강도질과 갈취의 대상은 다른 행상이나 노름꾼 그리고 특별한 집단만이 아니었다. 점점 보통시민들도 그들의 대상이 되었다.미국영화 갱단들(a la Guys and Dolls)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모습 또한 달라졌다. 그들은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고 검은 양복과 검은 넥타이 그리고 하얀 셔츠를 입었으며 머리를 짧게 자르기 시작했다.1958년에서 1963년 사이, 야쿠자의 조직원들은 150%이상 늘어나서 일본의 정규군보다 많은 184,000명이 됐다. 일본전역에서 활동하는 갱조직은 약 5000개나 됐다. 야쿠자는 자신들만의 영역 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폭력을 동반한 혈전이 시작되었다.3. 일본에 있어서 '야쿠자'의 존재는?세계적으로 봐도 가장 치안이 안정된 나라인 일본에서 야쿠자의 존재와 영향력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자전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자전거에도 고유 번호를 붙이고, 의심되는 자전거는 언제든지 불러세워 번호를 조회하는 경찰. 이다. 더더욱 황당한 것은 야쿠자들은 아예 자신들 조직의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내고 있다. 우리로 말하면 무슨 파, 무슨 파라는 이름을 공개적으로 내놓고 활동하는 것이다. 이런 조직이 일본엔 10만 명 존재하는데도 경찰은 손을 대지 못한다. 손을 대기는 고사하고 어떤 때에는 보호해 주는 게 아닐까 싶은 한심한 광경들도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야쿠자 사무실에 갑자기 회의가 있다고 할 때, 갑자기 으리번쩍한 벤츠, 링컨 콘티넨탈, 캐딜락들이 들이닥친다. 잠시 불법 주차해도 견인차가 끌어가는 게 일본이지만 이 때에는 예외라고 한다. 오히려 줄줄이 불법 주차된 야쿠자 차들을 정리해 주기 위해서 경찰이 나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도 보인는 것이다. 좋게 해석해 준다면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리 통제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다.그러면 야쿠자는 무얼 먹고 사는가? 당연히 민간인이 피땀 흘려 버는 돈의 착취해서 산다. 일본인들이 대중적으로 이용하는 '고리대금업`이라 하는 것은 야쿠자 사업이다. 빌리는 것은 쉬우나 공갈, 협박, 폭력이 뒤따른다. 수많은 일본인들의 이런 돈을 쓰고 있는 건 신문 광고나 엄청난 광고 인쇄물의 정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돈을 못 갚는 사람들은 야쿠자들의 잔혹하고 비열한 협박 폭력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자살에 이른다. 매춘부 인구 3분의 1이 바로 이런 야쿠자 빚을 못 갚아 이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높은 자살률과도 무관하지 않다.연예계는 물론 스포츠 흥행도 야쿠자의 사업이다. 합법적인 도박은 물론이고 비합법적인 모든 도박에 야쿠자는 관여한다. 세계 어느 나라나 도박이란 그들의 점유 사업이지만 일본처럼 일반인들에게 법을 따지는 나라에서 그걸 바라보고 가만히 있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그러나 야쿠자의 조직력과 뿌리를 캐보면 이들을 쉽사리 대할 수 없는 경찰의 실정도 짐작이 된다. 그 유명한 록히드 사건도 야쿠자의 대부 고다마 요시오가 당시의 다나카(田中角榮) 수상과 미국을 연결한 것 대학생, 노동자, 당원들의 거센 시위를 경찰 혼자 봉쇄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발급된 티켓은 야쿠자들을 동원한다는 아이디어였고, 이미 야쿠자의 정치적 동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의 민비 시해 사건 역시 일본 우익 야쿠자들의 소행이었던 바 원래부터 야쿠자란 일본의 국수 우익주의자들의 오른팔격인 행동대로서 규모가 방대해져 왔다.안보 투쟁 때의 야쿠자 행동대는 그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해냈다. 그들은 애국을 내세웠다. 이 나라를 폭력 혁명 공산당들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그들 역시 거침없는 폭력을 휘둘렀다. 시간이 지나고 그러한 정치적 과도기가 지났을 때 야쿠자들은 이미 경찰 통제력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커져 있었던 것이다. 과도기의 시대에 정부 특히 우익 정치인들은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특혜를 베풀었다. 야쿠자는 이미 밤의 세계를 지배하고 검은 경제의 극대화 작업에 돌입해 있었던 거다. 경찰의 통치만으로는 안 되니까 너희들이 어느 지역을 관할 통제하라는 것이다. '긴자(銀座)의 대통령`으로 불렀던 한국계 보스 마치이 같은 이들이 그 시대의 기린아들이었다. '긴자의 밤은 내가 다스린다. 대신 여기서 무슨 사고가 나면 내가 책임진다' 이런 식의 논리가 일본 전국 각지에 적용되면서 경찰과 야쿠자의 공존 논리도 성립되었다. 물론 세인들이나 매스컴의 눈이 있으니깐 가끔씩 단속을 한다. 단속을 하는 날은 당연히 야쿠자들 사무실에 연락을 해준다. 야쿠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기류, 마약류, 불법 물건, 장부들을 숨긴다. 막상 경찰이 왔을 땐 그들의 체면도 세워주기 위해 한두 자루 정도의 총이나 일본도 등을 남겨둔다. 경찰에도 건수를 올려주어야 피차 공생한다는 생각이다. 야쿠자는 폭력단이 아니라는 구호는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겨난 의식이다. 자기들이 필요했던 시기에는 경찰의 선봉대로 내세우고 이제 와선 폭력단 대책 新시행법으로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냐며 그들은 성난 눈초리로 정부와 경찰에게 오히려 데모하는 것이다.이러한 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