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hold Niebuhr』“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를 읽고..이 책을 읽다가 제일 먼저 의아해 했던 점은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윤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었다. 그는 특히 유럽과 미국의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 윤리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는 라인홀드 자신이 신학교 교수이자 목사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종교가라면 으레 자신이 속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 장점들과 좋은 점만을 설파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는데 이런 점에서 라인홀드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라인홀드 개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라인홀드 니버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도덕적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하며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써 내려갔다. 그는 개인적인 종교적, 도덕적 이상에 기초한 자선이 더 이상 집단 간의 이익이 얽혀있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집단적 도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함을 밝히고 있다. 기존의 사회체계의 한계들 내에서 베푸는 자선의 문제와 현대 산업사회 내에서 불균등한 경제적 집단들간의 정의의 문제와의 차이점을 파악하지 못한 도덕교사들은 집단의 도덕과 개인의 도덕사이의 명백한 차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회 갈등의 제거를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인간집단들이 어느 정도의 이성과 동정심을 발휘할 수 있고, 또한 도덕적 선의지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기 때문에 종교적, 도덕적 교육을 통해서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라인홀드는 인간이란 존재는 타 동물과 달리 생존의 필요성을 넘어 욕구를 확대시키는 상상력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생산되는 재화는 결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할 것이며 인간사회는 인간생활의 보존과 실현을 보장해 주는 자연적 혹은 문화적 산물들을 공정하게 분배해야 하는 문제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인간사회의 갈등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다. 불가피한 갈등 속에서 인간사회는 갈등하는 집단 간의 협력을 위해 강제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강제성이 없는 사회란 있을 수 없으며 상호간의 합의가 잘 되어있고 서로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공정한 방법들이 확립된 사회에서도 이러한 강제성은 잠재되어 있다가 위기의 순간이나 반항적인 개인들에 대하여 제제를 가할 필요가 있을 때 표면화되어진다. 라인홀드는 일부 낭만주의자가 주장하는 민주적 방법 또한 강제성의 예외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훨씬 강제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소수가 다수를 옳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다수의 득표가 다수가 갖는 사회적 힘을 상징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또한 강제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인간사회의 불가피한 갈등 속에서 강제성이 없는 사회란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것이며 따라서 충분한 정의는 있되 그의 공동작업이 전적으로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강제력이 충분히 비폭력적으로 되는 그런 사회의 건설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사회적 갈등과 불의의 해결을 위해 제시되어 온 것은 합리주의자들의 이성과 양심, 그리고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의 자애심이었다. 인간의 지성이 성장하면 자동적으로 사회불의가 제거될 것이라는 믿음은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불의는 낡고 관습적인 악습이 지속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러한 악습은 이성을 통해서 만이 해결될 수 있다고 합리주의자들은 생각했다. 라인홀드 또한 이성의 긍정적인 기능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불의의 진정한 원천인 듯이 생각되었던 전통과 미신들이 제거되었음에도 사회불의는 여전히 증가되고 있는 현 상황 속에서 그는 이성을 통한 사회적 갈등과 불의의 제거가 이상에 지나지 않음을 얘기하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완벽하게 이성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성의 발전속도가 기술의 진보가 야기한 사회문제의 증가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다. 특히 집단이 크면 클수록 그 집단은 전체적인 인간집단에서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공동의 지성과 목적에 도달하기 어렵고, 불가피하게 순간적인 충동 및 직접적이고 무반성적인 목적들과 연계를 맺게 되어 이성을 통한 해결은 불가능하게 된다. 날로 증가하는 사회적 갈등은 종교 부흥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이상주의자들도 있다. 종교 특히 기독교가 주장하는 회개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이 개인들을 교화시킴으로서 사회적 갈등은 해결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자신이 기독교 연구자이자 목사인 라인홀드도 "궁극적 승리는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서만 이룩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볼 때 그것은 이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에 그는 종교의 역할에 대해 비관적이다. 어떤 사회도 그렇게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잔인성과 불의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순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는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임을 그는 독자들에게 주장한다.앞에서 살펴본 합리적 이상주의자와 종교적 이상주의자가 주장한 이성과 사랑은 둘 다 개인적인 도덕심의 고취를 통한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주장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개인이 집단에 속하게 되면 집단의 속성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갈등은 사라질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여러 민족의 도덕성」에서 국가라는 집단이 가지는 이기적 속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집단은 이기적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19세기에 나타난 민족주의는 국가의 이기적 특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애국심이라는 깃발아래 비교적 이성적이고 종교적으로 교화되었다고 하는 유럽인들이 국가라는 집단을 통해 다른국가를 점령하고 약탈했던 19세기, 20세기의 제국주의는 개인적인 도덕만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수 없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라인홀드는 개인의 비이기성은 국가의 이기성으로 전환되며 바로 이 때문에 개인들의 사회적 동정심의 확산만으로 인류의 사회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희망은 결국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사회의 갈등은 대부분 사회적 경제적으로 특권을 가진 특권계급과 이에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사이에서 일어난다. 사회적으로 강자의 위치에 서있는 특권계급은 본질적으로 기존의 사회조직을 사회일반의 평화나 질서가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는 조직으로 선전하면서 기존의 사회조직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폭력과 강제력에 대해서는 묵인하면서도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에 대항하는 불만 세력들 특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폭력의 사용과 폭행의 위협에 대해서는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불평등한 교육제도는 보지 아니하고 원천적으로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올바르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비이성적이고 어리석기 때문에 그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을 그들 계급의 윤리적 바탕 위에 깔고 있다. 비록 한 개인이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집단행동은 언제나 다수의견에 의해 좌우되며, 대다수가 항상 이기주의적 동기에서 행동하기 때문에 따라서 계급적 특권에서 비롯되는 사회 불의를 도덕적 설득이나 설교만으로 치유할 수는 없다.사회의 갈등과 불의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많은 방법들이 동원되어져 왔다. 이성과 종교에 의한 개인적 도덕을 통한 방법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집단의 이기적 속성 때문에 마땅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사회 정의를 실현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폭력과 혁명을 통한 정의이다. 특히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은 일단 특권계급을 일소하고 경제적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부조리를 타파하는데 성공을 거둠으로써 그러한 해결책에 가장 접근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첫 번째로 계급투쟁이라는 폭력과 혁명을 통한 방식은 자본주의 국가의 또 다른 계급인 중간층을 간과하였다. 숙련공이나 화이트칼라와 같은 중간층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달리 덜 집단적이고 폭력적이며 심각한 위험이 닥치지 않는 한 오히려 기존사회의 안정과 유지를 바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현대문명의 모든 사회적?정치적 세력들이 가장 첨예하게 발전해 있는 독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은 중간계급 중의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에 속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그들은 파시즘 쪽으로 결집되어 사회주의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폭력과 혁명을 통한 사회정의는 당시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 하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적 부조리가 더 심각하였지만 중간층이 다수였던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둘째로, 비타협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혁명을 통한 정의가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폭력과 혁명으로 세워진 강력한 독재적인 정치권력에 대한 윤리적 또는 사회적으로 제약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 라인홀드 니버는 매우 부정적이다. “러시아의 경우에 공산관료들이 저지른 권력의 남용은 심대한 것이었고, 이는 권력을 쥐고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셋째, 비타협적 사회주의자들이 예상하는 이상사회 자신의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이상사회가 도래하리란 희망은 인간본성의 한계를 완전히 도외시한 지극히 낭만적인 주장이다. 인간이란 필요이상으로 자신의 욕구를 확대시킬 상상력이 있으며, 자신의 필요를 더 절실하게 생각하는 이기적 존재임을 비타협적 사회주의자들은 간과하였다.
▶목 차◀Ⅰ. 序論Ⅱ. 本論(1) 제 1 차 6자회담(2003년 8월 27일 ~ 29일)(2) 제 2 차 6자회담(2004년 2월 25일~28일)(3) 제 3 차 6자회담(2004년 6월23일 ~ 26일)(4) 제 4 차 6자회담(2005년 7월26일 ~ 8월 7일)(5) 제 5 차 6자회담(2005년 11월9일 ~ 11일)Ⅲ. 結論Ⅰ. 序論6자 회담은 1980년대 말부터 북한에서 제기된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 대한민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6개의 국가가 참가한 회담으로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다. 북핵문제는 1993-94년 한반도를 전쟁 일보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하였으나 1994년 9월에 대북 경수로 지원과 대체에너지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북한과 미국 간의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 시설의 궁극적인 해체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2002년 10월에 새로운 핵 개발 의혹이 제기되어, 다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북한은 핵 개발을 시인함으로써 제네바 합의는 거의 좌초될 위기에 봉착해 있었으며 한반도는 또다시 심각한 위기가 봉착 되었다. 이에 미국은 북한에 대해‘선 핵포기 후 대화 입장’을 주장하였고 북한은‘선 북미 불가침 조약 체결 후 핵문제 논의’를 내세우고 나왔다. 이에 우리정부는 평화적 해결 원칙을 굳건히 유지하며 북한을 설득, 미국과 협의하였고, 중국, 러시아가 적극적 중재에 나서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제1차 6자회담이 열렸다. 이후 현재 까지 제5차 회담까지 진행 되어 오고 있으나 크나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보고서에서는 각 회담에 대해 알아보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本論(1) 제 1 차 6자회담(2003년 8월 27일 ~ 29일)제1차 6자회담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의 과정으로서 유용한 계기를 마련하였고, 각국 입장에 대해 비교적 솔직한 의견교환을 통해 상호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또한 참가국간 차기회담 개최에 대한 공감대를 도출함으로써 향후 회담과정을 통한 평화적 문제 해결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향후 대화과정을 통해 서로의 인식차를 좁히고 합의를 축적해 나간다면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회담 전반에서 우리 대표단은 "대화의 촉진자"로서 원활한 회담분위기 조성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북한도 우리와의 접촉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등 우리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북한은 대화의 틀을 통한 평화적 해결의 과정에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해서는 안될 것이며, 우리로서는 제1차 회담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미·일 공조와 중·러와의 협력을 통해 후속회담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북핵문제 해결에 유리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남북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 촉구, 상황악화 방지를 위한 북한 설득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이번 6자회담에서의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이었고, 이에 북한은 먼저 핵 포기를 요구하지 말고 상대방이 원하는 조치를 동시에 취하자는 입장이어서 회담의 결과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6자회담의 몰꼬를 트면서 북핵 문제를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는 점과 각 국가 간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과 북한의 입장 차이가 여전히 크다는 점이 확인되었고 또한 그 한계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2) 제 2 차 6자회담(2004년 2월 25일~28일)제2차 6자회담에서는 각 국가간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유익하고 긍정적인 협의가 개시되었고, 또한 모든 참가국들의 협의 태도가 진지하였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회담을 통하여, 아직 차이점은 남아 있으나 참가국들은 상호 입장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였다. 또한 참가국들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였고 핵문제 및 관련된 관심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그리고 참가국들은 대화 과정을 계속하기로 합의하였으며, 2004년도 2/4분기내에 북경에서 제3차 6자회담 전체회의를 개최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하였고, 전체 회의의 준비를 위한 실무그룹을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제2차 6자회담에서는 국가들간에 여전히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고 다음 회담 일정을 잡은 것이 외에 크나큰 성과는 없었다.(3) 제 3 차 6자회담(2004년 6월23일 ~ 26일)제3차 6자회담에서 주목할 부분은 북미 양측은 1,2차회담과는 달리 2시간 20분간의 장시간 협상을 통해 북핵 포기의 구체적인 조건과 절차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수석대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보차관보는 부디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이 승인한 안건이라며, 구체적인 안건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북핵 5단계 해법’ 제시인데, 이에 대해서 북한은 미국이 먼저 보상하면 핵을 동결 및 폐지한다고 밝힌다.이러한 미국의 기존과 다른 태도에 대해서 미국 내부에서조차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뉴욕타임즈는 미국이 제시한 로드랩이 “그간 부시행정부가 내놓은 협상안중 가장 전향적이고 현실적이라”고 평가했고, 94 북미 제네바합의당시 미국측 수석대표 로버트 갈루치는 공영라디오NPR과의 인터뷰에서 “부시행정부가 과거와 전혀다른 과감한 대북 인센티브를 제시해 놀라울 정도이다” 또한 국무부대변인도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우리의 제안을 면밀하게 검토하길 기대한다” 면서 양국간의 평화회담 성사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나타내었다.하지만 양국은“선보상 후 핵폐기”의 북한과“핵패기 후 보상”의 미국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회담이 종결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4) 제 4 차 6자회담(2005년 7월26일 ~ 8월 7일)각국들은 전원일치로 6자회담의 목표가 한반도에서 평화적 방식으로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면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기로 약속했고, 빠른 시일내에 NPT와 IAEA의 보장·감독으로 복귀할 것을 약속했다.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가 없으며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국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따라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배치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재확인하고 현재 한국영토에는 핵무기가 없음을 확인했다.19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엄수되어야 하며 실현되어야 한다. 북한은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다른 참가국들은 이에 대해 존중을 표시하고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또한 각국들은 그들의 관계에서 유엔헌장의 원칙과 목적을 준수하고 국제관계에서의 규범에 따르기로 하고 북미는 상호주권을 존중하기로 승낙하고 상호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그들의 양자간 정책에 따라서 그들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북일은 평양선언에 따라서 그들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승낙했다. 또 이것은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남은 현안들을 해결한다는 기초위에서 또 평양선언의 정신에 따라서 양국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치를 취해가기로 승낙했다. 그리고 에너지, 교역, 투자 분야에서 양자 그리고 다자 사이에서 경제적 협력을 증진시키기로 승낙했다.그리고 중국, 일본, 한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은 북한에 에너지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한국은 북한에 200만㎾의 전력을 제공하는 2005년 7월12일의 제안을 재확인했다.마지막으로 각국들은 동북아에서 평화와 안정을 지속시키기 위한 공동노력을 다짐하고 안보와 협력을 위한 방법을 찾아보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5차 6자회담 일정을 오는 11월초 베이징에서 열기로 합의했다.(5) 제 5 차 6자회담(2005년 11월9일 ~ 11일)각국들은 진지하고 실질적이고 건설적인 토론을 하였고 제4차 회담의 공동성명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에 대해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각국들은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공동성명을 이행함으로써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조기에 실현하고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에 기여해 나갈 것이라는 점을 재천명하였다.??그리고 각국들은 신뢰구축을 통해 공동성명을 이행하며 각 부문에서의 모든 공약을 실천하고 적시에 조율된 방식으로 이런 과정을 시작하고 종결하며 균형된 이익 및 협력을 통한 윈윈의 결과를 달성할 의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상기 정신에 따라 공동성명 이행의 구체적인 방안, 조치 및 절차를 정하자는 데 동의하고 제5차회담 2단계 회의를 가능한 가장 빠른 시일에 개최하자는 데 동의하였으나 북한이 공동성명 이외의 주장 때문에 회담이 별다른 진전 없이 끝나고 다음 회의 날짜마저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그 내용은 북한은 10일 자국 기업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자산동결조치와 위조달러 공모, 마카오 중국계 은행 돈세탁 주장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북한 기업의 자산동결조치는 미 재무부가 지난 달 21일 조선광성무역 등 북한의 8개 기업이 대량살상무기(WMD) 확산을 지원한 혐의가 있다며 이들 기업이 미국 내에서 갖고 있거나 앞으로 가질 모든 자산에 대해 동결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각국들은 수석대표회의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의견을 교환했으나 북한의 이같은 문제제기가 공동성명 이행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고 의장성명에 담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목 차◁Ⅰ. 서론Ⅲ. 본론1. 루소의 생애2. 루소의 사상과 저서(1) 사회계약론(2) 과학예술론(3) 인간 불평등 기원론(4) 자연회귀사상3. 루소의 활동방향(1) 루소와 시민혁명Ⅲ. 결론Ⅰ. 서론루소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긴 어렵지만, 우리들은 이 글을 쓰면서 18세기를 가장 과격하게 비판한 사상가로 평가하고 싶다. 루소는 근대 유럽 지성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이는 당대의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그 영향력이 막대할지 모른다. 그 이유는 루소처럼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또 엄청난 정열과 웅변으로 저작을 써낸 사상가도 드물고, 또 루소처럼 자신의 저작과 생애를 가지고 일반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한 사상가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소는 당대의 계몽 사상가들 중에서 오로지 루소만이 자신이 살았던 세상의 주된 흐름을 혹독하게 비판함으로써 그 진행 방향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 이후 후대의 혁명지도자들이 정치적 실천과 이론을 일치시키려는 운동을 폈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동지의식을 발견한 곳은 루소의 사상이었다.루소는 정치 이외에도 많은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문화계의 저명한 인사답게, 그는 존경받는 작곡가였으며 충실한 내용의 음악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사실 음악은 그의 평생을 사로잡은 학문 분야였다. 루소의 초기 저작은 예술, 과학, 역사철학 등을 다룬 것이지만, 만년의 주된 관심사는 식물학이었다. 그는 자신의 식물학 연구 결과를 편지로 써서 남기기도 했는데 그 글들은 훗날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루소는 당대의 계몽주의 철학자들 가운데 루소처럼 정치문화 발전에 반발한 사람도 없었고, 또 그처럼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긴 사람도 없었다. 루소는 태어날 때 자신의 어머니가 사망함으로서 공식적인 교육도 받은적이 없는 시계수리공인 아버지가 자신의 육아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루소의 아버지는 낭만적이고 변덕스럽긴 하지만 루소에게 자연과 독서, 특히 고전과 역사서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루소도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유해를 팡테옹 (위인들을 合祀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2. 루소의 사상과 저서(1) 사회계약론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사회계약론'(1762)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사회적 질서는 신성한 권리로서 다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룬다. 그런데 이 권리는 자연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계약에 기초를 둔다.'사회적 질서 속에서 산다는 것이 속박이 아니라 인간만의 신성한 권리임을 강조한 뒤에, 그러한 권리, 즉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여 그 속에서 살 수 있는 권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계약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셈이다. 물론 루소 이전에도 이미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사회 질서가 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주장한 바 있다.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이른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속에 놓여져 있으며, 인간은 개인적인 자연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자유로운 계약에 따라 질서, 법률, 관습, 도덕 등을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사회 또장은 헛점도 지닌다. 우선, 과연 실제로 그런 계약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알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태고적의 지구 어느 한 구석에 원시인들이 모여 앉아 계약을 맺는 장면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차원에 불과하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사회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또한 설사 그러한 계약이 언젠가 실제로 채결되었다 하더라도, 도대체 왜 그 계약을 꼭 이행해야 하는지는 답하기 힘든 의문으로 남는다. 인간의 자연권을 보호하고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러한 목적이 계약의 이행 의무까지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그러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훗날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에게로 이어져, 급진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요구를 촉발시켰고, 이것은 결국 근대 유럽의 시민 혁명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공공선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시민의 의지에 따라 국가 공동체 또는 사회 질서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루소의 발상은 혁명으로 이어질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오늘날에도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전개한 통찰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2) 과학 예술론1750년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인간성 순화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제목의 아카데미 현상 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된 작품으로, 루소는 이 논문에서 아카데미가 제기한 물음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여기에서 루소는 귀족 사회의 학문과 예술이 도리어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학문이나 예술보다 차원이 높음을 강조하였다.그리고 귀족 사회의 사치와 낭비, 부패로 얼룩진 근대 문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지하고 비천한 민중에게 근대의 학문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인간이여 서 불평등이 초래되며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비참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루소는 인간의 자연이 선(善)임을 고집하고, "도토리나무 밑에서 허기를 채우고, 흘러가는 냇물에 목을 축이고, 나무 그늘에 누워 잠이 든 자연인에게는 그 이상 더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하여 인간 본연의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한다.(4) 자연회귀사상조물주가 처음에 만물을 창조할 때는 모든 것이 선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으면서 모든 것이 타락한다. 인간은 어느 한 땅에 다른 땅의 산물을 키우려 하고, 어느 한 나무에 다른 나무의 과실을 맺게 하려고 애쓴다. 인간은 풍토와 생활환경과 계절을 섞어서 뒤죽박죽이 되게 하며 자기의 개와 말의 노예를 불구로 만든다. 인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구로 만들며, 기형과 괴물을 좋아한다. 인간은 무엇이든 자연 그대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마치 훈련이 잘 된 말처럼 자기 기호에 맞게 길들여져야 하고 또 자신의 정원에 있는 나무처럼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방치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더욱 심한 불구의 인간이 될 것이다. 온갖 편견, 권위, 필요, 부지중에 빠져드는 모든 사회제도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자연적인 속성을 없애버리고, 그 대신 다른 무엇으로도 우리를 메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길 한가운데 돋아난 나무와 같은 것으로서, 행인들의 발에 마구 짓밟히고 꺾여서 이내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자애롭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어머니여! 한길에서 몸을 피하여 갓 자라난 나무를 인간의 여러 가지 편견의 피해로부터 지켜주는 어머니! 그 어린 나무가 죽기 전에 물을 주고 가꾸시오. 그 결과 어느 날 갑자기 어린 나무는 당신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재빨리 당신 아이의 영혼 주위에 울타리를 만드시오. 그것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겠지만, 오로지 당신만이 해야 할 일입니다.사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 힘으로 좌우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교육만이 우리의 의도대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가정에 의한 이론일 뿐이다. 왜냐하면 한 어린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언행을 완전히 그러므로 교육을 그저 하나의 기술이라 단정해버리면 그 교육의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교육의 성공에 필요한 세 가지 협력이란 것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나마 이룩할 수 있는 일이란 어느 정도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뿐이며,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은 행운일 따름이다.그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이미 증명한 그것이다. 교육의 완성을 위해서는 세 가지 교육의 합력이 필요 불가결하다. 그러므로 나머지 두 가지의 교육은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연의 교육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 자연이란 말의 의미가 너무 광범위한 듯하므로 그 뜻을 여기서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자연은 습관이 불가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강제적으로 익혀야만 몸에 배는, 그러면서도 절대로 자연을 억눌러 없애지 않은 그런 습성들은 없을까? 이를테면 수직 방향으로 뻗으려는 데 방해 당하고 있는 식물의 습성이 그것이다. 자유롭게 되어도 식물은 강제로 돌려진 방향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수액(樹液)은 그렇다고 해서 최초의 성장의 방향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실물이 성장이 계속하면 그 자란 부분은 역시 전처럼 곧게 자랄 것이다.이러한 사정은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상태에 머물러있는 한인간에서 생긴 부자연스러운 성향을 그대로 지니게 된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는 순간 그 습성은 곧 그치고 다시 자연성이 되돌아온다. 이와 같이 교육이란 확실히 습관에 불과하다.우리는 출생하면서부터 감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또한 출생하자마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감각을 의식하자마자 그 감각을 만들어낸 사한다.
?목 차?Ⅰ. 序論1. 배경Ⅱ. 本論1.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2.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3. 민족주의의 개념정의1) 한국 민족주의 운동2) 일제하의 민족주의 운동4. 한국에서의 원불교 시대적 전개1) 원불교 개교 전후의 시대상황2) 일제하 원불교의 전개3) 해방이후의 원불교5. 민족종교 원불교의 발전상1) 민족종교로서의 원불교2) 민족주의 한계 극복으로서의 원불교Ⅲ. 結論Ⅰ.序論1. 배경원불교는 근대시대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창시한 민족종교의 민족불교라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법당에 불상을 모시고 있다면 원불교에서는 법당에 일원상을 모시고 있다. 이는 동그란 원의 형상인데 작게는 부처님의 마음자리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자리를 형상화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진리를 수행의 표본과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한국의 민족주의와 원불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과 민족종교의 성향이 짙었던 원불교가 거의 동시에 맥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불교가 앞으로 21세기의 종교와 사상에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해 줄 것인가 하는 점과 현시대에 있어서의 여러 문제점에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우리 민족은 지정학적으로 특수한 지역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으로 인해서 우리 민족은 외세로부터의 끝없는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침략 속에서 오랫동안 민족의 단일성을 유지할 수 있던 가장 큰 원인은 국가를 유지함에 있어서의 종교·사상적 요소가 민중과 지배층 속으로 효율성 있게 파급 된 데에서 비롯된다. 고대의 국가 형성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저력은 대내외적인 세력에 대한 저항과 투쟁에 기인하며 이는 종교·사상의 발전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한편 현시대를 살아감에 있어 산업혁명으로부터 야기된 급격한 문명의 발전은 수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지배층과 피지배 계층간의 엄격한 수직적 관계의 과거와 달리 18세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물질 문질문명에만 치우치면 육신은 완전하나 정신이 병든 불구자와 같고, 정신문화에만 치우치면 정신은 건전하나 육신이 병든 불구자와 같다. 그러므로 정신문화와물질문명을 병진시켜야만 인간세계는 평화와 안락한 세계가 될 수 있다."둘째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다.이 세상 곳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하는 일마다 불공의 정신으로 하자는 뜻으로서 신앙과 수행을 병진하는 원불교의 특색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표어이다. 처처불상은 신앙의 이상적 자세로서 이 세상 만물이 모두 다 부처님의 화신이라는 것을 말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도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고, 물건까지도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주만유는 다 진리불이요 부처의 화신이다. 따라서 처처불상의 신앙은 인생으로서 가장 경건하고 엄숙한 생활자세요,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다. 사사불공은 수행의 이상적 자세로서 무슨 일을 하든지 부처님을 대하듯 하는 것을 말한다. 사사불공의 수행은 인생으로서 가장 성실하고 부지런한 생활자세다. 인간의 생활은 처처불상이므로 동시에 사사불공이다. 인간의 육근 동작이 모두 불공이므로 항상 선업을 짓게 되고 언제나 헌신 봉공하는 생활이다. 처처불상이 견성이요 정각이라면 사사불공은 솔성이요정행이다. 처처불상이 시불이요, 기도하는 생활이라면 사사불공은 활불이요 성실한 생활이며 정직하고 부지런한 생활이다. 따라서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신앙과 수행을 병진하려는 원불교인의 이상적 생활자세요, 가장 크게 완성되고 잘 조화된 종교인의 생활태도이다.셋째는 무시선 무처선이다.무시선 무처선의 표어에는 언제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항상 계속하는 선공부-곧 생활 속의 선, 행동선, 활선, 상행삼매, 보행삼매, 유희삼매를 말한다. 순간순간마다, 동작 하나 하나가 모두 선. 걸어가는 것, 잠자는 것, 밥먹는 것, 등교나 출근, 사무보는 것, 책읽는 것, 노래하는 것, 주판을 놓는 것, 논밭가는 것, 과일따는 것, 운전하는 것 등등 모두 선 아님이 없다. 소태산 대종사가 말씀하시기를 "육근이 처음으로 크게 표면 된 것은 프랑스혁명에서였다. 여기서 프랑스 혁명이 민족주의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이유는 혁명으로 인한 인근 국가의 간섭 전쟁이 프랑스 민중에게 애국심과 국민 주권의 원리와의 결합을 가져 왔고, 이어 나폴레옹의 침략은 유럽 여러 나라의 구체제를 파괴하는 반면에 여러 민족의 광범한 저항운동을 야기 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18세기 말, 서로 멀리 떨어진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의 출생 시점은 프랑스 혁명이 아니었다. 비록 그 혁명이 민족주의의 강화와 확산을 가져온 강력한 요인이기는 했지만 모든 역사적인 운동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던 여러 요인들, 예를 들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인의 활동 범위를 확대 시켰을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인한 상공업 계층의 성장은 봉건제를 타파하는 기반이 되었고 이로 인한 절대군주 체제는 곧이어 민족주의 체재의 도래를 야기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경제적?정치적?지적 여건의 성장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나라에 따라서 진행 속도도 달랐다. 그러므로 그 중요성에 따라 등급을 매기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의존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움직임에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이가 다름 아닌 장 자크 루소이다. 민족주의 이념의 발전에 기여한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민족주의는 오직 루소가 제공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만 구축 될 수 있었다.또한 민족주의 성장은 일반 민중을 공통의 정치적 형식으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현실로서든 또는 하나의 이상으로서든 경계가 뚜렷하고 규모가 큰 영토를 가진 중앙집권적 정부 형태의 존재를 전재로 한다. 근대적 운동으로서 민족주의는 그 생명력과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19세기 초엽에는 중부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중반기에는 남아메리카 신생국들이 받아들인 뒤 20세기에는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족주의이다. 점차 국경의 개념이 사라져 가는 정보화시대 속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국 문화에 대한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 밑받침 되어야한다. 오늘날의 무비판적 외래문화의 수용은 국가 존립 기강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인의 동남아인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적이지 못한 반면 미국?서유럽 등의 선진국가에 대해선 사대주의적 경향이 적지 않는 등의 이중적 모습이 있었다.근대의 과도기적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여러 모순을 나타내었다. 때문에 정치?군사?경제적 측면에서 서로 복잡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앞으로의 21세기에서 한국이 선도적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선 한민족의 균형있는 발전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민족주의의 올바른 사고의 정립과 함께 국민성의 향상을 도모해야한다. 이를 위해선 종교계의 역할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그리고 한국의 민족주의가 타 민족주의와 달리 특수성을 가지고 성립하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사상적 조화 속에서 진로를 찾아야 할 것이다.이처럼 민족주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강해서 오늘날의 분단 현실 속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 복잡성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민족주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한말과 일제하의 민족주의 운동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2) 일제하의 민족주의 운동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 왕조는 17∼18세기에 들어오면서 왕조의 부흥을 꾀하는 각종 정책을 펴는 가운데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기풍이 일어났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왕조의 사상적 국가 이념인 유교는 시대의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세계를 향해 문호를 열지 못해 급기야는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하는 상태까지 온 것이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통치권이 일본의 조선총독부에 넘어갔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가 근대적인 국민주권국가를 성립시키지 못하고 전제군주체제인 채 식민지 지배체제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민시대의 독립운동은 국민국가 수립운동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런 관점에서 민족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요구가 반영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왜냐하면 원불교 창시의 시대 상황은 민족주의의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원불교가 개교되는데 영향을 준 것은 소태산 박중빈이 살아온 호남지역이 동학운동의 본산지였으며 또한 증산교가 널리 번성하던 고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론 호남이 그 어느 고장보다 항일의병운동이 거세게 있어나 민족의식이 개명하였다. 항일 운동은 대부분 종교적 움직임과 맥락을 같이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소태산은 종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당시의 종교들은 민중들의 정신세계에 구심점을 찾아주기 위해 새로운 의미를 가지려고 몸부림치며 고뇌했다. 인간은 혼란한 시대를 당하면 당할수록 종교를 더욱 찾게 되고, 절대자의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당시의 불교는 산중불교의 선불교가 주류를 차지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지 못하여 호국불교로서 민중의 지도이념으로서의 가치와 사명을 상실하였다, 이는 당시대의 대안이 되질 못하였음을 의미하고 기독교도 일제에 의한 선교사의 포섭정책으로 친일적 성격이 대부분 이었다. 비록 3.1운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지속성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종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결과 시대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훌륭한 인물이 등장하듯이 원불교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나. 한국 민족이 더 나아가서는 세계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길을 개교의 동기에서 확연히 제시하였다.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의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그러므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 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이는 서구의 국가정책이 물질문명으로 인해 자국 그리고 타국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불교의 종교활동은 민족자각운동과 병행하며 한국 근?현다.
▶ 목 차 ◀Ⅰ. 序論1. 출생배경2. 학력Ⅱ. 本論1. 권력기반2. 통치와 과오3. 사회관계4. 정치사상과 대외정책5. 통일노선Ⅲ. 結論1. 평가Ⅰ. 序論1. 출생배경이승만과 그 세대 사람들은 말 그대로 격동기에 유년시기를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시기는 바로 동북아시아 천하의 지각이 뒤흔들린 때였다. 수백년 동안 동양의 여러나라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고 동양 각국간의 질서를 유지해오던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출생한 해는 1875년 3월 26일때어났다. 이승만의 탄생은 천우신조에 힘입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 대에까지 5대가 독자로 내려와 손(孫)이 귀한 집안이었다. 딸 둘을 낳은 이승만의 어머니는 갖은 치성을 드렸지만 나의 40이 되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꿈을 꾸었는데 용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가슴에 안기는 꿈 내용을 식구들에게 말했다. 동양에서는 서양과 달리 용은 숭배의 대상이다. 어머니의 꿈은 불교 전설과 초자연적 민간설화에 심취되어 있는 동양의 임신부들에게는 전혀 특이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몽은 현실로 나타나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가족들의 기쁨속에 6대 독자가 태어난 것이다. 어머니가 용꿈을 꾸고 태어났다고 하여 그의 아명은 승용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가족들의 보살핌은 극진했다. 하지만 이승만 가문의 가계는 양녕대군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의 조상들은 이미 오랫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고, 권력과 재부가 동일시되던 나라에서 그의 집안은 가난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권력과 부가 없이는 과거에 급제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승용은 좌절된 양반들 무리 속에 끼여 무위도식해야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6대 독자이니 만큼 가족들에 끔찍한 보살핌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승만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록이 전해지진 않지만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음은 사실인 것 같다. 승용의 부친 이경선은 양반가의 후예로 태어나 풍요롭게 자라면서 물질과는 거리가 먼. 이때 그의 나이 74세였다.따라서 본보고서에서는 서두에서 살펴본 이승만의 출생배경과 학력 등을 토대로 하여 한국의 초대대통령으로서의 권력기반구축과 국가를 통솔하는데 있어서의 통치와 과오와 더불어 사회관계, 그리고 그의 정치사상과 대외정책과 이승만 정권 때의 통일노선을 어떠했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난후, 마지막으로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한다.Ⅱ. 本論1. 권력기반해방 직후 단정노선파, 남북협상파, 단정반대파 등의 국내 정치세력 가운데 단정노선파가 민중적 조직 기반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자기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정당화 논리로 제공한 반공이데올로기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국가형성과정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였다.하지만 이승만정권은 국가권력장악의 가장 큰 계기를 미국의 지원에서 구하였으므로, 반공이데올로기 외에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상징 조작으로서 기능 하였고,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 반공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뒷받침하는 고갈되지 않는 정당성의 원천이 되었고, 민족주의 해체기능, 국가와 사회영역 간의 분획기능, 강제력 행사의 정당화 기능 등을 하였다.반일이데올로기는 이승만이 민중들의 반일적 감정을 정권유지의 도구로서 이용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의 반일이 진짜 반일이 아니었음은 그의 지지세력이 주로 친일파로 구성되어 있음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승만의 핵심 세력기반은 친일경력의 관료, 경찰, 군부였고, 이 때문에 반민특위는 좌절되었다. 따라서 반일 이데올로기는 반공이데올로기를 보완하는 기능을 하여 정권유지의 도구로 활용된 데 불과하다.경찰과 군부, 청년단체는 이승만이 물리적으로 남한을 장악해 가는데 최대의 기반이 되었다. 경찰은 이승만 체제 유지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골간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경찰은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가장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고도로 중앙집권적이었던 경찰은 일반 국민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정당이나 여론과는 분수는 506%로 팽창했고 물가지수는 같은 기간에 1,060%로 10배 이상 폭등했으며 정부는 262억 2천 4만 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권을 이양받은 이승만은 성안중인 농지개혁법이 한민당에 의해 지연되어 유명무실하게 된 것을 방치했고 농민에게 불리한 '양곡도 입법'이 제정 공포되는가 하면 '반민처벌법'이 온갖 방해 속에 겨우 제정 공포되었으나 특위의 행동이 개시되자 특위 습격을 지시하여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결국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김약수 부의장 이하 13명의 국회내의 반대파인 '소장파 의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했고(국회 푸락치사건), 단정을 반대한 김구를 암살하고 김구와 동조한 각 정당,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사회당 등은 정부 압력으로 사실상 활동이 끊어지고 말았다. 언론에 대해서는 공보처를 통해 7개항의 언론 단속지침을 발표하여 '국시위반' '정부모략' '허위사실 날조' '국위손상' '자극적 기사로 민심에 악영향을 끼치는 기사' '국가기밀 누설' 등을 금지해 언론의 기능을 위축시켰다. 반대파에 대해 이같은 온갖 탄압을 가하면서도 1950년 5월 30일의 선거에서 이승만계는 여당인 대한국민당이 겨우 24석, 독립국민회 12석, 대한청년당 11석 등 모두 합쳐야 57석밖에 당선되지 않았고 반이승만계는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등 거물이 다수 당선되었다.6·25후 피난지에서 이승만 정권은갖가지 추태를 연출했다.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 '중석불사건' 등, 연이은 의혹사건 속에서 이승만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대통령에 당선될 가망이 없다고 보자 야당의원 다수를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구속하고 대통령 국민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서 강제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승만은 삼선금지 조항으로 계속 집권의 길이 막히자 1954년 10월 경쟁자인 신익희를 '뉴델리 회담설' 조작으로 실각 시키려 하는 한편 같은 해 12월에는 삼선의 실을열어주는 개헌안이 부결되었는데도 사사오입으로 통과된 것으로 번복하는 전무후지구상의 인종을 몽고리안·코캐시안·이듸피안·아메리칸·멜래안의 다섯 가지로 구별하고, 다시 이것을 문명개화인·반개화인·야만인의 세 종류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인종을 구별하는 것은 이승만 자신만의 독특한 구분법이 아니고 당시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인식인데,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독립신문』의 논설에서도 비슷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의 인종적 편견은 문명화에 대한 기준에 입각하여 현재까지 도달한 각국의 문명을 평가한 결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각국의 문명 차이는 언어·풍속·제도 등을 개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진실로 만국이 서로 사랑하여 정의가 친밀하게 되면 풍속·인물·언어·문자까지 모두 한결같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이승만의 최고 목표는 인종적 차이를 극복하여 조선이 문명국에 도달하고, 조선인이 문명개화인이 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때문에 이승만은 『제국신문』 논설과 『독립정신』, 그리고 『신학월보』에 기고한 글 등에서 국민의 민권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이상의 인식에 기초하여 이승만의 민권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근대 서구에서 제기된 민권론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근대 자연법사상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민권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에서 발달된 외견적 입헌군주정체론의 기초를 이루는 민권론이다. 전자는 자연 상태에서의 불가양도의 인간의 권리인 자연권이 그 핵심인데, 그것은 국가 이전의 권리이며, 자유권·생명권·재산권 등의 기본권을 포함하여 참정권까지 포괄한 것이다. 후자는 국가적 지배조직은 사회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그 권력의 행사는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고유의 권위에 의해서 행사된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국민의 권리는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가 개인에게 인정한 '국가시민'적 권리에 불과한 것이다.이승만의 민권론은 어떠한 입장에서 전개되었을까. 이승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람의 높고 낮음, 귀천 등의 수립과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결국 국권의 이해를 민권의 이해보다 우선시했을 것이다.이승만은 민권과 국권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무엇보다 국민교육을 강조하였다. 이승만은 국민이 교육을 받지 못해 나타나고 있는 폐단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그는 하늘이 내려준 자주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나의 학문이 남만큼 된 후에야 될 것"이라고 보고, 먼저 총명한 사람들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교육의 폐단으로 옛 것을 숭상하고 큰 것을 섬기는 것 등을 지적하고, 가장 먼저 힘쓸 일로서 인민의 교육을 들었다. 이승만은 국민교육의 유일한 수단은 새학문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몇 천 년 전에 어리석게 믿던 것을 다 깨쳐 버리고 분명한 증거와 확실한 본체를 드러내어 아무라도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지며 마음으로 생각하여 깨닫고 믿음"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서양문명국이 이루어 놓은 정치, 경제, 산술, 천문지리, 법학, 철학, 농학, 상학, 기계학, 의학, 역사 등의 새학문을 시급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교육의 기초로서 국문교육과 여성교육을 강조하였다. 또 외국서적의 국문으로의 번역과 보급을 주장하는 한편, 더 나아가 외국어 공부와 외국제도·학문 등을 배우기 위한 외국유학을 강조하였다.국민교육을 중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결국 실력을 양성하여 서서히 국권을 회복하자는 준비론적인 국권회복의 자세와 연결되었다. 예컨대 그는 을사조약 이후 국권을 거의 일본에게 빼앗긴 시점에서 "세상 형편을 알고 세계 물론을 들어가며 장래에 어찌 행할 일을 낱낱이 준비하여 속 힘이 든든하게 된 후에야 남과 경위를 다투어도 나의 적국의 강한 적수가 되겠고 무력으로 다투어도 능히 남을 꿇릴 바 될지라"라고 하여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의 준비를 강조하였다. 이렇게 실력양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당시 의병전쟁에 대한 인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의병이 충애(忠愛)를 바탕으로 기병 하였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