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군 원정의 배경 -1902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을 목적으로 시작된 이래 1272년 제8차까지의 십자군 원정은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불러왔다. 십자군 원정이 왜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발흥한 지 20년이 채 못 된 638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손에 놓이면서 빠른속도로 기독교권이 이슬람화되었다. 고대의 로마 제국 이래 유럽의 손아귀에 있던 지중해 역시 이슬람교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십자군원정은 시작되었다.십자군 원정의 배경에 대해서는 10세기 이후 상업의 부활과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막대한 경비와 인적 자원이 요구되는 십자군 원정이 가능했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10세기 말부터 거듭된 흉작으로 악화된 경제 상황이 원정의 주된 원인이라는 상방된 주장이 공존한다. 어쨌든 십자군 원정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서기 1000년을 맞아 꿈에 그리던 성지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당한 어려움을 모험담으로 전하면서 폭발된 반(反)이슬람 감정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전개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200여년 동안 지속되면서 유럽 기독교 세계에 이익과 함께 손실도 가져다주었다. 특히 제 4차 원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같은 기독교 간의 분열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이때부터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은 사라지고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앞서게 되었다. 교황 우르반 2세의 1차 십자군 선언 후,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도중, 십자군들은 마을에서 식량을 탈취하고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그 후 원정을 계속하여 십자군들은 니케아에 이어 최종 목표였던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나서는 도시의 모든 물품을 빼앗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다. 이렇듯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공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졌고, 기독교 기사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피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집어 쓴 채로 성지를 잠시나마 정복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결성된 이슬람연합군에 의해 기독교 기사들이 누렸던 예루살렘 해방의 기쁨도 곧 사라지고 말았다. 제3차 십자군 원정도 성과가 없었다. 십자군원정은 실패했지만 11~12세기는 교황권의 전성기였다. 교황의 지배아래 기독교도들이 단합하여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권력을 창출한 일은 역사상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거친 옷을 입고 맨발로 눈 위에 선채 사흘 낮밤을 기다려 교황의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제4차 십자군은 타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1202년, 수상도시 베네치아에 집결한 십자군들은 바다를 건너 원정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십자군 자체의 함선을 이용할 만한 처지도 못되었고, 민간 선박을 빌릴 수밖에 없었는데, 민간 선박이라고 해서 십자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배를 빌리는 대신 베네치아 상인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들의 무역경쟁자인 달마티아 연안의 기독교 도시인 ‘자라’를 공격?점령하고, 그들은 계속 십자군을 자기들의 입맛대로 조정했다.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방무역의 경쟁자인 비잔틴 상인들의 세력을 꺾어놓기 위해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것을 제의했다. 애시당초 비잔틴제국이 투르크에게 함락당할 위기에서 구해달라고 할 것이 십자군운동의 시발점이었는데 이제는 그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심지어 교황의 파문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십자군을 자기들의 입맛대로 조정했다. 13세기 십자군은 5,6차에 걸쳐 선언되었으나 실패하고, 최후의 성지인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이슬람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십자군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15세기에는 새로운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투르크가 성장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유럽까지 넘보게 된다. 이에 십자군이 다시 한번 선언되나, 콘스탄티노플 탈환에는 실패하고, 오스만 투르크의 전진을 저지하는 역할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서유럽 세계도 지중해 무역로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이 점에서 제4차 십자군 원정은 가장 타락한 원정이었으면서도 오히려 가장 중요한 원정이기도 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지중해 무역권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십자군 기사들은 동방의 화려한 문물에 압도되어 서유럽만을 세계로 알았던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비록 예루살렘 성지의 회복은 실패로 끝났지만 유럽 사회 변화의 촉진제 역할을 하는 등의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십자군 원정이 가져온 유럽사회의 변화의 파장으로 제일 먼저 상업의 활성화를 말할 수 있다. 지중해 연안 도시 상인들이 원정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 공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원격지 교역인 동방 교역이 확대되는데, 특히 종교적 적대감에서 이슬람교도와 상업적 교류를 하지 않던 제노바와 피사의 상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또 후추와 향신료 등의 이국적 동방 상품을 접한 원정군과 상인들이 이러한 것들을 서구 사회에 소개하면서 대륙에 한정되어 정체되었던 카롤링거 왕조의 경제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마련됐으며, 이교도와의 교역을 금지하는 교회에 반하여 9세기경부터 이슬람과 교류하던 베네치아 상인들이 입장을 바꾸어 이슬람을 공격하는 십자군 전쟁에 물자를 아끼지 않고 적극 후원하면서 동방 교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되고, 그 결과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 상권을 이끌어 가게 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십자군에는 성직자, 기사, 대장장이, 포도주 상인, 재단사, 구두수선공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유럽 너머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문화적 변동은 중세시대의 정신적인 축이 바뀌는데에도 큰 이바지를 했다.- 십자군 원정의 영향 -바깥의 가장 큰 변화가 지중해를 장악한 데 있다면 안의 가장 큰 변화는 교황권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십자군 원정초기는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교황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십자군이 실패하면서 교황권은 큰 손상을 입었다. 물론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곧바로 교황권의 약화를 가져왔다기보다는 이미 시대의 변화 자체가 교황이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만 그렇다해도 십자군이 성공했더라면 교황권은 강해졌을 것이다.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일반 신도들은 더 이상 신이나 성직자들을 절대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으며 차츰 신앙도 식어가고, 교회의 위신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다.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해지자 각 왕국들은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Ⅰ. 서 문수세기 동안 제국의 역사를 경험했던 과거와 인적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세계화 추세 속에서 하나의 국가 내에 민족적 정체성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실상 민족적 동질성이 매우 높은 몇 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한 국민국가 내 다양한 민족적 정체성이 공존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특히 근래 들어 선진국으로의 급속한 인구 유입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 하였으며, 이는 정체성의 분절화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사회적 문제의 급증을 가져왔다. 다문화주의는 서구사회가 직면한 이러한 문제를 적절하게 해명하고 대처하기 위한 방법의 한 가지로 고안되었다.다문화주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이 1970년대 초반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다문화주의는 이제 불과 30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그것이 구체적인 정책으로 발현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시행된 정책의 결과는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또한 다문화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국가들은 여전히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아직까지 다문화주의와 그것의 구체적 성과를 전반적으로 평가하기는 힘들다.Ⅱ. 호주와 다문화주의호주는 대표적인 이민국으로서 호주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가치정향과 복수의 정체성하에서 ‘호주국민’을 주조해 내고자 하는 노력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이다. 호주는 동질성을 목적으로 하는 백호주의 정책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백호주의가 이민정책으로서 그 효력을 상실하는 1960년대 중반까지는 비교적 동질적인 인구구성을 보였으나 60년대를 경과하면서 국가의 필요에 의해 대규모의 이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인종?다문화의 복합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서도 다문화적 상황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더욱이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과정이 큰 사회적 혼란 없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형성’이라는 것은 공통 언어를 진척시키는 과정과 그 언어에 의해 운영되는 해는 여러 나라의 개척사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매우 잔인했다. 호주 역사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은 1970년대까지도 계속되었고, 당시의 가혹했던 호주 정부의 여러 정책 중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원주민 부모들이 아이를 제대로 못 키울 것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원주민 자녀를 강제로 백인들에게 맡겼던 것과 원주민들이 수세기 동안 신성시해온 땅을 강제로 몰수 한것, 열악한 주거 환경 등이다. 1967년에야 비로소 호주인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원주민들은 호주 전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으며, 시드니나 브리즈번에 비교적 많은 수가 살고 있어 대도시라도 이들 원주민을 보기는 쉽지 않다.국가 화합의 차원에서 1990년대 초 당시 노동당 정부의 제안으로 설립된 원주민보상평의회는 호주 정부와 원주민 간의 결속을 위해서 양자간의 협약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짓고, 2001년 전까지 정부는 이 협약 내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많은 호주인도 정부가 이를 이행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 2000년 초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원주민에 대한 유감을 표하는 뜻으로 시드니 거리를 행진했으며 멜버른 등 그 밖에 도시에서도 수만의 인파가 이런 행사에 동참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호주 정부는 아직까지도 원주민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있지 않으며, 협약에도 동의하지 않고 있다. 호주의 지식인들은 이런 원주민들을 호주의 모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행했던 과거의 일들에 대해 현 정부가 반성해야 하며 수상은 원주민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반 호주인이 원주민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 ‘The Sydney Morning Herald'라는 잡지의 설문 조사에 의하면, 호주 정부가 원주민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53%)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43%)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이렇게 짧은 역사에서 그것도 영국이라는 그늘 아래 영연방 국가로 지속되어 온 호주는 무엇보다도 국대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줄어들었고, 신 정부의 아시아에 대한 집착도 이전보다 누그러들었다. 이런 틈을 타고 호주 총 인구의 5%도 채 안되는 아시아계 이민족에 대한 반감이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표출되곤 했다. 1997년 신당을 창설했던 한나라당의 등장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나라당의 당수인 폴린 핸슨은 이민자들이 호주에 와서 호주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격리된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하여 사회의 조화를 깨뜨리고 있다면서 이민을 대폭 선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아시아 이민을 더 이상 받지 말고, 호주에 사는 아시아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향수를 버리고 호주 사회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호주 원주민들이 정부로부터 너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며 그들에 대한 혜택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이런 주장은 보수적인 호주인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그녀는 이로 인해 의회에 입성을 하게 되었다. 폴린 핸슨의 이런 발언은 호주 내에서뿐만 아니라 인근 아시아 국가에서도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호주 정부와 지식층은 호주에 도움될 게 하나도 없고 고려할 가치도 없는 발언이라며 애써 무시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간 아시아 일변도로 행해 왔던 정책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일리 있는 주장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정체성과 관련된 논의 중 또 다른 이슈는 공화제였다. 1994년 당시 노동부 정부의 수상이었던 폴 키팅은 호주가 영연방에서 독립된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런 발표가 있은 후 호주 전역은 공화제 논란으로 들끓었다. 신문은 친공화제파와 반공화제파를 대표하는 인사들의 논의를 연일 다루었으며, 성급한 언론들은 공화제가 이루어졌을 때 적격한 국가의 수반을 점치기도 하고, 새로운 호주 국기를 공모하기도 했다. 수년간의 논란 끝에 결국 이 이슈에 대한 찬반 결정은 1999년 국민 투표에 부쳐졌는데, 결과는 55대 45로 공화제 반대였다. 즉, 아직까지는 영연방으로 남아있기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현 야당인 노동당은 차기에 집권할 경우 도록 하는 등 장애인에 대해 배려가 매우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호주의 지식층들은 ‘호주의 평등주의는 사회의 계급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영국과 같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앵글로섹슨계, 비영어권,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는 모순된 과거로 인해 대부분의 호주인들은 어떤 형태의 차별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어느 나라처럼 보이지 않는 차별은 있으나,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지식층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간에 드러나 보이는 차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신’은 무슨일이든 간에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한 번 해본다는 뜻이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특히 ‘언더독(underdog:사회적으로 도외시된 약자)을 격려하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이런 경향은 스포츠는 물론 정치, 사회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언더독은 격려하는 반면, ‘톨 퍼피(tall puppy)’는 환영받지 못한다. ‘톨 퍼피’란 남보다 탁월하거나 우월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눈에 띄게 잘 되는 것을 (물론 속으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전문직이거나 경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일반 직종이나 보통 생활에서 뛰어나게 앞서 나가는 사람에 대해 질투를 한다는 의미이다. 1983년 당시 미디어 재벌이었던 알란 본드는 권위있는 요트 대회인 아메리칸 컵에 호주 팀을 이끌고 참여하여 대회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이겨 호주의 영웅으로 간주된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재벌이란 이유로 ‘톨 퍼피’로 간주되었던 알란 본드가 스포츠 영웅이 되자 호주인들에게 그는 ‘톨 톨 퍼피’로 인식되었다. 이런 그가 몇 년 후 부도로 망하게 되자 미디어는 물론 호주인들도 내심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위에서 언급한 호주적 가치, 즉 ‘공평한 사회’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신’은 여러 가지 모순점도 포함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현재 각 사회와 집단마다 계층과 계급이 있고 그 계층과 계급간의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위치 가치들은 옛것’정책은 민족적, 문화적 다양성을 호주 사회의 영구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이는 당시의 주도적인 문화(앵글로섹슨 문화)와 사회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한도에서 문화적 다양성의 일부(민속 예술, 고유 음식)를 어느 정도 허용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이민자를 기쁘게 함과 동시에 영국계 호주인들이 색다르고 이국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이민자들이 호주 사회의 결속을 저해하지 않고 호주 사회와 이민자 사회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인식하게 되면서, 정착 단계에서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가정의 중요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2년 위트램 정부는 이민자들의 정착을 도와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전화 통역 서비스, 이민자를 위한 방송, 공공 기관에 다국어를 할 줄 아는 복지 담당관 배치, 학교에서의 이민자 언어 교육 및 장려 등이 모두 이때부터 실시되었다. 이후 1975년에는 반인종차별법이 신설되었다. 1977년에는 소수민족평의회가 발족되어 다문화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정책의 틀을 검토하기 시작했다.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호주인은 앵글로 섹슨계의 백인들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호주로 이민 온 사람들은 주로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 등 주로 영어권 지역의 사람들이었으나, 1998년에는 이민자들 중 39%만이 영어권 출생이었다. 한편 전체 호주인의 23%는 외국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민 온 이민자들이다. 2000년 초 현재 호주의 인구는 1,900만 명을 넘었으며, 200여 개의 소수 민족이 10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비영어권 출신의 호주 이민자들은 대다수가 호주의 삶에 대해 만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주사회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된다. 호주 국영 다문화방송인 SBS TV가 2002년 공개한 조사보고서는 오래 전부터 살아온 호주인, 토착민, 이민자 등 호주인들이 이민과 다문화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새롭게 조명해 주고 있다. 레바논본다.
지구 온난화와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논의하기 위한 유엔기후변화협약 제11차 당사국 총회(COP11)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005년 11월 28일 열렸다. 회의에는 한국 등 세계 180개국 대표단과 관계 전문가 등 1만여 명이 참석해 12일간 계속된다. 12월9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회의의 가장 큰 쟁점은 온실가스 1차 감축기간이 끝나는 2012년 이후 선진국과 개도국의 의무감축량 문제다. 하지만 참가국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달라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단일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는 미국은 지난주 제임스 커노턴 백악관 환경보좌관을 통해 의무감축 기준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이미 밝혔다. 미국은 지난 7월 한국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중국, 인도와 함께 ‘청정개발 및 기후에 관한 아태지역 파트너십’을 구성해 교토 의정서 체제에 맞서고 있다. 이 협력체의 목표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참여국들이 ‘자발적’으로 공유해 온실가스를 줄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영국 공영 방송 BBC는 이를 교토의정서 체제의 ‘경쟁자’라고 평가했다. 또 유럽연합 등은 비교적 경제규모가 큰 개도국들도 온실가스 의무감축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개도국들은 ‘온실가스 배출에 제한을 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BBC는 “이번 회의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부분은 청정개발체제(CDM) 관련 현안, 개도국의 배출 감시 지원, (환경 관련) 기술 이 전 등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기후변화에 관한 최초의 국제 회의는 1979년에 열린 ‘인간활동에 의한 잠재적 기후변화를 예측, 방지하기 위한’ 세계기후회의이다. 이후 세계기상기구와 유엔환경계획에 의해 1988년 기후변화에 의한 정부간 패널이 조직되고 1992년 리우 지구환경선언에서는 154개국에 의해 유엔기후변화협약(UN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이 채택되었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은 1994년부터 효력이 발생하였으며 181개국의 당사국들이 모이는 정기적인 당사국회의(COP)가 열리게 된다. 기후변화협약의 궁극적인 목적인 기후시스템에 위협이 되는 인위적인 교란을 막는 수준에서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를 안정화시키는 것이다. 이미 CO2(이산화탄소)농도는 산업화 이전의 285ppm에서 366ppm으로 증가하였다.온실가스에 관한 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도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석유 최다 소비 국가인 미국의 경우 온실 가스의 규제는 자국의 산업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처음부터 반대하였다. 반면 일본은 섬나라이므로 지구 온난화 시 상대적으로 피해가 우려되므로 기후변화협약에 적극적이었다. 우려곡절 끝에 마련된 기후변화협약은 미국의 소극적 대처로 후속 조치가 당초 예정보다 늦어졌다. 수년 간 관계 전문가의 연구를 거쳐 기후변화협약에 대한 세부 규제 내용이 마련되었다. 바로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이다.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는 1997년 일본에서 채택되었다. 기후변화협약과 관련한 온실가스 규제의 세부 이행 내용을 담고 있다. 교토의정서에 의한 규제 대상 가스는 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수소불화탄소 등 6개이며 미국, 일본 등 38개 주요 선진국을 1차 규제 대상 국가로 정했다. 규제 내용은 1990년 배출량을 기준으로 2008년~2012년까지 평균 5.2% 감축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는 1차 규제대상에서 제외되어있다. 교토 의정서에 대한 세계 각국의 비준이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세계 에너지의 25%를 사용하는 미국이 탈퇴하였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100여 개국이 이미 비준을 했고 2004년 11월 러시아가 교토의정서에 서명하고 2005년 2월 교토의정서가 공식으로 발효되었다.우리나라는 OECD가입국임에도 불구하고 1992년 기후변화협약 채택 당시 개도국으로 분류되어 있어 현재 강제 의무 대상 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은 당사국 회의 때마다 매번 한국, 멕시코 등 선발 개도국과 중국, 인도 등 온실가스 대량 배출국의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1997년 교토의정서에 서명한 미국은 2001년 "의정서의 내용이 불공평하고 석유 의존도가 높은 미국 경제에 부담을 준다"며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교토의정서는 선진국들의 경우 2008~2012년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보다 5.2% 줄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은 감축 의무가 없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자국이 피해를 많이 본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대신 '자발적인 감축 노력 유도와 환경개선 기술 개발'을 강조해 왔다. 실제로 미국의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율은 상대적으로 낮다. 미국은 2013년 이후엔 교토의정서처럼 일률적인 감축 방식보다 각국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방안을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AFP통신은 회원국별로 의무 감축 배출량을 정하는 방식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요구대로 자발적인 감축 참여를 유도하는 데 그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논란이 다시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기후변화협약의 회원국들은 협약의 원칙에 따라 일정한 의무를 부담해야 하는 데 공통의무사항과 특정의무사항으로 구분된다. 공통의무사항은 모든 당사국들이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위한 국가전략을 자체적으로 수립하여 시행하고 이를 공개해야 하며 온실가스 배출량 및 흡수량에 대한 국가 통계와 정책 이행에 관한 국가보고서를 작성, 당사국총회에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특정의무사항은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의 원칙에 따라 기후변화에 대해 역사적으로 책임이 있는 산업화된 국가들로 구성된 AnnexⅠ(부속서 1)국가들에 부여되며 200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수준으로 동결하도록 했으나 이에 대한 강제력은 없었다. 2000년이 지난 현재, 실제 이 조건을 만족한 국가는 EU의 3개국과 경제적인 침체로 인해 생산후퇴에 직면한 동구권 국가들뿐이었고, 전지구적인 온실가스 방출은 여전히 해마다 1.3%씩 증가하고 있다. 기후변화협약 사무국에 집계된 자료에 의하면 1999년 온실가스 배출수준은 1990년에 비해 호주는 22%, 캐나다 15%, 미국은 13%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기후변화협약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위해 교토의정서를 채택하는 등 야심에 찬 시작을 했지만 화석연료 기업의 로비나 각 국의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실질적인 진척 없이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다. 특히 일본, 미국,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등 소위 JUSCANNZ로 불리는 국가들은 이 '회색 로비스트(gray lobbyists)'라 부르는 석유산업의 로비에 부흥해 매 당사국 총회마다 협약의 진행을 방해해 왔고 미국의 경우 부시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기후변화협약의 성과물이었던 교토의정서를 따르지 않을 것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석유생산국 (OPEC)들의 저항도 있었고 핵산업이나 흡수원을 통한 배출권 거래를 통해 이윤을 얻으려는 산업계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다. 기후변화협상이 시작된 지 10년, 기후변화협약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누더기가 된 것이 사실이고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