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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神)의 나라는 가라 서평
    "신(神)의 나라는 가라"를 읽고..몇 해전 우리나라와 중국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새로 편찬하는 교과서에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역사를 왜곡한 일이 그것이다. 한동안 이 일로 김대중 전대통령과 장쩌민 국가주석이 잇달아 유감을 표명하고, 일본에 방문해서 이 건에 대해서 대폭 수정을 요구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또한 한. 중 양국의 국민들은 이 일로 일본을 맹렬히 비판했다. 당시 오부치 게이조 수상은 자신들의 잘못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 수상의 이런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이없게도 이 왜곡된 역사교과서는 일본의 문무성에서 승인되었다.그런데 한동안 이런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 뉴스나 그런 데에서 많이 보도되더니 어느새 갑자기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진 것 같다. 잘 해결이 돼서 잊혀진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거대한 다른 어이없는 일에 묻혀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자일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 눈 뜨고 있는 군국제가 이렇게 빨리 사라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사교과서 왜곡은 결코 이렇게 흐지부지 덮어서는 안되며 우리의 선조와 후대를 위해서도 또, 일본을 위해서도 완곡하게 제지해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쉽다. 문제의 본질과 문제의 해결방안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채, 나쁜 놈들이니 어쩌니 하고 욕만 해댈 뿐...! 그러나 문제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비판을 해도 일본 내부에서 자신들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지금 흐지부지 끝난다고 해도 이 문제는 언제고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이 책은 이런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은 일본의 의식 있는 학자 4명이 역사교과서의 파일럿 판인 [국민의 역사]와 이것을 편찬하는 극우 집단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과 그 배후에 있는 산케이신문을 조목조목 [국민의 역사]책의 페이지 수까지 들어가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처음에 이 책을 들었을 때 또 그냥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외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읽어보았는데, 다행히도 일본사람들 내부의 비판이라서 일본에 대한 이미지를 조금은 좋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이 책에서 비판하는 내용들 -[국민의 역사]의 내용-이 정말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뉴스 같은 매스컴에서 많이 접한 근대사나 우리와 동아시아 침략에 관한 내용은 당연히 화가 나고 그랬지만, 정말 고대사에 대한 부분은 도대체 그 책을 쓴 사람이 개념이라는 게 있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했다. 신화를 억지로 자신들이 역사로 끌어들이고 또, 아직 일본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인 6세기에 일본열도 지배 영역이 지금과 같은 모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천하라는 국가 의식이 생겨나 천황 아래서 1만년 동안 평화롭게 지냈다고 주장한다. 가장 내가 쓰러지고 말았던 부분은 니코쿠 천황릉이 진시황릉 보다 더 큰 세계 최대 규모라고 서술한 것이다. 세상에!!그리고 또 어이없었던 것은 [국민의 역사]의 저자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하 새역모)의 회장이 역사 전공이 아닌 철학 전공이라는 사실이다. 뭐가 이렇게 큰 문제가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들은 역사강의들은 전공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철학을 전공한 새역모 의 회장 니시오 간지에게 올바른 역사관 같은 게 심어져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올바른 역사관이 심어져 있었다면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역사책은 서술하지 안았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역사 교과서 다른 것도 아닌 교과서에 자신의 생각을 쓸 수가 있는지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왜 갑자기 문득 이렇게 이 군국제와 황국사관을 다루는 것인가? 이 책의 또 다른 저자인 이어령은 일본 위기론에서 그 본질을 찾고 있다.그동안 일본은 아시아의 우등생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아시아의 맹주로 독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가 끝날 무렵 일본의 국가 경쟁력은 급격히 추락했고, 일본의 경제는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일본의 위기론은 급속히 대두되고 있었다. 일본이 위기의 시기에 휩싸일 때면 일본인들은 환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정한론의 기초가 되었던 한반도가 대륙의 주먹이라서 일본을 침략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먼저 한반도를 쳐야 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환상이 일본을 군국제의 망령으로 다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이런 위기론과 군국제의 망령 속에서 등장한 역사 교과서.. 일본인에게 긍지를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타난 역사 왜곡.. 과연 이것이 일본인과 일본 청소년들에게 긍지를 심어줄까? 일본어로 긍지와 먼지가 같은 호코리라는 말이라고 한다. 역사왜곡의 결과는 호코리(긍지)일까? 아니면 호코리(먼지)일까?? 이것은 누구보다도 일본인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이렇게 어이없는 내용을 배운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실제 사회와 그들이 만들어놓은 역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더욱 더 국가와 군국제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처럼 일본 청소년들의 생각 속에서 천황에 대한 존경,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같은 것들은 옅어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것들은 사라지고 국가에 대한 비판과 경멸만이 남아있게 될 지도 모른다.이들(극우 세력, 결코 이 책의 저자가 아님)은 역사라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르고 있다. 니시오 간지를 비롯해서 새역모 의 다른 회원들이나 산케이신문의 기자는 역사는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화도 역사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전혀 역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역사는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하는 실증적이고 매우 중요한 과학이다. 역사를 전공한지 2년이 채 안 되는 나도, 역사가 그 어느 학문보다 중요한 과학이라는 건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신화를 역사로 돌려서 허구를 만드는 그런 우매한 짓은 하지 않는다. 신화는 신화일 뿐이다. 우리가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 신화가 나온 배경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는 사회상, 또한 우리의 신화에서 보여지는 홍익인간 같은 그 나라의 사상이다. 물론 신화가 나라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며, 철저한 고증과 사료, 그리고 그를 확증하는 유물이 나오기 전까지 신화는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역사를 매우 조금 배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일본의 우익들은 모르고 있다. 아니 알면서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 올바르겠지?이 책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도 비판자가 되어서 이렇게 비판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처럼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할 수는 없었지만...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책만 낸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 내에서 새역모 와 산케이신문의 활동이 불법이라고 직접 불공정 거래 소송을 내기도 하고 신문에 칼럼을 써서 일본 사람들에게 사고를 바꿀 것을 촉구하기도 한다.그러나 산케이신문은 자신들이 언론사라는 이점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빠져나가면서 새역모 의 활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찬양한다. 여기에 역사교과서 왜곡 뿐 아니라 우리가 일본의 군국제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언론에서 앞장서서 왜곡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어떤 식으로든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물론 이런 기사나 활동에 속을 우매한 일본인은 없을 거라고 난 믿고 싶다. 그렇지만 우경화에 빠져있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고 하는데 이런 언론에서 앞장서서 역사왜곡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면, 잠자고 있는 군국제를 확실하게 깨우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또한, 새역모 는 타학 사관에 의해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난징에서 일어난 전쟁을 자신들에 의한 학살로 인해 쓰지 않고 중국에서 평화 협상에 사인을 하지 않았고 계속 전쟁을 요구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고 이런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은 난징 내 일본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평화협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6.10.14| 4페이지| 1,000원| 조회(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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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현대적 의미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현대적 의미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부터 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이다. 이 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이라고 불린다.그러나 이 시민혁명은 부르주아 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을 그대로 의미하지는 않는다.전 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인 것이다.프랑스 혁명이 현재의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3대 시민혁명 중에서 시민혁명의 대표를 프랑스 혁명이라 꼽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그 당시 프랑스는 몹시 혼란했던 시기였다.앙시앙 레짐 이라는 구제도의 모순과 갈등이 나타나고, 국가 재정의 악화, 물가의 상승과,실업자의 증가와 그로 인한 빈민의 증가, 그리고 늘어만 가는 교회의 십일조와 세금 등, 당시 프랑스의 상황에서 농민과 하층민들은 삶을 살아 갈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그 와중에서 루이 16세의 미국 독립전쟁 지원은 국가 재정의 파산을 불러 일으켰고, 쌓여만 가던 불만과 갈등 속에서 재정의 악화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또, 당시 사회에 유행하고 있던 계몽사상과, 그를 받아들인 부유한 평민계층-상민, 금융인, 등 브루조아 계급-은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잔재가 남아 있는 절대 주의를 타파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를 건설하기를 바라고 있었다.재정난 해결을 위한 삼부회에서 머릿수 투표의 주장과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제 3신분들 스스로 국민의회를 성립하여 전국 신분회가 국민의 이름으로 정부를 재조직할 권한이 있음을 선언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혁명의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이 시기를 혁명의 1단계라 하며, 이 1단계의 기간동안 프랑스는 국민의회의 손 안에 있게된다. 루이 16세와 귀족들은 이 국민의회를 인정해 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민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농민, 평민이 이 혁명에 참여하게 되었다.이 바스티유 감옥 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주권은 더 이상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는 것이었다.바스티유 감옥 습격이후 경제적 궁핍의 직접적인 여파로 고통 받고 있었던 농민들은 중간 계급의 혁명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불안감과 공포에 휩싸인 농민들은 영주의 저택과 수도원과 주교의 거주지 등을 불태워 버렸다.(대공포)또, 1978년 세 번째로 여성들이 빵 가격 상승과 국민 의회와의 협력을 끝까지 거부하는 왕의 태도에 격분하여 10월 베르사이유로 행진하면서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려 했다.이 세 번의 대중 봉기는 많은 성과를 남기게 되었다.먼저,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국민 의회를 국민의 입법 기관으로 인정하게 하는데 기여했다.대공포를 통해 장원제도의 잔재들이 폐지되었다.십일조세와, 강제 노역,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온갖 유형의 귀족, 성직자들의 면세, 독점은 평등권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사라졌다.모든 특권이 사라진 이후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이 인권 선언은 자유와 평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인권 선언 제 1조를 보면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그렇게 존속한다..라고 되어있는데 이 1조만 보더라도 프랑스 혁명 (제 1단계)는 자유와 평등의 혁명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압제에 대한 저항권과, 재산권은 자연권임을 주장하였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적법 절차의 원리 등, 이 인권 선언의 내용은 지금 현재 자유 민주주의 이념의 초석이 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이런 부분을 보아도 프랑스 혁명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시민. 평민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였으며, 많은 노력과 피의 산물로 조금씩 조금씩 얻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이 인권 선언의 내용이 우리나라 헌법..(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들의 헌법)에 대부분 나와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프랑스 혁명이 현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지 알 수 있다.또, 10월 혁명 이후 성직자 시민헌장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모든 주교와 신부들은 국민이 선출하며, 국가 권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국민의회는 1791년이 되어서 비로소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이 헌법에는 중간 계급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헌법의 주요 내용은 모든 시민이 동일한 공민권을 갖지만 투표권은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낸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었다.제한 선거에 의한 단원제 의회와 입헌 군주제가 그 헌법에 들어가 있었다.또,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브루조아의 혁명이었으므로, 여러 가지 경제, 행정면에서 계몽주의적 자유주의를 반영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제 1단계가 중간 계급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혁명이라면, 제 2단계는 평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급진 공화파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점차 정치의식을 지닌 하층민들이 제 1단계 혁명에서 막상 하층민 자신에고 돌아온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점차 그 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또, 물가의 갑작스러운 폭등으로 인해 파리 대중들은 빵 가격을 혁명이전의 수준으로 내려달라고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중요한 역할에 비해, 그들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 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대중들의 좌절감은 높아만 갔다.게다가, 루이 16세와, 왕비는 외국의 힘을 반혁명지지 세력을 규합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궁중을 탈출하다가 바렌에서 발각되고 많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더 해지고 왕정폐지를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다.지롱드파와 자코뱅파의 대립 속에서 국민 공회의 개혁과 혁명전쟁, 그리고 공포정치로 표현될 수 있는 제 2단계에서는 급진적인 자코뱅파에 의해 공산주의의 성격을 지닌 파리 코뮌이 설립된다. 또, 국민 공회는 프랑스가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루이 16세를 재판에 부쳐 처형하게 된다.그 후, 혁명군을 조직, 영국, 네델란드, 에스파니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제 1차 대 프랑스 동맹)에서 승리하고, 급진적인 공포정치를 행하게 된다.공포 정치는 반혁명 분자나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내는 정치였다. 1793년 9월부터 1794년 7월까지 2만명이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급진적인 개혁정치와 권위주의 체제에 의지했지만 이 자코뱅파의 혁명은 하층 중간 계급의 이익을 증진시킴으로써 프랑스 내에서의 산업의 변화속도를 늦추었다.그리고 공산주의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보통 선거와 같은 정책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리라 생각된다.그러나 인플레이션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민들의 지지를 잃고 너무나 급진적인 정책 때문에 로베스 피에르는 독재자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그 후, 공화파는 1795년에 제한 선거에 의한 의회와 5명의 총재로 구성된 총재 정부를 규정한 헌법을 제정하였다.그러나 여전히 국내 정세는 불안정하였고, 또 제2차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나폴레옹이 두각을 나타내어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나폴레옹은 교회 토지의 매각등 혁명적 토지 개혁을 실시했고,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재정의 안정을 꾀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 정치로 인해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잇다른 전쟁에서의 패배와, 독재로 인해 나폴레옹은 몰락하였다.이렇게 프랑스 혁명은 끝이 나고 말았다.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중요한 이념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프랑스 혁명은 단지 한 부분의 일부를 바꾼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프랑스 사회의 전체를 바꾼 것이다.특히 대혁명(1789년~1792년)에서 나타나는 혁명의 모습은 바람직한 혁명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중간 계급의 혁명이었으므로, 그 중간계급 (브루조아)를 위한 조항이 많이 보인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었던 농민들의 입장이 덜 반영된 것 같아 아쉬운 혁명이라 하겠다. 물론 이 혁명의 가장 큰 성과는 봉건제의 타파와 인권선언, 그리고 입헌 군주제를 들 수가 있다. 1789년과 1791년에 국민의회에 의해 도입된 개혁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인상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기록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문/어학| 2006.10.14| 5페이지| 1,000원| 조회(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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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일본인론
    일본, 일본인론목 차서론본론-일본인의 의식 형성1. 기후, 풍토2. 무사정권-일본인의 의식구조1. 같음과 다름2. 문화의 다양성과 자기문화의 보존3. 이중성4. 축소지향결론나가는 글참고자료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본의 문화를 우리나라의 문화와 비슷하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도 적잖이 있다. 고대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에 건너가 국가 기틀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며, 또 우리나라가 오랜 기간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일제시대의 아픈 기억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반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청소년들이나 젊은 층은 일본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도 한다.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제로 일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까?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전부로 느끼는 경향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일본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결코 우리가 아는 일본은 전부가 아니며, 일본의 문화와 우리나라의 문화는 결코 비슷하지 않다. 일본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수성에 따라서 해양로를 통해서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또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가기도 하였다.일본과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고 현재의 정세로 볼 때, 적이 되든지 아니면 동반자가 되든지 숙명적으로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물론, 평화롭게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 옳은 길이지만 말이다.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현재 3국이 꿈꾸고 있는 미래는 3국이 모두 각자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각의 나라들을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알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는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왔다. 그렇지만 일본은 무조건적으로 욕하고, 반감을 가지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일본에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만으로 일본을 바라본다면 우리나라는 평화와 공존이라는 동아시아의 미래 속에서 도태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 앞에서 얘기한 평화와 공존이라는 틀 속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본론-일본인의 의식 형성어떠한 나라와 그 나라의 국민 의식은 기후와 역사적 요소에 따라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생활환경과 어떠한 역사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의식과 국민의 의식이 바뀐다고 할 수 있겠다.1. 기후, 풍토일본열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동해를 사이에 두고 남북 4000Km에 결쳐 열도를 형성하고 있는 국가로 원래는 다민종 민족이었지만 일찍이 한민족?한 언어?한 문화로써 국가를 형성해 온 섬나라로, 국토의 7할이 산지, 3할이 평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절풍지대에 속하고 있어 사계의 뚜렷한 변화와 특성을 그 기후적 특징으로 들 수 있다.또한, 일본은 몬순적 풍토에 해당되는 국가로서, 겨울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어오는 차가운 계절풍과 여름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어오는 덥고 습기가 많은 계절풍, 즉 태풍을 그 기후적 특징으로 하고 있다.『풍토(風土)-인간학적고찰』이 저자 와츠지는 이러한 태풍을 ‘서열과 습기의 결합’이라고 하였는데 이 때의 습기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로 하여금 생을 영위하게 하는 요소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수용적성격을 가지게 한다. 즉 태풍이나 호우 또는 폭설 등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혈연간의 연대를 중요시하는 가족 및 집안 중시의 기질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몬순형의 풍토에 적응하는 수용적?인종적?태풍적 성격 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로 ‘섬나라 근성‘이라는 것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대륙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고립된 섬나라인 탓에 인간성의 도량이 좁고 대범함이 부족하다는 결점이 있으나, 오히려 대륙국가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므로 외국의 문화 및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여 외국의 문화에 대해서 휠씬 더 의욕적?진취적이라는 점은 섬나라국가라는 풍토적 사실에서 비롯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2. 무사정권역사적으로 일본은 오 최선을 다하는 풍조가 나타나게 된다. 이런 장기간의 무가정권 아래의 법규나 규칙, 무사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일본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사도는 일본인들의 의식구조 전반을 지배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의 의식구조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일본인의 의식구조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일본인의 의식구조에 대해서 논해 보도록 하겠다.1. 다름과 같음국화와 칼, 그리고 그 외 다른 일본 문학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인데, 일본은 서구와도 비슷하고 또 다르지만, 동양과도 비슷하고 또 다르다.이 무슨 언어유희인가 라고 생각될 지도 모르지만, 일본의 전체적인 틀은 고대 국가 완성 단계에서 중국과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중국,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렇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과 적용하는 방식은 다르다. 천황제로써 예를 들자면, 일본은 고대국가 완성 시기에서 중국의 황제를 표방하여 천황제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중국과 일본의 천황제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예상됨으로 부연 설명을 하지 않겠다. 또 다른 예로 종교를 보자면, 일본은 고대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모두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였다. 삼국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지만 일본은 신도라는 국가 종교가 긴밀하게 일상 생활 속에서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와 결합 할 수 있는 부분만 받아들이게 된다. 현재 불교와 신도는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사와 절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중국과 한국에서 거의 종교화 되어있는 유교도 일본에서는 단지 생활 규범으로써만 자리 잡게 된다.이렇듯 큰 틀은 비슷하지만, 깊게 들어가면 일본 나름대로 변형 시켜서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모습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거의 모든 것을 서구식으로 차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걸쳐서 이루어진 서구의 문화를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섬나라는 해로를 열어 필요한 문물을 받아들일 수도 또, 해로를 차단할 수도 있었다. 또한, 주변국과의 정세에 따라서 문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길도 한정되어 있었다. 일본은 필요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문물을 받아들였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그들의 문을 닫았다. 이러한 일의 반복으로 인해서 일본은 중국과 한국, 서구의 문물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고, 그것들을 일본화 시키는 것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쉬웠을 것이다.이러한 요소들로 인해서 일본은 중국, 한국, 서양과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들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중국, 한국과 또 서양과 다른 아주 특수한 일본에서만 보여지는 일본인의 특성에 그 포인트를 맞추어야 한다.2. 문화의 다양성과 자기문화의 보존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일본은 주변국들의 문화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주변국들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렇지만 일본은 주변국들의 문화가 곳곳에서 나타나며 또, 자신들의 고유문화까지도 함께 혼재되어 있다. 일본처럼 다양한 문화가 생활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나라는 흔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일본을 두고 샌드위치형 내지는 지층형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의 영향을 보다 덜 받은 우리나라보다 더 일상생활 속에서 전통문화가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섬나라 적 특성인 선택적 문화 수용과도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주변국들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기에서는 그동안 받은 문화들 역시 일본화 되고 또한, 독자적인 문화를 더욱 더 발전시킬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외래문화와 고유문화의 벽이 허물어지게 되면서 모두다 일본 문화라는 틀 속에 자리잡아 갔다.또한, 일본의 교육에서도 그 영향을 찾을 수가 있다. 군국주의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학생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 국민과 일본 문화의 우수성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주입한다고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자문화 멸시 타나게 되는 것이다.3. 이중성국화와 칼의 저자는 일본에 대해서 일본인은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 겁쟁이이며...등등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이는 나도 일본인에 대해서 일본에 대해서 생각한 점이다. 일본은 이중성으로 가득찬 모순된 나라라고 생각한다. 이는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흔히들 일본에 가면 그 친절을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을 한다. 일본인들은 실제로 하는 표현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런 일본사람들을 가지고 가식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러한 일본인의 이중성은 일본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조심스럽게 만들기도 한다.일본인의 이중성은 그들의 언어 생활에서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는데, 표현 방식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다. 예를 들자면, 일상생활에 자주 쓰이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 ’됐습니다.‘ 라는 표현은 일본인끼리는 어려움 없이 쓰이지만, 외국인의 경우는 여간해서는 그 진의를 파악하지 어려운 이중화법이다. 대개 외국인들은 ’생각해 보겠다‘ 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가까운 시일 내에 대답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기다렸다가 일정시간이 지난 후 그것이 바로 완곡한 거절의 의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는 완곡한 표현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해치지 않고 부정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일본인의 배려라는 긍정적인 시각으로도 볼 수 있다.또한, 완곡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것이 아닐까요?‘ 와 같은 표현을 써서 최종적 판단을 상대방에게 맡김으로써 의견의 차이가 나타났을 때 직접적인 마찰을 피할 수 있다.이러한 언어 표현은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언어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인들은 속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는 섬나라적 특성과 무라없었다.
    사회과학| 2006.10.14| 9페이지| 2,000원| 조회(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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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가비오따스 서평
    유토피아를 토피아로..“가비오따쓰” 를 읽고..처음 이 책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땐, 도대체 가비오따쓰가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속 가능한 계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공동체? 흐린 날에도 필요한 만큼의 태양열을 모을 수 있고, 풍력만으로 충분히 전기를 발전할수 있다니..!!솔직히 이런 얘기는 영화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 인줄 알았다.아무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밭을 일구고,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물이 사람을 살리는 물로 바뀌고.. 심지어 그 물을 다른 사람들이 사가다니!!책을 읽는 내내 난 이건 현실이 아닐 꺼야...이런 생각만 계속 들었다.그러나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 이 책 속에서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아니, 이 책은 지금 지구 어딘가 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내가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는 석유연료를 이용해 따뜻하게 잠을 자고 있을 때, 지구의 다른 쪽에서는 내가 오염시킨 지구를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었고, 내가 꿈이라고 여기는 것을 실현시키고 있었다.그것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나는 사실 콜롬비아가 그렇게 위험한 나라인 줄도 몰랐다.그냥 맛있는 커피가 많이 생산되는 라틴아메리카의 어디쯤이려니 생각했다.아니, 콜롬비아라는 나라를 따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 같다.콜롬비아가 50년 동안 내전을 겪고, 하루에도 수 백 명씩 죽어 나간다는 사실은, 가비오따쓰의 존재만큼이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같은 국민 사람을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총살한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정부군과 게릴라의 끊임없는 총격전으로 아무런 죄 없는 힘없는 농민이나 주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자신이 자란 땅에서 쫒겨나 유랑의 길을 걷거나 자신 역시도 게릴라가 되어버리고 만다. 또한, 돈을 버는 일이라면 마약 밀매도 서슴치 않고, 자신의 돈벌이에 해가 되는 사람은 누구든 죽여버리는 돈이 많은 사람들...누구도 이런 콜롬비아에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그러나,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가비오따쓰는 희망을 만들어 내었고,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만 여겨지던 것을 현실로 이루어 내었다.산성화되어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땅에서 수경재배로 채소를 재배하였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어느 곳보다 품질이 좋은 소나무 숲을 만들어 내었다.깨끗한 물을 위해서는 몇 백 미터씩 우물을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 일을 하는 사람들 모두 불만에 차서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바라보며,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고..또 다시 시작하고, 그러기를 반복해 결국, 존재하지 않고 꿈으로만 여겨지는 유토피아가 아닌 존재하는 토피아로 만들어낸다.가비오따쓰에서 파올로 루가리라는 인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는 이 가비오따쓰를 생각으로만 끝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벗고 나서서 결국 현실로 이루어 내었다. 나는 그의 행동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콜롬비아의 엘리트층인 루가리는 그냥 있었으면 그의 삼촌처럼 정부에서 고위직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편안한 인생을 거부하고 가비오따쓰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서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고 결국 도움을 얻어낸다. 그 뿐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비전을 갖게 한다.나는 루가리라는 인물을 보면서 나의 행동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나는 나 스스로도 나를 의지 박약아 라고 부를 정도로 행동력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내가 조금 비약해서 생각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저 생각으로 끝낸 많은 일들을 행동으로 옮겼다면, 가비오따쓰 만큼은 아니지만 거대한 일을 실행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이런 내게 루가리가 한 말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사막은 상상력이 고갈된 곳이다. 가비오따쓰는 상상력이 만발한 오아시스다”나도 언젠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뒤 저 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이것은 내가 책과는 별개로 루가리의 행동력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루가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모습 역시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루가리의 응접실에서 열린 명사들이 모임에서 한 신부는 각 정부 관료들에게 발전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물어본다. 각각 그 사람들은 자신의 나름대로 국민총생산이니, 일인당 포장도로가 얼마나 되느냐는 등의 말을 한다. 그렇지만 그 신부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나는 이 부분을 보면서 상관없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들었던 방글라데시를 기억해 냈다.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빈민국 이라고 한다. 빈민국 이기 때문에 나와 앞의 정부 관료들이 생각했던 발전은 물론 안된 나라였다. 하지만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가장 높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발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발전이란 무엇인가? 문명의 혜택? 편안하게 사는 것? 하지만 맘이 편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는데 문명의 혜택을 받는 게 발전일까? 루가리 에게도 많은 인상을 남겼지만 나에게도 역시 발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었다.역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읽을 때 효과적으로 읽는 방법 중에 하나로 공동체 내에서의 의사과정을 들었다.이 부분 역시 읽으면서 내게 큰 인상을 남긴 부분이다.가비오따쓰에 사는 주민들은 그 공동체에 관계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한다.이 회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지도 않고, 서로의 눈을 보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타협을 해 해결책을 찾아간다.의사결정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기가 쉽다. 내가, 우리가 하지 못하는 부분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읽게 되었다.솔직히 책의 앞부분에 태양열을 이용하는 기구들을 만든다거나, 풍력을 이용하기 이해 풍차를 만든다거나 등등, 과학에 관련된 부분을 읽을 때는 워낙에 그런 부분에 관심이 없고 알지도 못하는 지라 많이 지루하긴 했었다.하지만 뒷부분으로 가면서 가비오따쓰가 왜 그냥 공동체가 아닌 생태 공동체라고 불리는 지 알 것 같았다. 솔직히 앞부분에서도 생태 공동체라고 불릴만한 많은 일을 서술해 놓았다.석유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대체에너지 (특히 태양열)를 얻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설계하여 결국 만들어 내기도 하였고, 그런 것을 만들 때 재활용 제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만드는 과정 등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아 깊이 내게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그렇지만, 책의 후반부는 생태공동체라던가 환경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인공의 힘을 가하지 않고 그냥 잡초가 자라는 데로 놓아둔 소나무는 그냥 소나무만을 기르기 위해 잡초를 죽이고, 농약을 뿌린 곳보다 훨씬 더 잘 자랐다.
    독후감/창작| 2006.10.14| 3페이지| 1,000원| 조회(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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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아편전쟁부터 신해혁명까지 중국근대화의 과정 평가C아쉬워요
    아편전쟁에서 신해혁명에 이르는 중국근대화의 과정청나라는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외국 무역은 광저우[廣州]항(港)에 한하며, 또한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단체(길드)를 통해서만 허가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외국 여러 나라 중에서 영국이 광동 무역의 중심이었다. 중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비단·차(茶)·도자기 등이었고, 영국은 약간의 모직물과 향료 정도여서 비단과 차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은(銀)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8세기 말 영국 정부가 차에 대한 수입관세를 인하하고부터 일반 국민 사이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보급되어 중국차(홍차)의 수입이 급증하였다.1832년까지 중국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産)의 목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함으로써 차의 구매자금을 조달하려고 하였다. 특히, 그들이 전매제도 아래에서 중국인의 기호에 맞도록 정제하여 모험적인 민간상인에게 팔아넘김으로써 중국에 밀수된 아편의 양은 해마다 격증하였다.아편유입이 증가하고 은가의 등귀현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편금령이 내리게 된다.1729년에 시작된 초기 금열은 당시의 밀수량이 수백상자 정도였기 때문에 국민의 건강. 위생. 도덕을 정면에 내세웠던 것이지만. 도광(道光)연간에 들어오면 은의 유출을 방지하려는 관점을 첨가한 금령이 되며 특히 1830년대가 되면 그 중심은 아편유입에 수반된 은의 유출, 은가 앙등에 대한 대책으로 완전히 경제문제로 옮아간다.1830년대가 되자 중국측의 은(銀)이 종전까지의 입초(入超)에서 출초(出超)로 바뀌게 되어, 중국의 은 값이 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본위화폐(本位貨幣)인 은화의 등귀(騰貴)는 재정과 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상 동전(銅錢)을 사용하면서, 이것을 은으로 환산하여 납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민에게 있어 동전에 대한 은가 비율의 고등(高騰)은 심각한 것이었다. 또한 관청, 특히 군대 안의 아편 중독환자의 격증은 전제왕조(專制王朝)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몰리자 황제(道光帝)는 쟁이 재개되었다. 제 2기는 천비가조약 체결에서 41년 5월 말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 까지 이다. 영국군의 남하로 위기감이 덜헤진 도광제는 강경자세를 회복하였고, 영국 정보도 또한 천비가조약에 불만이었기 때문에 다시 전단이 열렸다. 장군에 임명된 혁산(奕山)은 1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고 광동으로 항했다. 앞서 임칙서에 의해 공고해진 광동방위는 그를 이은 기선에 의해 이미 철거되어 영국군의 침공 앞에 거의 저항력을 갖지 못했다. 혁산은 광동지 을 파견하여 챨스 엘리오트와 휴전협정을 맺게 하여, 600달러의 배상, 중국군은 광주로부터 60마일 외곽으로 철수하고 영국군은을 철수하며, 홍콩할양문제는 장래의 협정으로 미룬다는 것 등을 약속했다.제3기는, 전쟁 재개에서 42년 8월 29일 난징조약 조인가지이다.다음해 증원부대 1만 명을 추가한 영국군은 양쯔강으로 침입하여 난징[南京]에 육박하였다. 청조는 민중을 무장시켜 장기에 걸치는 게릴라전을 수행할 처지가 못 되었다. 무장한 민중이 이민족(異民族) 지배자인 청조를 위협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규군의 군규(軍規)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저항다운 저항도 없이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전쟁의 전(全)기간을 통하여 영국군의 사상자(死傷者)가 520명인 데 대하여, 청조의 사상자는 약 2만 명에 이르렀다. 청조는 난징의 함락이 가져올 황제의 권위 실추를 방지하고자, 그 직전에 영국의 요구를 전부 수락하고 난징 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였다(1842.8).그러나 그동안 광저우 교외의 삼원리(三元里)에서 영국군의 폭행에 격분한 농민 수만 명이 무기를 가지고 영국군을 포위하는 등, 민중이 자발적으로 침략반대 투쟁에 봉기하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광동성[廣東省]에서는 그뒤로도 오랫동안 영국인의 입성을 거부하려는 배외(排外)투쟁이 계속되었다.2. 결과의 의의난징조약과 그 추가조약(虎門條約), 오구(五口:廣州·厦門·福州·寧波·上海) 통상의 결정 등으로 중국은 영토의 일부뿐만 아니라, 세제·단련을 조직하여 무장하고 있었지만, 커자는 한족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 분산되어 살고 있었으므로 응집력도 없었다. 태평천국운동은 바로 이 커자를 배상제회라는 종교결사로 조직하여 출발했다.1843년 광둥성[廣東省] 화현(花縣) 객가(客家)의 농민 출신 홍수전이 상제교(上帝敎;拜上帝敎)를 창시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 고대의 지상신(至上神)인 하늘의 주재자 상제를 그리스도교의 여호와와 같은 위치에 두고 유일신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모든 우상을 믿지 않고 상제만 믿으면서 금욕적 계율을 지키면 모든 사람이 상제의 자녀·형제자매로서 서로 돕고 화목하게 지내는 대동(大同)의 세상이 실현된다고 주장하였다. 상제교는 주로 광시성[廣西省] 남동부에 새로온 이주민으로서, 일족(一族)의 신들이나 토지신의 제사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선주민 공동체에서 제외된 객가의 농민들에게 많이 받아들여졌으며,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와는 이질적인 토속적 일신교로 변질되어 의식(衣食)의 보장과 질병·재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현세적 이익 실현과 결합되었다. 48년 우상파괴운동으로 초래된 신도들의 동요를 상제 및 그리스도의 하범(下凡;顯現)에 의해 진정시키려 하였던 양수청(楊秀淸)과 소조귀(簫朝貴)는 홍수전이 그리스도 다음가는 상제의 둘째 아들이며 만국의 참된 왕으로서 지상에 보내진 사람이라고 널리 알렸다. 이에 홍수전은 지상천국 창립과 자신이 <참된 왕>임을 정당화하는 신화를 창조하였다. 우상파괴를 통해 객가의 빈농을 중심으로 한 상제회와 향신(鄕紳)이 지배하는 단련(團練;武裝自衛團)과의 항쟁이 격화되는 속에서 상제회는 50년 봄 이후 거병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약 1만의 신도는 토지·재산을 처분하고 무장집단을 결성해 청나라 군사와 항쟁하면서 광시성 남동부의 구이핑현[桂平縣] 진톈촌[金田村] 일대에 집결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전면적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봄부터 홍수전은 천왕(天王)이라 칭하고 <태평천국>이라는 새 국가를 수립하였다건지배체제의 위기 가운데서, 제 2차 아편전쟁 후 열강의 중국에 대한 침략이 한층 더 실질화 된 상황 하에서, 더군다나 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던 장강 하류지역에서, 열강과의 기묘한 협조관계를 배경으로 출발한 것이다.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이 양무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른 직접적인 동기는 열강의 지원을 얻어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양식 무기의 위력을 몸으로 체험한 것으로, 열강의 침략을 위협으로받아 들이는 의식, 따라서 또한 이것에 대결하려는 의욕은 임척서나 위원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상당히 희박하였다.양무파 관료들은 서양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자강(自强)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내 민중의 저항. 반란. 봉기의 진압을 제일의 임무로 하여 양무운동을 추진하였다.양무파 관료들은 먼저, 근대무기의 수입 ·제조를 개시하고 군사공업을 일으켰다. 양무운동은 청나라 정부가 1861년 베이징[北京]에 총리아문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1865년 상하이[上海]에 강남기기총국(江南機器總局)이, 난징(南京)에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이 설립되어 총탄·화약·총포 등이 제조되었고, 1868년 강남기기제조총국에 번역관을 설치, 〈기기발궤 汽機發軌〉·〈태서채매도설 泰西採煤圖說〉 등 자연과학·기술·역사·국제법에 관한 외국서적이 번역되었다.그리고 1882년에는 상하이 기기직포국(上海機器織布局)이 설치되고, 1894년 상하이 화성기기방적창, 후베이 방적국(湖北紡績局) 등이 설립되어 방적부문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교통·운송 부문에서는 1873년 수선초상국(輸船招商局)을 만들어 연해(沿海)·내해(內海)에서 영국·미국의 기선들과 대항했으며, 1880년 탕산[唐山]-쉬거좡[胥各莊] 사이에 석탄수송을 위한 철도가 부설되었다. 이들 실업의 촉진사업에는 자금조달 및 경영에 있어 상인들의 참가가 요구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한편 양무운동의 교육분야는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설립으로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냈다. 1862년 베이징 총리아문에 외국어학교인 동문관(同文館도가 추진·채택되었다. 또한 정부행정의 쇄신, 법전의 개정, 군대의 혁신이 이루어졌으며 부정부패는 공격을 받았다. 당시 낡은 중국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던 계층은 부정부패의 일소, 군대와 전통적인 교육제도 등의 쇄신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서태후(西太后)의 주변에 모여들었다.결국 이 운동은 서태후(西太后)의 쿠데타로 100일만에 좌절되고,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담사동을 포함하여 6명의 청년개혁가들은 처형당했으며, 황제도 강제로 격리되었다. 근대적인 학교설립 등과 같은 몇몇 온건한 개혁정책들이 계속 시행되었지만, 과거제도는 다시 부활되었고 그때까지 실행되지 않았던 개혁에 관한 대부분의 칙령들은 취소되었다. 20세기에 헌법제정·국회개설을 목표로 한 입헌(立憲)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청조타도(淸朝打倒)·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쑨원[孫文] 등의 혁명운동이 활발해졌다5.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19세기 말 세계의 분할을 거의 끝낸 제국주의 열강은 최후로 남아있던 중국에 대하여 적극적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청일전쟁의 패배였으며 전후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은 한층 더 격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민중 생활은 지극히 참기 어려운 상황 하에 놓여있었다. 청조 지배체제 하에서의 가혹한 수탈, 외국제품의 유입에 따른 농촌경제의 파괴 등과 함께 새롭게 더 강화된 열강침략의 중압이 사정없이 민중의 생활을 엄습하였다. 생활이 파괴되고 그 중압이 인내의 한계를 크게 넘어섰을 때 민중은 자신과 그 가족 그리고 향촌의 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일어섰다. 결국 의화단 운동은 열강의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 이었지만 그 근저에 있는 것은 자신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의화단 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가를 지키고 향촌을 방위하려는 의식을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고 서양으로 연결시킨 데에 있다.이러한 성격으로 생겨난 의화단 운동은 청조(淸朝) 말기인 1900년 중국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일어났다. 이를 북청사변(北淸事變), 단비(團匪)의 난, 권비(拳匪).
    인문/어학| 2006.10.14| 10페이지| 1,500원| 조회(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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