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副詞)품사의 한 갈래. 용언 또는 용언형이나 다른 부사 앞에 놓여 그 뜻을 한정하며 활용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문장·체언·관형사 등도 수식합니다. 부사는 그 기능이 주로 다른 성분 앞에 쓰여 그 성분의 내용을 한정(수식)한다는 점에서 체언을 수식하는 관형사와 함께 수식언에 속합니다. 형태상으로 볼 때 부사는 어형변화, 즉 활용이나 곡용을 하지 않는 불변화어입니다. 또한 문장에서 항상 부사어로 쓰일 뿐 서술어나 관형어로 쓰일 수 없습니다. 물론 체언에 부사격 조사가 붙거나 용언에 부사형 어미가 붙어 부사어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는 그 품사가 부사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임시로 부사적 기능을 할 뿐입니다. 체언에 붙는 보조사, 곧 특수조사를 취하는 특징도 있습니다. (보기; 아직도, 빨리만).부사는 한정하는 내용에 따라 시간·처소·상태·정도·어법 부사 등으로 나뉩니다. 시간부사에 <일찍> <잠깐> 등, 처소부사에 <여기> <곳곳이> 등, 상태부사에 <잘> <못> <갑자기> 등, 정도부사에 <훨씬> <결코> 등, 어법부사에 <꼭> <만일> 등의 부사가 있고, 학자에 따라 부사의 종류에 접속부사를 설정하여 <그러나> <그러므로> 등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또 부사는 본래부사와 다른 품사에서 전성된 전성부사로 구분됩니다. 전성부사의 대표적인 예는 형용사 어간에 <-이><-히>가 붙어 부사로 전성된 <깊이> <넉넉히> 등과, 동사 <넘다> <결하다>에서 온 <너무> <결코> 등이 있습니다. 의성어·의태어도 본래부사이므로 같은 말이 거듭되었을 경우 첩용부사(疊用副詞)라고 합니다. 부사는 한정을 가하는 용언이나 부사 앞에 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강조나 발음상 이유로 도치되거나 문두에 올 수 있습니다부사는 문장에서 주로 용언을 꾸밈으로써 용언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 주는 말입니다.부사는 형태가 고정되어 있어 활용을 하지 않습니다.부사에는 보조사를 붙일 수 있습니다.접속부사는 독립어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부사의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1. 성분부사: 특정한 성분을 꾸며 주는 부사문장에서 상태나 정도를 나타내면서 ‘어떻게’의 형식으로 한 성분을 꾸미는 부사. [성상 부사, 지시 부사, 부정 부사가 이에 딸림.]가.성상부사: 문장에서 상태나 성질의 정도를 나타내면서 ‘어떻게’의 형식으로 다른 말을 한정하는 단어.예) 급히, 가만히, 잘, 매우, 더욱, 더구나, 차라리, 높이, 깊이, 많이, 하물며, 가령 아직, 일찍, 갑자기, 잔뜩, 문득, 퍽, 조용히......-의성부사: 사물의 소리를 시늉한 부사. 예)퐁당, 하하하, 꾀꼴꾀꼴, 개굴개굴, 딩동댕......-의태 부사: 사물의 모양이나 움직임을 흉내 내어 만든 부사예)옹기종기, 반짝반짝, 사뿐사뿐, 팔랑팔랑, 나풀나풀, 슬슬......가.지시부사: 장소, 시간, 방향, 문장 내에서의 사실을 지시하는 부사로 처소나 시간 및 문장 안에서의 사실 등을 가리키어 한정하는 부사.예)‘이리 와서 자세히 말해 다오.’에서의 ‘이리’ 따위.-처소부사: 예) 이리, 그리, 저리, 여기, 거기, 요리, 조리, 어디......-시간부사: 동작의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 예) 언제, 금방, 오늘, 어제, 내일, 아까...가.부정부사: 용언(동사·형용사)의 내용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한정하는 말.예) 그는 아직 안 일어났다.’에서의 ‘안’ 따위. 못
1. 선정주의(Sensationalism)의 정의와 개념선정주의란 본능과 호기심을 자극하여 대중의 인기를 끌어 이득을 얻으려는 보도 경향으로 특정 의미를 극도로 강조하고 대중의 원시적 본능, 심미적 감성을 자극하고 호기심에 호소하여 사건 기사를 실제보다 흥미롭게 중대한 것처럼 윤색하는 보도경향을 일컫는 말이다.철학과 문학에서 유래하였으나 언론에서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염가신문이 등장하면서 사용되었다. 대부분 영리기업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의 매스미디어는 가능하면 많은 독자와 시청자를 확보하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매스미디어가 대중확보를 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어 왔다.주로 인간의 정서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범죄와 폭력, 성에 관한 기사, 유명인의 스캔들, 부정부패, 진담기문 등을 취급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1830년대부터 시작된 염가신문 시대, 1890년대의 황색신문 시대, 그리고 1920년대의 재즈저널리즘 시대(타블로이드즘 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다.선정적인 보도경향은 신문 방송을 포함한 모든 언론보도 방식에 영향을 주어 기업적 기반을 굳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언론보도 관행으로 보편화되어 일반대중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 경쟁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정치적 무지와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운 지나친 폭력과 성의 상품화는 청소년들의 일탈행위를 부추기고 쾌락주의를 퍼트린다.1996년 제정된 신문윤리강령에도 비윤리적 행위를 보도할 때 음란하고 잔인한 내용을 포함하거나 저속하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며 선정보도를 금지하고 있다. 화제가 되었던 영국 왕세자비 S.다이애나의 사생활과 그 죽음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파파라치의 추적, 미국 대통령 B.클린턴의 섹스 스캔들과 성추문보고서 보도 등이 그 예이다.센세이셔널리즘 경향을 띠는 옐로저널리즘의 특징은 집에 있어서 대형의 제목을 사용하고, 사진의 과다한 사용이 특징이며 내용에 있어서 모든 방면에 선정주의 적인 사실을 소재로 하고 만화 또는 천박한드》 일요판 만화 ‘옐로 키드(yellow kid)’의 스텝을 그대로 빼내 또다른 '옐로 키드'를 만들어냄으로서 동시에 두 잡지가 황색의 옷을 입은 소년이 주인공인 ‘옐로 키드(yellow kid)’를 가지고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고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신문이 과도한 선정주의로 흐름으로써 생긴 말이다. 이후 선정적 기사를 게재하는 신문을 가리켜 옐로 프레스(yellow press) 또는 옐로 페이퍼(yellow paper)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 신문인 이었던 J.퓰리처는 성공하기 위한 근대신문의 유형으로 끈질지고 용감한 기자를 고용하여 작성한 탐방기사와 선정적인 제목, 폭로기사, 현상모집, 저렴한 구독료, 삽화의 삽입, 경품제공 등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선정주의는 사회 미풍양식의 파괴 및 풍기문란 조장, 프라이버시의 침해, 신문의 품위 저하를 일으키는 원흉이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대중신문이 이를 채택되고 있다.2. 언론 매체와 선정주의눈에 띄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잘 보지 않게 되므로 어느정도의 선정성은 필요악이고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대중언론의 본질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그러나 문제점은 우리 언론이 점점 더 선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선정성을 더해가는 이유는 언론사간의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매체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종류의 매체 내에서도 경쟁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독자나 시청자 확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으며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기사의 자극성은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광고가 주 수입원인 언론 매체가 자유로운 경쟁 시장 체제하에서 운영되는 한, 수입을 올리기 위해 시청률에 집착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더욱이 상업(또는 민영) 방송의 경우, 시장 논리에 따라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할 때 최대 공약수의 시청자 층을 겨냥하여 프로그램을 제작, 공급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교육·소득·사회 계층 등의 잣대로 보아 피라미드형 내지 다이아몬드형인 우리 나라 되며, 선정주의로 치달아 전반적인 하향 평준화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본주의 텔레비전, 특히 시장 경제 체제하의 지상파 텔레비전이 안고 있는 태생적인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선정성 경쟁은 기사의 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정확한 표현보다 자극적인 표현을 찾다 보니 현실의 정확한 재구성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다 보면 독자나 시청자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언론은 상업성 못지 않게 공익성을 중시해야 할 기관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언론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나치게 장사속을 밝혀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언론이 본질적 요소들--곧 정확한 보도와 공정한 해설 그리고 다양한 읽을거리들--로 경쟁해야지 자극적인 표현으로 독자와 시청자를 끌려는 것은 본말을 뒤짚은 처사라 할 것이다. 게다가 언어문화를 선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언론이 오히려 앞장서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앞날을 암담하게 하는 일이다.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언어가 즉각적인 호응을 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극적인 언어가 일시적으로는 독자나 시청자들의 일시적인 흥미를 끌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공신력을 깎아 내리는 결과를 가져온다.3. 과도한 선정주의의 실태일간 스포츠지의 1면을 장식하는 기사 중 가장 많은 것이 아마도‘ΟΟ양 비디오 사건’,‘X양 섹스비디오 파문’일 것이다.‘L양, K양, H양...’등의 각 종 영문 이니셜로 이루어진 표제와 함께 1면의 전체 배경을 이루는 선정적 사진. 이러한 1면 양식은 정형화된 하나의 형식인가 싶을 정도로 남용되고 있다.스포츠지는 그 판매특성상 가판(街販), 즉 가두 판매되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적 1면이 내세워진다고 볼 수 있다. 무료한 지하철역에서, 버스정거장 앞에서 이러한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사진과 표제는 지나가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500원짜리 동전을 내놓게 하기에 충분하다.기준 자료로 삼은 5개의 스포츠지(스포츠 서울, 일간스포츠,리고 있다. 특히 스포츠나 연예 관련 메인기사 옆에 위에서 아래로 배치되어 있는 사이드 기사의 경우, 스포츠 소식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누드나 섹스 ,性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전화나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한 음란 매체에 대한 광고도 서슴없이 곳곳에 실려 있었다. 또한 각 스포츠지에 연재되고 있는 연재만화 역시 선정적 삽화와 내용을 담고 있다.이러한 과도한 선정주의를 형식면과 내용면으로 나눠 간략히 정리해보면, 우선 편집에 있어서는 대형 제목과, 현란한 사진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또한 내용면에 있어서도 대부분 선정주의적인 내용이 소재로 삼아지고 있으며, 만화 또는 천박한 내용의 기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살펴 볼 수 있다. 황색 저널리즘 현상이 현재 우리의 스포츠지에서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 위에서 언급한 미국 대통령 B.클린턴의 섹스 스캔들과 성추문 보고서 보도도 문제가 되었다.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작성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성추문 보고서가 지난 11일 인터넷을 통해 전격 공개되자 전세계 유수한 신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신문들도 ‘현대판 킨지 보고서’를 대서특필하였다. 오럴섹스·폰섹스·성관계·성욕·성교 등 자극적인 성적 용어로 점철된 4백45쪽의 보고서에서 사용된 섹스 관련 어휘는 물경 5천개가 넘는다고 한다.이 보고서에 사용된 어휘 중 성적(Sexual)이란 말은 4백6번이 등장해 최다 용어 1위에 꼽혔고 섹스(Sex)란 말이 직접 사용된 예는 1백64번, 성적으로(Sexually)는 9번, 섹스(Sex), 더욱 섹시, 그리고 성행위 등은 한번씩 등장하였다. 또 젖가슴이란 표현은 62번, 시가는 23번, 정액은 19번, 질은 5번, 성기와 그 변형어가 64번 사용됐을 정도이다.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사원 모니카 르윈스키의 10여 차례에 걸친 성관계를 소상히 기술한 보고서의 내용은 한미디로 낯뜨거운 삼류 에로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해괴하고 외설적이었으면 우리보다 개방적인 미국 성인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을 달아 보도했다.“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이 기사를 어린이가 읽을 경우 부모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는가 하면, 인터넷 전문업체 아메리칸 온라인사는 “10대들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돼 있는 만큼 부모의 동의 없이는 인터넷 검색을 불허한다”는 공고문을 홈페이지 사이트에 띄웠다고 한다.그러나 신문은 누구나 어디서고 읽을 수 있는 매체다. 어린 자녀가 읽는다고 이 내용을 놓고 무얼 어떻게 지도할 수 있는가. 신문활용교육(NIE)이라고 해서 신문을 교육에 활용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한데 별안간 신문을 읽지 말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인터넷은 ‘클릭’만 하면 접속이 가능한데 부모의 동의 여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색다른 성접촉’ 일지를 일부 신문들이 비중있게 다루었다. 또 여타 신문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종인 양 다루었다. 동아일보는 “(중략) 내용 중에는 외설적인 표현들이 있어 수치심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중략)다만 어린이와 청소년 등 미성년자들이 관련기사를 보는 데 부모의 지도가 필요합니다”라는 편집자 주(註)와 함께 ‘부적절한 성관계’를 요약, 전재했다.외설물을 실으면서 면피용으로 편집자 주를 달았을 뿐이지 어린이를 보호하려는 사려깊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2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스타 보고서를 인터넷에서 접속했다. 단일 문건을 읽기 위해 접속한 수치로는 사상 최고라고 할 만큼 ‘접속 대란’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부적절한 관계의 자세한 묘사는 우리 일간신문들을 포르노물로 만들었다. 신문 편집자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보고서의 기사화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알 권리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기 위한 정신적 활동의 원동력으로써 국민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다.알 권리란 ▷정보를 입수하는 권리 ▷사전 억제나 제한없이 인쇄 또는 방송하는 권리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밟지 않는 보복의 두려움 없이 인쇄 또는 방송하는 권리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필요한다.
20023660유선애《1950년대의 영화》1.한국전쟁발발영화계에도 6.25전쟁 후에는 많은 변모가 있었다. 전쟁으로 졸지에 피난민 신세가 된 영화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조선영화동맹 등에서 활동하던 죄파 영화인들은 대부분 이미 전쟁이 나기전에 월북한 상태였다. 나머지 우파 진영과 영화인들은 육해공군에 각각 지원하여 군에서 제작되는 뉴스, 다큐멘터리 등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미군이 마련한 녹음.현상소에서 리버티 뉴스 제작에 적극 참여했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만든 국방뉴스 등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임시 수도 부산에 현상소를 마련한 공보처에서는 안종화가 영화과장을 맡아 「대한뉴스」를 제작했다.전란기에 나온 영화는 한국전쟁 이전의 평화스러웠던 모습과 견주어 보인 서울특별시의 「아름다웠던 서울」(1950년, 이구영 감독)과 입대사병들의 훈련과정과 병영 생활을 그린 논산 훈련소의 「영광의 길」(1954년, 윤봉춘 감독)과 폐허가 된 서울거리를 재건하는 과정을 담은 공보처의「빛나는 건설」(1953년, 유장산 감독)및 여군 생활의 이모저모를 찍은 「여군」 (1953년, 조정호 감독)등을 꼽을수 있다. 또 민간인에 의한 기록 영화의 활발한 제작과 함께 국민 계도용 계몽 영화도 몇 편 선보였다.전란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16mm에 의한 영화 제작이 성행했다는 것 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54년까지 만들어진 38편의 영화 가운데, 거의 두 배에 이르는 28편이 16mm였다. 반면에 군사 영화 출격명령, 계몽영화 고향의 노래 ,기록영화 정의의 진격 여군 , 문화영화 코리아 등 고작 10편만이 35mm 표준 필름이었다. 필름을 비롯한 당시의 물자 공급이 순조롭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결과이다.한편 전쟁 중에도 정부 기관이나 삼군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한 영화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류에 맞춰 반공전쟁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가령 한형모(韓瀅模) 감독의「정의의 진격」이라든가 임운학(林雲鶴)감독의「진격만리(進擊萬里)」, 윤봉춘(尹逢春) 감독의「서부전선」「오랑캐의 발자취」,방의석(方義錫) 감독의 문화영화「육군포병학교」우리나라 영화 사상 처음으로 키스신을 연출하여 화제가 된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등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목적영화만 나온 것은 아니다. 이빈화(李嬪華)를 발탁하여 만든 윤봉춘 감독의「성불사(成佛寺)」라든가 이규동(李圭東) 감독의「귀향(歸鄕)」, 이흥만(李興萬) 감독의「청춘」등 극영화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전쟁휴머니즘을 밑에 깐 작품들로서 예술성이 약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전쟁와중에서의 혼란과 정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1950년에서 1954년까지 동란기의 한국영화는 이와 같이 전란의 불우한 환경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만큼 바로 눈앞에 있는 다급한 환경 아래서 이 국가의 존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한 싸움에 카메라를 들고 참전했다. 그러면서도 극영화 부문의 부진상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현실이나 인간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공간적인 퍼스펙티브가 있어야 했다. 때문에 그것은 다만 절박한 현실의 피부를 스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형상화하지 못했다. 광복 후의 혼란한 과도기와 연달아 일어난 동란의 황폐,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인간의식이나 사회성이 필름에 형성되기 위해서는 다음 시기에 넘어가야만 했다.그러나 그런 전란 속에서도 다수의 신인들은 등장하였다. 가령 이경천(李康天) · 정창화(鄭昌和) · 류두연(劉斗演) 등의 감독과 조진구(趙眞求) · 황영빈(黃瑩彬) 등의 시나리오작가, 그리고 박암(朴巖) · 이빈화 · 이민(李敏) · 이택윤(李澤畇) · 이민자(李民子) · 윤일봉(尹一峰) · 윤인자(尹仁子) 등의 배우가 그들이다.요약하면 분단 전쟁기의 영화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서부 전선(1960년), 정의의 진격(1951년)과 같은 종군 기록 영화의 등장, 둘째, 「성불사」(1952년)의 예처럼 전후방을 아우르는 계몽 영화의 성행, 셋째는 「악야」(1952년)가 내포하는 전후 사회문제의 대두 등이라고 할수있다.2. 한국영화의 성장기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는 비로소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정부에 의해 국산 영화의 보호 육성책의 하나로 입장세법이 개정돼 국산 영화 관람에 따르는 입장세가 면제됨으로써 정부의 환도와 함께 서울로 돌아온 영화인들은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영화인들은 의욕을 갖고 다양한 소재 발굴에 나섰고, 제작자는 경쟁력을 가진 영화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이러한 변화 속에서 1955년 1월 설날 프로그램으로 개봉된 이규한감독의 「춘향전」은 한국영화의 중흥을 예고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춘향전」은 그때까지 찾아볼 수 없는 2개월의 장기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조미령과 이민은 대중들로부터 사랑받는 스타가 되었다. 이는 곧 스타체제를 예고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또 춘향전」의 성공은 사극의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했다.1956년에는 영화활동이 더욱 활발해졌고 영화의 장르도 보다 다양해졌다. 이 무렵의 두드러진 경향은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과 같은 통속극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자유 풍조가 만연시킨 전후파적 애정 편력과 가정 윤리를 담아 전후 사회상을 반영했다. 유교적 인습에 길들여진 한국사회에 「자유부인」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이 시기의 특징으로 멜로영화가 크게 유행했다는 것이다. 제작편수가 점차 증가하지만 그중 멜로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관객 또한 멜로영화를 크게 선호했고 이것은 영화의 오락적 기능이 제 몫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당시의 관객은 3,40대 주부들이 주류여서 특히 눈물을 흘리게 하는 여성 멜로 드라마가 히트했다.
국문학의 연구 방법에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시대구분의 문제이다. 특히 왕조의 흥망성쇠, 민족의 분열과 통일, 그리고 주요한 외침과 외세의 영향은 민족문화에 변화나 발전과 위기를 초래했으며 또한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문학장르들마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원리로써 발생`변화했고 퇴화했으므로 그것들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국문학 전체의 양상을 고찰해 봄은 필수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문학을 하나의 정신적 유기체로 본다면 역사 속에서 다양하고 의미있는 변모를 고찰할 수 있는데, 어떠한 기준으로 우리에게 심오한 양상을 보이느냐 하는 물음은 국문학을 연구한는 이들이 항상 품어야 할 문제이다.1.사회 경제사적 흐름에 의한 구분: 생산,지배-피지배의 관계에 따른 구분이명선 {조선문학사} - 원시,고대,중세,근대,현대1)고대의 원시문학 (삼국시대- 신라통일전)2)중세기의 봉건문학 (신라 통일- 고려- 이조)고려왕조와 조선왕조는 매우 틀린데(문제의 변화, 사설시조, 실학사상등..) 한꺼번에 중세로 묶었고 현대문학은 아예 다루지 않는등 많은 논란이 있다. 우리의 고전문학이 모두 봉건적 속성으로 분류되는 오해가 생길수 있다.2. 왕조교체에 따른 구분김사엽 {개고 국문학사} - 삼한,삼국,남북국,고려,조선1)상고문학 (문학의 맹아- 설화의 발생)2)삼국시대 문학 (신라문학- 고구려 문학- 백제문학)3)고려문학 (균여의 향가- 국어가요- 한문가요)4)이조문학 (한글 제정과 초창기의 문학- 발흥기의 문학- 전란기의 문학- 영정시대의 문학 - 국말의 문학)5)현대문학 (신문예의 발아)철저하게 왕조중심으로 문학적인 특성은 등한시되고 역사적인 구분에 중점을 둔 방법이다.3. 현재를 기준으로한 시간의 원근에 따른 구분-구자균, 김동욱 -상대,중세,근세,근대4. 민족 정신의 생명체적 발전에 따른 구분조윤제 {민족문학사관}1)상고문학 ((민족의식)태동시대: 신라통삼 이전, 형성시대: 통삼후신라일대)2)중고문학 (위축시대: 고려시대)3)근고문학 (소생시대: 태조-성종, 육성시대: 연산군- 선조 임란)4)근세문학 (발전시대: 선조- 임란- 경종, 반성시대: 영조- 고종 갑오경장)5)최근세문학 (운동시대: 고종- 갑오경장- 삼일운동)6)현대문학 (복귀시대: 삼일운동이후)-조윤제의 문학사 시대구분 및 서술 방법론왕조교체에 의한 시대구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학의 독자성을 옹호하고, 문학 자체의 현상을 집약햐서 시대구분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착상이 시대구분의 방법으로 쉽사리 구체화되지 않는다. 기존의 작업을 비판하는 데는 유용한 주장이지만 새로운 시대구분을 마련하는 데 무력하다. 그 이유는 문학 그 자체를 막연히 옹호하다가 '문학사'를 '문학'과 '사'로 분리시켜, 문학의 역사적 전개를 논할 근거를 상실하고 문학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해서, 시대구분을 하는 방법이 막연해지고 만다. 정치사는 베제하더라도 문학을 정신사 또는 사상사의 산물로 보는 관검을 견지해야 시대구분의 방법을 마련 할 수 있는데, 그 정도에까지 이른 성과가 흔하지 않다.독자적인 시대구분의 방법으로 한국문학사를 서술한 대표적인 연구자는 조윤제이다. 조윤제는 문학의 기본양상과 문학사의 전개를 통괄해서 논하기 위해 민족정신을 내세우고, 문학사를 서술하는 기본 시각을 민족사관이라고 일컬었다. 문학을 민족정신의 구현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학작품의 내적 통일성, 동시대 문학의 총체성, 문학사의 연속성을 해명하는 데 핵심적인 의의가 있다. 문학을 이질적인 요소들의 잡다한 집합으로 보는 실증주의의 폐단을 극복해 문학에 대한 유기체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당면 과제 해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학의 주차가 민족임을 명확하게 하고, 문학사를 민족문학사로 서술하는 작업까지 일관되게 하는 데 필수적인 이론을 마련했다.문학사의 시대구분에서는 민족정신의 변천과정을 기존으로 삼았아. 민족정신이란 모호한 관념이므로 어떻게 기준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의심이 들 수 있겠으나, 실제로는 어떤 종류의 연역법도 쓰지않고, 작품의 부분과 다른 부분, 작가와 시대, 문학과 정치가 총체를 이루고 있는 양상을 집약해 민족정신이라 했다. 태동시대, 형성시대, 위축시대, 감동시대, 소생시대, 육성시대, 발전시대, 반성시대, 운동시대, 유신시대, 재건시대로 문학사가 전개되어 온 것이 민족정신사의 궤적이므로 민족사의 다른 여러 국면도 거기에 함께 포괄된다고 했다. 문학은 민족정신을 가장 선명하고 풍부하게 나타내 주기 때문에 커다란 의의가 있고, 문학사 서술의 과정 또한 그만큼 종대하다고 여겼다.그런데 조윤제는 내적 대립을 배제해야 총체성이 온전해진다 하고, 상하증으로 나누어져 있지않은 국민문학이 나타나야 위축되어 있던 민족정신이 소생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부분들의 대립적 총체가 아닌 추상적 관념을 내세워 문학의 실상과는 어긋난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결의 발전적 전개를 인정하지 않으니, 변화는 외부적인 조건 대분에 생긴다해서 민족사의 주체성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결과에 이르렀다. 문학사 전개의 필연적이거나 보편적인 과정을 생각할 수 없어, 한국 문학사를 민족문학사의 한 모형으로 이해해서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 연구를 하고 공통점을 찾는 거점을 마련하지 못했다.다윈의 진화론을 인용하여 민족의식을 기본으로한 발달론으로 일반 역사시대의 구분을 그대로 쓰고 있으나 문학적 특징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사상적인 인상이 강하고 예술이 과연 발달, 발전한다고 볼수있는가 하는 문제와 위축, 소생과 같은 생물학적 용어가 문학사에 적합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5. 표기문자에 따른 구분 - 한글창제 이전/한글 창제 이후장덕순 {한국문학사}1)구비문학2)고대가요 (고대전기문학)3)향가문학 (고대후기문학)4)고려문학 (중세문학) 5)조선문학 (근대문학) 6)근대문학 (개화기의 문학) 구비문학을 문학사에 최초로 본격적으로 편입시켰다. 왕조중심의 시대구분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여 일관성이 결여되었다. 세계문학사 구분과 관련이 지었는데 우리 왕조변혁이 세계문학사의 고대, 중세, 근대 변혁과 시기상으로 일치하는가에 대한 비판이 있다.6. 장르에 따른 구분원시종합예술시대-서정시 발생시대-향가시대-속가시대 ...7. 문예사조의 흐름에 따른 구분가람.백철 {국문학전사}1고전문학사1)여조이전의 문학 (고대문학- 삼국시대의 문학- 통일신라의 문학- 고려시대의 문학)2)근조문학 (시가문학의 난숙기- 산문정신의 맹아기)2신문학사1)근대적 문학 (전환기의 신문학- 근대적 문학의 신문척기- 근대문예사조의 도입기- 근대 적 문학의 성장기)2)현대적 문학 (하나의 신출발기- 프로문학의 진출과 문단 춘추시대- 현대적 문학의 형성 기- 현대문학의 분화기)세계문학사와 관련 우리나라문학의 특성을 살렸다. 그러나 고려이전은 왕조변화를 기준으 로 나누었고 조선은 장르갈래로 구분하는등 일관성이 결여되었다.8.갈래체계와 담당층과의 유기적 관련성에 따른 구분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2,3,4,5}1)첫째시대: 원시문학2)둘째시대: 고대문학3)셋째시대: 중세전기문학 제 1기 (삼국. 남북국시대)중세전기문학 제 2기 (고려전기)4)넷째시대: 중세후기문학 제 1기 (1216년경부터); 고려후기중세후기문학 제 2기 (악장출현년대부터): 조선전기5)다섯째시대: 중세 →근대이행기 제 1기 (17세기 이후): 조선후기중세 →근대이행기 제 2기 (1860년경부터): 개화기6)여섯째시대: 근대문학 (1919 - 1920년 이후)
한글 창제의 정치적,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의의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음성언어로 국어를 사용하면서도 문자언어는 양반층의 한문과 중인층의 이두로 대별되는 이원체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어를 발음대로 표기하는 훈민정음이 새로운 문자로 창제되어 문자생활에 민(民)의 글로서 이른바 언문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백성을 위한 글인 만큼 배우기 어렵지 않았고, 따라서 주로 여성과 일반 백성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불가의 불경언해, 사대부의 가사와 시조, 한서(漢書)의 주해 및 번역, 전교(傳敎)와 편지 등이 그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순언문 시가와 소설이 유행하면서 훈민정음은 백성과 여성층에 있어 불가결의 글이 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일어난 실학운동은 정음문학(正音文學)의 융성과 함께 정음연구를 근세적 문자음운학(文字音韻學)으로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실학파의 저술로서 정음에 관한 논술이 빠져서는 안 될 정도로 확산되었고, 그 업적은 어휘집뿐 아니라 방언과 속담의 수집 및 어원 탐구 등 여러 방면에 걸쳤다. 홍명복(洪命福)의 《방언집석(方言集釋)》, 이의봉(李義鳳)의 《고금석림(古今釋林)》 같은 것은 동양어사전인 동시에 기초어휘집으로서 가치있으며, 특히 유희(柳僖)의 《물명고(物名考)》에는 주석 곳곳에 1600여 개의 희귀한 우리말 어휘 기록이 전한다. 갑오개혁이 추진된 1894년 11월 칙령 제 1 호 공문식(公文式)을 공포하여 종전의 한문 대신 국문을 쓰도록 함으로써,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450년 만에 언문이 공식적인 국자(國字)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한글은 독창성과 기호 배합의 효율성면에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근거로는 모음과 자음의 구별이 쉽고, 28개 자모가 수직-수평의 조합으로 반듯한 사각형을 이루면서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점을 들고 있다. 특히 자음이 입술, 입 및 혀의 위치를 확실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한글의 과학성이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한글의 창제동기가 단순히 '어린 백성을 어여삐 여겨' 만들었다는 설은 요즘에는 통설로서의 의미를 잃고 있다. 봉건지배층의 행위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들이 베푸는 시혜(施惠)는 결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시혜는 농민의 전리품에 다름아니다. 한글이 농민의 역사적 전리품이라는 시각의 입장에서는 고려 무신정권이후 '공후장상(公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냐'는 피지배계급의 의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무신의 난으로 고려귀족계급의 지배질서가 무너지면서 일반 백성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와 자의식을 찾게 된데다가 고려의 패망과 조선의 성립이 중세사회자체를 동요시킨 결과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중세적 지배체제의 재확립을 위해서도 일정하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토지제도인 과전법도 실시과정에서는 많은 변질이 있어 종래의 권문의 토지소유를 해체시키지도, 관리에게 주듯이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지도 못하고 소작권 보호 정도에 머물렀지만, 원래의 구상에는 농민에게도 일일이 나누어 줄 계획이 있었다. 농민의 지지없이 정권 수립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 그 구상의 배경이었다. 세종때의 많은 역사적 발명품, 물시계나 측우기나 농사직설 같은 농업서적, 토지세의 재편 등도 농민의 지지를 획득해 불안정했던 이씨정권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의 결과 였다.한글도 마찬가지다. 자의식의 성장은 문자로의 의사표현도 바라게 되어 농민으로 하여금 소외된 문자생활권으로의 진입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세적 지배질서의 재확립을 위해서라도 백성을 지배계급의 입맛대로 '훈민(訓民)'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래서 '정음(正音)'을 만들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든 초기에 {언문삼강행실도}, {언문열녀도}, {언문효경}과 같은 유고적 덕목을 담은 서적을 펴내 백성들에게 편찬보급한 것은 이러한 의도의 발로다. {용비어천가}와 같은 이씨의 정권 장악을 합리화하는 글을 지은 것도 같은 목적을 담고 있었다.그런데 훈민정음의 반포시에 최만리 등의 인물들은 이에 극력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흔히 이들을 한자를 숭상한다해서 사대적으로 보지만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원래 세종은 궁중안에 절을 지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한글을 만들고 나서 앞서의 유교적 덕목의 책만 지은 것이 아니라 {석보상절}과 같은 불교서적도 많이 간행했다. 최만리의 입장에서는 한글의 창제가 숭불행위로 보였던 것이고 척불숭유를 이상으로 삼는 조선의 정치적 이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세조가 등장한 후 성상문 등 한글창제에 참가한 학자들이 대거 숙청되고, 연산군 때는 연산군의 학정을 비난하는 한글 대자보가 나붙었다는 이유로 한글사용자를 밀고하고 한글서적을 불태우는 혹독한 한글 탄압책을 폈다. 그 이후 한글은 사류(士類)들에는 발붙이지 못하고 안방의 '암클'이나 절간의 '중글'로만 남아 서민들의 표현수단이 됨으로서 초기의 과학성에 비해 계속적 발전을 못하고 근대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창제이후 몇백년 동안 한글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달라지는 언어체계에 따른 새로운 연구는 실학자의 몇편 연구결과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어떤 문자라도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특성상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이 감해질 수는 없었다. 1880년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한국에 와서 왕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다 1894년의 청일전쟁이 다 되어서야 돌아간 중국의 원세개는 중국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칭송하고 어려운 한자보다 한글을 보급하자고 주장했다. 원세개의 주장은 소국의 문자를 쓸 수 없다는 중국지배층의 격렬한 반론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지만 한글이 가지는 소리글자로서의 우수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중국글과 요즘의 한글과는 함께 사용하기 어렵다. 중국어는 높낮이의 사성(四聲)이 있는 반면에 지금 한글에는 이것이 없다. 그러나 예전의 한글은 중국식 사성까지 표기할 수 있었다. 원세개의 한글사용주장은 결코 공론(空論)이 아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