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복지국가모델의 형성과정사학과 12014283 이한나1. 머리말오늘날의 스웨덴을 가리켜 「요람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깝도록 보장된 복지국가의 모델이라고 한다. 그러나 스웨덴 또한 다른 유럽의 주변국처럼 복지국가를 건설하기까지 가난과 질병에 크게 시달렸다. 이런 스웨덴이 근대국가로 등장,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 사이 복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과 그 과정에 있어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러 요건들이 어떠한 메카니즘으로 상호 작용하여 왔는가를 살펴 보려한다.2. 산업화와 노동운동스웨덴의 산업화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뒤늦게 시작되었다. 1870년대부터 천연자원인 풍부한 목재, 철광석을 원료로 한 산업들이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제재소와 펄프공장, 그리고 철강회사들이 제품을 수출하게 되면서 산업화의 기틀이 잡히게 된 것이다. 스웨덴의 산업화가 늦게 시작된 것은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고, 산업화를 위한 자본의 축적과 기술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스웨덴의 산업화는 자생적으로 발생하였기보다는 그 당시 산업화의 선진국이었던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이 나라들의 산업화에 필요한 천연자원인 목재와 철광석의 공급을 필요로 하게 된 외적요인에 의하였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산업화는 스웨덴 사회의 구조 기능적인 측면과 지역간 인구 이동, 도시화, 그리고 정치구조와 형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산업화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1870년만 해도 인구 중 2/3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약 9%에 해당되는 인구만이 제조업과 수공업, 광업, 건설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에 이르러서는 산업구조의 변화가 나타난다. 총 인구 중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약 50% 가량으로 감소되고 반면 제조업과 수공업, 광업, 건설분야에 종사하는 인구30%이상으로 증가하는 한편, 상업과 교통·통신산업에 고용된 인구도 약 15%에 이르렀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고용기회의 증대에 의해 지역간 인구 이동과 인구 도시집중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산업화에 따르는 소득의 분배적 측면을 살펴보면 비록 산업화 이전보다 생활수준과 환경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하는 상태였으며, 직위와 직종에 따라서 소득격차가 심한 사회·경제적 모순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그리하여 산업화 과정에서 고용주에 대한 산업노동자 계급의 협상지위를 강화하고 노동자의 생활 조건과 사회적 지위 및 참정권의 개선을 주목표로 삼았던 노동운동이 점차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되고 그 조직력을 배경 삼아 사회정책의 개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치와 밀착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사기업체의 경제적 착취로부터 저소득층 가정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출발한 소비자협동조합운동도 그 활동을 적극화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제휴하여 공동전선을 펼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연대의식을 갖게 된다.이 두운동의 이념적 통합은 스웨덴의 정치적 민주주의 준비과정에서 활력소적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복수정당의 출현과 참정권의 확대를 통한 보통선거권의 제도화는 이 나라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결정적 작용을 하였다.이미 1840년에 노동자협회와 같은 단체가 만들어 졌으나 본격적인 노동조합의 결성은 1870년에 이르러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국 규모의 여러 노동조합 조직이 결성되고, 1898년에는 이들 조직체들이 하나의 연합체로 통합되어 스웨덴 노동조합 중앙협회(LandsOranizationen : LO)를 구성하게 된다.이때의 노동조합은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하였으며, 사민당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같은 노동조합과 사민당의 협력관계는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급기야 대규모 파업을 단행하고 이에 대치해 고용주 측은 중앙고용주연합회(Svenska Arbetegivare F reningen: SAF)를 형성한다. 그 후 1938년 살트쉐바드협약(Saltsj badavtal)이 체결되기까지 스웨덴은 극심한 노사분규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협약체결 이후 분규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스웨덴에는 산업평화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는 경제적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기반을 다지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3. 정치적 민주화와 의회 민주주의19세기 말 스웨덴에서 일어난 심대한 사회적, 경제적 변화는 정치적 변화도 수반하면서 이루어졌다. 귀족의 권력이 극도로 약화되었고 새로운 귀족인 무역가나 산업자본가가 등장하였지만, 기존의 신분제 사회 의회 내에서 새로운 귀족들이 대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회제도에 대한 개혁이 실시되었다. 1865년까지 네 가지 신분(귀족, 관료, 시민, 농민)에 기초한 중세적인 의회가 1866년 의회법에 의하여 양원제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확대하고자 했던 의도와는 달리 투표권은 소득과 자산을 기준으로 하여 주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제한적인 성격을 띄었다.따라서 이러한 참정권의 제한범위를 철폐하려는 운동이 안팎으로 꾸준히 전개되었다. 결국 1909년과 1918∼1921년 사이 두 차례에 걸친 법개정을 통해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에 이르며, 의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게 된다. 이렇듯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됨에 따라서 국민들의 의식이 변화되고, 각 정당들도 유권자 확보와 저변 지지세력 확대를 위해서 정당의 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정책 개발에 관심을 쏟았다.4. 사민당의 집권과 복지정책이미 정치적 민주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참정권의 확대는 정당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또 산업화에 따르는 사회·경제적 변화 역시 유권자들에게 정치이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사민당은 창당이후 1915년까지 겨우 8만6천여 명의 당원을 확보한 소규모 정당이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성숙해져 가면서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조직이 확장되어짐에 따라서 사민당의 지지기반이 굳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사민당의 실용주의에 입각한 점진적 사회개혁 노선에 새로 등장한 도시 중산층이 크게 호응하게 되어 사민당의 당세 확장에 기여하였다. 1917년 선거에서 많은 지지를 받은 사민당은 자유당과의 연정에 참여하여 최초로 내각에 참여하였다. 자유당-사민당 연정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921년 상원과 하원에서 완전한 평등선거를 입법화하게 된다.1921년 선거제도의 개혁으로 지속적인 당의 기반을 확대해 나간 사민당은 1920년대를 휩쓴 경제공황과 소수연정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독자적인 정책개발을 하지 못했다. 가장 직면한 문제는 실업이었다. 1920년대 연평균 16.6%의 높은 실업률이 지속되어 농촌의 궁핍과 경제적 불안정이 사회불안을 낳는 핵심적인 원인으로 등장한 것이다.이에 사민당은 1932년 가을 선거유세에서 실업과 비상구호사업에 관한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제시하였다. 사민당이 내세운 것은 포괄적인 사회복지프로그램을 통하여 일반 시민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한다는 것으로 스웨덴을 국민의 가정(folkhemmet)'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사민당은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대부터 사민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특히 1936년 선거에서는 사민당이 단독으로 하원의석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게 되어 복지정책을 과감히 수행할 수 있는 의회 기반을 단단히 굳혔다.1932년부터 시작된 사민당의 집권은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1977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동안 사민당은 상원에서 과반수 이상의 의석확보를 위해 두 차례에 걸친 농민당과의 연합내각을 수립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36∼1945년 사이에는 보수당, 자유당, 농민당을 참가시켜 초당적 내각을 형성하기도 하였다.스웨덴 복지정책은 이 사민당이 집권정당이 되면서 점차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했으며,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그 기반을 확고히 다진 후에 비로소 복지국가로 등장했다.
傳統 中國人의 日常生活서론이 책은 꼴레쥬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의 자크 제르네(Jacque Gernet)교수의 『몽골침략 전의 중국인의 일상생활(La vie quotidienne en Chine - a la veille de linvasion mongol 1250 ∼1276)』(paris; Hacette, 1959)을 번역한 것이다. 제르네 교수는 현존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동양학자 중의 한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이 책에서 남송왕조(南宋;1127∼1279)말기, 즉 남송(南宋)의 수도가 남하한 몽골군대에 의해 함락되는 1276년에 앞서는 시기와 그 수도가 되었던 항주(杭州)라는 도시에 초점을 맞추어 자연조건·도시구조·인구·교통과 물자의 보급, 상인계급의 대두와 도시의 경제생활, 의식주문제·오락·종교 등 다방면에 걸친 전체상의 복원을 통해 그 시대의 일반인들의 실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저자가 이 시기와 장소를 선택했던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이 시대가 도시와 상업활동의 경이적인 발전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 책에서 주로 도시생활에 주목함으로써 이 시대의 가장 특징 있는 성격의 일면을 밝혀보고자 했다. 둘째, 송대(宋代)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는 풍부하지 않더라도 10세기부터 인쇄술이 출연하여 활발하게 이용되었기 때문에 송대(宋代)에 관한 무수한 잔존기록과 문서들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 항주의 세세한 구조까지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복원해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 도시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마르코 폴로가 1276년부터 1292년까지 항주에서 살았고 마르코 폴로가 남긴 중국수도의 묘사는 저자의 저술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이러한 점으로 볼 때 저자는 중국 남송 시대 도시 생활의 갖가지 측면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표현하려 했다. 이는 왕조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일반 대중들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는 역사 서술로의 전상을 표현하고 있다. 처음의 시작은 어떻게 항주가 새 왕조의 수도로 결정되어 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항주는 원래 전단강의 하구에 있는 한 주(州)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강 유역과대규모의 무역항이 출현하고 있던 동남해안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항주는 수도임과 동시에 당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남중국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점으로 인해 항주는 인구 100만의 세계 최대도시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항주의 규모는 수도로 정해지기 이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고층 건물이 들어설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았고, 심각한 주택난을 겪게 된다. 이렇게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건물의 주재료가 대나무와 목조였기 때문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고 그 규모도 늘 컸다. 그래서 화재에 대한 방지책으로 소방조직을 결성하고 망화루를 설치하여 화재예방과 신속한 대처에 힘썼다. 다음으로는 수운을 통한 물자의 이동과 항주의 포장도로, 저수지 관리와 시내 10곳의 주요한 대시장에 대한 설명을 한다. 마지막으로는 번성하는 상업활동과 끊임없이 유입되는 여행자와 상인들로 인해 발생된 화려하고 사치스런 소비문화와 식당과 여관, 주루(酒樓), 다방 및 가무나 연극 등 볼거리를 즐기는 장소에 대한 설명을 한다. 이 부분을 통해 저자는 항주가 얼마나 거대한 도시였는지 그리고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미관을 지녔는지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항주의 생활은 인간이 지니는 뛰어난 자연지배능력, 인간 창의력과 불굴의 인내력을 증명하는 것이고 또한 매우 중국적인 성격 즉, 뛰어난 정치조직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제 2장 사회’에서는 변모하는 세계, 상류계층, 상인, 도시의 일반사람, 농민이라는 소주제로 그 당시 사회 구성원에 대한 설명을 한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급격하고 엄청난 중국의 상업발전은 국가 자체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경제발전에서 이익을 빨아들일 정도까지 이르게 했다. 하지만 중국의 전형적인 혈연관계에 의한 사회의 조직으로 인해 중국은 하나의변부에 머무르고 있었던 무관, 행정조직에 계속 문관을 배출해온 독서인 가족과 특별한 훈공과 황제의 총애로 칭호를 얻은 문관·무관의 가족과 황제가 총애하는 후궁의 친척을 포함한 귀족과 계급순위의 정점에 있는 황제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이라 보고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상인이다. 국가가 소비물자를 직접 통제하고 있었지만 국가와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민간상업이 번성하였다. 그렇지만 상인을 하나의 계층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대상인과 빈민가의 조그만 상점의 주인과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업의 발달로 다양한 종류의 지폐의 통용, 부유한 상인들의 증가,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고가의 수입품들과 사치스런 소비, 그리고 대중의 극단적인 빈곤들이 이 당시에 나타나게 된다.도시로의 부의 집중과 농촌의 피폐가 겹쳐져 농촌 빈궁민의 대도시 유입이 일어났다. 이러한 유입민들이 항주의 일반 주민이 되었다. 앞에서 말한 도시의 과잉인구는 이러한 현상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일반민들은 주로 육체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이중에는 안정된 계층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그날의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의해 항주에는 상류계층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원조를 바탕으로 하는 민간의 자선사업이 존재하여 곤궁한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었다. 시골 농촌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농업 노무자의 차용계약서나 지방관청의 문서를 통해 볼 때 꽤 다양한 사회생활이 존재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제 3장 주거·의복·식사’에서는 주거와 생활 공간, 목욕, 의복제도와 유행, 식생활이라는 소주제로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문화를 살펴본다. 주거와 생활공간에서는 주로 쓰였던 건자재와 건축물과 그 지붕의 모양, 귀족·부유한 상인·서민들의 다양한 주거 형태, 정자와 정원에 대한 설명, 실내 장식과 난방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중국의 지방마다 큰 차이를 보이는 목욕문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 규정이 나타나고, 규정은 아니더라도 신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천이나 의복형태의 차이가 발생했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식생활을 살펴보면, 13세기 항주 생활에 대한 기록에는 수백 가지 요리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중국은 면적이 커서 지방차가 크며, 당시의 항주에는 각지에서 온 피난민과 여행자들이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다양한 지방의 요리전문점이 번성해 있었다. 식생활에서 나타난 빈부 격차와 중국인이 즐겨 마시던 차에 대한 설명도 나타난다.‘제 4장 사람의 생애’에서는 가족이념, 어린이의 탄생, 양육과 교육, 결혼과 여성의 지위, 질병, 죽음이라는 소주제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한번씩 겪는 통과의례를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행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가족이념은 중요한 개념이다. 중국의 상업발전에 따른 도시화에 의해 대가족의 형태는 유지하기 곤란해지면서 이 형태에 의존한 전통적인 가족도덕의 유지도 곤란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새로 성립된 가족이념이란 가족 상호관계에서 지나치게 가까운 것은 소원하게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것이었으며, 자신의 태도를 가족 상호간의 원근에 따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 이상적 가족 이념은 도덕의 기반이었을 뿐 아니라 사회 관계의 기반이 되었다. 어린이의 탄생에서는 아이의 탄생과 그 후에 이루어지는 의식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양육은 가정에서 이루어 지는 교육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당시 가정은 아이에게 윗사람에 대한 공손함과 존경의 마음가짐을 가르쳤는데, 이는 아이의 개성발달을 억눌러 세상 일반의 상식에 잘 순응하는 틀에 맞추어진 인간밖에 키우지 못한다. 독립정신이나 큰 뜻을 키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무의 정신이나 용감한 투쟁정신도 키우지 못했다. 도시의 발전, 중류계급의 성장, 인쇄술 보급 등의 호조건이 겹쳐 도시에서 공립이나 사립 교육이 성행하였다. 또한 여성의 교육도 이루어 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과 여성의 지위 부분에서는 그 당시 결혼에 대한 풍습이나 일부 부유층들의 결 5장 시간과 공간’에서는 사계와 일상생활, 제례와 연중행사, 종교생활이라는 소주제로 그 당시 항주의 기후와 사용하던 역법에 대한 설명, 그 역법에 따른 관료나 일반인들의 휴일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다. 또한 중국인이 치르던 의례· 제례와 연중행사(정월초하루,2월초하루, 청명절, 동악천제인성제-축제, 석가모니 탄신일, 5월5일, 입추, 길쌈축제, 불교축제, 중추절, 국화절, 동지 등)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종교를 통해 나타나는 중국인의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중국인의 종교의식의 목적은 세계가 종말하는 무섭고 부자연스러운 현상을 막는 것이다. 종교의식은 국가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의식과 미신과 불교, 도교 의식이 존재했다. 국가의식은 황제가 하늘과 땅과 황실의 조상께 드리는 제사로 지배계층의 정치질서 유지를 목표로 행해졌다고 본다. 반면에 가정 내의 의식은 조상숭배의 형태로 씨족이나 가계의 어른이 가족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것이었다. 미신은 지방신의 형태로 고대의 성현, 유명한 시인, 군인 영웅, 도교의 여러 신전에서 차용한 신, 이름높은 고승, 불교의 여러 보살, 석가의 직계제자 및 토지신·성황신의 형태로 숭배되고 있었다. 이러한 미신은 심령술과 연결되어 영매·예견능력·예언자의 형태로 서민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불교는 중국 전역에 퍼져있어서 상류층이든 서민이든 자신이 행하는 의식이 불교의 것인지도 모르는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었다. 불교에는 도관(觀),신자 조직, 경전, 신선과 예배의식이 있었고 이는 도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불교보다는 그 파장이 약했던 것 같다.‘제 6장 여가시간’에서는 도시생활의 영향, 오락, 문예와 예술이라는 소주제로 그 당시의 예능분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상업의 발달로 인한 도시의 생성으로 부자·소매상인 및 하층민이라는 도시의 새로운 사회계층이 출현했다. 이에 따라 예능과 오락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났다. 많은 서민들이 오락산업에 관계하고 있었고, 상류층들은 심미예술에 빠있었다.
신라 말 선종의 대두사학과 12003431 김미영12014283 이한나12023765 한 샘*선종의 정의*선종은 불교 종파의 하나로서 좌선에 의해 심신을 통일하고 마침내는 자기가 그대로 부처임을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좌선은 석가모니이래 불교 전반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법으로, 특히 선종은 좌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경전에 의하여 종파를 구분하는 교종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여 문자에 의지하거나 경전의 복잡한 교리에 의거하지 않고 오로지 심성(心性)을 닦는데 치중하였다.선종에서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 그 자체가 곧 불성(佛性)임을 알면 그것이 곧 불교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있었다. 견성성불의 방법은 좌선(坐禪) 즉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인데 좌선을 통하여 각자의 마음 속에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종은 개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도입과 배경*신라 하대에는 지방에서 호족이 대두하게 되면서 지방의 통치는 실질적으로 호족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호족은 크게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 토착호족, 해상의 군진 세력으로 크게 나뉘어진다.왕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의 정치가 왕위계승분쟁으로 혼미를 거듭하게 되면서 지방호족 세력이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그 지방의 백성들을 독자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 하대의 중앙 진골귀족세력의 쇠퇴와 지방호족의 대두라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불교계 또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전제왕권을 옹호했던 교학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지방을 중심으로 참선(參禪)을 중시하는 선종(禪宗)이 성장하게 되었다. 교종의 인간의 성불에 대한 차별성에 비해 선종은 인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선종이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7세기의 선덕여왕 때라고 하나, 그 때에는 이렇다할 이해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9세기 초의 헌덕왕 때에 도의가 가지산파(迦智山派, 전남 장흥 寶林寺)를 개창하면서 점차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홍척(洪陟)의 실상산파(實相山派, 남원 實相寺), 혜철(慧哲)의 동리산파(桐裏山派, 곡성 泰安寺), 현욱(玄昱)의 봉림산파(鳳林山派, 창원 鳳林寺), 도윤(道允)의 사자산파(師子山派), 범일(梵日)의 사굴산파(山派, 강릉 山寺), 무염(無染)의 성주산파(聖住山派, 보령 聖住寺), 도헌(道憲)의 희양산파(曦陽山派, 문경 鳳巖寺), 이엄(利嚴)의 수미산파(須彌山派, 해주 廣照寺) 등 이른바 선종 9산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신라 말기에 선종이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지방의 호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선종 9산의 대부분은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봉림산파는 김해의 호족인 김율희(金律熙, 또는 蘇律熙)의 후원을 받았고, 사굴산파는 강릉의 호족인 왕순식(王順式)의 후원을 받았으며, 수미산파는 개성 호족인 왕건(王建)과 관계가 깊었다. 또 9산을 처음 연 승려들도 호족 출신이 많았다.비록 그 선조가 중앙귀족인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이미 낙향하여 호족화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9산은 모두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잡게 되었다. 선종은 요컨대 호족의 종교로서 성장하였다. '나도 깨달으면 부처'라는 선종의 개인주의적 경향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에 반항하여 일어나 '나도 한 세력 이루면 왕'이라고 주장하던 호족들에게 그들이 독립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선종과 호족과의 관계*통일신라시대의 신분제도였던 골품제가 점차 와해되어가고 특히 지방에서 호족이 새로운 세력으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면서 신라사회는 점차 붕괴되어간다. 진골중심의 폐쇄적인 사회구조를 거부하는 새로운 세력인 6두품과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서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던 호족은 함께 선종과 유교의 사상적 기반 아래 당시 보수적인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교종에 맞서게 된다.
*밀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1806년 5월 20일에 공리주의의 신봉자였던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홉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남다른 교육을 받아왔는데 이는 존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한 그의 방침이었다. 밀이 살았던 시기는 전체적으로 영국의 변화기에 해당하던 때였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주의의 원리를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었고 진보를 꿈꾸며 전진하던 이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존의 아버지는 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난이도의 교육을 시켰는데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정식교육을 받지 않은 그였지만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매우 뛰어났고 책의 속편까지 지어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런 지나친 뛰어남을 한번도 자랑거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으며 이로 인해 거들먹거리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존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교육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공리주의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존에게 항상 공리주의 사상을 주입시켰고 존 역시 자라면서 수많은 사상들과 접하게 된다. 존의 교육상 하나의 큰 행운은 열네살 때 프랑스에서 1년간 머무른 일이었다. 그는 그 곳에서 영국인과는 다른 프랑스인의 사고방식을 접하게 되며 아버지의 친구를 비롯한 많은 공리주의자들과 사상가들을 만난다.이렇게 자신의 사상체계를 서서히 만들어나가고 있을 무렵 존은 갑작스런 실의에 빠져든다. 그는 시나 소설 등을 통해 그러한 침체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다시 새로운 사상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실증주의의 역사철학을 알게 된 것은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주는 것이었다. 1830년 여름 밀은 헬리엣 테일러라는 여인을 소개받게 되는데 그녀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다. 하지만 둘은 사랑에 빠졌으며 1849년 헬리엣의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그들의 관계는 지속된다. 밀과 헬리엣은 그 후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녀는 갑작스럽게 죽고 만다. 그 후 밀은 그녀와 집필을 계획했던 많은 양의 책들을 써견을 억압할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국가 권력의 증대는 인간의 자유에 해롭다는 생각을 항상 가져왔고 자유를 한정 지어서 생각했다. 물론 정치에 있어서의 그의 신념은 민주주의였다. 에서도 나와있듯이 그는 여성의 선거권에 대해서도 굉장히 급진적인 사람이었다.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밀이 살았던 시기는 앞서나가려는 사람들의 시대였고 자본주의가 뿌리내린 때였다. 밀은 얼핏보면 공산적 사회주의자로 보이나 그에 따른 확신이 없다. 그가 인용했던 로버트 오웬이나 루이 부란 등은 공산적 사회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은 생산수단의 공유와 생산물의 동등한 분배를 주장했다. 하지만 역시 국가 세력의 증대에는 자유의 이름을 빌려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밀은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써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반대하였으나 실험적인 사회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관대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경험주의적 사회주의의 접근을 바랐으며 국가 권력과 제도보다는 개인의 역량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여성의 예속*제 1장19세기 영국에는 군사독재는 정당화될 수 없는 힘의 법의 한 사례라고 보는 보편적인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위대한 국가에서는 아직도 존재하거나 또는 이제 막 종식되었거나 아니면 특권층, 유력자들 중에 그것에 유리한 강력한 당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기존체제의 힘이며 이에 반대되는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체제의 힘은 막강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과 다르지 않다. 권력의 소유에서 오는 충족감이 무엇이든, 그리고 권력 행사에 따르는 이익이 무엇이든간에 이 경우 그 권력은 어떤 특정 계급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모든 남성에게 공통적이다. 일찍이 어떤 특권을 지니고 예속을 강요하는 제도가 그것에 의해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목에 멍에를 바짝 지웠다면 그 제도는 바로 여성 예속 제도이다. 여성들은 이러한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사회적, 자연적 남성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볼 때, 그리고 결혼법이라는 제도의 남용으로 야기되는 인간의 비참함은 소름끼칠 만큼 처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성인 남성의 수중에 권력이 쥐어져 있다는 것이고 누구도 남성들이 그 권력에 부적합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권력은 남성의 본성의 깊은 곳에 도사려 있는 잠재적인 이기심을 찾아내어 부추기고 이기심의 약한 불꽃과 타다 남은 재에 부채질을 한다. 그리고 이 권력은 다른 관계에서는 남성이 억제하거나 감추어야하고 언젠가는 권력의 억제가 제2의 천성이 될 본래의 이기심을 제멋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자격을 남성에게 준다. 남편이 권력의 소유에 적합하지 않을수록 그는 더욱 법이 그에게 준 권력을 의식하고 관습이 허용하는 최대의 한계까지 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단순히 권력 소유의 쾌감을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권력을 사용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낀다.제 3장오늘날은 누군가를 억압하려할 때 억압당하는 사람을 위하여 억압하는 척 한다. 남성들이 독점해온 모든 직업을 여성에게 개방하는 것을 억압할 때 여성들에게 직업을 가지는 일은 진정한 행복과 성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성들이 가정 내에서 여성의 복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모든 인간의 평등한 도덕적 권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선택하는 범위를 좁게 제한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치열한 경쟁이 경쟁자의 노력에 주는 자극적 효과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공적인 기능에 한정시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한 논의는 국회의원과 시의원의 선거권에 대한 것이다. 여성은 평생 자신을 지배할 남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되어있다. 공적으로 신뢰받는 사람들의 선거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안전장치와 제한으로 선거권을 보호하는 것이 헌법의 일이다. 남성에게 선거권을 주는 어떤 조건 하에서도, 어떤 제한 안에서든,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 비록 모든 여성이 아내라 자유라는 권리의 박탈은 권리를 박탈당한 인류의 절반에게 개인적인 즐거움의 상실과 그에 대치되는 피곤함과 실망 그리고 삶에 대한 심한 불만족이라는 악을 야기한다. 이것은 인간적 행복의 기초마저 파괴하며, 개인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모든 것을 빈곤화시킨다.* 자유론 *1859년 간행된 『자유론』은 밀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이다. 시민의 자유를 논한 고전적 저작으로 서론, 사상과 언론의 자유,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 개인에 대한 사회적 권위의 한계, 적용 등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제 1장 서론이 논문은 사회의 집단적인 권위가 개인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개인적 및 집단적 행동의 적절한 한계를 결정하기 위한 원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종래의 전제정치(혹은 소수의 귀족정치)에서는 소수 지배자들의 권력 행사를 제한한다면 국민의 자유는 자연히 보장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민주적 경향에 따라 오늘날 자유는 종전과 같이 소수의 특권계급과 민중과의 문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속의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의 문제로 존재하게 되었다. 민주정체(民主政體)는 민중에 의한 민중의 권력이라 하지만,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는 반드시 동일인이 아니고, 민중의 의사라는 것은 민중 다수자의 의사를 의미한다. 따라서 전제주의(專制主義) 체제로부터 다수의 민중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정치 제도가 확립되었지만, 새로운 형태의 전제, 즉 다수의 압제 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압제는 반드시 정부기관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여론의 압제 가 부과되어 행하여진다.민주주의가 확대됨에 따라, 경계해야 할 것은 교육이 없는 다수자가 수를 이용하여 소수자의 의견을 억압하는 일이다. 따라서 확고한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리가 필요하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사회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은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해에 관계되는 부분이요, 단순히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에 관해서는 각 개인은 절대적 독립자수자의 지배적인 사상이 잘못된 경우이다. 소수자의 의견은 집단적 권력이나 기타의 부당한 힘으로 억압해서는 안된다. 다수자가 어떤 수단에 의하여 소수자의 사상을 박해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절대 무오류(無誤謬)를 가정하는 것이며,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비록 현시(現時)에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음 세대에까지 영구히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따라서 비록 현재 지배적인 사상이라 할지라도 독선에 이르지 않고 보다 나은 사상의 출현을 위하여 사상의 문을 넓게 열어 놓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단적인 주장이 계속 탄압 된다면, 과연 어떻게 보다 좋은 사상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둘째의 경우로서, 다수자의 지배적 사상이 완전한 진리이고 소수자의 의견이 잘못된 경우라 하더라도, 후자에 대한 전자의 박해는 결코 행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상이 어느 시기에는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오랜 시일이 경과되면 마침내 죽어버린 독단(獨斷)으로 되어 생기 있는 진리가 될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진리가 생기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다만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하나의 인습(因習)이며 정신이 결여된 형체로, 진정한 의미의 진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이렇게 인습화되어 정신이 결여된 사상에 대하여, 자체 내부의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진리성을 되살아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반대론과의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즉 의견의 대립에 의해서만 진리의 발견은 가능하며, 진리의 발견은 사회의 진보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소수의 반대 의견이 설사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관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제 3장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개인적 행위의 자유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사상의 자유보다는 더 많은 사회적 제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오직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상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워야 하며, 각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