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지*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6
검색어 입력폼
  • 모던보이 박태원- 소설가 구보와 작가 구보
    들어가며문학작품은 그것을 창작해 낸 작가와 시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작가는 시대. 국가. 문학적 전통 뿐 아니라 가정환경, 신분계층, 교육, 종교 등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진 존재로서, 작가의 창작 활동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작품에 총체적으로 반영된다. 이에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一日」의 구체적인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작가 박태원의 삶이 그의 소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기로 한다.Ⅰ. 작가, 박태원1) 모던보이, 박태원의 삶.박태원은 1909년 음력 12월 7일 서울 수중박골에서 박용환과 홍씨 사이의 차남으로 경성부 다옥정, 지금의 수송동에서 태어났다. 박태원의 집안은 조부 이전부터 천변에서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데, 박태원의 출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서울 토박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박태원의 문학을 문제 삼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이점이다. 당시 서울은 식민지화와 더불어 급격히 도시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청계천변은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촌 즉, 충무로 진고개 일대와는 달리 한국인들이 상권을 갖고 있던 곳으로 일제의 도시화 정책에 의하여 급격하게 근대 도시의 풍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던 지역이다. 더구나 박태원이 성장한 다옥정 7번지 주변에는 한약방을 비롯하여 제과점, 이발소, 까페 등이 모여 있던 곳으로 전근대와 근대적인 변혁이 교호하는 도시상을 가장 민감하게 드러나는 장소였다.이처럼 그가 도시화, 근대화의 와중에서 성장한 점은 그의 소설 속 작품배경이 도시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지어진다. 박태원의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된 천변에서의 성장배경은 도시 생태의 병리학적 요소를 모티프로 삼는 동기 가운데 하나로 작용한 셈이다.또한 박태원의 집안은 선조가 무관을 지냈으며, 박태원의 아버지가 약국을 운영하였고, 숙부가 병원을 개업하였으며 고모 역시 신식교육을 받은 여학교 교사로 중인계층에 속하였다. 중인들은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경직된 사회와 국가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대변함으로백 수법을 구사하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또한 박태원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학교에는 잘 안나가고 영화관과 술집을 다니며 최신 예술인 영화나 미술, 음악 등 예술 전반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현대문물에 대한 선호는 그의 신분적인 속성의 영향을 받아 다른 이들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박태원의 지성과 감성은 매우 서구지향적이며 현대지향적이었다. 이는 박태원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머리스타일인 갓빠 머리로 시내를 활보했다는 조용만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도회에서 자라나 지나치게 세련되었으며 너무 조숙해 있었던 모던보이였다. 이후 박태원은 서울로 돌아와 본격적인 소설 창작에 접어들면서 주로 신변체험적인 사소설이나 심리묘사에 주력한 일련의 내성소설을 발표하고 실험적인 기법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된다.3) 구인회, 그속의 박태원한 작가의 사상이나 작품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가가 속한 사회그룹의 행동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박태원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구인회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박태원은 일본 동경유학 귀국 후 곧바로 작품활동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1년 이상의 침묵기간을 지낸 뒤 비로소 본격적으로 문단에 진출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인회(九人會)를 통해서이다. 구인회의 가입은 박태원의 글쓰기 행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많은 평자들의 지적처럼, 구인회 가입을 계기로 박태원은 그 이전의 습작기적 미숙성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 다양한 형식실험을 통해 본격적이고 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창작행위를 전개해나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박태원은 구인회 가입을 계기로 소설쓰는 행위에 대한 미학적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① 구인회1930년대 한국 문학의 전개양상은 카프의 해체라는 문단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고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카프 회원들에 대한 검거 사건은 작가들로 하여금도와 미학적 변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 구인회 가입을 전후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태원의 예술파적인 기질과 성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구인회라는 결속체를 통해서라고 볼 수 있다.②박태원의 문학관박태원은 작품 활동 초기부터 평론을 통해 자신의 문학관 내지 창작관을 비교적 명료하게 천명하고 있다. 박태원 문학관의 요체는 모더니즘 문학관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교파’라는 당시 문단 특히 프로문단 측으로부터 쏟아지는 맹렬한 비난에 대항하여, 자신의 문학태도를 밝히는 몇편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글들을 통해 박태원의 문학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는 일은 박태원의 소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박태원의 문학관은 편내용주의의 문학을 부정하고 자율적인 언어예술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문학은 어떠한 계몽적인 의도나 사회적인 효용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자족적인 언어 예술체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박태원은 반전통적인 입장에 선다. 식민지화와 더불어 시작된 한국근대문학은 어떤 의미로든 목적문학의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더구나 박태원이 문학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초까지 문단을 석권한 프로문학은 그러한 한국근대문학의 특성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문학 태도였다. 그러나 박태원은 현실의 직설적인 반영이나 내용 위주의 문학을 부정하고 탈 이데올로기의 문학관을 천명함으로써 기존 문학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강조한다. 박태원은 프로문학을 포함한 기존의 전통문학이 문학의 형식적인 가치를 소홀히 하고 정치적인 혹은 현실적인 이데올로기의 전달에만 치중하는데 크게 반발하면서, 문학의 미적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법의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이른바 모더니즘 문학관인데 그것은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다양한 실험정신을 기저로 한다. 문학의 자율성은 탈 이데올로기적 문학태도와 문학을 철저한 언어예술로 인식하는 바, 박태원에게는 우선 형식과 문장에 대한 강조로 나타난다결코 저속한 데로 흐르지 않는 그것이다. 우리 문단에서 보통 기교하면 그것을 소설작법상 어떠한 합리화의 수단으로 해석하지만 내가 말하는 작가 박태원씨의 기교란 이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전자를 문학의 기교라고 일컫는다면 박태원씨의 세계는 정히 기교의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부분적 합리화의 수단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미 기교화한 세계이다. 다른 작가 같으면 한 작품을 소설화하는 도중에서 기교라는 것이 생겨나지만 박태원씨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쓰고 하기 이전 어떠한 세계를 목도할 때부터 벌서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氏의 기교란 거의 현실과 동체이다)」박태원의 문학은 ‘문학의 기교’가 아니라 ‘기교의 문학’이며 ‘기교’는 현실과 동체라는 안회남의 해석은 박태원 문학의 핵심에 해당한다. 즉 현실 문제에 주목하고 그것을 문학에 반영하기 보다는 기교를 통한 텍스트의 구조화가 박태원 문학의 요체라는 것이다. 소박한 반영론을 부정하고 새로운 기법의 적극적인 실천을 통한 소설 지평의 확대와 심화가 바로 박태원 문학관의 본질인 것이다.Ⅱ. 소설가 구보씨와 1930년대의 작가 구보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一日」은 30년대 경성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도시문명의 영향 아래 창작된다. 그 당시 한성은 대한 제국의 멸망과 함께 독립국의 수도로서의 통치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부지역의 관리를 맡는 지방적 수도로 격하됨과 동시에 그 규모도 1/8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30년대에 와서 한반도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었고 조선 총독부의 기능 및 식민지 수도 경성의 통치-행적기능도 늘어나는 등, 점차 발전되는 경성부의 현상을 소규모의 도시계획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30년대는 일본의 독점 자본으로 수많은 노동자, 농민이 경제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으며, 이런 현상은 과잉 공급된 지식인 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식민지 지배를 위해 노동자만을 주로 필요로 했기에 과잉 공급된 조선 지, 그리고 그렇게 재주 있는 내 아들은 무엇을 하든 잘하리라고 혼자 작정해 버린다. 아들은 지금 세상에서 월급자리 얻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말한다. 하지만, 보통학교를 졸업하고도,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회사에서 관청에서 일들만 잘하고 있는 것을 알 고 있는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에 건너가 공불 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이 글에서 어머니는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낮에 한번 집을 나서면 밤늦게야 되돌아오는 스물 여섯 살짜리 지식인 구보를 일상인인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의 눈에 비친 그는 월급 자리라도 구할 생각 없이, 밤낮으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는 혹은 밤중까지 쏘다니는 인물이다.구보는 ‘생활인‘으로서 평범한 삶의 대열에 서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선다. 하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그는 정작가야 할 곳을 모른다. 서울 네거리에 홀로 선 그는 그 순간 소속된 곳이 없다. 모든 것에서 제외되어진 채 방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종로의 화신상회에서 행복해 뵈는 젊은 내외를 본다.「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 곳에서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그들의 오찬을 즐길 것이다. 흘낏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그는 이 가족들을 업신여김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바라는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삶이나, 화신상회의 젊은 가족들이 누리는 행복은 이 제도 속에 빠져 그것의 근본적 의미를 자각하지 못하는 보통사람들의 행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내부 한 켠에는 그들을 부러워하고 나아가 이사회에 편입하고자 하는 욕구 또한 가지고 있다. 구보는 현실을 부정하지만 그 곳에서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고독해하는 인간들의 표본이다. 한계단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은…」
    인문/어학| 2008.02.06| 10페이지| 2,000원| 조회(448)
    미리보기
  • 배비장전보고서
    Ⅰ. 들어가며조선 시대는 원래 충, 효, 열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벌열 정치가 성행하는 등 유교 이념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민중 의식이 성장했다. 유교 이념이 지배적이던 기존의 사회 체계와 가치 체계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선 후기 사회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 변화의 분위기는 소설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민중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판소리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곧 소설화 되면서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판소리계 소설을 지배층과 사회 모습에 대한 민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당대 사회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즉, 판소리계 소설은 풍자 소설이면서 세태 소설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사회에는 우화 소설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판소리계 소설, 그 중에서도 「배비장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1. 「배비장전」배비장전은 여색에 초연하다고 자처하는 주인공이 주변 인물들의 공모에 의해 오히려 호색적 성격을 폭로 당한다는 남성의 훼절담을 주지(主旨)로 한다. 그리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미 힘을 상실한 기존의 관념에 매달린 인물을 내세워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태, 풍자 소설이다.-세태 소설의 개념과 특징세태소설이란, ‘풍속과 세태를 사실적으로 반영한 작품’으로 간주한다. 모든 시대에 타당한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시기의 풍속이나 세태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로 소설의 사건과 전개를 순전히 풍속 세태적인 사실에서 구하는 소설 양식이다. 따라서 세태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든 시대에 타당한 인간적 진실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어떤 특정 시기의 특정 사회적 양상에 타당한 진실을 지닌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태소설은 사회가 주제로까지 나아가지 않고 배경으로만 그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세태소설은 사회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지 않고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등을구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곧 세태소설은 세태를 풍자하는 것보다 세태를 제시하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어 이는 야담계 소설과 성격이 같으나, 연암소설과 판소리계 소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세태소설은 서민과 양반의 삶을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로 서민을 소재로 하여 민중의식이 잘 드러나는 앞의 작품군과도 구별된다. 그 결과 세태소설은 중세의 가치관을 담고 있으면서도 근대의 가치관을 지향한 과도기의 작품군으로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물론 세태소설이 지니는 한계도 있다. 일부의 작품에서는 비현실적 요소가 나타나기도 하고, 또한 작품 중간 중간에 작가의 개입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건 진행이 사실주의적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작중 사건해결이 쉽게 결구되어 있는 것도 세태소설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세태소설은 세태 묘사, 세태 제시에 그치고 있는 까닭에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한계라 할 수 있다.- 구조가 지니는 이중성1) 외연적(外延的) 구조: 화합 지향성① 제주도 관기(官妓)애랑 →서울 양반 배비장과의 결혼 (애랑의 신분상승)② 몰락양반 배선달 →현감 승진으로 집권층에의 재 편입모순 대립과 갈등이 종국에 가선 극복, 지양되고 애랑과 배비장과 사또가 화합하게 되는데, 이것은 변증법적인 구조와 지향성에 기인한 것이다.2) 내포적(內包的) 구조: 지방 토착세력(민중)과 중앙 파견세력간의 갈등구조.1차 추방: 장의(葬儀)와 치병(治病)굿의 양상, 실제로는 애랑의 집에서 동헌마당으로의 운반.2차 추방: 항해와 감금의 형태, 실제로는 제주도→바다→제주도의 애랑의 집으로의 귀환.▶민중의 지배층에 대한 대결의식을 철저하게 표출시키지 않고, 화합을 지향할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 외연적 구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변증법적 통일을 지향한다. 즉, 배비장전은 대결형에 철저하지 못하고 화합형구조에 대결형 구조를 내포시킨 복합형 구조로 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배비장전의 풍자성의 풍자구조는 높은 가치가 낮은 가치로 전인공으로 등장하는 등, 그 내용은 근대적 성격을 지향하고 있지만, 결국 지배층의 의식과 화합, 타협함으로써 과거의 틀(중세적 가치규범)을 깨지 못했다. 배비장전은 결국 중세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미학적 긴장감이 떨어지고 후에 레퍼토리에서 사라지게 된다. 중세적 이념을 벗지 못했기에 지배층이든, 하층민이든 어느 계층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2. 「배비장전」의 탄생 배경1) 문학사적 배경「배비장전」은 원래 )판소리 열두마당의 한 편으로 영조대에 판소리 배비장타령으로 구전되었다. 그러나 고종 때,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을 여섯 마당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판소리 배비장타령이 빠진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이미 배비장타령은 판소리로서의 생명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배비장전」이 판소리 열두마당에 속해있다는 사실로 보아 「배비장전」의 성립연대는 19세기 초쯤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판소리계 소설이 그렇듯「배비장전」의 작품 형성 과정 역시 근원설화에서 판소리가 형성되고 다시 판소리에서 소설로 이행되었을 것이라는 판소리 일반의 작품 형성 과정을 따랐다고 보여진다. 「배비장전」이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스토리가 비슷한 설화나 실사를 찾아내야 한다. 배비장전의 소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된 근원설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기생과 이별할 때, 이(齒)를 뽑아 주었던 소년의 이야기인 발치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생을 멀리하였다가 오히려 어린 기생의 계교에 빠져 알몸으로 뒤주에 갇힌 채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경차관의 이야기인 미궤설화이다.◆「배비장전」의 근원설화① 발치설화(拔齒說話) - 이(齒)를 뽑는 이야기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에 실려 있는 발치설화는 애랑과 정비장의 이야기에 수용되었다. 발치설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계림촌에 한 기녀가 있었는데 그 기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장안에서 온 한 소년이 그 기녀를 몹시 사랑하였다. 그 기녀는 소년에게 “본래 가벌 있는 집안의 딸이었으나, 몰락하여 기녀가 되었다가 채 궤 속에 들어가 숨고, 그 남자가 들어와서는 나의 의복과 재물을 가지러 왔으니 궤를 내 놓으라 하였다. 기녀도 궤는 내 것이라고 시비하다가 관가에 호소하기로 하고, 그 궤를 지고 관가로 가니 날이 새었다. 재판에서 판관은 궤를 톱으로 썰어서 반씩 나누어 가지라 하고, 사람을 시켜 궤를 썰게 하였다. 차관이 궤 속에서 톱소리를 듣고, “사람 살리라.” 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궤를 열어 보니 차관이었다 한다.◆ 판소리 배비장타령과 「오섬가」영조 30년(1754)에 엮은 「만화본 춘향전」에 라는 구절이 있음을 논거로 「배비장전」에 관한 근원설화가 발치설화 계통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발치설화에서 변형이 가해지면서 판소리 배비장타령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발치설화를 통해 영조 때 배비장타령의 내용을 유추해본다면 배비장타령의 내용은 배비장이 제주도에서 발치봉욕을 당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조대의 판소리 배비장타령은 배비장이 발치봉욕을 당하는 단순 구조였다. 고종 때, 신재효가 창작한「오섬가」가 있다.「오섬가」에서는 제주기생 애랑과 정비장의 이별 장면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 정비장은 이를 뽑히게 되고 배비장은 미궤 속에 갇히어 희롱당하게 된다. 영조대의 배비장타령은 배비장이 발치봉욕을 당하는 단순구조였는데 철종대를 거치면서 고종대 초기, 「오섬가」에서는 정비장이 발치당하고 배비장이 미궤에 갇히어 조롱당하는 복합구조로 변형되어 그 축약형이 「오섬가」에 삽입되었던 것이다. 즉,「오섬가」에는 배비장타령이 구전되던 시기의 흔적이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요약하자면 )배비장타령은 처음엔 발치설화를 근원설화로 하여 생성되었다가 나중에 미궤설화를 첨가시키면서 기존의 반치봉욕의 주인공이 배비장에서 정비장으로 바뀌고, 배비장은 미궤봉욕의 주인공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배비장전」의 이본 - 세창서관본과 국제문화관본(김삼불 교주본))현전하는 「배비장전」의 이본으로는 세창서관본과 국제문화관본에서 발행한 김삼불의 교주본 2종이 있다. 「배비장전」은 이본의 종료가 적고전히 소설화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2) 사회적 배경「배비장전」이 19세기에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이 작품이 전환기의 시대, 사회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조선시대는 원래 유교이념이 지배적 가치였던 시기이다. 충, 효, 열은 조선시대의 절대적 규범으로 작용했고 이러한 가치규범들은 개인의 일상적 삶과 사회적 관계를 규정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유교이념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기존사회의 권력구조와 가치체계에 대한 회의가 나타났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아래 소설 역시 영?정조 이후 현실중심적이고 세태풍자적인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배비장전」이 창작되어졌다고 보는 19세기 초는 벌열정치가 행해지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많은 몰락 양반이 발생하였다. 농촌 사회는 이앙법이 보급되고 토지를 광작하는 부농과 이농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다. 지배계층인 양반 층 내에서는 집권 벌열층과 권력에 소외된 양반의 분화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기존의 신분 질서를 재편하게 되었고, 조선사회의 중세적 질서를 서서히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서민의식이 크게 성장하였다. 권력에 소외된 이들은 기존의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반발하여 현실중심의 실학을 주창했다. 실학사상이 크게 융성한 조선 후기는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근대화의 시발점을 이룬 시기였다. 문학에 있어서도 양반위주의 문학에서 서민주도의 문학으로 바뀌었다. 서민주도 문학의 대표로는 판소리계 소설을 꼽을 수 있다. 판소리계 소설은 전래해온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해학과 풍자가 넘칠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전통적인 윤리규범을 내세우면서 그 이면에는 기존의 봉건적 가치규범과 사회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근대적 질서를 지향하고 있다. 문학의 소재는 현실과 밀착된 것이 다루어졌으며, 소설 역시 전기적인 요소가 많이 사라지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어 비판과 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시기는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라고 볼 수 있으며,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중심적이다.
    인문/어학| 2008.02.06| 10페이지| 2,000원| 조회(525)
    미리보기
  • 대안교육과 대안학교 평가C아쉬워요
    대안교육과 대안학교대안학교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내가 처음 대안학교에 대해 접했던 것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어느 티비 방송을 통해서였다. 오래된 일이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학생들끼리 이름이 아닌 별명을 부르고 선생님과도 격 없이 지내고, 보통 학교처럼 보이지 않은 학교에서 수업 같지 않은 수업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주체적이고 능동적이게 학생들이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꿈을 펼쳐나가는 곳이라는 식의 학교소개멘트이다. 그 당시 대안학교는 나에게 있어 그저 막연히 제도권 학교와는 무엇인가 달라 보이는 신기한 공간이었고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특별하다기 보다 특이해보였다. 그리고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는 대안학교도 이런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이 더 흐른 지금 대안학교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고 있으며 대안학교의 수도 100여군데나 될 만큼 증가했지만 사람들이 갖는 대안학교에 대한 생각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안학교의 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결국 공교육에 대한 불신도 몇 년새 더 커져갔음을 반증하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대안학교는 진정한 대안학교로서의 기능을 얼마나 하고 있는 걸까? 또한 대안학교 중에서는 입학정원을 훨씬 초과하여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밀려들어오는 곳도 있다는데 대안학교에 다니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은 어떠한 생각으로 대안학교를 택하는 것일까?나는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책을 펼쳤다. 책에서는 대안교육과 대안학교에 대해 개괄적으로설명해 놓고 있었다. 대안교육에 대한 정의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들과 함께 외국의 대안학교에 대한 이야기, 대안교육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같은 글들은 대안교육에 대한 배경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책에서는 대안학교는 저마다 각각 내세우는 이념은 다르지만 모두 공통되는 것은 교과지식 만이 아닌 다양한 경험과 삶에 필요한 기술, 덕목을 조화롭게 배우고, 경쟁과 서열화 대신에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최대한 존중하며, 통제와 다. 우선 찾아본 곳은 간디학교였다. 간디학교는 내가 대안학교 중 구체적인 명칭을 미리 알고 있던 유일한 학교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화된 대안학교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는 뜻일 것이다. 특히 이곳은 인가학교로 학력이 인정되고 기본공통교육과정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교육하고 특별한 교육을 따로 정해 실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정보를 가지고 홈페이지를 살펴보았다. 이 학교의 게시판에는 특히 간디학교의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의 입학문의 글이 유독 많이 보였다. 대안학교의 입학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에 놀라웠다. 예전에는 대안학교라 하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위 문제아 학생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에 비해 이제는 보통의 학생들도 공교육과 다른 교육을 받고자 하여 선택하는 곳으로 바뀌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곳을 지원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글을 클릭해서 읽어보는 동안 나는 대안학교의 입학을 원하는 동기가 내 생각과는 사뭇 다르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물론 대안학교를 선택하는 학생들도 보통의 학생들이겠지만, 난 왠지 대안학교를 원하는 학생들은 경쟁을 강요하고 성적으로 평가하는 학교교육에 회의를 느끼고, 뭔가 다른 교육을 통해 자기를 찾아보고자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용기 내어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안학교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만이 너무 부각되어 비쳐진 것일까? 학생들은 대안학교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입시공부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편하게 입시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간디학교를 선택했다는 학생, 이 학교에서 명문대 입학률은 얼마나 되는지 묻는 학생, 자기는 의대가 가고 싶은데 이과는 개설되어 있지 않냐고 묻는 학생, 날라리가 없는 학교가 좋아 간디학교가 꼭 오고 싶다는 학생, 외고, 과고는 가기 힘들고 그저 뺑뺑이 돌려 평범한 학교는 가고 싶지 않아 간디학교에 오고 싶다는 학생, 간디학교가 실업계인지, 특목고인지, 일반고인지 어느 계열인지 잘 모르겠다는 학생.은 입시를 위한 교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생들은 입시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 학교에 들어가고자 하고 있었다. 이는 학부모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에 안보내도 괜찮다. 학창시절을 즐겁게 잘 보내고 자기의 인생에서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사는 어른으로 커주면 만족한다.' 라는 생각들을 하면서 대안학교에 자녀를 보내고자 하는 학부모들이지만 학력 때문에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입장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부모는 대학을 안 보내려고 대안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받지 않고 공부하게 해주고 싶어서 대안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었다. 대학을 가야지만 사람구실을 할 것이라는 생각, 어찌되었든 대학을 가야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팽배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안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해서 모두 입시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며 이들도 사교육을 받고 입시공부를 하는 보통의 학생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또한 대안학교라고 해서 폭력과 왕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대안학교로 알려져 있는 학교들 가운데는 학사 운영에서 일반 학교와 별 차이가 없는 곳도 있고, 군대식 학교 문화가 그대로 스며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대안학교에 입학한 학생 중에는 '군기 잡는' 선배들을 견디지 못해 한 달만에 학교를 그만둔 경우도 있었다. 대안학교들이라고 해서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므로 군대식 위계질서 문화에 젖어 있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가 일반학교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곳도 있다.사람들은 대안학교라고 한다면 전혀 기존의 학교와 다른 곳을 상상한다. 공교육을 떠나 파라다이스와 같은 공간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와 꿈과 희망을 안겨줄 것만 같은 공간.. 그러나 대안학교에서 말하는 자유라는 것은 학생들에게 배로 부가되는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안학교에도 결국 기존학교제도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보통의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다. 대안학교라고 문제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대안학교가 기존 학교와스로 총회를 열어 토론하고 생각해보고 있었다. 학교에서 도난사건이 발생했다면 보통은 가방을 모두 뒤지고 비인간적인 처사로 대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곳에서는 학생을 자율적인 존재로 보고 인격화하여 문제를 해결해나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가 기존의 학교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 학교도 다른 학교와 차이가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 대안학교에 들어가는 것 자체로 공교육과 다른 새로운 교육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가 학교를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많은 기대 속에서 학교에 입학했다가도 중도에 탈락하는 학생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 또한 학생 스스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교육이 새롭기만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대안학교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언론과 방송의 책임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문화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학교 운영 시스템의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머리통이 굵은 아이들이 몸에 밴 습성이나 의식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새로운 문화 속에서 조금씩 의식과 행동이 바뀌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대안교육이라고 해서 특별한 사람들이 만드는 교육이 아니다. 기존의 사람들이 특별한 교육을 하고 받기 위해서는 교사, 학생, 학교가 모두 함께 노력하는 공간일 뿐이다.대안학교의 교사들.내가 대학교에 처음 들어와 오티를 갔을 때의 일이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분은 오랫동안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대안학교의 교사를 꿈꾸는 분이라고 했다. 그 선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 같이 입을 모아 대단하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대단하다는 이유에는 경제적인 부분이 컸다. 그곳의 보수가 그렇게 적다는데 교육에 대한 진정한 뜻이 없다면 갈수 없는 길이야.. 라는 식의 로 가득했던 그 자리는 역시 우리가 그 당시 예상했던 대로 현실의 벽에 부딪쳐 있었다. 흔히 대안학교 교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안학교가 '아이들에게는 천국, 교사에게는 지옥'이라고들 말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그만큼 교사들은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일반학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봉급에 일반학교보다 훨씬 많은 노동.. 그리고 새로운 것을 교육해야 한다는 부담감..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경제적인 것과, 그 외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기꺼이 교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러한 갈등은 학교 게시판에 학교에서 갑작스런 해고 통지를 받은 한 대안학교 선생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글 하나를 통해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선생님과 교장의 갈등의 일부는 급여문제로 충돌된 것이었다. 결국 대안교육을 꿈꾸며 기존학교와 다른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곳도 학교이며, 사람이 부딪치는 곳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대안학교의 교사들이라고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 또한 학교교육 하에서 교직을 이수하고 공부한 평범한 제도속의 학생들이다. 대안교육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이를 구현할 교사들의 교육과 임용, 연수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져야만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것이 부족하다. 열악한 환경, 낮은 보수에도 바른 교육을 해보겠다는 열정과 의지 하나로 교육에 임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높이 살만 하지만 멀리 대안교육을 내다볼 때 필요한 것은 제대로 갖추어진 교사 양성 체계의 마련일 것이다. 또한 대안학교 교사의 급여문제에서도 보여지 듯 사실 대안학교에는 정부의 지원이 없는 상태이며 학부모의 보조금이나 단체의 후원금등으로 꾸려지기 때문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곳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의 재정부담은 상당 부분 학부모에게 지워지고 있다. 일반 공교육 학비에 비해 대안학교의 학비가 비싼 것은 바로 이본다.
    교육학| 2008.02.06| 4페이지| 1,000원| 조회(294)
    미리보기
  • 국어사시대구분
    1. 국어사 시대구분의 필요성국어사는 한국사의 일부로서, 한국어의 역사를 말한다. 국어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병존해 있는 수많은 개별적 언어사실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 분류하지 않고는 국어가 변화하여 온 과정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또한 국어사는 국어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이기에 국어사를 어떻게 시대구분하면서 볼 것인가의 문제가 반드시 나타난다. 그 동안의 국어사는 대체로 국어사의 하위부문인 음운사, 문법사, 어휘사 등의 부문별 특성을 종합적으로 관찰하여 시대구분해 온 것이 관례이며, 각 하위 시대구분은 상위사인 전체 국어사의 시대구분과 어떠한 상관성 또는 독자성을 가지는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시대구분론이 역사를 살펴보는 편의상의 방법에 불과하기에 여러 시대구분의 논의가 분분할지라도 역사 본질 자체에는 아무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단지 시대구분은 역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편의상의 수단으로만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역사의 시대구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역사 인식에 상당한 견해차들을 불러 일으키듯이 국어사의 시대구분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어사의 인식과 이해가 달라지기에 비교적 보편타당한 시대구분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결국 국어가 변천해 온 과정을 몇 시대로 구분하려는 이유는, 국어를 시대별로 나누어서 각 시대의 국어가 지닌 일반적 성격을 찾아내어 몇 개의 범주로 분류함으로써 국어가 단계적으로 변화하여 온 과정을 가시적으로 이해하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과 기준에 의하여 국어사의 시대구분이 이루어져 왔다.국어사의 시대구분을 시도했던 초기에는 국어를 크게 고어와 현대어로 구분하고 고어를 다시 왕조의 이름을 따서 고려어, 조선초기어, 조선후기어로 세분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국어의 구분을 통하여 국어사의 시대구분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법은 양분법에 의해 다시 구분을 하고 다시 이를 세분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 이숭녕(1954)의 『국어학개론』상대의 국어- 신라시대의 국어- 고려시대의 국어- 이조시대의 국어- 현대의 국어(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 (이조시대)2. 김형규(1955)의 『국어사』신라시대- 고려시대 - 조선초기- 조선중기- 조선 후기- 조선 말기- 현대(훈민정음-세조)(성종-임진란) (임진란-경종)(영조-갑오경장)김형규(1962, 증보 1974), 김형규(1975)상고어(=고대어)- 중고어 - 중기어- 근대어- 현대어(신라시대) (고려시대) (-임진란) (-갑오경장) (-현재)이중 김형규의 견해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김형규-1955, 國語史여기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역사에 있어서는 정치사적 관점이나 왕조의 변동이나 지배권의 이동을 중심으로 보아, 신라 고려 이조로 나누고 있으나, 국어사를 논할 때에는 그것을 본받을 수 없다. 국어는 정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요, 문화적 존재로서 쉬지 않고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표현문자나 언어현상을 가지고 몇 시대로 크게 나누어 보았다. 그런데 우리의 문자나 언어의 역사는 정치적 역사 시대구분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 우선 우리글자 훈민정음이 나오기 전후로 크게 나누어, 그 이전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로 나누고 그 이후를 다시 5기로 나누었다. 그 결과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아진다.훈민정음 이전: 신라시대고려시대훈민정음 이후: 조선초기- 세종 세조조선중기- 성종이후 임진란까지조선후기- 임진란이후 경종까지조선말기- 영조이후 갑오경장까지현대- 갑오경장 이후이는 다만 표면에 나타난 문자의 기록만을 가지고 본 시대구분이 아니라, 조선의 사회 정치 문화의 변동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으며, 우리말의 음성이나 어휘 또는 어법의 변화가 이 시대를 계기로 나타나고 있다. 이로써 김형규에 나타난 시대구분은 언어사와 사회 정치문화사를 동시에 고려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조선시대를 초기, 중기, 후기, 말기처럼 세분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사실에 입각하여 시대구분하는 견해다음으로는 외사적 구분론과 달리 언어사를 언어사실에 입각하여 시대구분을 하고자 하는 견해가 있다.이를 처음 주장한것은 이기문에서이다. 이에 따르면 언어의 내사와 외사를 구별하여 내사에 따른 언어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였으며 이 내사가 곧 언어사실에 입각한 국어사 기술을 뜻한다. 여기서 언어사실이란 것은 언어의 역사적 변화와 원인을 크게 ‘음운변화, 유추에 의한 문법의 변화, 차용에 의한 어휘변화’ 라는 세가지 기준으로 보고 이 세가지 중에 어느 한 변화라도 두드러진다면 시대구분의 특성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또한 훈민정음 창제는 문자창제에 불과하므로 언어변화와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훈민정음 창제를 기준 삼는 태도도 비판하고 훈민정음 직전 시기인 15세기 초에 나온 조선어가 훈민정음기와 같은 언어모습이란 점에서 훈민정음 이전을 모두 고대로 돌린 하야와 같은 태도는 시정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고려시대의 중부방언을 기반으로 현대 한국어의 토대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출발부터를 중세 국어의 출발로 보며 중세 국어의 제 특징이 무너지는 16세기를 중세의 최후로 설정하였고, 14세기의 모음추이와 같은 음운사적 원인을 중시하여 중세를 전후기로 나누었다. 또한 임진란을 분기점으로 중요시하는 태도들과 달리 임진란 이전 시기에 소위 임란 이후의 언어변화라고 하는 것들이 이루어졌기에 임진란에 절대적 비중을 둔 태도를 거부하며 16세기를 중세와 근대국어의 과도기로 본다. 그 구분은 다음과 같은데 내사- 원근법적 시대구분이라 부를 수 있다.(국어의 형성)- 고대국어- 전기중세국어- 후기중세국어- 근대국어- 현대국어(신라어) (10-14세기) (15-16세기) (17-19세기) (20세기~)이 시대구분은 고대국어를 신라어로 한정한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기문 교수는 고구려어의 특징을 밝히는 등 나름대로 고구려, 백제어 등에 대해서도 기술을 베풀고 그 층위를 한국어의 전층에 간직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니, 광의의 국런데 언어는 점진적으로 계속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므로, 그 역사를 어느 시점에서 분명히 구획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언어사상의 특기할 만한 대사건의 존재는 시대구분에 편의를 제공하며,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시대구분을 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원칙하에서 다음과 같은 시대구분이 이루어졌다.고대국어중세국어 전기; 고려초- 훈민정음 이전중세국어 후기; 훈민정음 편찬- 16세기 말근대국어 전기; 17세기 초- 18세기 푸반(영조시대까지)근대국어 후기; 그후(현대국어)이상의 각 시대에는 간략한 언어사적 특징이 제시되어 있다. 중세국어의 특징으로는 음소 z와 b, 어두자음군 및 된소리의 발달을 들고 있으며, 근대국어의 특징으로서는 중세국어의 특징이 모두 없어졌다는 점과 이중모음의 단모음화 등을 들고 있다.이로써 이기문에 나타난 시대구분은 언어사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각 시대의 특징으로 제시된 주요 내용이 음운론적인 항목들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위와 같은 시대구분은 일단 음운사적 기준에 상당한 비중이 놓여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박병채(1989)의 견해이다. 지금까지의 국어사의 시대구분에서 고대국어에 대해서만은 고대라는 개념의 포괄성 때문에 많은 이들이 삼국의 언어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기문 교수의 설정이 일반화된 지금 박병채는 이와 다른 특이한 시대구분으로는 고대를 넓게 설정하고 있다.(3) 박병채-1989, 국어발달사국어의 역사적 기술에 있어서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은 왕조사적 시대구분을 과감히 탈피하는 일이다. 언어의 외적인 요인인 왕조의 교체라는 전환점에 기준을 둘 때, 정작 핵심이 되는 언어의 내적 요인에서 오는 변화의 실상이 흐려질 염려가 있기 떄문이다. 물론 언어 외적 요인인 왕조의 교체, 정치적 중심지의 이동, 원주민의 이주, 또는 인접민족과의 접촉 등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동이 언어의 변천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어사 기술에서는 그 주체인 언어은 분명히 언어의 내적 요인에 기인하는 변동기가 기준으로 제시되어 있어, 그 기반이 언어사에서 나왔음을 알려주고 있다.전기 고대국어- 후기 고대국어- 중기국어- 근대국어- 현대국어(~1103) (1103~1443) (1443~1598) (1598~1894)(~현대)다음으로 최범훈(1990)은 다음과 같은 6분법의 시대구분을 보여준다.형성기 한국어- 고대한국어- 중고한국어- 중세한국어- 근대한국어- 현대한국어(~삼국정립 이전까지)(통일신라)(~정음창제)(~임진란)(~갑오경장)(~현대)이상에 따르면 요컨대 국어사의 시대구분은 하야의 3분형, 이기문, 박병채교수의 4분형, 이숭녕, 김형규 교수의 5분형, 최범훈 교수의 6분형으로 나뉘는데 쟁점이 고대와 중세의 범위에서 크게 갈린다. 특히 이기문 교수는 고려와 조선 건국을 ‘중세국어’라는 개념하에 일관되게 연속적으로 파악하면서 전, 후기 개념으로 나누는데 반하여 나머지는 고려어와 조선어의 일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건국이나 훈민정음 창제를 분기점으로 두어 구별하여 기술한다. 그리고 이기문 교수가 특정 연대를 기피하고 ~~세기 정도의 표현을 써서 언어의 연속성을 살리는 쪽으로 기술하는데 반하여 나머지는 특정연대를 제시하려고 하여 언어의 불연속성을 드러내는 듯한 인상을 주어 대조적이다.역사의 시대구분이 잠정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국어사의 시대구분도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이다. 20세기의 국어를 현대국어로 귀속시키는 기존의 국어사 시대구분은 이제 21세기의 국어도 현대국어 속에 포함시켜야 할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구분을 재검토할 시기가 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아무리 정교하게 구분된 시대구분이라 하더라도, 그 구분은 인위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단히 이를 재검토하여야 하며, 또한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국어사 시대구분의 타당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이 시대구분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3. 국어사 시대구분의 차이에 나타나는 배경적 요소들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국어사를 고대국어,
    인문/어학| 2008.02.06| 7페이지| 1,500원| 조회(848)
    미리보기
  • 중세국어와 근대국어의 특성 비교론 -응운, 자료, 어휘, 표기 면에서
    중세국어와 근대국어의 특성 비교론-음운, 자료, 어휘, 표기-1. 음운의 비교? 중세국어의 음운1) 자음체계)훈민정음에서는 자음을 중국 음운학의 용어를 이용해서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의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현대 언어학의 연구개음, 치경 폐쇄음, 양순음, 치경 마찰음(또는 파찰음), 인후음에 각각 대략 해당한다. 평음, 격음, 경음이란 계열은 현대어와 같지만 중세어에서 경음은 아주 특수한 경우에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ㆅ"이 특징적이다. 전기 중세국어의 자음에는 어두에도 경음이 나타났으며 어두자음군은 형성되어가는 중이었다. 〈계림유사〉에는 후기 중세국어에 ''[米]로 기록되는 어휘가 '薩'로 표기되어 있어 자음들 사이에 있던 어떤 모음이 탈락하여 어두자음군이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과 'ㅿ'이 존재했고 유성마찰음의 ''([] 또는 [γ]이 생성되고 있었다. 이들은 다 어중에 나타나는 것들인데 'ㅿ'은 음절말 위치에서도 나타났다. 자음은 음절말 위치에서 아직 다 내파화되지 않아서 'ㄱ·ㄴ·ㄷ·ㄹ·ㅁ·ㅂ·ㅅ·ㅿ··ㅈ·ㅎ'등이 제대로 발음되었다. 그러나 유기음은 평음에 중화되었다.후기 중세국어에는 평음과 유기음 외에 경음 계열이 더 있었다. 어두의 경음은 ㅅ계 합용병서와 'ㆅ'으로, 어중의 경음은 ㅅ계 합용병서와 'ㄲ·ㄸ·ㅃ·ㅉ'으로 기록되었다. ㅅ계 합용병서로 기록된 경음에 'ㅾ'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성마찰음 ''과·'ㅿ'·''도 한 계열을 이루고 있었다. ''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소멸되었고, 'ㅿ'과 ''도 16세기에는 소멸되었다.이 시기에는 ㅂ과 'ㅄ'계의 합용병서('ㅳ'·'ㅴ' 등)로 표기되는 어두자음군이 있었다. 어두에서도 여러 자음이 다 발음되었음을 말한다. 모음 사이에서 자음을 셋 이상 발음할 수 없는 자음군단순화 현상도 있었다. 그러나 ㄹ·ㄴ·ㅁ 등의 유성자음 뒤에서는 세 자음을 다 발음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외의 자음은 음절말에서 완전히 내파적으로 발음되어 'ㄱ·ㄴ·ㄷ·ㄹ·3) 액센트(성조) )중세어 문헌을 보면 한글 옆에 "·"이나 ":"이 찍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방점"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조"를 나타낸 것이다. "성조"라고 해도 중국어 성조와 다르고, 일본어 높낮이 액센트와 같은 것이다. 점이 없음을 평성이라고 하며 낮은 소리, 한 점은 거성이며 높은 소리, 두 점은 상성으로 낮다가 높아지는 소리를 나타냈다. 다시 말해, 중세어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소리의 높낮이로 의미를 구별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 "성조" 즉 액센트도 대부분의 방언에서는 사라지고, 지금은 경상도와 함경도 방언에만 남아 있다.?근대국어의 음운근대국어가 중세국어와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모음 체계가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고대국어와 중세국어의 큰 차이가 모음 체계뿐만 아니라 자음 체계까지 다르다는 점과 구별된다. 중세국어 시대에 들어오면서 모음이 고대국어의 5모음 체계에서 7모음 체계로 바뀌고, 동시에 자음 체계에서도 고대에 없던 유기음?경음이 발달하여 음운 체계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는 모음 체계에 크다란 변화가 있었을 뿐, 자음 체계는 극히 기능 부담량이 적은 ‘?’만 없어졌을 따름이다.1) 자음체계)근대 국어의 자음은 중세국어나 현대국어와 마찬가지로 장애음과 공명음으로 나누어지는데 장애음에는 폐쇄음, 파찰음, 마찰음의 세 계열이 있었으며 공명음에는 비음과 유음의 두 계열이 있었다. 이들 자음은 비음 ‘ㅇ’를 제외할 때 모두 초성 위치에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두 위치에 한하여 근대 국어 초기에는 초성에서 두 자음까지 발음할 수 있기도 했지만 18세기부터는 현대국어와 마찬가지로 초성에서 한 자음만 발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어두 자음군이 17세기 후반에 급격한 변화를 겪은 데에 기인한다. 종성 위치에서는 현대 국어와 마찬가지로 한 자음만 발음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위치에서 ‘ㄱ,ㄴ,ㄷ,ㄹ,ㅁ,ㅂ,ㅇ’의 7자음만 실현될 수 있었다. 이는 종성위치에서 ‘ㅍ’가 ‘ㅂ’로 ‘ㅌ,ㅅ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점도 가진다. 그러나 중세국어에 다가갈 수 있는 자료가 다리 없기에 우리는 대부분 이 언해자료를 기본자료로 하여 그 당시 언어의 실상에 다가간다. 특히 한글이 창제된 바로 직후에 나온 문헌 자료는 한글 문헌 자료가 적은 편이기 때문에 한 두개의 어휘밖에 포함하지 않는 한글 문헌자료라 하더라도 소중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중세국어 한글 문헌 자료1. 불교 관계 한글 문헌 자료 2. 유교 관계 한글 문헌 자료3. 의학 관계 한글 문헌 자료 4. 역학 관계 한글 문헌 자료5. 시가 자료 6. 어휘 자료 7. 언간 자료 8. 구결 자료 9. 운서 자료10. 한글 및 음운의 연구 자료1. 불교 관계 한글 문헌 자료불교 관계 한글 문헌 자료는 세조대에 간경도감에서 간행되어 나온 불경 언해서가 주종을 이룬다. 그런데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와 같이 그 언해의 저본이 되는 한문본이 현재로서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들도 불교 관계 언해 자료와 함께 다룬다1. 석보상절 (1447년) 2. 월인석보(1459년) 3. 능엄경언해(1461)4. 법화경언해(1463년) 5. 금강경언해(1464년) 6. 반야심경언해(1464년)7. 상원사어첩,상원사중창권선문(1464년) 8. 선종영가집언해(1464년)9. 아미타경언해(1464년) 10. 원각경언해(1465년) 11. 목우자수심결(1467년)12. 몽산법어언해(1467년) 13. 사법어언해(1467년) 14. 한글판 오대진언(1476년)15. 금강경삼가해(1482년) 16. 남명집언해(1482년) 17. 불정심경(1485년)18. 영험약초(1485년) 19. 오대진언(1485년) 20. 육조단경언해(1496년)21. 진언권공, 삼단시식문(1496년) 22. 개간법화경언해(1500년)*15세기의 불교 관계 한글 문헌 자료*16세기의 불교관계 한글 문헌 자료1. 별행록절요언해(1522년) 2.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1553년) 3. 육자신주(1560년)4. 몽산화상육도보설 (1576년) 5. 해와 비교하여 구결을 연구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생획자를 쓴 부분과 원자를 쓴 부분들이 두루 섞여 있다.⑤훈의소학강보- 간행 연대 미상의 목판본으로, 한문 원문에는 권점을 쳐 놓고, 원문의 상단에 생획자의 구결을 판각한 것이다.2. 구결자료구결자료도 근대국어시기가 중세국어시기 보다 훨씬 방대하고 다양하다. 고대 국어 시기나 중세 국어 시기의 구결 자료는 판본인 한문본의 좌우에 붓으로 써 놓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근대 국어 시기에 오면 이들을 한문의 좌우에나 상단에 판각하여 놓은 것이 많다.특이할 만한 점은 중세국어시기의 이두자료와 구결자료는 대부분 목록화되어 있는데 비해, 근대 국어시기의 그것은 목록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한글자료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영인본도 없는 셈이다.3. 한글자료근대 국어 시기의 한글자료는 그 명칭으로만 보아서는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는 자료를 지칭하여야겠지만, 실제로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한자를 비롯한 다른 문자와 혼용하여 쓴 자료를 포함시킨다.* 번역 여부에 따른 분류한글 자료는 그 문헌이 번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문으로 쓴 문헌인가, 번역을 거쳐 이루어진 문헌인가에 따라 구별할 수 있다. 전자를 원국문본, 후자를 번역본이라 한다. 번역본은 다시 한문이나 백화문을 번역한 언해본과 그 이외의 언어인 몽고어 청어 왜어 등을 번역한 역학서본, 그리고 내용을 번역하지 않고 외국어 음만 번역한 음역본으로 구분할 수 있다.3.1 원국문본본래부터 국문으로 쓰인 자료는 흔하지 않다. 대개 운문류, 고소설류, 그리고 언간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본래부터 국문으로 쓰인 한글 문헌 자료는 국어학적인 면에서 몇가지 특징을 지닌다.첫째, 이들 자료는 판본이 많지 않고, 대부분이 필사본이다. 필사본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이 전사본이다. 이것은 근대 국어 연구자들에게 이 자료를 어느 시기의 자료로 취급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 자료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근대 국어 연구 자료로 등 한자어로 표현하였는데, 불과 10년 사이에 많은 고유어 어휘들이 한자어로 대치된 것을 볼 수 있다.(ㄱ1) 이 經 듣고 隨喜?야 法會로셔 나아 녀느 고대 가 쥬? 坊이어나 뷘 겨르?? ? 히어나 巷陌이어나 ??히어나 제 드론 야?로 어버?며 아?미며 이든 벋?려 ?? 불어 닐어든 (ㄱ2) 이 經 듣고 隨喜?야 法會로셔 나 녀나? 고대 가 僧坊애 잇거나 空閑? ?히어 나 城邑과 巷陌과 聚落과 田里예 드룬 다? 父母 宗親 善友 知識 爲?야 히믈 조차 불어 닐어든 2) 중국어 (중국어 입말 차용어)중국어 차용어는 15세기의 문헌에도 소수의 예가 보인다.?(銅)부플 , 갸? (家事, 의미는 ‘椀?’이었음) ,훠(靴 ,능엄 6:96>, 노(羅) 등.16세기에 사용된 중국어들은 《번역박통사》,《훈몽자회》등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의복, 옷감, 생활 용품, 음식물 등에 관한 것들이다.투구(頭?), 비갸(比甲), 딩자(頂子, 頂兒), 후시(護膝), ?미(玳瑁), 노(羅), 야청(鴉靑), 야투로(鴨頭羅), 솨?(刷子), 피리(??), 사탕(砂糖), 쳔량(錢粮), 진디(眞的), ??(白菜) 등3) 여진어여진족들은 12세기에서 15세기에 함경도 근처에 사는 동안 지명에 그 언어의 흔적을 남겨 두었다. 이런 여진어 지명들은《용비어천가》,《동국여지승람》,《세종실록 지리지》등에 기록되어 있다.4) 몽골어몽골은 고려가 대몽 항쟁을 포기하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부터 1367년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100여 년 가까이 고려를 지배하게 되었다. 지배족인 몽골족의 언어와의 접촉은 국어에 많은 몽골어 차용어를 불러들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몽골어 차용어는 몽골 지배 지배 아래 있던 고려 후기에 들어와 사용되던 어휘들이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더러는 귀화어화하기도 하였다.《고려사》‘권126 열전 변안렬(邊安烈) 조’에 보면 1380년 이성계가 운봉에서 왜적을 물리친 황산대첩 이야기가 있는데, 적장은 나이 겨우 열대여섯밖에 안 되어 우리 군사들이 그를 ‘阿終也
    인문/어학| 2008.02.06| 25페이지| 3,000원| 조회(851)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9
19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7
  • B괜찮아요
    6
  • C아쉬워요
    3
  • D별로예요
    1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7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8:59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