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의 의산문답一. 序論1. 홍대용)본관 남양(南陽). 자 덕보(德保). 호 담헌(湛軒) ·홍지(弘之).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학풍은 유학(儒學)보다도 군국(軍國) ·경제(經濟)에 전심하였다. 1765년(영조 41) 숙부인 억(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베이징[北京]에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사귀어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또 천주당(天主堂)에 가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고 독일 사람인 흠천감정(欽天監正) 할레르슈타인[劉松齡], 부감(副監) 고가이슬[鮑友管]과 면담했으며, 관상대(觀象臺)를 견학하여 천문(天文)지식을 넓혔다.귀국 후 수차 과거에 실패하고 1775년 음보로 선공감(繕工監) 감역이 되었다. 그 후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 ·감찰 ·태인(泰仁)현감 등을 거쳐 1780년(정조 4) 영주(榮州)군수가 되었다.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이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저서에 《담헌설총(湛軒說叢)》이 있고, 편서(編書)에 《건정필담(乾淨筆談)》, 《주해수용(籌解需用)》,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항전척독(抗傳尺牘)》, 《삼경문변(三經問辨)》 등이 있다.2. 의산문답의산문답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먼저 유학의 虛스러움에 대한 비판, 다음은 홍대용 자신의 자연관, 역사에 의한 인성의 변천이다. 유가의 지나친 격식차림에 대한 비판의 경우는 다른 실학자의 경우와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 역사에 의한 인성의 변천 경우는 기존의 유학자들과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유가에서 성인으로 모시는 고대의 왕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텍스트 중심으로 읽고 그것에 기반하여 비판을 하기에 기존 유학자들의 해석에 해석을 덧붙이는 인물평과는 달리 다분히 실증적인 면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비판은 그러한 사람들을 성인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또 새로운 시각을 주었다. 요즘 들어서 생각하는 텍스트 중심으로 읽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가장 놀란 부분은 홍대용의 자연관이었다. 과거 국사책에서 홍대용이 현대적 우주관을 주장한 것을 알지만 이렇게까지 과학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의산문답의 내용 중 상당부분을 이러한 자연관 내용이 담고 있기에 자연관 중심으로 내용을 진행하겠다.二. 本論허자의 학문은 유학자의 학문에 강령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지만, 큰 道를 깨닫는 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실옹이 제시하는 새로운 실제적인 학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物事의 영역이고, 物事 영역의 중시는 당연히 객관적 대상세계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낳았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관과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변화를 수반하였다.자연관의 전환전체 논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人物無分論인데, 그의 人物心性論은 ‘人物均’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사람과 物은 균등하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만이 만물 중 가장 빼어난 기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종래의 성리학적 견해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또한 주자학적 人物性同論과도 전혀 다른 것이다. 궁극적 존재로서의 太極을 부정하는 홍대용의 사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러한 종래의 입장들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다.종래의 人物性同論에서는 오든 사물이 理를 갖추고 있다는 것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러한 理가 기질로 인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과 그런 차이에 대해 가치적 차등을 두는 것 있어서는 人物性異論과 다르지 않다. 즉 실질적으로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홍대용은 만물의 차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 차이성을 차등화하지 않는다. 이는 다음의 허자와 실옹이 주고받은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허자가 말했다.“천지간 생물 중에서 오직 사람이 귀하다. 저 금수나 초목은 慧도 없고 覺도 없으며, 禮도 없고 義도 없다. 사람이 금수보다 귀하고, 초목이 금수보다 천한 것이다.”실옹이 고개를 들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너는 정말 사람이로다. 五倫과 五事가 사람의 예의라면, 무리를 지어 함께 다니면서 함께 먹이를 먹는 것은 금수의 예의이고, 군락을 지어 가지를 뻗는 것은 초목의 예의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물이 똑같다. …… 무릇 큰 도리를 해치는 것으로 봄내는 마음보다 더 심한 게 없다. 사람이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물을 천하게 여김은 뽐내는 마음의 근본이다. …… 너는 왜 하늘의 입장에서 물을 보지 않고 사람의 입장에서 물을 보는가?”즉 그의 人物無分論, 혹은 人物均論은 사물의 다양성 내지는 사물마다 서로 다른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성을 강조하는 데에 일차적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사물을 인간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입장 즉 하늘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객관주의가 바로 그가 낡은 자연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연관을 확립하는 것의 중요한 입각점이 되었다.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자연을 직관적인 사유, 관념이나 추상의 대상이 아닌 실험과 실증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옛 사람들의 기록을 믿지 말고 사물로 나아가 직접 자신의 눈으로 현실을 살펴보아 그것이 정확한지를 실증해야 한다는 것이다.홍대용 자연관의 특징물론 그도 과거의 전통적인 자연관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자연관을 전통과의 단절 혹은 그것의 극복이라는 면에 주목하여 본다면, 그는 자연이라는 대상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이룰 수 있었고 이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五行論으로부터의 탈피, 災異論으로부터의 탈피, 象數學으로부터의 탈피 등이 그것이다.오성의 몸에는 각각 그 덕성이 있는데, 이를 오행의 하나하나에 맞추어 놓은 것은 술법을 부리는 자들의 그릇된 생각이다. …… 근래 천체 운행에 관한 연구가 진척을 보게 된 것은 궁중의 지원에 힘입은 것인데, 별들의 명칭이 붙은 것은 역술가들이 마음대로 정한 것이다. 그들은 천체에 관한 일들을 번잡하게 늘어놓고 억지로 맞추어서 속된 일에 인용하는 것과 같은 잔꾀를 부려 점술가의 무기로 삼았으니, 그 망령됨이 천문 분야에서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무릇 지구를 허공에 비하면 미세한 티끌에 지나지 않으며, 중국은 지구에 비하면 10수분의 1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둘레를 몇 개의 경계로 나누어 거기에 별의 출현을 맞춘다는 것은, 어쩌면 일리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한 쪽에 붙어 있는 구주를 억지로 여러 별들의 세계에 배합시켜 나누거나 합침으로써, 재앙을 알아맞히거나 상서로움을 점치려 하니, 사람의 그 간사한 꾀와 망령됨이 오히려 부끄럽다.
현대문화에서 나타난 몸의 표현Ⅰ.들어가면서1. 현대문화에서 사람의 몸은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가라앉을 법한데도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는 몸짱 열풍을 봐도 그렇다. 옆의 몸짱 아줌마는 과학교과서에도 이제 실린다. (비교적으로 요즘은 얼짱 열풍은 많이 가라앉아 있지 않은가?). 아이용한 상품들은 넘쳐나고 있다. 그 외의 문화적 코드나 니 과거에는 아름다운 몸만이 코드였으나 지금은 정형돈, 이윤석 등에서 보듯이 개성 있는 몸 자체가 개성의 표현이 될 수 있는 시기이다. 연례행사인 미인대회부터 슈퍼모델대회, 게다가 요즘은 남녀가 참여하는 Body Builder Contest등에서 보듯이 원초적인 몸 자체를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문화와 사람의 몸은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2. 인간의 몸은 가장 오래된 예술의 도구이다. 마임의 역사는 고대로마에서부터 시작된다. 목을 이용한 노래또한 가장 원초적인 음악의 형태이다. 고대 중국의 秦의 전통음악은 허벅지를 두들기며 그 소리로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까지 무용, 발레, 댄서들의 춤 등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에는 이것을 넘어서 몸 바로 그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Body Builder Contest나 미인대회 등이 성행하고 있다.서양의 문화는 인간의 몸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옆의 니케의 상이나 헤르메스의 조각을 보자. 이들은 반라와 나신의 상태로 인간의 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몸을 주제로 삼는 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서 르네상스에서는 그 꽃이 가장 화려하게 펴진다. 그 이후부터 문화적 코드에서 사람의 몸을 뗄 수가 없게 되며 문화에 있어서 사람을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주제가 된다. 이것은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3. 우리의 과거문화에서 사람의 몸은 부적절한 소재였다. 동양의 유가적 문화권 내에서는 가리는 것이 미학이었으며 몸이라는 것은 초월해야하는 존재이지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대의 조각, 그림 등에서 사람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은 에서 누드화를 본적이 있는가? 동양의 무용을 보아도 그것은 꽃이라던가 해, 달 등 자연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의 수단도 몸짓이지만 의복이나 장신구 등이지 몸 자체는 아니었다. 이것이 몸 자체에 착안하여서 몸짓을 극대화 한 마임과는 다른 것이며 동양적인 것이다. 동양에서는 가림의 미학과 몸에 대한 초월적 철학으로 인하여 몸에 대한 문화는 구속받고 있었다. 하지만 구속이 풀린 현재 몸에 대한 문화적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Ⅱ. 현대문화에 나타난 사람의 몸현대문화에서 보이는 사람의 몸을 한가지로 정의 하자면 융합과 그로인한 일탈이다. 남녀 양성 체를 비롯하여 사람의 몸과 다른 것의 조화가 주된 코드이다. 앞에 언급하였듯이 몸 자체에 관한 관심은 르네상스에 꽃이 피었고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다. 기존의 것으로는 더 이상 표현해봤자 새로울 것이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의 공업화와 맞물려서 물질적인 것의 급속한 충족과 동시에 정신적 공황을 겪은 현대인 들은 초현실적인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환상문학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때이다.) 이 때 등장한 초현실주의 화풍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지만 또한 내심 바라고 있던 것이었기에 큰 인기를 끈다. 이러한 것은 현대에 와서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라는 것이 거부감은 들지만 받아들이기에는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로테스크 이미지의 주된 소재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의 몸의 변형이며 다른 사물과 융합이다. 그렇기에 현대문화에서 보이는 사람의 몸에 관한 코드 중 하나는 융합으로 인한 일탈이다.또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모호성이다. 융합의 결과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한 결론이 나지도 않는다.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준다. 융합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대문화에서 한 특징이며, 몸을 주제로 한 것들에 있어서 무시 할 수 없는 특징인 것이다.1. 살바도르 달리에서 보다1였지만 그의 그림 중에서 사람의 몸을 주제로 한 것이 많으며 그것은 다른 무엇과 융합되어 있다.이 그림 은 사람의 몸과 옷장이 융합되어 있다. 게다가 이것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주변 사물의 융합이다. 달리가 바로크시대 이탈리아 화가 브라첼리의 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이 작품 안에서의 사람의 몸은 가구와 남녀의 혼합체가 마구 섞여져서 사람의 몸이지만 몸이라고 할 수 없는 일탈된 표현물에 불과하게 되었다.주변의 다른 현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람의 몸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서랍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사람의 몸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서랍장 속에 꺼내어지는 사람의 장기 즉 사람의 사물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이 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것도 모르겠으며 그렇게 했기에 한가지로 표현할 수 없는 현대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며, 지금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 된 것이다.2) 이것은 달리의 또 다른 그림 이다. 이것은 더욱더 극단적으로 치달아 있다. 사물과의 융합을 넘어서 몸과 몸의 융합이며 그것이 또한 어떤 부위인지도 알 수 없다. 극단적인 융합은 괴기함을 낳았으며 음란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도 공포스럽게 느껴지며 음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몸과 몸을 섞어서 인체를 표현하였고 그것이 배경과 절묘하게 어울려져서 몸이 아닌 다른 사물로 느껴진다. 사람의 몸을 완벽하게 일탈해버린 것이다.여기서는 식인주의와 관련된 식도락적인 비유와 관념이 달리의 사상과 도상에 있어서 가장 함축적이고 중대한 주제로 보인다. 보편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썩기 쉽고,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부패하며 결국 죽음이 기다린다. 동시에 음식을 만드는 것이나 먹는 것은 모두 딱딱한 것에서 부드러운 것으로 변화하고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은 마치 인식을 먹는 편집광적인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스스로 그들과 멀리 이 - 로 채워지게 되는데 이것은 독특하고 환각적인 도상을 창조한다.)여기서 혀와 손은 가슴에 집착하고 있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한 집착을 기분이 인체를 이용하여 괴이하게 표현하였기에 사물을 사용하지 않고도 집착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순환하는 구조, -한명의 팔은 가늘지만 한명의 팔은 길다- 인간의 탐욕은 끊임없는 것이고 그것은 약해졌다고 느끼지만 다시 강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동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극단적인 표현으로 인하여 그것이 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그림은 다시 한번 말한다. 현대에서 사람의 몸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일탈을 뺀다면 상품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을 말이다.3) 아래 그림은 이라는 그림이다. 스페인 내란과 관계되는 여러 작품들 중 하나이다. 두 기사가 창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여성의 가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자의 머리는 폭력적인 전투 중에 있는 인물 표현으로 이중 이미지이다. 이 전쟁 장면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를 위한 소묘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에 인용하였다. 반쯤 열린 서랍에 걸려있는 붉은색 손수건은 전쟁의 비극적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여기서 인간의 몸은 그 형체만 보일뿐 뚜렷이 형상화 된 것은 팔과 발 정도이다. 지극히 말초적인 부분들로만 형상화 되어 있다. 오히려 그림의 주제는 서랍장 같다. 하지만 그 서랍장 속의 붉은 손수건은 장기처럼 보이기도 하며 시체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손수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쟁시 사람은 언제든지 꺼내어 쓸 수 있는 소비물인가? 아니면 그 전쟁의 피해자인가? 그 모호함을 달리는 모호한 인간의 형상으로 더욱더 어렵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2. MARILYN MANSON 충격을 주겠다.지금 일탈의 상징에서 락스타를 뺀다면 얼마나 남을까? 나름대로의 일탈이라던가 하는 것이 있지만 큰 충격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탈과 자이지만 여장을 즐기며 콘서트에서의 동물스러운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이 밴드의 멤버인 Twiggy Raminez이다. 남자이지만 여자의 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여자처럼 앉아있다. 게다가 기괴한 화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있는 의미는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여자의 아름다움과 살인마의 잔혹함을 함께 표현하기 위함이다. (Twiggy는 60년대를 풍미한 모델이다. 깡마른 몸으로 그 이전의 풍만한 미인상을 내려버린 장본이기도 하다. Raminez는 나이트 스토커라 불리는 살인마인 Richard Raminez이다.) 여성과 동물의 융합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도 아닌 여성도 아닌 일탈된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옆의 사진은 리더인 마릴린 맨슨의 사진이다. 그는 여기서 날개 달린 복장과 여성의 속옷을 입고 반라의 상태로 있다. 남성의 몸에 여성성으로 장식을 한 뒤 날개로 마무리 한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살바도르 달리의 표현이 퍼포먼스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 이다. 이들은 몸으로 자신의 음악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의 음악의 주제 중 하나인 Irony of Sex + violence를 말이다. 그들이 사람을 Mechanical Animal이라고 부르듯이 그들에게 몸은 이미 사람이라는 존재의 정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좌측의 사진이 Mechanical Animal의 표지이다. 여기서 맨슨은 여자의 가슴을 가졌지만 남녀 둘 다의 성기를 가지지 않은 몸을 표현하였다. 이 때의 몸이 의미 하는 것은 생명체의 그것이 아닌 기계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면 이미 그 몸은 생명체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기에 이렇게 표현 한 것이다. 마릴린 맨슨 이들은 초기에는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에 동물적 이미지를 융합한 새로운 제 3의 인간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 시기가 지난 현재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사회의 부속품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모습으로 그들은 사회적 폭력을것이다.
하이쿠1. 하이쿠란 무엇인가? 5?7?5의 음수율로 된 일본의 정형시다.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한 줄도 너무 긴 것’이 하이쿠이다. 그 외의 규칙으로는 계절을 상징하는 계어가 들어가야 하며 한꺼번에 읽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기레지가 필수어 라는 것이다. 기레지는 5?7?5 음율의 어느 단락에서 끊어줌으로써 강한 영탄이나 여운을 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예컨대 [~や(이여)] [~かな(~로다)] [~けり(~구나)]와 같은 것이다.)대표적인 일본 서민 문학으로서 침묵의 시이고, 해학적인 형식의 시이며 의외성과 당연성이 있는 시이다. 그럼 이러한 특징이 있는 작품을 하나 보자.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똥 누느라나갈 수가 없다.이것은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가 정치인의 초대를 받고 답장으로 쓴 것이다. 이 단 한 줄에 앞에 말한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가? 그리고 대표적인 서민문학답게 속어도 쓰인다.2. 그렇다면 일본에서 하이쿠의 위치는? 전문 월간지만 해도 8개 동인지만도 800개 쯤 된다. 하이쿠 애호가가 1000만 명이라니 대단한 인기라고 할 수 있다. 마사오카 시키는 이런 말을 했다. “하이카이는 장기, 우타(=와카)는 바둑” 바둑처럼 지식인들의 유희가 아닌 장기처럼 누구나 쉽게 즐기는 것이 하이쿠인 것이다.3. 유래? 과거에 한시가 들어오고 그것이 와카가 되고 또 바뀐 것이 렌카. 렌카가 어려워지니까 쉽게 만든게 하이카이 렌카이다. 여기서 하이쿠의 아버지인 마쓰오 바쇼가 정리하고 하이카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이것이 훗쿠라고 불리다가 메이지 시대 마사오카 시키가 하이쿠 개혁을 하고 정리를 한다. 그리고 현재의 하이쿠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4)하이쿠의 매력나비 한 마리 돌 위에 앉아 졸고 있다.어쩌면 나의 슬픈 인생을꿈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하이쿠의 특징이자 시키가 누누이 주장한 사생의 미가 극도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림을 그리듯이 주변을 표현하고 그 속에 자신의 심정을 담는 것이라는 시키의 하이쿠론을 이 단 한편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하이쿠의 매력인 것이다. 어렵지 않다. 단지 묘사된 자연의 정경을 그린다. 그리고 그것을 음미하다 보면 화자의 마음이 이해되는 것이다. 짧고 간결하고 쉬운 것이 하이쿠의 매력이다.5) 하이쿠의 영향? 메이지 이후 하이쿠가 서구에 소개되면서 이미지즘과 릴케의 시작 활동에 영향을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양에 소개된 하이쿠는 17음 정형과 기레지를 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하이쿠 특유의 선명한 이미지와 압축의 미는 잘 전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압축의 미는 서양에서는 동양의 선의 사상으로 해석되기도 했다.이러한 하이쿠는 서양의 시에 있어서 전통적인 사상성과, 의미성을 벗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떠한 가를 간결하게 노래 할 수 있게 해주었다.무엇보다도 하이쿠가 가진 매력은 대중성이다.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이 시 창작에 참여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하이쿠가 시계에 끼친 가장 큰 영향력일 것이다.6) 대표적 작가(1)마쓰오 바쇼 : 하이쿠 작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하이쿠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단순한 서민 문학이었던 하이카이 렌카가 자리를 잡게 하고 그것의 수준을 높였다. 하지만 그는 하이카이의 특징인 해학미와 대중성을 잃지 않게 함으로서 하이카이의 특질을 유지 시켰다. 하지만 초기의 작가라서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 시키는 이렇게 평했다. “1000연 수 중에서 200여 수 정도나 수작이다.”그에게서 유명한 것은 [오꾸로 가는 작은 여행길]이라는 하이카이 기행문이다. 이 여행 후 바쇼는 인간의 심오한 심정을 쉽고 간결하게 자연에 대비시켜서 표현하는 하이쿠 기법을 완성시킨다.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바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본인이라면 잘 아는 구다. 이 작품을 보면 바쇼가 하이쿠의 아버지인 것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봄이 온 것을 표현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가 아닌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로 표현 한 것이다. 사물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과 정적인 이미지에 감정을 담는 것이 저 표현에 드러나는 것이다. ‘소리없는 소리를 듣고 생명의 발동을 포착한 것’ 이라는 오가타 즈토무의 말이 이 구에 대한 명답인 것 같다.(2) 마사오카 시키 : 개인적으로 바쇼가 하이쿠의 아버지라면 시키는 하이쿠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메이지 시대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일본 전통의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을 때 시키는 하이쿠를 수집, 정리 하이쿠론을 발표하면서 하이쿠를 재정립 시켰고 부흥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 외에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뻔 했던 오쇼 부손의 발견, 그리고 제자인 다카하마 교시와 가와히가시 헤키고토를 키운 점일 것이다. 유명한 하이쿠 작가들 몇 명을 뽑으라면 마쓰오 바쇼, 오쇼 부손, 고바야시 잇사, 마사오카 시키, 다카하마 교시, 가와히가시 헤키고토 등 인데 이 중에서 4명에 시키가 관련되어 있다. 이것만 보아도 시키가 하이쿠 작품을 떠나서라도 하이쿠 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목차Ⅰ. 태권도의 역사Ⅱ. 태권도의 정신Ⅲ. 태권도의 기술Ⅳ. 태권도 수련의 목적Ⅴ. 태권도 수련의 효과Ⅵ. 결론Ⅰ. 태권도의 역사1.고 대)1) 선사시대인간이 선사시대부터 수렵 채취생활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맨손 격투기나 아니면 사나운 맹수를 서로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대결의 자세를 취했으리라는 점도 쉽게 짐작이 가능하며 무기를 들었건 맨손이건 대결의 자세는 오늘날의 태권도나 유도와 씨름에 있어서 의 대결의 자세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2) 고구려고구려 환도산성에 있었던 무용총 현실 벽화에는 오늘날의 태권도와 유사하게 체계화된 자유대련의 장면이 고분벽화에 나타나 있으며, 당시에는 현재의 태권도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무술들이 태껸, 수박, 권법, 각저, 날파람 등으로 불리워 졌었다.당시의 체육은 무사 체육시대임을 상기할 때 무예도 호국무예임을 추측할 수 있으며 명 림답부, 연개소문, 남생 등은 고구려 무사단체인 조의선인 출신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헌신 한 뛰어난 영웅들이었다. 고구려 무인들의 용맹성과 끈질긴 투지력과 국가를 지켜내려는 충성심은 조의선인으로서의 정신적인 연마와 수양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3) 백제건국이래 공격과 방어의 전쟁이 끊임없었기에 무예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또한 삼국 은 같은 시대에 서로 호각지세를 이루었으므로 백제는 고구려의 조의선인 제도, 즉 선배 제도가 청년무사단체라는 것과 또한 신라의 화랑제도도 알았을 것이다. 당시 백제는 외세 의 침공을 방지하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격검술이 널리 성행 했으며, 특히 고구려에서 태동을 한 태껸은 백제에 이르러 이웃 신라와 함께 개화기를 맞 게 되고 부락마다 태껸에 의한 우열을 가름하는 민속놀이로 유행했다.또한 백제시대에는 농군들의 심신단련 방법과 국력증강을 목적으로 도수공권의 무술을 수련했음이 에 오늘날의 수박타로 전해져오며, 전라남.북도에 십 여년전까지 전 해오는 달맞이 집 싸움에서 역력히 입증되고 있다. 마을의 힘센 장정들이 무기 없는은 국제교류가 가장 활기를 띄었으며 왕은 사 신을 보호하고 외국상인들을 독려하기 위해서 고려의 각종 불교행사와 나라행사를 참관시 켰다. 이때 고려의 태권인 수박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으며 수박을 배워 자기 나라에 가 서 고유의 무도와 자연스럽게 융화되었을 것으로 본다.이와 같이 고려의 태권도는 수박희라는 이름으로서 무인정치시 사병의 양성이란 차원에서 발달되었고 무신의 필수과목으로 예종 4년(AD.1109) 국자감에 칠재를 설치하였는데 그 중 6재는 유학재이고 일재는 무학재로서 두었다는 것은 태권도사에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또 왕궁이나 사원 병영 서민들 사이에 일반화된 반면에 국가의 중요한 행사나 불교의 의식행 사, 서민들의 행사에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사실은 고려 태권도의 확고한 체계와 발전을 시 사하는 증거가 된다.3.근 세1) 조선시대)조선초기에는 부국강병을 위해 무예를 중요시 하였다. 특히 맨손 무술인 태권도는 모든 무술의 근본으로 여겨 매우 중요시 하였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병조(지금의 국방부) 의흥 부에서 수박희로서 인재를 시험하여 방패군에 보하되 3인을 이긴자를 채용하였다’라고 하 였고 이어서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갑사를 뽑되 의흥부의 무사를 모아 흥인문 안에서 갑사를 충족시켰다.이에 뽑히지 못한자는 3군의 부령 주보를 삼고, 수박희로 3인 이상을 이긴자는 모두 합격 시켰다.‘라고 기록하였다.또 태종실록은 ‘임긍(태종)이 잔치를 배풀고 갑사 및 방패군으로 하여금 수박희를 행하도 록하고 구경했다.’라고 했고 ‘시위군사에게 수박희를 시키고 상을 주되 차등이 있었다.’라 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이 태종실록의 기록은 태껸의 높은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기록들은 수박희가 이미 일반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고 정부 의 관리채용에 있어서도 특기로 인정될 만큼 그 유용성이 입증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당쟁을 일삼고 문치주의에 흐르게되자 무예를 경시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더구나 화약의 발명과 무기의 과학화로 린 사람은 이원국이다. 이원국은 당시 식민지 국민에게는 무술을 지도할 수 없게 금지령이 내려졌으나 아베 조선총독을 설득하여 허락을 받음으로서 도장의 설립이 가능했었다. 그는 1927년 일본에서의 대학시절 후나고시의 송도관에서 처음으로 당 수를 배웠으나 현재 명동에 위치한 자유중국 대사관의 무관이었다. 호시라는 사람을 만나 많은 중국의 무술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하남성, 하북성 등지에서 많은 무술들과 접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자유중국 대사관 앞에서 택견을 하는 노인과 3회 의 조우를 통해 택견의 발기술을 접하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알려진 것과 같이 그가 일본에서 익힌 가라데만을 지도한 것이 아니고 중국의 여러 무술들과 택견의 기술과 가라데의 기술을 종합하여 나름대로의 기술을 지도하였으며 해방전인 그 시기에는 가라데를 품새를 사용하지 않고는 도장을 개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수련의 목적으로만 가라데의 품새를 가르쳤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현재 태권도의 출발점이라고 했다.즉 그가 우리의 전통무예인 택견과 가라데와 중국 무술을 수용하여 지도했다는 주장은 태 권도 역사의 전통설에 가까이 할 수 있는 가치를 부여해 주었다.4. 현대)1. 대한민국정부수립이후1945년 고아복 직후에는 당수도 공수도 권법등의 이름으로 각 사범 중심으로 수련하였는 데 당시에는 청도관, 연무관, 송무관이 대표적인 도장 중심의 수련단체로 활동하였다. 그러 다가 1955년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명칭제정회의에서 태권도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도록 결의하였다.그 당시에는 일본식 도장 명칭을 사용하여 끝에 관자를 붙여 도장 중심의 단체를 형성하 였는 데 6.25동란 직후 40여개의 태권도 단체가 난립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이조시대의 태권 수련 방법을 전승하여 수련했다고 볼 수 없고 일본류나 오끼나와류에 자기도장의 특이한 수련방식을 복합시켜 가르쳤다고 본다. 그때의 단체는 오도관, 한무관, 충무관, 청무관, 무 학관, 상무관, 창헌관, 문무관, 강덕원, 정도관, 연무관, 수무관 등이품새이다.3) 태극 3장은 팔괘의 이(離)를 의미하여 이는 불을 나타내고 뜨겁고 밝음을 지닌다.태권도 품새 수련을 통한 불같은 정의심과 수련의욕이 생겨난 파란 띠로 승급할 수 있는 과정이다. 새로운 동작은 손날 목 치기, 손날 막기이고 새로운 서기는 뒷굽이이며 기술은 연속 막고 치기와 차고 연속 지르기가 특징이다. 빠른 속도로 상대로부터의 치기를 막고 되치는 기술의 힘을 중요시 한다. 태권도 6급이라야 수련할 수 있다.4)태극 4장은 팔괘의 진(震)을 의미하며 진은 우뢰를 나타내고 큰 힘과 위엄 있는 뜻을 지니고 있다. 파란 띠의 품새답게 차원 높은 기술과 동작이 많다. 새로운 동작은 손날몸통막기, 편손끝찌르기, 제비 품목치기, 옆차기, 몸통바깥막기, 등주먹얼굴 앞에치기이고 특수한 미끄럼발이 있다. 겨루기에 대비한 각종 동작과 뒷굽이 서기가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태권도 5급의 과정이다5) 태극 5장은 팔괘의 손(巽)을 의미하며 손은 바람을 나타내고 바람의 강약에 따라 위세와 고요의 뜻을 지닌다. 힘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수련단계라 할 수 있겠다. 새로운 동작은 메주먹내려치기, 팔굽돌려치기, 옆차며 옆지르기, 팔굽표적치기가 있고, 서기는 꼬아 서기와 왼서기, 오른서기가 나온다. 특징으로는 차기 뒤에 아래막고 몸통막기가 막기만 연속되는 동작과 뛰어 구르면서 치는 동작이 특수하고 표적치기 시에는 표적이 움직이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태권도 4급의 과정이다.6) 태극 6장은 팔괘의 감(坎)을 의미하며 감은 물을 나타내고 끊임없는 흐름과 유연함을 뜻한다. 만물의 생명원인 물의 특성처럼 기술의 연결이 물흐르듯 해야 한다. 새로운 동작은 한손날얼굴 바깥막기, 돌려차기, 얼굴바깥막기, 바탕손몸통막기가 있고 품새의 중간에 편히서기가 나온다. 수련상의 유의점은 돌려차고 난 다음 찬 발을 정확히 앞으로 내딛기와 바탕손 몸통막기를 할 때는 막는 부위가 다르므로 팔목으로 막을 때보다 손바닥 길이만큼 낮추어야 한다. 태권도 3급의 과정이다.7) 태극 7장은 팔괘의 간(艮)을 의미.2. 겨루기겨루기는 품새를 통해 익힌 공격, 방어의 기술을 응용하여 실제로 상대방과 대결하는 기술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이 일정한 틀에 맞추어 연습하는 맞추어 겨루기와 기술의 제한이 없이 연습하는 겨루기가 있다.태권도경기는 겨루기의 기술을 충분히 습득한 청ㆍ홍 두 선수가 일정한 경기규칙을 지키면서 승패를 가리는 방법이다. 경기는 태권도의 공격기술 중에서 주먹지르기와 발차기만을 사용하고 몸의 전면만을 공격하되 얼굴공격은 발만 사용하며, 아래공격은 금지되어 있다.더욱이 인체의 급소는 모두 보호구로 막아진다. 머리보호대, 몸통보호구, 낭심보호대, 팔ㆍ다리보호대 등으로 경기 중 인체상해를 예방하게 된다.1) 타이밍(Timing)이것은 동작의 시간조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가 심하고예측하기 힘든 외부조건에 대해 자기 동작을 시간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다. Timing이 나쁘다는 것은 적시에 적절한 운동을 하지 못하여 효과적인 움직임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겨루기에서 상대가 뒤 후리기로 공격할 때 뒷발로 받아 차기를 적당한 시간에 적절한 동작으로 취하지 않으면 득점할 수 없다. 이것은 동작의 시간성을 말한다. Timing은 육체적, 생리적 그리고 정신적인 면으로 분석될 수 있다.상대방이 준비 중 또는 행동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일격을 가한다.상대방의 행동이 최고조일 때 일격을 가한다. 주기적으로 변동하는 긴장이 보일 때, 즉 상대의 집중이 산만할 때 일격을 가한다. 상대방이 주의를 게을리할 때, 즉 상대방이 산만할 때 일격을 가한다. 경우에 따라 타이밍은 많은 위협적인 동작을 포함한다. 만일 상대방이 FEINT의 리듬을 받아들여 다양한 기술을 피하고자 시도하였다면 아주 작은 주저가 리듬을 파괴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는 결과가 된다. 일반적으로 Timing이란 상대가 공격준비를 하는 순간과 상대의 공격이 끝나는 순간에 공격이나 행동을 우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타이밍에 있어서는 상대가 공격해 오는 것을 피하고 받아 차는 동작하겠다.
일본의 불교 - 전기一. 序論일본에는 종교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장 종교가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종교가 없다는 말이 있을까? 이것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범세계적인 종교가 없다는 말이다. 일본 종교의 특징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신토화 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들 또한 다른 신으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것이 불교이다. 사찰이라던가 중이라는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불교의 특징이라면 나무아미타불 등의 진언을 계속 외우는 다는 것, 그리고 불교의 신들의 숭배이다.우리처럼 단순히 묶어서 부처님이 아닌 아미타불, 여래불, 비로자나불, 비사문천, 미륵불 등등 세세하게 나누어서 믿는다. 그리고 각각 믿는 부처도 다르다. 이것이 일본 불교의 특징이다. 다신을 숭배하는 일본의 신앙이 그대로 불교에 반영된 것이다.조금 더 들어가자면 우리의 불교에도 저런 부처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부처님일 뿐이다. 구체적인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진언 중심의 불교가 발전한 것은 교육환경에 있어서 닫혀 있었던 일본이었기에 보다 단순한 형태의 불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입맛에 맞았던 것이 진언 중심의 불교였다.이렇게 일본의 불교는 일본화가 되면서 많은 변화를 겪은 현재는 일본만의 불교가 되어있다. 이 불교가 종교가 아닌 일본인의 생활에 있다는 것도 일본 불교의 특징이다.우리의 불교로 이해 안 되는 것이 일본 불교이다. 결혼도 하고 돈도 번다. 중이라는 것도 세습적인 가업이다. 이러한 일본의 불교가 하는 역할은 죽음이다. 사람이 죽으면 절을 찾고 화장을 지내는 불교식의 장례를 치른다.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본 불교의 처음이 이번 레포트의 부분이다.二. 本論 上1. 이 책의 3장과 5장은 초기의 일본 불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전래가 되었는지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를 말한다. 일본에 불교는 긴메이 천황 때 전해졌다고 하는 학설과 그 이전에 전해졌다는 학설이 있지만 6세기에 전해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렇게 정식으로 전해지기 이전부터 도래인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숭상되고 있었고 남조와 교류하고 있었던 만큼 일본 조정이 불교에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이 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본의 종교적 상황이다. 전통적 신앙이 약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거대한 고분에서 사원의 증축으로 바뀐 것을 본다면 전통신앙에서 불교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동북아 국가의 불교처럼 국가 불교로 자리 잡게 된다. 다음은 쇼토쿠 태자의 불교이다. 섭정을 하면서 강력한 왕권 구축을 위한 수단으로 쇼토쿠 태자는 불교와 유교를 선택한다. 이러한 목적론 외에도 쇼토쿠 태자 자신이 불교를 숭상한 것 같다. 三經義疏라는 주석서를 쓴 것과 법룡사를 지은 것이 그렇다. 이렇게 불교가 융성하면서 중의 수가 늘자 승니령을 내려서 제한하기 시작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후에 쇼무천황의 대불건립과 교키의 활약으로 민간에 불교가 퍼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서 당의 감진이 불교의 체계화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불교의 타락과 귀족들의 반발에 의해서 나라시대의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한다.2. 5장의 헤이안 시대의 불교 특색은 후대와 비교되게 학파라는 것이 있으며 학문적 성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것외에는 사이초의 천태종과 구카이의 진언종이다. 이 때 사이초의 업적이라면 감진이 전한 계율 등을 간략화 시킨 것이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현재 일본 불교의 특징이 발현되는 것 같다. 다음의 특징으로는 밀교가 전해진 것이다. 이러한 것의 영향으로 초목불성불을 주장하기 까지 한다.三. 本論 下이번 챕터에서 아쉬운 점은 작가의 의도가 잘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나 이러한 불교가 영향을 끼친 것 보다는 그것이 전해진 객관적 사실과 그것의 일본화 된 내용보다는 그러한 학파가 담고 있는 내용을 말한 것이다. 분명 불교는 그 나라에 맞추어서 발전했다. 그리고 일본은 독특한 형태로 발달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일본인의 정신, 사상을 밝히는 것이다.3장에서 화엄경의 내용을 언급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단순히 사상으로 일본문화를 보기 위해서 그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부차적인 수준으로 언급하지 않고 그 부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도 일본의 흡수형태가 아닌 원래의 형태를 언급한다. 당시의 사상 보다는 그 사상의 원류에 지나치게 많은 할애를 하는 것이 원래 사상사라는 책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는 일본인의 와해되어가는 전통을 막고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일부분이 아닌 이후에 읽은 5장의 경우에도 이러한 구성이 많다. 그렇다면 작가의 의도는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된다.읽으면서 느꼈던 다른 문제는 ‘무엇을 했는가.’ 이것이 중심이다. 위인이 무엇을 했는가도 역사에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문화라면 그것이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그러한 것의 언급이 없었고 너무 지나치게 인물 중심의 내용이었던 것이 아쉽다. 하지만 인물의 행보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자신의 주관적인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서 그러한 영향을 추측하게 해주고, 생각할 거리나, 공부할 화두를 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물론 일본의 불교의 수용에서 남조와의 교류에 의한 영향으로 불교가 어느 정도 전파 되어있었다는 것, 도래인 사이에서는 이미 숭배되고 있었다는 것 등은 개인적으로 새로운 시각이었다. 특히 3장에서는 백제에서 전파되었다는 언급은 일본인이 직접한 말이었기에 놀라웠다. 지금까지 접한 책들에서는 백제라는 구체적 언급보다는 도래인이라는 표현이 많았고, 한국에서의 전래라는 것을 피해나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비토 마사히데가 친한파인지 반한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본다면 최소한의 객관성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한 것 같다. (그렇다고 극단적인 친한파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