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영조의 탕평책1.시대 상황숙종 때 경신환국(1680:남인인 영의정 허적의 어용장물 사용과 허적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남인이 지배층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서인 중에서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었다. 사도세자(영조의 아들)의 죽음 이후로 노론이 정권을 주도 하면서 붕당정치는 폐단을 가져왔다. 원래 17C의 붕당정치는 서인이 주도하는 가운데 남인이 꾸준히 진출하며 서로 비판과 견제를 하였지만 경신환국 이후로는 철저한 탄압과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 때 탕평론이 처음으로 제기 되었으나 숙종이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상에 지나지 않았다. 노론과 소론의 이러한 치열한 당쟁 가운데 생명의 위협 마져 느끼며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 하며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권 지향적인 무리들에 의해 당쟁은 지속된다. 급기야는 왕권에 도전하는 변란까지 발생한다. 하지만 영조는 이같은 난국을 비상한 정치능력으로 타개 하며 지속적으로 조정을 탕평 정국으로 이끌고 나가는데 성공한다. 또한 제야에서는 실사구시의 학문이 일어나 사회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2.노론 VS 소론의 싸움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은 주로 이이의 학통으로 일당 전제정치를 추구하며,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은 주로 성흔의 학통으로 이황의 학설에도 호의를 보이고, 양명학을 연구하며 성리학이해에 탄력적임을 보인다.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은 처음에는 정치운영방식, 훈신, 척신 등 특권 세력과의 제휴, 남인에 대한 처리 등을 둘러싸고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다. 그러다가 경종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동생인 영조를 노론이 후원한 것이 소론에게 반역으로 몰려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처형 됨 으로서 소론과 노론의 사이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영조 즉위 후 소론을 반격하여 소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제거 되었다.3.영조의 탕평책의 특징영조의 탕평론은 서경 홍범조의 왕도 탕탕, 왕도 평평에서 유래,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적 정치 원리로서 국왕이 치우침없이 공평해야 한다 고 서경에 나와 있다.초기에는 소론을 내몰고 노론을 기용하였다가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 하는 등 탕평책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안정되면서 영조는 정미환국(1727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위해 정국의 인사를 파견한 일)을 통해 노론과 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사람들은 제거 시키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노론의 이의연이 상소를 하여 물의를 일으키자 그를 유배시켰으며 소론 중에서도 당파성이 강한 사람은 제거 시키고자 하였다. 소론중 에서도 당파성이 강한 김일경, 목호룡 등도 상소를 허위로 날조한 사실이 밝혀져 처형하였다. 또한 노론의 정호, 민진원 등을 기용하고 신임의 옥에 희생된 김창집 등의 관작을 수복, 원혼을 위로 해주었다. 이리하여 노론이 주요 직책을 차지한 결과가 되었으나 영조의영조의 본래의 뜻은 노론과 소론의 양파의 당쟁을 조정 하는데 있었다. 이리하여 정국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다. 영조는 정치적 신념으로 이끌던 탕평 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 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 시켰으며, 또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 하였다.뿐만 아니라 탕평책의 강화하기 위해 같은 당파에 소한 집안간의 결혼을 금지시킨 이른바 “동색 금혼패”를 집집마다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 시켰다.하지만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였다. 강력한 왕권인 영조의 힘에 눌려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것 뿐 이였다. 이후 소론과 노론이 공존하였으나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로 노론이 우세하게 되었다.Ⅱ.정조의 탕평책1. 시대 상황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며 왕위에 오늘 정조는 문예 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 하려고 한다. 그의 이 같은 문화 정치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규장각과 실학자들 이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게 전개 된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 되었듯이 정조 역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고, 철저한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였다.2.시파와 벽파의 대립노론이 사도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나뉘게 된다. 여기서 시파란 “시류에 영합한다” 는 의미로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며 사도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 쪽이고, 벽파란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있다” 는 의미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하며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지한 쪽을 말한다. 즉 영조 때 형성되었던 외척 중심의 노론은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일부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3. 정조의 탕평책의 특징정조의 탕평책은 규장각을 중심으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또한 당쟁은 사색 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 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 되었다. 규장각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혁신정치를 펼치려고 했다. 규장각은 급속도로 그 규모가 확대되어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도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 기능이 정착되자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개국이래로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 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또한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당하관의 소장 관원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하여 상벌을 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각 신하들은 초계문신의 시험관이 되게 하였으므로 규장각은 실질적인 경영관으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들을 대리 찬술하는 일 에서부터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학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 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 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치지 (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화(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 이라는 규장각의 2대 명분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육경 중신의 남인과 친숙하였고, 예론에서도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남인 학파 내지 남인 정파와 밀착 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그리고 신권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젊은 자제들이 북학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학자적 소양에도 호응하고 있었다. 정조가 중용하던 대표적인 사람은 남인 계열의 체제공을 비롯하여 실학자 정약용, 이가환등과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에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가자 조정은 당연히 정조의 통치이념에 찬성하던 시파 중심으로 운영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벽파는 자신들의 위기 상황을 실감하고 종전보다 더 똘똘 뭉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던중 벽파는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를 기점으로 서서히 힘을 회복했다.신해 박해는 천주교 수용 여부에ㅔ 대한 논란끝에 결국 수용불가 결정이 나면서 일어났다.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 이였는데,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그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 이였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 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정면 충돌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4년뒤 중국인 신부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체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약화ㅏ되었다 1799년 체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 되었고, 이듬해 정조가 죽음으로서 남인은 거의 축출 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조의 탕평책을 비롯한 정치는 막을 내리지만 정조가 남겨놓은 큰 업적들이 있었다. 우선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 졌고,영조때부터 추진해오던 문물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 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때 편찬된 , , , ,< 문원보불>, < 동문휘고> ,<규장전운>, 등의 책 들이였다.
1. 핵무기란 무엇인가핵무기란 원자핵의 분열반응, 융합반응에 의해서 일어나는 방대한 에너지를 살상 및 파괴효과에 이용하는 무기의 총칭을 말한다. 핵무기의 종류로는 핵분열 반응을 이용한 원자폭탄 강화원자폭탄, 핵융합반응을 이용한 융합폭탄 및 순 융합폭탄, 중성자폭탄, 초 플루토늄폭탄 등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원자폭탄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원자폭탄이란 우라늄과 플루토늄 등의 원자 핵 분열에 의해 얻어지는 에너지를 살상 또는 파괴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만든 폭탄으로 그 피해는 실로 막대하다. 알다시피 이 폭탄의 투하로 히로시마에서는 34만 3000명의 인구 중에서 약 7만 명이 사망하고, 13만 명이 부상, 완전히 연소 파괴된 가옥 6만 2000호 , 나가사키에서는 사망 2만 명, 부상 5만 명, 완전연소 또는 파괴가옥 2만 호, 반소 또는 반파가옥 2만 5000호, 이재민 10만 명을 냈다. 또한 이 폭탄으로 일본의 항복이 촉진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앞당겨 끝내는 효과도 거두었다. 이외에도 피해는 엄청 났다.다음은 “오후 1시 서울시 중구 서울시청상공 ( 고도2500M ) 에 1mt전략핵폭탄 직격” 되었을 경우의 가상 시나리오이다.1차 열복사및 2차 후폭풍에 의해 서울의 모든 80~90%의 건물파괴 및 서울인구 천만명중 약 200만명은 찍소리한번 내보지도 못하고 즉사, 약 2백만명은 고통속에서 몸부림 치다 사망. 그리고 약 300만명은 2주내지 6개월안에 사망하게 될 것이며 교통마비, 수돗물 중단, 전기 중단, 의료기관및 의료요원의 부족 속에서 사망자는 더욱더 늘어날 것이다. 또한 인근 주변도시 인천, 수원, 동두천, 의정부등은 열복사 및 후폭풍에 의한 직접피해는 그나마 서울보다는 좀 덜 할 테지만, 선낙진 피해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은 서울 못지않을 것이며 전체적인 피해역시 약 60%이상의 인구가 직접, 간접적인 피해로 6개월 안에 사망할 것이다. 간단히 계산 했을때 우리나라 인구중 1000만에서 1400만명 정도가 사망할 것이다.그 뿐만 아니라 방사능피해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의 고통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며, 세계 환경오염도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그러면 북한은 왜 이렇게 위험하고 무서운 핵을 만들고 개발하려 하는 것일까2. 북한이 핵을 만드려는 이유핵이라는 것은 위에 설명한 대로 매우 위험하면서도 커다란 하나의 무기로 작용 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그것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보유하고 있기만 하면 핵은 북한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를 위반하였고, 2002년에는 핵무기 개발을 시인하였다. 또한 핵 확산금지조약(NPT),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위반하였다. 이렇게 되면 국제적으로 고립이 될 텐데,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핵 개발을 시인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적으로는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포기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즉 핵을 하나의 무기삼아 미국에게 선전 포고를 하려는 것 같다. 또, 북 미 안보 현안의 일괄타결을 필요성도 제기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핵을 무기로 미국이 북한을 좌지우지 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보인다. 다시 말해 핵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미국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현재 북한은 자신들의 위기감을 인식하고, 핵을 직접 전쟁에 사용하기위해 만든다기 보다는 그것을 이용하여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핵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현재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체제를 숨기고, 자신의 체제가 우월 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일 뿐 아니라, 핵무기 국가에 진입함으로서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려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핵 개발을 이용하여 남한에게는 우리보다 정치, 군사적인 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들을 얻어 내려는 의도가 보인다.3.북한의 핵 문제가 우리나라와 세계에 미치는 영향우선 북한의 핵개발은 우리나라의 생존과 직결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은 2단계나 낮아져, 우리 자금 시장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또한 북한의 핵개발은 국내의 외국 기업의 투자를 위축 시키고, 불안감을 증가시키며, 소비심리도 감소시켰다. 또한 우리의 수출 환경에도 나쁘게 작용 하게 되었다.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경우에는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여러 나라들과 관계가 정상적으로 복원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이 북핵 포기시 여러 가지 에너지, 식량 지원, 그리고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과 외교적 승인을 얻어 낼 수도 있다.이러한 여러 정황들로 비추어 볼 때에 북한은 핵 개발을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핵을 보유함으로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들을 얻어내기 위한 마지막 방편으로 핵을 이용하는 것 같아 보인다.4. 북핵문제의 해결 방안은? (나의 생각)북핵문제는 전 세계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각각의 나라마다 그에 따른 해석이 다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도 핵 문제에 있어서 사태의 전말과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 할 것인지 먼저 파악하고, 그런 후에 우리 나름대로의 대처방안과 해결 방법이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북한과 미국간의 중재자 입장에서 문제를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 자신의 문제로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평화적인 해결이다.우선 하나의 방법으로 ‘에너지’문제를 들 수 있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했던 중유공급을 중단함으로서 북한의 에너지 문제를 악화시켰다. 북한은 주민들의 생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변원자로를 가동 시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의도가 어찌되었든 에너지문제가 해결 되면 핵 문제를 일시적으로 중단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의 에너지문제의 해결 방법으로는 미국이 지원해 주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현 시점에서 미국은 그러한 의도가 없으므로 우리가 에너지를 지원해 주거나 러시아, 중국, 일본이나 유럽연합과의 협력을 통해 대북 지원틀을 다시 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전력 공급이 이루어지면, 북한이 핵 개발을 더 이상 추진 할 명분이 없으며, 미국 역시 북한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그리고 북한이 그동안 경제체제 변화를 위해 해온 노력과 국제통화기금이나 아시아 개발은행과 경제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 미사일 실험의 유예조처 등의 노력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 할 수 있도록 미국에 알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현재 북한에 대해 가져온 부정적인 시각을 좀 더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 역시 조금이나마 해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이렇게 해서 미국과 북한의 적대적 감정을 완화시킨 후, 그 다음으로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 서로 각자에게 원하고 있는 북한의 핵 포기나 미국의 북한 공격 불가침 조약 등 서로 원하는 사항을 맞바꿀 수 있도록 협상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현재 미국의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분위기를 보면, 이라크와 비교하여 긍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룬다. 허바드 주한 미대사의 말에 따르면 북한 핵과 북한 문제는 우려스럽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라크 사태와는 분명히 다르며 외교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대사는 이라크의 무장해제 추진 과정은 10년이 넘는 복잡한 과정에 걸쳐 진행 된 반면 북한의 핵 문제의 다국적 해결 추진은 방금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반응에서 미국이 북한과 평화적인 해결을 원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