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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현대문학]민촌 이기영의 고향
    [[ 고향 ]]⊙1933년 11월 14일의 에 신연재 장편 소설 [고향]을 명일부터 본지 특간(特刊)에 연재 한다는 광고가 나와있다.만천하독자제씨의 열렬한상찬을밧든 본지특간에 련재중인 채만식씨작 장편 [인형의집을나와서]는 오늘로ㅅ긋을맺고 다음으로게속하야 민촌 리긔영씨작 장편소설 [고향]을 명일부터특간제삼면에련재하기로되엇습니다. (후략)[고향]은 에 1933년 11월 15일부터 다음해 9월 21일까지 연재되었다.⊙ 작품내용1920년대 중반의 농촌현실을 반영한 이기영의 [고향](1934)은 원터 라는 충청도의 한 농촌을 무대로 식민지 자본주의하에서 일제의 착취와 그에 따른 농촌의 황폐화, 식민지 자본주의화에 따른 광범위한 농민계급의 분해와 빈농의 속출, 그에 따른 농민의 노동자화와 노농동맹의 필연성, 그리고 파업과 소작쟁의 등을 통한 빈농과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과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김재용 외, [한국근대민족문학사], 한길사, 1993. 12, 488~489쪽소설은 원터마을 농민들이 착취와 고역에 시달리고 있을 때 선진사상을 가진 김희준이 동경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의 참상을 뼈아프게 체험하면서 헐벗고 굶주리는 농민들과 더불어 좋은 세상을 찾기 위하여 싸우려는 결의를 굳게 다진다. 그는 노동야학을 열어 농민들을 계몽시키는 한편 두레를 통해 빈농민들 속에서 서로 돕고 이끄는 정신을 키워나간다. 이듬해 큰물이 져 원터마을에 흉년이 들자, 희준은 동회를 열고 농민들을 소작료삭감을 위한 투쟁에 불러일으킨다. 농민들의 투쟁이 곡절을 겪게 될 때 제사공장 노동자들이 동정파업을 일으키고 의연금을 모아 보내준다. 그리하여 난관을 극복하고 원터마을 농민들은 요구를 관철해낸다.{) 박종원 외, [조선문학개관下-북한문학편], 온누리, 1988. 12, 67~68쪽* 농촌의 현실지금의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기아(饑餓) 는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 벅찬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양조소에는 물물이 술지게미가 많이 나왔다. 그전에는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팔고 거저 주기도 하였는데 누가 먼저 발견을 했는지 지게미를 사러 오기 시작했다. 그는 읍내 사는 막벌이꾼이었었는데 몇때를 굶고나서 곰곰히 생각한 끝에 마침 동전 몇닢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재강을 사다가 끓여먹어보았다. 그 뒤로 이것이 전파되자 재강은 훌륭한 푼거리 양식으로 이 근처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용되었다.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처참한 현실을 작가는 담담히 서술하고 있으며, 오히려 재강이 그들에게는 훌륭한 양식이라며 뛰어난 발견을 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는 무미건조한 표현으로 참상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농민의 노동자화평생 땅을 파서 먹고 산 부모님 밑에서 자란 인순이는 희준에게 부탁까지 해 가며 농사를 짓지 않고 공장으로 들어간다. 마름집에서 곱게 자란 안갑숙(나옥희)도 자연스러운 과정은 아니지만 여직공이 되며, 경호도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공장은 얼추 지어갑니까? 가을 안으로는 다 되겠지. 거기 어떻게 우리 계집애 좀 넣어주도록 해주게. 갑숙이는 양산을 펼쳐서 머리 위로 내려쪼이는 태양을 가리고 서면서 인순이도 잘 있지요? 잘 있지유. 그애는 공장에 들어갔다우.그는 작년에 일심사에서 만났을 때도 만일 출가를 하게 되면 어떤 공장으로나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서울에서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할수없이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이런 의미에서 경호는 신생활의 첫걸음으로, 권상철의 소개를 빌어서 그 곳 제사공장의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갑숙이나 경호는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지만, 흔히 말하는 운명의 장난 으로 노동자가 되었다. 인순이는 농사를 지어서는 굶기를 매일같이 해야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로서 노동을 선택하지만, 이 역시도 해방구가 되지는 못한다.자기가 다니는 공장에서 하루를 시달리고 나면, 두 손은 홍당무처럼 익고, 눈은 귀에서는 전봇대 우는 소리가 나고, 목의 침이 마르고, 등허리는 부러지는 것 같이 아플 뿐만 아니라, 수족은 장작처럼 빳빳해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노동지옥이다. 농촌에는 이와 같은 노동이 없는 대신에 기아가 도사리고 있다. 노동과 기아! 그 어느 편을 낫다 할 것인가? 아니, 그들에게도 농민 못지 않은 기아가 있고, 농민들에게도 그들 못지 않은 노동이 있다. 결국 이 두가지는 그들에겐 공통된 운명일는지도 모른다.* 물질중시위자료 오천원 에서 볼 수 있듯이 안승학과 권상철은 자식과 가문의 명예 등을 놓고 장사꾼 기질을 발휘하며 이윤을 따지기에 급급하다.위자료 오천 원! 오천 원의 금액은 금시로 그의 눈 앞을 빛나게 하였다. 안승학은 권상철을 찾아갈 때까지도 자기에게는 위자료를 청구할 만한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권상철은 안승학의 환심을 사기위해서, 이런 말을 선선하게 꺼냈다. 그러니 그는 어떻게든지 약혼을 먼저 해서, 그 돈을 다 안 쓸 작정이다.가진 사람이 더 무섭다 라는 말이 실감될 정도로 지나친 그들의 모습은 보통의 사람이기보다는, 극히 전형적으로 창조된 인물로 보여진다. 먹을 것마저 부족했던 그 시기라면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긴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작쟁의와 공장의 파업어느 한 여직공(경순)이 입바른 말로 인해 해고를 당하자 같이 일하던 남녀직공 일동이 파업을 시행했고, 소작쟁의는 큰물로 인해 야기되었다. 이 둘 모두 진행되는 과정에서 위기가 닥쳐오지만, 이를 잘 이겨내어 원만한 해결이 이루어진다.그날 낮에는 남공일동도 여공들에게 호응하였다. 밤낮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던 공장 굴뚝은 별안간 연기 한 점도 안나오고 멋없이 우뚝 섰다.즉 그들의 곤경은 더 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와해될 위험이 각각으로 절박해온다는 것을 말한 후에 ....그러나 이는 튼튼한 실력 으로 인한 승리가 아니라 위협재료 로 굴복받았기 때문에, 완전한 승리는 아니며 차후의 개선노력과 이들의 나아갈 방향을.⊙ 시대적 배경1920년대 조선사회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 과거 봉건사회의 신분제에 기초한 기존의 양반 대신 근대적 상업원리에 기초하여 돈을 번 새로운 양반, 즉 식민지 부르주아들이 일제의 비호 아래 득세하게 되며 광범위한 농민분해의 결과 대량으로 창출된 빈농민들은 봉건사회의 공동체와는 다른 새로운 각박한 삶을 강요당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산미증식계획 으로 한국인들의 식량사정은 매우 나빠졌으며, 과도한 수리조합비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농업구조와 유통구조까지 쌀 중심으로 개편되어 경제구조의 파행성이 심화되어 소작쟁의가 격화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일제의 가혹한 착취에 반대한 노동자·농민 단체들이 조직되고, 사회주의자들의 지도 아래 노동자 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노동단체는 일본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의 인상과 8시간 노동제의 요구가 중심을 이루었으며, 농민운동은 주로 소작인조합 중심으로 5할 이상인 고율 소작료의 인하와 소작권 이동 반대가 주목적이었다. 반일적인 성격을 띤 농민운동은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되면서 더욱 가열되었는데, 이 조직에는 소작인뿐 아니라 자작농들도 함께 참여하여 일제의 가혹한 수탈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제3권(근대·현대)], 경세원, 1998. 2, 126쪽, 138쪽⊙ 민촌 이기영이기영의 필명 민촌 의 사전적인 풀이는 봉건 시대에 상사람이 살던 마을을 뜻한다. 양반이 살던 반촌(班村)에 맞서는 낱말이다. 이것만 놓고본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적 빛깔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김상선, [민촌 이기영 문학 연구], 국학자료원, 1999. 11, 16쪽프롤레타리아 문학발전에 적극 기여한 이기영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어투를 정제된 것이 아닌 농민들의 일상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그의 유학경력이나 인텔리적 근성에 의해 간혹 사용된 용어를 제외하면 말이다.그는 충청남도 아산군의 가난한 농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고전소설과 신소설 작품들을 탐독하는 과정에서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1911년 봄부터 시작된 5년간의 방랑생활은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목격하고 많은 생활체험을 쌓았다. 192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다가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1923년에 귀국한 후 문학수업을 진행하였다. 이기영은 1924년에 단편소설 [오빠의 비밀편지]가 잡지 사 주최의 현상모집에 당선된 것을 계기로 하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잡지 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 밑에서의 조선인민의 비참한 생활처지와 새 사회에 대한 지향을 반영한 [가난한 사람들](1925)을 비롯한 여러편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다. 1925년 8월에 가 창립되자 이기영은 거기에 망라되어 문예비평활동과 작품창작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발전에 적극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 창작한 단편소설 [쥐이야기](1925), [민촌](1925), [농부 정도룡](1926), [농부의 집](1927) 등에서 작가는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빚어낸 불합리한 사회현실을 예리하게 폭로하였으며 착취받고 압박받는 인민들에 대한 동정과 착취계급에 대한 증오, 새 사회에 대한 지향을 생동하게 반영하였다. 지주, 자본가계급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노동계급과 농민의 단결을 이룩할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형상적으로 밝힌 단편소설 [원보](1928)와 선진적 인텔리의 영향에 의한 제지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과 투쟁을 반영한 단편소설 [제지공장촌](1930)은 이기영의 창작에서는 물론 이 시기 프롤레타리아 소설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또한 1931년에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우리나라 농촌현실을 생동하게 반영하고 조선인민의 의식장성과정과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에 대한 지향을 구현한 중편소설 [쥐불], ([서화])을 창작하였다. 장편소설 [고향]은 이기영의 대표작이며 해방전 우리나라 프롤레타리아 소설문학을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의 하나이다.{) 박종원 외, [조선문학개관下-북한문학편], 온누리, 1988.
    인문/어학| 2004.08.31| 4페이지| 2,000원| 조회(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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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시가] 찬기파랑가-기파랑은 화랑인가, 불승인가
    《 耆婆郞은 화랑인가, 불승인가 》讚耆婆郞歌의 '耆婆郞'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기록된 것이 없어, 그 해석이 실로 다양하다. 우선, 耆婆郞을 말하기 전에 讚耆婆郞歌를 지은 忠談師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창작자의 사상이나 견해는 보통 작품 안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발표문에서는 忠談師를 '불교적인 제사장'으로 보았으나, 그 외에도 耆婆郞을 모셨던 낭승이나 검소한 승려, 미륵세존을 숭앙한 승려, 왕사를 거절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매한 인격자인 동시에 통치권에 타협하기를 꺼린 민중편에 선 승려, 안민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호국애민사상을 지녔던 지성인등의 다양한 해석이 있다. 물론, 우리는 忠談師의 속성이나 본명은 물론 僧名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趙芝薰(조지훈)이 일찍이 지적한 바와 같이 '僧 忠談'으로 표기되지 않고 '忠談師'로 불려지고 기록된 점, 화랑을 찬모한 '찬기파랑가'를 지어낸 사실, 화랑을 대칭하는 미륵세존을 신앙의 주 대상으로 삼았던 것 등을 감안하면 낭도승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이제 작품의 주인공 耆婆郞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노래에 송백과 같은 눈과 서리도 능히 이겨내는 굳은 절개를 지닌 고매한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김선기의 풀이{당대의 실존인물 '김기'로 보는 견해}는 지나친 비약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배제하기로 하겠다.) 양주동은 자전적인 해석으로 늙은이, 스승, 위대한 인격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耆를 통해 오래 살라는 '긴 목숨'을 희구하는 뜻이라고 보았으며, 다음으로 詞腦歌를 고려하여 해석한 견해가 있다. 불교신앙을 중심내용으로 드러내는(균여의 詞腦歌는 전편이 보현보살의 소망을 드러냄) 詞腦歌의 입장에서 예찬한 인물이란 불가의 세계에 나오는 인물이나 위대한 불승으로 상상할 수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역시 무리한 해석인 것 같다.다음으로, 耆婆郞의 '郞'과 작품 내의 花判의 '花'에 초점을 두어 화랑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작품에서는 정신적인 고매함 등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外樣은 없다. 이로 인해 화랑이라는 견해 뿐 아니라 '위인 찬양가'로도 확대하여 해석하기도 한다.또한, 당대는 신라왕조의 위기였으며, 경덕왕이 鄕歌라는 표현을 피하면서 굳이 '其意甚高'라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노래가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찬양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와 어떤 형태로든지(위기상황을 타파할 영웅을 바라는 것이라든지..)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인문/어학| 2004.08.31| 1페이지| 1,500원| 조회(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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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음악과무용감상] 문화 유산 공연 감상
    저는 처음에 이번 레포트의 주제인 '전통회화', '전통무용', '전통음악'중에 '전통음악'에 관련된 공연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전통회화'같은 경우에는 미술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 있을 때 감상해야 각각의 그림이 얼마나 완성도 높게 잘 그려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선뜻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기초지식이 없는 상태로 보았을 때, 오히려 잘못된 감상관점이 자리잡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움이 앞섰습니다.그리고 전통무용도 전통회화와 마찬가지로 현대무용과 비교해 가며 전통무용만의 독특한 특징이나 특성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한데, 그러한 시각이 저에게는 아직 갖추어져 있지 못해서 공연을 보는 동안 따분한 시간만 될 것 같았고, 자칫 잘못 감상하면 오히려 전통문화에 대해 나쁜 시각을 가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에 비해 음악은 비록 서양음악이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많이 접해 왔으며, 판소리나 타령 등 작은 범주이지만 들어 본 전통음악도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비해서 그다지 부담감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 특별한 사전지식이 없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전통음악'에 관련된 공연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음악도 그렇게 쉽게만 생각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생각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아서 우선은 인터넷에서 여러 가지 공연 정보를 알아본 후에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전통공연에 관련된 사이트를 찾으며 웹 서핑을 하던 중 정동극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정동극장은 중학교 때 숙제 때문에 한번 찾았었던 기억이 있는 곳이며, 또한 뉴스나 신문 등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왔던 곳이라서 좀더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정동극장에서 하고 있는 전통공연은 『전통예술무대』라는 타이틀로 풍물, 전통무용, 기악 등으로 구성한 A, B 2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하는 『상설국악공연』중에는 '가야금 독주회'가 있었는데, '가야금 독주회'는 왠지 모르게 따분하고 졸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우리음악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나온 편견이지만, 기왕 공연을 볼 것이라면 제 마음에 들고 흥미를 느낄 수 있을만한 공연을 보고 싶었습니다.정동극장의 공연은 작은 카테고리로 구성되어 있는 공연이기 때문에 전통공연에 관해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을 것 같았고, 각 공연에 주어진 시간이 적기 때문에 깊이 있는 지식이 없이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동극장의 2가지 프로그램 중에 좀더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을 동시에 볼 수 있는 A프로그램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공연 당일 날 정동극장에 들어서자 국내 관람객보다 외국인 관광객이 대다수의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었는데,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통공연에 대한 무관심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공연이 시작할 시간이 되어 자리에 앉자 제목을 알 수 없는 음악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 음악은 다소 소란했던 공연장을 조용하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그리고 무대의 오른쪽 편에 설치되어있는 큰 전광판을 통해 보여준 인사말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의 3가지 언어였습니다. 월드컵 시즌을 고려해서 외국인 관광객까지 배려한 극장측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공연이 시작된 후에도 각각의 세부공연에 대한 설명을 전광판을 통해 보여주어서 그 공연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관람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전통예술무대』중에서 처음으로 본 정악 합주는 서양음악 중에 소규모 오케스트라 연주와 비슷하다고 느낄 만큼 여러 가지 악기를 사용하는 조화로운 연주였습니다.저는 여러 가지 전통악기로 합주를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으며, 이전에는 우리나라 악기는 농악놀이를 제외하고는 각각 한가지 악기로 독주를 하거나 유사한 악기 한두 가지로만 연주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우리의 전통악기도 서양의 오케스트라처럼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신기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처음에는 그 조화로운 소리만 감상하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천천히 각각의 악기 하나하나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합주를 하면서 각각의 악기가 어떤 소리를 내며 그 소리가 전체적인 음악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고, 그 악기만의 독특한 음색을 느껴보고 싶어서였기 때문입니다.연주자의 손놀림을 눈으로 따라가며 합주를 하고 있는 모든 악기의 음색을 느껴가면서 음악을 감상하자 좀더 깊이 있게 연주를 느낄 수 있었고 너무나 다른 독특한 음색이 하나가 되어서 더욱 아름다운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냄을 온몸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다음으로는 부채춤을 보았는데 부채춤은 다른 전통무용에 비해 비교적 많이 접해 본 것이라 처음에는 그다지 흥미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채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형형색색의 의상과 부채가 눈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현란한 몸동작이 저를 공연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그런데 부채춤을 출 때 부채를 들고 여러 가지 문양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무용수들이 걷거나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듯 진행되는 춤을 보여주기 위해 발을 땅에서 완전히 떼지 않고 바닥을 스치듯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으며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었으나, 그 모습에서 저는 실제로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특히, 부채춤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 학예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 한두 번씩은 다 경험 해보는 것이라서 쉽게만 생각하였었는데 그 정교한 움직임과 몸짓 하나하나를 보았을 때 이것 역시 쉽게만 볼 수 있는 공연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부채춤을 보며 새로이 느낀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인상깊게 기억되는 공연이 바로 3번째 공연이었던 '사물놀이와 관현악 연주'였는데 이전에는 사물놀이와 관현악 연주를 단 한번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무대 앞쪽은 사물놀이패가, 그리고 뒤쪽에는 관현악 악단이 자리를 잡고 연주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연을 보고 있었는데 관현악의 서정적이고 다소 차분한 느낌의 연주와, 사물놀이만의 특색인 신명나고 흥겨운 연주가 어우러져 생각지도 못했던 조화를 보여주었습니다.그리고 앞에서 했던 정악합주 공연에서 보았던 악기들을 다시 볼 수 있었고, 고등학교 축제 때 마지막으로 보고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사물놀이 공연을 보게 되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관현악 연주가 기본 바탕이 되어 사물놀이 연주가 진행되었는데 관현악 악기 중에 어느 하나도 자신의 소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소리의 조화를 생각하며 연주를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그리고 조였다 풀었다 하는 사물놀이의 진행방식을 연주자들이 잘 나타내 주어서 우리음악이 조화로운 것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화 속에서 기교적인 부분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으며 그 기교적인 부분조차도 조화롭게 들릴 수 있도록 연주할 줄 아는 맛깔스러운 연주를 해낼 수 있음을 듣고, 또한 볼 수 있었습니다.다음으로 살풀이는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조지훈 님의 '승무'라는 시를 통해서 우리민족의 한이 승화되어 녹아있는 춤이라고만 언뜻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풀이는 공연자 혼자서 그 자신이 겪어 온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 등을 춤 속에 주입시켜서 보는 사람들도 그 한풀이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이번에 본 살풀이 공연은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동시에 같은 동작을 연출하는 공연이었는데, 그것은 한사람만의 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사람이 서로의 호흡을 느끼면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색다른 묘미를 느끼게 되어 흥미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흰 옷을 입고 여러 명이 동시에 같은 동작을 하면서 하얀 천을 나부끼는 모습은 정말이지 한 마리의 하얀 새가 날아다니는 듯 하였고, 참 깨끗한 느낌을 주어 '백의민족'이라는 말에 진정으로 걸맞는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다섯 번째로 보여준 가야금과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전통성악 공연은 전부터 알고 있었던 새타령을 들려주어서 연주도중에 알고 있는 부분이 나오면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며 따라 불러보기도 하면서 공연을 보았습니다.가야금이나 거문고 연주는 졸리고 따분할 것이라는 생각에 우면당에서 하는 '가야금독주회'는 포기했었는데, 가야금을 새롭게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 것 같아서 아쉬움이 더욱 컸습니다.그래도 예전의 고정관념을 깨어버린 정동극장에서의 연주가 흥겹게, 신나게 들렸던 이유는 타령을 연주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예상과는 달리 너무 신명나고 흥겨움을 선사하는 공연이었으며 잘못되었던 제 생각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공연이었습니다.다음으로 삼고무는 종로에서 전통행진을 재연할 때 사용하는 것 같은 커다란 북을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큰 북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압도당하며 심장박동도 덩달아 빨라졌습니다. 그 순간 무대 전체에 조명이 켜지면서 삼고무를 연주하는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보였습니다.마치 로보트처럼 동일한 그들의 움직임에 놀란 것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3개의 북이 자신의 몸과 하나인 것처럼 너무나도 능숙하게 연주하는 숙련된 솜씨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큰 북 하나로도 삼고무 연주와 같은 소리를 연주해 낼 수는 있지만,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하나의 북을 3개로 나누어 삼면의 방향으로 배치하여 몸의 유연성을 최대한 보여주면서 연주하는 모습은 인체의 아름다움과 음악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체능| 2003.05.05| 5페이지| 1,500원| 조회(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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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미니즘] '가족사유재산국가의기원' 을 일고 평가A좋아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난 후에 머릿속에 계속 머물렀던 생각은 그동안 읽어왔던 페미니즘 서적과는 사뭇 다른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수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여성의 지위가 낮아지고 남성에게 종속되게 된 이유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였으며 가족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우선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제목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선사시대 문화의 단계들을 제시합니다. 물론 이 때에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후에 가족이나 국가의 모습이 왜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탐구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문화단계를 기술하였다고 보여집니다.그 다음에는 바로 가족이라는 카테고리가 제시됩니다. 모오간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여자가 모든 남자에게 또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에게 속해있던 원시 상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무규율 성교라고 하는데 가족제도가 확실하게 자리잡혀 있는 지금으로써는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러한 무규율 성교로부터 가족형태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선 가족의 첫째 단계인 혈연가족은 혼인 집단이 세대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이 모두 형제·자매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부부입니다. 물론 혈연가족은 사라졌지만 그 이후 가족의 전체적인 발전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숙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푸날루아 가족이 있는데 여기서 푸날루아라는 말은 한 계열의 형제나 자매들이 일정한 수의 남편·아내와 공동의 혼인 생활을 할 때 동성끼리 '친근한 동료·동반자'라는 뜻으로 서로를 부르던 말입니다. 이는 이전의 혈연가족에 비해 부모·자녀간의 성교를 배제한 조금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혼이 존재하는 한 혈통은 어머니 편에 따라서만 확정될 수 있으며, 모계만이 인정됩니다. 이런 모습들은 가부장제가 확립된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며, 여성 역시 한 집단 내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다음으로는 대우혼 가족이 있는데, 대우혼 가족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생활 하지만 부부의 인연은 쌍방이 다같이 용이하게 끊을 수 있으며, 자녀는 어머니에게만 속하는 형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여성지배가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나 재부가 증가함에 따라 남편의 지위가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모권은 폐지되고 말았으며, 결국 부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부권적 상속이 도입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족의 발전상을 살펴보면 점차 혼인의 범위가 줄어들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러한 경향이 계속 되다보면 결국 한쌍의 부부만이 남게 되어 일부 일처제 가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른 것으로써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후에 직계상속인으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가족제도는 대우혼과는 달리 혼인 유대가 더욱 공고합니다. 그러나 단혼은 역사상 진보라는 얼굴 대신 노예제 및 사유재산과 함께, 한 개인의 발전이 다른 개인의 억압을 통해 실현되는 사회를 열어 놓게 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리고 현대사회는 순전히 개별 가족이라는 그런 분자로만 구성된 집단인 것입니다.이와 같이 혼인에는 대체로 3개의 주요형태가 있는데, 야만시대에는 군혼, 미개시대에는 대우혼, 문명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있었습니다.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는 대우혼과 일부일처제 사이에 여자 노예에 대한 남자의 지배와 일부다처제가 있었습니다. 즉, 중세기 말에 이를때까지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집단 전체와 이미 정혼관계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군혼역시 그 집단의 범위만 축소된 것 뿐이지 실정은 같았으며, 대우혼 역시 보통 어머니가 자식들의 혼사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사적 소유가 공동소유로부터 승리를 거두고 재산의 유증에 대한 관심이 나타남과 더불어 부권과 일부일처제가 지배하게 되자 결혼은 전적으로 경제적 타산 여하에 좌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매매혼의 형식은 소멸했으나 실질적으로 그것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까지도 그의 인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재산에 의해 평가되었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조건을 고려하게 되는 결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많은 문제 거리가 되는 화두중의 하나입니다. 혼수문제로 인하여 생기는 가정 불화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의 시작이 일부일처제의 확립과정에서 생겨난 것임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그 다음으로는 이로쿠오이 씨족과 그리스인의 씨족이 나타나는데 그 각각의 사회제도나 특징에 관하여 서술하고있는데, 그리스인의 씨족부분에서는 씨족법 전체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 이유가 부권제가 실시된 이후 부유한 여자 상속인의 재산이 여자와 함께 그 남편이, 즉 다른 씨족이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어려워서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씨족법의 기초가 흔들리자 자녀들이 재산을 상속하는 부권제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은 한 가족에 의한 재화의 축적을 조장했고, 가족을 씨족에 대항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제 5장에는 아테네 국가의 발흥이라는 소제목으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화폐경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화폐경제는 자연경제에 기초한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적 생활양식을 침식했고, 그러므로 씨족제도는 화폐경제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영세농은 그들을 보호해주던 씨족적 유대가 약화됨으로써 영락하게 되었고 채무 청산을 위해 자기 자녀들을 외국에 노예로 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녀를 팔아 넘긴다는 것이 부권제와 일부일처제가 나타낸 첫 번째 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폐를 발명함으로써 실은 자기가 새로운 사회적 세력, 즉 사회전체가 머리를 숙여야 할 유일한 일반적 세력을 창조하게 된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며, 고대의 씨족제도는 화폐의 개선 행진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씨족제도의 종말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아테네인들에게서는 국가의 발생은 국가형성 일반의 가장 전형적인 모범입니다. 그것은 이 국가 형성의 모든 본질적인 상세한 점을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인문/어학| 2003.05.05| 3페이지| 2,000원| 조회(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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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4.19혁명과 참고싸이트
    ■4·19혁명해방이후 우리 나라 역사에 길이 빛나는 시민 혁명은 4·19혁명이다. 이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학생 중심적인 개혁 혁명이었다. 3·15부정 선거에 의해 촉발한 4·19혁명은 당시 여러 사회적 요인들이 작용하였다.*4·19혁명 발발 요인1.사회적 요인1) 농촌 경제 파탄으로 인한 인구도시 집중화2) 500만 북한 피난민 남하하여 생활기반 전무3) 상이군경, 전쟁 미망인 (59만명), 제대군인 실업자 폭증2.경제적 요인1) 6·25전쟁으로 기간 산업시설 파괴 (생활물자 태 부족)2) 정경유착, 부정부패 만연, 경제질서 파괴3) 미국 경제 원조 의존 권력 등 독식 횡포※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로 자유당 정권 민심 이반- 4·19혁명의 경제·사회적 원인은 미군정에 의하여 특혜를 받은 친일분자 중심의 새로운 지배층과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피지배 계층간의 갈등과 모순의 심화에 기인한다. 사회·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부패로 국민들은 개혁을 원했고, 그로 인해 혁명이 시작되었다.3.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부패4·19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원인은 종신집권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그는 해방이후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종신집권과 독재권 강화를 위해 온갖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를 감행함으로써 점차 국민의 지지를 상실해갔다.6·25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공언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피난을 감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다. 또한 국민방위군사건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일대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 시작하였다.1952년 대통령직선제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 연금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백골단·민족자결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 1956년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승만-이기붕'과 민주당의 '신익희-장면'이 대결하였으나 신익희 후보가 선거 10일전 갑자기 사망하여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 면이 당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4대 선거에 야당의 후보로 나섰던 조병옥이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해졌고 모든 관심은 부통령 선거로 모아졌다. 부통령 선거가 중요시되었던 이유는 당시 이승만이 고령이어서 대통령직을 대신할 부통령의 역할이 커졌고, 다음 선거에서 현직 부통령이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3.15부정선거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지지 성향과 투표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가는 것을 이용하여, 5월중에 실시해야 할 정부통령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하였다.내무부장관을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음모의 내용은, ① 4할 사전 투표 ② 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③ 자유당의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위협 ④ 야당참관인 축출 ⑤ 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⑥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⑦ 투표함 바꿔치기 ⑧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⑨ 득표수의 조작 발표 등이었다.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의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함으로써 폭로되었다. 그사이에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사함으로써,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3월 17일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하였으나,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도화선4·19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불붙여졌다.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일인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교 학생은 당국의 지시로 등교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였던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본부, 그리고 자유당 본부 등을 습격하여 불태우거나 파괴하였다. '서대문경무대'로 알려진 이기붕의 집도 습격하였으나 이 곳에서는 정치폭력배들이 데모 학생들을 몽둥이로 살상까지 하였다. 서울 시내는 완전히 무정부상태였고, 모든 질서를 회복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다.이 날의 구호는 “3 ·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등 독재규탄과 민주수호 및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서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을 진주시켰다. 사망자 약 100명에 부상자 약 450명에 달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온 데모는 계엄군의 진주로 다음날부터 일단 멈췄다.그러나 4월 23일 서울시 주관으로 4·19희생자에 대한 합동위령제를 올리자, 일제히 이에 반발 “어용위령제는 4·19희생자에 대한 모독이다. 학생들이 주최하는 위령제를 다시 거행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한편, 23일 부통령 장면이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퇴하자, 이기붕도 자신의 부통령당선을 사퇴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고, 이승만도 자유당총재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그러나 결코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한다거나, 대통령직을 사퇴한다는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이러한 자유당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의 분노가 다시 일기 시작하였고, 25일 서울의 각 대학 교수 259명이“대통령 이하 3부 요인들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데모에 나섰다. 이 날의 교수 데모는 자유당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반군중들은 계속해서 야간 데모를 벌이며“자유당정권 물러가라”고 외쳤고, 26일에는 다시 학생들이 거리를 메워 태평로는 4·19 때와 같은 혼란이 거듭되었다.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주선하여 학생과 시민대표 5명이 이승만과 면담하고 시국수습을내 1987년의 6·10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실천적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특히, 1960년의 4·19와 1987의 6·29가 혁명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혁명의 도화선을 이끌어냈지만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국민의지가 중산층까지를 포함한 전국민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4·19혁명과 6·29는 향후 민중 혁명의 성공모델을 제시해 주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세계사적 맥락에 있어서도 4월혁명은 세계 제2차 대전 후 신생 독립국 민중의 민주주의적 정치 의식의 성숙을 과시한 것이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전후 민족 해방운동과 흐름을 같이 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4월혁명의 현대적 의의1960년 4월혁명은 한국 민중의 결집된 힘이 최초로 압제의 틀을 깨뜨리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적 의의를 지닌다. 즉, 한국 역사상 최초로 학생들이 주체가 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성공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4월혁명은 압제자의 허물을 벗기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를 변혁시키는 정치 구조의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이는 혁명의 주체 세력인 학생들이 정권의 주체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한 까닭이다. 민족사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했으면서도 4월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불리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4월혁명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4.19 이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민중들의 실천적 움직임이 성숙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4월혁명은 지속적인 자기 주장, 자기 극복의 과정을 거치며 한국사의 흐름속에서 항상 현재적 의미를 가지고 부활하는 것이다.*4·19의 역사적 성격-정치 민주주의·자유 민주주의 혁명우선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4월혁명은 진취적 의미의 정치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이다. 물론 1948년 건국 때 우리는 정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이념의 헌법을 제정하여 이에 기초했다. 그러나 이념과 현실세계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민주 공정의 혁명도 불가능하고, 대중의 미성숙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불가능하며, 현실의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은 진취적 지식인과 학생들에 의한 옆으로부터의 혁명만이 독재와 외세 의존과 침체를 타개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민족주의론이 성행하였다. 4월혁명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선두에 서고 시민들이 호응했으며 전국민이 지지한 옆으로부터의 혁명이었으며, 자유 민주주의 혁명이었고, 민족주의 혁명이었다.*이처럼 4·19는 민주주의, 민족주의에 입각한 현대사에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기념일로 지정하고 역사관을 지어 그 뜻을 후대에 널리 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정신을 계승하여 보다 나은 학생 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학생운동은 어떠한가?■요즘 학생운동은?-학생 운동하면 우리는 한총련을 생각한다. 한총련은 전국 단위의 조직을 갖고,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는 단체이다. 한총련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재 발족으로 시작한 단체이다. 우선 전대협에 대해 살펴보자.*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고조되자 서울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된 이한열군의 장례식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7월 5일 연세대학에서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국대학생조직을 건설할 것을 제안하였다. 서대협 의장 이인영의 주도로 8월 19일 충남대학에서 전국 95개 대학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 발족식을 가졌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조국의 평화통일, 민중연대, 학원자주화, 백만학도의 통일단결 등을 활동목표로 내걸었다.전대협은 1987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 1988년 8·15남북학생회담 시도, 1989년 임수경의 평양축전 참가, 1990년 8·15범민족대회 추진 등 조국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다. 핵심간부들에 대한 구속·수배 등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매년 1회씩 거행되는 전대협 발족식은 해마다 규모가 커져 19
    사회과학| 2003.05.05| 8페이지| 1,500원| 조회(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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