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토지이용상 문제점무엇보다도 먼저, 지적되는 것은 그간 우리사회의 압축성장과 도시화의 급진전으로 토지수요가 급증하여 지가의 급등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용용지 부족과 토지공급의 비탄력성, 토지수요의 불안정성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60년대 이후 도시화·산업화의 급진전 속에 진행된 지가상승현상은 '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지난 '77년에서 '97년까지 20년간의 지가상승은 약 8.2배로서 일반 소비자물가의 4.8배보다 훨씬 컸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90년대 들어 지가상승폭은 크게 둔화되긴 했지만, 지난 시대 우리 나라 토지시장에는 지가상승문제가 자못 심각하게 나타났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아직도 개발이익환수가 미흡하여 토지 등 부동산이용과 개발에 따른 자본이득이 불균등하게 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과거에 비해 우리 나라의 자본이득의 규모가 크게 줄기는 했으나 아직도 '91년의 경우 GNP의 1.2배인 263조로 나타나는 등 그 규모가 상당히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 현행 토지세제와 각종 부담금들의 자본이득 환수기능은 매우 미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복잡 다기하고 이원화된 토지이용·관리체제로 인한 비도시지역의 무질서한 개발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 토지이용과 관리에 관해서는 약 70여개 법령에서 180여 가지의 지역·지구·구역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일부지역의 경우 다수의 지역·지구·구역이 동시에 중복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토지의 효율적 이용을 저해하고 토지이용규제의 실효성을 저하시키기도 한다.토지정책의 회고1. 근대화 이전시대우리의 토지정책은 시대를 달리하며, 변화해 왔다. 과거 왕권시대에는 왕토사상에 기초하여 국유제를 바탕으로 전제제도 등이 운영되어 왔다. 특히 이 시대에 토지제도의 문란은 곧 왕권의 몰락을 초래할 정도로 토지제도의 성패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다. 이 시대 토지정책의 핵심은 국가의 토지를 어떤 계층에게 어떻게 나누어 주고, 토지에 기초한 조세를 어느 수준으로 거두어들일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현대적 토지제도의 도입기는 일제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토지조사사업 실시와, 「시가지계획령」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도입되었다. 근대적인 측량기술이 도입되어 지적의 과학화와 전국지도 제작이 가능하게 되기도 하였다. 새로이 등기제도가 마련되고, 토지세제체계가 확립되기도 하였다. 이 때 도입한 「조선시가지계획령」은 우리 나라 도시계획제도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이 도입된 토지제도들은 일제가 우리민족의 식민통치와 토지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반감되고 있다.2. 건국과 전재복구시대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우리 나라 토지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근간인 재산권의 보장과 그 제한이 제정헌법에 명백하게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에 역사적으로 뿌리깊게 인식되어온 왕토사상을 깊이 있게 성찰하지 않고, 서구적인 사소유권제도를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는 일부 지적도 있지만, 이는 우리경제가 자본주의체제로 쉽게 전환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이때에는 농지분배에 있어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헌법에 규정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현상의 하나였다.3. 1960년대1960년대는 본격적으로 토지정책의 기반이 조성된 시대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에는 본격적으로 시행된 경제개발을 원활히 지원하기 위하여 효율적인 토지이용과 개발을 도모하는데 토지정책의 중점이 두어졌다. 우선, 도시형 토지수요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현대적 계획 및 개발제도들이 속속 제정되었다. 도시계획법.건축법.토지수용법 등이 1962년에 제정되고, 국토건설종합계획법이 1963년, 그리고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 1966년에 제정되었다. 또한 공업용지 등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수출공업단지개발조성법(1966)」등 각종 단지조성법들이 제정되었던 것도 이때였다. 한편, 경인고속도로(1966)와 경부고속도로(1969)등 건설과 관련하여 토지투기와 지가상승이 문제되자 투지방지 위한 「부동산투기억제에관한특별조치법」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토지정책은 개발이념을 보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토지정책의 방향과 내용이 단편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 치우쳤다는 평을 받고 있다.4. 1970년대1970년대는 본격적인 토지정책이 형성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경제의 지속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각종 토지 관계 법령들이 새로이 제정되었다. 우리 나라 국토이용관리의 골격을 형성하는 국토이용관리법(1972)이 제정된 것도 이때이며, 산업화에 따른 공업용지의 원활한 공급을 위하여 산업기지개발촉진법(1973)과 공업배치법(1977)이 제정된 것도 이때이다. 한편, 지속적인 도시화로 심각해지는 주택문제해결을 위하여 주택을 원활히 공급하기 위하여 주택건설촉진법(1972)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토지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토지금고법(74)을 한국토지개발공사법으로 개정(78)하여 '한국토지개발공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때 눈에 띄는 것은 환경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환경보전법(1977)이 제정되고, 오늘날 전면 재조정의 진통을 겪고 있는 개발제한구역제도가 도입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는 부동산시장 과열에 따른 투기대책도 강력히 추진되어 1974년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1.14조치)가 취해진 바 있다. 중동건설붐으로 외화자금이 유입된 1978년에는 토지거래허가·신고제 도입 등 8.8조치가 단행되기도 하였다.5. 1980년대1980년대는 제도정비시대라 할 수 있다. 80년대 초반, 제2차 오일쇼크를 겪으며, 침체된 주택경기활성화 정책이 추진되어 택지개발촉진법(1980)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경기활성화가 이루어진 1983년 이후에는 잇따른 부동산 투기억제대책 추진에 이어 토지거래신고제('84) 및 토지거래허가제('85)가 본격 시행되기도 하였다. 특히 1980년대 후반에는 올림픽 특수와 무역수지 흑자 등의 영향으로 지가가 급등하는 등 부동산시장의 혼란이 심각하였다. 이에 따라 1988.8.10에는 부동산 투기근절을 위한 장단기 종합대책을 발표하여 검인계약서 실시 및 등기의무화, 양도소득세강화, 종합토지세.공시지가제도 도입 등이 발표되고, 토지공개념제도 도입 및 5개 신도시 건설계획 등이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개발이익환수에관한법률.토지초과이득세법이 제정되게 되었다.
-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의 등장 배경, 등소평의 경제체제개혁과 관련된 기초적 이론, 경제 체제 개혁의 추진 방안의 전반적인 사항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Ⅰ.등소평의 개혁 · 개방 정책의 등장 배경중국은 과다한 인구, 부족한 농지의 농업 생산력 등으로 인해 경제적 후진성을 면치 못했으며, 문화 대혁명, 사인방 등 극좌파의 극성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감이 모든 국가적 활동을 저하시켰고 이로 인해 국가 발전을 위한 경제건설도 매우 저조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경제적 건설이 우선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택동과 주은래가 사망한 후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개혁 주도 세력은 중국의 현실적인 사회, 경제적 현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기 위해서 과거 30년의 사회, 경제 정책에 대해 반성을 해야 했다. 즉 그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서 경제건설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중국을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끌어 올리려는 욕구가 강력했던 것이며, 이것이 곧 등소평의 개혁, 개방노선을 초래하게 했던 것이다.Ⅱ.등소평 체제의 성립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하자, 모택동은 부총리 등소평을 제쳐놓고 서열 제6위인 부총리 화국봉을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였는데 그 의도는 문혁파 사이의 대립, 투쟁을 완화하여 정치안정을 도모하는 가운데, 그가 문화대혁명에서 공고히 다지고자 하였던 정치우위의 혁명노선을 실현할 수 있는 인물로 화국봉을 지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사망과 4인방 등 문혁 강경파의 실각 등을 배경으로 중국정치 무대에 재등장한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는 당시 사회에 팽배했던 경제건설의 욕구를 배경으로 현실주의적인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였다. 이에 따라 화국봉은 모택동의 혁명사상 즉, 紅을 우선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계승을 열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 행정부, 군, 일반사회에 광범위한 실용주의지지 세력의 압력으로 본래 의도와는 달리 실용주의 노선의 경제정책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하는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상품경제의 발전을 위한 조치로 결코 자본주의 체제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회주의 공유제를 주체로 계획경제체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체제와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불균형 성장 계획을 추진하여 전체가 부유해지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성실한 노동, 효율적인 경영에 의해서 일부사람, 일부 지방이 먼저 부유해짐으로써 다른 사람, 다른 지방의 모범이 되는 자극을 주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것으로 본다. 이처럼 분배, 소득의 불균형들을 인정하는 중국 지도자들의 입장은 사회 계층과 계급이 형성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써 그들 계층, 계급 사이에 형성될 수 있는 갈등, 소외 등 마르크스가 중요시 하였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다섯째, 효율적인 경제 건설을 위해서는 안정된 사회 환경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 있는 중국에는 불안정한 요소가 많은 까닭으로 사회의 안정과 인민의 단결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며 그러한 안정과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특히 민주화와 법제화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화와 법제화의 확립은 중국 내부에 아직도 도사리고 있는 봉건적 요소, 전제적 요소를 조속히 타파하는 것과 함께 지난날 모택동 시대 혁명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의 비법적이며 비인류적인 잔재의 청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이상의 다섯 가지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서의 지도 방침을 보면 모택동 시대와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공업화의 중국을 건설하는 것이며 현대화된 선진 공업국으로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문화 대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모택동 사상의 한계와 문제점은 모택동의 사망과 더불어 과도기 체제를 거쳐가면서 등소평의 개혁노선이 새로운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해가는 과정으로 해서 정리되었으며 모택동 사상의 격하를 통하여 새문제, 계층간의 대립, 갈등, 투쟁이 그 초기적 현상으로 발생하여 격화되기 마련이다. 오늘날 중국 지도자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합리화,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등소평은 오늘날 중국에 있어서 제도상 국가가 보장해야 할 일은 정치생활의 민주화와 아울러 경제 관리의 민주화, 사회 생활의 민주화이며 그럼으로써 현대화 건설 사업의 순조로운 발전을 추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화 건설의 순조로운 진전을 위하여 당과 국가는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생활의 민주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경제적. 민주적인 경제 제1주의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Ⅳ. 등소평의 개혁 · 개방 정책의 내용이제 부터는 등소평 집권이후부터 추진해온 개혁 개방정책의 실제는 무엇인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등소평 체제는 인민들의 경제발전 및 생활향상에 대한 욕구와 중국의 현대화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혁 개방정책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 개방정책은 주로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한 경제정책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이는 대내경제의 개혁정책과 대외경제의 개방정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등소평 체제가 추진하고 있는 대내경제의 실용주의적 개혁정책을 경제개혁 정책의 전제로서의 정치개혁과 경제체제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들로 나누어 살펴본다. 이후에 개방정책에 있어서는 중국경제의 4개현대화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개방정책의 기본전략과 대외개방정책의 실제내용으로 나타난 경제특구 및 경제개발구의 설치 및 운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1) 정치체제개혁중국과 같은 일당독재 하에 있는 사회주의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경제관계는 정치관계와 밀착되어 있다. 생산수단이 공유화되어 개인경영이 한정되어 있는 중국의 상황에서 모든 경제활동은 정치적인 측면 즉, 당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이 경제정책의 계획, 결정 및 집행에 대한 판정권과 해석권을 갖는다. 따라서 당정제도에 대한 개혁은 등소평체제가 추진이것을 상부단위까지 파급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간부의 연소화와 전문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의사, 작가, 음악가, 과학자, 교육자 등이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것은 이번 대회가 처음이며, 11전 대회에서 선출된 노동자, 농민, 군경대표 중 90% 이상이 제거되고 대신 대부분 젊고 유능한 간부로 대치되었다.그 뒤 계속적으로 이러한 정책이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특히 1985년 제 12기 5중전회에서는 새로운 정치국 중앙위원 64명(중앙위원 29명, 후보위원 35명)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의 평균연령이 50.1세로 나타나 연경화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점과 대학, 전문학교 정도의 학력소지자가 3분의 2(48명)를 차지함으로써 지식화와 전업화도 강력하게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3. 당 정기구의 개편1982년 9월 당 제 12기 전 대회와 11월 제 5기 전인대는 등소평, 호요방, 조자양체제의 구축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당 및 정부의 정치적 행사였으며, 이에 따라 기구개편도 단행되었다. 모택동의 제도개혁이 조직간의 기능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에 반하여 등소평 체제의그것은 조직간의 기능을 분화하고 개인의 독단과 대중의 직접적인 참여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기구개편에 관하여 12전 대회에서 통과된 '당장정'을 중심으로 하여 집단지도체제의 확립, 당정기능의 분리, 간부의 연경화 등의 측면에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로, 집단지도체제의 확립이다. 등소평 체제는 37년간 지속해 왔던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당총서기제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문화혁명 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던 당서기가 1980년 2월 제 11기 5중전회에서 부활되어 당 정 군간의 주요 정책협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총서기는 당주석과 달리 중앙정치국회의와 그 상무위원회 회의의 소집만을 책임지며 이 회의들의 다른 구성원보다 큰 영향력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당주석제를 없애고 당서기를 부활한 것은 의사결정과 지도면에서의 권력분산과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둘째로, 당 정 기고한다는 것이다. 당시 총리 조자양이 6기 5차회의에서 행한 정부보고는 공작체제 개혁방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기업개혁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하여는 이미 규정하고 있는 기업의 권한을 견결히 보호하는 것 외에, 개혁의 중점을 기업의 경영기제 완비에 두어야 하며,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원칙에 근거해서 다종형식의 승포경영책임제를 실행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독립된 자주경영의 경제실체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공업기업의 개혁은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를 통해, 공유제라는 사회주의의 대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기업의 자율권 및 다종경영방식을 이용한 생산력 발전에 그 목표가 있다 하겠으며, 이는 농업체제 개혁과 동일한 목적추구라 하겠다.2. 경제운영기구와 제도의 개혁중국의 경제운영기구와 제도에 있어서의 개혁은 모든 경제체제개혁 가운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개혁의 목표도 대단히 중요하다. 중국은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정책을 결정한 이래 당 국가와 기업, 계획과 시장간의 관계에서 시종 명확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중국은 과거 장기간 전통적인 계획경제 관리체제 하에서 국가와 기업과의 관계를 유지해왔다.이와 같이 중국의 기업은 당 국가의 행정상 부속품처럼 관할되기 때문에 생산재소유권과 기업경영권이 합치되어 있고, 당 국가 대 기업의 관계에서 생산적 지휘는 완전히 국가가 직접 지시 하달해 나가고 있다. 1984년 10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2기 3중전회에서 , 중공은 사회주의 경제가 계획상품경제라는 말을 처음 밝혔다. 상품경제는 이론이나 실천면에서 시장의 작용을 경제운영기구에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당 국가와 기업관계는 기업이 국가의 계획관리와 시장조절의 이중적 지휘와 영향을 받으며, 당 국가와 기업 간의 관계는 밀접하게 이루어져 있다.그 후 1987년 10월 중공당 제13기 전인대에서 경제운영기구제도개혁의 목표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즉 중국 공산당은 "국가가 시장을 조절하고, 시장이 기업을 인도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서론최근의 자동화의 개념은 공장자동화를 의미하지만 최근에는 제품이 다양화되고 다품종 소량생산의 자동화를 의미하는 유연생산시스템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즉 기업은 과거의 양산효과에 의한 원가절감을 통한 대규모 시장수요를 창출하는 방식으로부터 현재는 다양한 수요자의 욕구를 만족할 수 있는 개성화,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이에 따라 기업의 환경도 변화되고 기업간, 국가간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따라서 자동화 개념도 다품종 소량생산의 자동화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으나 제조업체의 생산현장에서는 숙련근로자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산업에 쓰이는 로봇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로봇을 사용하는 주된 이유는 자동화를 위함이고 다른 이유들로는 인건비 절감, 제품의 질 향상, 지속적인 단순 반복작업이 가능하여 생산성 향상, 작업환경으로부터의 자유로움, 불량률의 감소등을 이유로 들을수 있다. 로봇을 이용한 자동화시스템은 많은 산업분야에서 산업용 로봇의 활용은 그 응용범위가 확대될 것이다. 이제 산업에 쓰이는 로봇의 응용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본론1. 로봇의 어원'Robot'이라는 말은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Karel Capek의 희곡 R.U.R.(Rosuum' s Universial Robots)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로봇의 어원은 체코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 'robota'에서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Capek는 그의 R.U.R. 중에서 모든 작업능력에서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면서 인간적「감정」이나 「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로봇이라고 불리우는 인조인간을 등장시키고 있다. 로봇은 언젠가 쇠조각으로 변하여 반항하는 정신을 발달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창조주인 인간을 전부 죽여 버린다고 하는 비극을 인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Robotics'라는 말은 로봇의 활용과 로봇 공학을 의미한다. 이 말은 미국 과학자이면서 작가인 Issac Asimov(1920.1.2.-1992.4.6)에 의해 1942년에 발간한 단편Runaround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950년에는 장편소설인'I Robot' 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서 Asimov는 로봇의 행동에 관한 삼원칙을 제안했다..제1원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제2원칙 :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에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제3원칙 :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과 제2법칙에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2 로봇의 정의1 로봇의 정의로서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말은 아직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로봇의 개념은 고대신화시대부터 있었으며 현재도 소설이나 만화 등에서 널리 쓰이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로봇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 반면 로봇 기술은 급속히 진보 발전해 가고 있기 때문에 로봇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기술개념은 현시점에서 계속 변화 확대해가고 있는 셈이다.현재의 로봇은 여러 목적의 로봇(해저, 우주탐사 등)중에서도 주로 산업에서 사용되는 산업용 로봇을 칭한다. 그외 로봇은 사전이나 공상과학 등에서 "기계인간"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좀더 실용적인 측면으로 정의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2 RIA(USA Robotic Industries Association) - "A reprogrammable multifunctional manipulator designed to move material, parts, tools or specialized devices through various programmed motions for the performance of a variety of tasks."3 JIRA(Japan Industrial Robot Association), AFRI(Association Francaire de Robotique Industrile), BRA(Britisn Robot Association) 등에서 각각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산업용 로봇이란 부품, 재료, 기구 등을 다루기 위해 고안된 재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기계적인 장치"라고 정의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4 역사적인 정의 - 공포를 주거나 유머스런 행동을 하는 융통성이 없는 기계 인간5 일반적인 정의 - 인간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인간을 지키는 철인 아톰과 같은 일종의 이상적인 기계6 Karel Capek의 정의 - 일할 수 있는 능력은 있어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을 닮은 것7 퀸 메리 대학의 스링그 교수의 정의 - 팔과 손을 가지고, 인간에게 프로그램 되어져서 여러 가지 연속 동작이나 운반 작업을 하고, 주위를 잘 보고, 애초부터 결정된 방법으로, 자기의 운동을 조절하여 움직일 수 있는 기계8 스링그 교수에 의한 로봇의 조건 - 인간에게 복종할 것, 물건을 잡거나 운반할 수 있을 것, 주의 상황의 변화에 응할 수 있을 것, 자기 스스로 움직여 돌아다닐 것9 JIS - 자동 제어에 의한 manipulation 기능 혹은 이동 기능을 가지며, program에 의해 다양한 작업의 수행이 가능한 기계3. 산업용 로봇산업용 로봇은 공장에서 사람 대신 일을 하는 로봇이다. 공작물의 설치나 분해 도장 용접 조립 등 로봇이 쓰이는 분야는 상당히 넓다. 작업수순을 메모리에 기억시켜 주면 그것을 그대로 흉내 내어 정확하게 몇 번이라도 반복한다. 로봇은 주로 '팔'과 '손' 동작을 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다.공간 안의 지정된 위치에 가서 손끝의 공구를 필요한 방향과 지정된 위치로 옮겨 공작물에 맞추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의 장치가 사용된다.원통좌표형 이라는 것은 카메라의 3각으로 목표를 겨눌 때의 움직임과 흡사하며, 극좌표형은 호스로 물을 뿌리는 동작과 흡사하다. 또한 직교좌표형은 크레인 게임기가 경품을 들어올리는 모습과 같다.특히 대형이나 소형 로봇 모두 수직다관절형 구조를 이용하는데 이것은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 세곳에서 베어링이 회전운동만 하면 되고, 왕복운동은 하지 않는다. 인간의 팔과 아주 흡사한 형태이다.또 팔을 90도로 굽히는 수평다관절형(스칼라로봇)도 급속히 증가하는 장치 중의 하나다. 이 장치는 구성 요소가 적어서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 작은 부품을 조립할 때 쓰인다.로봇의 팔에는 물건을 쥐거나 가공하는 여러 가지 손들이 달려 있다. 사람 손가락의 유연함을 본뜨는 고도화가 진행되고 있다. 부드럽게 접촉하거나 상대의 조건에 따라 적응하고, 인공감각을 갖추게 하는 다양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로봇에는 보통 유압식과 전기식, 공기압식이 있다. 무거운 물건을 다루거나 대출력이 필요할 때에는 유압식이 좋지만, 보통은 제어하기가 쉬운 전기식이 쓰인다. 또 각종 서보 모터가 사용된다. 공기압식은 작동이 빠르고 소형에 적합하다.4. 산업용 로봇의 사용.농업로봇(Plustech walking forestry manipulator){세계최초의 임업용 보행 메니퓰레이터이며, 다양한 지면 상태에 적절한 6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 작업하는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설계되었으며 자체 무게는 땅에 고르게 분포되어 땅의 침식을 막는다..이송로봇(크래인)부산항 물류센타의 주업무인 컨테이너 선박의 T.S(Transhipement) 즉, 환적기능을 본 로봇크레인이 자동 하역하면서 컨테이너 정보를 인식 판단한다. 동시에 정렬하면서 재선적을 하는 환적작업을 단독으로 수행하게 된다.{.벽면 이동로봇대형 구조물의 외벽에 부착하여 이동하면서 청소, 용접, 도장, 검사등을 수행할 수 있는 Wall Climbing Robot이다. 건설 현장의 구조물 용접 및 검사, 빌딩 외벽의 청소, 도장 및 검사, 기타 고소 벽면 작업에 적용할 수 있다.{.포장로봇(Blue Painting System)자동차용 경타이어 제조공정중 분진과 소음으로 작업 환경이 열악한 블루페인팅 공정을 무인 자동화한 것으로 인입되는 타이어를 종류와 모델을 인식판별하고 불량을 검사하며 백테 및 문자부분에 인공지능로보트를 이용하여 청색도장을 하는 머신 비전시스템이다. 한국 타이어에 납품한 본 시스템은 미국의 RAM사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성공한 것 이다.{.적제로롯(짐도리)2개의 스태핑모터를 이용한 화물의 이송과 저장, 사물의 2차원 공간의 좌표를 이용한 저장방식{.용접로봇(LNG저장탱크용접)LNG 선박 혹은 LNG 저장탱크용 Corrugated Panel들의 TIG 용접을 자동화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7축을 동시에 제어하며 용접속도는 45cpm이다.{.공정자동화(C.F.공정 자동화)칼라 브라운관의 프레임에 스프링을 용접하고 검사하는 무인설비로서 인입된 프레임과 정렬된 스프링을 스폿용접기에 로보트를 이용하여 용접하고, 용접완료된 프레임을 스프링 탄성 및 치우침을 측정하는 장치에 장착하여 불량 및 제품분포도등을 네트웍으로 연결하여 검사 조정실에서 원격감시하는 완전 무인설비이다.{.메니퓰레이터(소형 6축다관절 로봇)국내 최초의 독자 기술로 개발된 고유 모델의 6축 다관절 로봇이며 반복정밀도 오차는 0.1mm, 가반중량은 5kg이다{.건설로봇(Horizontal Drilling Device)조용하고 친근한 환경을 가진 드릴링 기계이다. 보링헤드 끝쪽에 노즐이 있어서 물이 세차게 방출되면서 뚫는 방식을 사용한다.{.Road 로봇세계최초의 자율이동, 자율조종으로 완전하게 도로공사를 끝내는 로봇이다. 또한, 원격으로 조정하거나 터치 스크린을 눌러서 조정할 수도 있다.
문예사조사계몽주의1. 머리말18세기를 계몽의 세기로 규정하는 것이 프랑스 문학사 정리의 보편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때 계몽이라는 용어는 18세기 전체를 관류하는 지적 경향과 사상적 풍토를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하나의 문예사조의 명칭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이다.넓은 의미로서의 계몽주의는 영국과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던 18세기의 광범위한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현대를 연 프랑스 대혁명이라말로 18세기 계몽 운동의 종착점인 셈이다.프랑스는 계몽의 정신을 배태시키고, 계몽운동을 가장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마침내 대혁명으로 계몽적 투쟁을 완결한,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중심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어는 유럽 계몽주의의 보편적 언어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2. 시대 구분새로운 비판적 사고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17세기 말인 1680년경을 계몽의 세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계몽주의는 17세기 말경에 싹트기 시작해서 1715년에 중요한 계기를 맞았고, 이후 대혁명 때까지 계속된 18세기 전체의 지적·사상적 흐름을 뜻하는 것이라고 정리하면 무난할 것이다.3. 의미와 내용칸트는 계몽주의를 하나의 철학이기보다는, 정신의 해방이며, 진보의 정신으로 고양된 이성의 자유로운 검증에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는 용기 있든 결단, 즉 철학적 태도인 것이다.철학의 세기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계몽주의의 시대는 사실상 각각 철학적 입장에서 다소간 편차를 보이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활약한 시대이기도 하다.계몽적 투쟁의 주된 특징의 하나인 반기독교주의만 보더라도 볼테르의 이신론에서부터 디드로의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여러 입장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계몽의 세기는 흔히 이성의 세기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계몽사상은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지양한 새로운 합리주의라고 말 할 수 있다.뉴턴류의 인식론은 경험의 검증에 맡겨지는 법칙을 끌어냄으로써 감각적 세계를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과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생생한 능력을 증언하게 된다.뉴턴과 아울러 계몽 사상에 또 하나의 전범이 된 인물은 영국 철학자 로크였다. 1690년에 씌어지고 1700년부터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전 유럽에 보급된 그의 인상 오성론은 계몽주의를 창설한 책 중의 하나라 할 만큼 영향력이 큰 저작이었다.뉴턴과 로크의 과학적이고 경험론적인 사유를 규범으로 삼은 계몽사상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간 사상이였다. 계몽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내포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계몽 철학자들은 편견에서 벗어난 인류의 보편적 이성은 마침내 자연의 완전한 통제를 확보해 줄 만한 과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인문 과학과 사회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정치적·도덕적 판단을 세련시켜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인류의 진보를 믿는 계몽의 세기의 낙관주의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믿는 낙관주의이기도 하다.볼테르는 인간 조건의 비참성을 강조하는 파스칼의 기독교적인 비관적 인간관을 논박하였다. 볼테르와 더불어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또 다른 철학자 디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복의 문제를 인간의 의무 사항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인간의 행복을 주된 관심사로 하는 게몽주의는 자연히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 돌 수밖에 없다.계몽주의 운동은 이성의 이름으로 비이성인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공격하는 운동이었다. 미신과 압제와 특권,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권을 떠받쳐 주는 종교가 이 비판과 공격의 주대상이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고, 그것을 문학의 중심적 기능으로 생각하는 사르트르 같은 작가가 18세기를 문학의 황금기로 여기는 것은 바로 계몽주의 문학의 전투적 성격 때문이었다.앙시앵 레짐을 파괴시킨 프랑스 대혁명에서 앙시앵 러짐 전체를 비판과 공격의 대상으로 한 계몽주의 운동의 귀결을 보는 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다.계몽주의는 한 세기의 긴 기간과 『백과 전서』파를 비롯한 수많은 참여자들의 활동을 총칭하느 포괄적 명칭인만큼, 계몽주의 일반의 속성을 얘기하고자 하면 아무래도 논의가 추상적으로 흐르기 쉽다. 각자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계몽주의의 흐름에 참여하고 기여하였던 것이다.4.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몽테스키외는 현대 민주 정치의 원리가 된 삼권 분림의 원칙을 제시한 동시에 새로운 사회학적 탐구 방법론을 창시한 그의 대저작 『법의 정신』으로 후세에 기억되는 인물이다. 대단히 조화롭고 균형 잡힌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귀족 법관으로서 평탄하고 유복한 일생을 보낸 몽테스키외는 계몽 사상가들 가운데 박학한 학자적 풍모가 가장 두드러지는 사상가이기도 했다.계몽주의는 어떠한 지역적 가치나 진실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종교든 관습이든 제도든 간에, 계몽주의는 일체의 지역적 진실을 보편성의 자로 측정하려 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지역적 진실의 불충분성을 지적했다. 몽테스키외가 동방이의 눈을 통해 밝히고자 한 것도 유럽의 현상이 보편적 이성의 수준에 터무니없이 미흡하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5. 볼테르계몽 운동의 대표적 투사는 볼테르였다. 사상의 독창성과 후세 철학에 대한 영향력의 정도 등의 문제를 차지하면, 볼테르는 단연코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694년부터 1778년까지의 긴 일생을 통하여 이 계몽 사상가는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의 지적 제왕과도 같은 권위를 쌓아올렸다. 그는 철학자였고 역사가였으며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동시에, 문학 분야에서도 모든 장르에 걸쳐 많은 글을 남긴 작가였다.볼테르는 소설이란 진지한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열등한 장르라고 멸시하였지만, 소설 분야에서는 독창적인 창조자가 될 수 있었다.저자의 본래 의도인 계몽적 투쟁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사상하고서는 철학적 콩트는 성립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볼테르의 대표적인 철학적 콩트 『캉디드』가 있다.인간의 현세적 행복의 가능성을 믿은 계몽 철학자 볼테르는 인간 조건을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지도 않고 비극적인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캉디드』는 단순히 부르주아의 현실적 모럴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게 된다. 치욕스로운 현실을 담아내는 볼테르 특유의 기법, 현대 비평이 주관심 대상으로 사는 그 아이러니의 기법은 순전히 문학적 흥미의 유발을 위해 채택된 것이 아니라. 다음의 인용이 지적하는 바와 같다 계몽 사상가 볼테르의 이성의 투쟁을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다.볼테르의 대표적인 철학적 콩트『캉디드』를 그의 계몽 사상의 한 표현으로 인정한다면 이 작품을 혁명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6. 디드로디드로의 가장 두드러진 시대적 역할은 계몽의 세기의 정신과 지식의 집대성인 『백과 전서』를 책임 편집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서민적인 활력과 자발성의 소유자였고, 지칠 줄 모르는 근면한 일꾼이었던 디드로는『백과 전서』편집의 힘겨운 와중에서도 자신의 개인적 저작에 할애할 시간을 찾아 낼수 있었다.철학 분야에서의 디드로의 특성은 계몽주의의 합리적 사유를 그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간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맹인에 관한 서한』을 출판하여 뱅센느 감옥에 수감된 1749년부터 유물론적 사고를 나타내 보이기 시작한 디드로는 그 이후의 철학적 저작들에서 계속하여 유물론적 결정론을 전개 시켰다.자연 속에는 신도 영혼도 존재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의 무한히 다양하고 항상 일시적인 결합만이 존재한다는 디드로의 유물론적 사고는 18세기 합리주의의 최종적인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미술 비평가였고, 소설과 연극의 이론가였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독창적인 서술 형식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라모의 조카』와 『운명론자 자크』같은 독특한 소설을 써낸 소설가이기도 했다.문학사적 관점에서 디드로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이성우위적인 18세기의 건조한 문학에 낭만적 감성을 도입한 작가라는 점일 것이다. 루소와 더불어 디드로는 18세기 후반에 전기 낭만주의적 문학을 개화시킨 낭만주의의 선구자 역학을 했다.『라모의 조카』는 철학자인 와 장 프랑수와 라모라는 이름의 가 카페에서 만나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화는 미학, 도덕, 철학에 관한 주제로 대별해 볼 수 있고, 그 중에서도 도덕 문제를 주제로 한 대화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디 드로는 라모라는 기이하고 유별난 괴짜를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인상적인 반윤리적 인물의 하나로 만들어내고 있다.디드로에게는 이 인물 라모를 통해서 현실 비판의 효과적인 도구로서도 사용되고 있다. 『라모의 조카』에서 디드로는 반윤리적이 인물을 내세워 역설적으로 현실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