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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프랑스 대혁명 평가B괜찮아요
    프랑스 혁명 (1789-1793) - 백과사전을 참고로 작성(주로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기점으로 혁명의 변천사를 나타내어주고 있음.)- 목 차 -1.프랑스 혁명-귀족반란-1789년의 사건들-새로운 체제-프랑스와 유럽의 혁명과 반혁명-전쟁, 국왕 처형, 공포정치-총재정부와 혁명의 확산1789 예레미 벤텀이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설을 출판.1789 조지 워싱턴이 초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1792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가 암살당함.1792 러시아와 프러시아는 폴란드에 침입.1794 로베스삐에르 처형됨. 공포정치가 끝나고 테르미도르 반동이 시작.수세기 동안 세계의 정치사는 정권을 타도하거나, 타도를 시도하는 야심가들과 군림하는 군주들과 왕국들의 무수한 예로 가득 차 있었다. 18세기 말에 새로운 현 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Common people)이 그들을 지배하던 군주정에 반대하여 일어섰고...그리고 승리했다. 주변부국가에서 일어난 연관성 없는 예들 정도가 아니라, 이것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주요국가에서 일어난 중요한 혁명들이었다. 우선,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고 새로운 국가로 등장했다. 다음으로,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국왕들의 전제정치에 지친 프랑스인민들 이 1774년 부터 부르봉의 제 5대 국왕으로 통치하고 있던 루이 16세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중산층과 빈민들 모두가 오랫동안 귀족의 통치와 특권에 불만스러워 해 왔지만 그들의 분노에 불을 붙여 혁명으로 이끌어간 촉매가 된 것은 루이가 귀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준다고 선언한 일이었다. 1789년 7월 14일 거대한 군중이 파리의 감옥인 바스띠유(Bastille)를 휩쓸고 점 거했다. 그때 베르사이유(Versailles)궁전에 머물고 있던 루이 16세는 인민들이 스스로를 프랑스의 시민이지 더이상 프랑스왕의 신민이 아니라고 선언했을때 깜짝 놀랐지만 무력했다. 루이 16세는 너무나 오랫동안 현실과 접촉하지 못했기 때리·그르노블·디종·톨루즈·포·렌 등지에서 소요가 있었다. 국왕 루이 16세는 이에 굴복하고 자크 네케르를 내각으로 불러들였다. 네케르 1789년 5월 5일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그는 실제로 언론자유를 허용해 프랑스는 국가재건을 위한 각종 구상을 담은 소책자들로 넘치게 되었다. 1789년 1~4월 사이에 실시된 삼부회 선거는 1788년 형편없는 추수로 인해 더욱 커진 소요와 때를 같이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투표에서 어떤 계층도 배제당하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불만과 희망 사항을 담은 청원서를 작성했다. 삼부회에 선출된 대의원들은 제3신분 600명과 귀족 대표 300명 및 성직자 대표 300명이었다.[1789년의 사건들]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 소집되었다. 이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곧 분열이 되었다. 머릿수에 따른 표절 방법을 쓸 것인가. 신분별 표결방법을 쓸 것인가에 대해 전자로 결정하면 제3신분이 유리하고, 후자로 결정하면 두 특권 계층이 제3신분을 누르게 되어 있었다. 이 법률적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싸움에서 제3신분의 대의원들은 국왕이 호의를 보이는 귀족계층에 반감을 가진 성직자층의 지지를 얻어냈다. 제3신분은 6월 20일 왕을 무시하고 테니스 코트에서 회합을 갖고 프랑스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흩어지지 않기로 서약하는 개가를 올렸다. 왕은 마지못해 굴복하고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제 3신분과 함류해 헌법제정 국민의회를 구성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해산할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식량부족문제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2개월을 얼버무리며 속이려 들었다는 사실은 각 도시와 지방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왕과 특권계층이 제3신분회를 뒤엎기 위해 '귀족 음모'가 꾸며졌다는 무성한 소문은 1789년 7월 대공포(Grande Peur)를 초래했고 농민들은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파리 주변에 군대가 배치되고 네케르가 해임당하자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789년 7월 14일 군중들은 왕스의 국민의회가 국제법의 혁명적 원칙, 즉 각 국민은 자결권을 가진다는 원칙을 천명하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비뇽 교황령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1791년 9월 13일 프랑스로 재통합되었다. 프랑스와 여타 유럽국가들의 골은 깊어만 갔다. 외국에서 혁명을 지지하는 자들을 통칭해 자코뱅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1792년 4월 20일 마침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다.[전쟁, 국왕 처형, 공포정치]혁명전쟁의 첫번째 국면(1792. 4.~9)에서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국경을 넘어 빠른 속도로 파리를 향해 진격해왔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국왕과 귀족들이 자신을 배반했다고 믿고 1792년 8월 10일 국왕이 거처하던 튈르리 궁전을 점거하고 국왕 가족을 이 궁전에 감금시켰다. 9월 초순 파리 군중은 감옥들을 습격해 투옥되어 있던 귀족과 사제들을 학살했다. 한편 혁명이 민주주의를 일깨움에 따라 의용군들이 끊임없이 군대로 몰려들었다. 프랑스군은 마지막 힘을 다해 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프로이센군을 저지했다. 같은 날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이튿날 국민공회는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선언했다. 전쟁의 2번째 국면(1792. 9~1793. 4)에서 혁명군은 적군을 무찔렀다. 프랑스군은 벨기에, 라인란트, 사보이, 니스 주를 점령하여 이곳의 봉건제도를 폐지했다 국내에서는 국민공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프랑스에 부르주아 공화국을 건설하고 전유럽으로 혁명을 확산시키기를 바라는 지롱드당과 하층계급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더 많이 부여하되 혁명활동을 프랑스 국내에만 국한시키려는 로베스피에르의 산악당(Montagnards)으로 분열되었다. 지롱드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국민공회의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3년 1월 21일 처형당했다.1793년 봄, 혁명전쟁은 3번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프랑스군은 다시 패배를 거듭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영국은 동맹(나중에·스페인이 평화협상을 벌였다. 1796년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사르데냐는 곧 굴복했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막으로 항복한 나라였다.(1797. 캄모포르미오 조약) 프랑스가 점령한 국가들 대부분이 '자매 공화국'으로서 프랑스를 모방한 제도를 갖게 되었다.유럽 대륙에 찾아온 평화는 혁명의 확산을 종결짓지 못했다. 대부분의 총재는 혁명을 유럽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지롱드당의 염원을 물려받아 외국 자코뱅주의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1798, 1799년 프랑스군은 스위스, 교황령, 나폴리로 진격해 각각 헬베티아·로마·파르테노페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영국상륙을 기대할 수 없었던 총재정부는 보나파르트의 요구에 따라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인도의 영국 정부를 위협하기로 결정했다.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원정군은 몰타에 이어 이집트를 손쉽게 점령했으나 원정군을 호위하던 함대가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 만에서 호레이쇼 넬슨의 함대에게 격멸당했다. 혁명의 진전에 불안해 하던 열강은 프랑스군의 참패에 용기를 얻어 재 2차 동맹을 결성했다. 오스트리아·러시아·투르크·영국이 참 여한 이 동맹은 179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대승을 거두었고 프랑스군을 국경으로까지 후퇴시켰다. 그후 프랑스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군사적 패배로 실추된 정부의 평판과 자신의 커다란 명성을 이용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비록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바로 자신이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전세계에 전파하게 되었다.[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한 결과]- 전형적인 시민혁명. 복합혁명(귀족혁명,부르주아혁명,도시대중혁명,농민혁명이 혼합)프랑스 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우선 정치적인 면에서 혁명을 통해 전제적인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귀족, 성직자 주역의 정치형태를 중산층을 옹호하고 육성하며 이들의 자유, 족이 되었고 법관직이 많았으며 재산관리에 능하였다. 이들은 점차 혈통귀족과 거의 같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검귀족이 법복귀족을 경멸하였으나, 점차로 양자간의 차이는 사라졌다. 귀족은 막대한 토지 소유, 교회·군대·정부요직 차지·면세 특혜를 향유하였다.특권신분인 제1신분과 제2신분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대다수는 제3신분에 속하였다. 그 수는 전 인구의 96%에 달하였으며, 거기에는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지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포함되었다. 이 중에서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총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농민은 동유럽의 농민들과는 달리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영국의 농민들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업노동자로 전락했지만 프랑스의 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한 토지 규모는 살아가는 데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지주에게 소작을 얻는 등의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또한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지세인 타이유, 교회에 내는 1/10세, 인두세, 소득세 같은 직접세와 혁명 전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된 염세 같은 간접세)으로 그 수입의 절반은 빼앗겼으며, 이들에게 도로부역 같은 노동력 징발도 큰 고통이었다. 정부는 7세 이상은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사도록 강요하였는데, 정부에서 파는 소금은 실제 시세의 10배였다. 염세 때문에 매년 30,000명 이상이 투옥되고 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또한 염세를 정부 관리자가 징수하지 않고 개인이나 회사에 청부를 주어 징수하였으므로 청부업자들의 횡포가 심하였다. 제3신분 중 가장 중요한 계층은 시민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계급은 금융업자·상공업자·법률가·의사·문필가 등 자유업 종사자이다. 이들은 재력과 능력이 뛰어나 사회 발전에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평민이라는 신분적 제약때문에 특권귀족의 하위에 있었고, 정권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으며, 경제면에서 봉건적 잔재 때문에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소시민층은 소상인과 수공업자를다.
    인문/어학| 2003.06.04| 11페이지| 1,000원| 조회(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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