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대한 교육자-안창호Ⅰ. 생애와 사상“나는 밥을 먹어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그러면 당신은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일본의 실력을 모르는가?”“나는 일본의 실력을 잘 안다.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 원한다.”“그건 무슨 뜻인가?”“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이웃인 우리나라를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에서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2천만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것보다 우정을 가진 2천만을 이웃으로 두는 것이 일본에게 득이 될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도산 안창호를 취조하던 일본인 검사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도산 안창호는 독립 운동가요, 뛰어난 웅변가요, 교육자였다.도산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성에서 안흥국의 3남으로 태어나, 1938년 3월 10일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서거하기까지 파란만장의 삶을 살았다. 어릴적 그는 그의 생애의 방향을 정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두 사건을 겪게 되는데 어릴적 같은 서당에 다니던 필대은 이라는 몇 살 위의 동문선배로부터 당시에 새롭게 보급되기 시작하던 신학문에 접하게 된 것과 그가 열여섯 살 나던 1894년 평양에서 청일전쟁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19세의 청년 도산은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독립협회 판서지부를 조직하였으며,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탁월한 웅변으로 명성을 알렸다. 또한 그는 뛰어난 조직가로 1907년 29세 때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 1912년 대한인 국민회, 1913년에 흥사단), 1928년에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였다. 그가 30세가 되던 1908년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울 것을 계획하고 국민 문화향상을 전개 하였으며, 평양 마산동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산업을 일으키는 운동에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그는 국내와 미국, 중국에서 민족독립과 교포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활약하였고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냈으며, 1923년에는 대한 독립당을 결성하고 중국 남징에 독립운동의 근거리로서 이상촌 건설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도산은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 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Ⅱ. 교육사상도산의 사상과 행적은 민족계몽과 민족성의 향상을 통한 실력배양에 걸쳐 있었으므로 그는 교육의 정점을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한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로 두고 민족계몽과 학교사업을 통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추구하고자 하였다.도산의 힘의 내용을 보면 금전의 힘, 지식의 힘, 도덕의 힘, 단결의 힘, 인도자라 하는 이들의 자격과 일반사회의 중류 이상을 자처하는 이들의 인격의 힘 등 새로운 시대의 힘으로써 구각을 완전히 벗고 근대 사회적 여건에 맞는 실력을 갖추어야하며 우리가 이러한 힘을 준비함에는 교육과 계몽, 산업발달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개인은 먼저 건전한 인격의 수련을 통하여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자질에 필요한 힘을 기르고, 각 개인이 독립되지 않고 집합하여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단결을 이루어야 함을 역설하였다.이러한 ‘건전 인격’의 달성은 도산이 강조한 4대 정신인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덕목과 3대육, 즉 덕육?체육?지육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이는 도산의 교육운동에서 일관되게 강조된 기본인격성의 덕목들이다.)그의 ‘무실’은 실에 힘씀을 말하며 그리하며 실은 성실(誠實) 외에도 실력(實力)과 실질(實質)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전근대 사회의 구조적 특성에서 비롯된 비생산성으로부터 근대사회의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시민계층의 의식과 능력을 촉구하는 근대교육의 일면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씩씩한 기상과 적극 진취의 자주적 태도를 지닌 용감한 국민의 자세, 이것이 네 번째로 도산이 지적한 ‘용감’의 정신이다. 정의인줄 알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며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확고한 신념이 있을 때 여러 가지 용기가 나온다고 하였다.“ 우리 청년은 태산 같은 큰일을 준비합시다. 낙심 말고, 겁내지 말고, 쉬지 말고, 용감하고 대담하게 나아갑시다. 총독부, 사령부라도 당돌히 출입하는 청년이 되시오.... 뉘말을 들은즉 상해에서는 조심한다고 일 못한다니 조심한다고 일 못하면 언제하오. 죽을 작정하고 담대하게 일합시다.”이 연설에서 우리는 도산의 용감의 덕목을 읽을 수 있다.결국 건전 인격의 실천방안으로서 4대 정신이란 근대적 시민정신의 실천적 덕목들 위에 민족주의적 애국투쟁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민족의 실력을 배양해야 된다고 하는 역사성 위에서 성립된 것이었다.이와 함께 ‘3대육’이란 먼저 덕육에 중점을 두고 이어서 체육과 지육을 조화 있게 발전시키고자 한 전인교육론이다. 그는 인간이 덕이 없으면 그 지식은 악용되기가 쉽고 몸이 건강치 못한 자는 지식이 다만 불평불만의 씨가 될 뿐이라고 하였다. 특히 4대 정신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품성의 배양 위에 튼튼한 몸을 갖도록 정진할 것이며, 지식에 있어서도 추상적? 관념적 재의식이 아니라 생산과 기술과 직업에 관련된 실용적 지식일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이미 개화사상의 교육론에서 일찍이 주장되어 온 실학적 지식교육론을 계승한 것으로, 이러한 그의 주장은 1인 1기의 직업교육으로 보다 구체화되어 국민개업론(國民皆業論)과 이상촌 계획과 관련되어 나타나게 되었다.)특히 그는 ‘단결훈련’과 ‘공민훈련’을 통하여 민족적 단결과 자치적인 능력, 자주적 시민의 자질을 배양코자 하였다. 이는 ‘인격훈련’과 더불어 도산이 주창한 청년 수련의 3대 과제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단결훈련은 신의(信義)를 생명으로 하고 이를 굳게 지키며, 규율에 스스로 복종하며 서로 사랑하고 돕는 습관을 기르는 데에서 행해졌으며, 공민훈련은 고도의자각과 명확한 책임의식을 가지는 자주적 시민으로서 자립적 정신과 자치 능력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뚜렷한 식견 또는 자기의식이 있어야 된다고 하였으며 대공의식(大公意識))에 투철함으로써 비로소 국민적 품격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그리하여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은 소자본과 약간의 연장으로 독립한 하나의 직업을 가져서 한 지방의 한 부문을 담당케 하여야 하며 이들은 재학 중 ‘모범촌’ 생활을 견습하고 실제로 그 생활 습관을 길러 자기 고향에 돌아가 모범촌에 의거하여 개조하고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토록 한 것이다.이와 같이 그의 교육방법상 매우 특이한 것은 ‘모범’에 의한 방법이다. 그는 청년학우회의 회원 된 성격을 도덕적 완전성의 모범에서 보았고 대성학교나 자기회사의 의의가 하나의 모범인데 두었으며, 흥사단 단원이 또한 모범적인 지도적 인격으로 성장하기를 원했다.그의 부단 없는 민족계몽활동을 통해서 제시된 많은 원칙과 덕목 기준들은 사실 어떤 철학적 이론체계로서 일맥상통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는 탁월한 선각자요 지도자였으며, 실천가였지 이론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위대성이 암울하고 침체된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전근대성과 제국주의적 침략에 기인하는 불합리성을 혁파하고 민족의 참신한 생명력을 되살림으로써 열악한 내외적 조건을 개선하려는 실천가적 투쟁사에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또한 도산의 점진론은 근대 민족 운동의 다양한 갈래 가운데 민족내부의 발전을 지향했던 근대화 운동으로서, 급진론자들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민족 근대사의 당당한 지류임에 분명하다.Ⅲ. 교육사적 의의독립 운동가이며 민족주의 사상가로 일생을 마감한 도산 안창호(1878~1938).도산이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주의 수양단체로 결성한 흥사단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며 청년운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일제 때 만들어진 대부분의 조직들이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치며 끝내 사라진 것과 뚜렷이 대비되며 또한 ‘무실역행’을 근본으로 한 도덕적 실력양성을 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이 평가할 만 하다.그리고 전근대와 근대의 단절적 고통을 겪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실상이라는 점을 보면, 근대 서구사상을 내면화하고 이를 우리의 역사 현실에 맞추어 번역하여 실천적 청년 운동으로 제공한 도산의 사상들은 역사적 단절을 극복하는 하나의 실천운동의 지침이 될 수 있다.
1. 한국의 지형【1】경동지형오랜 침식으로 평탄했던 한반도가 신생대 제3기의 비대칭적 융기로 동해안 쪽은 급경사, 서해안 쪽은 완경사를 이루는 지형을 말한다. '경동지형'이란 '경동지괴'에서 유래되었다. 경동지괴는 한쪽이 급경사인 단층애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반대쪽은 완경사의 사면을 가지는 비대칭적인 산지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태백산맥은 양쪽사면이 비대칭을 이루고 있으나 동쪽 사면이 단층애가 아니므로 경동지괴와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경동지형이라 한다.〔인천-동해 중부지역의 경동지형 단면도(상)와 입체모형도(좌)〕태백산맥이 위치한 동해안 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반대인 서해안 쪽은 완경사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3기 중신세의 경동성 융기운동에 의해 동서의 융기량 차이에 따라 경동지형이 형성된 것이다.【2】카르스트 지형석회암이 녹아서 형성되는 카르스트지형은 조선누층군의 석회암층이 넓게 노출된 산간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카르스트지형에서 여러 종류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지표의 돌리네와 지하의 석회동굴이 대표적인 것이다. 돌리네는 단양?영월?삼척의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대개 밭으로 이용되므로, 단양에서는 이를 ‘못밭’, 삼척에서는 ‘움밭’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석회암지대의 토양은 테라로사라고 불리운다. 석회암의 불순물이 잔류하여 형성된 테라로사는 일반 산지토양과는 달리 돌이 없고 점토성분이 풍부하여 산간지방에서는 비옥한 토양으로 꼽힌다. 석회동굴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카르스트 지형으로 영월의 고씨굴, 단양의 고수굴, 울진의 성류굴 등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으며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다.【3】고위평탄면태백산맥은 동해안에서 쳐다보면 병풍을 두른 것처럼 가파르게 솟아 있다. 그러나 그 정상에는 기복이 작은 고원상의 지형이 곳곳에 나타난다.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대관령 부근의 횡계지역에서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해발800m 내외의 이곳에서는 이러한 지형이 오늘날 배추와 씨감자의 고랭지농업에 주로 이용되며 젖소를 기르 목장으로도 개발되었다. 함경산맥도 형태가 태백산맥과 같으며, 그 북쪽의 개마고원에는 이름에 어울리게 아주 평평한 땅이 넓게 펼쳐진다. 고위평탄면이라고 불리우는 이 같은 지형은 한반도의 거의 전체가 침식을 받아 낮아졌을 때의 유물로서 제3기 중엽 이후 한반도가 경동운동을 받아 융기한 이후에도 침식을 덜 받아 남아 있는 것이다. 고위평탄면은 태백산맥의 분수계 주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백산맥 분수계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원래의 융기량과 관련하여 점점 낮아지며, 곳에 따라 산정부를 중심으로 좁게 분포한다. 이러한 고위평탄명은 충주 부근에서는 해발 600~700m, 남한산성 부근에서는 해발500m 내외의 고도에서 나타난다. 남한산성은 고위평탄면에 쌓아 올린 대표적인 산성이다. 고위평탄면은 경북 영양군의 수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의 최상류에서도 간혹 볼 수 있으나 흔치 않으며, 해발800m 이하에서는 개석이 심해서 남아 있지 않다.【4】화산지형용암 대지(lava plateau)점성이 작은 현무암질 용암이 열하 분출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 형성된 평탄한 대지상의 화산 지형으로 개마고원, 철원∼평강, 신계∼곡산 지역에 분포한다. 열하 분출은 지각운동에 의해 생긴 좁고 긴 균열을 따라 현무암질 용암이 분출하여 물처럼 흐르면서 넓게 퍼지는 것을 말한다. 철원∼평강 지역의 용암 대지의 경우는 열하 분출한 용암이 하곡을 메우면서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다가 기존의 하곡이 넓은 곳에 철원, 평강과 같은 대지를 형성하였는데, 그후 이곳에는 임진강과 한탄강에 의한 침식작용이 일어나 하곡에 주상절리가 노출된 수직 절벽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수리 시설이 잘 되어 있으며, 깊은 하곡이 파이기 전에 용암 대지의 표면을 덮어 흐르던 물에 의해 퇴적된 충적토로 덮여 있고 현무암층이 얇아 제주도와는 달리 논농사가 활발하다. 철원(鐵原)이라는 이름은 흑색 또는 암갈색을 띠어 쇠붙이를 연상케 하는 현무암의 용암대지에서 유래되었다. 전곡리에서 발굴된 구석기의 유물은 용암대위를 지나는 한탄강의 퇴적 작용으로 이루어진 충적지에 매몰된 것이다.백두산산정부는 경사가 급한 종상 화산, 산록부는 경사가 완만한 순상 화산이다. 순상 화산은 유동성이 큰(점성이 작은) 용암의 분출로 형성되어 경사가 완만한 화산을 말한다. 그 형태가 마치 방패를 엎어놓은 것 같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종상 화산은 유동성이 작은 (점성이 큰) 용암이 넓게 퍼지지 못하고 종 모양으로 형성된 화산이다.천지는 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칼데라호이다. 칼데라는 화구의 일종으로 화산체가 형성된 후에 대 폭발이나 산정부의 함몰에 의해 2차적으로 형성된 분지이며, 이 곳에 형성된 호수를 칼데라호라 한다. 신생대 제4기의 빙기 때 형성된 빙식곡(kar)이 나타나는데 카르는 백두산 지역이 위도 상으로 북쪽이며 고도가 높기 때문에 빙하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한라산전체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순상 화산 형태이나 정상 부근은 급경사의 종상 화산을 이루고 있다. 산정부의 백록담은 화구호이고, 산록에는 '오름'이나 '악'으로 불리는 기생 화산이 분포한다. 기생 화산은 주화산의 산록에 형성된 작은 화산이다. 주화산이 형성될 때 그 산록의 틈을 따라 용암이 분출되거나, 가스 분출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만장굴, 협재굴, 김녕굴과 같은 용암굴과 해안의 주상 절리는 관광 자원으로 이용된다. 용암굴은 용암이 흘러내릴 때 표면이 냉각되어 굳어진 후에도 하층부가 고온의 유동성을 가지고 있을 때 하층부의 용암이 지하에서 흘러 내려 형성된 동굴이다. 제주도 해안에는 주상 절리가 발달하는데, 이 주상 절리는 용암의 표면이 냉각 수축되면 표면에서 아래쪽으로 갈라지면서 수축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절리(갈라진 틈)가 6각형의 망을 이루어 형성된다. 하천이나 해안에서 아랫 부분이 먼저 침식되면 기둥 모양으로 무너져 내려 절벽을 이루며, 하안이나 해안에서는 이 절벽에 폭포가 발달한다. 제주도의 해안 지대에서는 이러한 주상 절리 때문에 폭포들이 발달하는데 정방 폭포, 천제연 폭포, 천지연 폭포 등이 대적인 예이다.제주도는 다공질의 현무암이 분포하여 물이 잘 스며들어 물이 귀하고, 하천이 발달하지 못하며 대부분 비가 올 때만 흐른다. 이로 인해 벼농사가 불가능하여 밭농사 중심의 토지 이용이 나타나며, 스며든 물이 해안에서 솟아나와 용천대를 형성하므로 취락은 이러한 해안의 용천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울릉도해저에서 분출된 종상 화산으로 상하 2단의 칼데라 분지(나리 분지, 알봉 분지)가 있으며, 그 사이에 중앙 화구구인 알봉이 있는 등 이중 화산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평균 고도 250 m인 나리 분지와 평균 고도 500 m의 알봉 분지는 알봉이 솟아오르면서 분리된 것이다. 섬의 최고봉인 성인봉은 외륜산에 해당한다. 해안은 반 이상이 수직적인 해식애로 둘러싸여 있어 해안도로의 건설과 유지에 어려움이 많다. 하단의 칼데라인 나리 분지는 울릉도에서 가장 평탄한 지역으로 취락이 발달하고, 밭농사가 행해진다.2. 한국의 기후우리나라는 온대에 자리하며, 4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동안에 위치한 관계로 계절풍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이로 인해 같은 위도의 대륙 서안보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이러한 기후를 대륙성 기후 또는 동안기후라고 부른다.한대위 추위에 못지않은 겨울의 혹한은 시베리아 고기압의 확장으로 인해 한랭 건조한 북서계절풍이 강하게 불 때 밀려온다. 시베리아 고기압은 정체성 고기압으로 대략 7일을 주기로 성쇠를 반복하며 이 고기압이 쇠약해지거나 성장하는 동안에는 중국대륙에서 이동성고기압이나 저기압이 이동해 와서 추위가 누그러지며, 그 결과 삼한사온의 기상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열대의 더위에 못지않은 여름의 무더위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우리나라는 지배하는 동안 절정에 이른다. 여름 계절풍은 남서풍, 남풍, 남동풍의 형식으로 불어오며, 겨울 계절풍처럼 뚜렷하지 않다.〔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기단의 종류〕정체성 고기압은 기단을 형성하고, 기단은 날씨를 지배한다. 우리나라의 기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단으로는 한랭건조한 시베리아 기단과 고온다한 북태평양기단 이외에 양쯔강 기단과 오호츠크해기단이 있다. 양쯔강기단은 시베리아 기단의 일부가 남쪽으로 떨어져 나와 변질된 온난건조한 기단으로 주로 봄과 가을에 이동성 고기압의 형식으로 우리나라로 이동해 온다. 오호츠크해기단은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수온이 낮은 오호츠크해의 해상에서 형성되는 냉량다습한 기단으로 동해쪽에서 우리나라로 영향을 미친다.연강수량은 600~1600m이다.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지역차가 상당하지만 일본보다 적고 만주지방보다 많다. 강수량의 약 60%는 여름에 내려 벼농사에 큰 도움을 준다.한편 우리나라의 대기권 상층에는 범지구적 풍계의 일환으로서 서풍이 불고 있다. 고기압과 저기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이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날씨의 변화가 일반적으로 서쪽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동쪽으로 옮아간다,3. 자연환경이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Ⅰ. 서론이제 환경이라는 용어는 거의 일상용어화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일반화되어져 있다. 특히 '환경오염'이 문제시 되면서 우리 생활속에 환경은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환경'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대한 인식 또한 이전 시대에 비하여 매우 증대되고 있다.한편 환경의 문제는 비단 공기가 탁하다거나 맑은 물이 점점 없어진다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전략과 연결되어져 있고, 이는 우리가 무엇을 소중한 가치로 다루어 나갈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되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생활을 규정하는 제반 환경요인들은 그 범위가 훨씬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요소들 이외에도 다양한 환경적 요인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생활에 영향을 준다.Ⅱ. 본론과거의 인간 생활은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었다. 인간의 환경은 자연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며, 자연은 인간의 생활 전체를 결정하는 요소였다. 북부 지방으로 갈수록 가옥의 구조가 폐쇄적이고 남쪽으로 갈수록 개방적인 것은 기후라는 자연 환경에 의해 가옥구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을 환경 결정론이라고 한다
Ⅰ. 파리평화회의1. 평화회의의 구성과 세 거물들의 주장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전후 국제문제들의 처리와 영구적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건설을 위해 평화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동맹국을 제외한 전승국과 중립국의 60여 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제국주의의 충돌이 가져온 전쟁의 원인과 이로 야기된 문제들이 논의 되었으며, 윌슨의 14개조의 기본정신이 주축이 되었다. 파리 강회회의는 승자와 패자 사이의 협상적인 강화라기보다는 패전국들을 범인으로 재판하는 강제선고장이었다. 전체회의는 단지 여섯 번 열렸으며 중요한 회의는 소위원회에 의해 처리되었다. 처음에는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의 수상들과 외무장관들로 구성된 10인회의가 주무를 담당하다가 3월경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수상들로 이루어진 4인 회의로 축소되었다. 이것은 다시 한달 후 이탈리아의 오르란도수상이 윌슨과의 불화로 사퇴함으로 3인 회의로 축소되었다. 그러므로 베르사유 조약은 거의 일들 ‘세 거물들’인 윌슨, 로이드조지 그리고 클레망스에 의해 결정되었다. 파리회의의 결정으로 연합국은 독일 이외의 동맹국들과 각각 별도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을 위시하여 다른 여러 조약들에서 결의된 사항들을 소위 베르사유체제하 하여 제 1차 세계대전 후 세계 신체제의 기본적인 틀이 되었다.위의 세 거물들은 하나의 공동목적을 위하여 모였으나 그들의 개성을 너무나 달랐다. 미국의 윌슨은 완고한 이상주의자로서 정도에 어긋나는 불유쾌한 일들에 대해서는 태도가 분명한 비타협적 인물이었다. 그는 비밀조약도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다. 영국의 로이드 조지는 1916년 애스퀴드를 이어받은 꼼꼼한 웨일즈인 이었다. 그의 현명하고 켈틱한 유머감각은 윌슨의 결점을 메꾸기에 충분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변신을 잘하는 정치가였다. 세 번째의 프랑스수상 클레망소는 미국에서 기자생활을 한 적이 있는 가장 나이 많은 정치가였다. 그는 승려와 왕 요구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우아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14개 조항’을 조약에 반영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4개 조항’은 오래된 유럽적 관행을 타파하는 혁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완충국을 창출하여 라인강 서안을 지배하고, 독일을 영구적으로 무장을 해제시키고, 프랑스의 전비전액을 배상시키고자 했다. 영국은 자국의 해상세력의 확보를 위해 ‘평시와 전시’의 해양의 자유를 반대하였다. 영국은 이 조항이 철회된 후에야 겨우 ‘14개 조항’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요구들 때문에 평화회의는 난항을 거듭하고 부득이 ‘14개 조항’원칙에 어긋나는 예외적 규정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국가간의 ‘연합기구’ 설치에 대해서도 유럽의 정치가들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이 기구를 통해 국제간의 분쟁을 해결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미 체결된 모순적인 각종 비밀조약 문제, 방대한 배상금과 전쟁범죄자 처벌문제, 영?불의 패권회복 문제, 미국의 완고한 고립주의 문제, 신생국가들의 문제, 소련의 볼셰비즘의 서방세계로의 침투문제 등 허다한 문제들이 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영?불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해 자유롭고 관대한 평화조약을 체결할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Ⅱ. 베르사유 조약과 베르사유체제의 확립1. 복잡한 영토문제파리 평화회의의 중대 관심사는 영토처리 문제와 신생국가들의 요구사항의 처리 문제였다. 특히 중앙유럽과 동유럽에는 각기 언어가 다르고 민족의식이 강한 많은 소수민족들이 서로 뒤섞여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일률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위성국가의 설치를 요구하고 나섰고 서방국가들은 소련의 공산주의 침투를 예방하기 위한 이른바 방역선(완충국)의 설치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패전국의 영토는 위임통치제도)를 새로 도입하여 처리하였다. 평화회의의 베르사유 조간 라인강 좌안지대를 점령하도록 조치하고 독일의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기를 철저히 억제하기 위해 육군은 10만으로, 해군은 1만 5천으로, 장교는 5천으로 각각 제한하였다.연합국은 러시아의 볼셰비즘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강력한 완충국들을 건설하고자 신경을 썼다. 핀란드에서 루마니아에 이르는 허리띠 같은 긴 지대에는 여러 나라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공산주의의 서방세계로의 팽창을 방지하는 이른바 방역선 으로 간주 되었다. 폴란드를 독립시켜 옛 영토를 회수케 하였고 단치히시는 자유시로 만들고, 메멜 시는 국제화시켜 리투아니아에게 넘겨주었다.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모두 상실하였고 본국영토의 13%와 전 인구의 10%를 상실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생제르맹 조약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어 작은 3개의 독립국가(오스트리아 공화국?헝가리 왕국?체코슬로바키아)로 분립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이전의 영토의 10분의 1정도로 축소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하여 독립국이 되었다. 불가리아는 뉘이 조약에 의해 발칸 전쟁에서 획득한 영도와 그 후에 획득한 영토를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양도하였다.2. 군비축소연맹규약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군비축소는 국제 평화에 절대적인 필수 조건들이었다. 전쟁 이후 모처럼 활기를 디는 평화의 무드와는 반대로 인부 강대국들은 건함제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미국, 영국, 일본 등은 그들이 차지한 영토와 특권을 지키기 위하여 패전국의 동향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바로 군비증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화유지를 위한 군비축소가 열국간의 현안문제로 등장하였다. 미국대통령 하아딩은 1921년 5대강국과 태평양 관계국들을 중심으로 워싱톤에서 군비제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의는 5대강국인 미?영?프?이?일의 주력함 비율을 5:5:3:1.75:1.75로 정하고 이후 10년간 주력함건조중지를 결의하였다. 이 회의는 따로 미?영?프?일이 태평양에서의 영토보존을 상호 인정하는 4국조약과 극본의 반발과, 히틀러의 등장소식으로 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3. 독일의 배상금 문제독일에 대한 배상금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전승국들의 배상청구액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배상금 문제는 앞으로 유럽의 경제생활과 국제사회에 가장 중대하고도 비참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었다. 미국이 참전할 당시 각국은 아무런 영토적 야심이나 물질적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인류의 권리 옹호자’로 전쟁을 하였는데 일단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의 생각은 윌슨의 의지를 따르지 못하였다. 당시 독일의 경제는 완전히 파탄되었는데 벨기에가 청구한 액수는 자국의 전 재산보다 많았고, 불?영이 요구한 액수는 전쟁 때문에 입은 모든 손실을 계산한 것으로 방대한 것이었다.윌슨은 원래 무배상주의를 선언하고 다만 피점령지의 전쟁손해만을 부과하려 하였다. 그런데 클레망소는 독일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는 여론을 배경으로 최대한의 배상금을 청구 할 결심을 하였고, 영국의 로이드조지는 당시 실시한 총선에서 “마지막 한 푼이라도 받아 내겠다”고 공약하여 승리했기 때문에 윌슨의 제한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조약에서는 1921년 5월1일 까지 2백억 금마르크를 우선 지불토록 하였다. 연합국들은 전쟁 때문에 입은 손실을 전부 보상케하고 미국에서 차관한 막대한 빛을 상환하기 위해서, 독일의 재기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던 것이다. 연합국은 배상금을 확실히 이행시킨 의도로 그 유명한 전범조항을 베르사유 조약안에 포함시켰다. 배상문제는 전범문제와 더불어 독일국민들을 격분시켜 훗날 나치 운동에 투신케 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Ⅲ. 베르사유 체제하의 공과(功過)1. 국제 연맹의 창설평화화의에서 가장 어려웠던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국제 연맹의 창설이었다. 국제연맹은 세계평화의 확립과 인류문화의 창달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상설기구이다. 국제연맹의 주요한 사업은 군비의 축소, 각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 사회 준수할 것을 서약하였다. 국제 연맹의 가장 큰 결함은 침략국에 대한 제재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맹규약은 마치 전승국가들의 안전을 위해 패전국가에 강요하는 것과 같이 되었고, 미국에서는 조약의 비준마저 상원이 부결하여 연맹에 가입조차 할 수 없게 되어 국제연맹은 처음부터 파행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가맹국가들은 국제연맹에 대한 신뢰가 미약하였고, 회원국은 언제라고 연맹을 탈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제 속에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전쟁의 망령을 어느 정도는 쫓았다는 점에서 성공한 점도 없지 않았다. 당사국들이 거의 작은 국가들이긴 하였지만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었다. 1920년 핀란드와 스웨덴의 올란드제도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1925년에는 경제적 거부 위협에 의해 불가리아에 대한 그리스의 공격을 막았으며, 1932년에는 레티키아에 대한 콜롬비아와 페루의 싸움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강대국이 개입한 문제들은 거의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 한편 국제연맹은 보조기구인 국제노동기구를 통하여 노동문제에 대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 인종적 정치적 망명자 문제나 국제법문제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것은 장래 국가들의 협력을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은 연합국을 주축으로 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의 승리를 나타낸 베르사유체제의 골격이라 할 수 있다.2. 로카르노 협정과 부전조약전쟁 이후 국제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지나친 복수심과 경계심이었다. 이것은 양국뿐 아니라 주변 유럽 국가들의 분쟁을 야기 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923년 프랑스는 독일이 배상금지불을 지키지 못하자 이를 구실로 공업지대인 루르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10월 독일외상의 제의에 따라 스위스의 로카르노에서 베르사유조약 준수, 라인안전보장조약 등 7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