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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지리학사에 관한 연구
    근대 지리학사의 연구과 목 명담당교수학 번이 름제 출 일1. Humboldt와 Ritter의 사상 비교① 근대 지리학의 개막고대 그리스ㆍ로마시대에 발전했던 지리학은 그 후 중세를 거쳐 유럽에서는 쇠퇴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지리학이 다시 발전할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은 르네상스시대이다. 르네상스기는 다른 대부분의 학문분야와 마찬가지로 지리학에서도 재생의 시대, 활발한 전개의 시대였다. 지리학적 시야의 확대와 함께 지구 및 지표면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적 記述(기술)의 시도가 차차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가 폭넓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경우 상식을 추월하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로 세인의 호기심을 부추기거나, 특정 장소에 관한 사실의 무미건조한 나열에 의해 여행자나 행정관, 상인 등의 실용적 필요에 응하였기 때문이지만, 어느 것도 과학적인 지리학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 있었다.그러나 18세기 중엽부터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과학적인 지리학의 확립을 지향한 지리학의 혁신운동이 그것이다. 그 중심은 독일로서,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지리학의 발달은 주로 독일인 지리학자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도 1768년에 출생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와 1779년에 출생한 칼 리터(Carl Ritter)는 학문의 지리학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근대 지리학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다. 이 두사람의 위대한 재능에 의해서 지리학은 근본적인 변혁을 이루게 되엇으며, 훔볼트에 의해서 명시되고, 리터에 의해서 근대지리학의 원리가 정식되었다.② Humboldt와 Ritter의 지리적 사상의 공통점Humboldt는 경험적 관찰자이자 비교론자로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주로 그의 저서를 통해서, Ritter는 대학에서의 강의를 통해 그 시대의 사람들과 그 後學(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Humboldt와 Ritter의 견해는 공통점이 많았으며, 또한 그들의 연구는 상호계에 걸친 개별적 요소를 분석하는 계통지리와 지역에 의해 복잡한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지지로 분리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세 번째, Humboldt와 Ritter의 지리학 원리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지리학을 성립시켰다. 모든 자연적 관계와 모든 공간적 관계는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전제를 Humboldt와 Ritter 두 사람 모두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리학의 실체를 과학적 형태로 주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지역에 대한 설명적 기술을 제시하고 그들을 다른 지식과 비교함으로써 과학적인지리학의 硏究方法論(연구방법론)을 마련하였다.Humboldt의 발생학적(genetic)연구에 대한 접근 즉, 모든 실체의 통일체를 이해하도록 이끄는 一般原理(일반원리)의 추구는 상당한 수준의 과학적연구라고 평가되고 있으며, 더군다나 통합된 현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Humboldt는 이 복잡한 통합체가 어떻게 보다 덜 복잡한 부분적 통합체로 나누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각각의 관계에 대한 법칙을 수립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Ritter의 경우 가장 독특하고 고유한 특성과 일반적인 현상을 모두 함께 지니고 있는 지역의 결속력 자체를 기술하고 밝혀내는 것이 지리학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통합체에 기초를 둔 과학적 지리학을 발달시키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③ Humboldt와 Ritter의 지리적 사상의 차이점Humboldt와 Ritter는 개인적 성격과 그들의 생애 전반에 거친 삶의 과정과 이들이 접촉하고 영향받은 철학자, 문학가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연구는 매우 다른 색채를 띄고, 지리학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서로 대조적인 차이점을 보여준다. Humboldt와 Ritter의 지리적 사고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점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이들이 갖고 있는 자연에 대한 哲學的 接近方式(철학적 접근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의 통일체 개념을 두 사람 모두 받아들였지만 Humboldt는 기계론적 관점(계가 다 밝혀질때까지(즉 계통지리가 완성될 때) 기다리기 보다는 특정현상그룹을 다른 현상그룹과의 지역적 관계속에서 계통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Humboldt와 달리 Ritter는 지역연구에 있어서 주로 이론에 머물러 있었으며, 실제적으로는 부분적으로만 연구가 행해졌을 뿐이다. 비록 Ritter의 목적은 지역을 종합화하고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었으나 지역내의 모든 관련된 현상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를 수행하지는 못하였다.④ Humboldt와 Ritter의 지리적 사상의 문제점과 해결방법Humboldt와 Ritter의 지리적 사상 중 지리학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들간의 상호관련성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사고를 수용할 때 대두되는 문제중의 하나는 다양한 현상그룹간의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점이다. 즉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Humboldt와 Ritter는 단지 지표면의 다양한 현상들과 요소들을 고려하였으며, 지역의 전체적인 특성을 결정짓는데 다양한 현상들과 그 구성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상호관련되었는가 하는 점에서만 연구의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환경주의론적 논제에 부딪치지 않고 벗어날 수 있었으며, 모든 지표상의 현상들은 분리될 수 없는 통일체라는 그들의 개념에 따를 경우 자연적 요소와 인문적 요소들이 분리되어야 될 필요가 없었다.오히려 Humboldt와 Ritter가 세상을 떠난 후에 다양한 견해들이 확대되고 학문이 전문화되면서 자연과학분야의 사회과학분야로 이원화되었다. 주제에 의해 세부영역간의 전문화가 서로 연관된 현상들의 기초위에서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규명하게 됨으로써, Humboldt와 Ritter의 지리적 사상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리학의 각 세분화된 영역들이 부분적으로 통합된 특정한 현상그룹에 대한 이해를 서로 공유하여 지리학의 고유주제인 지표상의 다양함을 총체적이고 통합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주교재(지리학사 권용우.안영진 지음 한울아카데미)를 제외한 주.참고문헌▷ (한울지리학경론을 비로소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② 환경결정론과 가능론 주요 개념들의 비교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에 관한 지리학적 관심사의 초점은 두 가지 중심적 논제인 환경결정론(環境決定論, environmental determinism)과 가능론(可能論, possibilism)에 맞춰졌다. 인문지리학의 창시자로서보다는 hgksrudrufwjd론의 효시로서 널리 알려진 학자는 위에서 언급한 독일의 지리학자 라첼(Ratzel)이었다.라첼(Ratzel)은 문화양식이란 자연조건에 적응하고 자연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환경결정론이라는 문제에 관한 라첼 자신의 언술은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이었으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환경의 영향보다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파악하고 주장한 것은 그를 뒤이은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인류지리학과 관련한 라첼(Ratzel)의 학문세계를 평가함에 있어서 주목할 또 하나의 논점은 그가 결정론자로 비판을 받을 수 있으나, 그는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문화적 현상도 계통적 연구의 주제가 될 수 있음을 정당한 논거에 의거하여 제시한 최초의 학자였다는 것이다. 그 이전 시대만 해도 인문지리학은 주로 지역지의 틀 속에 제한되어 있었다.라첼(Ratzel)은 환경결정론과 민족주의, 그리고 이종주의 사이에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데 이론적 단초를 제공하였다. 특히 ‘인류지리학’ 제 2권에서 취락형태의 집중과 분포, 이주, 그리고 문화적 특성의 확산에 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여기서 라첼(Ratzel)은 이러한 현상들을 자연조건의 견지에서만 설명할 수 없으며, 국지적 인구나 이주집단의 역사적 발달과 문화적 배경이 또한 중요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다.미국에서는 지형윤회설을 제시한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W. M. Davis, 1850~1934)가 지리학의 내용적 범위는 통제력을 행사하는 자연환경과 인간의 반응 사이의 관계에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 가장 저명한 지리학자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지리학회의 초대회장아었던활동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국가의 개발을 촉진하거나 늦추거나 아니면 중지할 수는 있어도 이미 자연환경에 의해 정해진 방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리학자의 임무는 아연의 마스터플랜을 연구하고, 그들의 국토를 기온, 강수량, 토양 등의 자연환경에 부합하도록 개발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데이비스와 셈플 등의 생각은 1930년대까지 미국 지리학을 지배하였으며, 미국의 학교지리에 있어서는 보다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비록 데이비스와 샘플의 생각이 20세기 초반 북미 지리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인간과 환경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일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환경결절론과 매우 큰 편차를 보녀주는 가능론의 관점이 나타난 것이다. 가능론의 냐용은 각 공동체가 우세한 자연조건에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하며, 그 적응의 결과는 수세기에 걸친 발전을 반영하며, 하나의 작은 공동체는 다른 지역에서, 심지어 동일한 자연적 조건을 가진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전체적으로 가능론자들은 이간의 행위에 주어지는 자연의 제한은 지표면의 장소에 따라 그리고 역사적 시기에 따라 다양하다고 보았으나, 인간이 얻은 수많은 기술은 결코 자연의 통제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동시에 인정하였다. 환경결정론이 자연환경만이 인간생활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라고 할 때, 가능론은 인간의 행동이 또 다른 통제요소에 의해 복합적으로 규정된다. 가능론이란 환경론으로 통칭되는 하나의 사고 틍의 연장선 속에서 극단적 결정론과 대비적으로 존재한 관점이었다.③ 환경경결정론과 가능론이 미친 영향20세기 초 지리학의 성격을 정형화하였던 관점들은 당시 북미 사회가 경험하고 있던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들을 반영하는 편린들이었다. 거기에서 바로 사회적 정당성의 신조가 자연신학에 기초한 하나의 신정론(神正論)에서 진화론이라는 자연의 새로운 법칙에 기초한 또 하나의 신정론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결정론적다.
    기타| 2009.11.14| 10페이지| 2,000원| 조회(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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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과 사회변동-청계천 등
    1. 사람들이 청계천 복원에 흥분하는 이유성공적(?)인 복원사업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받고 있는 청계천!그 동안 이름뿐인 청계천이 이제서야 제 이름에 걸맞게 물이 흐른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청계천에 물이 흐르는 모습에 감탄하고 놀라워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청계천에 흥분하게 했을까? 그에 대한 가장 표면적인 답변으로 아래의 청계천의 복원 전?후의 모습을 비교한 그림으로 대신하겠다.< 청계천 복원 전 >가.청계천변 판자촌의 모습(1962년)(사진출처: http://local.naver.com/cheonggye)나.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후의 청계천에는 염색공장이 들어서는 등 하천의 오염 으로 대표적인 슬럼가가로 전락함(1950년대 중반)(사진출처: 청계천 문화관)다.청계고가도로(사진출처: http://local.naver.com/cheonggye)< 청계천의 복원 후 >가.광통교 나.청계광장의 밤 다.청계천물놀이인파(사진출처:http://local.naver.com/cheonggye)이렇게 청계천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명박 시장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청계천 복원 사업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2005년 10월 1일. 방문객은 이미 100만명을 훌쩍 넘어섰고 각 신지에는 26일(토)까지 995만명의 시민이 다녀간 데 이어 일요일인 27일, 방문자가 1천만명을 넘어섰음을 보도했다. 1천만명이면 서울인구와 맞먹는 수치인 만큼 놀라울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청계천에 대한 관심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영한다.2. 서울시가 내세운 청계천 복원 사업의 당위성우리들에게 새로운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청계천은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복원되었는가? 서울시에서 발표한 청계천 복원사업 내용을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다음은 청계천복원사업홈페이지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것이다.복원의 목적은 청계천에 맑은 물을 다시 흐르게 하여 생태계의 복원은 물론 서울이 자연 과 함께 어우러지는 환경친화적 도시로 거듭나게 하는 프로젝트이며, 조선시대의 적되고 있다.3. 성공적이지 못한 청계천 복원 사업청계천이 복원되어 시민들에게 개방이 되고 갖가지 행사를 여는 등 서울시는 청계천 홍보에 열을 올렸다. 연일 매스컴에서는 ‘축제의 장’ 으로 꾸며 보도했고, 그 동안 어려움이 있었으나 해냈다는 식의 성공적인 개인적 신화로까지 비춰지는 듯한 인상까지 받았다. 과연 성공적인 복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많은 우려와 기대 속에서 청계천에 물길이 열렸다. 도심을 배외하던 참새들이 돌아오고, 자연의 모습이 들어서니 자연을 터전삼아 살던 생물들이 먼저 알고 찾아왔다. 어느새 자연의 내음을 맡고 찾아온 것이다. 청계천 복원으로 인해 자연 생물들이 돌아오고 도시의 야경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지난 10월 5일 KBS 환경스페셜(235회)에서 [청계천, 물길 열리다]의 제목으로 방영한 내용을 보면 마냥 좋아만 할 수는 없다. 다음 글은 KBS 환경스페셜의 내용을 토대로 청계천의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과 외국사례를 통해 완벽한 복원을 위한 과제를 살펴보겠다.(KBS 환경스페셜 235회(‘05. 10. 5) 청계천, 물길 열리다의 인용부분들은 방송다시보기를 통하여 반복하여 보면서 거의 대분분의 내용을 필기한 것입니다.)1958년 청계천은 교통체증의 대명사였다. 47년전의 물길은 메말라 있었다. 청계천의 고가도로 아래에는 서울시 하수 20%가 흘러들어가는 거대한 하수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청계천의 복원으로 메말랐던 곳에 물길이 생기고 드디어 예전처럼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청계광장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원된 물길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길이 열린지 3개월 청계천은 수심 40cm의 하천으로 변했다. 청계천에 물길이 생기니 참새가 날아오는 등 더 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장관을 이룬다.또한 청계천에는 도시대기환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3차원 풍향 풍속계로 측정한 결과 공사이전과 이후로 비교하였더니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을 볼 수 있었다. 청계천의 물길이 뚫리니 청계천을 따라 바람이 생겨 도시 대기가 순환하로 대량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신답철교 부근은 자연 하천에 가까우며, 풀이 자라는 곳의 생물들을 채집하였더니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는 잠자리 유충이 발견되었고 피라미와 버들치들이 많이 있었다. 물의 깨끗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황학교 부근의 물고기는 강 하류에서 이곳까지 올라와 있는데 하류에 서식하는 잉어 붕어들이 대량 발견되었다. 물길을 따라 이곳까지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하천 생태학자들은 이러한 강의 길이를 따라 나타나는 질서를 강의 연속성river continuum이라고 한다. 상류하천의 생물군집은 유역의 육지(또는 때때로 인접한 호수)로부터 씻겨 나온 유기물에 크게 의존한다. 하천의 중류에서는 강의 폭이 더 넓어지며 큰 강의 하류에서는 흐름의 속도가 감소하고, 보통 물이 혼탁하여 빛의 투과도와 수중의 광합성이 감소한다.(유진, 오덤 지음 2001 생태학 사이언스북스 p.305.)이러한 강의 연속성에 따라 일반적인 하천의 경우 상류는 맑고 중류는 상류에 비해 탁하기 마련인데 청계천의 경우는 상류가 탁하고 중류가 조금 맑고 중랑천과 만나는 하류는 가장 맑아지는 현상이 일고 있다.상류가 탁한 이유는 한강 본류의 물이 상류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한강물은 탁도가 심해 뚝섬에 있는 처리장에서 부유물을 걸러 공정을 바치면 탁도가 낮아진다. 이렇게 탁도가 낮아진 물은 2급수다. 이러한 물이 청계천으로 하루 12만톤이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겉모양은 상류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속은 하류의 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또한 도로를 따라 길게 뻗어있는 청계천의 직강하 형태(전체의 70%)의 물살과 싸워야하는 어린 치어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또한 여름철의 집중호우도 역시 문제다. 청계천 물은 순식간에 불어날 것이다. 빗물과 주변의 생활 오페수는 물고기들에게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청계천의 빗물관리 시설은 있으나 현재 시설만으론 아직 부족하기에 더 보완해야 한다.이렇게 도심환경에까지 변화를 불러일으켜 온 청계천과 같은 사례는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나라의 도심하천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도심하천은 물과 어울린 천변의 울창한 숲을 자랑하고 있다. 드라이잠은 흑림에서 발원해 프라이부르크를 관통한 뒤 라인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흑림에서 라인강까지 너비 20~100m로 120km를 흐르는 이 하천은 프라이부르크 시내로 접어들어서는 강폭이 20~30m로 좁아진다. 도시화 과정에서 상당부분 직강화가 돼었기 때문이다.(김해창 지음 2003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에서 배운다 이후 p.100.)이곳은 도심형 하천과 다른 자연형 하천이 흐른다. 콘크리트 제반 대신 자연 그대로의 흙으로 강변을 조성하였다.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자연과 생물들이 서식하도록 하였다. 지금도 강과 인접한 도로를 헐어내고 강을 구불구불하게 만들기 위해 시당국은 노력하고 있다. 자연생물의 서식지를 더욱더 확대하여 드라이잠강 주변 모든 동식물들의 서식지로 만들기 위함이다.프라이부르크에는 하천외에도 도심의 구석구석을 흐르는 특이한 수로가 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베히레’ 라고 하는 이 수로시설은 너비 50m 정도인 시내를 흐르는 총연장이 15km에 이른다. 흑림에서 나온 드라이잠의 물을 결사가 진 프라이부르크 시내의 이 수로를 거쳐 플러 내려가게 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방지하고 오심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는데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 베히레를 통해 각종 쓰레기를 쉽게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독일에서 이 같은 베히레가 남아 있는 곳은 프라이부르크가 유일하다고 할 정도여서 관광객들에게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세계적 석탄 생산지로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독일 루르지방. 라인강의 지류인 엠셔강은 지난 150년간 산업용 페수와 생활 오페수로 오염되었다. 콘크리트 제반를 헐고 자연형 하천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주민들도 하천관리에 들어갔다. 특히 빗물관리다. 강 주변의 전기회사 옥상을 살펴보면 바닥이 경사져 비가 오면 한쪽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옥상에 내인 빗물은 바닥의 구멍을 통해 아래로 흐른다. 한 곳에 모여 땅속으라 독일의 엠셔강 주변의 빗물활용시스템과 같은 빗물이용의 방법도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된다.그러나 물길의 수로를 좀 더 보완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있다. 가장 큰 청계천 복원의 관심사는 역시 물길인데 완벽한 복원을 위해 해야할 일은 바로 발원지와의 연결이다. 참고로 이에 따른 서울의 지형을 간단히 살펴보자.과거 한양의 지형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 등 이른바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한강이 동남쪽으로 감싸 안으며 지나가는 형상이었다. 오늘날의 서울북쪽의 북한산,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 동쪽의 용마산 등 이른바 외사산으로 둘러싸이고 그 중앙을 한강이 동서로 가로지른다. 다음 장에서 서울의 주요 산과 서울의 주요 하천을 그림을 통해 보자.(한국생태학회 2002 서울의 생태 당대 p.72.)서울의 주요 산 (사진출처: 어린이 서울광장 www.kid.seoul.go.kr)서울의 주요 하천 (사진출처: 어린이 서울광장 www.kid.seoul.go.kr)청계천은 백악산, 인왕산, 남산과 타락산 등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모여 도성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오간수문을 빠져나가 중량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선 안팎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물길은 약 28개로 그 중 백악산 서쪽, 인왕산 동쪽 기슭(현 종로구청운동)에서 발원하는 백운동천이 청계천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청계천의 물길이 시작되는 이 곳 인왕산은 맑은 물에만 산다는 가재가 있다. 대부분의 지천들이 청계천으로 흘러들지 못하고 있다. 인왕산자락에서 시작해 남산과 북악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서울의 동맥 청계천은 서울 도심의 생태를 잇는 축이다. 그러나 이 물은 청계천으로 흘러들지 못하고 하수관으로 흘러든다. 청계천의 지류인 정릉천도 물 위로 버들치가 훤히 보일 정도이나 이 물도 역시 청계천으로 흘러들지 못한다. 이러한 발원지와의 연결도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이다.청계천 복원 사업과 관련하여 지적되는 문제들 중에서 환경에 .
    사회과학| 2008.10.18| 12페이지| 2,500원| 조회(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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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과정 사회학
    교육과정 사회학단선형 학제 복선형 학제세계 각 나라의 학교제도에는 각기 다른 민족성, 고유성 등을 담고 있다. 이것이 학제에도 반영하며 이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단선형(Single ladder system)학제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중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모든 국민이 원칙적으로 같은 종류의 학교에 다니게 하는 민주적 학교체계를 말한다. 이런 학제는 일찍이 미국에서 전형적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미국형’이라고도 하며, 국민의 계층적 분화를 막고 교육을 대중화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크게 공헌한다. 우리나라도 단선형 학제에 속한다.이와는 반대 개념으로 복선형(dual system) 학제는 두 개 이상의 학교제도가 병행하고 있고 그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이동이 없는 교육체계이다. 이 제도는 원래 교육을 통해 사회적 신분 질서를 고착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졌는데 영국이 그 대표적인 나라이고, 귀족이나 상류계층은 인문고를 나와 명문대학에 진학하여 사회의 지도층이 되도록 교육받는다. 그 반면 평민들은 실업학교나 기술학교를 나와 기능공이나 실무직에 종사하도록 규정된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이런 복선형 학제가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경쟁적 ? 후원적 이동형식개인?집단의 사회이동 형식으로서 터너(Turner)는 후원형과 경쟁형으로 분류했다. 경쟁적 이동(contest mobility)은 개인의 자질과 노력에 의해 지위나 소득이 결정되기 때문에 업적주의 사회에서 가능하며 엘리트주의 교육관과 단선제가 속한다. 반면 후원적 이동(sponsored mobility)은 조기 선발 또는 특정집단에 의해 선발된 사람만이 특정 지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평등주의 교육관과 귀속적 사회에서 가능하다. 유럽의 복선제가 이에 속한다.문화 상대주의와 문화실조문화실조(cultural deprivation)라는 개념은 1960년대 리스먼이 『문화적으로 실조된 아동』이라는 저서를 발간한 이후 문화실조라는 개념은 미국에서 저소득층 자녀의 학업적 실패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흔하게 사용되었다. 가정이나 주변의 환경이 적절하지 못해 발달이 왜곡되거나 지연되는 것을 말하며 선천적인 것보다 가정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문화적 환경이 풍부함과 부족함에 따라 교육적인 자극이 충분하거나 부족하게 되고 이는 곧 학교에서 학습하는 내용을 인지하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즉 문화적 환경과 교육적 성취간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있음)보편적 사회화와 특수 사회화사람은 교육을 통해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는데 이러한 ‘사회화’에는 ‘보편적 사회화’와 ‘특수 사회화’로 구분된다. 보편적 사회화는 한 사회의 언어, 가치, 규범 등 공통적인 요소를 사회화함으로서 그 사회가 지닌 독특성을 유지하고 구성원들의 동질성을 확보한다. 반면 ‘특수 사회화’는 개인이 속하는 특수 환경이 요구하는 특정지위와 역할을 말하며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서는 ‘보편적 사회화’가 중요시 된다. 이를 주장한 학자로는 Durkheim이 있다.교육의 기회균등『허용적 평등관』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관점으로 사람은 각기 다른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신분, 성별, 종교, 지역, 인종 등을 이유로 (제도적)차별을 당한다거나 특정집단에게 특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준다 할지라도 완전한 교육평등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왜 일까?일본의 경우 현재 초?중학교 9년인 일본의 의무교육 기간을 2009년부터는 유치원을 포함한 10-11년으로 연장시키는 법안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이처럼 의무교육제도로 인해서도 ‘학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가난한 집이나 무관심한 부모로 인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또한 학교와 집이 너무 멀다면 지리적인 이유로도 학교에 다니기 힘든 경우도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경제적?사회적 장애요소로 인한 불평등을 막기 위해 『보장적 평등관』이 나타났다.그러나 교육기회를 대폭 확대해도 계층간의 분배구조(지역, 남녀, 계층 등)까지 평등하게 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즉, 『과정의 평등(조건의 평등)』과 같이 다같이 학교를 다니게 하는 것만으로는 평등이 실현되지 않고 학교의 시설, 교사의 자질, 교육과정에 있어서 학교간의 차이가 없어야 교육평등이 실현된다는 것으로 누구나 같은 교육환경과 조건에서 교육받는 것을 중요시 한다. 이렇게 인간의 교육받을 권리를 중시하여 교육조건까지 평등화 했지만 저소득층의 취학 전 어린이가 기초학습능력이 부족한 상태로 초등학교에 입학할 경우 상급학년으로 진급도 하고 졸업은 하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아 낮은 성적이 누적되는 것처럼 교육결과에 까지는 평등이 보장되지 않아 이러한 『결과의 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에서는 보상교육(compensatory education)을 하고 있다.Coleman Report와 그 영향인종이나 계층의 차이로 교육기회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검증한 보고서로 학교간의 특성이 거의 비슷하고, 학교의 시설, 교사의 능력과 자질 등과 같은 교육환경이 학업성위도에 영향을 크게 미치니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문화결손 이론의 관점에서 취약계층의 낮은 학업성취도는 가정배경에 있다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콜만 연구는 집단적 차이 발생의 강조와 학교가『결과의 평등』을 보장하지 못함을 밝혀냄으로서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보상교육(compensatory education)으로 미국에서는 “Project Heart Start", "Middle Start Project"가 영국에서는 ”EPA-Educational Priority Area“와 같은 교육사업이 행해지고 있다.양적 연구방법과 질적 연구방법양적인 연구방법은 검사도구를 제작?시행하여 점수를 산출하는 식의 방법으로 기본 가정은 사회현상을 포함한 모든 현상들은 과학적인 탐구방법으로 검증할 수 있으며 수량화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주관자의 판단이나 개인의 가치에 근거한 평가는 배제된다. 따라서 객관성을 입증할 수 있는 수량화된 정보만을 강조하게 되어 주로 인지적 영역에 사용된다. 질적인 평가는 관찰이나 면담과 실기평가 등을 통하여 다양하게 연구?평가하는 방법으로 양적인 연구와는 달리 개인의 개별성과 독특성과 개성을 존중하여 평가해야 하며 주로 정의적 영역의 평가에 사용이 된다.아비투스(habittus)적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사회경제적 배경요인 중 학업성취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부르되(Bourdieu, 1977)는 부모가 가진 지위와 소득이 아니라 상층계급이 가지고 있는 문화 즉, 아비투스적 문화자본이라고 하였다. 아비투스는 ‘습성’을 말하는데 계급과 개인의 의식을 연결시키는 개념으로 ‘언어’와 ‘생활 양식’과 같은 특정한 의미체계를 말하며 문화자본은 쉽게 말해 ‘재산’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비투스적 문화자본은 다른 집단, 다른 구성원들과는 구분해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학교는 아비투스적 문화자본을 소유한 집단을 더욱 인정함으로 이러한 것을 소유하면 할 수록 경쟁에서 훨씬 유리하게 된다. 또한 경쟁에서도 유리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사회과학| 2008.10.18| 6페이지| 1,0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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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문학 교육혁신 방안
    FeducationFeducation感性 교육intro3FFeelingFictionFemaleFeeling FictionFeducationFeducation감 성 교 육?의미있는 연결고리 2F 포함프로젝트 개요협력 기관제작 주체영상관련학과재학 대학생 누 구 나 !참여유도방안1 공모전 2 특전활용방안실제 영상 제작기획의도중고교 문학 수업시간 보조교재로 사용1 주입/암기식 교육에서 벗어난 감성교육 2 작품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3 작품의 거부감을 줄이고 학습 능률 증진제작방향Point 학생들의 관심을 끌수 있도록효과참교육공교육고전부활1 진정한 감상이 가능한 문학수업 구현 2 사교육비 절감과 공교육 신뢰성 제고 3 고전문학의 부활 및 재생산요약 · 결론2FFeducationQuestion?Thank youFeducation{nameOfApplication=Show}
    교육학| 2009.06.17| 33페이지| 4,500원| 조회(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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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품사관련 박물관 견학, 옹기 민속 박물관 견학
    담당과목: 한국식품사과제: 식품사 관련 박물관 견학제목: 옹기민속박물관 견학학과/학년:학번/이름:제출일:1. 옹기민속박물관 소개▷옹기박물관의 외관 모습옹기 전시실(지하 1층)한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는 옹기는 먹거리를 위해 곡식, 장류, 김치, 젓갈류 등을 보관하던 대표적인 그릇으로 지방별로 그 형태를 달리하는데, 옹기 전시실에는 식생활 옹기를 비롯해 거름통, 요강, 화로, 굴뚝, 독우물 등 주거 생활용과 악기용 옹기 그리고 업단지, 신주단지 등 민간 신앙용 옹기가 전시되어 있어 서민생활 깊숙히 자리했던 옹기 문화의 전반적인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었다.기타 전시(야외)박물관의 작은 마당에는 큰 항아리, 옹기굴뚝, 석탑, 석등, 맷돌 등 다양한 석조물과 현대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었다.옹기민속박물관 찾아가는 길4호선 수유역 3번출구로 나와서 다기 101,170,1217번 버스를 타고 서라벌중학교에서 하차하여, 옹기민속박물관 길로 100M 걸으면 도착한다.2. 옹기(甕器)란?우리나라의 고유한 큰 항아리 혹은 독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옹기는 점력이 좋아서 진흙을 원료로 물레위에서 수레, 조막, 훌테를 이용하여 날그릇을 만들고, 약토와 잿물을 섞어 만든 잿물을 발라 약 1,200도의 놓은 온도에서 구워낸다.3. 옹기의 역사우리 조상들은 신석기 시대부터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다.그 초기에는 손으로 빚어서 형태를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물레를 사용하여 빠르고 모양도 좋게 만들었다. 토기 표면에 무늬도 파기도 하고, 모두 불에 구워 물을 담아도 풀어지지 않게 만들어 사용했다.이 시기의 토기는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관계로 모래가 많이 섞인 흙을 썼고, 화도도 800도 내외 에서 구워낸 것이기 때문에 흡수성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아주 오랜 처음에는 진흙을 물에 반죽하여 모양을 만들고 햇볕에 말려서 사용했다, 그러나 그런 그릇은 물에 닿으면 도로 처음의 진흙 상태로 변하거나 힘이 없어 금방 깨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흙 가운데는 가소성이 있고 구울수록 더욱더 단단해지는 내화성이 운반 등을 위한 생활용기를 만들어왔다. 정확히 언제부터 옹기가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 이후 그릇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토기는 점차 단단하고 유약을 바른 도기로 만들어졌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와 같은 새로운 도자기가 만들어졌지만 일상생활에서 여전히 중요한 생활용기로 사용되어진 것은 도기, 옹기였다. 그러다가 17세기부터 옹기에 잿물유약이 사용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쉽게 접하는 흙갈유 유약이 입혀진 옹기로 발전하였다.4. 문헌속에서 발견하는 옹기의 역사옹기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발효음식과 때를 같이했다고 추정되며 상고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이 죽으면 묻는 관을 비롯하여 제기, 식기, 솥 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삼국지』의〈위지동이전〉과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것을 부경이라고 불렀다. 고구려 사람들은 매우 청결하여 잘 저장된 발효식품을 만들어 먹기를 즐겼다 는 것이다. 그 같은 시설은 중국의 집안 지역은 물론 경상북도 봉화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학자들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영주까지 고구려의 세력이 미쳤을 때의 유산으로 추정한다. 중국 집안 시에 보이는 부경. 현재도 집안 시에는 고구려시대의 저장고로 사용하던 부경이 원형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삼국사기』에는 옹기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다. 백제 2대 다루왕 11년 가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에게 술 빚는 것을 금하게 했다 는 기록도 있고 신라 31대 신문왕은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데 신부 집에 보내는 명세서에 쌀, 술, 기름, 꿀, 간장, 포, 젓갈 등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이것들을 저장하고 발효시키는 데 옹기를 사용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와기전(瓦器典)이라는 도기류를 생산하는 기관이 있었으며 소속관원으로 간(干) 1인과 사(史) 6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음에 비추어 옹기가 체계적으로 제작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려시대 기록으로는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식었다. 또한 『경국대전』에도 충청도 임주에 황옹장(黃瓮匠) 1인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황옹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독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동국여지승람』, 『육전조례』, 『사시찬요』 등에도 옹기에 관한 언급이 있다. 또한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는 발효음식의 제조방법과 올바른 옹기의 사용방법이 구체적으로 소개돼 있다. 특히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흙으로 빚은 옹기들이 명확히 분류돼 있다.5. 옹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옹기는 우리 주변에서 얻어지는 흙으로 그릇의 모양을 만들고 황토흙에 부엽토와 재, 물을 섞어 만든 잿물유약(식물성 유약)을 입혀 구워낸다. 옹기를 만들려면 먼저 흙 안에 있는 모래와 불순물을 없애고 점력을 높이기 위해 '깨끼질'과 '곧매질'을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흙을 ‘질’이라고 부른다.질덩어리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 가래떡 모양으로 길게 마련해 놓고 그릇벽을 쌓아 그릇의 형태를 만듭니다. 모양이 완성되면 그늘에서 말린 후 잿물을 입히고 잿물이 마르기 전에 손가락을 이용해서 무늬를 그려줍니다.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을 옹기장이들을 '환친다'고 한다. 건조된 그릇이 한 가마 정도의 분량이 되면 다시 햇볕에 말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그릇들은 옹기가마 안에 넣는다. 수십개의 그릇돌로 가마 안이 가득 채워지면 장작불로 10여일 정도 때서 구워낸다. 그러면 우리가 사용하는 옹기가 완성된다.6. 옹기의 쓰임젓갈독옛날엔 거의 모든 가정에서 젓갈을 직접 담아 먹었다. 그러나 요즘은 젓갈을 집에서 담가 먹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 쓰임새가 불필요해져 우산꽃이나 꽃꽂이용으로 이용된다. 특히 꽃꽂이용의 경우 옹기의 통기성으로 물이 쉽게 썩지 않아 꽃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홍도의 ?고기잡이?란 풍경화를 보면 배안에 젓갈독을 싣고 직접 가지고 들어와서 여러 종류의 젓갈류를 넣은 다음 젓갈과 함계 수요공급처에 바로 운반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자배기옛날엔 설거지, 김치버무릴 때 간혹 큰항아리의 뚜껑 가 사용하는 용기의 형태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있고,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에서는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에 물을 길러온 아낙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물을 청하여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식수와 옹기옹기는 마을의 공동우물과 강가에서 강물을 옹기에 길렀는데 물을 길러다가 집집마다 공급해주는 물장수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북청물장수는 보통 아침에 두 지게, 저녁에 두 지게씩 길러다루고 물값은 보름 또는 한달에 한 번씩 계산한다. 물장수는 각자 자신의 단골상을 가리고 있는데 샘마다 물맛이 다르기 때문에 물맛이 변하지 않도록 소중히 다루었다고 한다. 집집으로 물을 팔러 다니는 물장수의 모습은 상수도가 본격 보급된 뒤 물장수 라는 말과 함께 거의 사라졌다. 북청물장수에 대한 김동환의 ‘시’를 보면 당시의 물장수의 생활을 짐작할 수가 있다.북청물장수 김동환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머리맡에 찬물을 솨아 퍼붓고는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북청 물장수.물에 젖은 꿈이북청 물장수를 부르면,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북청 물장수.독우물샘물 보호 우물로 흙, 돌, 나무 등으로 벽을 쌓아 만드는데, 아래 사진과 같이 옹기로 만든 우물벽은 흔하지 않다.▷독우물(옹기민속박물관 지하전시실 소장용 사진)항아리일반적으로 항아리는 큰 독과 단지의 중간형태로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저장 등 지역별로 다른 형태를 띈다. 특히 항아리의 버선과 금줄을 매어 놓는 항아리가 있는데 버선은 항아리 안에 담긴 장맛이 변할지라도 다시 본래의 맛으로 되돌아오라는 의미와 항아리안의 음식은 집안 식구가 먹는 귀한 음식이므로 아무나 함부로 발을 들여 놓지말라는 의미도 있다. 또한 장독대 부근에는 벌레가 많은데 이벌레들을 발로 밟아주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다. 금줄은 예부터 간장, 고추장, 된장 등이 담기는 장항아리에는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쳤고 금줄에는 고투나 대추, 숯 등을 끼워 항아리의 어깨에 매달기도 했다.▷항아리(옹기민속박물관 지하전시실 소장용많이 사용되지 않는다.▷술독과 술춘(옹기민속박물관 지하전시실 소장사진)Z콩나물시루콩나물이나 숙주나물을 키울 때 쓰는 용기. 천을 깐 시루에 불린 콩을 넣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검은 천이나 볏짚을 덮은 후 물을 자주 주면 콩나물이 자라게 된다. 콩나물 시루 밑에는 쳇다리를 받치고 그 아래 자배기를 놓아 물이 빠질수 있도록 하거나 볏짚을 태워 시루 밑에 깔아놓기도 하였다.▷콩나물시루(옹기민속박물관 지하전시실 소장용 사진쌀독어미독이라고도 하며, 옛날 임금님 쌀을 보관하던 항아리이다.초새알단지고초장, 잡곡류 등을 넣는 단지이다.조막단지옛날 양념을 담는 작은 크기의 그릇이다.허벅제주도에서 쓰이는 옹기로 옹기의 입구가 좁다. 제주도는 물이 귀하므로 흘리지 않기 위해 허벅의 입구를 좁게 만들었다.장군물이나, 술, 간장, 분뇨들을 담아 나르던 용기로 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다.확독과 확고추, 마늘, 보리 등을 갈 때 사용한다.확독의 안과 확의 표면에는 내용물이 잘 갈리도록 하기 위해 요철문양이 새겨져 있다. 확독은 자배기의 형이고 확은 8자형, 절구형, 손가락을 끼워 놓을 수 있는 형태 등 다양하다.▷확독과 확(옹기민속박물관 지하전시실 소장사진)푸레독푸레독은 질그릇과 같은 방법으로 그릇에 그을음을 먹여 굽지만 가마 안의 온도가 상승하여 질이 융융될 즈음에 소금을 뿌려 넣는데, 소금의 양에 따라 표면의 광택이 달라진다. 푸레독은 질그릇보다 높은 온도에 굽기 때문에 질그릇보다 단단하다. 질그릇보다 더 고급 용기로 인정받았고, 궁중에서 쓰이던 쌀독, 시루 등을 이런 푸레독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화덕과 화로안악3호분 부엌에 화덕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한 고구려 용호동고분에서 출토되었으며, 화로는 일종의 난로인데 청동화로, 돌화로, 토기화로, 무쇠화로가 있다7. 옹기의 지역별 형태비교옹기는 지역별로 기후나 생활관습의 차이에 따라 약간씩 변화된 형태, 명칭, 제작기법을 보인다.서울?경기도남부 지역에 비해 기온이 낮고, 직사광선이 약하므로 햇빛과 지면의 복사열을 최대한 많.
    생활/환경| 2009.11.14| 15페이지| 3,300원| 조회(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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