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의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의 실패 요인- 부지선정과정상의 문제점 >1.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의 비민주성방사성폐기물 처분 방식과 처분장 부지를 결정하기 위해선 원자력 발전의 지속 여부를 포함하여 원자력 발전의 수혜자인 시민들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처분을 위한 모든 준비과정, 예를 들면 원자력 정책, 전문가들이 수립한 방사성폐기물 처분 계획 등이 완전히 공개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이에 대한 평가와 검토가 국내외의 전문집단과 비판적 과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의견을 바탕으로 지역주민, 관련 환경단체, 전문가 등에 의한 공개적 의견수렴 과정이 있어야 하나 지금까지의 과정에서는 민주적 절차는 없었다.2. 부지적합성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은 300년 이상 생물권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지질이 안정되어야 하고 지하수가 스며들어선 안된다. 그러나 위도의 경우 지질구조 상태의 안정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질분포상태, 지하수의 영향, 지진 안정성 등이 낮게 평가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을 설치하려다 실패하였다.3. 주객이 전도된 지역개발 지원사업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같은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지역에 정부에서 반대 급부로 지역발전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것은 정부가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지역주민의 동의를 구하여 공공사업을 추진하면서 감사와 위로의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역발전을 미끼로 지역주민들을 회유 혹은 매수하여 필요한 공공사업을 추진한다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왜곡하고 사회분열 현상을 가속화하며 공공사업의 비용을 증가시킬 것이다. 나아가 설득의 대상이 되는 지역주민들의 명예와 자존심을 모욕하고 돈이면 전부라는 식의 배금주의를 확산시켜 우리 사회의 정신적 가치를 병들게 할 수 있다. 정부가 한때 검토했다가 안팎의 비판을 받고 철회한 위도 주민 직접 보상논란도 정부와 한수원이 막대한 지역 지원책으로 주민을 회유하려다가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또한 정부가 선진국을 예로 들며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안전하다고 선전하면서 선진국의 투명하고 민주적인 절차는 따라가지 못하니 경제적 합리성이 결여된 턱없이 거창한 지역개발사업안이 나오고 정부가 나서서 돈으로 정신적 가치의 거래를 부추기는 부도덕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문제이다.4. 허점투성이 보고서, 신뢰할 수 없는 자문위원한 지역을 예로들어 위도의 부지선정 과정에서, 산자부와 한수원은 애초에 선정된 4개 지역이 철저한 자료조사와 분석, 현장답사와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자문 등 5단계 심사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용역연구의 결과 라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연구보고서는 환경단체로부터 과거의 자료를 재탕한 허점투성이 보고서 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자문에 응했다는 각계전문가 의 명단조차 싣지 않아 신뢰성을 크게 상실했다.▶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과 경주 지역 발전{유치 찬성 측유치 반대 측- 3천억원 특별지원 + α- 해매다 85억원의 폐기물 반입 수수료- 직원 9백여명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양성자 가속기연구소 지원- 고용은 대부분 임시직, 일용직- 일시적 건설 경기 활성화- 문화재가 있는 역사적인 해안이 피폐- 경주지역 도로는 육상 방폐물 이동으로 핵 의 도시가 됨- 우리나라 원전이 폐쇄되면 잔재물이 다 경 주로 집결할 것이라는 생각- 방폐지역은 영원히(수천년 동안) 사용할 수 없다- 핵폐기물 수송 전용 항구( 문화, 관광, 역사, 청정해안 이미지 훼손 등으로 인한 관광객 감 소)방폐장 부지 선정을 위한 주민투표로 경주, 군산, 영덕, 포항 등 4곳에서 실시했으며 찬성률이 가장 많은 곳을 선정하기로 하였고, 개표 결과 경주가 가장 높은 89.5%의 찬성률을 기록해 방폐장 유치 지역으로 확정됐다. 그 이전의 부지선정과정과는 달리 정부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정하기로 했고 그 결과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또 그 과정에서 수 차례의 토론회와 설명회를 가짐으로써 주민들을 부지선정과정에 참여하게 하였고 그 이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부지의 적합성 측면에서도 부적합한 곳을 일방적으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경주, 군산, 영덕, 포항이라는 4곳을 적합성 측면에서 고려해 선정하였다.경주는 정책집행자의 활발한 홍보와 주민들의 관심을 끌어들여 투표률을 높이는 등 지역발전을 위해 운동한 결과 방폐장 유치에 성공하였다. 방폐장 건설지 선정 주민투표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도 도출되었는데, 우선 안전성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방폐장 부지를 주민투표를 통해 선정한 것은 후유증을 남길 전망이다. 정부는 철저한 부지 적합성 조사를 통해 예상 부지를 선정하고 주민들의 찬반을 묻는 어려운 방식 이 아니라 수천억 원의 지원금을 미끼로 방폐장 유치 경쟁을 유도하는 쉬운 방법을 택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한 정부가 무리하게 중·저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을 추진하면서 결과적으로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을 어렵게 만든 것도 큰 실정으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방폐장 유치와 관련해 중요한 요인으로는 안정성, 경제성, 환경성, 불가피성, 지역발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 투명성, 신뢰성, 민주성, 주민참여, 절차적 민주주의, 정책합리성, 지속적인 홍보활동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 가운데 이번 방폐장 선정과정에서 취약했던 부분은 안정성에 대한 부분이다. 아무리 경제적인 보상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위험성, 안전성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한 것 같다. 주민참여를 이끌어 유치했다는 것에는 대단한 의의가 있지만 경제적 보상만을 앞세운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핵 발전과 핵폐기물 처분장에 대한 상반된 주장 >{유치 찬성 측유치 반대 측안정성- 다방벽 설계로 지진, 홍수, 산사태 등 천재지변에 안전- 외국의 경우 대부분 핵발전 포 기 경향환경성- 발전소 부지가 작게 들어 입지 활용면에서 유리하고 공 기나 바다를 오염시키는 공해 물질이 거의 발생되지 않음- 방사능 유출 문제- 핵폐기물 처리 문제경제성- 풍력, 태양광 발전의 경우 현재 최소 2배에서 15배 정도 고가임- 핵발전소 건설비용, 발전소 폐 기 비용, 핵폐기물 처리비용을 고려하면 싸지 않다.불가피성- 핵발전이 국내 총 전력의 40%를 차지- 국제 에너지값 상승- 대체에너지의 충분한 경제성 (현재 외국의 경우 발전단가가 핵 발전의 발전단가와 같은 수준 임)< 특정지역 수용을 위하여 검토되어야 할 요인들 >
1. 7차 교육과정의 특징교육개혁 차원에서 개정된 제 7차 교육과정은 학생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다양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필수과목의 축소 및 선택과목의 확대, 정보화 · 세계화 교육의 강호, 수준별 교육과정의 편성 · 운영을 개정 원칙으로 선정하였다. 제 6차 교육과정이 교육내용과 방법의 쇄신 차원의 개정이었다면 제 7차 교육과정은 신교육체제의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의 큰 틀을 중심으로 개정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교육과정이다. 제 6차 교육과정의 구성방침이 교육목표, 내용, 운영, 제도의 네 가지 기둥을 기반으로 설정하였다면, 제 7차 교육과정의 구성방침은 교육과정의 기본방향과 인간상 구현과 관련하여 국민공통기본 교육과정의 편성,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의 도입, 수준별 교육과정의 도입, 재량 활동의 신설 및 확대, 교과별 학습량의 최적화와 수준의 조정, 질 관리 중심의 교육과정 평가 체제의 확립,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창의성, 정보능력의 배양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2. 사회과 교육과정의 개정중점{제 6차 교육과정제 7차 교육과정비 고개정중점· 민주 시민의 자질 육성· 올바른 사회인식 능력의 제고· 통합 교과로서의 성격 강화(초, 중학교)· 통합성과 영역별 학문영역과의 조화 (고등학교)· 사고력 신장과 실생활에의 적용력 강조· 교수 · 학습 부담의 경감· 사회의 변화와 학문 발전 요소의 반영· 지역화의 강조· 교육과정 구성체제의 개선· 정보화 · 세계화 시대의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시민적 자질 육성· 학습자 중심의 수준별 교육과정의 추구· 내용 수준과 양의 하향 조정· 시민성 함양 교과로서의 통합 사회과와사회과학 교과로서의 계통성의 조화 추구· 성취 수준과 학습 활동을 결합한 형태로의 내용 진술· 교수 · 학습 방법의 개선과 다양화 추구 및 구성주의적 학습 환경의 강조· 수행평가 실행의 강조· 총론의 기본 방향과 인간상 및 교육과정 구 성방침의 반영3. 제 7차 사회과 교육과정의 편성과 구성체계1) 사회과 학년별 시간 배당 기준{구분역할을 하는 교과라는 점과 바른 사회 인식을 바탕으로 지식, 기능, 가치, 태도를 고르게 습득시켜야 하는 교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제 7차 교육과정에서의 건전한 시민적 자질은 21세기의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 육성 이라는 인간형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시민성의 본질을 합리성과 자발성으로 보고 비판적 합리성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발성을 강조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결론적으로 사회과 교육과정의 성격에는 -공동체 의식, 관용과 타협정신, 참여와 책임의식 등의 민주적 가치와 태도를 함양하고(문화유산 전달의 관점), - 사회과학의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고 현상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며(사회과학적 관점), - 사회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쟁점의 반성적 탐구 관점), - 민주시민의 자질을 육성하는 교과이다 라고 규정하고, 서로 다른 세관점이 종합적으로 공존하면서 통합성을 추구하는 사회과와 계통성을 유지하는 사회과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5. 제 7차 사회과의 목표일반적으로 교육 과정에 제시되는 목표들은 교과 목표, 학년 목표, 단원 목표의 순으로 위계화 된다. 교과 목표보다 상위의 목표들인 학교 교육 목표, 초 · 중 · 고등학교의 학교급별 목표는 교육기본법과 교육과정 총론에 규정되어 있으며 사회과의 학교급별 목표는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사회과의 성격에 규정되어 있다. 국민 공통기본 교육과정의 사회과의 교과목표는 총괄 목표와 행동 영역별 목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목표는 사회과 10학년 마지막 단계에서 학습자가 성취해야 할 최소 필수 수준의 성취 능력을 중심으로 진술하도록 하고 있다.먼저 종합 목표는 사회과 교육의 궁극적 목적인 민주적, 기능, 가치 · 태도 목표를 종합하여 제시한 것이다. 또한 영역별 목표는 6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 항은 지리, 역사.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상호 관련 하에 통합적인 교과 운영을 강조한 목표이다. 그리고 나 , 다 , 라 , 항은 지식 영역의 목표들을 고려4 사회과의 지리, 역사, 사회과학의 학문성과 사회과학 개념 확대의 원칙과의 조합을 꾀하여 사회과 교육의 통합성과 사회과학 교육의 계통성 간의 조화를 추구5 학교급에 따른 통합방법의 다양성과 균형성을 고려3) 내용의 제시방식제 7차 사회과 교육과정은 학습자들이 성취해야 할 목표로서의 기본적 지식과 기능, 가치 · 태도와 이러한 기본적 지식과 기능, 가치 · 태도의 습득을 가능케 하는 학습활동이 결합된 형태로 기술 되어있는데 이는 내용과 학습활동 결합한 형식으로 종래의 방식과 근본적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4) 수준별 교육과정의 구성사회과에 수준별 교육과정의 도입도 제 7차 교육과정의 큰 특징인데 수준별 교육과정의 기본정신은 학습의 개별화와 자기 주도적 학습력의 신장을 통한 사회과 교육의 수월성 추구로 요약될 수 있다.수준별 교육과정의 구성방식은 기본과정과 심화과정의 두 가지 수준으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는데, 기본과정은 사회과의 단원학습을 통해서 대부분의 학습자들이 성취해야 할 목표로서의 기본적 지식과 기능과 가치, 그러한 기본적 지식, 기능, 가치의 습득을 가능케 하는 학습활동을 결합하여 기술하였고 심화과정은 기본과정을 기대수준 이상으로 성취한 학습자들이 이수하는 과정으로서, 학습자의 창의적 사고와 상상력을 높일 수 있는 활동, 교실에서 학습한 내용을 구체적 사회현실에 적용하는 활동, 학습자의 흥미와 관심을 과거와 미래 혹은 타지역으로 확대하는 활동 등을 제시하였다.5) 학교급별 내용구성(1) 초등학교 사회과(3~6학년)의 내용구성1 내용 구성의 원칙a. 학습자의 발달, 사회적 경험, 사회 기능을 고려하여 환경 확대법의 원칙에 따라 배열하였으며 각 학년별로 지구촌적 관점을 고루 반영하여 환경 확대법의 제한점을 보완하였다.b. 사회 과학의 기본 개념을 구체적 사례와 문제에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되, 나선형 교육 과 정의 원리에 따라 확대될 수 있도록 하였다.c. 주제 또는 문제를 중심으로 한 내용과 방법의 통합, 생활 경험과 지식의 통합에 초점을 2) 중학교 사회과(7~9학년)의 내용 구성중학교 사회는 6학년까지의 통합적으로 학습한 내용을 좀 더 심화시킴으로써 계통성, 통합성, 심층성을 동시에 확보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중학교 사회과는 a. 지리, 역사, 사회과학의 제 영역을 내용으로 하는 분과형 b. 연결되는 내용들의 순서에 따른 배열을 통해 관련을 시키는 상관형 c. 2~3개의 관련되는 영역간의 통합을 추구하는 융합형의 3가지 형태를 구성하였다.1 지리 영역제 7차 교육과정에서 지리 영역은 공간 의식과 관련하여 1학년에서 지역지리 중심으로 다루고 3학년에서는 계통지리 중심의 통합주제 접근을 하는 2개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3학년 2학기의 2개 단원의 중학교 전체 내용구성의 원칙에 따라 순수 계통지리의 내용이 아니라 지리주제 중심의 통합 단원의 성격을 띠고 설정된 단원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지리 중심의 분과적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2 역사 영역7차 교육과정에서 역사영역은 2, 3학년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역사(세계사) 영역의 내용 구성의 특징은 인간사회와 역사 라는 단원의 신설이다. 이는 지리영역과의 통합과 함께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의 특성과 역사 연구 방법을 익힘으로써 앞으로 역사 교육의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국사영역은 2, 3학년에서의 사회 영역과 관련지어 다루도록 하고 있다.특히 국사 영역은 2학년에 전근대사, 3학년에 근 · 현대사를 학습하도록 한 체제가 무너지고 2학년에서는 고려까지를, 3학년에서는 조선이후를 학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3 일반사회 영역6차에서는 국제 정치 · 경제와 현대 사회 · 문화의 내용을 먼저 다루고 3학년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원리와 실제 관련 내용을 다루도록 한 바 제 7차에서는 2학년에 사회 및 법 생활의 원리와 실제에 이어서 3학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원리와 실제의 순으로 구성되어 내용의 체계성이 많이 보완되었다. 그리고 2학년의 6단원과 3학년의 4단원이 상관 통합사회와 환경 과목의 신설과 심화 선택과목으로 경제지리 , 한국근 · 현대사 , 법과 사회 과목이 신설되었다.1 일반 선택과목 : 인간사회와 환경{구분제 6차 교육과정제 7차 교육과정비 고내용없음1. 인간사회와 환경의 구조2. 인간사회의 탐구3. 산업화와 현대사회4. 지역화와 지방자치5. 세계화와 세계의 이해6. 정보화와 정보사회7. 새로운 세계의 창조· 신설 과목(4단위)· 국민공통기본 교육과정과 심화선택과목의 교량 역할의 과목· 교양 및 통합 과목의 성격 강조· 각 단원마다 통합 주제를 중심으로 지리, 역사, 일반사회의내용을 통합하여 구성2 심화 선택과목a. 한국지리한국지리 과목은 계통 지리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조직하고, 지역 지리적 접근을 결합하여 국토 공간에 관한 심층적인 이해를 도모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한편 한국지리 과목의 경우, 국토관을 강조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절대적 공간과 객관적 공간을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의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구성되어 있으므로 10학년 사회의 지리영역과 중복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있다.b. 세계지리세계지리 과목은 세계 각 지역의 지리적 현상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이해하여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세계 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과목이다.세계지리 과목은 세계화에 피동적인 인간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계 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는 데 그 의의를 두고 있다.세계지리과목의 내용은 우리가 가까운 국가들, 일찍 산업화된 국가들, 지역 개발에 활기를 띠는 국가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변화를 겪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구분하여 6차와 비교하여 지역구분 방법이 변경되었다.c. 경제지리경제지리 과목은 지표 위에서 전개되는 경제 활동을 특성을 지리적 관심에서 체계적,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 및 세계 각 지역의 경제 발전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데 필요한 능력과 태도를 기르는 데 목적을 둔 제 7차 교육과정에서 신설된 과목이다.{구분제 6차 교육과정제 7차 교육과정비 고내용과목(필수)11~의 성숙
Ⅰ. 서론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을 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존재하지 말았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한다면 그같은 모순도 없을 것이다.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애써 외면하려 하면서도 감출 수 없는 호기심으로 곁눈질하고 쳐다보며 가까이 다가가고픈 기묘한 욕망이 기이한 욕망의 사슬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외면해선 곤란한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매춘현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매춘현상은 우리 인식체계 속에서 이 용어를 접하고 제일 먼저 연상할 수 있는 일종의 혐오, 호기심, 방관, 탐닉 즉시적 배설욕 등 모두를 순간적으로 촉발시킬 수 있는 가시적 원인행위, 그 자체일 뿐이다.매춘이 어제 오늘 얘깃거리가 아니고 인류가 생겨난 이래 가장 오래된 직업한국사회에선 매춘업 이란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매춘은 직업일 수 없다. 이 말은 매춘은 그 어느 경우에도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양, 있도록 있을 수 없는 일로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일반적 이중심리 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러한 심리로 인해서 매춘문제는 언제나 논의의 주된 대상이 된 적도, 될 수도 없었다. 마치 단물이 빠지면 씹다 뺑어 내고 또 씹고 싶으면 언제 어디서나 살수 있는 껌조각 정도의 의미만을 가진 채 논의의 가치조차 없는 어두운 뒷전의 이야깃거리에 불과했다.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은폐되어서도 안되고 덮을려고 해서도 안된다. 이 문제는 성을 팔고 사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Ⅱ. 성매매 문제의 배경과 심각성1. 성매매 문제와 윤락행위방지법성매매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문제화 되었다. 그러나 성매매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는 이유로, 또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더욱더 확대되었다. 성매매의 문제는 일제시대 이후 때로는 묵인되고 조장되면서, 때로는 철저히 금지되면서 끊임없이 사회문제화 되었고 그 결과 1961년 윤략행위방지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한 대안이 부족하였다. 매매춘 여성들을 선도, 보호할 수 있는 보호 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시설이용도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기고 있어 이전에 문제시되었던 인권문제에 큰 개선을 가져온 듯 했으나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어 현실적으로는 해당 여성들의 인권보호나 사회복귀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인권보호도 제대로 달성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3. 성매매 특별법의 필요성우리사회에 성매매 현상이 만연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부인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성매매 현상을 모두가 다 범죄라고 인식하지는 않지만 우리사회의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성매매 문제는 여성이 성을 팔고 또 성을 파는 여성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간주되고 그들에 대해 관심이 적었다. 또한 인신매매나 미성년자의 성매매의 경우는 형법, 특정범죄가중처벌에 대한 법률, 청소년보호에 관한 법률 등에 의거하여 분명한 법적 처벌이 수반되고 있으나, 그외의 형태의 성매매에 대한 처벌은 사실상 포기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 9월 군산시 대명동에 있는 속칭 쉬파리골목 에서 화재가 발생해 그 안에 있던 매춘여성이 쇠창상에 갇힌 채 그대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여성의 강제 매춘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들이 착취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장치와 국가의 정책이 필요하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였다. 이에 1962년에 제정된 윤락행위등 방지법 이 성을 파는 여성들의 인권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본격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성매매 현상을 근절할 수 있는 새로운 법적 장치의 필요성이 논의되었고, 이러한 성매매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성매매 특별법 개정되었다.Ⅲ. 성매매 특별법1. 성매매 문제의 정의성매매는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여성의 몸과 성적행위를 매매하는 것으로서 여성에 대한 남성지배의 결과이자 수단이고, 인신매매 성적하대, 강간, 폭행, 언어폭력 지원한다.4. 보호시설을 확충한다.⇒ 이로써 큰 시장 규모를 줄이고 성매매의 연결고리인 업주들을 집중 단속하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3. 잠재적 해결방안1 탈성매매 여성자활센터를 활성화해야 한다.성매매 여성이 심리치료를 받고 자활 의지를 갖게 되기까지는 평균 5년의 시간이 걸린다. 반짝 제도가 아닌 지속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이는 보호가 필요한 여성 6만 4천명을 수용하고 교육시킬 수 있는 보호시설을 확충해야 하고 이러한 시설에는 매매춘 여성들을 포함한 보호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고 예방해야 한다. 또한 성매매 여성들을 사회에서 이탈행위를 한 범죄자나 사회계층의 사회문제를 야기시킨 문제적 대상으로 낙인찍고 통제 하여야 할 집단으로 취급하지 않는 의식 변화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경찰단속으로 인한 수용으로 인하여 수용된 당사자는 보호기관을 단속조치시설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입소 과정에서의 강압조치와 인권유린적 방법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무서운 곳 , 가고 싶지 않은 곳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는데, 이러한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성매매 여성이 직접 찾을 수 있는 곳으로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또한 이 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성매매 여성의 필수적인 외상 값을 파악하여 자치단체나 여성단체 자금을 지원해 갚게 한 뒤 성매매 여성들로부터 장기저리 형태로 회수하는 방법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2 성매매 방지를 위한 예방사업을 시행해야 한다.사이버 성매매 예방을 위한 상담을 늘려야 한다.(인터넷 감시활동, 성매매 조장 사이트를 해킹하여 활성화를 줄여야 한다.) 또한 시민들의 감시활동으로 제보시 포상금을 지급하거나 성매매 억제 정책시 지역 주민과 연계체계를 구성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캠페인 및 홍보 활동으로 관련법(특별법에 대한 자세한)팜플렛, 포스터를 제작 및 일반인에게 성매매의 해약성을 알리는 공개강좌를 지원하고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홍보(광고, 연극, 라디오 등)해야 한다.그리고 남성 모임 등을 통해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 상한 10년으로 강화되었다.- 성매매 피해자 규정에 있어서 윤락 행위등 방지법에서는 성매매 여성을 무조건 처벌하는 것으 로 되어있었으나, 성매매 특별법에는 업주 강요에 따른 성매매의 피해자로 보고 형사처벌에서 제외된다.- 윤락행위등 방지법은 수사기관 협조 조항이 없었으나, 성매매 특별법은 각종 자활지원, 긴급구 조 요청시 경찰관 동행 의무 등 수사기관의 협조 조항이 신설되었다.2. 형량 비교{구분윤라행위 등 방지법성매매처벌에 관한 특별법용어순화윤락 등의 왜곡된 표현성매매, 성매매 피해자 등 가치 중립적, 인권중심적 표현성매매 일선자 처벌 강화법정형 하한 5년(혐의 중복되면 22년 6월까지 가능)법정형 상한 10년경제적 제재 조항 신설없음성매매 알선자 수익 몰수 및 추징성매수자 처벌1년이하 징역, 300만원 이하 벌금(경찰, 훈방 등 관대한 적용)옛 법과 같음(경찰, 무조건 입건 방침)성매매 피해자 규정 신설성매매 여성 무조건 처벌업주 강요에 따른 성매매 피해자로 보고 형사처벌 제외성매매 피해자 보호규정 신설없음증인보호법상 신변보호, 신뢰 관계자 동석수사기관 협조 조항 신설없음각종 자활지원, 긴급구조 요청시 경찰관 동행 의무의료비 지원 조항 신설없음14조에 지원 근거 신설윤락행위방지법보다 성매매 특별법에서는 형량이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에서 주의해서 봐야할 것은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성매매 당사자인 여성 처벌에 초점을 맞춰졌다면, 성매매 특별법에서는 업주와 성매수자의 처벌이 엄격하게 강화된다. 성매수자의 처벌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구류 등에 처한다 는 규정을 두긴 했으나, 사실 사문화 조항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성매수자들을 무조건 입건해 법에 따른 처벌을 받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업주의 강요에 의해 성매매를 하게 된 여성은 피해자로 간주해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한다. 대신 의료지원을 포함한 자활프로그램을 가동해 피해 여성들의 자립을 돕게 된다.그리고 성매매 업주는 성매매 특별법 제 25조 몰수·추징 조항에 의해 성매매 알선 등의 법은 성매매가 소위 포주나 소개소 등 알선업자에 의해 확산되고, 성산업으로까지 변질되었음을 간파하고, 성매매 알선이나 인신매매로 번, 검은 돈은 국가가 전액 징수, 추징할 수 있도록 하였다.성매매 시장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성을 파는 사람은 종사 여성 보다는 포주이며 여성은 포주와 구매자 사이에서 팔리는 대상의 처지에 놓여있다. 이 과정에서 이들 여성들에게는 족쇄가 채워지고 강요와 압박에 의해서 악순환의 굴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할 경우 폭력 등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있다. 성매매가 전업으로 이뤄지는 지역, 일명 사창가가 남아있는 한 성매매를 금지하고 있는 법이 사문화되고, 성매매에 대한 사회적 묵인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는 이런 지역을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등 성매매가 기승하는 환경부터 척결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선불금이라는 불법 사슬 확실히 끊는다# 1단계 - 상담센터, 긴급구조체계 확립성매매의 계기가 여성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선불금 등을 이용한 위협, 감시, 강요 등의 행위가 있는 업주, 소개소, 사체업자 간에 형성된 부당한 착취구조에 얽혀 자유롭게 이탈을 못하고 있는 여성은 피해자로 규정, 적극적인 법적 보호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다.* 현장 상담센터 및 보호시설 확대- 유흥업소 밀집지역, 취약지역의 성매매 여성을 위한 현장 상담센터 및 보호시설을 확대해 탈 성 매매를 돕는다.- 피해를 당한 여성은 경찰에 설치된 긴급지원센터로 신고하여 신속한 구조와 사전 처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 탈 성매매를 지원하기 위해 성매매 현장 활동가와 시설 종사자에 대한 인력 양성을 추진한다.* 긴급 구조와 법률혜택 강화-상담 및 긴급구조 활동이 강화되고 무료 법률구조 혜택을 확대해 선불금 등 성매매 관련 채무 문제를 해결해 준다.# 2단계 - 자활 직업훈련, 주거지원성매매는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구조적 사슬이 존재한다. 성매매로부터 벗어난 경우에도 심리적 경제적 문제로 인해 사회적응이 힘들다. 정부는 이런 현실이다.
☆ 안압지에 대한 개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문무왕 14)에 '궁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기 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에는 못의 이름에 관해서는 초기에 간행된 과 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 폐허가 되어버린 신라의 옛 터전에 화려했던 궁궐은 간 곳이 없고 쓸쓸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못 위에 안압(雁鴨)들만 노닐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문무왕 19년에는 못 서편에 동궁이 건립되었다는데, 임해전은 아마도 정전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안압지는 동궁에 속해 있던 못인 것이다. 이 곳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 배경 ☆중국문화, 백제문화, 고구려문화를 흡수하여 신라인들의 발달된 미의식이 작용한 통일신라 문화의 첫 번째 궁원 조경 작품인 안압지는 중국의 무산 12봉 을 본떠서 만들었다. 이 무산 12봉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양왕이 꿈속에서 선녀와 노닌 고사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를 소재로 병풍에 그린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직접 삼협에서 무산 12봉을 본 사실과 연결하여 시를 썼다.무산은 양자강 상류 삼협에 있으며 중국의 유명한 명승지이다. 12봉의 이름은 망하, 취병, 조운, 송만, 집선, 취학, 정단, 상승, 초운, 비봉, 등룡, 성천 등이다. 또한 안압지를 불로초가 있다는 동해로 상징하여 삼신산을 연못 가운데에 만들고 못가에는 괴석으로 조경하였으며, 연못 서편에는 동궁을 세우고 그 정전의 이름을 임해전이라 하였다.안압지 조성의 사상적 배경으로는 일찍이 중국에서 들어온 도가사상의 영향으로 신라인이 삼산(경주 낭산, 영천 골화산, 청도 혈례산)에 제사를 지낸다든가, 화랑도 정신 수양의 줄기를 이루었던 신선 사상 같은 것이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며, 아울러 오랜 전쟁을 치른 문무왕고려 태조를 초청하여 임해전에서 나라의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던 마지막 잔치 당시까지는 왕궁으로써 면모를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신라가 망하고 고려시대가 되자 이곳이 궁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고, 건물 등의 보수가 이루어지지 못하자 동궁과 안압지는 비바람등으로 폐허가 되기 시작하였다.안압지의 신라시대 이름은 월지 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는 첫째, 『삼국사기』내용을 보면 헌덕왕이 태자를 월지궁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이는 월지궁이 곧 태자궁이라는 것이며, 이궁은 674년에 연못을 판 후 679-680년에 세운 월지 바로 서편의 동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둘째, 『삼국사기』에서 월지와 동구에 관련된 직관으로 동궁관, 동궁아, 승방전, 월지전, 월지악전(월지의 조경과 관리를 담당했던 부서로 추정), 용왕전(용왕에 대한 제사 등을 담당)등이 기록되어 있어 동궁 옆의 연못의 이름이 월지였음을 알 수 있다.셋째, 이러한 역사적 기록과 더불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유물들이 1975년 발굴 때 이 못 안에서 출토되었다. 곧 동궁아일 이라고 쓰여진 자물쇠, 세택 이라고 쓰여진 목간, 용왕전에서 사용했다고 짐작되는 토기들이 그것인데, 접시의 안이나 바닥에서 용왕신심 , 신심용왕 이라고 음각 되었거나 먹으로 쓰여있다. 이 밖에 승방전과 관련되었을 많은 불구류와 불상들, 월지악전에서 조경에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도끼와 낫 등의 철제 이기들이 있다.월지와 월지궁은 고려시대를 지나면서 점차 그 화려한 자취가 허물어지며 아울러 이곳에 대한 기록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안압지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붙여진 이름이다. 월지는 신라가 망한 후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주변의 무산 12봉에서 깎여 내려온 흙과, 월지 서편의 동궁이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허물어지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못 안이 거의 흙으로 매몰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못에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고 이 사이를 오리와 기러기들이 날아다녔다고 한다. 이것을 본 조선시대의 묵객들에 의해 못의 이름이 오늘처럼 안압지 라반도처럼 생긴 곳에 일정시대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이 있었는데 발굴 결과 이곳에는 원래 건물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철거시켰다. 1985년 국립경주박물관에 단위 유적에 대한 최초의 독립 전시관인 안압지관을 세웠다. 이곳에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고, 나무배를 비롯한 대표 유물 700여 점을 전시하였다.☆ 안압지의 구조 및 특징 ☆1. 연못안압지는 땅을 파내어 물을 끌어들이고 그 파낸 흙으로 가산을 만들고 섬을 쌓아 만든 인공 못이다. 연못의 전체 규모는 동서 200미터, 남북 180미터이며 그 형태는 거의 네모형이고 남쪽 호안과 서쪽 호안의 지형은 북동쪽 지형보다 2.5미터 높다. 호안석축은 북쪽과 동쪽에는 40여개의 굴곡이 있는 곡선이며, 높이 1.5미터 안팎으로 수직에 가깝게 한 단으로 쌓아 올린 석축이다.호안석축에 접하여 건물터가 있는 서쪽 호안은 직선으로 높이 1.8미터 내외의 1단 호안이며, 건물터가 없는 곳에는 하층 호안과 상층 호안이 폭 2미터를 사이에 둔 2단 호안으로 되어있다. 건물터와 접한 호안석축의 기단은 물에 잠기는 부분은 모두 자연괴석으로 앞면만을 다듬어 쌓았고, 수면 위에 보이는 부분에는 대부분 길고 높은 장대석을 다듬어 쌓았다.남쪽 호안은 거의 단조로운 직선형태이며 호안과 땅 위와의 거리는 경사면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자연 괴석을 놓고 꽃을 심어 조경하였다. 못을 이룬 모든 호안석축의 바닥에는 직경 60센티미터 안팎의 냇돌을 등간격으로 호안석축에 기대어 놓아 호안석축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이 연못은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직선과 곡선의 다양한 변화로 이루어진 호안석축으로 만들어졌는데, 동쪽 호안석축에서는 서쪽으로 돌출된 2개의 반도를 곡선으로 축조했으며, 서쪽 호안튼 동쪽으로 돌출된 5개소의 건물 기단을 겸한 직선형태로 구조되어 좌우가 서로 잘 조화되어 있다. 이것은 연못의 좁은 공간에서 넓은 바다를 연상하도록 꾸민 것이다.연못의 바닥에는 두께 50센티미터 안팎으로 점토와 자갈 등을 섞어 강회 다짐하여 물이 밑으로 새지로 놓아 호안석축을 받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섬에는 진기한 새들과 작은 동물들을 기르고 아름다운 화초를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3. 복원된 건물터- 제1건물터 : 안압지의 서남 모서리로부터 6.4미터 되는 북쪽 위치에, 남북 폭이 15.4미터 되는 건물터의 기단 석축이 호안석축으로부터 동쪽으로 8.6미터 돌출되었다. 건물의 동 서 중심축은 연못의 서남 모서리 기점으로 14.1미터 거리가 되며, 건물의 규모는 남북 3칸, 동서 3칸으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에 장대석 석축이 2단까지 남아 있었 으나 원래는 8단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총높이는 약 5.6미터가 된다.- 제3건물터 : 연못에 접한 5개의 건물터 중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동서 중심축은 연못의 남서 모서리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93미터 거리에 있다. 호안석축으로부터 남벽이 4미터 동으로, 북벽이 북으로 5.8미터 각각 돌출되어있는데 돌출된 북벽이 동서 폭 은 18미터이다. 동서 5칸, 남북 4칸의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제5건물터 : 서쪽 호안이 동쪽으로 꺾인 기점으로부터 북으로 32.5미터 거리에 동서 중심축을 둔 동향의 건물이다. 기단의 크기는 남벽이 6미터, 북벽이 6.3미터, 동벽이 10미터 이며 2단의 형식의 기단이다. 하층 기단은 상층 기단 벽면으로부터 남, 동, 북쪽으 로 각각 2.2미터, 3.6미터, 2.1미터 연못 안쪽으로 돌출되었다. 세 곳에 모두 자연 석을 면만 맞추어 쌓고 그 위에 자연 괴석을 배치하였다. 호안석축으로부터 북벽 이 7.7미터, 남벽이 8.8미터 돌출되었으며 동벽의 길이는 13.4미터이다. 동벽과 남 벽은 기단의 벽면에 단면 u형으로 동벽에는 두 군데, 남벽에는 한군데, 기단선의 변화를 주었는데 아마도 이곳에 배를 대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하층 기단 위 에는 크기 50센티미터 이상의 해석을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물 위로 이 돌들의 윗 부분이 바다 속에 있는 바위처럼 보이도록 처리하였다. 기단 주변에서 돌난간 부 재가 다수 출토되어 이 건물터에 돌로 만든 난간수조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용머리는 없어지고 지금은 용머리를 끼운 자리만 남아 있다. 아래수조에서 연못으로 떨이지는 폭포의 높이는 약 1.2cm정도이다. 또한 물이 입수부의 완충수조를 지나 못으로 수직 낙하하는 지점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놓았는데, 이는 못 바닥의 침식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들어온 물은 다시 큰 섬부딪혀서 북쪽으로 갈라지게 되며, 여기서 생기는 물의 회전은 연못 안 물의 정화에도 큰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5. 출수구출수구는 연못 안에 물이 많을 때 이 물을 연못 밖으로 보내는 시설인데, 수위를 조절하는 특수시설, 장대석으로 쌓은 석구, 목제수구, 장대석 석구 등 4단계로 되어 있다. 맨 처음의 특수시설은 연못 호안 석축면에 맞추어 장대석을 2단으로 길게 쌓고, 1단과 2단의 이음부분에 구멍을 뚫고 나무 마개를 꽂아 놓았다. 2단의 장대석 중 위에 놓인 장대석 윗면에는 단명 u형태의 화강석재가 이었는데, 이 위에는 비신과 같은 형태의 석재를 올렸던 것 같다. 발굴 당시 비신의 형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 석재에 수량조절과 관계되는 구멍이 있었다고 추정된다.특수시설과 바로 연결된 장대석으로 만든 수구는 가공된 석재를 호안석축의 높이까지 쌓아 단면이 u형태를 이루고 있다. 뚜껑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발굴 당시 측벽의 석축이 2단까지 남아 있었으나 원래는 5단 정도로 호안석축의 높이와 같았다고 한다.장대석 수구 다음에 연결된 나무로 된 배수구는 직육면체의 형태를 지녔다. 통나무를 u형으로 파서 위와 아래를 겹치게 하여 구멍을 만들어 그 맨 앞에 나무 마개를 꽂아 놓았다. 이 마개는 손잡이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어 사용하는데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목제 수로를 통과한 물은 다시 장대석으로 만들어진 수로를 지나 목제 수로로부터 북쪽 20미터 지점에 있는 큰 배수로로 통하여 흘러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큰 배수로의 바닥에는 큰 장대석 30여개가 마치 빨래터처럼 깔려 있었다. 이와 같은 출수구에서는 이를 통해 수위를 조절했음
☆ 한국전통주택 정원의 특징 ☆한국의 전통주거양식 중에서 특히 조선조의 주택양식은 신분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사회적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가 규제되었다. 한국의 전통주택정원은 일상주거생활공간과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고 융합되어 있고, 자연환경 및 자연관의 영향을 받아 주택과 정원을 앉히고 짜는 법도가 상당히 분명했으며 가정생활에서도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따라 공간과 정원이 나누어지지만 완전히 폐쇄되거나 분리되는 것은 아니고 닫힘과 열림이 교묘하게 배합되었다.한국전통사회에서 주택과 마을, 도시가 자리잡는데 풍수지리설의 원리가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건물, 마당, 울타리, 나무심기, 우물파기 등을 함에 있어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었다. 대개의 주택은 경사지를 단으로 깍고 건물을 앉혔기 때문에 뒤쪽에서 뒤산과 만나는 자리는 화계가 조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원구조는 유고의 영향을 받아 조상숭배의 표현으로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집안의 다른 건물보다 높은 위치에 지었으며 남·여의 구별이 엄격해 안살림과 바깥살림을 구별하고 공간도 구분하였다.그리하여 한국전통주택의 정원은 공간 구성에 있어서 마당의 배분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대부 집은 대문간에 행랑채가 있고, 그 안으로 남자 주인의 생활 공간인 사랑채가 있으며, 그 안으로 여자의 생활 공간인 안채가 있다. 사랑채에서 떨어진 공간에 별당이 있으며, 후원에 조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이들 모든 별채의 건물마다 마당이 있는데, 대문 밖의 마당은 타작도 되고 농산물을 말리는 장소도 되기 때문에 가장 크다. 그리고 사랑 마당은 손님을 영접하기도 하고, 가마나 말을 타는 장소이기도 한데 경우에 따라 혼례식 같은 곳도 하기 때문에 안채 마당보다 넓으며, 이곳은 가산을 만든다든지 방지원도의 연못을 파서 꾸몄고, 장대석을 이용한 정원이 꾸며지기도 했다. 안채마당은 폐쇄된 여인들의 공간으로 가장 작은 마당을 형성한다.안채 뒤쪽의 가장 깊은 곳은 후원으로 집 주인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이 후원에는 대게 대나무위를 원림으로 조성한다.안채, 사랑채, 별당의 공간 사이는 담을 설치하여 기능을 구분하였고, 행랑채 앞마당에는 채전이나 미나리꽝, 과수원 등이 설치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 큰 연못을 만들고 연못가에 원림을 조성하고 정자를 건립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안채의 마당은 화목이나 기물을 설치하여 조원하지 않는다.주택정원에서 경관을 도입하는 방법으로는 자연경관 속으로 들어가 노니는 방법과 자연경관을 주택 안으로 끌어와 즐기는 방법이 이용되었고, 주택정원에서 심어진 식물은 상징성이 중요하게 여겨져 의도적으로 식재되었으며, 정원에 식물을 심을 때는 수종 뿐 아니라 장소도 제한시켜 금기되는 수종과 권장하는 수종이 있었다. 민간주택의 정원에서는 보고 즐기는 효과를 노리기 위하여 물을 모아두는 지당, 물을 떨어뜨리는 폭포, 물을 흐르게 하는 수로 등이 애용되었으며, 돌로 만든 점경물도 석가산, 괴석, 석지, 석분, 석상, 식석 등의 형태로 활용되었다.한국주택정원은 정원을 보거나 돌아다니는 차원에서 벗어나 읽고 느끼는 차원으로 끌어올려 상징화, 이름짓기, 글짓기 등의 방법으로 의경(意景)을 추구하였다.☆ 주택 조경 1 : 월성 손씨 대종가 ( 서백당 ) ☆이 종가는 양민공 손소(1433-1484)에 의하여 1458년에 창건되었으나, 양민공의 차남이며 성종과 중종 때의 대학자였던 우재 손중돈이 양동마을 초입의 관가정으로 이사하면서 400여 년간 대종가의 격을 상실하였다가 20세기 전반부에 손씨 종손이 다시 이 집으로 옮겨오면서 대종가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이 집 사랑채에는 서백당 과 송첨 이라는 두 개의 당호가 붙어있다. 여기에서 서백당 이라는 현판은 원래 관가정 사랑채에 걸려있었던 것으로 이 글에는 참을 인(忍)자를 백번 써서 종손으로서 인내심을 기르라는 고통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한편, 송첨 은 소나무 처마 라는 뜻으로 이 말은 사랑채 앞마당에 있는 오래된 향나무의 생긴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양동마을의 지형은 물(勿) 자형을 이루는 네 개의 능선과 그 사이에 형성된 세 하였다. 화계는 안채의 대청에서 관상하기 좋은 위치에 조성하여 대청으로부터의 시각구조를 고려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화계가 지형처리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관상을 위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화계의 단 높이는 밑단에서부터 30cm, 40cm, 60cm이고, 길이는 23m, 12.5m, 9m로 짧아져 높이와 길이가 반비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단의 너비는 밑단에서부터 2.6m, 3.12m이고 3단은 4m 정도까지 평지로 조성되나 그 이후는 담까지 사면으로 처리되어 있다. 안채기단과 화계가 시작되는 첫 단까지는 약 1.25m 떨어져 있어 사람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으며, 첫 단은 돌을 한 층으로, 둘째단은 2층으로, 세 번째 단은 3층으로 쌓아올려 높이를 조절하였다. 쌓는 방식은 사괴석을 수직으로 바른층쌓기 하였다.화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곡선담, 돈대, 수목이다. 담 뒤편에는 송림이 우거져 있어서 화계의 인공적인 경관과 대조를 이루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화로운 경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화계에는 앵두와 같은 과목(果木)을 심어 꽃과 열매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여 실용적 가치와 관상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한편, 사당 앞에 조성된 화계는 누마루처럼 높은 사랑대청과 건너방에서 보기 좋도록 위치를 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주택에서는 사당의 중요성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사당 앞에 조성된 화계는 단순한 관상의 차원이 아니라 유교정신에 입각한 사당치례 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화계는 신문의 기단과 담장에 거의 평행이 되도록 돈대를 3단으로 쌓아 조성하였으며, 사당에 이르는 석계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진다. 단의 높이는 밑으로부터 0.5m, 1.5m, 0.54m이며, 단의 너비는 4.5m, 2.4m, 1m이고, 단의 길이는 평균 1.8m 정도이다. 돈대의 축조재료는 첫 단은 장대석, 두 번째 단과 세 번째 단은 자연석이며,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화계에 도입된 식물재료를 보면, 첫 단의어 있다. 세 번째 단에는 영산홍과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들 수목들은 수령이 오래되지 않았으나 대부분 조선시대 주택정원에 많이 식재된 수종들이다. 또한 안채 뒤의 화계가 유실수를 중심으로 한 것에 비해 사당 앞의 화계는 화목류가 중심이 되고 있어 화계가 조성되는 장소에 따라 꾸밈새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종가에 조영된 화계는 형태가 정형적이고 전체적으로 구성이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어 형식미와 인공미가 뛰어나다. 또한 다른집보다는 규모가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한편, 사랑채 전면에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된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주택 조경 2 : 여강 이씨 대종가 ( 무첨당 )무첨당은 조선조 때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 선생의 종가댁의 일부로 조선중기에 세운 건물로 살림채, 별당(무첨당), 사당으로 구성된다. 살림채는 후대의 것으로 여강 이씨 무첨당파의 종가이고, 별당 및 사당과 다른 안대를 취하여 배치됨으로써 역동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ㅁ자형이다. 살림채와 무첨당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이언적의 별묘가 있고 그 아래에는 화계가 형성되어 있다. 별당 건물의 입지는 보편적으로 살림채 중 외부의 눈에 잘 띠지 않고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두지만, 이 건물은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별당이라기 보다는 큰 사랑채라 할 수 있다. 사랑채 앞에도 정원이 꾸며져 있다.☆ 주택 조경 3 : 향단 ☆향단은 회재가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것으로 중종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전임하면서 그의 동생인 이언괄에게 물려주어 그의 손자인 이언관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고 이름짓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됨에 따라 여주 이씨의 파종가가 되었다. 향단은 일반 가옥과는 상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몸채를 '月'자로 하고 여기에 'ㅡ'자형 행랑채와 칸막이를 둠으로써 전체 평면은 '用'자를 이룬다. 이것은 '用'자가 '日'자와 '月'자가 합쳐진 모양이므로 하늘의 해와 달을 지상에 있게 함으로써 생기를 북돋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귀공명을대청과 한 면을 접하면서 모서리끼리 만나고 있으며 각 방의 서쪽에는 부엌이 딸려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안대청이 안마당을 향하지 않게 하고 행랑채 지붕을 보도록 하였다. 아마도 안마당과의 기능적인 관계보다 전망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대부의 검소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입지에 있으며 특이한 외관, 일반적인 격식을 과감히 벗어난 대담성 등은 그런 느낌을 만들어 준다.{▶ 향단의 담장 - 향단의 대문 옆으로 리듬감이 느껴 지는 담장과 담장 너머의 향나무가 보인다.{사랑채에서 바라 본 후원 ◀☆ 주택 조경 4 : 관가정 ☆관가정은 보물 제 442호로 집의 첫 주인인 손중돈은 원래의 종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 분가하여 관가정을 지었다. 따라서 관가정은 서백당이 지어진 1458년보다 한 세대 뒤인 148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가정은 양동마을 초입의 물봉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아 멀리 오똑한 호명산을 바라보고 있다. 경사지를 넓게 깎아 단을 만들고 건물을 깊숙이 앉힌 탓에, 관가정의 모습은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진입로는 갈지(之)자로 나있어서 경사는 그리 급하지 않다. 명문가의 대종가 치고는 소규모이며 단순하게 구성돼 있다. ㅁ자형 몸체에 전면 좌우로 날개를 뻗어 사랑채와 행랑채로 삼았다. 이 집을 대표하는 형태는 사랑채의 누마루다. 손중돈이 마을 깊숙한 서백당을 떠나 이 곳에 종가를 옮긴 이유는 바로 더 넓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함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누마루는 필수적이었다. 이 집의 핵심은 바로 이 누마루, 즉 '관가정'을 만드는 데 있었고, 단순해 보이는 조작으로 의도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했다. 이 곳은 일상의 살림집과 일상에서 일탈된 정자라는 상반되는 건축유형을 절묘하게 결합한 복합건축이다.{▶ 사랑대청과 누마루{▶ 사랑대청에서 본 모습{진입로에서 본 모습 ◀◀◀☆ 주택 조경 5 : 양동 심수정 ☆심수정은 마을 입구 오른쪽 산등성이에 이향정, 강학당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여강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