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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마호메트의 유언으로 본 삶과 사상 평가B괜찮아요
    마호메트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태양이 눈을 뜨려 하자 검은 차도르를 벗은 사막이 서서히 황금빛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로누워 있는 보드라운 알몸의 능선들은 은은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하지만 뱀처럼 유연한 모래 언덕 뒤편에는 아직도 촉촉한 어둠이 고여 있었다. 광활한 밤하늘에서 반짝이던 금모래들이 이제 다 지상으로 떨어져 천상은 텅 비었다. 신은 모래시계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참이었다. 인샬라!진흙과 종려나무 잎새를 이겨서 만든 사원의 지붕 위를 아침햇살이 조심스럽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사원의 남쪽벽에 붙어 있는 두 채의 조그마한 집 한 곳에서 인기척이 새나왔다. 커튼이 젖혀지면서 머리에 붕대를 하고 흰 옷을 차려 입은 노인이 안뜰과 연결된 문 앞에 나타났다. 마호메트였다. 곁에는 젊은 아내 아이샤가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던 신도들이 일제히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오, 선지자시여! 알라의 가호를!알라의 사도께 평화가 함께 하소서!"알라의 은혜, 알라의 축복이나이다!"사람들은 마호메트가 병상에서 일어난 것을 보고 감격하며 환호했다. 마호메트는 걱정하지 말고 기도에 전념하라는 듯 그들을 향해 오른손을 뻗어 다독거렸다. 그의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마호메트는 가슴 깊숙이 들어찬 아침공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며칠 만에 보는 사원풍경이 선명하게 각인돼 들어왔다. 천구의 모양을 본 뜬 듯한 아치형의 입구와 햇볕에 구운 벽돌담 테두리를 따라 장식된 단조로운 아라베스크 무늬에서 경건함이 배어 나왔다. 신도들이 납작하게 엎드려 기도를 올리고 있는 네모 반듯한 안뜰에도 자갈과 모래가 깔려 있어 검소함을 느끼게 했다. 나무제단 밑에서 아침예배를 집전하던 아부 바크르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마호메트에게 다가왔다.이 사원은 마호메트와 무슬림들이 메카의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하면서 세운 이슬람 최초의 모스크였다. 사원에 딸린 두 채의 집은 마호메트의 아내 사우다와 아이샤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여덟 명이나 되는 다른 압바스가 들어오자 좁은 방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아이샤는 사람을 보내 얼른 친정 아버지를 모셔 오도록 시켰다.잠시 정신이 돌아온 마호메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쓸 것을 가져오게 했다. 긴장한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무슨 지시를 내리려 하십니까?병자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알리가 물어보았다.이슬람의 신도들을 유혹으로부터 지켜줄 방도를 일러주겠네.순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요했다. 코란은 마호메트를 통해 내린 신의 계시를 기록한 이슬람의 성전이었다. 그런 코란을 놔두고 계시도 없는 방도를 일러주겠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렇지만 선지자의 명령이었다.어서 쓸 것을 준비하시오.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우직하고 혈기가 왕성한 오마르가 딱히 누구를 지목함이 없이 목청을 높였다.안 될 말이오. 알라의 계시가 이미 코란에 내렸는데 사도가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오.압바스가 오마르를 막고 나섰다.그렇죠. 그러다 사도의 말씀이 코란의 계시와 다르기라도 하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 집니다.알리도 압바스를 거들었다. 사람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도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들은 사도의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는 측과 보류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잠시 언쟁을 벌였다.그만들하고 나가게!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마호메트가 언성을 높였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손사래를 쳐 사람들을 내쳤다. 머쓱해진 그들은 아이샤만을 남겨둔 채 모두 방을 빠져나갔다. 주위가 조용해진 가운데 낙타처럼 웅크린 마호메트의 몸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걱정이 된 아이샤는 사도의 머리를 끌어다 자기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슴으로 꼭 안았다.알라의 사도요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남편을 대하기란 아이샤로서는 편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많은 나이 차로 인해 아버지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 병에 걸려 이렇게 쇠약해진 그를 품에 안자 그녀는 야릇한 모성을 느꼈다. 자기의 행동거지라면 모두 재롱으로 받아들이다시피 한 사도였다. 한 번도 발휘되지 먼저 적극적인 상업활동을 전개했다. 때마침 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제국 간에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동·서양을 잇는 교역로가 메카로 우회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메카는 소상인들의 경유지에서 대상교역로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막대한 부를 거둬들일 수 있게 되었다. 부족 내의 모든 가문이 상업활동에 전념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여성들까지도 한 몫을 쥐기 위해 장사판에 뛰어 들었다.그와 동시에 성지로서 메카의 입지도 강화되었다.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관계로 많은 부족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각종 신상을 메카에 안치했다. 그런 우상수가 대략 360여 개나 되었다고 하니 카바 성소는 한 마디로 신들의 집성소였다. 덕분에 라잡이나 무하람 같은 성월聖月에는 아라비아반도 각지에서 메카를 향한 순례행렬이 끊이지를 않았다. 쿠라이시족은 그들을 상대로 제물용 양과 낙타를 팔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가죽은 타지역의 특산품과 교환했다. 이제 메카는 명실상부한 종교도시이자 상업도시로써 전 아랍의 주목을 받았다.경제와 문화의 발달은 사회적으로도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공동으로 가축을 기르고 돌보는 목축업에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이문을 남기는 상업으로 업이 바뀌자 무엇보다 부족집단의 구성원에 불과하던 개인의 가치가 중시되었다. 따라서 개인 의식들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부족보다는 가문을 우선시했고 가문보다는 가족과 자기 자신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부족장을 위시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조직체계에도 지각변동이 생겼다. 장사를 통해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 상인들이 발언권을 얻으면서 가문의 새로운 지도계층으로 부상했다. 당연히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고 계급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그리고 지중해 방면과 활발한 대상무역을 전개함에 따라 쿠라이시족 사람들은 그곳을 통해 들어오는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동·서양을 대표하는 두 문명의 충돌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바깥 세상에 눈뜨게 되었다. 전통을 답습하는 것 이외에는 교육과정이 전무했던 베두인 사회에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흘러든 것이다. 은 심정이었다. 거의 기다시피 하여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아내 하디자에게 털어놨다. 그녀는 남편을 걱정하며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신비한 현상을 체험하자 하디자는 남편을 그녀의 친족 와라카에게 데리고 갔다. 유대교와 기독교 교리에 해박한 와라카는 모세가 경험한 것과 비슷한 일이 마호메트에게도 일어났다고 말하며,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띠게 되었음을 예고했다. 처음에는 와라카의 말을 반신반의하던 마호메트도 나중에는 그것이 가브리엘의 강림임을 믿게 되었다. 마침내 긴 과거가 끝나고 위대한 미래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모래시계의 과거를 여전히 한 줌 모래뿐인 미래로 돌린다.이슬람교의 탄생구약을 세운 모세는 준비된 자였다. 동포를 학대하는 애굽병사를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숨어 들어온 모세는 팔십 노인이 되도록 그곳에서 목자로 살아간다. 하지만 노예로 전락한 동포들의 고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그는 사십 년의 도피기간을 영적 생활로 일관한다. 마침내 역사의 전개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을 갖춘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라는 신의 소명이 내린다. 그것은 도저히 견디다 못한 시대의 부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양이나 치면서 무료한 여생을 보내는 노인이었다면 결코 성령이 그에게 임했을 리 없고, 설령 임했다 하더라도 응하지 못 했을 것이다.마호메트 역시 준비된 자였다. 개인적인 계기로 인해 세속을 벗어나 동굴을 찾기 시작한 마호메트는 십 년이 넘도록 명상수행을 생활화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차츰 고정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 인식의 영역을 넓혔고 영혼을 고양시켜 나갔다. 부족사회의 문제와 우상숭배의 폐단에 대해서도 냉철한 시각을 견지하던 그에게 어느 순간 세상에 올바른 진리를 전하라는 신의 소명이 내린다. 그것은 마침내 변화하기를 바라는 시대의 부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회의하고 냉소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였다면 결코 성령이 그에게 임했을 리 없고, 설령 임했다 하더라도 그 역시 응하지 못 했을 것이다.마호 나는 너희들과 똑같은 한 인간이나 단지 신은 단 한 분뿐이라는 계시가 내게 내렸을 뿐(알 카흐프 18:110)내가 내 자신을 위해서 유익하게 할 수도 없으며 해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뜻이라. 내게 보이지 아니한 것을 알 수 있었다면 나는 더하여 복을 받았으며 내게는 어떠한 불행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하나의 경고자로서 그리고 믿는 자들을 위한 복음의 전달자에 불과하니라.(알 아으라프 7:188)마호메트는 메카 내에서는 진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오던 터였다. 그가 서른 다섯이었을 때, 홍수로 카바신전의 일부가 무너진 일이 있었다. 네 가문들이 모여 신전을 새로 보수한 다음 성소에 안치할 검은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차례가 되자 서로 그 영예를 차지하려고 다툼이 일었다. 고심하던 사람들은 고매한 인품을 소유했으면서도 고아인 마호메트가 중립적이리라 보고 그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마호메트는 큰 천에다 돌을 올려놓은 다음 각 가문의 대표들로 하여금 천의 네 귀퉁이를 잡고 함께 돌을 옮기도록 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것은 그의 지혜가 돋보이는 고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구에게도 미움 살 일을 하지 않는 마호메트의 신중한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일로 하여 그는 성실한 자라는 뜻의 아민 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그처럼 덕을 갖춘 마호메트의 확신과 신념에 찬 전도에 이끌려 서서히 새로운 종교로 귀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계층은 명문가의 자제들부터 노예까지 다양했다. 특징적인 것은 구성원의 나이가 이십 대에서 사십 대 초반에 이르는 젊은 층이라는 점이었다. 이처럼 마호메트의 유일신 사상이 젊은 층의 관심을 끈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상업의 발달로 개인의 의식과 지식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어 가자 보수적이고 획일적인 부족중심의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로 기존체제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거나 외부세계와의 자유로운 왕래로 개방적인 사고를 갖게 된 젊은이들
    인문/어학| 2003.05.15| 23페이지| 무료| 조회(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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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예수의 유언으로 본 삶과 사상 평가B괜찮아요
    예 수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과월절過越節을 맞기 위해 지방은 물론 외국에서까지 많은 유대인들이 성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로마관저가 있는 프레토리움에서 북쪽 성문으로 이어지는 거리도 아침부터 인파로 붐볐다. 길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집마다 누룩이 든 빵을 태워 없앤 탓에 거리에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씀바귀와 고추냉이를 파는 행상 주변에 동네 아낙네들이 몰려 있었다. 제물로 쓸 어린양을 목말에 태워 일찌감치 성전으로 가던 사내가 아이들과 부딪쳐 양을 놓칠 뻔하자 발칵 성을 냈다.그 때 갑자기 거리가 잠잠해졌다. 화를 내던 사내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길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쇳소리가 철커덕거리며 붉은 망토가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로마병사들이었다. 물살이 갈라지듯 사람들은 양쪽 집 벽으로 붙었다. 십자가의 가로형틀을 어깨에 짊어진 죄수들이 끌려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구경꾼들이 따라 붙었다. 행인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앞에서 끌려오는 두 죄수의 얼굴에는 죽음을 앞둔 불안과 초조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목은 뒤에 쳐진 또 한 명의 죄수에게 쏠렸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었다.형틀의 무게 때문에 등이 잔뜩 구부러진 그는 발을 끌다시피 하며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길이 꺾이는 곳에서 몸의 중심을 잃는가 싶더니 무릎이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양팔을 묶어 어깨에 지운 형틀이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쿵 소리와 함께 땅에 부딪쳤다. 그 바람에 가시관을 쓴 머리가 밑으로 눌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이었다. 멍에를 짊어진 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입가로부터 허연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일어낫!칼날 같은 로마병사의 목소리가 귀를 갈랐다. 고통으로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머릿속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곱씹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게 끝난다. 일어서자. 납작 엎드린 그는 형틀의 중심을 잡은 다음 가까스로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상체를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치와 쇠못을 부딪쳐 쨍쨍거리는 소리를 내자 처형장에는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덩치가 큰 그의 과장된 몸짓은 마치 검투사가 격투에 임하기 전에 몸을 푸는 동작처럼 보였다. 백부장이 멋쩍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더니 땅으로 꺾었다. 병사들이 곧장 달려들어 왼편에 있는 죄수부터 발가벗기려 했다. 그 순간 죄수는 무섭게 돌변하더니 형틀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병사들이 창자루로 그를 내리쳤다. 눈가가 찢겨나갔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병사들이 양쪽에서 형틀을 낚아채 그를 뒤로 넘어뜨렸다. 죄수는 자기의 옷을 찢어발기는 병사들에게 악다구니와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험상궂게 생긴 병사가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사력을 다해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죄수의 손뿌리에 쇠못을 갖다댔다. 망치가 못을 때리는 순간 죄수가 내지르는 욕설은 단말마의 비명으로 변했다. 구경꾼들은 소름이 돋았다. 몇몇 놀란 여인네들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병사는 몇 번 더 망치를 내려쳤다. 죄수가 발악을 하느라 바짝 쳐든 가슴이 찢겨 갈비뼈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양손에 못질이 끝나자 병사 한 명이 날이 시퍼렇게 선 칼끝으로 죄수의 팔뚝을 묶은 끈을 가리키며 백부장을 쳐다보았다. 죄수의 목숨을 오래 끌고 갈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팔목을 묶은 채 매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유대 장로들은 안식일과 함께 시작되는 과월절을 더럽히기 전에 사형이 종결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총독에게 전해왔다. 총독은 순순히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죄수들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만으로도 잔당들과 불순세력들에게 경고를 주기에는 충분했다. 백부장은 총독의 명령을 이행했다.끊어라.죄수의 팔뚝에 묶은 끈을 자른 다음 병사들이 달려들어 양쪽에서 형틀을 잡아 올렸다. 손에 못이 박힌 죄수는 악을 쓰면서도 끌려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양쪽에서 형틀을 위로 바짝 받쳐 올렸다. 죄수의 두 발이 허공에 뜨자 수평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두 손이 못에 박힌 채 돌아갔다. 맷돌 사이로 스며 나오듯 시뻘건 선혈이 모자의 정을 거부했던 아들의 행동, 그리고 그 아들의 비참한 죽음. 곁에서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는 젊은이는 예수의 제자 요한이었다. 예수는 다정하고 슬픈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눈빛으로 요한을 가리켰다.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그리고 예수는 요한에게 당부했다.이분이 네 어머니시다.그리고는 슬픔에 겨운 듯 눈을 감더니 다시 시편을 찾아 가까스로 머릿속의 글귀를 읽어 나갔다.…물이 잦아들듯 맥이 빠지고 뼈 마디마디 어그러지고, 가슴 속 염통도 촛물처럼 녹았습니다. 깨진 옹기조각처럼 목이 타오르고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개들이 떼지어 나를 에워싸고 악당들이 무리지어 돌아갑니다. 손과 발이 마구 찔려 죽음의 먼지 속에 던져진 이 몸은 뼈 마디마디 드러나 셀 수 있는데 원수들은 이 몸을 노려보고 내려다보며 겉옷은 저희끼리 나눠 가지고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 야훼여, 모르는 체 마소서. 나의 힘이여, 빨리 도와주소서…시장거리는 한산했다. 나물과 음식을 팔던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고 향유와 옷감을 파는 행상만이 몇 군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새끼양을 무등에 태운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손을 끌고 바삐 성전으로 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가는 아이의 얼굴은 연신 즐거운 표정이었다.…나를 굽어 보시고 불쌍히 여기소서. 외롭고 괴로운 이 몸입니다. 나의 근심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곤경에서 이 몸을 건져 주소서. 나를 굽어 보소서. 고통받고 불쌍한 이 몸입니다. 나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소서…성전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제단은 제물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소리가 회랑 가득 울려 퍼졌다. 제물로 바친 고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 그들은 루가와 입장을 달리해 이 일화마저도 예수에 대한 증거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그들은 어떤 시각에서 이 일화를 바라보았을까? 그 단서는 예수의 대답에 있다.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는 바로 이 말을 어린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어린 예수의 일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즉 성전이 내 아버지 집이기 때문에 있어야 했다는 말은 본래 살던 집이 내 아버지 집이 아니기 때문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처녀가 아이를 배면 돌로 때려서 참살했다. 하지만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였다. 그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며 아들이 태어나면 예수라 이름을 지으라는 계시가 내렸다. 요셉은 사자의 분부대로 마리아를 데려다 아내로 삼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이렇게 해서 예수는 아버지가 없이 태어났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자랐을 어린 예수가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동생들도 친동생이 아니었다. 마음의 상처와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한 어린 예수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과연 나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리하여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면, 내 부모가 나를 버린 것 같고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남이 된 것 같은 심정이었다면, 성경이야말로 외로운 예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최상의 복음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예수가 자주 애송했을 〈시편〉의 기도문들은 그의 처지를 잘 대변해 준다.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2장 7절손수 그들을 붙들어 주시니 당신은 가엾은 자들의 의지이시며 고아들의 도움이시옵니다. 10광야에서 모세가 야훼와 영원한 언약을 맺은 것처럼 예수는 새로운 언약을 맺었다. 지금까지는 주와 종의 언약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이었다. 모세가 율법을 세운 것처럼 예수는 율법을 완성했다. 지금까지는 영원한 복종의 율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영원한 사랑의 율법이었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든 것처럼 예수는 자기자신을 들어야 했다. 모세의 지팡이가 가차없는 권위를 상징했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가없는 희생을 상징했다.예수의 짧은 공생애가 시작됐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그가 가르침을 주자 주위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따랐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갈릴래아 일대를 다니면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고 이적을 행했다. 하지만 치료와 이적은 가르침을 위한 표적과 방편에 불과했다. 예수가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하느님의 진리였다. 그리고 예수는 오직 이 진리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다.예수 당시 유대는 신정국가였다. 3,500년 전 모세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노예근성에 길들여진 사람들이었다.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의심이 많은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했던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율법을 세웠고 그것을 통해 백성을 통치했다. 그 후 가나안 땅에 정착한 유대부족이 국가의 틀을 갖춰 가는 동안 종교는 훌륭한 통치수단이 되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대변자임을 자임하는 사제들이 정치를 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지배계층이 되었다. 그 정점에 있던 것이 최고의회이자 최고법정이며 최고행정기구에 해당하는 산헤드린 이었다. 성도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은 의장 1명, 제사장 24명, 장로 24명, 학자 22명으로 총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됐다. 의장은 대개의 경우 대제사장이 맡았다.하지만 종교뿐 아니라 입법, 사법, 행정 일체를 산헤드린에서 관장하게 되자 사제들은 막강한 특권을 행사하며 지나치게 세속화돼 버렸다. 선민의식과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은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내부적으로는 분파를 조성하여 족벌정치를 자행했다.
    인문/어학| 2003.05.15| 29페이지| 무료| 조회(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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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부처의 유언으로 본 삶과 사상
    석가모니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사라나무 숲 속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달밤의 원시림이 간직하고 있는 본래의 고요함은 아니었다. 그곳을 찾아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정적이 빚어내는 적막함이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채 고목처럼 제자리에 박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벌써 몇 시간 째였다. 달 밝은 어둠 속에 마른 나뭇잎 같은 가사를 걸치고 머리를 삭발한 윤곽들이 나발처럼 보였다. 반원을 그리고 앉아 있는 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정면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사라나무 사이를 주시했다. 그곳에 석가모니가 옆으로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의 안광이 집중된 때문인지 그의 전신에 광채가 어렸다. 두 눈을 살포시 뜬 석가모니의 얼굴은 속세의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슬퍼하지 말아라.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열반에 드는 것이다.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느냐. 그러나 기쁨과 슬픔의 실체가 없거늘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랴.석가모니는 자기 곁에서 수발을 들고 있는 비구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그 비구는 석가모니의 사촌동생으로서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이십 오 년 동안 그를 충실히 보좌하고 있는 시자 아난다였다.아직도 저의 수행이 부족한 탓이옵니다.아난다는 석가모니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슬퍼할 것이라면 모든 죽음을 슬퍼해라. 여래를 비롯하여 일체 범부와 모든 미물과 풀 한 포기의 죽음까지도 슬퍼해라. 그러면 그 슬픔은 자비가 될 것이다.정적한 밤공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석가모니의 말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불제자들은 귀를 세웠다.잠시 격정을 가라앉힌 아난다가 조심스럽게 석가모니에게 말을 건넸다.한데 세존이시여, 왜 이런 곳에서 열반에 드시려 하십니까? 좀 더 큰 도성도 있고 재가신도들의 집도 있지 않습니까?삼 개월 전 바이샬리 부근의 벨루바에서 하안거를 할 때 노령의 석가모니는 오랜 장마와 더위로 인해 몹쓸 질병에 걸리고 말았다. 가까스로 병에서 회복할 수 있었지하라. 이외에 다른 것은 의지하지 말아라.작지만 거대한 일성이었다.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이 세상에 난 것은 반드시 죽고 죽어서 헤어지니 괴롭다. 미련이 남아 다시 태어난들 괴로움만 쌓일 뿐이다. 그 괴로움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밖에는 없다. 그 길을 가라.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이다. 참된 부처는 육체가 아니다.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나고 죽는 법이 없다. 육체는 여기서 죽더라도 깨달음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석가모니의 잔잔한 목소리는 히란냐바티강 강물처럼 어둠을 가르며 조용히 도의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비구들이여 게으르지 말라. 나는 게으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을 이루었다. 헤아릴 수 없이 좋은 일도 게으르지 않음으로 인해 얻게 되는 것이다. 일체 만물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청정한 법성이 밤공기를 가르며 창공 속으로 퍼져나갔다.이것이 나의 최후의 말이다.석가모니가 설법을 마치자 깊은 감동의 물결이 굽이쳤다. 제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스승에게 공경의 예를 표했다. 석가모니는 서서히 호흡을 조절했다. 그는 선정에 들기 전에 평생을 몸담았던 세상에 대해 최후의 일별을 보내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나뭇잎 사이로 비친 둥근 달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한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한 번도 보지 않은 적이 없는 얼굴.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는 길에 만개한 꽃을 보려고 가마에 서 내려 룸비니 동산의 사라나무 가지를 잡는 순간 산기를 느끼고 길에서 자기를 낳았다는 어머니! 그리고 나서 그녀는 이레만에 세상을 떴다. 몸소 낳은 아들을 제대로 한 번 품에 안아 보지도 못하고 마야라는 이름 그대로 환영처럼 살다가 사라져 간 것이다. 그러나 팔처럼 자기를 감싼 사라쌍수에서 석가모니는 근원적인 모성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모자의 인연만을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모성이었다. 그것은 일체 존재의 모성이었다.눈을 깜박하는 순간 한 평생이 지나갔다. 석가모니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吾當安之(오당안지)의 吾(나 오)자다. 앞 연과 대구를 맞춰 我(나 아)자로 쓰는 게 바람직할 터인데 굳이 吾자를 쓴 한역이 있다. 마치 마음으로부터 깨달음(悟 깨달을 오)을 얻은 참나 (吾)를 은연중 글자의 모양새로 나타내려 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쨌든 불가에서 깨달음은 곧 해탈을 의미하는 바, 그 경지에 오른 나 (吾)는 삼계의 윤회를 벗어났으니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을 이룬 것이리라.고타마 싯다르타숫도다나왕은 이토록 귀하게 태어난 아기 석가모니의 이름을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지었다. 고타마는 성이고, 싯다르타는 소원을 성취하다 라는 뜻을 갖고 있다. 결혼 후 이십여 년이 지나 가까스로 대를 이을 아들을 보았으니 왕은 소원을 성취한 것이다. 그렇지만 마야왕비는 아들을 낳은 지 칠일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아들을 얻은 대신 부인을 잃은 숫도다나왕은 당시의 풍속에 따라 마야왕비의 여동생인 마하파자파티를 새왕비로 맞아 태자의 새엄마로 삼았다. 태자는 부왕과 이모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훌륭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태자가 점점 커갈수록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나 역시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석가釋迦는 범어 사카Sakya, 모니牟尼는 성자를 뜻하는 무니muni의 음역으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붓다Buddha라는 호칭이 따른다. 이처럼 싯다르타가 인류의 성자 석가모니 붓다가 된 데에는 우선 그의 천성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싯다르타는 대단히 총명한 데다 천부적으로 깊은 감성과 사고를 타고났다. 학습을 통해 사물과 언어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그의 감성은 이미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천착했다.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으며 모두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자기의 탄생과 맞바꾼 어머니의 죽음이 어린 싯다르타의 감성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과거에 살았고 현재 살아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모든 것들의 죽음이 싯다르타의 의식 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스승과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비상비비상처도 무소유처와 마찬가지로 선정삼매에 들 때뿐 선정을 깨고 나면 아무 것도 변화된 것이 없었다. 결코 진정한 해탈이 아니었다.여러 선지식들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싯다르타의 수행은 발전을 거듭했다. 그는 이치를 터득했기 때문에 당대 최고라 하는 두 선인이 이룩한 경지에 쉽게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아직 마음에는 의심과 번뇌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진정한 해탈은 티끌만큼의 의혹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을 구할 스승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그 때 싯다르타는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렇다! 내 마음의 의심은 나 의 의심이다. 나 의 의심이 일어나는 곳은 바로 나 다. 그러므로 나 의 의심을 제거할 수 있는 곳도 바로 나 다. 나 의 스승은 나 일 수밖에 없다. 나 를 스승으로 삼아 정진하자.싯다르타는 마가다국의 가야에서 멀지 않은 우루벨라로 가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숲을 새로운 수행처로 삼았다. 그곳에서 그는 깨치지 않으면 죽음을 맞겠다는 각오로 정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이는 미혹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그러면서 차츰 근본적인 문제로 접근해 들어갔다. 저마다 다른 삶의 양태에 대해서, 태에서 나오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과 태어나면 반드시 고아일 수밖에 없는 존재의 운명에 대해서, 그 인간존재의 우연성과 필연성에 대해서, 자기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자기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나 에 대해서…….싯다르타는 숲 속에 있는 무덤가 곁에서 시체나 해골들과 함께 잠을 잤다. 추울 때는 시체의 옷을 끌어다 덮었다. 가끔은 목동들이 나무 꼬챙이로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의 귀와 코를 후비기도 하고 그의 몸에 방뇨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숲에 떨어진 열매나 풀씨만을 주워 먹었다. 대추 한 알만 먹고 하루를 버티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틀에 한 끼, 사흘에 한 끼, 이레에 한 끼, 보름에 한 끼만을主宰性을 말한다. 결국 나 라는 것은 항상 변하면서 아무 것도 주재할 수 없다는 얘기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졸음조차 주재하지 못하는 것이 나 아닌가.셋째 법인은 일체개고一切皆苦다. 일체의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나 라는 본성의 고유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라는 착각에 사로 잡혀 영원히 나 이기를 바라고 영원히 내 것이기를 바라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당연히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삼법인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포함시켜 사법인으로 했다가 오늘날에는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을 넣어 삼법인으로 하기도 한다. 열반적정이란 일체의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난 참으로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세계관을 삼법인으로 본다면 열반적정은 붓다가 개인적으로 성취한 경지요, 세계 밖의 얘기다.삼법인에서 보다시피 모든 것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으니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본래가 그런 것인가. 본래가 그런 것이라면 고통에서 헤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붓다는 그것이 원인으로 인하여 생겨난 결과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그 원인을 제거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길도 열리는 것이다. 붓다는 연기법緣起法을 통해 그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연기緣起란 말 그대로 연緣하여 일어난다起 는 뜻이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즉, 태어남이 있음으로써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생김으로써 죽음이 생긴다. 그러므로 태어남이 없다면 죽음이 없고, 태어남을 멸하면 죽음을 멸한다. 지금까지 절대적인 것으로 믿었던 죽음 역시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절대로 피할 수 없다고 믿었던 죽음을 상대로 새로운 운명이 개척된 것이다. 죽음이 태어남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면 태어남 역시 그 원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붓다는 연기의 법칙에 의거해 죽음이 생겨이다.
    인문/어학| 2003.05.15| 27페이지| 무료| 조회(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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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공자의 유언으로 본 삶과 사상 평가A+최고예요
    공 자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공자의 집 창가에 앉아 뜰을 바라보고 있는 자공子貢은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스승인 공자의 병세가 갈수록 위중했다. 지난 밤에는 고열에 시달리며 밤새 식은땀을 흘리더니 아침이 돼서야 겨우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 한데 이상한 것은 공자가 병석에 든 지 오늘로서 칠일째가 되었건만 그동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공은 물론이고 병수발을 들고 있는 다른 제자들 모두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환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말을 못할 정도는 분명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공자는 입을 다문 채 간혹 알 수 없는 미소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행동한다고나 할까……. 지난번에 있었던 스승과의 일을 다시금 떠올려 보는 자공만은 그런 공자의 심중을 나름대로 헤아릴 듯도 했다.자공이 노魯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로서 위衛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기 전 인사차 들렀을 때 배알한 공자의 모습은 예사롭지가 않아 보였다. 지난 삼동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얼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다. 그런 한파에 잔뜩 움츠려 들었다가 갑자기 화창한 봄의 온기를 쐬면 노인들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기운을 못차리는 경우가 있었다. 73세라는 고령 탓인지 공자의 거동은 더욱 불편해 보였고 등도 전에 보던 때보다 더 굽은 것 같았다. 9척 6촌의 거구에서 풍기던 위엄과 기백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읍례를 하고 뒷걸음으로 물러나면서 얼핏 올려다 본 스승의 모습에서 자공은 어쩐지 속이 텅 빈 거목을 접하는 느낌이었다. 아들 백어伯魚를 비롯해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안회와 자로子路마저 잇달아 운명을 달리한 요 몇 년 사이 공자는 큰 상실감을 맛보았다. 공자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병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다 그동안 가까이서 보필하던 자공마저 당분간 먼 길을 떠난다니 노인의 심사가 더욱 울적한 것이리라.사신으로 가 있는 동안에도 자공은 머리에서 한시도 스승에 대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공무를 마치고 무사히 노나라로 귀국한 자공은 도읍인 명철한 왕이 일어나지 않는데 천하에 그 누가 나를 능히 받들겠는가. 나는 곧 죽을 것이다.병으로 앓아 누운 지 대략 7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기록에 의하면 공자는 7일 가량 병상에 있다가 눈을 감았다. 이것으로 미루어 사람들은 공자가 심하게 앓는 바람에 유언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아니면 입을 열기는 했지만 혼수 상태에서 한 의미 없는 말들인지라 제자들이 유언으로 새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로 보건대 공자는 이미 죽음을 예감했다. 그에게는 죽음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거기다 공자 그가 누구인가? 평생 가르침을 업으로 삼아왔으며 삼 천 명이나 되는 제자들로부터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 받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실다운 유언 한 마디 없이 눈을 감았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실마리를 다음 글에서 찾을 수 있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자공이 말했다.스승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이 어떻게 도를 이어받아 전하겠습니까?공자께서 말씀하셨다.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양화〉어쩌면 이것이 공자가 이레 동안 병상에 있다가 눈을 감을 때까지 침묵을 지킨 이유일지도 모른다. 공자에게는 유언을 남길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자 스스로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공자는 병상에 들기 직전 자공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자주석지야子疇昔之夜 몽좌전어양영지간夢坐奠於兩楹之間.지난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양 기둥 사이에 편안히 앉아 있더라는 얘기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다행히 공자는 꿈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그것에 대해 자공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하후씨빈어동계지상夏后氏殯於東階之上 즉유재조야則猶在 也. 하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고인의 빈소를 사당의 동쪽 걷게 된 것은 28대째 주왕紂王에 와서다. 폭군 주왕은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었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과 죄인들로 하여금 기름칠한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해 미끄러지면 구덩이 속의 숯불에 타 죽게 했다는 포락지형 烙之刑을 낳은 장본인이다. 은은 역사적으로 그 실체를 인정받고 있는 나라다.은을 멸망시킨 주나라(기원전 1046∼기원전 256경)는 본래 중원의 서쪽 변두리에 있는 소국이었다. 그러나 사후에 문왕文王이라는 시호를 추숭받은 서백西伯 창昌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무왕이 민심을 잃은 은을 멸하고 중원을 제패했다.무왕은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봉토를 하사하여 강태공姜太公으로 잘 알려진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에게는 제齊나라, 동생 주공에게는 노나라를 맡겼다. 그렇지만 무왕이 곧 승하하는 바람에 주공은 어린 조카인 성왕을 보필하기 위해 주나라를 비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장남 백금伯禽에게 노나라를 맡기고 자신은 주나라에 남아 섭정을 펼치며 건국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종묘사직의 기틀을 잡기 위해 불철주야로 일했다. 이렇게 해서 주공이 세운 예와 악 등은 열국의 모범이 되면서 후대로 전해졌다. 후에 공자는 그러한 주공의 선례를 이어 받아 고대 예법을 재현하고자 노력했으며 주공을 자신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고 그의 세계를 사숙했다.무왕은 투항한 은나라 주왕의 형인 미자계微子啓에게도 송宋나라를 봉토로 하사해 망국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미자계가 죽자 아우인 미중微仲에게 자리가 계승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공자의 직계 조상이다. 공자가 스스로를 은나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후 여러 단계를 거쳐 송의 후계자 자리가 바뀌면서 공씨 가문은 공족公族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공자의 6대조인 공보가孔父嘉가 당시 태재太宰 자리에 있던 화독華督이라는 자의 음모에 말려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바람에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공씨 집안은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 갔다.노나라에 새 터전을 마련한 공씨 집안은 공자의 아버지 공흘孔紇 는 미희만을 총애하던 유왕幽王이 결국은 견융犬戎의 침략을 받아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그 아들 평왕平王은 동쪽에 있는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천도하여 주나라의 부흥을 꾀했다. 이 시기부터 동주東周라 부르고 그 이전을 서주西周라 불렀다.동주가 시작된 때(기원전 771년)부터 봉건국 중 하나인 진晉나라의 대부 한韓·위魏·조趙 삼 씨가 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기원전 403년)까지를 춘추시대, 다시 그로부터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는 때(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일컫는다. 춘추는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춘추春秋》에서 따온 말이다. 이 책은 노나라 은공 원년(기원전 722년)부터 노나라 애공 14년(기원전 481년)까지 왕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서다. 전국이라는 이름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춘추시대에는 주왕실과 제후들 간의 혈연관계는 이미 의미가 없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주나라는 겨우 왕실의 명맥만 유지할 뿐 그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많은 봉건국들이 중앙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일부 봉건국들은 주변의 약소국들을 병합하여 그 위세가 종주국인 주나라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하극상의 풍조는 봉건국 내에서도 똑같은 악순환을 불러일으켰다. 세도가 막강해진 대부들이 제후들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중원은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노나라의 제후인 소공은 정권을 쥐고 흔드는 삼환씨三桓氏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삼환씨는 계손씨季孫氏,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로 대표되는 막강한 대부 가문들이었다.공자는 사람들이 근본을 망각하고 전통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처럼 하극상의 풍조가 난무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과거에는 태평성대를 구가했는데 지금에 와서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도탄에 빠지고 있었다. 이것은 현세의 제도와 문물이 과거의 그것만 못하다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자전적 해석만 가지고서 인이 공자사상의 중핵으로 쓰이게 된 이유를 밝히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한자의 특성상 인이라는 글자의 형성을 살펴서 단서를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이러한 시도는 종종 있었다.인仁 은 사람 인人 변에 두 이二 자가 합친 단어다. 사람이 둘이거나 그 이상이면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에서 어질다 의 뜻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한글의 어질다 역시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온 말로 볼 수 있다. 어우러지다 는 말이 있다. 여럿이 조화가 되어 좋은 상태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인이란 개인의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 잘 어울려 사는 것을 일컫는 말이라 하겠다. 하지만 인이 자기에게서 유래한다爲仁由己 는 공자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이라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파생되기 전부터 이미 자기 자신에게 형성돼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이에 근거해 인 의 근본적인 의미를 풀 중요한 단서가 되는 공자의 말이 있다. 그것은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왔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안연〉군자는 군자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에다 하나를 덧붙여 보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 卽 人人.군자는 군자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즉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인 자가 사람 인人 자 둘을 합쳐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人과 사람人의 관계 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사람人이 사람人다워야 하는 본성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공자의 인은 사람이 사람다워야 함 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의 또 다른 사전적 정의인 열매씨 인果核中實 도 그 뜻이 명확해 진다. 씨라는 것을 은유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그 열매의 가시적인 본성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콩씨는 콩이 되는 것이고 팥씨는 팥이 되는 것화다.
    인문/어학| 2003.05.15| 36페이지| 무료| 조회(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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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소크라테스의 유언으로 본 삶과 사상 평가A좋아요
    소크라테스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하루리카베토스 언덕과 아크로폴리스에 막혀 기세가 꺽였던 바람이 방향을 바꿔 아고라 광장 쪽에서 불어오자 답답하던 감방에도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해가 지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이기도 했다. 크리톤은 대화에 열중해 있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감옥 주변에는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를 알아본 아테네 시민과 청년들이 안의 상황에 대해 물어왔다. 크리톤은 짧게 답변하면서 서산 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해의 바퀴는 이미 산마루에 닿아 있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방으로 들어갔다.무슨 이야기 끝인지 안에 모여 있던 면회객들과 크리톤의 친구가 함께 웃고 있었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칠십 나이에 머리는 벗겨지고 기력은 쇠약해졌어도 형형한 눈빛과 당당함, 그리고 사람을 웃기는 재주는 여전했다. 그러나 평상시와 너무도 다름없이 행동하는 그를 보면서 크리톤은 저 친구가 과연 오늘 죽을 사람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후 들어서도 그랬다. 독약을 담당하는 간수가 오늘만큼은 친구가 말을 많이 하지 않게 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흥분하면 독약이 잘 안 받아 두세 잔을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신경쓰지 말게. 그럼 두 잔이고 석 잔이고 마시면 될 거 아닌가.마치 술을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그래도 약이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아폴로도로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무효로 해주겠지.어이없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기 전날, 때마침 아폴론 신에게 제사를 지내러 가는 배가 델로스 섬으로 출발했다. 그 배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기 전까지 부정탄다는 행위는 국법으로 일절 금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사형 집행도 연기됐다. 그동안 소크라테스는 실낱같은 목숨을 부지한 채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발목에 사슬을 찬 몸으로 매일 면회객을 맞으면서도 특유의 해학과 즐거움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야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철학하는 자의 실천 덕목으로 삼아 행동으로 옮긴 철학가다.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올바른 지혜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무지를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알아야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 어떻게 올바른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사람은 겸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보편 타당한 지혜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알량한 지식을 뽐내며 삶의 본질을 망각한 채 헛되이 살아갈 뿐이다.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마치 주인공인 양 착각에 빠진 사이비 인간들을 경계하고, 결국은 존재의 조연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철저한 자기 반성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인 것이다.자기 자신을 알아본 바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른다 는 사실에서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사상체계를 마련할 수 있으며,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사상들이 과연 보편 타당할 수 있냐는 얘기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사상체계를 구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소크라테스의 독특한 대화 방식도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지를 자각하게 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그는 길거리, 시장, 연회장, 운동장, 극장, 체력단련장 등 어디서든지 군인, 시인, 학자, 상인, 정치가, 작가 등 누구와도 상관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대화를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유도해 갔다. 그런 다음 상대방이 한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그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주장에 문제점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이라 한다.그렇게 해서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된 사람들은 마치 다시 태어난 기분을 맛보았다. 반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속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쏟아지는 오해와 내세웠지 실질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해 주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자연철학에서 과감히 벗어나 인간에 대한 철학을 전개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룬 것은 아니고,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시도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영혼, 인간 공동의 선, 인간의 행복, 용기 등 인간존재와 직결되는 관념적인 것들에 대한 탐구를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형이상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이것의 학문체계를 구축한 사람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다. 사유를 통해 존재일체의 궁극적 원리를 탐색하는 이 학문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철학 이라고 불렀다. 서기 1세기경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을 편찬하면서 제1철학 에 관한 책을 자연학Physica 다음meta에 놓았다 하여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자연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소크라테스의 삼십대 시절은 아테네의 번영이 거의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쥔 이 지혜의 도시로 지중해권에 속한 모든 배들이 들락거리며 온갖 인종과 진귀한 물품, 문물을 실어 날랐다. 마치 현대판 뉴욕과도 같은 곳이었다. 다르다면 자유의 여신상 대신 지혜의 여신상이 아테네를 굽어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신과 노예들의 가호 아래 아테네 시민들이 최고로 치는 덕목은 무위 도식이었다. 가난한 소크라테스도 그것을 자랑삼았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귀찮은 일은 아테네 시민의 몇 배 되는 노예들의 몫이었다. 걸음이 느릴수록 권위가 선다고 생각한 아테네 남성들은 어깨와 겨드랑이를 거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히마티온을 입고 소일거리를 찾아 도시의 중심가로 몰려들었다.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높다란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서 있는 하얀 대리석의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인들의 신심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신전 앞에는 신탁을 구하러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언덕 아래 크산티페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제자의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해학을 곁들여 대답하고 있다.길들이는 걸세. 아주 거친 말을 길들이다 보면 다른 말을 길들이기는 더 쉽지 않겠나. 아내를 다룰 정도면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다루기란 식은 죽 먹길세.그래도 용케 잘 참으십니다.길들여지는 거지. 도르래가 툴툴거리는 소리처럼 계속해 듣다 보면 귀에 익는 법이네.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몇 가지 사례만 듣고 크산티페를 악처의 대명사로 각인시켜 버렸다. 과연 그녀는 악처였을까? 오히려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교감과 신뢰가 밑바탕에 깔린 부부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물벼락까지 날린 사건은 오십이 넘은 남편과 결혼한 젊은 아내의 장난기 어린 앙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던 날도 그렇다. 크산티페는 아침 일찍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남편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감옥을 찾았다. 간수에게 사정해 겨우 감방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남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쏟았다. 시간이 돼서 면회객들이 감방 안으로 몰려들자 크산티페는 더욱 슬피 울어대기 시작했다.여보! 이제 친구분들이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군요.결혼하고 이십 년 동안 그녀가 지겹도록 본 것이라고는 남편이 사람들과 얘기하는 모습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오늘 이후로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마저 아쉬운 마음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내가 몹시 슬퍼하자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부탁했다.크리톤, 사람을 시켜 아내를 집에 데려다 주게.크리톤의 노예 하나가 그녀를 부축해서 데리고 나갔다. 크산티페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여보, 당신은 죄가 없어요. 부당하게 죽는 거라구요.그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감방 안을 울리자 소크라테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그럼,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죽길 바라오?소크라테스의 재판기원전 399년 2월,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들을 믿지 않으며 다이몬이라는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을 밝혀주고자 노력했다. 그런 일에 바쁘다 보니 나랏일이나 집안일은 물론이고 자기자신마저 돌볼 새도 없이 평생 신만을 섬기며 가난하게 살아왔다.소크라테스는 평생 딱 한 번 공직에 종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테네는 열 부족에서 대표 오십 명씩을 뽑아 그들 5백 명에게 정무심의회라는 공직을 맡겼다. 그리고 열 부족이 돌아가면서 일 년의 10의 1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집행부 일을 관리했다. 기원전 406년 안티오키스 부족에 속해 있던 소크라테스가 일일 의장직을 맡고 있던 날이었다. 아르기누사이섬 앞바다에서 벌어진 스파르타와의 해전에서 아테네가 승리했으나 구조작업이 지체된 데다 폭풍우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물에 빠졌던 2천 명에 가까운 수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책임자급 장군 열 명이 재판에 일괄 회부됐다. 개별심판과 변론이 생략된 점을 들어 의장이었던 소크라테스만이 유일하게 그들에 대한 재판이 불법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광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배심원들은 집단재판을 강행했고 소환에 응하지 않은 네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의 장군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시민들은 후에 이 사건이 잘못되었음을 후회하고 이번에는 장군들을 기소한 자들을 법정에 세워 사형에 처했다. 생명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의의 편에 선 소크라테스는 그 때 군중심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잠시 숨을 고른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남들처럼 아내와 자식들을 대동해 동정표를 호소하거나 탄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것은 그가 완고해서도 아니고 배심원들을 경멸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배심원들에게 무죄를 부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옳은 정보를 제공하고 납득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배심원들이란 누구를 편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이었다.그러므로 아테네인들이여, 훌륭하지 않거나 옳지 않거나 경건하지 않은 일을 하라고 내게 요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지다.
    인문/어학| 2003.05.15| 31페이지| 무료| 조회(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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