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와지역문제 - 인사동국토에 관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선 우리 국토의 한국적인 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많이 찾는 명소중 한곳인 인사동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현대속의 전통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외국인들은 이곳이 우리의 전통 냄새가 풍겨서 좋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정말 한국적인 미가 아직 남아있는걸까? 사람들은 오늘날 왜 인사동을 찾는 것일까.인사동은 전통적인 모습과 현대적인 모습이 서로 갈등관계를 엮어나가면서 공존해가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이 레포트에서는 인사동에 대한 이론적, 실제적 조사를 통하여 현대의 인사동이 우리에게 그리고 넓게는 외국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고자 한다.인사동의 이론적 조사 전통과 현대문화가 공존하고있는 서울의 대표적 전통문화 명소지역 인사동로를 중심으로 크고작은 골목들이 가지처럼 뻗어나가있다. 큰대로변엔 골동품과 미술품등이 많고 가다가 꾸불꾸불하다가 중간에 끊기기도 하는 작은 골목사이사이에는 음식,찻집들이 즐비하다.내부와 외부가 다른 특성으로 발달되어있음 전통적분위기의 음식점과 현대적 분위기의 시설이 섞여있음 연령이 비교적 골고루 분포한다. 몇군데 남아있지 않은 한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것을 상업으로 적절히 이용하여 현대적으로 새로운 의미로써 보존해나가고 있다는 것.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문화재들이 보호되고있지 못하다. 가로에 쉴곳이 부족하다.여러 갈등들의 조합속에서 발전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인사동의 실제적 조사지금부터는 인사동에 대한 실제적인 조사를 통하여 그곳의 사람들의 움직임과 생활의 모습들이 어떠한지 알아보고자 한다.1.인사동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평일:큰 길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동을 하였고, 거의 가판점에서나 이동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 도로에는 차들이 줄을 이었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두 시간대를 한시간 동안 분석해본결과 각각 1시간 후 사람의 움직임4시45분~5시1분(30분간)안국동입구의 인구유동량5시50분~6시20분(30분간)종로입구에서의 인구유동량INOUTINOUT35세이하*************6세이상*************304638614안국동 입구에서의 4시45분에서 5시15분까지의 인구 유동량은 총 556명이었으며, 종로 입구에서의 5시 50분에서 6시 20분가지의 인구의 유동량은 1252명으로 거의 2배에 가까운 증가량을 보였다.유동량의 증가는 퇴근시간이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연령의 분류는 시각적인 관찰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소 부정확하지만 대략 학생, 직장인들을 35세이하로 분류했다. 이는 시간대에 어떤 사람이 많이 유동하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노인층보다는 젊은층에서의 인구의 유동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인구유동량3. 인사동에서 사람은 어디로 다닐까?동쪽의 인도는 안국에서 종로까지 쭉 연결된 것에 비해 서쪽은 학고재를 기점으로 인도가 끊기고 있다. 과연 인도의 유무로 인해 사람이 행동이 영향을 받을까.평일: 저녁 시간대를 보면 종로쪽과 안국쪽을 비교해봤을 때 안국에서 통행시 사람들은 인도의 유무와는 별 상관없이 자유롭게 통행했다.이것은 아마도 안국역쪽은 종로에 비해 양쪽 가게 진열장을 통해 볼것이 많은 가게 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비해 종로쪽은 인도가 없는 곳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인도가 있는 동쪽 도로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노점상도 많았다. 이 이유는 아마도 종로쪽이 거리가 크기 때문에 인도가 없고 있고에 따라 찻길과 사람의 길이 확연히 구별되는 감이있으나 안국쪽은 워낙 길이 좁기 때문에 인도가 없건 있건간에 소박하게 물건들 둘러보는 여유를 갖게되는 것이다.주말: 평일에 비해 인도의 유무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차가없는 거리기 때문에 인도를 선택할 필요없이 도로 중앙으로 걸어다니기 때문인듯하다.4. 왜 사람들은 인사동에 모이는가왜 사람이 모이는가에 대한 해답은 사실 그 목적성에 따라 다르다. 인사동의 큰길에서 사람ㄷ르이 모구경하러2)인사동의 음식점을 찾아서3)인사동의 음식점이 아닌 다른곳 방문4) 인사동 아닌 다른곳을 가기위해 지나감주말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으나 평일엔 꽤된다.주말에 음식점이 아닌 다른곳을 가는 사람은 대부분 전통 찻집과 미술관이었다.평일엔 중고등학생들이 하교하는 경우도 많았다.또 종로쪽의 경우 근처의 직장인들도 인사동내의 음식점을 많이 이용했다.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구경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우선 설문대상을 선택함에있어 가장 많이 보이는 순서대로 그 대상의 양을 조절하였다.나이대와 상관없이 가장 많이 찾는 이유는 인사동의 장식품점이나 필방을 찾아서였다. 물론 이것은 인사동의 전통성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대답과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유의할 것은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20대의 경우 물론 전통을 찾아 오는 사람이 많긴했지만 다른 연령대에 비해 인사동의 음식점을 찾아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즉, 애인이나 친구끼리 그곳의 전통찻집이나 먹거리를 찾아온 경우이다.이는 역시 사람들이 인사동을 찾음에있어 전통성의 향기가 주된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음식 산업등 상업의 발달이라는 요소도 사람을 끌어모으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는 결론을 확인할 수가있다.1-2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닐 경우 인사동에서 얼마나 시 간을 보내는시는지?1)1시간미만2)1~2시간3)2~3시간4)4시간 이상1~2시간 정도라는 대답이 압도적이다.그 정도 시간이면 가볍게 구경하거나 그냥 식사하기에 알맞기 때문인 듯 했다.평일엔 낮과 저녁에 차이가 없지만, 주말의 경우는 저녁쪽의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무른다.특히 일요일의 경우에는 "차없는 거리"의 선포와 함께 여러 이벤트들이 벌어지고, 사람들도 훨씬 많다. 하지만 외국인의 경우는 평일과 주말이 비슷했다.2. 당신은 인사동에 얼마나 자주 오십니까.1) 이번이 처음이다.2) 1년에 몇번정도3) 한달에 몇번정도4) 일주일에도 몇번씩주로 한달의 몇번정도 혹은 일년의 몇번정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고년층에서 10대로 갈수록 자주오는 빈도가 높과 함께4) 가족과함께5) 기타.주말이라 그런지 친구와 함께오는 경우가 젤 많았다.10대들은 혼자서 온 경우는 하나도 없었고 고년층으로 갈수록 혼자오는 비율이 점점더 증가했다. 10대나 20대는 가족과 오는 경우가 별로 없었으며 30~40대이상의 경우엔 가족과 오는 빈도가 많았다.비교적 혼자오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이는 아마 주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맞춰왔기 때문인 것 같다.어떤 경우라도 친구와 함께 온 사람이 제일 많았다.연인끼리 온 사람들은 낮보다는저녁에 인사동을 방문했다.가족과 함께 온사람은 평일낮 순이었다. 특히 연령대와 상관ㅇ벗이 전통 공예품이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는인사도으이 이미지는역시 즉 전통적인 것에 있음을 알수있었따. 20대의 경우엔 미술관이라고 대답한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부류별로 특색이 나타난다.·직장인의 경우 (종로쪽에서 많이온다) 식사시간에(점심,저녁) 인사동으로 많이 온다. 그들의 행동유형은 처음부터 식사를목적으로왔기 때문에 골목길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뒤 곧 바로 인사동을 나가는 형태이다.·연인이나 여자들끼리 왔을 경우에는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않았고 그냥 인사동의 큰 길만을 여러번 지나가면서 구경하고 나간다.·안국동 쪽에는 풍문여고 뒤쪽 도서관에 갔다가 지나가는 사람도 꽤있었다.·사진 화랑등의 공부때문에 오는 경우도 꽤 있었다.·.3명이상의 남녀 친구들이 왔을 경우 식사와 구경을모두 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외국인의 경우 처음오는 사람과 자주 오는 편인사람으로 나누어 진다. 처음오는 사람은 단순히 구경이지만 자주오는 외국인의 경우 업무차 오거나 식사하러 선물 하러 등 다른 목적으로 많이온다.*나이별 경향·10대는 거의 친구들과함께온다. 보내는 시간은 짧은편이거나 아주길다.(과제때문에 방문한 경우)·20대들도 친구들과 온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0대후반의 젊은 주부들의 경우 각자 아기와 함께 친구와 온경우도있었고, 연인과 온경우도 꽤있었다.·30대이상은 가족과함께 온 사람이 많았는데여있던 천변길이었다.이제는 늙어버린 백발 시인이 술잔을 앞에 놓고 소년 시절에 보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들었던 길을 이야기 할 때 어디선가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를 들었다.시냇물 옆에는 고려 시대에 설립한 원각사가 자리를 잡고있었고, 또한 조선왕조 시대 회화교육과 국가시험을 치르던 도화워닝 위치했고, 현재 풍문여고 터는 왕가의 혼례장으로 사용되었던 안동별궁등이 자리하던 유서깊은 지역이었다니, 터가 종교와 예술적으로 만만치 않다. 따라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양반들이었다고 한다. 저녁이면 걸인들이 이 거리로 찾아와 구걸해서는 시냇가에 모여앉아 푸짐한 식사를 즐겼다니 인심또한 어진 마을이 아닌가.세월이 지나도 기운은 삭지 않았을까. 행인들 가운데 스님네 들과 예혼을 가진 맑은 예술쟁이들이 많다. 요즈음 인사동 길을 걸을때면 저쯤해서 시냇물이 흘렀겠군, 무척 맑았을 거야, 가재는 잇었을까. 어디선가 화선지에 붓 옮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을까. 걸음이 늦어질 수 밖에 없다. 원각사의 풍경소리랄지, 각설이 타령이랄지, 독경소리를 상상하면 거리를 걷는 맛도 더해진다.사실 인사동은 인사동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부제를 실시하면서 아름답고도 토속적인 많은 이름들이 이땅에서 한자표기로 바뀌면서 사라져갔다. 이 동네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경성부제 실시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때, 인사동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조선초기까지 한성부 중부 관인방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관인방의 인 자와 , 절이있던 계곡이었기에 절골이라 불리우던 마을을 사동이라 한자식으로 바꾸어 여기서 사자를 따내서 합성으로 인사동이라 칭했다. 일본식 이름인 셈이다.그러나 독립된지 50년 가까이 되도록 정부는 행정간편화 우선수위정책으로 옛이름을 되찾을 의지는 없다. 하여 인사동을 즐겨찾는 사람들은 궁여지책으로"어진절 마을"로 다시 고쳐부르기도 한다. 인사동에있는 사동면옥이라는 음식점도 그런연유지만 제대로 부른다면 절골 국수집이 옳지않은가.1906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이토히로부미가 제1대 조선통감부 통감으로 있다.
FRANK LLOYD WRIGHT의 건축유기적 건축의 의미와 라이트의 건축적 함축 의미건축을 살펴보는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는데, 확실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은 그러한 모든 방법들이 적용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따라서 그의 건축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특히 깊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그러나 우리 대다수에게 있어 라이트 건축에 대한 이해는, 그의 일생에 대한 자세한 설명 , 그의 고객 그가 활동했던 시대, 그 자신에 대한 잘못된 설명, 그리고 그의 건축양식 상의 혁신과 이후의 건축가들과 건축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자세한 분류에 의해 불명료해지고 있다.그러므로 위의 내용을 다소 지양하는데 초점을 두고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과 건축의 의미에 대해서 서술해 보고자 한다.⊙ 유기적 건축의 의미FRANK LLOYD WRIGHT는 자신의 건축 작품에 대해 독특한 " 유기적 건축 " 이라고 하는 언어로 일관하고 있는데,『경희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에서 인용』이것은 근대 건축의 제 1세대로 불리우는 몇몇 건축가들과는 다른 특이한 존재로 평가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이 유기(ORGANIC)건축이라는 단어는 라이트가 1893년에 만들어 내었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다. ' 자연안에라는 극히 단순한 뜻을 갖고 있다 자연 위가 아니라 자연 안에 담기는 건축을 말한다. 라이트가 유기적 건축을 만들어 낸 것도 그런 토양이 있었으므로 가능했고 그는 그것을 잘 이뤄 낼 능력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라이트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건축가 9505『유기적이라는 단어는 실체(ENTITY)를 나타낸다. 아마도 통합(INTEGRAL)이나 본질(INTRINSIC)이란 단어가 사용하기에 가장 좋을 것이다. 건축에서 본래 사용되었을 때에는, 유기적이란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통합으로서 본질이 유기적이란 단어가 진실로 의미하는 것이다.』------ WRIGHT 의 LANGUAGE OF ORGANIC ARCHITECTURE 않고, 그는 유기적 건축을 창조하였는데, 건물들이 당연히 그 건물이 속한 환경에서부터 개발되어야 한다는 심오하면서도 단순한 개념이 그의 주요 목적에 반영되어 가장 적합한 건물 재료를 사용하였다.『건물의 평면도와 입면도 사이에 조화 있는 관련성을 확립하려고 ----나는 계속 노력하여 왔다. 프로젝트 전체가 한가지 문제의 상태, 그 해결로써 평면도를 생각하고 그 표현으로써 입면도를 생각하여 왔다. 나는 우선 유기적인 완전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여 의미 있는 문법적 표현(GRAMMATICAL EXPRESSION)에서 오는 결과를 위한 기초를 형성하고, 될 수 있는 한 일관성 있게 전체를 만들어 내도록 노력하여 왔다(1908년)』라고 WRIGHT 자신은 언급하였다. --『경희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에서 인용』.건축가에 있어서 유기적 감상이라는 것은 불가결한 것이다.이 자연에서 확실히 그 감각이 발전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형태와 기능의 관계에 대한 지식은 건축가의 일에 있어서 근본이다.도대체 , 다른 어떠한 곳에서 자연이 이처럼 손쉽게 준비해 주고 있는 것 같은 적절하며 구체적인 수입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성격을 결정 짓는 형태의 구별을, 樹木에서 배울 수 있는 것처럼, 배울 수 있는 곳이 다른 어디에 있을까? 예술 작품의 특질인 필연성의 감각을 자연과의 교류에 의해 보다 신속하게 배울 수 있는 곳이 그 밖의 어디에 있을까.문제는 그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할 유기적 질서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유기적이라는 말은 전체가 부분을 대하는 것처럼, 부분이 전체를 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라이트는 정의했지만 유감스럽게 이 정의는 매우 일반적이라서 거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정의를 이리저리 생각한다고 해서, 새로운 것 혹은 라이트의 이념의 특질이 모여진다고는 생각 할 수 없다.이 정의는 라이트가 매우 싫어하여 평생 공격한 고전주의의 건축 이론의 기본적 정의이며 비트루비우스 이래 알베르티, 팔라디도 등등의 이론서 중세서 되풀이돼 사용되하여 , 자연 속에 몰입』이라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그렇지 않고 라이트는 분석적 태도의 필요를 주장하고 있다.『자연의 창조물 속에서 패턴을 추출하자. 새 . 뱀. 물고기. 조개 등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 속에서 형태, 이념의 기하학을 배워라』라고 라이트는 말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밝혀 두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것은 추출 된 패턴은 대상으로부터 단 한 번으로는 결정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에서 규정하고 있음과 동시에, 분석의 도구에 의해서도 또 규정되고 있다, 분석의 도구가 없으면 추상화 될 수 없다.그리고 동일 대상에서도, 다른 분석의 도구로부터 다른 패턴을 끄집어 낼 수 있다. 기하학은 하나의 유효한 도구일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 건축 언어도 또하나의 도구 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분석하는 사람의 형태 질서가 동시에 궁금하게 되는 것이다.( A. U에서 인용)1939년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함으로써 디자인에 대한 그의 이론적 근거의 ' 유기적 ' 또는 ' 자연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 유기적 건축은 자연적 건축이며 , 자연을 위한 자연의 건축이다" " 그것은 어떤 미리 생각했던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단순한 상식적 법칙을 강화하고 ---외부의 모든 부과 물에서 독립되어 있으며----”그리고 " 어떤 학문적 미에서도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 건축 형태와 원리, 저자 PAUL LASEAU, JAMES TICE 공저 』유기적(또는 본질적인) 건축은 이상적인 민주주의와 같은 자유로운 건축이다.유기적이라는 말은 본질과 관련이 잇다. 그러므로 필 수 적이거나 본질적이라는 말이 사용하기에 더 좋은 단어가 될 것이다. 원래 건축에 사용되었던 것처럼 유기적이란 말은 전체가 부분이며, 부분이 전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므로 필 수 적인 것으로써의 본질이 진실로 유기적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나는 여기서 ' 유기적' 이란 건축 용어로서, 건축 즉, 살아 있는 인간 정신의 생생한 표현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심지어 라이트우리는 건축의 차원에 대한 연구를 알게 되고, 그것이 성공을 보장 할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적 함축 의미20세기의 특히 미국의 건축물에 대한 개관은 라이트의 광범위한 영향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첫 번째 고려에서 그의 작품의 지배적인 영향은 주제적 단일성의 개념처럼 보인다.우리는 그의 특별한 미적 모방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스타일에 관계없이 빌딩의 규모에서 형태의 연속성을 언급하려고 한다.루이스 칸, CARLO SCARPA, PAUL RUDOLPH, MARIO BOTTA, FAYE JONES와 같은 건축가에 의한 설계의 많은 힘과 통합성은 단일화 된 주제에 대한 끊임없는 경의에서 형태의 형태의 정리에 따라 정해진다. 이런 점에서 라이트는 하나의 스타일이나, 미학에 의존하는 것에서부터 현대 건축(주제 상의 스타일과는 구별되면서) 의 자유화에 공헌했다. 그는 형태 생성의 방법을 증진시켰는데, 이것은 형식적 또는 경험적 선취권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라이트 건물 설계에 대한 우리의 비교 연구는 그가 형식적이고, 학문적 구성과 자연적 리듬의 비 형식적인 유동성을 통합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계획의 완전한 잠재성은 공간에 대한 그의 동양적 개념의 채택을 통해 개발되었다.그의 건축에서 ' 숨겨진 차원’은 그의 가장 훌륭한 건물의 감소되지 않은 경험적인 힘을 설명한다. 이 접근법은 많은 건축가에 의해 추구되어 온 표현의 동적인 양상을 도입하고 있다.그러나 라이트의 건축은 여러 뛰어난 동시대 건축가의 작품을 화합시킨 형식적 분석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 될 수 있을 것이다.그의 작품은 너무 개인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완전한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는 창조적 천재성의 낭만적 개념은 디자인 사상의 전환성에 대해 논의를 불러 일으켰으며, 건축을 불러 일으켰으며 건축을 배우는 학생과 라이트의 디자인 사이에 장벽을 만들었다.모방의 단념과 형식적 분석의 거부는 때 건축 교육 - 즉 , 설계의 우수성은 지적 추구보다 더 습득된 기술이라는-을 향한 그의 태도에 의한 것 같다. 대체적으로 우리는 이해보다는 그의 건축을 통해 노출된 면을 전수 받아 왔다.이 유산은 이제 단지 기술로부터 나타나는 지식의 실체로 향하는 건축 전문성의 상징이 되었다.라이트 건축의 주된 특성은 질서와 경험, 보편적인 것과 특별한 것 혹은 일관성과 다양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된 예술적 의문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다.그는 디자인 범위 이상으로 일관성과 다양성을 성취하기 위한 건축 상황의 특별한 조건을 가지고 추상적인 기하학을 배치시켰다. 그가 취한 용어의 일관성은 그의 공간 경험에서 어떤 일관성을 설명한다. 안전성, 안정성, 편리함, 이완성, 친숙성이 그것이다.그의 디자인 발명의 생명력은 그가 기하학, 재료 구성에 의하여 그의 디자인 영역에 놓아둔 한계의 정도와 관련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재료, 구성, 그리고 공간과 빛을 만드는 것이 자연을 모방한 것일지라도 작품의 기하학은 인간의 지성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공간 개념으로써 라이트가 현대 건축에 미친 공헌현대 건축에 대한 F .L 라이트의 가장 뚜렷한 공헌은 디자인에서 공간의 역할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 그가 즉시 인지함에 따라 공간에 대한 , 그의 생각은 중국 철학가 노자에 의해 표현된 도교적 믿음의 기본 개념 - 즉 보여주는 공간의 본질은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 에 밀접하게 관련된다. 건축 설계로 옮겨진 빌딩의 본질은 보이는 구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즉 , 그 속에 구체화된 ' 부정적 공간’이다. 우리는 동양적 건축에서 부정적 공간의 연속성, 즉 , 가장 자리에서 끝이 올라간 돌출된 지붕의 처마와 그들의 지지 대를 넘어서 뻗어 잇는 구조상의 들보, 건물의 기저부에 있는 상승된 복도, 현관 위의 채광창 공간, 주택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움직일 수 있는 풍경에 대한 수많은 표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대개가 전통적인 일본의 사원이나 주택에서 볼 수 있으며 급된다.
Mies van der Rohe[ 독일시대 ]근대 이후 대부분의 건축가와 달리, 미스는 생애를 통하여 건축 교육을 받지 않았다. 인생 전반에 체험적인 학습과 실무를 축적하고 사상의 형성을 밟아 건축가로 대성한 것이다.부친이 장식용 선반과 묘석을 주로 취급하는 돌 세공업자였기 때문에 미스는 여러가지 석재에 둘러싸여 자랐다. 피부로 느낀 이 소재가 나중에 '바르셀로나 파빌리온(1929)'으로 대표되는 돌로 둘러싸인 공간에, 또한 소년기에 경험한 건설 현장의 벽돌 쌓기에의 경험이 '벽돌조 컨트리 하우스 안(1923)'등에서 살아난다.실업학교에서 몸에 익힌 제도술이 그를 건축으로 이끄는데, 무장식의 작품으로 유명한 그의 생애에 걸친 신념은 이 때에 배운 이오니아식 주두의 장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고향인 아헨의 설계 사무소에 기능인으로 고용된 일이 실무 경험의 첫걸음이 된다. 베를린에 나가기를 권장받은 미스는 예전 신건축의 기수 부르노 파울에게 사사받고 시공주 제 1호 철학자 아로이스 릴과 만난다. 릴과 맺은 인연으로 1920년대까지 차차 주문을 늘려가면서 철학을 배우고 결혼도 한다. 또한 피터 베렌스의 문하에 들어간 일은 평생 경쟁관계이던 월터 그로피우스와 르 꼬르뷔제뿐 아니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알고 모더니즘이라는 세계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싱켈과 같은 고전주의 건축가를 재평가하는 기회도 가졌다. 무엇보다도 제 1차 세계대전 후의 다다이스트인 한스 리히터와 맺은 교우관계야말로 아방가르드의 안내가 되었던 것이다.전위집단 '11월 그룹'에 참가한 그는 건축부분의 책임자가 되어 이윽고 독일공작연맹 부회장에 취임하고 '바이센호프 지드룽'을 지휘한다. 1930년에는 '투겐트하트 저택'을 짓고 바우하우스의 제 3대 교장으로 부임한다. 1920년대 아방가르드와 나눈 교재는 '프리드리히가의 오피스 빌딩'등의 작품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돌아온 미스에게 시대와 건축예술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촉구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후의 새로운 사조가 활발하게 논한다. 그리고 나치스의 압력에 따라 바우하우스를 폐교하고 미국으로 이민한 뒤에 유리상자등 방해가 없는 세계적인 공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미국시대 ]미국에서의 미스 건축에 특별히 두드러지는 것은 거의 강박 관념으로부터라고 한 쪽이 좋을 듯한 '空洞'이다. 독일 시대에 있어 인터내셔널하고 '자유'로운 공간과는 반대로 미국 시대는 이 '공동'공간이 특징적이다.유리와 멀리온에 둘러싸인 미스 특유의 방형 플랜은 확실히 카시미르 말레비치(1878-1935)의 정방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미스의 정방형 내부가 문자 그대로 새하얀 점에서, 미크로한 필치를 그 내부에 농밀하게 새겨넣은 말레비치의 미니마리즘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절취된 '아무것도 없는' 장소, 그 곳이 미스의 '공동'이었다.미스의 '공동'은 미국 망명의 수년 후, '일리노이 공과대학(IIT) 도서관, 사무동 계획(1942-43)'의 평면도 중에서, 사방 유리붙임의 중정이 되어 일찌기 출현하였다. 내부 공간 두터운 층의 중앙 부분에 주변의 외부환경으로부터 절단되어, 완전히 고립된 '외부'에는 미스의 독일시절에 일련의 코트 하우스에 중정과 파사드가 '내부'와의 상호 침투를 촉진하는 열린 '외부'의 반영이 아니라, 여기서 '공동'의 최초 싹을 볼 수 있다. 이후 이 '공동'은 'UNIVERSAL SPACE'라는 말하자면 '위장개념'으로 받아들여져, 학교, 주택, 오피스, 극장, 대회의장, 미술관 등의 작품 속에 건물의 종류나 고유의 기능 조차 희생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집요하게 사용된다.'주체'를 바꾸는 일, 특히 미스의 경우 모든 작품에 걸쳐 시종 일관 느껴지는 것은 어딘가 충격적이고 무매개의 '건축' 그 자체의 욕망과 같은 것은 아닐까. 미스는 '인간'과 '건축'이 이반하여 가는 20세기에서, 예를 들면 르 꼬르비제나 주제페 테라니와 같이 그 사이에 몸을 펴고 '상호 매개자'일 것이라고 하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건축'측에서의 직접적 '해방자'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건축'이 '인간'이라는 타인으로부터 절리성립되었다면, '건축'의 욕망이 최초로 '자유로운 운동'을 가능하게 한 유토피아를 향하게 하고, 최후에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 공동, 즉 건축 없는 '건축'에 충동적으로 이른다는 '건축'사의 전말은 인류에게 있어서도 극히 흥미로운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20세기에 있어 '인류'의 어느 역사와 극히 흡사하였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향한 희구를 실천화하는데 고개를 내민 이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결국 최후에는 극적인 패러독스를 준비한다. 그리고 미스의 유작인 베를린의 '국립 미술관(1968)'은 바로, 그 건축적 형상화가 아닐까. 미국 시절에 부단히 추구한 '공동'은 우습게도 최후에 다시 베를린의 땅에서 거의 완벽한 성립을 보기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그 외측에는 전체주의로서도 불러질 듯한 기분을 우울하게 하는 건축의 압도적 구성이 슁켈의 '고전주의'라 할 정도의 신 없는 신전을 연상시키는 위용을 갖고 어느 사이엔가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미스의 '공동'이란, 활동을 정지하고 석화한 '유토피아'의 건축 레벨에 있어 북극이다. 그러나 그때문에 지금 다시 그것은 '유토피아'가 가진 적극적 특성으로서의 '아무것도 없고, 어느 곳도 아닌'장소로 이어지고도 있는 것이고, 그 한도에서 언제까지나 금일적 문제로서 주목에 값한다.LE CORBUSIER[ 20세기의 신정신과 고전적 정신 ]르 꼬르비제는 78년간의 생애에 걸쳐, 20세기의 기계문명 시대는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개인적인 변덕스러움이 아닌 시스템을 만드는 그 창조적인 맥박에 의해 오늘날의 사건의 종합을 설명하는 정신적 질을 건축에 의해 체현한다'는 신념을 전개해 왔다....... '나의 손이 지난 세기의 잔재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 손을 잘라 버리지 않고 씻으려고 한다. 그리고 과거의 세기는 반드시 나의 손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풍부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20세기라는 문명의 다면적인, 모순으로 가득찬 조건이 급격한 역사의 전환기 속에서 르 그 범위를 넓혀 서서히 주택문제, 그리고 공공적인 공간의 형성, 도시문제에로 스케일과 그의 관심을 넓혀 수많은 지상과 계획안과 현실 건축의 모습으로서 그 해결을 제시했다. 그들은 20세기를 만든 건축가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영향력을 주고 계속적으로 파생적인 시행을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많은 표면적인 모방을 만들어냈다. 또한 많은 표면적인 모방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20세기 건축의 중심적인 산맥을 만들어 내고 있다.르 꼬르뷔제의 사고는 인간에 대해 이상주의적이고, 논리의 명석함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인간 생활이란 것에 떠돌고 있는 부정형의 욕망을 충분히 건져 올리지 못했으며, 현실적으로는 그들의 새로운 사고나 발명은 인간성에 대한 오류나 무지로서 되돌려져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르 꼬르뷔제는 '철과 시멘트가 아니고 사랑으로써 건축되는 것이다.'라는 시원적인 정신으로까지 되돌아 갈 수 있는 정신의 진폭을 나타냄으로써 20세기라는 이념이 아나키하게 사방으로 흩어져간 시대에 있어서 생명과 인간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으로서의 건축을 제출했다.그 이성의 빛이 투과한 작품의 시적인 결정은 20세기라는 시대의 북극성으로서 그 진전을 점점이 이어면서 그 산맥의 능선을 종단해 가는 것이다. 철과 시멘트 등의 새로운 소재나 기술은 인간의 시원적인 목적, 즉 릴리시즘과 시의 기초이자 새로운 시대의 인간 시각의 환희에 제공되는 빛나는 사랑의 작품의 소재였다.1926년에 제출된 근대건축의 5가지 요점 1.지주 2.옥상정원 3.자유로운 평면 4.옆으로 여닫히는 세로로 긴 창 5.자유로운 입면 등은 일반적인 말로 20세기의 건축 양식을 요약하는 것으로, 빛나는 건축에 접근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조형적인 힌트였다. 말하자면, 교의와 같이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하나하나는 오랜 과거의 건축 사상의 연구로부터 태어난, 음영과 광채로 충만된 구체적인 이미지들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주라는 개념 속에 '빌라사보아(1929-31)'의 주열은 그런대로 '스위스 학생회관(1935)'의 육 1911년의 반년동안에 걸친 발칸, 이스탐블, 그리스, 이탈리아에의 '동방에의 여행'속에서 역사와의 연속성을 확인하고, 한편으로 1918년 이후의 퓨리즘 서화의 추구는 새로이 도래할 20세기라는 시대의 겨냥도를 예견할 수 있게 된 2개의 커다란 요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르 꼬르뷔제는 '과거라는 위대한 교사 이외에는 스승이란 것을 갖지 않은 혁명가'였다고 자기를 규정함으로써 고전적 정신에 얽매여 '건축이 정신에 호소될 때, 항상 한 사람의 인간의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시대가 요구한 단편화에 저항, 20세기의 '건축'을 부흥시킨 것이다.[ 20세기 형의 모델인 '자연'과 '기계' ]19세기 말의 건축 양식인 아르누보의 세계 모델이 '자연'이고, 20세기 전반의 국제 양식의 그것이 '기계'라고 한다면, 르 꼬르뷔제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두부터 창작활동을 개시한 건축가로서, 역시 그러한 시대의 건축 모델 변환이나 추이를, 독특한 형태로 개인의 마음 속에 투사하고 있었다.그 '자연'과 '기계'라는 2가지의 모델은, 표현의 여러가지 수준에서 결국 주제제출방법이나 혹은 그 형체 자체로서, 그리고 또한 부분의 형적 동기로서 침투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르 꼬르뷔제의 작품 속에 담겨있다. 자연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고, 그것은 또한 생애 변함없는 것이었으며, 한편으로 기계를 통하여 세계의 합리적이고 정확한 편성을 시도하여 왔다. '기계'는 20세기라는 문명의 고동을 치게하는 시대의 요청이었고, '자연'은 또한 인간이 되돌아가야 할 조화의 원리로서 생각되고 있던 때가 있다.르 꼬르뷔제의 청년기에 그려진, 자연의 사물에 관한 스케치는 많이 남겨져 있다. 거기서 그는 항상 돌아다니며 생활하고 있는 외계를 확실히 파악하고, 그것을 추상화하여 정착하고자 하고 있다. 그 후 1908년까지 스위스의 작은 시골 라 쇼드 퐁의 땅에서 부르즈와를 위한 습작이라고도 해야 할 2개의 주택을 설계하고 있는데, 난간이나 창틀이나 벽면의 문양과 같은 부
바우하우스를 읽고....도학을 배우면서 나는 꽤 짜증도 냈었고 왜 이런 것을 하는지...이것이 건축하는데 있어 얼만큼의 영향이 있을지 생각했었다. 그 시간들은 이미 지났고 설계를 하는 지금 시점에 와서 평면도와 투시도를 그리면서 왜 그때 열심히 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후회를 하곤한다.현대 시대는 우리에게 상당한 편리들을 가져다주었다. 그 덕분에 우리에겐 이제 칼로 깎아쓰는 연필보다는 일정한 굵기로 나오는 샤프가, 또한 일일이 팔에 힘을 주고 써야했던 T자보다는 제도판에 딸려있는 아이자가, 급기야는 손으로 그리는 도면보다는 캐드와 3d-max 로 그려진 도면을 보며 더 황홀해 하곤한다어쩌면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바우하우스는 먼나라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책은 나에게 있어 기초의 충실함, 재료에 대한 충실함, 창작성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장인정신에 대한 새로운 각인을 주기에 충분했다.바우하우스에서 육개월 동안 계속되는 예비과정은 학생들은 몇 달 동안 그들 주변의 모든것, 즉 색채, 형태, 양감, 질감 그리고 소리와 냄새까지도 알아 내어야 했으며, 재료와 도구들의 상이한 특성들도 연구하였다. 이런 방법 을 통해서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하되 그것에 규칙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생겼다. 선입견을 지닌 사고는 학생들이 처음부터 스스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며 배워가는 동안에 버리게 되었다.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합당한 기능을 가지면서 동시에 제작자의 사상 까지도 표현하는 물건을 만들려고 했다.우리에게 예비과정이라함은 도학이라고 할수 있겠다. 최근 도학수업이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변해가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것 같다. 바우하우스에서 했던 것처럼 꼼꼼하게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잘 표현할줄 알만큼은 수공예에 대해서 적응이 되어있어야 좋을 것 같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것과 할수 있지만 안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바우하우스에 입학한 직공들은 의무적으로 공예회의소(chamber of Crafts)의 직공이 된다는 계약을 맺는다. 공방에서 한 학기 동안은 연수기간이었다. 이 연수기간을 마친 후에라야 정식으로 입학한 직공으로서 인정되었으며, 그리고 나서 바우하우스 공방에서의 교육과정을 이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법적으로 규정된 시간을 이수하고 규정된 자격을 갖춘후에 직공에서 도제, 또는 도제에서 마스터로 승격하는 자격시험에 응시할수있었다. 합격한 직공과 도제들은 자신의 공방 마이스터의 승낙을 얻은 후에 다른 형태 마이스터의 과정에서 기술적이고 미학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다.이렇듯 교육과 실무가 연속선상에 있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처럼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그것대로, 기사 시험을 보기위한 지식은 또 나름대로 준비해야되는 것을 보면 실무적 건축교육이라는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는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본다.그로피우스는 기계와 기술의 통합에 있어서 수공예 교육의 목적은 손의 기술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며, 바우하우스는 결코 수공예 학교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며, 공업과의 연계를 원하고 있다는 뜻은 과거의 수공예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오늘날 수공예와 공업은 계속해서 서로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점차로 새롭게 통합되어야 하며, 이와같이 부분에서 전체로에의 지향은 공동 건축 작업에 대한 무조건의 전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바우하우스의 교육목표는 단순한 도구를 사용하는 작업과정에서 시작해서 점차로 복잡한 작업과정 및 기계사용에 대한 능력과 이해를 습득시키는데 있다. 이는 공장의 경우처럼 분업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대문에 언제나 전체 과정과의 관련에서 벗어나서는 않된다.이런면에서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정말 다양한 것을 할수 있어야 했고 또 다룰줄 알아야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참된 장인정신일 것 같다. 좁은 우물을 파듯 하는일을 단순히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 과정과의 관련속에서 작업을 리드해가는 능력, 그것이 건축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발터 그로피우스 -중에서"장인과 예술가 사이에 거만한 장벽을 세우는 계급의 차이가 없이 새로운 장인의 길드를 만들도록 하자. 미래의 새로운 건물을 함께 생각하고 창조하도록 하자. 이것은 건축과 회화와 조각을 하나로 결속하고 새로운 신념의 결정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수많은 노동자의 손에서 하늘로 향해 언젠가 솟아오를 것이다."바우하우스의 교육적 가치는 분명하고 독창적인 실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기존의 선입견을 버리고 기능적 요구 사항과 그 해결책을 실현해 낼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을 동시에 연구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각 프로젝트를 접근했다. 즉 예술과 공예, 미학과 기계 생산의 종합을 이루려고 했다.바우하우스는 통일을 향한 모든 예술 창조의 집중을 꾀하며 그 불가분의 구성 요소로서의 모든 공작예술 부분-조각, 회화, 공예-의 재통합을 꾀한다. 바우하우스의 최종적인 목표는 기념비적 예술과 장식 예술을 구별하지 않는 통일 예술 대건축이라고 할수있다. 바우하우스는 모든 개개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를 유능한 수공예가 내지 창조적 예술가로 교육하여, 건축 작품 전반에 걸쳐서 동일 정신으로서 통일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지도적인 또는 수업중의 수공예술가 노동공동체를 이룩했다고 할수있다.
Alvar Aalto알바알토는 유럽의 근대건축 속에 나무라는 소재를 회복시킨 건축가이다. 1930년대의 알토의 건축은 나무의 추구에 시종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안일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그는 자기자신의 건축을 개척해 나갔다. 그의 나무의 추구의 흔적을 찾아 보면 알토의 건축가로서의 자세를 이해할 수 있다......차례1.알토와 다른 거장과의 차이점2.알토의 건축적 특징3.알토의 시기별 특징4.파이미오 요양원5.마이레아 저택참고문헌1.근대건축론 - 정인국역2.아주대학교 건축공학과 홈페이지1.알토와 다른 거장과의 차이점르 꼬르뷔지에, 그리피우스, 미스 반 데 로에의 공통점은 철저한 기능주의와 합리주의를 건축이념으로 하여 소위 국제주의양식의 건축을 전 세계에 만연시킨 거장 들인 것이다. 그 들의 작품에서는 냉철한 논리와 계산된 기계미와 순수형태의 매스의 조화와 통일된 질서만을 찾을 수 있을 뿐으로 이와 반대되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갈망하고 요구하고 있는 민족성, 지방성, 휴머니티, 낭방성 등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의 1950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점차로 이러한 특질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을 그들 자신도 인정하나, 처음부터 고귀한 이 특질을 건축의 기본으로알바 알토는 건축활동을 하였다.2.알토의 건축적 특징①알토는 빛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축가이다.물론 자국인 핀란드의 지형적인 여건상 빛의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과 혼탁함을 경험했던 것이 그 기본적인 배경으로서 작용했지만 Wolfsburg문화센터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천장과 고차을 이용한 자연채광을유도하고 있으며 또 그의 이용방식에 있어서도 로바니에미도서관, 핀라드 국민연금협회 도서관,무라메교회등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한단계 여과된 자연채광방식을 선택하고 있다.②근대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던 국제기능주의의 양식화된 기하학적 직선과는 대조적으로 알토의 작품에서는 다분히 유동적이고 파동적인 곡선 체계가 그 디자인의 핵심을 이룬다.여기에서 거론하는 곡선 체계라는 것은 크게 분류해 볼 때 완만하고 반복적인 마치 파도의 곡것은 알토의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즉, 호수의 이미지나 물결의 흐름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영감이 알토가 그의 작품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하나의구성요소로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뉴욕 만국박람회 핀란드관, 헬싱키 공과대학 오리토리움, 리올라 교구센터의 교회등에서 보여지는 천장과 벽체에의 곡면적용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디자인작품인 유리꽃병(1937년)에서는 호수의 유동적인 이미지가 여실히 표현되어 있다. 또한 알토의 곡선사용의 배경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인본주의적인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딱딱하고 절제적인 반듯한 직선의 이미 지에 비하여 곡선의 이미지가 보더 더 그의 건축적 이념을 표출하기에는 적합했으리라 생각한다.③알토는 단조로운 실내평면의 활력소로서 '바닥면의 높이 변화'를 적용하였다. 특히 핀란드 국민연금협회 도서관에서는 내부 조형, 기능적인 면에서도 적절한 구성요소로 작용하였다.④알토는 근대건축을 주도한 거장의 한 사람이었지만, 자국인 핀란드에 있어서는 위대한 애국자이면서 민족주의의선구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건축가이다.그의 어록에서 빌라 마이레라의 공사가 진행되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아마 원시시대의 건축예술은 발견의 예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재료의 가공능력이 결어되어 있었기 때문 에 자연속에서 미리 만들어져 있는 건축재료들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돌조각, 나무즐기, 그리고 동물가죽등이가장 쉽게 선택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건축 예술은 발견된 재료들을 정확하게 조립하는 일이었다.'알토가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했던 재료는 단적으로 목재와 벽돌이었는데, 그것은 산림자원이 풍부한 자국 핀 란드의 주요 자연 생산품이었으며 그로인한 목재와 건축에서의 사용확대는 적지 않은 이윤을 남겨 주었다.또, 알토의 자연적인 건축재료의 사용은 그의 자연주의적 성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한 성향은 1935년에강연한 알토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도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예술과 순전히 물질적인 개념과는 병존하기 어려운 생활방식이다."⑤'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의 교류'를 알토 작품의 특성으로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빌라 마이레라, 세이나차로 타운 홀,핀란드 국민협회 도서관, 무라찰로 여름 별장과 알토의 스튜디오에서 단적으 로 볼 수 있듯이 대지의 형상에 따라 건축물을 'ㄷ자형'이나 'ㅁ자형'으로 둘러싸고 그 안 쪽에 '뜰'을 형성하여자연스럽게 실내공간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주로 취하고 있다.또, 다른 방식으로 알토의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교제시키는 방법은 끊임없이 펄쳐지는 핀란드의 자연경관을 안 뜰과 같은 매개공간을 두지않고 직접 내부공간과 연결시키는 방식으로서 그 예는 카레 저택에서 찾을 수 있다.카레 저택은 전망이 좋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갤러리로 쓰이는 중앙 홀 주위로 여러개의 침실과 거실 및 식사실을 배치하여 각 실에서 시원하게 설치된 창을 통해 사방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숲과 대지를 조망할 수 있도 록 배려 하였다.알바알토라는 건축가에 관한 해석방법에는 여러 가지의 접근방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었보다도 가장 명확하고 깊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자연주의적인 측면에서의 해석 방법일 것이다.functionalism → national romanticism → doricism의 단계를 거쳐오는 동안 알토자신의 궁극적인 건축 이상의 실현은 살아 움직이는 건축 즉,내부공간체계의 구성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활동하는 듯한 '성장과 적응'이었을 것이다."옛 것은 아무것도 그대로 재생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일단 존재한 모든 것은 새로운 형태를 빌어서 항상 재 부상한다." 이 처럼 알토 자신이 생각하는 건축의 이상향은 단지 합목적적이고 기능적으로만 충실한 표준화되고 규격화 되어 버린 그와 같은 보편적인 건축이 아니라 그 내,외부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유기적인 구성 체계를 갖는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곡선과 곡면의 사용, 그리고 이와 얽히면서 무한히 충돌하는 가운데 공간을 형성해 나가는 부정형용, 실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곡면 천장과 벽체사용등의 부수적인 요소들도 알토의 작품을 특징짓는 구성요소로 작용되는 것이다.이와 같은 여러 가지 알토의 건축 구성요소를 이해하고 학습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핀란드라는 국가의 지형적, 시대적, 역사적 상황의 인식이며 또한 당시의 근대건축을 주도했던 국제기능주의의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근대건축의 선도자로서 알바알토의 독자적인 건축영역은 당대의 주류로부터 다소는 이단적인 건축양식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저면에는 인본주의와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건축예술구현의 의지가 모티브로 작용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근거일 것이다.3.알토의 시기별 특징①Alvar Aalto건축의 잉태기- 1920년대 초[특징]고전을 벗어나지 못한 전합리주의적 건축경향을 보임[작품]Railway Worker's Housing(1923)Worker's Club(1924~1925)Civil Guard Complex(1927)Civil Guard Building(1927)②Turku시의 사무소 시기- 1927~1931[특징]신고전주의로부터 탈피하여 근대적인 국제주의 양식으로 변화하고 있다.신건축의 5원칙이나 구조의 기능성, 또는 공간의 변화성 등이 뒷받침이 된 현대적인 기능적 형태를 성장시키면서 한편으로는 핀란드의 지역적 특성과 국민적 정서에서 벗어날 수없는 토착성이 이러한 현대성과 종합되어지는 특이한 체질을 나타낸다.1927년 C.I.A.M.참가.[작품]Turun Sanamat 신문사 사옥Viipuri 도서관Paimio의 결핵요양소Turun Sanamat 신문사 사옥③Helsinki 사무소 시기- 1931~1950[특징]핀란드 자연환경 속에 무수히 존재하는 호수의 곡선의 도입과 핀란드의 토착 소재인 목재와 흙의 사용.대륙의 근대건축을 완전히 소화, 흡수하면서도 목재와 벽돌이라는 소재에 비상한 감각적 반응을 나타내고, 또 실내공간에서 머리위의 천장채광과 곡선이라는 주제를 적극적으로 의도40)Kauttua의 Terrace House(1938~1940)MIT 기숙사(1947~1948)New York세계박람회 핀란드 관(1938~1940)④이후의 Alvar Aalto의 작품[특징]1950년대 들어서 현상설계에 연속하여 당선됨.그 후로도 많은 작품이 있음4.파이미오 사나토리움(Paimio Sanatorium 1929 - 1933)파이미오 사나토리움은 약 290명을 수용하게 되어 있는 중 정도의 규모이다. 주동은 일련의 6층집이고 남남서로 향하고 있고, 이 주동과 약간의 각도를 열어 일광욕실이 캔틸레버의 발코니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다.알토가 이 공공요양원을 현상설게에서 당선되기는 1928년 인데 당시로서는 일광욕실을 일열의 철근콘크리트 기둥위에 올려 놓고, 그 뒤를 한 개의 평탄한 벽으로 막고 7층의 발코니를 연속시켜 돌출시키기에는 상당한 용기가필요했다.여태까지 요양원에서는 병실과 일광욕실이 한 단위로 되어 있어 환자가 직접 외기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병실과 연결되어 있는 발코니가 없다. 의사들은 환자 자신의 선택과 취미에 따라서 각자 작은 그룹으로 만드는 것이 안정요법상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긴 환자의 열이 보기 흉하기 때문에 발코니에는 간단한 스크린으로 막아 적은 그룹들이 분리하여 쓰게 되어 있다. 옥상은 전 건물이 대기욕실로 쓰게 되어 있다.알토는 콘크리트의 평편한 면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발코니에 따라서 소나무 화분을 진열하였다.이러한 인간적 배려는 개개의 병실에 기본설계에도 고려되어 있어 침대 옆에 가까이 놓여진 전등의 위치라든가,작은 반침의 난형베니아문이라든가, 특히 물이 흐르는 소리가 안나게 고안된 세수기라던가, 천장면의 파넬히팅의 채용같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환자를 수용하는 주동과 직각으로 계단실과 엘리베이터실이 있는 짧은 부분이 달려 있는데, 이것은 식당이나 사교실과 연결되어 있다. 진찰과 관리를 위한 비교적 얕은 부분과 주방, 세탁실, 동력실 등이 방사형으로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