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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한미군의 재배치와 우리의 대안
    Ⅰ. 한국 국방력의 주한미군에 대한 의존도와 중요성주한미군의 재배치에 대한 논의를 하기 앞서 한국의 국방력이 주한미군에 의존하는 정도와 주한미군의 한국의 경제력에 미치는 중요성을 알아봄으로써 과연 주한미군의 재배치가 한국의 국방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주한 미군의 지상군 중 한반도의 정쟁 억지에 가장 유용한 것은 역시 미 2사단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재배치 문제는 미 2사단의 한강이남 재배치(평택ㆍ오산)문제와 대동소이 한 것이다. 왜냐하면 미 2사단은 북한에 의한 전쟁 도발 시 미 증원군을 이끌어 내는 인계철선(tripwire)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국방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시 미국은 시차별 부대 전개 제원(TPFDD)에 따라 전체 해군의 40% 이상, 공군의 50% 이상, 해병대의 70% 이상 전력을 한반도에 증원하도록 돼 있다. 현재 주둔하고 있는 3만7000명의 주한미군은 60여만 명으로 알려진 한반도 증원군의 전초대로서 미국의 대한(對韓) 방위공약을 현장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현재 주한미군이 갖고 있는 전력 가운데 한국군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전략정보 기능이다. 고도 정찰기 및 인공위성을 통한 영상 및 신호정보 판독 등 주한미군의 정보자산은 한국군이 갖지 못한 자산이다. 한국군이 효과적인 방공망을 충분히 갖지 못한 상태에서 패트리어트 지대공 미사일 등 주한미군의 방공 전력은 매우 절실한 시스템이다. 또 북한군의 전차는 한국군에 견주면 2배 가까이 많아 기갑공격 능력에서 매우 위협적인데, 미군에만 있는 A10 대지 공격기는 이에 유용한 대응 수단이다.주한미군의 중요성은 위와 같은 전략적 요건을 넘어 경제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한국은 주한미군을 대체할 안보능력이 없다. 현재 주한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와 물자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총 140억 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전력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무려 30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국방예산이 16조3천억원(약 122억달러)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연간 국방예산의 3배가 되는 돈이다. 우리 국방예산에서 전력 투자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40% 정도로 연간 40억 달러 정도만을 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른 전력 투자는 전혀 하지 않은 채 7년 이상 비용을 쏟아 부어야만, 주한미군 철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도 미군이 보유한 무기가 최첨단 현대식 장비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이처럼 눈에 보이는 실물 전력보다도 1회 임무 수행에 1백만 달러가 소요되는 U-2정찰기, 미 군사당국이 직접 운용하는 정찰 위성 능력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이처럼 주한미군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의 국방력에 대한 엄청난 전략적ㆍ경제적 지원이며, 주한미군 2사단의 최전방 배치는 남북 간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는 국민의 심리적 방어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Ⅱ. 주한 미군의 재배치 계획럼스펠드가 마련한 미국의 신국방 정책 4원칙 중에는 '해외 기지 등 전방배치 전력 감축'과 '군사 기동성 강화 및 경량화'가 들어 있다. 전진배치 되어 있는 미군을 후방으로 이동해 놓고 세계 어느 곳이라도 즉각 투입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춘 경량화된 부대로 개편한다는 안이다. 이런 구상은 적국의 공격무기가 더욱 대량 파괴적이고 정밀해지며 사정거리가 길어진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 지금처럼 기동성이 낮고 기습 공격에 취약한 기지 중심의 미군 부대를 그냥 둔다면 미군 병사의 안전을 지키기 힘들다는 것이다.위와 같은 원칙에 부합해서 주한미군은 용산기지와 미 2사단 등 전국에 산재한 미군기지를 장기적으로 오산ㆍ평택과 부산ㆍ대구 지역 등 2개의 중심권(HUB) 기지로 재편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전국의 미군기지 대부분을 오산ㆍ평택 지역으로 이전하고 나머지를 부산ㆍ대구 지역에 모아 2개 중심권 기지로 재편 할 계획인 것이다. 여기서 부산ㆍ대구권의 기지는 유사시 미군 증원 병력을 들여오는 발판이 될 것이라는 계획이다.도널드 럼즈펠드(Rumsfeld) 미국 국방장관은 5월 15일 정례 브리핑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에서 보듯이 전쟁의 형태가 바뀌었다고 전제한 뒤 ?주한미군의 배치 방법과 주둔군의 종류가 바뀌더라도 억지력을 상당히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고 말해, 주한미군의 감축과 재비치를 계속 추진할 뜻을 강력히 시사했다.그는 ?주한미군은 수십곳에 분산돼 있어 효율적이지 않다?면서 ?군사보호 관점에서 도움이 되지 못하고 한국주민들의 관점에서 개입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정부와 매우 긴밀한 협의 아래 주한미군 재편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럼즈펠드 장관의 회견에 배석한 리처드 마이어스(Myers) 합참의장은 ?주한미군 재배치나 병력 감축 등의 조치를 취해도 주한미군의 능력은 현재보다 결코 저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주한미군 군사능력은 강화될 것?이라면서 ?장관이 말한 대로 군사능력 강화는 반드시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이어스 의장은 ?우리는 단기적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면서 ?한반도의 안보, 한국의 안보는 중요하며, 결코 위태롭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회과학| 2003.11.17| 3페이지| 1,000원| 조회(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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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고리 원정기
    이고리 원정기를 읽기 전에... 나는 "이고리 원정기"가 러시아 고전 문학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와,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에 있어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단지 한편의 고전 문학으로서의 "이고리 원정기"를 읽는 것 보다는 그 문학적 가치를 알고 읽는 것이 러시아의 고전 사상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키예프 루시의 가장 탁월한 작품인는, 1185년에 노브고로트-세베르스키의 이고리 공이 다른 공후들과 함께 동방 유목민인 폴로베츠족과 싸우다 패하는 이야기이다. 1185~87년에 씌어져 단 1권의 필사본이 전해져오다 1795년에 발견되었으나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때 모스크바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소실되기 전에 만들어진 사본들은 원작과 같음이 입증되었다. 고대 러시아 문학에서 이는 독일의 《니벨룽겐의 가락지》나 프랑스의《롤랑의 노래》와 비길 만한 민족문학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고 한다.나는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결말에 이르기 까지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여러 번을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일반적인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시적인 표현들을 사용했음을 느끼게 되었다.대략적인 줄거리는 이고리 공후가 뽈로베쯔인들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출정했다가 전쟁에서 패한 뒤 포로로 잡혀 있다 탈출하게 되는 이야기로서, 결과적으로 실패한 원정을 서술한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이 글은 실제의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떠한 이유로 실패한 원정을 서술한 것일까? 자신의 공후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힌 것은 분명히 치욕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글을 쓴 이유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러시아내 각 공국들이 서로의 권력 싸움을 심하게 하던 시기였으므로 러시아의 공후들이 통일을 위해 단결해 줄 것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글의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소설과 시의 형식을 모두 가지고 있고, 각 공후들에게 보내는 저자의 소호가 상당히 은유적이면서 비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젊고 용감한 공후 올례그를 잠들게 한 까니나 강', '도시들을 분할시킨 로시 강과 술라 강', '무서운 이교도 뽈로베쯔인들의 외침소리 아래 탁하게 흐르고 있는 드비나 강', '러시아 인들의 뼈가 뿌려진 네미가 강', '영광의 아들 드네프르 강', '이고리 공의 아내 야로슬라브나의 외로움을 표현한 두나이 강', '외부의 물줄기를 집어 삼키고, 검은 강변의 늪지에서 젊은 로찌슬라프를 삼켜버린 수뚜그나 강', '러시아 땅에 기쁨이 있다고 스스로 말 한 도네츠 강' 등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다.
    독후감/창작| 2003.11.17| 2페이지| 1,000원| 조회(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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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블료프의 삼위일체 평가A좋아요
    들어가는 말저는 "루블료프의 삼위일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앞서 이꼰에 대한 이해가 먼저 요구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이꼰을 알아야 했고, 그 다음 루블료프를 알아야 했고, 그리고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각적이고 깊이있는 이해는 못했지만 이번 보고서 작성을 위해 제 나름대로 조사하고 수집한 자료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이꼰의 이해-정의, 기원, 특징이꼰의 정의는 중세 러시아 회화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상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스도, 천사 , 사도, 예언자, 순교자. 성직자. 그 외의 종교에서의 인물상을 이꼰(성화상,聖像畵)이라고 한다. 또한 이꼰은 그림으로 그린 성서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글을 잘 모르는 일반 민중을 계몽시킬 수 있는 ‘그림으로 된 신학’이라는 의미의 이꼰은 이자 신비적 체험과 기적의 살아있는 증거물이라고도 생각된다.이꼰은 11세기중 그리스 장인들의 프레스코(fresco)를 통해서 도입됐다. 끼예프 공국기에 러시아 제자들은 비잔틴의 형식과 스타일을 준엄하게 따랐고, 이들이 제작한 작품들이 정교에서 교화에 사용되었던 ‘이꼰(icon)’이 된 것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비잔틴의 이꼰이 발칸반도 지역의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남부 지역에도 확산되기 시작했고, 러시아가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공인함에 따라 러시아 전역에 확산되기 시작했다.이꼰은 눈부신 색깔로 채색된 예수, 마리아, 성자, 천사상 등은 종교적 열정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던 러시아 국민의 신앙심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정교회 내부장식으로 시작된 이꼰은 비잔틴 양식의 전형을 따랐으나, 차츰 슬라브적으로 변모하였다. 북부지방으로 전래된 성화상은 딱딱한 비잔틴 양식을 벗어나 슬라브 의상을 입은 생기있고 다정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붉고 희고 푸른 선명한 색조, 가늘고 길게 변형된 인물, 분명한 선, 동적인 구도... 이런 것이 러시아 이꼰의 특징이다. 이러한 이꼰을 그리는 화공들은 신적 영감에 싸여 일하였다. 이꼰의 제작자는 그 이름이 분명히 남아있어, 그 명망에 따라 이꼰의 작품성이 평가받는다. 현존하는 초기 이꼰 가운데 대표작은 12세기 초에 그려진 "블라지미르의 성모자상"이다. 이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쳐 마을의 안전을 지키고 온갖 기적을 행하는 이꼰으로서 사람들의 숭배와 공경을 한 몸에 받았다. 러시아 농가에는 가정용 성화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것은 자연계의 온갖 사악한 힘을 쫓아내는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집에만 성화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호성인의 작은 이꼰을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은 성스러운 존재의 화신으로서, 자기의 소망을 들어주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수호자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꼰에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은 예언자 엘리야로서, 자연계의 모든 힘, 특히 물과 불을 지배하는 존재로 믿어졌다.루블료프의 삶과 삼위일체 이콘의 탄생 배경안드레이 루블료프에 이르러 러시아 이꼰의 특징을 살린 아름다움은 극에 달하였다. 그의 작품 '삼위일체'는 러시아 중세의 최대 걸작이다. 비잔틴 미술 전통의 구도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그 색채와 곡선, 구도의 훌륭함과 뛰어난 서정미는 루블료프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잘 나타내어 준다. 성화가 만들어낸 조화와 평온, 빛과 완전무결함의 인상은 "성 세르게이 정신의 한 계시"라 불릴 정도이다.그리스도교가 탄생한 이후 초 세기부터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이꼰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다. 많은 시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시대의 시련에 저항하면서 삼위일체 이꼰을 탄생시켰다. 그가 바로 안드레이 루블료프인데 그는 수도자, 이꼰 화가, 신학자로서 후기 고딕과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뛰어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출생 날짜, 장소, 가문에 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14~15세기, 즉 안드레이 시대와 후대에 루블료프라는 성(姓)으로 봐서 출신 가문은 상류 지식층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삼위일체 이꼰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블료프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삶에서 풍겨 나온 신령한 성품이 삼위일체 이꼰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루블료프는 몽고의 타타르족이 러시아를 침공하여 식민지(1240~1480)로 삼았던 시기에 살았다. 역사 학자들은 당시 1380년 타타르족의 굴레에서 해방의 시발점이 되었던 쿨리코보Kulikovo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루블료프도 참전하였거나 아니면 그 스스로 그 전투를 목격하였던 증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2년 후 모스크바는 토크타미쉬에 의해서 폐허가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고통의 사건들과 그에 따른 다른 요인들이 안드레이로 하여금 수도자의 삶을 살도록 하고 그의 영성을 성장시켜 갔을 것이다. 당시 많은 러시아인들은 발칸반도, 아토스 성산,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곤 하였다. 청년 루블료프도 비잔틴 세계를 방문하였으며 불가리아에서 공부하고 작업을 하였다.루블료프는 많은 고통과 폭 넓은 삶의 체험 이후에 수도자가 되어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이꼰에는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 잘 드러난다. 특히 그는 조국 러시아의 시련을 생각하면서 민족의 고통을 극복하여야 하는 돌파구로서 삼위일체 이꼰을 형상화하였다. 1411년경에 그려진 이 삼위일체 이꼰이 루블료프의 영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루블료프의 대표적인 이꼰 삼위일체는 당시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인한 러시아의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려는 동 슬라브 민족의 신앙적 돌파구로서 삼위일체를 형상화하였다고 전해진다. 삼위일체 이꼰을 그리도록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영적인 인물은 스승 라도네즈의 세르게이였다.세르게이 성인은 러시아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그는 모스크바에서 동남쪽으로 약 2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고르스크의 삼위일체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루블료프는 세르게이 성인의 삶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루블료프는 세르게이 성인의 후계자 니콘St. Nikon에게서도 영성지도를 받았다. 동방교회의 영성 안에서 볼 때 그의 모든 작품은 예리한 헤시카즘Hesychasm을 바탕으로, 특히 세르게이 성인의 영성적 유산을 이꼰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루블료프의 예술적 탁월함은 14~15세기 동방 교회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그의 심오한 영성적 시각과 연결되어 있다. 루블료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선언되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러시아가 그리스도교를 받아 들인지(988년) 1천 년을 기념하는 1988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 품에 올랐다.「루블료프의 삼위일체」이꼰의 이해「성삼위일체(Troitsa)」이콘은 정교의 핵심적인 교리인 '성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이꼰이며, 구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세 천사가 아브라함의 천막안으로 들어와 아들의 출생을 알리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정교에서는 이 세 천사의 방문이 삼위일체라고 간주하며, 따라서 이꼰 화가들도 이 세 천사 사이의 전체적 비율과 색채의 상징적 대칭성, 구도의 균형 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특히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성 삼위일체 이꼰이 이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는 비록 초기 비잔틴의 규범에서 일탈하여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천사들의 위치를 원형구도로 잡아 삼위일체의 의미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이꼰은 그림의 구도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의미는 깊다. 세 사람의 천사가 식탁에 앉아 있는 그림인데, 루블료프는 종래의 성상 양식에 생생한 인간의 감정을 불어넣었다. 화면의 중앙에는 산 제물이 된 어린양을 담은 접시가 놓여져 있고, 세 천사는 이 죄 없는 산 제물의 상징을 향해 동정을 담아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다. 이들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세 천사를 의미한다. 여성적이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겸손한 표정, 서열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 천사는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를 표현하며, 사랑, 형제애, 화해하는 믿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꼰을 바라보는 쪽에서 왼편은 최고의 색상 황금색 옷으로 단장된 만유의 근원 되시는 성부, 중앙은 붉은 색과 자주 빛 그리고 하늘색 옷으로 단장된 것은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구세주 되는 성자, 오른 편에는 녹색 옷으로 단장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묘사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사랑으로 하나되어 평화를 속삭이는 듯 중앙에 놓인 잔을 가리키며 바라보고 있다. 성 삼위 후두에는 원이 그려져 있고, 한 손에는 막대기인 듯 지팡이인 듯한 것을 지니고 있다. 이는 최고 권위와 전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성자 등뒤의 나무는 중앙의 탁자 위의 잔을 통과하는 구원의 선이 세상으로 이어지는 듯이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날개는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예체능| 2003.11.17| 5페이지| 1,000원| 조회(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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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마니아 사회주의 해체과정 평가A좋아요
    ≪ 목 차 ≫Ⅰ. 서 론루마니아의 정치 흐름과 체제 붕괴와의 상관 관계Ⅱ. 본 론 - 공산 주의의 해체 과정1. 루마니아 공산 정권의 수립2. 루마니아의 탈소 자주노선3. 체제 위기의 시작 - 정치ㆍ경제적 위기4. 공산주의 해체 원인Ⅲ. 결 론평가 및 결론※보고서를 마치며...Ⅰ. 서 론양차 대전 이후 루마니아 정치사는 루마니아의 공산 과정과 더불어 소련의 내정 간섭을 탈피한 독자 노선을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그러한 독자노선이 루마니아의 정치와 경제에 끼친 영향과 그로 인한 체제붕괴와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루마니아의 2차 대전 후에서 혁명이 발생한 89년까지의 정치흐름을 파악하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데지 정권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난 루마니아의 대소 자주노선이 어떻게 형성, 확대, 정착을 했고 그러한 자주노선이 강력한 공산 블럭하에서 가능했는지 고찰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체제 위기가 어떻게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를 경제 문제와 대소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산주의의 해체 원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 론 - 공산주의의 해체 과정1. 루마니아 공산 정권의 수립루마니아의 공산화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화와 마찬가지로 1944년 8월 소련군의 발칸 진출을 배경으로 일어난 쿠데타에 의해 안토네쿠스 정권이 타도됨으로써 실현 되었다. 2차 대전 직전까지의 대중의 지지결여 속에서 이렇다 할 정치활동을 벌이지 못한 루마니아 공산당은 2차 대전 패배 후 만성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농민대중의 반파시스트 정부 움직임을 지지, 유도함으로써 대내적인 지지세력을 만들었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지원과 소련 점령 상황에 대한 미국 등 서방측의 묵인 하에서 국민민주전선을 통해 반대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정치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마침내 왕정을 폐지 시키고 1947년 12월 30일 스탈린 주의식 공산체제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는 강력한 공산당 정부를 성립시키게 되었다.이러적이었으며, 스탈린주의적 체제를 세밀히 모방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충실한 위성국이었던 그리고 동구 블럭내에서의 소련이익의 확고한 지지자로 보였던 루마니아 지도층과 소련 지도층과의 갈등의 뿌리는 오래된 것이었다. 결국 루마니아의 민족주의의 주도적 인물인 게오르게 데지 정권을 시작으로 탈 소련적인 자주노선의 길을 가게되는 것이다.제2차 세계대전 중에 루마니아에 적군을 진주시킨 스탈린은 이 지역을 확고히 위성국화 시키기 위해 공산정권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자신에게 복종하는 아나 파우커(Ana Pauker) 와 바실 루카(Vasil Luca)등의 모스크바파 루마니아공산주의자가 권력을 잡도록 도와 주었다. 이에 반해 루마니아 국내에 기관을 가진 국내파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게오르게 데지(G.G.Dej)는 과감히 모스크바파에 도전했고 오랜 권력투쟁 끝에 결국 데지는 1952년에 가서 그들을 숙청할 수 있었다.권력투쟁에서의 경험으로 데지는 소련에 대한 소외감과 적대감을 느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의 지시에 관계없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중으로부터 좀 더 확고한 지지를 얻을 필요성을 느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과 1950년대 후반 흐루시쵸프의 등장으로 인한 국제정치에서의 다중심주의적 상황은 적극적 정책을 펼쳐 자신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데지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다.당내 기반을 구축한 데지는 2차 대전 후 소련이 루마니아에 행해온 간섭을 언급하여 대중의 민족주의 감정을 고취하였으며, 소련에게는 루마니아 내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이 필요 없음을 주장하여 비로소 1958년 이들의 철수를 성공시켰다. 이는 루마니아가 소련의 위성국 위치로부터 이탈할 수 있었던 기본조건이었다.모든 장애요소를 없앤 데지는 대중지지 획득과 국가의 재건을 위해서는 경제발전이 지상과제임을 깨닫고 이미 1930년대에 소련에서 효과를 보았던 마르크스-레닌식의 중공업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념적 정통성을 표방하고 경제성장을 쟁취하겠다는 이 야심적인 계획은 약화된 대동구지배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하여키면서 자국의 경제정책을 고수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는 길로 선택하였다.루마니아가 경제논쟁에서 소련의 압력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중.소 분쟁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대소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루마니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소련과의 관계악화를 무릅쓰고 중ㆍ소 분쟁에서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즉, 타소련 블럭 국가와는 달리 언론을 통한 직접적인 대중공비난을 하지 않았으며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중공을 고립시키기 위해 소련이 주최하는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타 동구블럭 국가들이 대중공무역량을 줄였는데 반하여 루마니아는 70%정도로 무역량을 늘렸다. 루마니아는 중ㆍ소 분쟁에서 중재 역을 자청하고 나섰는데 이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루마니아의 갈등이 점점 확대되어가는 상황에서 1964년 10월 흐루시쵸프의 실각과 1965년 3월 데지의 사망으로 따른 양국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루마니아의 자주노선은 일단 전환기를 맞게 된다.그러나 루마니아의 입장에서의 상황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다. 데지의 뒤를 이은 것은 데지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차우세스쿠였다. 당서기장이 된 차우세스쿠는 수상인 마우레과 대통령인 스토이카와 함께 자주노선을 고수할 뜻을 밝혔다. 차우세스쿠에게도 상황은 데지와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소련의 이익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취해야 했다. 또한 권력유지를 위해서도 자주노선이 필요했는데 만약 국내정책이 실패하더라도 반소비난의 목소리를 높여 민족주의 감정을 고취시키고 이로써 그 실패를 은폐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소련과 관계가 최악으로 치 닫았을 때는 1968년 여름이었다. 반동적인 루마니아는 두브체크의 자유주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지만 대소견제와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에 함께 할 수 있는 동맹국을 얻기위해 두브체크를 지지했다. 이러한 이유로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침공은 루마니아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특히 체코침공에 루마니아군이 참가하지 않음으로 인해 바르샤 위해서 브레즈네프가 직접 부쿠레슈티에 간 사실을 볼 때 이 우호조약의 체결은 소련이 루마니아의 독특한 위치를 인정하고 있음을 평가할 수 있다.3. 체제 위기의 시작루마니아는 1970년대 후반까지 동구제국 중에서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경제성장과정에서 몇 차례의 경제개혁으로 일련의 분권화 조치가 시도되었지만, 루마니아 경제는 오히려 집권화가 강화되어 왔다. 그리고 탈 소련자유노선의 영향으로 대서방 및 개도국 경제, 기술협력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 상황은 많이 바뀌어 루마니아의 대소련 경제 의존은 확대되었다. 즉, 외채위기에 직면한 루마니아의 강력한 수입억제정책은 대 서방 무역규모를 축소시킨 반면, 국내 에너지 자원의 고갈로 인해 소련으로부터 석유, 천연가스 등의 수입을 확대하는 한편 전력까지 공급받게 되어 루마니아 경제에 있어서 소련의 비중은 커졌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루마니아의 대소련 경제의존은 확대되었지만, 고르바쵸프가 강력히 추진하고 대부분의 동구사회주의국가들도 도입하고 있는 개혁정책을 루마니아가 도입하지 않는 것은 게오르규 데지의 뒤를 이어 탈소 자유노선을 계속 유지해 온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차우세스쿠는 고르바쵸프 지도부의 대내외적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는데, 즉 차우세스쿠의 독특한 노선이란 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체제유지를 위한 것이다. 차우세스쿠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루마니아의 절대군주제에 비견할 만한 독재 정치체제에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개방 정책과 참된 민주화운동, 정치적 다원주의의 승인 등 소련 페레스트로이카의 요소들은 루마니아에게 치명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루마니아는 소련에 대한 정보를 엄격히 통제하는 한편, 차우세스쿠의 ‘황금 시대’를 찬양하는 기사들로 언론을 장식했다. 양국의 경제 교류가 감소하고 생산단위 사이의 접촉이 거의 단절되었고, 소련 외교관과 기자들의 루마니아 내 자유 이동이 극히아가 자주성과 독자성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을 뿐이다.루마니아 사회 각 계층도 차우세스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파업과 자연 발생적 정치 시위가 빈번해졌다. 세쿠리타테(소련의 KGB와 같은 성격이라고 함)의 엄격한 이데올로기적 감시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치가들까지도 차우세스쿠를 비난하게 되었고 루마니아 군부 인사와 재야 인사들, 외교관들도 반 차우세스쿠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85년 이후 가중되기 시작한 경제 위기 속에서 차우세스쿠의 강권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계속되었으며, 1988년에는 차우세스쿠 정부의 족벌체제에 불만을 품은 민중폭동이 브라쇼브에서 발생하였다. 이에 차우세스쿠는 더욱 강권통치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시에서 발단이 된 민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군부의 분열로 진압에 실패함에 따라 24년간의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은 1989년 12월 25일 차우세스쿠가 처형됨으로서 붕괴된다.4. 공산주의의 해체 원인게오르게 데지의 뒤를 이은 차우세스쿠의 자주노선은 국가이익의 합리적인 추구와는 무관하게 외향적인 민족의 자부심, 차우세스쿠 개인의 영광에만 중점을 두고 또한 민족주의의 명목 하에 민족에 대한 탄압정책을 강화 함으로써 국민전체를 소외시키고 국민경제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차우세스쿠의 자주노선은 민족의 삶에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대외정책에서 루마니아의 민족주의적인 의지는 그들의 끊임없는 반소입장, 특히 1970년대 전반까지 실질적으로 획득한 대외적 자주 등에 의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이익의 합리적인 추구보다는 공허한 제스처로 국가의 영광, 차우세스쿠 개인의 맹목적인 숭배 추구에만 그 중점을 두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또한 이러한 대외 정책은 정권에 의해 사회 경제적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즉, 정권은 국민들에게는 소련의 위협을 내세우면서 계속적으로 '애국적인 침묵'을 강요하고 소련에 대해서도 루마니아 내부체제의 교조.
    사회과학| 2003.11.17| 7페이지| 1,000원| 조회(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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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박물관관람기
    고대 박물관을 찾아서...박물관 관람기. 나의 전공이 사회과학인 관계로 대학 생활 중 관람기를 써 볼 기회가 없었다. 말하자면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 기억으로 나는 박물관에선 항상 뛰어 놀다 혼나던 기억이 전부이다. 일단 아무 생각없이 여러 가지 박물관 중 가장 가까운 고대 박물관을 선택했고, 9월 26일 친구와 함께 고대로 향했다. 고대의 넓은 캠퍼스와 낮은 인구 밀도 속에서 박물관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물어 물어 찾아간 끝에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친구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관람객은 아무도 없었고, 관장님이 전시실로 안내해 주었다.겉보기에는 허술한 건물인 고대 박물관은 3층 건물에 1층은 제 1 전시실, 2층은 2전시실, 3층은 3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특별전 준비로 2층과 3층은 개방하지 않았고, 1층만 관람이 가능하였다. 2층과 3층에는 지도와 그림, 古가구와 도자기 등이 전시 되어있다고 한다. 제 1 전시실은 역사관계자료실로서 대부분이 조선 시대에 사용되던 것으로, 생활 도구에서 장신구, 무기에 이르기 까지 의ㆍ식ㆍ주 전반에 걸친 민속품이 다양하게 전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시실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생각한 것이 "현대인과 의상"이라는 과목과 유물들과의 연관성을 내 나름대로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눈길은 자연히 복식과 관련된 장신구나 노리개와 같은 치장 도구들로 이끌렸다. 따라서 이것들을 위주로 한 감상을 정리하고자 한다.처음 눈에 띈 것은 노리개였다. 노리개는 여성의 몸치장으로 한복 저고리의 고름이나 치마허리 등에 다는 패물을 말하는 것으로 한복의 멋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리개는 외형상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호화로운 장식이기도 하였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적 배경이 있는 듯 단아하고 절제된 느낌도 받았다. 장도는 남녀가 몸에 지니는 노리개 또는 호신용 칼이다. 장식용으로 차기도 하고 남을 공격하거나 때로는 자결을 위한 것이다. 한국에서 장도를 차는 풍습이 생긴 것은 고려 때부터이며, 조선시대에는 널리 보편화되었다. 은으로 만든 은장도를 제일로 꼽는다. 장도는 차는 위치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며, 또 그 중에는 은젓가락이 달린 것도 있는 데, 이는 외식을 할 때 음식에 독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 모양을 자세히 보자면 옛 선비의 청렴함이나 부녀자의 지조에서 나오는 "외유내강"의 다부짐을 느낄 수 있었다.선추는 부채 고리나 자루에 매다는 장식품으로 유관자(有官者)만이 할 수 있는 치레였다고 하지만 여성용도 있다고 한다. 백옥, 비취, 호박, 상아나 묵은 대추나무 등에 송학, 일월, 산수, 불로초, 사슴누각 등의 무늬를 음, 양각 혹은 투각한 것과 은세공품에 칠보를 올린 것 등 여러 종류의 선추가 있다. 이것은 양반들의 풍류와 더불어 멋을 즐기는 장신구라는 설명이 있었다. 이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선추란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핸드폰 줄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모양을 보아도 인사동에서 볼 수 있는 핸드폰 줄과 과히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조선시대 선비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개성이었다.오늘날의 향수나 방향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향갑과 향낭이다. 향갑이란 향을 담는 작은 상자로서 거실이나 침실에 놓아두거나 몸의 노리개로 지님으로 향기를 나게 한다. 한편 향갑에 사향을 넣고 다니다가 급성 위장병이 났을 때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향낭은 향을 넣어 패용하는 주머니이며, 향기와 함께 구급약 또는 호신향과 같은 경우, 재액을 쫓는 주술적인 의미도 있었다.이 밖에도 다리, 떠구지, 떨잠과 같은 여성들의 머리 장식이 있었는데, 떨잠은 큰머리 ?어여머리의 앞 중심과 양 옆에 꽂은 머리꾸미개로서, 원형 ?각형 ?나비형의 옥판에 칠보 ?진주 ?보석 등으로 꾸미고, 은사로 가늘게 용수철을 만들어 끝에 은으로 만든 꽃 ?새 모양의 떨새를 붙인다. 떨잠은 옥판 위의 떨새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이 때 떨새의 모양은 무척 아름답게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다리와 떠구지는 둘 다 머리 숱을 많아 보이게 하는 용도이다. 다리는 여자의 머리 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하여 덧넣는 땋은머리인데, 전시된 것으로 보아서는 실제 사람의 머리와 똑같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잘라 자신의 머리위에 얹어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후에 가체금지령으로 인해 머리 위에 대나무틀을 얹은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떠구지이다. 그러나 모두 머리를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함은 지금과 상반되는 트렌드라고 생각된다.
    사회과학| 2003.11.17| 3페이지| 1,000원| 조회(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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