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혁명의 혼재, 태평천국목차1. 태평천국의 시대적 배경2. 홍수전과 태평천국3. 전개과정4. 천조전무제도와 자정신편5. 한계와 의의※ 태평천국의 전개1848년 1월 풍운산 체포정치적인 성격 가지게 됨1850년 6월 배상제회에서 단영 선포무장 조직화1851년 1월 금전기의3월 홍수전 천왕에 즉위9월 영안 점령,1852년 2월 천력 발표6월 풍운산 전사9월 소조귀 전사12월 태평군익양, 병주, 한구 점령1853년 1월 증국번 호남성단련을 규합, 상군 개칭태평군 무창성 함락2월 태평군 황주 구강 등을 점령3월 태평군 남경 점령,천경으로 개명, 체제정비1854년 10월 상군 무창 한양 탈환1856년 9월 천경사변태평천국의 통합력 상실상군 무한을 점령1857년 청조 강남대영과강북대영의 재건1858년 9월 태평군 안휘성 북부전투 승리이수성, 진옥성 부각11월 태평군 상군 정예 괴멸12월 강북대영 붕괴1859년 4월 홍인간의 개혁『자정신편』저술1860년 5월 강남대영 붕괴소주 함락시킴1861년 이홍장 회군 창설1862년 1월 1차 상해 전투영?불연합 상승군에게 패배4월 이홍장의 회군 상해진출5월 증국번의 상군 천경포위6월 2차 상해 전투 - 회군에게 패배1863년 12월 상승군 회군과 함께소주탈환1864년 6월 홍수전 사망7월 상군, 천경함락태평천국의 실질적 붕괴1868년 1월 뢰문광 부대 진압태평천국의 멸망1. 태평천국 운동의 시대적 배경중국과 같이 거대한 영토와 막대한 인구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국가의 경우 대개 어느 한 두 가지의 요인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다양한 요인이 중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태평천국이 등장한 19세기 중반의 경우도 이러한 사회경제적 모순이 극대화됨으로써 민중의 불만 표출은 필연적인 상황에 있었다. 그 원인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강희, 건륭 시기의 안정적 통치에 힘입은 번영 속에서 인구는 급속히 증가한 반면, 토지의 증가는 소폭에 그침으로써 민중들이 생활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기본적 환경에 직면하였다는 것이다의 빈발이 그것이다.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자연 현상의 변화는 흔히 인간행위 그 가운데에서 통치자의 행위와 연관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태평천국이 봉기하기 이전인 1846 ~ 1848년 사이를 비롯한 중국의 중남지역에는 극심한 홍수와 가뭄이 몰아 닥쳤던 것이다.다섯째, 광서지방이 처한 자연적 환경과 경제적 낙후가 그것이다. 광서지방은 지형적으로 산이 많고 농토가 적어 물산이 풍부하지 못하였고, 지리적으로 중국의 남쪽 끝에 위치하여 모든 면에서 중국의 중심과 떨어져 있었고 교통도 불편하였기 때문에 관리의 횡포 또한 매우 심한 곳이었다.또한 광서지방은 종족적으로도 한족 이외에 다양한 소수민족이 거주하였으며, 광동, 호남, 복건, 강서 등지로부터 온 객가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광서지역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하였으며, 인재의 배출 또한 타 지역에 비해 열악한 상황을 보였다.여섯째, 서구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중국의 무능이 드러남으로써 청조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청조가 1840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굴욕적인 남경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중국사회의 혼란은 크게 가속화 되었다.2. 홍수전과 태평천국홍수전은 1814년 광동성 화현의 평범한 농민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18세가 된 홍수전은 고향 서당의 훈장으로 초빙되어 이후 1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는 과거를 통한 관료사회로 진출하기를 열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세 때부터 4차례에 걸쳐 시도한 과거 응시의 결과는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네 번째의 과거 실패 후 홍수전은 청조의 과거 제도가 이미 유명무실하다고 판단하고 부패적인 청조의 통치에 격분한다.불우한 자신의 처지와 당시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백성의 고통을 연관시켜 이해하게 된 그는 과거를 통한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843년 네 번째 과거 시험에서 실패하여 마음던 양수청, 빈농 출신의 소조귀, 지주 출신의 위창휘, 부농 출신의 석달개 등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태평천국과 같은 거대한 정치운동을 성공적으로 도모하였다. 그리고 1851년 홍수전은 38회 생일을 맞아 금전촌에서 ‘태평천국 원년’을 선포한다. 이후 그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면서 스스로를 천왕이라 칭하고 9월에는 영안성을 공략하여 태평천국군의 사기를 대대적으로 진작시키면서 다시 봉건제를 실시하여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였다.1852년 6월 광서성 동북부의 군사 요새인 전주를 공략하여 점령한 뒤, 12월 익주를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6월에는 풍운산이 12월에는 소조귀가 전사하였다. 1853년에는 무창성을 점령하고 이어 남경의 공략하는데 집중하였다. 무창 점령 이후 태평천국은 북경으로 향할 것인지 남경을 근거지로 한 이후에 북진할 것인지 등의 몇 가지 전략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남경 함락 후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고 천경으로 개칭하면서 태평천국은 진군을 멈추었고 북경 공략도 시도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홍수전은 남경을 천경으로 개정하고 새로운 정책인 ‘천조전무제도’를 반포한다. 이는 토지의 균분과 생산의 평등분배를 기초로 하고 있어 농민들에게 희망적이었으나 상당한 모순점도 포함하고 있었다.한편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서양 세력들도 점차 개입의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어느 쪽이 그들에게 이득이 될지가 중요했다. 따라서 태평천국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그들과 만나볼 필요를 느끼고 교류를 시도하지만 오만하고 거만한 행동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증국번의 상군, 이홍장의 회군 등으로 신사층이 결집하여 태평천국운동을 저지하며 대항하고 있어 태평천국은 더 큰 세력화를 이루는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이후의 태평천국은 중심부의 지도력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내부의 힘이 미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변질되었다. 천왕부에서 정무를 의논하던 것이 엄숙한 의식과 같은 것으로 변했고 천왕은 태평천국의 현실에 직접 접촉하는 일이 없어지고 모든 일상의 정무와 국무는 동왕이 장악하게 되었원을 반영하여 평등적 토지분배에 기초한 토지정책을 핵심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토지 정책의 경제적 기초위에 그것이 상응하는 정치ㆍ경제ㆍ군사ㆍ문화ㆍ사법ㆍ혼인 등의 제도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태평천국 혁명이 건설하려는 사회의 청사진으로, 청조의 봉건적 지배체제에 대항하여 민중의 이상을 제시한 것이었다. 천조전무제도의 핵심은 토지정책을 근간으로 한 일련의 경제정책인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첫째, 천하의 토지는 천하의 사람이 함께 경작한다는 원칙에 따라 지주제를 폐지하고, 토지생산력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9등분하여 가구 수의 다과에 따라 평등 분배한다.둘째, 인민이 농업노동 이외에 양잠, 길쌈, 재봉, 가축사육, 목공일 등의 의무화함으로써 농업과 수공업이 결합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도모하였다.셋째, 25가를 하나의 경제적 자급단체로 설정하여 여기서 생산된 산물은 필수 소비량을 제외하고 모두 국고에 납입하며, 필요물자는 국고로부터 일률 지급하는 평등분배 원칙을 확립하였다.넷째, 늙은 홀아비와 과부, 자식 없는 노인과 고아 그리고 병약자나 신체불구자 등 노동능력 상실자는 모두 국고로부터 공양하고, 풍장지경세서 흉작지역을 돕는 등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하였다. 이 같은 경제 정책의 실시로 이상 사회의 건설을 구상하였다.천조전무제도의 내용 중에는 지주-전호 관계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모든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여 토지집중이 없고,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농민적 토지소유를 보장하였다. 이는 자신의 토지를 가지려는 무수한 농민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지주제에 대한 부정은 봉건적 토지제도에 대한 부정이며, 농민적 토지소유의 보장은 반봉건적 토지제도의 확립이라 할 수 있다. 즉 천조전무제도는 반봉건적 토지강령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토지강력으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근대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이해할 때 천조전무제도가 자본주의적 토지제도이려면 토지의 사유권이 보장되고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보장되며 그것이 자본으로 전화 될 수 있어야 한다.내용에서도 여러 가지 결함을 안고 있었다.자정신편자정신편은 홍인간이 홍콩 등지에서 개신교 선교사들과의 교유과정에서 얻은 자연과학, 정치학, 경제학, 외국의 정세 등에 관한 지식을 기반으로 저술되었다. 그리고 천왕 홍수전이 1856년 9월의 천경사변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던 태평전국의 내정을 진정시킨 후 천경으로 올라온 조카 홍인간을 간왕에 봉하고 최고 행정직인 군사에 임명함하였을 때 자정신편을 기초로 하여 개혁을 하고자 하였다. 그 개혁의 방향은 태평천국의 경제이념과는 상충하는 자본주의적 개혁이면서 대외인식 방면에서도 기존의 태평천국 지도층과는 상당한 인식 차이를 보이고 있다.자정신편에서 홍인간은 주권국가로서의 외국을 인정하여 황제 제도 하에서의 조공무역이 아닌 통상을 허락하고,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에게 주권국가로서의 태평천국의 국법 준수를 요구했으며, 중국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타국의 주권을 인정하여 그들과의 친교를 위해 외교문서에 태평천국을 높이고 상대국을 비하하는 어휘사용을 금지하였으며, 무력이 아닌 국력과 신의로 외국이 자신들을 추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전통적인 중화사상이나 태평천국의 그 이전까지의 대외관과 달리 태평천국 지도계층의 객관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의식을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5. 한계와 의의태평천국은 그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 한계로써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고 그 의의를 찾음으로써 긍정적인 면을 짚어 볼 수 있다. 먼저 한계를 살펴보자.첫째 종교적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서양의 기독교는 일신교적인 신앙이다. 이러한 교리에 의거하여 창도된 홍수전의 ‘배상제회’에서는 ‘상제’만이 신이고 중국 민간에 유포되어있는 염라천자나 성황토지신 등은 모두 ‘염라요’로 불리며 배척되었다. 그런데 홍수전은 ‘천부’를 대신해 이 세상을 주재하는 ‘천왕’을 자처하였으니, 이는 민간 신앙을 그대로 있다.
조선 후기 농업기술의 변화에 따른 사회변화목차Ⅰ. 서론 1Ⅱ. 조선 후기 사회의 분위기 1~2Ⅲ. 조선 후기 농업 기술의 변화 2~4Ⅳ. 농업기술 변화에 따른 사회의 변화 4~5Ⅴ. 결론 5Ⅰ. 서론조선시대 농업의 발달은 국가의 근본을 다지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는 농업이 국가의 기본적인 사회의 틀을 유지하는데 농업이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며 그와 관련된 연구가 지속되면서 사회의 안정은 농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국가는 이 분야에 집중적으로 적극적인 권농정책을 펼쳤으며 지배층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농업기술이 발전되었고 농업생산력은 향상되었다.그러나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면서 농업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국가는 재정적인 수입에서 부터 사회전반에 이르는 혼란과 변화를 책임져야 했다. 때문에 농업기술은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에 더욱 주목을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농민층의 분화와 농업방식이나 형태에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에 따른 농업의 분화는 다시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피지배계층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층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조선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분위기를 알아보고 농업기술의 변화가 이것과 어떠한 관련성을 갖으며 사회변화를 일으키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조선 후기의 사회적 분위기조선 후기는 기존의 사회구조가 급속도로 변동과 해체를 반복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16세기 말의 왜란과 17세기 초의 호란을 겪은 이후 뚜렷하게 나타나며 정치ㆍ사회ㆍ경제ㆍ문화 등의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조선은 양반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로써 일반 백성들의 사회생활에는 많은 제제가 따랐다. 그리고 신분상으로 지배계층에 속하는 양반계층은 피지배계층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예속관계를 강화하였다. 16세기 중반 이후로는 이 체제가 약화되다가 왜란과 호란 이후에는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지러워 사회가 동요하고 있었다. 따라서 17세기 조선사회는 기득권층의 이익에 대한 반발이 나타나고 농민층은 의식변화와 함께 농업에 관련한 다양한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양난 이후 경제면에 나타나는 현상은 위의 상황을 가속화 시키게 되었다. 전세를 개편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과정에도 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각종 부가세가 추가되었다.) 국가수입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공납은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폐단)으로 시정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고 있었고 군역제도 또한 큰 부담)으로 남아있었다. 국가의 재정적 기반을 위한 수취제도는 농민의 이탈을 지속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등장은 사회계층의 분화를 예고하고 있었다.이렇듯 양난으로 혼란해진 질서는 쉽게 복구되지 않아 이런 혼란의 상태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모색되고 있었다.Ⅲ. 조선 후기 농업 기술의 변화조선 후기의 농업기술의 변화는 이전의 농업기술의 발전과 별개의 것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방법들이 차츰 보완되거나 개량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조선 전기의 농업기술이 바탕이 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농업기술의 변화를 살펴본 후 후기에 변화에 주목하여야 한다.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중농정책과 더불어 농업과 관련된 모든 계층들이 생산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 농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우선 개간사업으로 농경지가 확대되고 각종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농사를 짓는 방법을 연구하여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주력하였다.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땅을 기름지게 하는 시비법(施肥法)의 발달로 해를 걸러 휴경을 하지 않고 매년 토지를 경작 할 수 있게 되어 밭에서는 조, 콩, 보리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지고 논에서는 벼와 보리의 이모작(二毛作)이 가능한 지역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에 들여온 중국 화북지방의 농법을 소개한『농상집요(農桑輯要)』나『제민요술(齊民要術)』을 참고 하면서 조선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현실적인 토에 적합한 독자적인 농서로써 영향을 미쳤다. 또한 벼의 품종도 많이 개량 되어 성종 대에 강희맹(姜希孟)의『금양잡록(衿陽雜錄)』에는 경기도에서 81종 곡식이 재배 되었다는 내용과 그 특징들이 서술되어 있다. 16세기에 이르러 지방의 사림들은 중국 강남의 농법을 받아들여 수전농업(水田農業)을 시행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발전들은 16세기 말 부터 시작된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 황폐화 된 국토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양난 이후 중농정책에 의해 진전을 보이고 있었지만 17세기로 넘어오면서 노동력의 부족을 해결되지 않았고 농민들은 생활의 기반을 잃고 타지방으로 떠돌아 생산성은 쉽게 높아지지 않았다. 때문에 농업생산성과 수리시설의 보완을 우선으로 하여 정비에 나섰다.조선 후기에는 노동력을 많이 투입하여 생산성을 높이던 노동생산성 방식보다 토지의 생산성을 높이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조방적 농업으로 방향이 전환되면서 이앙법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농업생산과 바로 연결되는 수리시설의 보완과) 수전농업의 발전은 밭이 논으로 바뀌고 모내기법이 더욱 확산되기도 하였다.밭농사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16세기 이래 쟁기가 개발되면서 땅을 깊이 파고 밭두둑을 높이 하여 고랑과 이랑에 적합한 작물을 재배하였으며 특히 밭고랑에 곡식을 심는 견종법(?種法))이 보급되면서 생산성이 증대되었다. 또한 보리와 콩을 매년 두 번씩 재배하는 근경법(根耕法)도 행해졌다.이 같은 방법들이 보급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어 1인이 경작할 수 있는 경지면적이 늘어나게 되고 넓은 토지를 경영하는 광작(廣作)이 나타나게 되었고 상품작물 재배에도 주목을 하여 농가의 소득을 올리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에 걸친 연작법의 일반화와 시비법의 발달 16세기의 수리시설의 확충은 생산력을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18세기에 이르러 농법이 달라지면서 노동력은 절감되고 생산력이 현저하게 증가하게 된 것이다.한편 농학자들은 사회적 모순과 농민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으며 많은 농서를 간행하였다. 救荒撮要)』를 묶어서『농가집성農歌集成』을 편찬하였고 숙종 대 박세당은『색경』을 써서 과수ㆍ축산ㆍ원예ㆍ수리ㆍ기후 등에 관한 지식을 정리하였고 홍만선(弘萬選)은 농업ㆍ임업ㆍ양잠ㆍ식품가공 등 일상생활에 의식주 관한 내용들을 모아서『산림경제山林經濟』를 간행했다. 영조 대에 유중림(柳重臨)은 이를 증보하여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를 편찬하였다. 18세기 후반 서호수(徐浩修)는『해동농서(海東農書)』 편찬하였고 그의 아들은 서유구의『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라는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백과전서를 내놓았다.Ⅳ. 농업기술 변화에 따른 사회의 변화17세기에 이르면 농법의 개량이나 농업 생산력의 발전 및 이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경영의 확대, 그리고 봉건적 지배층의 토지개간과 토지겸병에 의해 양적으로 지주제가 확대되어 갔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신분제와 관련하여 인신적 지배ㆍ예속 관계를 내포하고 있던 기존의 봉건적 지주제가 신분질서의 동요, 유통경제의 상정을 배경으로 전호의 신분적 외피가 제거 되고 경제적 관계에 의한 새로운 지주제로 전개되어 갔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화 되어 농민층은 분화되었고 농업경영의 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수리시설의 확충과 개간사업은 부유한 지주층의 토지겸병과 지주제를 확산시키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면서 이들이 광작을 주도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들은 노동생산성이 과거에 비해 발전하고 토지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자 소작농에게 대여하던 토지는 노비와 머슴 등을 이용하여 경작하고자 하였다. 지주에게는 소득을 높이는 것이었지만, 소작농민들은 그만큼 자신의 차경지(借耕地)를 빼앗기는 것이었다. 지주와의 대립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소농민 사이에 소작지를 확보하고자 경쟁관계에 돌입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차경지마저 전부 상실하게 된 무전농민들은 농업노동자로서 계속 머물기도 하지만, 농촌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농민들은 토지를 매개로 하여 대지주층과 서민지주층으로 분화가 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농민 소득을 얻는 과정에서 화폐가 통용 되고 있었다. 생산물의 교환이 화폐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상품화폐경제는 발달하게 되었고 거래를 통해 이윤을 얻은 농민들은 상품작물의 재배에 더 집중하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상업에 전념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이렇듯 종래의 경제 질서가 해체되면서 농민은 분화를 가속화게 되어 부농과 빈농으로의 양극화가 점차 심해지고 부농 중에서도 서민 지주들과 상업적인 농업 경향의 경영적 부농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계속적으로 사회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사회로부터 유리되는 농민의 수가 증가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부농층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이는 농민층 이외에 양반들 사이에도 일어났으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계층의 변동이 활발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피지배계층이 양반신분으로 옮겨가고 몰락하는 양반들은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리는 결과가 그것이며 조선 후기에 양반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것이 현저하였다.) 이렇게 크게 늘어난 양반층은 신분적 질서에 의한 사회의 주도권을 약화 시켰으며 신분적인 권위와 경제적인 성장이 점차 분리되었다.Ⅴ. 결론조선 후기 사회는 그 구조가 변동과 해체를 급속도로 겪는 시기였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질서에는 농민들의 움직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 양반계층이 주도하던 사회는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정치ㆍ사회ㆍ경제ㆍ문화 등의 전반에 걸쳐 농민들이 그 변화에 참여했다. 조선은 농업에 근간하여 사회체제를 구성하였고 흔들리는 농업으로 인해 국가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가능하여 그 변화가 심하였다.농업기술이 변화와 발전을 하면서 농민들은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고 생활을 개선해 나가는 도중에 사회계층의 변동이 두드러졌다. 수리시설의 확충과 농법의 개량 개간사업 등의 관련된 노력을 바탕으로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지만 토지를 매개로하는 부의 축적이 나타나게 되어 부농층과 빈농층으로의 분화가 구분되어진 것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된 농민층이 생겨나기도 하며 반대로 몰락하는 양반층이
여말선초 왜구와 외교문제1. 서론2. 고려의 대일관계와 왜구침구3. 조선 초기 대일외교 발전4. 대일외교의 변화와 대처5. 결론1. 서론동아시아의 14세기는 한?중?일 삼국의 외교적 노선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먼저 중국의 원(元)나라가 무너지는 과정 속에서 명(明)나라가 건국되어 전통적인 책봉과 조공을 통한 중화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고려(高麗)에서는 외우내환을 겪으면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교체가 일어났고 이에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이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겪으면서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가 권력을 계승한 뒤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을 열고 명나라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분위기를 보였다.각각 삼국은 시기상으로 또는 방법에 따른 차이는 보이나 새로이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내의 정치, 사회, 경제 등 복합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면서도 국제적으로도 공식적인 입장을 정하기 위해 인접국가와의 외교관계를 재정립 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왜구(倭寇)의 문제이다. 왜구의 침구(侵寇)문제는 14세기 이래로 동아시아에서 외교적으로 상당한 마찰을 가져와 이로 인한 문제가 삼국의 외교와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명과 막부는 과거와 달리 책봉관계가 성립되고 통교를 하였고 조선은 세종 이후 안정 국면에 접어들기까지 대일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고려나 조선의 입장에서 왜구의 문제는 대일외교에 있어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여기서는 여말선초의 이 기간이 왜구 침구 문제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만큼 외교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는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한 이 문제를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의 침략과 연관성 있게 볼 때 대일외교의 체계를 수립하였던 조선 초기까지의 대일외교는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므로 대일외교노선의 변화와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2. 고려의 대일관계와 왜구의 침구고려의 대일외교는 소극적인 관계로써 8확인되는 규모를 살펴보자면 20여척에서 500여척의 대규모 선단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복수 집단이 동시적으로 나타나며 선박)과 말을 약탈하고 이용하였다. 출몰 빈도수는 경인년(1350) 이후로 부터 조선의 건국 전(1391)까지 약 40여 년 동안 600여회에 이른다.왜구의 횡포는 정도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조운선의 약탈도 격심해져서 조세를 거두기 어려워 녹과 지급이 중단되기도 하였고) 연해지역의 조창(漕倉)을 내륙으로 이동시키고), 조운(漕運)을 육운(陸運)으로 대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왜구의 침입지역은 점차 해안에서 내륙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내륙지역으로 진출하는 수로(水路)와 육로(陸路)상의 거점지역이나, 내륙으로 접근이 용이한 연해지역의 군현이 다시 피해를 입었다. 해상 뿐 아니라 하천을 거슬러 내륙 깊숙하게 들어오는 지경에 이르자) 왜구의 침구의 피해는 단순한 재물의 약탈에 그치지 않고 지방관청을 방화) 하여 행정적으로 마비가 되는 등 더욱 심각하였다.이 게릴라 전술과 같은 형태에 고려는 대응하기가 어려웠으며 원나라의 지배로 인해 수군은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 해상에서 왜구의 침구를 저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해안 지역의 백성들은 30~40리에서 다시 60~70리의 내륙에까지도 이주하도록 지시하였지만 미봉책에 불과하였고 연해 지방에 평야의 농사는 불가하여 농민의 유랑이 지속되어 다른 복잡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냈다. 왜구문제는 고려에만 국한되지 않고 중국에서도 나타나 원과 명에서는 고려조정에 대해 왜구토벌에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왜구토벌을 기회로 명나라가 출병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외교적인 위기가 생겨나기도 했다.이렇듯 대일관계는 왜구의 침구가 일으키는 다양한 혼란을 가지고 복잡한 관계를 맞이하였다.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외교의 틀을 만들지 못한 상태의 불안정한 외교는 왜구의 침구가 일본의 국내정세에 의한 영향이 크게 작용하는 것과 맞물려 그 성과가 만족스왕17년(1368)이하생(李夏生)왜구의 금압과 보빙『고려사』세가41 공민왕17년 윤7월우왕1년(1375)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라흥유(羅興儒)왜구 금압과 보빙, 승려 양유(良柔)를 보내 약속『고려사』열전46 우왕1년 2월, 2년 10월우왕3년(1377)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안길상(安吉祥)왜구의 금지 보빙, 승려 신홍(信弘)을 보내 약속『고려사』열전46 우왕3년 6월, 8월우왕3년(1377)전 대사성(箭 大司成)정몽주(鄭夢周)왜구의 금압『고려사』열전46 우왕3년 9월, 4년 6월, 7월, 열전30 정몽주우왕4년(1378)판도판서(版圖判書)이자용(李子庸),전 사재령(前 司宰令)한국주(韓國株)왜구의 금압, 피로인 230명 송환 군사186명 파견『고려사』열전47 우왕4년 10월, 열전 48 5년 7월, 고려사 열전47 우왕5년 5월우왕5년(1379)윤사충(尹思忠)보빙『고려사』열전47 우왕5년 윤5월이상에서 보듯이 8세기 말 이후 단절되었던 대일외교는 기본적인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고 진봉관계에서 급진적으로 왜구의 금압(禁壓)을 다루는 성급한 과정과, 자국의 입장 위주로 외교에 임하면서도 동시에 국내의 혼란으로 인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지 못하는 부담이 가중되어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협의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3. 조선 초기 대일외교 발전고려의 왜구 침구의 문제는 외교적인 성과는 기대하는 것처럼 얻지 못하였지만 군사적으로 왜구를 소탕하는 데 있어 일정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성계의 세력이 성장하였으며 조선을 건국하였다. 일본도 이즈음에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가 권력을 잡아 조선과 무로마치 막부는 왜구문제와 통교(通交)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다.)이런 변화는 명나라가 전통적인 국제 관계 회복을 목표로 책봉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가속하여 진행되었다. 태종과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일본국왕의 지위를 중국으로 부터 인정)받음으로 책봉체제에 편입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가 체계화 되며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활발해지는 반면 왜구의신 일본을 국제질서의 체계로 이끌어 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결국 조선 초기의 대일외교는 고려말기 심각한 왜구의 침구문제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나 정치?경제적인 교역을 목적으로 하는 외교관계로 전환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조선은 세종 이후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대일관계를 구축하였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되기도 하였으며, 삼포왜란(三浦倭亂)이나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등의 문제를 통해 대일관계는 단절과 개항을 반복하며 관계를 조율해 나갔다.3. 대일외교의 변화와 대처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대일관계에 있어 공식적인 사절의 교류가 없었으므로 민간차원의 교역에 머물러 대일관계에 다소 소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려의 건국 초기부터 시작하여 요(遼)와 금(金), 원(元)나라에 이르기까지 북방민족과 고려와의 특수한 상황이 전개 되었다고 하더라도 대일관계를 생각하는 시야에 한계는 고려의 외교적 부진함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려말기의 국내사정의 혼란한 과정을 겪으면서 대일관계에 있어 선린외교의 필요성을 대두 시켰으며 이것이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위협과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조선 초기의 대일외교는 이러한 점을 숙지하였기 때문에) 국초에 가장 확고히 해결하고자 하였고 국제질서에 막부를 편입시킬 수 있었다. 이후 대일관계는 국가에서 주도하여 적극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이러한 변화 속에서 조선이 정치와 외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일본은 경제적인 목적과 문화적인 측면이 강하여 양국의 이해관계는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양국의 교류는 대일사행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세종대 이후 사행을 끝으로 막부가 거처하는 교토(京都)에 들어가는 사행이 사라지게 되면서 두드러졌다. 이것은 조선이 정치?외교적인 목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정보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며, 계속적으로 통교왜인들의 경제?문화적 조건은 만족되는 과정을 볼 때 외교적 문제적이었던 왜구의 침구가 해결되고 안정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자 점차 그 역할이 소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후 왜사절단 가운데 가까이는 일본국왕사를 사칭하는 위사(衛士)문제로도 이어졌으며 멀리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통교를 이루었음에도 적극성과 의지가 이어지지 못하여 지속적인 문제 발생에 효율적인 대처법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4. 결론과거로부터 동아시아의 외교는 국제적으로 고립을 피하고 국내에서 세력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써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외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 중국이나 북방민족과의 외교는 적극적이고 실용적인 관계를 추구하고자 하였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체로 대일관계에서는 부진한 면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살펴본 바와 같이 간헐적으로 유지를 해오던 대일외교로는 왜구의 침구를 저지할 근본적인 방안을 모색할 수 없었던 상황과 일본을 북방민족과의 관계에서처럼 우월적 입장으로 대하면서도 그 영향력에 대해서는 동일한 입장 두지 못한 점이다.또한 왜구 침구가 대일외교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본격적인 외교가 시작되면서 일본에 대한 경계와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점차 제자리걸음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에 동아시아의 세력권 밖으로 분리된 독립적 존재가 아닌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써 파악되고 다양한 시각과 방법으로 지속적인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당한 손해와 위기를 통해서 인식하게 되었다.이것은 전통적인 중국의 책봉질서에 편입하여 조공무역을 통해 다방면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교역을 통해 이득을 얻는 대신 그 체제 속에서 큰 어긋남이 없던 명과 조선의 관계와 비교한다면, 고려 또는 조선 중심의 대일외교를 진행하는 점에서 일본에 대한 지나친 관대 또는 소홀함을 지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일외교 노선의 변화에 있어 우호와 친선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며 견제와 비판하는 태도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문화사
수로부인(水路夫人)聖德王代 純貞公赴江陵太守 今溟州 行次海汀晝饍성덕왕대 순정공부강능태수 금명주 행차해정주선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태수(지금의 명주)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傍有石 如屛臨海 高千丈 上有 花盛開방유석장 여병림해 고천장 상유척촉화성개그 곁에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높이는 천길이나 되는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公之夫人水路見之 謂左右曰 折花獻者其誰공지부인수로견지 위좌우왈 절화헌자기수공의 부인 수로가 이것을 보더니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구 꽃을 꺾어다가 줄 사람은 없는가."從者曰 非人跡所到 皆辭不能종자왈 비인적소도 개사불능그러나 종자들은, "그곳에는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하고 아무도 안되겠다 했다.傍有老翁牽 牛而過者 聞夫人言 折其花 亦作歌詞獻之방유노옹견자우이과자 문부인언 절기화 역작가사헌지그 곁으로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와서는 또한 가사를 지어 바쳤다.其翁不知何許人也기옹부지하허인야그 늙은이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便行二日程 又有臨海亭 晝膳次 海龍忽攬夫人入海변행이일정 우유임해정 주선차 해룡홀람부인입해또 이틀을 더 가니 임해정이 있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버렸다.公顚倒 地 計無所出 又有一老人告曰공전도벽지 계무소출 우유일노인고왈공이 비틀거리며 땅에 주저앉았으나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또 한 노인이 말했다.故人有言 衆口 金 今海中傍生 何不畏衆口乎 宜進界內民 作歌唱之 以杖打岸고인유언 중구삭금 금해중방생 하불외중구호 의진계내민 작가창지 이장타안"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 쇠도 녹인다 했으니 바다 속의 짐승이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야 합니다. 노래를 지어 부르고 지팡이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則可見夫人矣 公從之 龍奉夫人出海獻之칙가견부인의 공종지 용봉부인출해헌지공은 그 말대로경과심산대택 누피신물략람수로부인은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매양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번번이 신물에게 붙들리곤 하였다.衆人唱海歌詞曰중인창해가사왈여러 사람이 부르던 해가의 가사는 이러했다.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 逆不出獻 入網捕掠燔之喫구호구호출수로 약인부녀죄하극 여야방역부출헌 입망포략번지끽해신아, 해신아, 수로부인을 내 놓아라남의 부녀를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그물로 너를 잡아서 구워 먹으리老人獻花歌曰노인헌화가왈노인의 헌화가는 이러했다.紫布岩乎邊希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 不喩 伊賜等 花 折叱可獻乎理音如자포암호변희집음호수모우방교견 오힐부유참힐이사등 화힐절질가헌호리음여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목차수로부인 정치 스캔들I. 서론II. 순정공의 고민III. 수로부인의 로비결심IV. 로비스트 수로부인V. 결론수로부인 정치 스캔들I. 서론일반적으로 수로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로써 전통 문화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보는 관점, 성에 대한 여러 접근방법 가지고 관점, 실존인물로써 정치적 해석을 하는 경우이다. 첫째는 수로보인 보다 여타의 등장인물을 신격화 하고 전통 문화와의 연관성을 두는데 무게를 두고 해석을 한다. 둘째는 수로부인을 둘러싼 사건들을 일종의 가십기사로 이해하곤 한다. 여기서는 세번째 입장에서 신라여성의 자유가 높은 수준이었다는 생각을 덧붙여{) 867년 이찬 김양중의 딸 명단이 봉화 취서사의 불탑을 조성할 때 재산을 시주한 것과 갈항사 석탑을 세울 때도 여성의 경제력이 뒷받침됐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경제력은 사회활동의 기초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여성의 지위와 사회적 활동이 허용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수로부인을 실존적 인물로써 파악하는 것 보다 신라여성의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능동적인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택했다.여성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 때 확실히 그것을 무기로 삶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고고함, 청순함, 뇌쇄적, 지적, 로부인의 내용에 앞서 남편인 순정공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는 여기서 부인을 사랑하지만 소극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부인이 꽃을 꺾어 달라고 하는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고 길 가던 노인이 꽃을 꺾어 바쳤는데도 마땅한 반응도 없이 길을 간다. 나중에 극단적으로 용이 부인을 바다로 끌고 가자 그제야 반응을 보이지만 공은 어쩔 수 없었으며 느닷없이 나타난 노인의 도움으로 부인을 되찾게 된다. 이런 모습들은 그가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아름다운 부인을 가진 남편으로써 그리고 명주에 부임하는 태수로서 위엄을 뚜렷하게 나타내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정치적인 배경을 살펴 찾아보자.성덕왕 시기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왕과 왕족을 위한 평화로써 백성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 성덕왕 때 많은 백성들이 굶주려 이를 구휼하는 기사가 상당수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5월 가물었다(旱)(三國史記 8, 신라본기 8, 성덕왕 4년)10월 국가의 동쪽 주, 군에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유망하자 사자를 발하여진휼하였다(신라본기 8, 성덕왕 4년)1월 국내에 기근이 들자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진휼하였다(신라본기 8, 성덕왕 5년)8월 곡식이 익지 않았다(신라본기 8, 성덕왕 5년).1월 많은 백성이 굶주려 죽었다.사람에게 1일에 곡식 3되(升)를 7월까지 지급하였다 (신라본기 8, 성덕왕 6년).2월 백성들에게 5곡 종자를 내려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신라본기 8, 성덕왕 6년)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으나 그 수준에 이르는 사회적인 안정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있던 귀족들은 천재지변을 책임지고 사퇴를 하여 왕의 정치적 방패가 되기도 하였으며, 왕은 진골들 사이의 긴장을 이용하여 정국을 이끌며 위민정책을 펴 나갔다. 명주로 부임하는 순정공 또한 이런 과정에서 민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 컸을 것으로 보이고 부임지로 가는 도중 만난 지방호족들과 백성들로부터 애로사항을 들을 다. 여기서 점심을 먹는 시간에 꽃을 꺾어달라는 부탁과 노인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 보자. 晝饍(점심 때)이라는 용어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일종의 이벤트의 발생 으로 보았는데 꽃을 꺾어 달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삼국유사를 살펴보면 그 주변이 절경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지만 꽃이 있는 그 자리는 위험한 곳으로 접근성이 쉽지 않은 장소였다. 수로부인은 왜 그곳에 피어있는 철쭉을 가져다 달라고 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철쭉이라면 희귀한 꽃이 아니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인데도 말이다. 이 의도를 수로부인이 앞에서 설명한 순정공의 정치적 입지의 어려움을 돕고자 하는 것으로 파악해 보자. 순정공에게 도움이 될 사람을 찾아보는 시험의 의미로써 주변에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과제를 걸어 놓는 것이다.이 사건은 어떤 노인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 줌으로써 구체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꽃을 꺾어 받치는 것과 동시에 가사까지 지어 자신에게 접근하는 노인 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다. 수로부인에게 험난한 지형에서 꽃을 꺾어 받치면서 노래를 지어 부른다는 것은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신라 문화전파를 경주의 귀족적인 문화가 지방 호족에게 퍼져가는 과정으로 떠올려 볼 때, 지방호족으로서 문화적인 것이나 수로부인의 과제를 해결했던 그 능력면에서 격이 맞는 사람의 등장인 것이다이쯤에서 노인 의 존재는 쉽게 알 수 있듯이 영향력 있는 호족 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노인으로 표현 되는 세력은 설화에 이미지처럼 온건적이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녔다고 본다. 또한 수로부인은 미모가 뛰어나 인지도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노인은 순정공에 대해 일정한 사전 조사를 마치고 점심 을 통해 의도적 접근을 시도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노인이 등장하면서 암소 를 끌고 왔다는 것을 제의적인 해석 말고도 생산이 가능했다는 상징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근거로 이용될 수 있겠다.이러한 만남의 최종 목적은 순정공과 노인세력의 사회정치적 결합이었을 것으로 본다. 결국 부인이 로비 가고 순정공이 노인의 도움을 받아 노래를 지어 부름으로써 부인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사건이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녀가 점심 때 갑자기 용이 바다로 데리고 갔다는 것과 노래를 지어 불러 부인을 찾아오는 점이다.우선적으로 점심 때 나타난 용 과 관련해서 살펴보자. 이틀 전에도 점심을 먹는 시간에 사건이 발생한 것을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점심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수로부인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시간적인 개념이나 그 자체로 추정해 보자.{) 제의적 시각으로는 굿 이나 제물 로써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다른 시각을 가져보았다.이벤트 발생 시기를 알려주는 단서나 그 이벤트 자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로부인은 일반적으로 삼국유사를 읽었을 때 생각하는 수로부인의 납치가 아닐 가능성을 제시한다.남편인 순정공은 갑자기 용이 부인을 데려간 것 으로 알고 있다. 갑자기 라는 것으로 볼 때는 순정공이나 수로부인의 의사가 포함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용이 부인을 데려다 준 이후 용에게 대한 아무런 처벌을 원하지 않았고 그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순정공은 아니더라도 수로부인에게 의사 결정권이 있지 않았는가하는 가능성을 갖게 한다. 수로부인에게 아무런 해도 없었다는 점과 용과의 만남에 대해서 좋은 점을 언급으로써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 정황증거로 볼 수 있겠다.결국 더 발전시켜 보면 처음 용이 등장했을 때 수로부인은 용을 따라 갈 수도 있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체적인 선택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용은 누구일까. 노인의 세력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적극적인 방법으로 수로부인에게 접근한 세력으로 볼 수 있겠다. 노인세력 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급진적이고 터프한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을 순정공은 처음에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신물들과 연결된 점으로 보아 마지막에 수긍하는 방향이었던 것이다.그럼 왜 수로부인은 순정공도 혼란스러울 만한 일을 행하였나 하고다.
목차Ⅰ. 애드호크러시(Adhocracy)1. 애드호크러시의 정의2. 애드호크러시의 등장 배경3. 애드호크러시의 종류1) 프로젝트 팀2) 태스크 포스3) 위원회구조4) 매트릭스 조직4. 애드호크러시의 특징1) 일반적 특징2) 애드호크러시의 장단점Ⅱ. SO(soft organization)1. SO 대두2. SO 특징Ⅲ. 애드호크러시와 SO 비교Ⅳ. 결론애드호크러시(Adhocracy)와 SO(soft organization)Ⅰ. 애드호크러시(Adhocracy)1. 애드호크러시(Adhocracy)의 정의전통적 관료체제의 구조와는 다른 모습으로 융통적 적응적 혁신적 유기적 기능적 임시적이라는 특징의 구조를 지닌 '특별임시조직'을 말한다. 토플러의 저서 미래의 충격 에는 유기적 임시조직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애드호크러시(Adhocracy)라는 단어는 2차세계대전 중 특수임무를 수행했던 기동타격대인 애드혹팀(Ahoc team)에서 유래되었는데 임무가 완수되면 해산되었다가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면 재구성되었다. 팀 구성원의 역할은 임무의 성격과 복잡성의 정도에 따라 바뀌며 개인은 세분화된 분야에 책임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특별임시위원회 , 특별조직 등으로 번역되는 것이다.사회심리학자이자 경영학 교수인 베니스(Warren G. Bennis)는 애드호크러시를 '다양한 전문기술을 가진 비교적 이질적인 전문가들이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집단을 구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변화가 빠르고 적응적이며 임시적인 체제'로 정의하였다.2. 애드호크러시의 등장 배경애드호크러시의 필요성은 현대사회가 다원화 되고 급격한 변화를 특징으로 하여, 과거의 표준화가 붕괴되면서 생겨났다. 생산품 가격, 정치, 대중정신, 종교관 등이 일률성과 표준화에서 벗어나고 그 대신 다양한 생활양식과 자율적인 생각 을 바탕으로 고도로 개성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때문에 폐쇄적이고 기계적이며 일률적인 전통적 조직체제도 다양하고 개방적인 정보 체제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전통적 조직체제는 기계적인 능률성을 게 되는 제약에 관해서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의사결정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조직의 구성원들의 행태를 설명하는데 많은 한계점을 노출하였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서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때문에 베니스(Warren G. Bennis)는 앞으로 관료제는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미래의 조직은 이원 또는 다원 조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으로 그 형태는 열을 가하거나 냉각시키면 변화하지만 통상의 온도에서는 다시 원상으로 되돌아가는 플라스틱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여 필요성을 언급하였다.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애드호크러시와 같은 조직형태가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한 조직 모형으로 인식되어 높은 적응력과 창조성을 요구하게 되는 조직으로 유용하게 받아들여졌다. 대부분의 앞서가는 선진국 정부기관은 물론 민간 기업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 잘하는 정부 에서는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하도록 권장되어 가는 것이다.대규모 조직들에서 프로젝트 팀, 매트릭스, 태스크 포스, 위원회등과 같은 조직단위가 날로 증가 하고 있으며 이러한 조직단위(애드호크러시)들은 새로운 조직의 모습을 구체화시키게 되었고 이는 중앙집권화 된 일원적 통제 대신에 이원 혹은 다원적 명령체제 를 채택하게 하고 있다.3. 애드호크러시의 종류1) 프로젝트 팀본래 조직은 정형적(定型的) 업무를 능률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계층화 부문화하는데, 정적(靜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장이나 기술 등 환경의 변화가 심하면 조직이 처리해야 할 새로운 과제가 빈번히 일어난다. 그 과제는 각 부문에 걸치는 일이 많고, 종래와 같이 위원회나 회의에서 부문 간에 조정하게 되면 조정에 시간이 걸리고 책임이 불분명하게 되어 실행의 성과가 오르지 못한다. 그래서 특정한 목적만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조직 내의 인적, 물적 자원을 결합한다. 어떠한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젝트 팀이다일상적인 일이 아닐때, 조직 간의 상호의존적인 기능이 요구 될 때, 바람직한 조직이 된다.프로젝트 팀의 형성은 외부의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이것은 주로 모조직체에서 발생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3) 위원회구조계층제 조직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민주적 결정과 조정을 촉진하기 위하여 동일한 계층과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합의제 조직을 말한다.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폭넓은 경험과 지식 등이 요구되는 경우와 어떤 특정한 개인이 조직을 이끌어 나가기 힘든 조직의 변혁기에 바람직하다. 또 의사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의사결정에의 참여가 허용되는 경우에 보다 효과성을 가진다.4) 매트릭스 조직매트릭스 조직이란 전통적인 기능의 조직구조와 프로젝트 팀을 결합시킨 조직으로서 조직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신축성은 없으나 비교적 안정적인 기능조직의 장점과 신축성, 기동성, 전문성을 지닌 프로젝트 팀의 장점을 조화시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조직구성원들은 이차적인 명령체계 속에서 일상적인 업무에 관해서는 기능조직 관리자의 명령에 따르면서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그 팀의 관리자의 명령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4. 애드호크러시의 특징1) 일반적 특징애드호크러시는 대체로 장기적인 부서나 공식적으로 규제된 행동, 일상적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표준화된 절차가 없다. 주어진 프로젝트에 따라 전문요원들이 팀을 구성하여 상황에 맞게 문제를 해결하여 임무를 완료하는 특성을 지닌다. 즉 구조적 차원에서 볼 때 애드호크러시는 복잡성 공식화 집권화의 정도가 모두 낮다는 특징을 지닌다.애드호크라시는 관료제에 비해 비능률적인 면이 많이 보이지만 불확실한 환경 아래서 유연성 있게 그리고 혁신적인 태도로 처리해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이 단점을 상쇄시킨다.2) 애드호크러시의 장단점· 장점애드호크라시는 변화에 대한 신속한 대응능력이 있고, 기술혁신(innovation)을 촉진하며, 다양한 전문요원들의 조정을 촉진시킨다는 장점이 있다부 사람들은 매우 곤혹스러워한다.2 애드호크러시는 갈등과 무질서를 야기 시킬 수도 있다. 일선 현업계층에서 담당하는 업무들 간에 중복과 마찰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직무에 따라서는 한 사람의 부하직원이 몇명의 상사과 관계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창조적 성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한 사람의 직원이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로 인해 매우 괴로운 상황이 발생된다.3 애드호크러시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종업원에 대한 폭넓은 교육훈련과 내부승진제도의 실시가 필수적이다. 애드호크러시는 단순 반복적인 업무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애드호크러시는 종종 중복과 비능률을 초래하며, 업무활동의 조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드호크러시는 급격히 변화하는 환경 아래에서 창의적으로 과업을 수행해야 할 경우 가장 적합하다.Ⅱ. SO(soft organization)1. SO 대두현대는 조직구성의 불확실성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 근래의 추세를 보면 항시 변화가 정상적으로 이해되기에 연속성과 확실성에 기초한 가치, 신념체계와 제도의 부적응이 발생되고 있다. 기술이 변하고 업무방식도 바뀌면서 사회제도와 조직이 달라지고 있고 특히, 전자적 연결(electronic connections)에 의한 정보화 혁명은 행정조직과 기능에 과거와 전혀 다른 새로운 충격을 가하고 있다. 정보기술의 확산으로 전산화에서 네트워크화로, 정보화로 그리고 연성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런 변동 상황에 비추어볼 때 기존의 조직체는 유연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기존의 조직체의 모델인 경직된 조직 에서 최근의 개혁을 위한 실천적 노력이 실효를 거두고 바람직한 모습을 구현하려면 연성조직 으로의 전환이 요망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 SO 특징기존의 조직체가 연성적 성격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거와 대비되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요구되고 있다.첫째, 무한 속도, 무형가치, 무경계로 인한 불확실성 증대에 대처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력과 혁신력을 갖춘 횡한 대응으로 모색된다. 또한 프랙탈 조직은 기본적인 원칙만을 공유한 수많은 자생조직의 집합체이다. 이처럼 조직구조를 유연화하기 위해서 환경요구 및 시민입장에서 행정단위를 재설계하되 상황과 시민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장차 행정환경은 적시보다는 즉시(卽時)를 필요로 할 것이며, 인간중심적 고객가치가 강조될 것이므로 조직재설계는 신축성 있는 인간중심의 조직을 지향해야 한다. 이를테면 행정하드웨어의 개편과정에서 조직통폐합과 인력감축과 병행하여 대민지원 및 서비스조직을 확대해야 한다.둘째, 조직의 지식·정보 집약화를 추구해야 한다. 정보수집·이용·유지·배포비용을 최소화하고, 정보유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서(red-tape)관리 중심적 조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장차 행정의 사이버화가 진전되면서 행정기능과 활동은 전자화될 것이다. 지식사회에서는 조직구조 형태에 따라 정보이용의 효과가 달라진다는 가정이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같은 논의들은 환경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지식·정보 활용 중심적이어야 함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셋째, 조직의 탄력성을 높여야 한다. 먼저 조직 수평화와 정책결정시스템의 합리적 재편이 요구된다. 탈계층화 또는 저층 구조화를 통해 의사결정체계를 간소화하며, 조직경량화를 통해 저비용 고효율의 행정체질로 전환해야 한다. 급변하는 행정환경에 대한 행정의 적응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정책개발 그리고 시민요구에의 적절한 대응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권한의 하부이양(empowerment)을 통해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병행하여 부문 간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 연관성을 높여 시너지효과를 창출하도록 한다. 여기서 가능하다면 임무중심의 임시조직 또는 가상조직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테면 시간제(part-timer), 계약직, 외주화(outsourcing) 등을 도입, 조직의 신축성을 강화해야 한다.Ⅲ. 애드호크러시(Adhocracy)와 SO(soft organization) 비교애드호크러시와 SO는 공통적인 성격과 차이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