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지진아에서 켈틱 타이거로2004년 1월 4일 KBS 일요스페샬을 보고 있었다. 그날의 방송은 아일랜드에서 배운다 라는 것이었는데, 우리와 같이 IMF를 겪고 국가 부도 위기에 빠졌던 한 유럽의 최빈국이 10여년 만에 유럽 두 번째의 고소득 국가가 된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시 그 내용을 보면서아직도 소득 1만달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문제는 몰까? 하는 생각을 잠시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중소/벤처론 수업을 통해 그들의 강점은 무엇이고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모색해보고자 한다.{아일랜드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면적 : 70,282km2수도 : 더블린인구 : 1999년 기준 3,600,000명종교 : 북아일랜드에 신교도가 많은 데 비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에는 구교도가 많다. 종교는 국민의 90%가 카톨릭을 믿는다. 아일랜드국교회가 2.5%이다.주요민족 : 아일랜드인주요언어 : 20세기 초 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립 이후, 아일랜드어의 사용을 지속적으로 장려하여 성인의 32.5%가 아일랜드어를 알고 있다. 아일랜드어는 초등,중등과정에서 중요한 과목 중 하나이다. 최근 몇 년동안 점차 많은 학교들이 오직 아일랜드어만을 통한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학교들은"Gaelscoil"( or all-Irish School)이라 불린다. 국영라디오 방송국(Radio na Gaeltachta)과 국영텔레비젼방송국(Teilifis na Gaeilge)이 아일랜드어 방송을 하고있다.기후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멕시코 난류의 영향으로 기후는 온난하며 습윤하다. 연간 평균기온 12 이며 여름은 평균 17 이하로 낮고 겨울은 평균 5 이상이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곳도 있다. 전반적으로 맑은 날은 적으며 비나 안개, 흐린 날이 많다. 강수량은 연간평균 1,092mm로 높은 편이며 습도도 일년 내내 높다. 겨울에는 강풍이 고습도가 높아 추운 날이 계속되며 한 여름에는 끈적거리기도 한다.지리아일랜드섬의 토지는 비옥하고 평균해발 60 120m의 넓은 중북재건 프로그램 (programme for national recovery)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국가 흥망의 갈림길을 목전에 둔 위기감은 농업 및 정부기관과 기업은 물론 농업 노동조합 모두에게 공히 새로운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켰고, 자연스럽게 선 성장,후 분배 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아일랜드 정부는 국가 부흥 프로그램을 통해 지나친 임금 인상 요구로 인한 경제적 불안을 막기 위해 향후 3년 동안의 임금 인상률을 2.5% 범위 내로 제한하며 임금 인상을 자제하기로 합의한 근로자에게 대한 보상차원에서 정부는 소득세율을 낮추는 조세 개혁을 단행해 실질 임금을 줄이지 않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했다.이와 같은 기틀을 마련한 회의가 사회 연대 협약(social partnership agreement) 이었다. 이회의는 1987년 노 사 정 3개 부분의 대표들이 모여 2월에 시작하여 10월까지 타협을 이룰때까지 회의를 계속했다. 3년 게획으로 체결된 사회협약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이후 아일랜드의 국가 운영을 위한 기본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아일랜드 정부는 1990년 사회경제 진보프로그램(programme on economic and social progress), 1994년 경쟁력 및 노동 프로그램(programme for competitiveness and work) 등 현재까지 3년마다 고용주 대표와 노조대표들이 참여하는 삼자조합주의 방식 에 따른 사회협약을 체택하고 이에 기반한 국정을 운영해 가고 있다. 1~3차 사회협약에서는 경제 위기 극복, 경제 성장, 경쟁력 강화가 주된 관심사였으며, 분배와 사회적 형평성 문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돌파한 1990년대 후반(5~6차 사회협약)에서야 다뤄졌다. 아일랜드의 사회협약은 무엇보다 기업, 노조, 정부가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합의를 도출하고, 이행하는 이른바 아일랜드 정신 을 낳았고 이는 아일랜드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됐다..사활건 외자유치-아일랜 유럽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로서,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gateway to Europe)'이란 이미지를 앞세워 대대적인 해외홍보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IDA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IDA는 건축개발 승인과 환경통제 허가를 제외한 전권을 갖고 외국기업들이 공장입지 선정부터 회사 등록까지 모든 서비스를 한 곳에서 받도록 지원했다.아일랜드는 이같은 조건을 앞세워 지난 87년 이후 꾸준히 외국기업을 유치했다. 현재 아일랜드에 진출해 있는 외국기업은 1천2백여개.이들 기업에 고용된 인력은 모두 13만4천여명에 달한다. 아일랜드 경제에서 차지하는 외국기업의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35%, 수출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기업을 빼놓고는 아일랜드 경제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아일랜드는 중공업 기반이 약했던 만큼 금융회사와 IT분야 기업을 유치하는데 초점을 맞췄다.더블린 시내 동쪽 커스톰 하우스 둑에 위치한 더블린국제금융센터(IFSC). 15만㎡ 규모의 부지에 건립된 이 초현대식 종합금융센터에는 메릴린치 씨티뱅크 스미토모은행 AIG 등 전 세계 약 4백30여개의 금융기관들이 입주해 있다. 아일랜드 중앙은행에 따르면 IFSC에서 조성된 펀드는 총 3천3백77건이고 이들 펀드의 순수자산가치는 3천억유로에 달한다.{IFSC에는 사무실은 물론이고 호텔 레스토랑 공연장까지 갖춰 최상의 입지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다음의 사항은 IDA에서 밝힌 아일랜드의 기업유치전략이다.1) 낮은세율제조 및 서비스업이 산출한 이익에 대한세금은 단지10%로최소한 2010년까지 보장된다.그러므로, 자유롭게 본국 송금이 가능하며 원천징수도 하지 않는다. R&D 즉 연구개발사업에 종사하는 회사들에게는 개 발제품의 특허 로얄티수입에 대해서도 관세를 매기지 않는 등 아주 파격적인 대우가 주어진다2) 미리 준비된 우수한 자질의 노동력{아일랜드는 젊고 잘 교육받은 풍부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다.이는 지속적으로 사업을 해 나갈 고용주들에게 중요한 경쟁적 잇점으로 작용한다. 서기 2000년에는 아일랜드 때나 확장시에도 아 무런 무리없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4) 낮은운영비종업원들의 급여를 포함하여 아일랜드에서 회사운영에 드는비용 은 타 유럽국에 비하여 상당히 낮다. 이러한 잇점을 이용하여 좀더 나은 생산성과 탄력적인 노동력을 기대해 볼수있다. 고용 안정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종업원 훈련비용을 절감할수 있다.원거리 통신비용은 투자자들이 핵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 소이다.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낮은 관세를 부과하는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예를 들어 다수의 사용자들에게 할인 해 주어야 할때 범유럽을 대상으로 무료 통화 서비스를 실시하는 것과 같이 가장 경쟁력 있는 곳이다. 아일랜드는 가격경쟁력이 필요한 사업들이 필요로 하는나라이다.지난 10년동안 아일랜드의 인플레이션율은 유럽연합및 OECD 회원국들중에서도 가장 낮았다. 1986년 부터1995년까지의 인플레이션율은 평균 매년3% 미만이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예측된다.5) 광범위한 인센티브제자본투자금, 훈련비 및 종업원급여등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착수비용(Start-up Cost)이 아일랜드 정부에 의해 보조된다6) 첨단물류시설대략 국내총생산의75%를 수출이 차지한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아일랜드는 대부분의 유럽지역을 트럭수송을 통한 육로로24~48 시간내에 도달하게 해주는 고도로 효율적인 배송망이 짜여져 있다. 늘어난 많은수의 회사들이 아일랜드를 그들의 범유럽 배송센타로 삼아 보다 많은 경쟁적인 이득을 확보해 오고 있다.아일랜드 도처에 있는 국제공항에서의 많은 항공편제공도 타유럽국 및 미국으로의 직접적인 접근을 용이하게 해준다.7) 예술의 경지에 이른 원거리통신{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진보된 통신망들 중의 하나를 구 축하기 위해 최근 미화 35억불의 투자를 해 왔다. 모든 주 요 유럽경로에 대한 다양한 섬유광학의 연결로'feature rich' 로 불리우는 이 연결망은 전세계로의 혼신없는 깨끗한 연결 을 가능하게했다.이러한 특징은 예를 들면 국제통화센터를 설립한회사들에게 유 럽과 미국간 아니라 유럽 및 세계에 공급한다.디스켓 및CD 제조, 원판 및 복사, 사용자 지침서 인쇄, 포장, 턴키써비스 및 기술보조등을 포함한 소프트웨어회사들에 이러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제약 및 건강관련제품의 분야에 종사하는 회사들은 크린룸 및 살균장치 전문가들이 도와준다9) 양질의 삶아일랜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양질의 삶이 제공된다. 양질의 교육이 모든 연령의초.중.고생들에게 주어지며 대학들은 교환학생들의 특정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도시들은 국제화와 사회화를 표방하고 있으며 자연이 훼손되지 않은 지방도시와 숨막힐 듯이 아름다운 경치들이 지척에 있다.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연극, 골프, 승마, 낚시등의 다양한 레저 활동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유럽의 실리콘밸리아일랜드는 IT기업의 개발 및 제조기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IBM 인텔 델 등 3백여개 다국적 IT회사들이 진출해있어 '유럽의 실리콘 밸리'로 불릴 정도다. 실제로 유럽에서 팔리는 컴퓨터 4대중 1대는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다. 소프트웨어는 무려 60%가 아일랜드산이다.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미국이 아닌 더블린의 유럽센터에서 자바 등 전략 품목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의 MIT공대는 더블린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지었다.정부가 외국기업 유치에 워낙 적극적이고, 외국기업들의 기여도가 높다보니 아일랜드에선 외국기업과 토종 기업간의 차별이 전혀 없다. 정부에 대한 목소리도 똑같이 낸다.외국기업이 아일랜드 기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은 IBM 현지법인 사장이 재계를 대표하는 아일랜드경제인연합회(IBEC) 회장을 맡았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IBEC 회장은 아일랜드 토종기업과 외국기업 대표가 번갈아 가며 맡는 것으로 정착돼가고 있다.이와같은 분위기 및 여건 조성으로 인하여 아일랜드는 다음과 같은 초고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GDP{⊙ 각종 경제 지표{수출US$ 53,489 Million11.50%수입US$ 46,086 Million13.75%무역흑자US$ 7,4 한다.
덕수궁 중화전보와 기둥 구조설명{{종 목보물 819호명 칭덕수궁의중화전및중화문(德壽宮의中和殿및中和門)분 류궁궐건축수 량일곽지정일1985.01.08소재지서울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시 대조선시대소유자국유관리자덕수궁{덕수궁 중화전덕수궁의 중화전은 조선 고종 39년(1902년,광무 6년)에 중층으로 건립되었으나 고종 41년 화재시에 불에 타 버려 고종 43년에 단층으로 증건된 건물이다.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 문무백관의 조하,진하 등 하례를 비롯한 국가적인 의식을 거행하고, 정령을 반포하고, 때로는 외국 사신의 접견등 공식적인 중대한 의식을 행하던 법전으로 궁궐 안에서 가장 중심되는 건물이다.치조 공간의 중심건물인 중화전은 상.하층의 이중 월대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양식 팔각지붕 건물로서 내부에는 어좌와 오봉병이 있으며, 어좌 위에는 화려하게 꾸민 닫집과 보개 천장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용 조각 등 위엄있는 공간을 형성하도록 하였다.중화전은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 가장 늦게 세워진 건물로서 건물의 구조나 조각기법 등이 섬세하고 화려한 조선 후기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다.가구형식{근정전,인정전과 화재로 소진하기 이전의 중화전은 모두 상하 2층 건물이다. 정전이 대부분 중층으로 건립된 것은 임금이 사방을 살펴 보는 것 이라고 설명하는 등 그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위계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건물인 정전을 다른 건물보다 크고 웅장한 규모로 건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목조 건축물은 자연재인 나무를 구조부재로 사용하여 중층으로 구성할 경우 상하층의 가구 연결 방식과 입면체감방식에 따라 다양한 가구형식으로 분류 가능하다. 근정전과 인정전은 상하층 별개의 층을 중첩하여 연결하는 적층방식 방식이 아니라 상하층 가구를 일체로 하여 구성하는 통층 방식 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 독락사관음각은 2층 건물로 하층 기둥 위에 두공을 얹고 짧은 평좌기둥과 두공을 결구한 평좌층을 만들고 그 위에 상층 기둥을 세우는 전형적인 적층방식 가구를 택 유발하게 되어 공포의 의장상의 특성을 좌우하게 된다.정전은 다포계양식의 건물로 포간거리 설정은 부재의 표준화 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건축 계획적 요소이다. 고래로부터 일정한 법칙 아래 포간거리를 설정하는 방식을 규정하여 왔다.건물의 위계를 설정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기둥상부에 사용하는 공포의 출목수는 건물 위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요소의 하나이다. 내외출목의 수가 많을수록 서까래를 길게 내밀 수 있으며 내부에서는 공가이 퐁아지므로 화려하고 장엄한 내부공간을 연출할 수 있다. 따라서 임금이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는 정전은 궁궐 건물 중 가장 폰은 위계를 가지게 되며 당연히 많은 출목수를 가진 공포를 사용하게 된다.전통 중층건물의 상하층 공포의 출목수를 살펴보면 대게 서가지 유형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첫 번째는 무량사 극락전과 같이 상층이 하층보다 출목수가 많은 공포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무량사 극락전과 같은 공포의 사용수법은 법주사 대웅보전, 불타서 없어져 버리기 이전의 장안사 사성전과 같은 전각건물에서도 같은 수법을 찾아볼 수 있으며 서울에 남대문, 서울 동대문, 수원 장안문과 같은 중층문루 건물에서도 창아볼수 있다.두 번째는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상층보다 하층이 출목수가 많은 공포를 사용한 경우이다. 현존 건물로는 안국사 대웅보전이 유일한 사례이며 전소한 장안사 대웅전이 이런 유례에 속하였다.세 번째는 앞의 두 사례가 상하층 공포의 출목수를 달리하는 수법과 달리 출목수가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현존 상당수의 중층건물은 이 수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반칸물림방식으로 상하층에 체감하고 있다. 그러나 마곡사 대웅보전과 같은 온칸물림방식의 건물에서도 이와 동일한 수법을 채택한 사례가 있다.이 건물의 공포는 살미외단이 심하게 원호를 그리면서 올라가는 조선후기의 수법으로 치목하고 있다. 또한 공포 내단도 운기문으로 일체화 되어 있어 조선후기의 장식적 수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공포 내단의 운기문으로 일체화되는 수도 한다. 그리고 지붕가구재로는 보, 도리, 장여, 대공 등의 부재가 사용된다.경회루의 가구 구성을 살표보면 하층에서는 내 외진 모두 칸마다 빠짐없이 돌 기둥을 세웠으며, 상층에서는 이 돌기둥 위에 각각 나무기둥을 세웠다. 상층기둥들 뿌리 사이에는 방재 혹은 귀틀을 결구 하였고, 기둥머리 사이에는 창방을 결구하여 기둥에서의 가로 방향 틀을 짰다.상층의 가구는 큰 규모에 비해 단순 명료한 편이다. 기둥들은 모두 상부에 익공계 공포를 구성하여 보를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 도리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기둥간격이 넓으므로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도리를 설치하여 11량가로 구성하였다. 기둥은 외진의 평주,내진의 외고주, 그리고 중앙 칸의 내고주로 구분된다. 편의상 외고주는 중고주, 내고주는 고주로 칭할 수도 있다.제 3중인 퇴칸의 가구 구성을 살펴보면 외진주열에 세워진 평주 상부와 내진주열에 세워진 외고주 몸체사이에는 수평으로 퇴량을 걸고, 외고주 상부에는 중증도리를 설치해 놓았다. 또한 외진평주와 외고주 사이 주칸이 5,830mm로 넓으므로 평주에서 3,377mm를 들여 퇴량 위에 대공을 설치하고 대공과 외고주 몸체 사이에 수평으로 계량을 설치하였으며, 상부에는 하중도리를 걸어 놓았다.제 2중인 내진 부분의 구성방식도 제 3중에서와 같이 퇴량과 계량을 걸고 각각중중도리와 상중도리를 설치해 놓았다. 제1중인 중앙칸에는 내고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중앙부에는 마루대공을 설치하고 종도리를 걸었다. 그리고 제 2중 부분의 퇴량 높이에 맡추어 내고주 사이에도 보를 설치해 놓았다. 대공에는 모두 뜬창방이 설치되어 있는데 마루대공에는 뜬창방이 상하이중으로 설치되어 있다.측면쪽 퇴칸에서의 가구 구성도 정면이나 배면쪽의 퇴칸과 같은 기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기도리는 측면 평주 주심선에서 3,377mm정도 들여서 설치되어 있다.{{{{기둥기둥은 위치,단면형태,높이,입면형태 등에 따라 구분된다. 경회루는 중층누각이므로 누하주와 누상주로 구분하고 이들을 다시 외진주와 내진주로 나누어 살펴부들보와 같은 높이이다. 내진퇴량 단부의 결구 방식과 형태를 살펴보면,머리쪽은 외고주 상부의 이익공 짱임 위에 놓여 도리방향의 중중도리장여와 중중도리에 직교하여 결구되어 있으며, 내단 꼬리쪽은 장부를 내어 내고주 몸체에 꽂혀져 있다. 내단 하부에는 초각된 보아지가 설치되어 내진퇴량을 받치고 있으며, 장부는 기둥 옆면에서 상하 두개씩 방형 산지를 박아 고정시켜 놓았다.내진퇴량의 단면은 너비보다 춤이 긴 장방형의 하부 두 모서리만 둥글게 궁글린 형태이다. 그리고 입면상 하부면은 거의 수평으로 다듬어 놓았다. 보머리 형태는 전형적인 익공계 초각형으로 다듬어져 있는데, 마구리를 사분원에 가까운 형태로 단을 지어 다듬고 마구리 중앙부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비스듬히 경사지게 자른 후 측면과 아랫면에 당초를 새겨 놓았다.내진계량내진계량은 제2중인 내진칸에 내진퇴량 상면 중앙부에 설치한 대공과 내고주 몸체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종단방향에서 내진칸 주칸이 5,220mm정도 인데 대공은 외고주 열에서 2,150mm정도를 들인 위치이므로 대공은 중앙에서 외부쪽으로 460mm정도 내민 위치에 세워져 있다. 내진계량 단부의 결구방식과 형태를 살펴보면, 머리쪽은 동자주대공 상부의 초익공 짜임위에 놓여 도리방향의 중중도리장여와 중중도리에 직교하여 결구되어 있으며, 내단 꼬리쪽은 장부를 내어 내고주 몸체에 꽂혀져 있다. 장부는 기둥 옆면에서 상하 두개씩 방형 산지를 박아 고정시켜 놓았으나 내단 하부에 보아지는 설치하지 않았다.내진계량의 단면은 너비보다 춤이 긴 장방형의 하부 두 모서리를 둥글게 궁글리고 상부 두 모서리는 약간 비스듬히 모만 죽인 형태이다. 그리고 입면상 하부면은 거의 수평으로 다듬어 놓았다. 보머리 형태는 대들보와 같이 마구리를 비스듬히 자른 후 위가 뽀족한 오각형으로 다듬고 하부 양쪽모서리는 둥글게 궁글리고 측면 상부에 게눈각을 새긴 형상이다.3) 오진퇴량,외진계량외진퇴량외진퇴량은 제3중인 외진칸에서 평주 상부와 외고주 몸체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외진퇴량 단부의 결구방다.대들보는 모두 4개가 사용되었는데 전,후면기둥 위에 통보로 걸쳐 사용했다. 대들보의총길이는 주심도리간 중심거리인 4632mm보다 조금 크게 사용하고 있는데 대략 4962mm이며 보머리는 주심과 외 1출목 사이에 위치하여 외부로 돌출되지 않았다.. 종보 대들보의 형태는 사용된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내부 우측에 사용된 부재만 대략 직재를 사용하고 내부 좌측 및 측벽에 사용된 대들보는 휜 부재를 사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용된 부재 모두 중간부분이 휘어오른 형상인데 특히 측벽에 사용한 부재는 단면 형태도 균일하지 않다. 내부에 사용된 대들보는 상하부 모두 수평으로 다듬고 모서리는 호형으로 다듬었으며 옆면을 양변치기 하였다.측벽에 사용된 대들보는 내부에 사용된 부재와 치목수법 및 단면 형태등을 비교할 때 차이를 보인다.2)대공극락전에는 종대공과 중대공 2가지 대공이 쓰였다. 종대공으로는 판대공을 사용하였고 중대공으로는 동자주를 사용하였다.{종대공은 종보 위에 설치되어 종도리와 종도리장여를 지지하고 있는데 하나의 판재로 구성하였으며 모두 4개를 사용하였다. 중대공은 대들보 위에 설치되어 종보를 지지하고 있는데 모두 8개의 동자주를 사용하였다.동자주의 머리에는 사괘를 터서 대들보와 중도리장여를 결구하고 있으며 주두나 보아지 등의 부재를 사용하지 않고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종보의 맞춤은 사괘를 숭어턱맞춤으로 사용하였고 중도리장여는 내부에서는 맞댄이음 뺄목이 있는 측벽에서는 종보와 반턱맞춤으로 하였다.. 중대공건물내부에 사용된 중대공은 어칸쪽 도리방향으로 뜬장여를 결구하여 중도리장여와의 사이에 층급천장의 레벨차이에 의한 판벽을 설치하고 있고 보방향으로는 내목도리장여와 결구하고 있는 초방을 두어 하단천장을 설치하는 귀틀로 사용하였다.{기둥극락전에 사용된 기둥은 모두 원형단면으로 귀기둥 4개 평주 4개 프면 중앙에 사용한 분심주 2개 등 총 10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중에서 귀귀둥 4개 전면어칸우측 평주 그리고 후면어칸좌측 평주는 구재이고 나머지 기둥들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천황의 권위를 태고부터 강력한 것으로 기술한 ‘니혼쇼키’는 조선을 ‘한 수 아래 나라’로 기술했다.두 번에 걸친 몽골 침입 당시의 행운은 ‘일본 신국설;을 더욱 강화시켰고, 가마쿠라의 무사들에게 ’이국 정벌‘이라는 사고방식을 심어주었다.**가마쿠라의 무사들-일본 최초의 부케정권[武家政權].1185년경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사가미[相模:神奈川縣] 지방 가마쿠라[鎌倉]에 수립하였다. 1159년 헤이지[平治]의 난(亂)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가 패하여 헤이시[平氏]가 정권을 잡은지 20년 후인 1180년, 왕자 모치히토[以仁]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賴政]가 헤이시 타도를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이즈노구니[伊豆國]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일단은 헤이시의 추격군에 패하여 모치히토와 요리마사는 전사하였으나, 요리토모는 간토[關東]지방 호족(豪族)들의 지원을 받아 점차 세력을 늘렸으며, 동년 11월 겐지[源氏]의 연고지인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삼았다.그 후 도고쿠[東國]의 여러 호족을 평정하는 동시에 대항세력이었던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를 쓰러뜨리고 다음 해 단노우라[壇浦]에서 헤이시를 멸망시켰다. 동생 요시쓰네[義經]가 황족과 짜고 반항하자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왕으로 하여금 슈고[守護] ·지토[地頭] 등의 관직을 전국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1189년 요시쓰네를 숨겨주었다는 구실로 오슈[奧州]의 후지와라씨[藤原氏]를 토벌함으로써 전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1192년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됨으로써 확고한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었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이국 정벌’을 실행한 전형적인 사례였다. 전국시대 다이묘간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의 정벌을 주장하며 1592년부터 1598년에 걸쳐 침략전쟁을 개시했다.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지방세력가인 다이묘(大名)들의 관심을 밖으로 분출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25년(1592) 4월에 약 20만 명의 일본군이 부산을 침략해 왔다.이 때 부산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부산과 동래에서 상륙하는 일본군을 맞아 사투를 벌렸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중앙에서 출정한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항전하였으나 역시 허사로 돌아가 일본군은 서울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아무런 준비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조총으로 잘 훈련된 일본군을 막을 수 없었 던 것이다. 결국 정부는 전의를 상실하고 의주로 피난하였으며,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도 못되어 서울에 입성하였고 계속해서 평양을 거쳐 함경도까지 북상하였다. 육지에서의 참패에 반하 여 해전에서는 도처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수사 원균( 元均) 등이 이끄는 수군은 일본군의 것보다 한 선박과 화기(火器)를 이용하여 옥포·당포·당항포·부 산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특히 한산도에서는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이로써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수·륙으로 협공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을 봉쇄하였으며, 전 라도의 곡창지대를 보존할 수 있었다. 한편 각 지방에서는 유생과 농민으로 구성된 의병이 일어나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에 나섰다.이들은 정부의 징집 명령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일본군의 침탈을 당하자 자기 가족과 재산 그리고 마 을을 지키기 위해서 응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의병장으로 특히 명성이 높았던 이는 곽재우(郭再祐)·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 등이며, 묘향산의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금강산의 사명당 유정(惟政)은 승병장으로 유명하였다. 이들은 유격전술로 일본군의 군사행동에 막대한 차질을 끼쳤고 관군이 전 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어 주었다.수군의 승리와 의병의 활동, 육군의 전열 정비 등으로 전세가 반전되어 가고 있을 때 이여송(李如 松)이 이끄는 명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조선군과 합세하였다. 일본은 전쟁 초기부터 정명가도(征明假 道)를 내세워 대륙침략을전력을 크게 강화하였다.조총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중앙군의 편제와 훈련방 법을 바꾸고, 또 속오법(束伍法)에 의거하여 지방군 편제를 개편하였다.그리하여 일본군의 재침략은 남해안 일대를 점령하는 정도에서 저지되고 마침 도요토미가 죽자 모 든 일본군 병력은 퇴각하였다.조선에서는 국왕이 전투를 피해 북쪽으로 피난한 것을 비롯하여 조정 내부의 대립 때문에 총력으로 일본군과 싸울 수 없었다. 민중도 지배자들에게 강한 불만을 품어 육상에서는 북쪽까지 일본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남쪽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거북선을 이용하여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여 일본의 보급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순신은 히데요시의 수군을 격파한 구국의 영웅으로 한국에서 가장 추앙받고 있다.조정 내부의 대립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해상만이 아니라 육지 각지에서 지역의 유력자이자 인망이 높은 양반과 승려 등의 지휘 아래 의병이 활약하여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의병’의 전투란 외적의 침입등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군사를 모집하여 싸운 민간인 무장투쟁을 말한다. 조선에서는 근대에 들어서도 ‘의병’ 전투가 지속되었다.의병활동한편 명의 원군도 조선에 파병되어 일진 일퇴의 공방전이 거군으로 재침공하니, 그것이 1597년(선조 30년)의 이른바 정유재란 이다. 다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침입해 왔다. 그들은 이순신을 두려워하여 간첩을 침투시켜 그를 모함하는 데에 성공했다.결국 이순신은 원균을 옹호하는 일파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 마침내 일본의 대군이 계속 상륙하자 명나라에서도 다시 원군을 급파했다. 조선에서도 이원익을 체찰사, 권율을 도원수로 삼고, 이덕형, 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창설하게 하는 동시에 방어를 굳게 하였다. 이 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없는 틈을 타서 해전을 벌이니 원균 등이 전사하고 전선이 대파되었다.그러나 우리 나라와 명나라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고,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여 남은 선박 12척으로 해군을 재편성, 결사적인 항전 끝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명량에서 적의 함대 1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 무렵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후퇴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도망가는 적함 200여 척을 격파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일본 국내를 피폐화시켰다. 또한 출병의 실패는 다이묘간의 대립을 불러 일으켜 격렬한 내부항쟁에 빠져 들었다. 이항쟁은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수습될 수 있었다.하지만 침략을 받은 조선의 피해는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6년간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수십만 민중이 목숨을 잃었고 농토는 황페해졌다.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도 속출했고, 경주의 불국사와 서울의 경복궁을 비롯한 유서 깊은 건축물이 불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조선의 피해 정도임진년 이후 7년에 걸친 전쟁이 조선, 명, 일본 세나라에 준 영향은 대단히 커서 삼국이 다 황폐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조선은 특히 심했는데 왜적의 침공을 받은 이외에 명나라 군사의 주둔으로 인해 정신적·물질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전쟁 중 국내 인구의 소모는 물론, 국보적 문화재 - 특 나름대로 체계가 있었다.참고로 중종 38년인 1543년 조선의 총인구는 호구자료통계에 의하면 4,162,021명인데, 앞에서 언급한대로 관청에다가 자신이 직접 신고하는 자진 신고제라 이게 정확하지는 않고 당시의 마을 규모를 따져서 추정해보면 대략 11,633,000명 정도다.조선 인구가 1000만명을 넘긴 시기는 중종 6년인 1511년에 추정인구가 10,010,000명으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즉, 27년만에 160여만명의 인구가 늘었을 정도로 1500년대 후반 그러니가 임진왜란 발발 바로 전까지 조선의 인구 증가율은 굉장히 높았다.그런데 1642년 인조 20년의 인구는 추정인구 10,764,000명으로 이미 1543년의 인구보다 적습니다. 이미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이 훨씬 넘은 시기임에도 100만명 가량의 인구가 더 적었다.그러니까 임진왜란을 겪은 다음은 1000만명에 훨씬 못 미치는 인구로 줄었다.참고로 당시 조선군의 사망군인이 전체 참전 군인의 72%였다고 한다. 즉 참전 군인중 72%가 죽은 것이다. 정확히 수치로 따지면 전체 참가 군인 97,600명에서 70,000명이 죽었다고 한다.전쟁에서 가장 죽을 확률이 낮은 사람이 건장한 남자, 그중에서도 잘 훈련되고 자길 지킬 무기도 있고 조직적이고 조직이 있는 군인인데. 군인의 사망자가 이정도니.. 당연히 일반인의 피해야 말핤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하지만 호남 지역 만큼은 이순신 장군과 한양의 권율 장군에 힘입어 피해가 최소화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농사를 지어서 전 조선을 먹여 살렸었고그것을 감안할때 오히려 전체적으로 따지면 군인의 사망자 비율보다는 낮았을 것이다.대략 전체 인구의 반 정도가 죽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후 전체 인구의 생존률이 65% 정도였다.그러니까 중종 38년인 1543년의 인구인 11,633,000보다 많은 1200만여명의 인구에서 3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결과가 나온다.조선 침략과 관련된 일본의 유적 중에서 교토에 있는 ‘미미쓰카;는 가장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