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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영화] 90년대 한국영화의 흐름
    90년대 한국영화의 흐름1) 1990년 한국 영화 위기론한국영화에 대한 위기론이 급격히 확산되는 속에서 한국 영화계는 90년대를 맞이한다. 처음에 직배영화는 영화인들의 반발과 전반적인 거부감으로 시내 중심가 극장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변두리 극장에서 상영하면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지만, 90년대 과 이 35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UIP 직배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도 사라지고 안정화에 접어들기 시작한다.그리고 90년 12월 처음 중심가 극장으로 진입한 은 주제가 "언체인드 멜로디" 와 함께 흥행의 돌풍을 일으킨다. 전국 약 400만(서울 169 만) 관객이 관람한 것으로 집계(1991년 집계) 되었고, 이것은 당시까지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던 79년 개봉된 성룡의 의 흥행기록을 쉽게 넘어서고, 한국입성 2년만에 손쉽게 한국의 영화시장에 안착한다. 은 멜로드라마의 구조에 특수효과를 결합하여 관객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전형적인 오락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엄청난 흥행 성적을 올린 것은 무거운 주제의 영화, 아니면 싸구려 오락영화가 범람하는 한국영화의 분위기와 관련이 있으며, 제대로 된 오락영화가 부재한 한국영화와 단순한 헐리우드영화를 선호하는 관객들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또한,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오라이언 등의 메이져 영화사들이 직접 배급을 하면서 90년대 한국 영화계의 배급구조는 흔들렸고 직접배급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영화인 밖에 없다는 자조섞인 농담과 허무감이 퍼져갔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한국영화는 약진을 거듭하는데, 오랫동안 충무로에서 활약하며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 온 임권택 감독의 이 서울 관객 67만이 라는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잘 만든 한국영화도 관객을 끌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90년은 한국영화의 흥행성공과 직배영화의 약진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외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 몇몇 작품이 등장하였는데, 박광수 감독과 과 장선우 감독의 이 그것이다.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은 사회의 모순과 가정의 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미장센과 이기자기한 이야기 구성으로 재미있고, 신선하며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를 선보여 주었다. 그해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거머쥔 이 신인 아닌 신인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명세 감독은 또한 36회 아태영화제에서도 신인감독상을 수상 했으며, 장길수 감독의 는 각본상과 여우주연상 등 2개부문에서 수상했다. 또, 선우완 감독의 은 아태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해외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박광수 감독은 으로 제5회 싱가폴 영화제에서 최우수극영화상을 수상했으며, 김혜수가 주연한 가 파격적인 가격인 16만 2천달러로 대만에 수출돼 당시 영화인들을 놀라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개봉된 8편의 하이틴 영화는 모두 실패했다. 이것은 똑같이 얄팍한 기획력으로 승부하려던 충무로 영화인들의 한계가 드러난 일이기도 하다. 일본의 야마가타 영화제에서는 김동원 감독의 을 비롯한 네편의 독립다큐멘터리가 상영되기도 했다.영화제작소 ‘청년’에서 만든 이상인 감독의 이 이적표현물로 지목되어, 필름 압수, 상영저지, 관계자 구속 등 최대의 공권력 세례를 받았는데, 작품을 만든 이상인 감독은 구속수감되었다. 이것은 90년 와 똑같은 사건으로 기록되며, 다시한번 정국을 긴장시키는 상황을 연출했다. 이후 독립영화 진영은 난제인 배급문제를 풀지 못하고, 조직적인 분화를 거듭한다. 이처럼 영화에 대한 검열은 당시에도 끊임없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광주항쟁을 다룬 이정국 감독의 가 25분이나 삭제되었다가 재심의에 의해 복원 상영되었고, 많은 작품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부분 삭제되거나 작품을 수정해야 했다. 또한 수입신청을 한 에이젠쉬타인의 , 등의 작품이 수입불가 판정을 받았다. 90년대가 되었지만, 아직 사회적인 분위기는 냉랭했으며,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하지만 공륜의 심의 기준은 계속 말썽이 되었는데, 포르노영화가 몇 장면이 삭제된 채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버젖히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했으며, 에로 영화들은 계속 양지만 주제의식과 실험성에의 도전을 높이 살만하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80년대의 영화계를 거의 이끌다시피한 쌍두마차 이장호와 배창호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실패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들에게나 영화를 사랑하는 한국의 관객들에게나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80년대의 흥행감독이었던 배창호 감독의 은 배창호 감독이 바라보는 현실과 영화속 현실과의 교묘한 조화를 시도 하지만, 무리한 조합의 한계를 나타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영화가 예술이라고 굳게 믿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몇 안되는 감독이었다. 이창호 감독 역시 해외로케이션을 시도하며 라는 대작을 만들었으나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관객들의 취향에 기성감독들이 따라가고 있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이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영화적 힘마저 잃어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또한 외국 영화는 풀 버호벤의 이 1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해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또한 유럽영화에 눈을 돌린 국내 배급업자들의 외화 사냥으로 이나 , , 등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을 볼 수 있었던 해이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은 일정한 수의 관객을 동원하며, 영화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관객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독립영화집단에서는 홍기선 감독이 독립프로덕션을 차려 만든 로 주목받았으나 관객을 모으는데 실패했고, 장산곶매는 그들이 세 번째 장편 는 제작을 방해하는 당국의 탄압속에서도 어렵게 제작이 이루어져,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또 전교조가 배급을 맡아 새로운 배급통로를 모색하는 독립영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4) 1993년 제작방식의 분화시작93년은 로 몰아친 한 해였다. 는 100만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며 정치인들의 잇단 관람과 매스컴의 집중포화로 직간접적인 가중치를 누린 것뿐 아니라, 10년 가까이 극장을 찾지 않았던 잠재 관객들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의 가치는 90년대 한국영화의 가장 큰 성과이다세 명의 수배자와 만화 가게 주인을 통해 훌륭하게 그려 내고 있다. 그리고 대작의 홍수 속에서 적은 제작비로 만들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흥행 성적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지영 감독의 는 모두가 헐리우드 키드일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문화사를 감독 자신의 추억을 회상하듯 그린 영화이다. 정지영 감독이라는 가중치와 비교적 많은 광고에도, 더위에 지친 관객들은 헐리우드 키드로 남기만을 바랄 뿐 그의 생애에는 관심이 없는 듯 영화를 외면했다. 한국판 SFX이며, 의 산뜻한 시나리오로 관심을 모았던 박헌수 감독의 만이 2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헐리우드 영화에 대항했다. 94년에는 비교적 재미있고 내용있는 영화들이 많이 등장한 편이다. 박광수 감독의 , 여균동 감독의 놀라운 데뷔작 와 이정국 감독의 는 상당히 의미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뿌리깊게 남아있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는 는 독특한 제작방식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박광수 감독은 이전 두작품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에 힘입어 영국의 채널 4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아 영화를 만드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국내 제작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외국 자본을 순수하게 끌어들여 만드는 제작방식은 한국영화를 해외에 알리는데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탈옥하게 된 두 죄수와 한 명의 여자가 벌이는 소동이다. 이 소동은 소동으로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모순을 모조리 건드린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죄수들은 세상에 대한 깊은 냉소를 보내며 더욱 더 세상 밖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는 80년대 비제도권 출신인 이정국 감독에게 대종상을 안겨 주었다.에는 13만, 에는 38만의 관객이 동원되었다. 이후 섹슈얼리티에 집착한 장선우 감독의 작품은 '포르노그라피'라는 카피와 함께 그 논란만큼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1994년 하반기는 한국영화의 약진이 두드러진 해이다. 모든 영화들이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모두 한국영화가 살아남민했다. 기동성있는 독립 프로덕션들은 대기업의 제작 참여를 유도하며, 기존의 영화들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95년에도 전년도에 비해 다양한 작품들이 나왔는데, , , , 등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이것은 고학력 여성관객을 겨냥한 기획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90년대 이후 여성문제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과 등 관객들로부터의 모금을 통해 작품을 제작하려는 의미있는 시도였다. 영화 제작에 관객들이 참여를 유도하는 시도이면서, 관객에게 작품 제작의 정당성을 알리고, 그것을 작품 홍보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것은 관객들의 수준이 영화를 관람하는 소극적 소비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영화를 문화적인 상품으로 인식하고 제작 초기부터 자신의 지지의사를 표명하는 중요한 변화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런 관객들의 적극적 의지는 만드는 이에게 높은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은 90년대와 70년대를 오가면서 진중하게 전태일의 삶과 폭압적인 시대에 대항하는 한 지식인의 모습을 진중하게 보여 주었다. 는 많은 관객을 동원하지는 못했지만, 감춰지고 잊혀져가는 종군위안부 이야기를 다뤄 사회적으로 그 문제를 환기시키는데 대단한 역할을 했다.또한 영화전문지들이 창간되어 관객들에게 영화에 관련한 폭넓은 정보를 제공했으며, 영화에 대한 준전문가적인 소양을 제공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다룬 등이 등장해서 영화와 동성애에 관한 논쟁을 유발했다. 이 작품 역시 영화가 갖는 문화적인 힘과 작품을 통해 담론의 영역을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그리고 항상 영화인들의 질타의 대상이었던 영화법이 "영화진흥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영화를 진흥시키려는 법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관객을 위한 어떤 조치와 정책도 제시되지 않고, 규제만이 보이는 영화진흥법은 제정된지 1년만에 영화인들의 요구와 새로운 정부에 의해 다시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7)니다.
    사회과학| 2005.09.24| 9페이지| 2,000원| 조회(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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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방송] 인포그래픽
    §인포 그래픽§인포 그래픽은 주로 일러스트레이션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도표와 텍스트를 동반하는 시각적 표현을 말하며, 인포 그래픽은 매체에서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었으며 지의 커러풀한 편집과 함께 컴퓨터 기술의 혁명과 시각 메시지에 관한 인기 상승으로 가속화되었다. 이 지는 이전의 일반적인 신문들과는 다르게 텔레비젼을 보면서 자라는 세대를 겨냥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신문 종사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이 신문에서의 기상도면에 관한 인포 그래픽은 많은 신문들이 인포 그래픽을 활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기상도면]기상도면에 관한 인포 그래픽은 인쇄 매체나 방송에 등장한 어떤 인포 그래픽 보다 인기를 끌었으며 테이타 전송을 위한 사업에 또한 많은 의존을 하게 만들었다.처음 신문에 등장한 도면은 단순한 풍향을 나타내는 세계지도에 불과했지만 전보가 도입되면서 전국의 기상 관측이 하나의 지도에 그려지게 되었고, 그 얼마후에는 신문의 발행인들이 기상도면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보수적인 신문사들도 기상도면을 게재하였다. 다음해에 AP통신사는 전화선을 통해 전국의 가맹 신문사들에게 기상도면을 전송하게 되었고 아무런 수정 없이도 지방 신문사들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AP의 기상도면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기상도면에 대한 것은 텔레비젼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초기에 일기예보는 다른 분야에 비해 가벼운 뉴스로서 취급되어 그 전달자도 코메디언이나 외모말고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사람들이 나와서 읽어가는 형식이였으나 점차 전문기상 전공 캐스터들이 등장하였으며 초기에 칠판에 그림을 그리거나 보드에 자석을 붙였다 하는 것이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으로 현재의 일기예보는 가장 극적이고 다양하고 많은 색상의 인포 그래픽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신문이나 방송에서의 인포 그래픽의 발전은 위성을 이용해 여러 지역으로 전송이 가능하게 되고 컴퓨터 그래픽 등의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KRTN 그래픽스 통신사는 기사, 사진 및 인포 그래픽 등을 구독신문사, 기업체나 개인에게 전화전송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의 인포 그래픽에 대한 분석]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이 신문이 컬러풀한 편집으로 시각적 극대화와 타이포그래피의 적절한 사용으로 다양성을 창조하고 가독성을 높이는 미래형 신문이라고 말한다. 이 신문이 단축된 기사 작성이 비판을 받아왔지만, 그래픽의 요소들과 배포방식만은 주목할 만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신문을 ‘위성 전국지’ 라고 칭했고, 인포 그래픽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아주 중요하며 인정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모든 섹션의 첫면에 도표가 들어있고 USA스냅샷이라는 기상도면과 색다른 형태의 인포 그래픽의 사용은 전통적인 방식을 발전시킨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양의 인포 그래픽을 창조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소화하기 쉽게 그래픽적 요소를 강조하는 이 신문의 편집경향은 취재의 미약함을 야기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신문의 편집장은 독자적인 그래픽의 사용을 장려하고 있으며 이것은 이 신문에서 나타나는 독자적인 그래픽을 통해 발견된다. 좀더 많은 미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이 신문은 대체로 중상층 백인에 편중된 마케팅 방법과 뉴스의 왜곡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신문의 기상도면은 가장 좋게 평가받고 있으며, 이 신문의 시각적으로 흥미 있는 형식으로 혼합된 교육, 오락, 광고 및 자체 광고 등으로 이 신문은 미국의 완벽한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인포 그래픽과 여섯 가지 관점]인포 그래픽은 인쇄매체나 방송, 기업체 등 광범위하게 쓰이는데, 이는 인포 그래픽이 문장만으로 지루하고 사진만으로 단순한 기사에 묘미를 더해주기 위해서 사용된다고 본다.이 인포 그래픽을 여섯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매체가 가지는 교육이라는 실용적인 의무인 정보의 전달에 있어서 문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적 만족감과 함께 시각적인 메시지들의 감정적인 소구를 결합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인포 그래픽은 처음 동굴의 벽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지도를 통해서 발전되었다고 본다. 이 인포 그래픽은 사람들의 창조성이 아니였다면 단순한 도표나 지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그래픽의 발전을 가지고 왔고 걸프전을 통해서 인포 그래픽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컴퓨터 기술은 인포 그래픽의 제작과 배포를 쉽고 경제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테이타와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복잡한 정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제작자와 소비자에게 교육한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이미지로는 복잡한 과정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장이 인포 그래픽의 일부가 되어야한다. 모든 그래픽에는 의미가 분명하도록 작성되어야하며 보는 사람들은 그것의 의미를 추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포 인포 그래픽은 단순히 관심을 끄는 수준 이상이 되어야하고 디자이너들도 단순한고 심미적인 것을 종합해야한다. 그리고 인쇄 매체의 편집인들은 사용된 모든 그래픽 요소들이 기사에 도움을 주고, 독자를 압도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정보를 담은 그래픽에는 실험 데이터나 정량 데이터를 보여주는 통계 인포 그래픽과 문장과 시각적인 정량정보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비통계 인포 그래픽으로 나눌 수 있다. 윤리적 관점에서 인포 그래픽은 통계적 프레젠테이션이 쉽게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픽이 오류와 시각적 왜곡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제작자들이 통계정보에 관해 경험을 별로 갖지 못하고, 단순히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오류가 있거나 장식용이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제작자들이 통계학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지 못 했기 때문이다. 터프트라는 학자는 커뮤니케이션상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거나, 명쾌하고 정확하며 효율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전달해야하고 독자를 우롱하지 않고 항상 진실만을 담는 것이 좋은 인포 그래픽이라고 했다. 문화적 차원에서 인포 그래픽을 이해하려면 기호의 사용과 해석이 문화적 맥락에서 봐야한다고 했으며 메시지 전달에 있어 상징 체계를 주위 깊게 선택하는 것이 인포 그래픽의 제작에 중요한 것이다. 인포 그래픽을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컴퓨터의 기술이 단순히 정보를 시각적인 메시지로 보여주기만 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제나 오락적인고 장식적인 것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포 그래픽이라는 것은 단어와 이미지의 진정한 융합인데, 이것을 단순히 그래픽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때문에 추앙 받는다. 문자와 그래픽이 형태와 기능면에서 합쳐질 때 인포 그래픽은 흥미롭고 가치잇는 것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예능인이 컴퓨터를 사용할 경우 인포 그래픽은 오락매체로 전락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과학| 2005.09.24| 2페이지| 1,000원| 조회(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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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 사회변동과 세대차이
    사회변동과 세대차이들어가며한국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일제의 탄압, 해방, 6.25, 4.19, 5.16, 군사독재와 민주화 등 다변하는 정치적 경험과, 극심한 빈곤에서부터 눈부신 경제성장,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새로운 경제적 경험 등 그야말로 총체적인 구조 변동을 경험했다. 이러한 많은 변화는 이 시대를 살아온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쳤고, 세대간 의식차이를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일반적으로 사회변동의 폭이 크고 빠를수록 세대간 의식격차(Generation Gap)는 크고 이로 인한 세대간의 갈등은 심화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가 바로 그러한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사회변동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변화에 더 많이 노출된 신세대의 가치가 기성세대의 가치에 오히려 영향을 미치는 역현상인 전형성적 문화(pre-figurative culture)로의 전환(Mead, 1970)도 일어나고 있다.한 사회의 성원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로 대체되고 있으므로 새로운 세대들이 어떠한 가치관과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변동 방향을 예상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변동과 세대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기위해서는 사회변동과 세대, 각각의 개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사회변동의 의미사회변동이란, 어느 사회의 구조 내지는 질서 또는 그 구성요소가 내 외부적 사정으로 부분 또는 전체적으로 장단기간에 걸쳐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사회구조는 상호의존관계에 있는 데다 대립하는 각 요소의 상대적 균형에 불과 하므로 절대 불변이라 할 수 없고, 그중의 어느 한 부분 또는 요소에 발생한 변화는 다른 부분 또는 요소에 파급되어 조만간에 변동을 일으킨다. 구조와 변동은 방패의 양면과 같아서 구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변동이 있다.그러면 이렇게 여러사회에 걸쳐 일어나는 사회 변동이 어떠한 양상으로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와 같이 사회가 복잡하고 거대해 지면 사회변동도 다종다양한 양상을 띠게 된다. 그원인으로는 변동의 동인이 단일하지 않고 복합적이며 여러요소가 일정한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며, 각 요인간 또는 각 요인과 사회구조 전체 사이에 여러 가지 관련성이 있으며 또한 변동을 일으키고 수습하는 인간 사이에 예측 통제할 수 없는 주체적 조건이 작용한다는 것을 들수 있다. 사회 변동은 외부적요인에 의한는 경우도 있으나 내부적 요인에 의하는 경우도 있다. 국제적교류가 활발한 현대에는 이것은 내부적 요인에 의한다 저것은 외부적 요인에 의한다라고 확연히 구분짓기 어려운 변동이 많다. 외국의 압력에 의한 문화개방과 개혁, 이질적 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변용, 전쟁에 의한 격변,혁명등이 이에 포함된다. 변동은 부분적 국부적인것도 있으나 전체적 전면적인 것도 있다. 혁명은 기존 질서에 대한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파괴이며, 개혁은 기존질서의 테두리 안에서의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수정이다.오늘날, 특히 주목되는 변동과정으로는 산업화(기술진보에 의한 생산양식의 고도화) ,관리화(관료제화;조직의 거대화 집권화),도시화(인구의 도시집중,도시적 샹활양식의 침투) 등을 들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제 2차 세계대전 후 사회변동의주류를 이루어 현대의 고도산업사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동과정에 의해서도 사회구조 자체의 기본적 변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급격한 변동과정이 사회생활을 혼란에 빠뜨리고, 생활문제와 그 밖의 병리적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급격한 산업화(고도경제성장)에 따르는 환경파괴, 공해의 심각화, 관리화=관료제화에 따른 소외의 심화, 도시화에 따른 지역의 해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일반적인 세대구분"세대"란 말은 일상생활에서도 사람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세대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로 세대란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세대문제에 관한 지금까지의 주요 연구들을 통틀어 볼 때, 란 첫째, 가계계승의 단위(unit of kinship decent), 둘째, 동기집단(cohort), 셋째, 생애단계(life stage)라는 세 가지 의미로 많이 이해되어 왔다.가계계승단위로서의 세대란 '부모세대' '자식세대'로 구분하는 것처럼 좁게는 친자관계 또 넓게는 친족 체계 일반의 가계서열을 지시할 때 쓰여지는 개념이다. 동기집단(cohort)으로서의 세대는"특정기간 내에 주요 생활사건을 공통적으로 체험한 사람들"로 정의되며 오늘날 세대연구의 중심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동시출생집단(birth cohort)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학교동기(school cohort), 입사동기(employment cohort)등 출생 이외의 생활상태의 변화를 두고도 cohort 개념을 얼마든지 적용 가능하다. 이 개념이 보편화하게된 것은 같은 사건의 경험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동기집단들 간에 모종의 의식적 공감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지식사회학적 사고가 보편화되고 나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생애단계로서의 세대는 '청소년 세대', '대학생 세대'와 같이 특정시대 혹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는 직접 관계없이, 주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과 직결된 변화(age effect, maturational effect)를 보기위한 개념이다.위의 어떤 경우이든 세대란 말이 나이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개념임에는 틀림이 없다. 세대의 구분방식은 연구자의 관심이나 사용하는 세대의 개념에 따라 다르며, 크게 나누어 볼수도 있고 좀 더 세분해 볼 수도 있다.가장 상식적인 세대구분은 와 , 와 와 같이 양분하는 것으로 한국의 세대 관련 연구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다. 한 연구에서는 35세를 기점으로 하여 35세 이하를 신세대로, 36세 이상을 구세대로 구분한 바 있다. 또 한 연구에서는 가치관이나 생활규범에 관한 15개의 항목을 골라 이들에 대한 응답자들의 반응을 5세 간격의 연령층별로 구분하여 집단분석의 자료로 이용하였으며 그결과 40세를 기준으로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로 구분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많을수록 보수적, 과업지향적이고 법을 신뢰하며 전통규범을 수긍하는 반면 나이가 어릴수록 개인주의적이고 단기적 소비관을 가지며 성적 개방성이 높았다. 또 신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 비판적인 반면 기성세대는 관용적인 것으로 나타났다.세대 차이(Generation Gap)한 사회가 겪는 이러한 사회변동에서 나타나는 세대의 변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세대차이이다. 이 세대차이에 대해 알기 위해 이와 관련된 여러 개념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한 시점에 있어서 서로 다른 세대간의 의식격차는 두가지 요소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어떤 세대가 그들이 받은 교육과 그들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형성된 가치관이나 의식구조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측면이다 이것을 흔히 동기집단효과(cohort effect)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그들의 가치관이나 의식구조가 달라지는 측면이다. 이것을 흔히 연령효과(aging effect)라고 부른다. 젊었을 때는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하던 사람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한 시점에서 나이가 서로 다른 세대간의 차이(generation gap) 즉, 세대효과(generation effect)는 동기집단효과(cohort effect)와 연령효과(age effect)의 복합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미국 미시간대 정치학교수인 로널드 잉글하트는 지난 10여년간 세계 각국의 문화변동을 계량적 방법으로 추적해 오고 있다. 그는 전세계 주요국 국민들의 출생연도별 가치관 차이를 도식화해 발표한 바 있는데 1990년 실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연구대상 43개국 가운데 세대간 가치관 격차가 가장 극심한 나라로 지목되고 있다. 즉 한국의 경우 개인의 자유, 풍요, 남녀의 역할 평등과 같은 탈물질주의 지표에 대해 1920년대에 태어난 기성세대들은 -40의 반응을 보이는 데 반해 70년대생들은 +30의 반응을 보여 세대간 격차가 70여 포인트에 이르고 있다. 신세대들의 경우 개인적 자유나 평등, 삶의 질 같은 무형지표들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기성세대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격차는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에서 약 20포인트 내외의 세대간 격차가 나타나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은 나라는 세대별로 성장기에 경험한 역사적 사건이나 경제발전단계, 경쟁상황 등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급격한 사회변동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위이 결과는 당연한 수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한국사회의 세대간 의식격차는 연령효과보다는 동기집단 효과로 보다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한국적 상황을 고려한 새로운 세대구분앞서 기술했듯이 세대연구에서 가장 일반적인 세대구분은 신?구세대의 양분법적인 구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급격한 사회변동과 그에 따른 동기집단효과를 고려할 때 앞으로 세대차이에 따른 우리의 사회, 생활의 변화를 예측하는데에는 신?구세대에 의한 양분법적인 구분보다는 보다 세분화된 세대구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반세기동안 우리보다 사회변동이 적었다고 생각되는 미국, 일본의 경우 미국이 Matures, Boomers, Xers(3개 세대구분), 일본이 戰後世代, 團塊世代, 新人類, 團塊주니어, 新人類주니어(5개 세대구분) 등 보다 세분화된 세대구분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동기집단과 생애단계의 세대개념을 복합적으로 사용하고 출생시기, 인구규모, 역사적 경험, 생애단계 등을 고려하여 사이버세대, 개성세대, 이념세대, 경제개발세대, 전쟁세대의 5개 세대로 새롭게 구분해 보았다. 다섯 개 세대의 특성을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과학| 2005.09.24| 4페이지| 1,000원| 조회(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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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문화] 중국의 정치제도
    1) 정체(政體) : 노농연맹에 기초한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 국가(93년신헌법 제1조규정)2) 정부형태(政府形態) : 공산당 일당 독재(형식상 8개 정당존재)3) 의회(義會) : 단원제(전국인민대표대회)4) 행정구역(行政區域) :22개성,4개직할시,5개자치구(중국은 대만을 23번째성으로 간주) - 1997.7.1,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인수받아 특별행정구 설치- 1999.12.20,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 인수받아특별행정구 설치5) 주요 지도자(주요 지도자)-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강택민(쟝쩌민.Jiang Zemin)- 국무원 총리 : 주용기(주롱지 Zhu Rongji)- 국가 부주석 : 호금도(후 진 타오 Hu Jintao)-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 이붕(리 펑 Li Peng)-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 이서환(리 루이환 Li Ruihuan)- 외교부장 : 당가선(탕 지아쉔 Tang Jiaxuan)6) 주요정책(主要政策)-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추진- 대륙.대만간 국가통일 실현(1국 2체제 방식)- 패권주의 반대, 세계평화 옹호■ 정치형태정치지도체제는 크게 "당(黨)"과 "정(政)"으로 나누어지는데 당은 "중국공산당"이 정은 "국무원"이 대표하고 있다. 중국 정치권력의 핵심은 공산당에 있으며, 그 중에서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있다. 당이 국가권력의 조직, 관리 및 정책결정을 담당하고 실질적 군 통수권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관장한다.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기관은 전국대표회의와 중앙위원회이며 최종 목표는 공산주의 사회제도의 실현이다. 기본임무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 4개 분야의 현대화로서 금세기 내에 달성하는 것이다. 1982년 수정된 헌법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를 표방하며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개인숭배, 권력집중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국정운영을 당 총서기비부 1 서#정치제도■ 개요중국의 국가조직은 "민주집중제"와 "의행합일"을 통한 인민민주독재를 표방하고 있으며, 국가 최고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정점으로 행정,사법, 검찰 기구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연계되어 중앙의 통일적 관할 아래에 있다. 지방조직은 성,현,향의 세등급으로 조직되어 하부구조는 중앙조직의 기능과 연계되어있다.■ 중앙조직중앙의 국가조직은 전인대를 정점으로 한편으로는 전인대 상무위원회, 국가주석, 국가 중앙위원회가 병렬적 위치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무원, 최고인민법원, 최고 인민검찰원 예속적 위치에 있다.1.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1) 역할과 구성전인대는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갖고 있는 국가최고 권력기관으로 상설 기관은 상무위원회이다. 전인대와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주로 국가의 입법권을 행사하여 헌법상 국가최고 의결기관이다. 전인대 대표는 성, 자치구, 직할시 인민대표회의 및 인민해방군의 선거에서 선출되며 정원은 3,500명을 초과하지 못한다.성,자치구,직할시,전인대(全人代)에서 선출되는 대표의 숫자는 인구비율에 따라 배분되는데 농촌대표 1인당 인구수를 도시대표 1인당 인구수의 8배로 한다는 원칙이 적용된다. 전국의 소구민족 대표는 인구분포 상황을 참조하여 각 자치구, 직할시의 인민대표대회에 배분하여 선출하며 인구가 아무리 적은 민족이라도 최저 1인의 대표를 가져야 한다. 전인대의 임기는 5년이고 매년 1회 상무위원회에 의해 대표 전원이 북경에서 전체 회의를 갖는다.전인대에는 민족 위원회, 법률 위원회, 재정 위원회, 의사 위원회, 화교 위원회등 분야별 상설위원회가 있고, 필요에 따라 전문위원회를 두며, 각 전문위원회는 전인대 및 상무위원회 지도하에 관계의안을 검토, 심의, 기초한다. 헌법개정등 중요의안은 전인대 상무위원회 혹은 1/5이상의 전인대 대표가 제의하고 전인대 전체 대표 2/3이상의 다수결로 결정한다. 법률, 법령 및 기타 의안은 전인대 전체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한다.2) 직능헌법을 수,개정하는 제헌권법과 헌장, 부위원장은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다.이 기구는 헌법의 해석과 헌법 실시의 감독, 전인대가 제정하는 법률 이외의 기타법률을 제정/개정, 전인대 폐회기간 중 전인대가 제정한 법률에 대한 부분적인 보충과 개정, 법률의 해석, 전인대 폐회기간 중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구성인원, 최고 인민법원 및 최고 인민 검찰원의 인선 결정, 특별 사면의 실시, 전국이나 일부 지역에서 동원령을 내리거나 계엄을 실시하는 권한을 갖는다.3. 국무원국무원은 중앙인민 정부로서 권력기관의 집행기관이며, 최고의 국가 행정기관이다. 1954년 헌법 제정과 더불어 건국(1949년10월1일)시 설립된 정무원을 개편한 행정조직으로 좁은 의미의 정부이다. 문화혁명기 10년동안 국무원의 기능은 마비상태에 머물렀으나 1976년 모택동 사망과 등소평의 복권, 화국봉 총리 퇴진, 조자양의 등장과 퇴장, 이붕의 등장으로 이어지면서 역할이 강화되고 있다.국무원은 각 부/위원회 및 전국의 각급 지방 행정기관의 업무를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한편, 전인대(폐회 기간중에는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업무를 보고 한다. 국무원은 총리, 부총리 약간명, 각 부 부장, 각 위원회 주임, 회계검사장, 비서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리의 주재하에 실시한다. 또한 부/위원회,심계기관, 직속기관, 변사기관 및 비서기구, 지도기구 등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총리는 국가주의 제청에 의해 전인대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고 1회에 한하여 연임이 가능하다. 부총리, 국무윈원 등은 총리의 제청에 의해 전인대에서 선출된다. 각 부/위원회는 전국적인 명령체계를 지휘할 권한과 책임이 있으며,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수직적 지휘체계를 형성하여 국무원의 통일적 지도하에 전국적인 행정업무를 집행한다.국무원 각 부장과 각 위원회 주임의 권한과 지위는 동등하다. 부와 위원회의 차이점은 위원회의 업무가 종합적이고 광범위하게 많은 관련 부분과의 연락이 필요한 반면 각부의 업무는 비교적 전문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국무원 직속기구는 및 국가예산을 편성, 집행한다.성/자치구/직할시의 지역구분을 승인하고 자치주/현/자치현/시의 건설구역을 구분 비준한다. 또한 성/자치구/직할시 관할내의 일부 지구에 대해 계엄을 결정하며 법률 규정에 의거하여 행정요원의 임면권을 행사 한다.4. 국가주석(國家主席)정협체제(政協體制) 아래 있던 건국초기(1945~1954)에는 중앙인민정주 위원회 주석이 국가의 수반이었으니 1954년 헌법 제정과 더불어 국가주석제가 신설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은 집단지도체제를 표방했으나 국가주석(당시 모택동 은 당 주석과 국가주석 겸직)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 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당시 국가주석이던 유소기(劉少奇)가 실각된 후 국가주석제가 폐지되고 대신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하였다.그러다가 1982년 헌법에서 국가주석제가 부활되었으나 그 권한은 1954년 헌법과 비교해 보면 상징적 성격이 훨씬 강하다.현행 헌법상의 국가주석은 전인대 및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법률을 공포하고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부부장 각 위원회 주석, 심계장(審計長), 국무원 비서장의 임면권을 가지며 국가훈장 영예 칭호의 수여, 특령/계엄령/선전포고/동원령을 공포한다.또한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고 외국사절의 접수, 전인대 상무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해외주재 전권대표(全權代表)를 파견/소환하고 외국과 체결한 조약 및 중요협정을 비준하고 파기하는 권한을 가지는 등 극히 의전적인 지위에 있다. 현행헌법상의 주석은 과거와는 달리 군의 통수권도, 국무회의 주재권도 없는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한 것이다.국가주석과 부주석은 전인대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전인대의 임기와 같은 5년으로 임할 수 있으나 계속하여 2회를 초과할 수 없다.5. 국가중앙군사 위원회중앙 군사 위원회는 국가의 군사 지도기관으로서 전국의 무장력을 통솔한다. 중국의 무장력은 인민해방군, 무장 경찰부대와 민병을 포함한다. 중국의 인민해방군 통수체계는 당 중앙 군사위와 국가 중앙군사위가 군 통수권을 공유하게 되어 있으찰원이 책임진다.또한 사건의 판결은 인민법원이, 판결후 처리는 사법행정기관이 담당한다, 이들을 총괄하는 것이 당 중앙정법위원회이다. 최고 사법기구로서 국무원과 대등한 관계에 있는 최고 인민법원과 최고 인민검찰원은 전인대의 직속기관으로서 3자는 상호 연계 속에 독립된 하위조직체계를 갖고 있다. 인민법원과 인민검찰원은 동급의 인민대표회의에 책임을 지며 상급인민법원과 검찰원의 지도를 받는다.인민법원(人民法院)은 국가의 재판기관이다. 국가는 최고인민법원, 각성/자치구/ 직할시는 고급 인민법원을 설립하여 이하에는 중국 인민법원과 기층 인민법원이 있다. 인민법원은 법률의 규정에 따라 독립적으로 심판권을 행사하며 행정기관, 단체 및 개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최고 인민법원은 중국의 최고 심판기관으로서 전국 인민대표회의와 그 상부위원회에 대해 책임지며, 각급 지방 인민법원은 그것을 조직한 국가권력 기관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최고 인민법원은 최고심판기관으로서 지방 각급 인민법원과 전문인민법원의 재판활동을 감독하며, 상급 인민법원은 하급 인민법원의 재판 활동을 감독한다.인민법원 안건심리는 국가기밀, 개인의 사생활 및 미성년자와 관련되는 범죄사안외에는 일률적으로 공개/집행한다. 피고인은 변호받을 권리가 있어 자체로 변호할 수도 있고, 변호사 또는 근친, 후견인에게 위탁하여 변호받을 수도 있다.인민 검찰원은 국가의 법률 감독기관으로서 최고 인민 검찰원, 지방 각급 인민검찰원, 그리고 군사 검찰원등의 전문 인민 검찰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인민검찰원은 법률의 규정에 따라 독립적으로 검찰권을 행사하며, 행정기관, 단체 및 개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인민 검찰원의 설립은 인민법원과 서로 대응된다.인민 검찰원은 반역사건/국가 분열사건 및 기타 중대 범죄사건에 대한 검찰권을 행사하며 공안기관이 수사한 사건에 대하여 심사하여 체포/기소 또는 기소면제여부를 결정하여 형사 사안에 대한 공소를 제기/지지하며 공안/인민법원과 가옥/구치소/노동개조기관 활동의 합법여부에 대해 감독한다.공안기관은 국가이다.
    사회과학| 2003.05.21| 8페이지| 1,500원| 조회(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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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사상] 한국전쟁 평가D별로예요
    - 목차 -서론I. 한국전쟁 발발 논의Ⅱ.한국전쟁의 군사적 전개과정1.북한군의 남침과 미군의 개입2.유엔군의 북진과 중국군의 개입3.유엔군의 후퇴와 전선의 교착4.전휴협상을 둘러싼 갈등과 소모전Ⅲ.한국전쟁기의 남북한 내부문제1.남한체제의 위기와 북한의 남한 점령정책2.유엔군의 북진과 북한 내부상황3.남한체제의 재구축과 이승만의 권력강화4.북한체제의 재구축과 김일성의 권력강화맺는말서론한국전쟁의 배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원' '배경' '원인'등 다양한 용어들의 사용은 일정한 개념적 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한국전쟁이 생기게 되는 갈등의 등장을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이러한 갈등이 적대적으로 양극 구조화되는 상황을 한국전쟁의 '구조적 배경'으로, 이와 같은 적대적인 양극구조 속에서 전쟁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한국전쟁의 '원인'으로 규정하고자 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하여 주요하게 살펴봐야 할 주제는 미국의 정책이다. 특히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후반부터 1950년 전반까지 미국이 취한 대한정책의 내용과 그 변화 여부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판단 여부에 따라서 한국전쟁의 발발과 확전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책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전쟁 직전 미국의 정책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가?첫째는, 미국의 대한 공약이 약화되었고 따라서 이를 오판한 공산측의 침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주장이다. 곧 주한미군 철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약화시켰고,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시킨 에치슨 발언은 소련 및 북한의 오판을 불러일으켜 공산측의 전면적 침입을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전통주의는 전쟁이후 남한의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을 말합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야기된 한국에서원한다. (http://www.empas.com, 필기참고), 북한이 제의한 일련의 평화공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전반적 상황은 한국전쟁 직전에 북한이 무엇인가 모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남한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초조감인지, 무력에 의한 공격 준비인지는 분명치 않다..한국전쟁 직전에 남한 내부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위기에 봉착해 있었고, 밖에서는 장개석과 연결된 일부 반공 강경론자들이 한국에서의 전쟁 발발을 부추겼고 이것이 모스크바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 북한의 군사력은 강화된 상태였고, 이러한 속에서 소련은 북한에 무기를 지원하는 한편 소련 군사고문단을 교체시켜 공격계획을 작성해주었다. 곧 남한 외부에서는 자유 진영의 롤백주의자들이 전쟁의 발발을 고대하고 있고 소련은 북한에 무력 강화를 도와주는 가운데, 남한 정권은 내부 위기의 돌파구를 찾고 있었고 북한은 고도의 긴장 속에서 무력 강화와 전투계획 작성에 치중하고 있었던 상황, 이것이 한국전쟁 직전의 전체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의 시작이 남한인지 북한인지 분명치 않다. 다음절에서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과 함께 이 문제를 살펴보자.I. 한국전쟁 발발 논의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대부분의 연구는 한국전쟁 발발을 둘러싼 논의였고, 특히 보수적 시각의 연구는 한국전쟁 발발론에 집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이는 전쟁 발발의 책임을 물어 전쟁 전체의 책임을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남북전쟁이나 베트남전쟁의 경우가 그렇듯, 개전의 총성 자체가 전쟁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데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전쟁 발발의 책임만으로 전쟁 전체의 성격을 왜곡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의도는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 이전의 준전쟁적인 무력갈등이 진행되었다 할지라도, 6월25일은 전쟁이라는 수단이 선택되어 남북한의 전면적인 무력 대결이 시작되었고 이에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되어계획이 없었던 것은 단기 전격전을 계획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즉, 북한의 당초 '계획'에서는 서울을 일단 점령하면 전쟁의 승패가 가려질 것이라는 가정하에 '전격전'에 의한 서울점령'이 최우선적인 목표였으나 인민군의 서울 점령 이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후퇴한 국방군의 재정비와 개입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미국의 등장으로 전쟁은 확대되는 결과를 나아 북한의 전쟁계획이 불완전했음을 드러낸다. 이에 북한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미군의 전면적인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전에 부산까지 휩쓸어버리고자 하는 속전속결의 새로운 공격으로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Ⅱ.한국전쟁의 군사적 전개과정한국전쟁의 군사적 전개과정은 군사적 상황의 추이에 따라 4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1국면은 1950년 6월 25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9월 중순까지로, 인민군의 공세 속에서 미군의 개입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2국면은 9월 중순 이후로부터 북진한 유엔군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 11월말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중공군의 개입이 이루어졌다. 3국면은 11월말 이후로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고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1951년 6월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유엔군의 후퇴가 이루어졌고 이어 전쟁이 제한되면서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4국면은 6월 하순 이후로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점인 1953년 7월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휴전협상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면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1.북한군의 남침과 미군의 개입북한인민군의 전격적인 서울 점령의 목표는 일단 달성되었으나 남한이 한강이남에서 전투력을 재정비하고 미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전쟁은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되고 있었다. 서울 점령 후 인민군이 전진을 일시 중지한 것은 원래의 계획이 서울 점령 자체에 치중되어 후속 행동을 곧바로 취하기 어려웠고, 한강교의 폭파로 인하여 도하 장비가 부족한 인민군으로서는 한강철교가 복구되기를 한편, 만주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 7함대에 의한 대만해협 봉쇄 때부터 미국의 태도를 주시했던 중국은 7월부터 제4야전군을 압록강 변경으로 재배치하는 한편 동북변방군을 조직하고 모택동은 8월 5일에 그달안으로 동북변방군의 전투준비를 완료하도록 지시하였다. 유엔군이 막 38선을 넘기직전인 9월30일 주은래는 미군의 북진에 대해 경고했고 10월 2일에는 당시 인도 대사를 통하여 미군이 북한을 점령할때 중국군이 개입할 것임을 미국에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10월초 제3야전군도 압록강 변경에 집결하였다.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개입은 10월 2일 소련이 중국군에 대한 공중지원과 100개 사단에 대한 무기 및 물자 지원을 약속한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에서 미국과의 직접 대립을 회피하고자 했던 스탈린은 중국군의 참전 직전 갑자기 소련 공군의 파견을 연기시켰다. 결국 중국은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 참전하기로 최종 결정하였고, 이 무렵 북한 외상 박헌영, 작전국장 유성철, 상업상 부상 이상조 등의 대표단이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하였다. 10월19일 중국군은 인민의용군의 이름으로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1950년말에 가서야 2개 공군사단을 지원하여 압록강 철교와 반경 100Km 이내의 보급로를 엄호했고 1951년에 이르러서야 소련의 지원은 본격화되었다. 한국전 개입을 둘러싸고 내부적으로 찬반 논란이 있었고 소련의 지원 약속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중국은 미국의 공격을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는 북한에서 사전에 막아내고, 중국의 국공내전 과정에서 공산측에 참여하여 싸운 한인들에 대한 보답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미국의 개입으로 이미 국제전화 되었던 한국전쟁은 이제 중국의 개입으로 미국과 중국의 직접적인 전투장으로 변모되게 되었다.10월24일 신맥아더 라인으로 지칭되었던 작전제한선이 철폐된 직후 유엔군은 경쟁적으로 한만국경을 향해 북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엔협상과 군사적 압력이 교대로 이어지면서 전쟁의 피해를 증대시켰다.1951년에는 주로 군사분계선 문제가 논의되었다. 유엔측의 처음 주장은 자신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보상해주는 것으로 지상 접촉선보다 훨씬 북쪽의 선을 제시했고 공산측은 38도선을 제시했다. 양측의 교섭은 8월 22일에서 10월 25일까지 한차례의 중단을 거친 후에 다시 재개되어 지상 접촉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엔측이 공산측이 점령하고 있던 개성을 포함한 서부전선 일부와 유엔측이 점령하고 있던 동부전선 일부를 교환하자 고 제안함으로써 교섭은 다시 난관에 봉착하였다. 결국 유엔측이 자신의 제안을 철회함으로써 11월 27일 쌍방은 지상의 현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로부터 양측 2Km를 비무장지대로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사이에 이미 공중폭격을 통하여 북한의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던 미국은 8월 15일부터 공산측의 통신망과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교살' 작전을 수행하였다. 9월, 10월에는 '허드슨항'작전에 의해 북한 상공에서 모의 원폭투하비행을 실시하는 한편 지상전선에서도 유엔군은 8월 중순 이후 10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하계공세와 추계공세를 감행함으로써 군사적 압력을 가중시켰다. 1952년에는 휴전감시 문제와 포로 처리 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다. 휴전감시 문제에 대한 유엔측의 입장은 북한내 비행장의 복구와 건설을 중지하고, 휴전감시 출입지역을 남북한 전역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1951년 중반 이후 점차 강화되고 있는 공산측의 공군력을 약화시키고, 대부분의 병참 지원을 일본에서 지원받는 유엔군의 유리한 입장에서 북한 전역을 감시지역에 거부하고, 휴전감시 출입지역을 제한하며, 감시기구로서 정전위원회와는 별도로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하고자 하였다. 결국 휴전감시 문제는 1952년 5월 2일 휴전감시 출입지역을 쌍방 5개소로 하고, 휴전감시 기구로 체코,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등 4개국의 중립국감독위원회를 구성할 것에 합의하였다. 한편 관련 각국에 대한 건의 문제는 양측에 특별한
    사회과학| 2003.05.21| 12페이지| 2,000원| 조회(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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