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Ⅰ. 들어가기1990년대 이후 한국 역사학계 및 사회과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식민지근대화 논의의 성격을 검토하고 논의하고자 한다.식민지근대화론은 1980년대 이후 한국 및 동아시아에서의 경제성장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접근 방법으로서 기존의 지배적 접근 방식인 '식민지 수탈론'을 대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찬반양론의 형태로 학계에서 쟁점이 되어 왔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있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논의의 하나는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 시기 사이에 적극적 연속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해방 후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식민지 유산(colonial legacy)이 영향을 준 점을 주목한다.Ⅱ. 식민지근대화론1. 식민지근대화 논쟁의 내용 및 전개과정식민지 근대화론적 논의는 이미 국내외에서 1980년대부터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한일 경제사학자들이 ‘한국근대경제사 연구회’를 결성하고 공동연구의 성과를 낸 것에서 그 촉발계기를 찾기도 하며, 구미 학자들에 의해서도 식민지 시기의 ‘성과’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20세기 후반 이후 소위 동아시아 후발국들이 제3세계 일반에서 나타난 전형적인 ‘저발전’이 아닌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면서 이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한 시도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졌고, 식민지시기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을 동아시아라는 이질적 문화권에서 이루어진 독특한 경제성장의 양상으로 파악하고자 한 서구 학자들이 식민지사 재해석 논의를 주도하였으며, 이 연구들의 결과는 식민지시기에 대한 연구에서 민족문제를 경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기존 역사학계의 식민지 연구 관점은 “원시적 수탈론, 근대주의론, 내재적 발전론”으로 크게 구분될 수 있다. ‘원시적 수탈론’은 해방후 1960년대까지 논의된 시각으로 현재는 그 영향력이 적은 반면, ‘근대주의’와 ‘내재적 발전론’은 역사학계의 지배적 연구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을 극복하고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하는 관점을 견지한다.이러한 ‘식민지 수탈론’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식민지 이전 사회의 역동성을 주목한다는 점이며,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일제에 의하여 단절되었음을 주장하고 식민지지배의 유산을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식민지수탈론이 지닌 일반적 문제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지적되고 있다. 우선, 민족감정의 과잉으로 역사의 실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사관이 지니는 객관성의 문제 즉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한 비판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식민지적 침략에 의한 왜곡을 주장하는 내재적 발전론 역시 서구중심적 역사발전론을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 지적되기도 한다. 즉,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이라는 단계적, 직선적 역사발전론에 입각하여 지나치게 자본주의 맹아론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식민지기와 해방후간의 ‘부정적인 연속성’만을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시 된다. 이는 해방후 한국의 근대화 성공요인을 추적하는 최근의 논의들이 이제까지 민족사관에 의하여 단절되었던 식민지시기와 해방후간의 ‘긍정적 연속성’에 착목하고 있는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결국, 식민지수탈론은 ‘일제의 수탈 대 민족저항’이라는 이분법적 틀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식민지 시기의 실상을 밝히는데 소홀했다는 것이다.이러한 비판에 기초하여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시기를 해방 후 한국사회와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며 재조명하고자 한다.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조선사회에 대한 자생적 자본주의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한국 근대는 서구 근대의 수용 내지 이식을 통하여 비로소 그 발전계기를 만들었다고 본다. 이들은 ‘식민지 개발자’로서의 일제에 주목하고 식민지 기간동안의 사회간접자본 건설과 근대적 제도의 도입?보급 및 한국에 대한 자극 등을 강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식민지 시기의 개발경험과 성과는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개되었는데, 동아시아사회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그 전사(前史)로 가졌고 일제 식민정책의 특수성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식민지근대화론의 주요 입장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적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된다. 첫째, 조선사회의 자생적 자본주의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의 근대를 이식, 수용함으로써 발전의 계기를 맞이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둘째, 식민지 개발자로서의 일제의 역할을 주목한다는 것이다. 일제는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고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고 보급함으로써 식민지를 개발하였고 한인도 일제의 개발에 자극을 받아 자기 성장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셋째, 식민지 시기의 개발경험과 성과는 1960-70년대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해방후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 및 경제성장의 인적 자산 등의 측면에서 일제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점이 강조된다. 마지막으로 역사발전의 지표를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서 찾으며 그 발전의 기본 동력을 내부에서 찾기보다는 일제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경제원조 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한편, 이러한 식민지근대화론은 다음과 같이 비판되고 있다. 우선, 식민지근대화론이 취하는 단선적, 기원론적 접근 방법이 비역사적이라는 점이다. 즉 식민지 근대화론이 취하고 있는 ‘기원론적 접근법’이 지닌 단선적 역사관은 설득력이 없고,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는 경성방직의 경우는 매우 예외적 사례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서구로부터 이식된 근대의 토착화를 가능하게 한 ‘능동적’ 역사적 요인들을 인식하기보다는 전통사회적 요소들을 서구적 근대 이식의 토착화 가능요인 정도로 수동적으로 취급할 뿐이라는 점이다. 둘째,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규범화(normalize) 하는 경제성장 지상주의적 사고 방식에도 문제가 있어 일본자본주의의 외연적 확장에 따른 한국경제의 예속화의 심화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식민지국가의 근대성을 강조하면서 국가권력의 근대성을 관료이데올로기와 결합할 가능성이 있고, 일본 내 극우파들의 논리에 이용될 위험성이 있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2. 식민지적 근대의 의미와 식민지의 실상 규명의 문제그렇다면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 논의가 지니는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시사점이 있다면 식민화, 분단 등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적 특성으로 인하여 ‘탈이념적’이고 ‘객관적’으로 역사, 사회적 분석을 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민족사관의 ‘과잉적용’을 경계하도록 한다는데 있을 것이다. 즉, 사회과학적 객관성이 궁극적으로는 ‘신화(神話)’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역사서술에서의 객관적 사실 규명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시기에 대한 접근에 있어 여전히 ‘민족 모순’을 배제한 ‘객관적’ 분석의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한 논자가 그의 논문 속에서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경제학의 마술’에 ‘사라진 식민지’의 이미지에 대한 우려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하여 경계하도록 하며 그러한 우려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방법론적으로 제기하는 ‘합리적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게 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수탈이냐 근대화냐의 논쟁을 잠시 벗어나 식민지 근대화론적 경향을 띠는 논자들이 제기하는 ‘합리적 문제의식’은 무엇이며 그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검토하여 보기로 하겠다.식민지근대화론으로 불리는 논자들 간에도 인식 차이가 있으며 명확한 편가름을 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 논쟁을 가열화 하는데 계기가 된 조석곤의 글은 수탈론과 근대화론이 공히 가지고 있는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가치판단적 가정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보다 심층적인 실상 접근”을 통하여 “식민지 사회 고유의 특질”을 규명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조석곤에 의하면 해방후 한국사의 큰 과제인 식민사관의 극복은 1970년대 이후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주류적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으나, 1980년대 후반 이후 동아자 하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수탈론 대 근대화론이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를 넘어선 식민지 시기의 ‘실상 규명’을 강조하고 있다(조석근, 1997: 357-358). 환언하면, 식민지근대화를 가치개입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식민지 시기의 근대’를 인정하는 것은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3. 식민지적 근대의 비판적 검토1) 근대(혹은 근대화)에 대한 가정식민지 근대화 논의에서 가정되는 ‘근대’란 서구적 근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근대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몇 가지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첫째는 근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사실적 차원과 가치적 차원의 문제이다. 근대를 다룸에 있어 사실적 차원과 가치적 차원을 구분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으나 ‘근대=서구적 근대’라는 기준을 인정하는 한 사실과 가치는 분리되기 어려울 수 있다. 식민지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에서 표면적으로나 암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인식이 있다면 ‘근대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는 자체적 근대화를 저지한 계기로 인식되거나 자생적 근대화가 불가능한 조건에서 외부의 자극과 이식을 통하여 근대화가 추진되었다는 양극적 논의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근대화론적 가정에서는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사실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경제성장=긍정적’이라는 가치적 차원을 귀결점으로 하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경제성장의 ‘성과’는 그것이 사실규명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서구적 역사발전단계를 ‘규범화’ 하는 한 긍정적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경제적 근대화에 수반된 식민지적 억압은 ‘성장을 위한 고통’으로 쉽게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근대=서구적 근대’라는 기준을 인정하는 한 근원적으로 사실과 가치는 분리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 일제의 문화적 헤게모니 문제일제의 식민지배 정책 속에서 어떠한 '공간(space)'들이 창출되었고 '기회'들이 만들어졌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식민지하에서의 있다.
드라마에 나타난 30대 미혼여성 재현방식‘달콤한 나의 도시’에 재현된 30대 여성상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본 논문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된 시청층이 여성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여성의 사회화과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우리사회 여성의 위상과 지위, 생활문화와 가치관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반영하여 바람직한 역할모델을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연구를 시작하였다.이 연구는 TV드라마의 영향력과 현실을 반영, 재창조, 왜곡하는 이중적인 역할에 주목하여, 드라마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30대 여성의 이미지재현방식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30대 미혼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인 ‘달콤한 나의 도시’를 중심으로 그들의 성, 사랑, 일과 관련하여 이를 드라마가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분석하였다. 그 결과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30대 여성들은 기존의 아름다움과 젊음은 20대 여성에게만 제한했었던 드라마 공식을 깨고 30대 미혼여성들도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젊음을 가지고 있는 여성으로 표현되었고, 자신의 직업의식을 가지고 공적영역에 참여하며,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으로 그려졌다. 이는 기존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성주도적인 여성의 일과 사랑이 드라마를 통해 재현된다는 기존의 연구와 달라진 결과를 보임으로써 드라마 속 30대 여성의 이미지가 진취적, 능동적, 주체적으로 변하고 있고 이는 30대 미혼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과 이데올로기도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Keyword: 드라마, 이데올로기, 30대 미혼 여성, 이미지재현방식, 내용분석목차Ⅰ.서론: 문제제기 ........ 4Ⅱ.이론적 배경1.TV 드라마의 사회적 의미 .화적 표상의 기반에는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는 사회 이데올로기와 가치관이 깔려 있다.)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논의로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성 이데올로기의 왜곡과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내재이다. 여성의 몸을 하나의 물적 대상,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 폄하함으로써 텍스트의 행간에서 나타나는 의미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으로 고정되어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는 것이 문제라고 이미 지적된 바 있다. 그리고 다른 논의는 전자를 전복하자는 시각인데 드라마 텍스트라는 장(場)을 통해 여성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전개하자는 것이 주요견해이다. 특히 뉴미디어의 시대가 오면서 사이버 공간과 수용자의 결합으로 인해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지금까지 드라마 텍스트에 반영되어 온 여성의 성 역할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척이나 편파적이었다. 초기 여성주의 비평가들은 드라마 텍스트 속에 내재된 여성 재현과 성역할에 관해 끊임없이 문제시하며 드라마로 대표되는 대중문화가 여성을 가정 내 영역에 안주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이 어머니, 아내, 주부가 되는 것을 강조하고 가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할 사람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점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논란이 되던 파격적인 여성캐릭터의 등장에 따라 이를 지켜보는 여성들에게는 하나의 좋은 롤모델(Role Model)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드라마 텍스트도 더 이상 일방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다. 이를 통해 TV드라마가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드라마 속 여성의 이미지 재현방식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여성상의 사회변화를 알아봄으로써 드라마 속 여성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2.사회변화에 따른 여성상의 변화한국의 여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여성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시작는 나이로서 표현되고 있다. 또 30대 미혼여성 또한 20대의 열정과 낭만도 간직하고 있으면서 20대의 어수룩함보다는 노련함과 성숙함으로 능동적, 주체적인 모습으로 강세를 띠고 있다. 이러한 드라마 속 30대 미혼녀의 강세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며 보다 심층적인 30대 미혼 여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가 많아질 것으로 생각한다.3)연상, 연하커플드라마에 심심찮게 나오는 연상녀-연하남 커플. 이제 연상연하 커플은 신기하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그만큼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커플유형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연상연하 커플들의 나이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제 한두 살 많은 여자는 연상녀 축에도 못들 정도로 과감한 연상연하 커플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2007년 7월 16일부터 2008년 5월 9일까지 방영된 MBC 일일드라마 아현동 마님의 시향(왕희지)-길라(김민성) 커플은 무려 띠동갑 12살 차이이고 조강지처클럽의 나화신(오현경)-구세주(이상우)커플의 나이 차이는 6살, 달콤한 인생의 준수(이동욱)-혜진(오연수)는 10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한다.이러한 드라마의 연상녀, 연하남 커플은 연상연하커플이 현대사회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경기도 안산에 사는 최모씨(40ㆍ여)는 지난해 4세 연하의 남편과 결혼했다. 초혼이고 자녀는 아직 없다. 최모씨는 ‘일 중독’이라고 할 만큼 커리어우먼으로 15년 이상의 직장 생활을 하다 결혼에 골인했다. 15년간 직장생활만 하다 보니 집안 살림에는 영 소질이 없다. 하지만 요새는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의 현실과 공감도 하고, 때로는 비현실적인 내용에 속도 탄다.“을 보면서 극중 시향이의 결혼 생활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요. 음식을 나이 어린 손위 형님에게 배우는 등 집안 일에 있어서 실제로 공감하는 게 있어요. 의 극중 나화신처럼 아줌마에서 신데렐라 격인 ‘줌마렐라’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않나요?”최근 우리나라도 최씨처럼 여성들의 결혼 연령이 높아지면서 연하 빠진다. 주인공 은수와 그를 둘러싼 남자들, 그리고 은수의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이 드라마는 전개된다.은수의 삶과 친구들의 삶은 그들의 만남과 수다를 통해 표현되고 그로 인해 시청자는 30대 미혼여성의 삶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서른한 살 은수의 일과 사랑을 중심으로 그의 친구 재인과 유희의 일과 사랑을 둘러싼 그들의 선택을 현실감 있게 다루고 있다. 선택의 기로에 서는 나이, 가치관이 흔들리는 나이, 이러한 나이는 보통 성장기 때나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비교적 젊은 나이의 인물들이 하는 고민으로 드라마에서 다루어져왔다. 하지만 ‘달콤한 나의 도시’의 시놉시스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30대 미혼 여성 또한 이러한 고민을 하고 그것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점을 명시하며 30대의 나이를 더 이상 이미 안정적이고 선택이 끝난 나이, 혹은 더 이상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없는 나이로 재현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30대 미혼 여성 또한 끊임없이 무언가에 고민하고, 도전하기 위해 여러 기로에 서서 선택을 하며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으로서 30대 미혼여성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난 2004년 방송되었던 30대 미혼여성의 일과 사랑을 다룬 올드미스다이어리와 비교해 볼 때, 두 드라마 모두 30대 여성 주인공과 친구들의 이야기로 30대 미혼여성의 삶을 재조명했고 이로 인해 여성들의 공감을 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두 드라마가 보여주는 30대 미혼여성이미지 재현에 있어서 ‘달콤한 나의도시’에서 30대 여성의 모습이 조금 더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주인공 ‘은수’의 원나잇스탠드, 7년이나 어린 연하남과와의 연애, 친구 유희의 혼전임신, 재희의 이혼 이야기들을 다룬 점에서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올드미스다이어리가 방송된 2004년의 시점보다 30대 미혼여성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대한 인식과 가치관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를 바라보는 사회인식 또한 변화하고 있고 그고 있다. 그 곁으로 와 나란히 서는 은수. 무심코 돌아보는 영수. 찡그린 채로 보다가, 조금 갸웃.. 그러다 가만히 미소 짓는다.은수도 미소. 마주하는 두 사람.은수 못 오시는 줄 알았는데.영수 (나침반 내밀며) 이거 드릴려구.은수 (나침반 받고.. 보다가 피식) 이거 줄려구요?영수 네.은수, 영수를 가만히 보다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민다.악수를 받는 영수.은수 처음 뵙겠습니다. (뜸) 저는 오은수예요.영수 반가워요. (뜸) 류태경입니다.그렇게 서 있는 두 사람, 멀어져 가며./ 마침.이렇게 ‘달콤한 나의 도시’의 마지막 결말은 은수와 영수가 다시 만나서 서로의 이름을 다시 소개하며 악수를 청하며 막을 내린다. 이는 영수와 이별을 택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원작의 결말과는 조금 다르다. 서른 한 살의 은수와 서른여덟의 영수가 결혼보다는 다시 연애를 시작한다는 ‘현재진행형의 사랑’을 보여주는 열린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은수의 사랑이 결혼이라는 전형적인 드라마의 결말과 같이 가지 않으면서도 은수와 영수의 사랑이 결국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예고해준다. 이러한 결말은 시청자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만족감을 준다. 그리고 극 중 은수와 동일시했던 관객에게 희망을 주고 서른한 살의 나이가 꼭 결혼으로서 마침표를 찍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제시해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달콤한 나의 도시’의 서사적 특성을 살펴본 결과, 이 드라마는 1인칭 주인공 시점, 내레이션, 애니메이션을 통해 철저히 은수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켜가고 있다. 기존의 드라마가 남성 중심적인 시선에서 드라마 속 주인공을 바라보았던 것에 반해 30대 미혼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주인공 ‘은수’시선을 통해 시청자는 극 중 은수가 보는 시선과 그의 내레이션을 통해 30대 미혼여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은수의 더 깊은 내면과 심리를 엿볼 수 있고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것을 무겁지 않게 처리한다. 또한 열린 결말을 통해 은수를 자신으로 여기던 많은 시청자들은 은수가 행 중.
영화제목 : 태극기 휘날리며 감독 : 강제규 주연 : 장동건, 원빈, 이은주, 공형진, 김수로 장르 : 전쟁 등급 : 15세 이상 (국내) 상영시간 : 148분 개봉일자 : 2004-02-05 제작국가 : 대한민국태극기 휘날리며 선정 이유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두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한편으로 동족간의 전쟁에 대한 비극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요즘 청소년들에게 영화를 통해 6.25전쟁 전말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한 의도에서 선정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전쟁의 아픔과 고통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사상과 이념대립과 논쟁, 전쟁에 관하여 역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선정하게 되었다.1950년 6월..서울 종로거리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진태(장동건)는 힘든 생활 속에도 약혼녀 영신(이은주)과의 결혼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생 진석(원빈)의 대학진학을 위해 언제나 활기차고 밝은 생활을 해 나간다. 6월의 어느 날,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호회가 배포되면서 평화롭기만 하던 서울은 순식간에 싸이렌 소리와 폭발음,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해진다.줄거리이에 , 남쪽으로 피난을 결정한 진태는 영신과 가족들을 데리고 수많은 피난행렬에 동참하지만, 피난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대구역사에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만 18세로 징집 대상이었던 진석은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군용열차로 오르게 되고 진석을 되 찾아오기 위해 열차에 뛰어오른 진태 또한 징집이 되어 군용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평온한 일상에서 피 튀기는 전쟁터로 내 몰린 진태와 진석은 훈련받을 시간조차 없이 국군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으로 실전 투입이 되고 동생과 같은 소대에 배치된 진태는 동생의 징집해제를 위해 대대장을 만나게 된다.줄거리대대장과의 면담을 통해 동생의 제대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 진태는 동생의 생존을 위해 총을 들며 영웅이 되기를 자처하는데.. 진태의 혁혁한 전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성공한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진을 시작한다. 애국 이념도 민주 사상도 없이 오직, 동생의 생존을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전쟁영웅이 되어가고 있는 진태와 전쟁을 통해 스스로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진석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 평양으로 향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운명의 덫이 그들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줄거리인물 설명 ∬ 전쟁도 이념도 꺾을 수 없는 강한 집념의 형, 진태, 장동건 ∬ 전쟁 속에서 변해 가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런 동생. 진석, 원빈 ∬ 적극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인, 영신, 이은주 ∬ 영민, 공형진 ∬ 인민군대좌, 최민식 ∬ 청년단장, 김수로영화 속 한국전쟁 전투 ∬ 1950/ 7월 4일 음성 지구전투 ∬ 1950/ 7월 17일-7월30일 영강전투 ∬ 1950/ 8월 14일-8월 30일 328 고지전투 ∬ 1950/ 9월 14일-10월 7일 756고지전투 ∬ 1950/ 10월 18-10월 20일 평양진격전투 ∬ 1950/ 10월25일 운산전투 ∬ 1950/ 11월3일 청천강 부근 전투 ∬ 1951/ 4월22일 파주 석현리 전투▶ 1950.6.25 북한군의 남침 ▶ 1950.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 1950.8.1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명령 ▶ 1950.8.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 ▶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 ▶ 1950.8.31 ~ 9.8 인민군의 9월 공세 ▶ 1950.9.15 인천상륙작전 ▶ 1950.9.28 수도 서울 탄환 ▶ 1950.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6.25 전쟁 속으로▶ 1950.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 1950.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 1950.11.21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 ▶ 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 1951.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 ▶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 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6.25 전쟁 속으로▶ 18살이 중학생?? 일제강점기 때 우리는 일본의 교육학제인 소학교-중학교-고보-대학교의 편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 불붙은 한 병사의 얼굴이 푸른색?? 백린이 사람얼굴에 묻으면 사람얼굴이 불에 타면서 그런 색깔을 낼 수가 있다. 원래 불은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다르고 산화물질에 따라 불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극중에서는 인이 연소하면서 푸른색깔이 난 것으로 보인다.영화 VS 실제▶ 시체 태우기 전시에는 시체가 대량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처리방법이 곤란하다. 그래서 땅에 묻거나 태우는데 땅에 묻으려면 인력과 장비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태우는 방법을 많이 쓴다. ▶ 총검싸움 정말 많이 하나?? 6.25를 비롯 2차대전 등 수많은 전쟁에서 총검으로 찌르고 찌르는 백병전은 수없이 많이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산(고지)을 점령하고 수비하려는 고지 점령전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났던 전투 방식이다.영화 VS 실제영화 속 옥의 티 ∬ 흰색 수건 ∬ 이웃 11연대에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 평양전투에서 거리 간판 중 ∬ 장동건 형제가 소속된 부대 ∬ 장동건의 기자회견 후 국군들의 식사장면 ∬ 우익청년단이 좌익부역자들을 처단하는 ∬ 총을 든 국군의 약혼녀를 청년단이 함부로 죽이는 것도 납득하기 힘들다. ∬ 이은주가 보리쌀이라도 얻으려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하는데…1. 영화 속 보도연맹 을 통해 알 수 있는 해방 후 한반도 정세를 유추해보아요.형성평가2. 오늘날의 가족애가 이념갈등을 넘어서는 가장 숭고한 가치관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해묵은 사상과 이념대립과 논쟁은 오늘날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종적을 감추어버린 것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형성평가{nameOfApplication=Show}
영화선정이유이번학기 서양근현대사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강의를 듣고 있다. 서양사에 대해 배우면서 종교개혁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중 더 나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사회모습이다. 종교개혁이 있은 이후 각 나라마다 종교전쟁이 긴 시간동안 지속되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세히 배우지 않았다. 영화 『여왕마고』를 통해 종교전쟁의 실제상황을 이해하고, 더불어 16세기 프랑스의 정치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여왕마고』의 역사적 배경 : 바르톨로메오의 학살1572년, 종교전쟁으로 분열된 프랑스, 수년전부터 구교와 신교는 서로 죽이며 대립했다. 10살에 왕이 된 샤를르 9세는 카톨릭교도인 모친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정권을 맡겼는데, 신교도인 콜리니 제독이 왕의 신임을 얻자 그녀는 평화를 위해 정략결혼을 계획한다. 딸 마고와 신교도인 나바르 왕 앙디 드 부르봉의 혼인 정치적 책략이란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한편 콜리니는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전쟁을 준비했다. 그 해 8월 18일 파리는 찌는 듯한 더위에 휩싸였다. 결혼식을 보러 파리로 몰려온 수천 명의 신교도들이 여인숙과 거리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들의 검은 옷과 엄격한 태도는 폭동 직전의 파리인들에겐 또 하나의 도발이었다. 평화와 화해의 상징이었던 마고의 결혼식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학살을 예고했다.16세기 프랑스는 카톨릭을 믿는 프랑스와 개신교를 국교로 하는 나바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카톨릭군은 기즈 남작, 개신교군은 콜리니 제독이 이끌어 왔고 이들 사이엔 서로 싸우고 죽이는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마고는 샤를르 9세의 동생으로 프랑스 왕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구교도이지만 종교전쟁으로 갈갈이 찢겨진 프랑스를 위해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된다. 상대는 신교도로 나바르의 볼품없는 어린 왕인 앙리 나비르. 앙리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마고는 결혼 후 앙리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거대한 야망과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샤를르 9세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인 까뜨린느 메디치이다. 그녀는 왕인 샤를르 9세보다는 동생인 앙주를 편애했으며 그를 위해 평화로운 왕국을 만들어서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구교도와 신교도의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종교전쟁을 끝내기 위해 구교도 마고와 신교도 앙리와 결혼시켰던 것이다. 마고의 결혼이 끝난 후 6일 동안의 축제기간에 구교도와 신교도는 축제의 열기에 휩싸이지만 그곳엔 어머니 까뜨린느의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었다. 6일 동안 축제 후 동이 돋을 무렵 5000여명의 신교도들은 구교도들에게 무참히 살해된다. 세느강은 피로 물들고, 파리는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한다.영화와 현실사이여왕 마고는 누구였을까?영화에서의 묘사영화에서 마고는 정략결혼으로 앙리 나바르와 인연을 맺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길에서 만난 라 몰르라는 개신교 청년을 향하고 있다. 앙리 나바르와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앙리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도와 그의 목숨을 지켜낸다. 상처 입은 라 몰르를 간호하고, 그를 따라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나바르로 가기로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역적으로 몰린 라몰르는 교수형에 처하고, 샤를 9세가 죽고 앙리 3세가 왕위에 오르자 샤를 9세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앙리 나바르는 후일을 기약하며 나바르로 떠나고 마고 또한 라 몰르와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홀로 나바르로 떠난다.영화에서 마고는 처음에는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바람둥이 같은 여자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신분이나 화려한 겉모습 보다는 진실한 사랑을 원했던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된다.역사적 사실역사에서 불려지는 이름은 마르그리뜨 드 발루아 이다. 프랑스의 여왕이자,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공주이다. 영화에서 보이듯 앙리 나바르와의 정략결혼이 있었지만 이 결혼에 순순히 희생될 정도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마고 역시 자신의 정치적 이용가치를 잘 알고 있다. 애정 없는 형식적인 결혼이긴 해도 자신은 엄연히 왕가의 사람이고, 왕의 여동생이니 모후 카트린느처럼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은 못 해도 '앙리 나바르의 아내'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중요한 건 '개신교의 지도자 앙리 나바르의 아내'라야 하는 것, 즉 앙리가 살아 있어주어야 카톨릭도, 개신교도 자신을 쉽게 내쳐버릴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 때 앙리 나바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마고가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제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개종해서 살아남으라고 앙리를 설득한 것도 마고이다.영화에서 프랑스 궁정의 타락을 보여주었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문란했다고 한다. 마고도 그 중 유명한 여자였다. 마고의 오빠였던 샤를9세뿐만이 아닌 다른 왕족과도 근친상간의 사례가 많았다. 마고의 오빠들이 모두 정식 후계자가 없이 죽자 왕의 서열에 따라 마고의 남편이었던 나바르의 앙리가 후에 앙리 4세가 된다. 하지만 나중에 이들 사이에 아이가 없자 이혼을 한다. 앙리 4세는 부르봉왕조를 연 사람으로 루이 14세의 할아버지이다. 부르봉왕조는 루이 16세가 혁명이후 처형당할 때까지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다.- 위그노전쟁과 그 이후 프랑스의 역사1562∼9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종교전쟁. 위그노(Huguenot)라는 말은 카톨릭 교도들이 칼뱅파 신교도를 멸시해서 불렀던 말이다. 종교개혁은 프랑스에서도 16세기 전반기부터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J.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1536)》 출판 뒤에 신교도는 칼뱅파를 중심으로 가톨릭과 확실하게 결별했다. 이후 날로 심해지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교도는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왕국에 깊숙이 침투하였다. 신·구 양파의 대립은 마침 그때 벌어지고 있던 명문 귀족간의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되었다. 발루아왕가는 명문 귀족간의 미묘한 균형 위에 군림하고 있었는데, 1559년 프랑수아 2세의 외척인 기즈가(家)가 세력을 확대하자, 그 균형은 무너졌다. 기즈가가 열광적인 구교도였기 때문에, 이에 대항해서 반(反)기즈파 귀족들이 신교도와 손을 잡았다. 이렇게 되자 신·구 양파의 신앙상의 대립은 단번에 정치적 대립양상을 띠게 되었다. 60년 샤를 9세의 즉위와 함께 섭정을 시작한 왕모(王母)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양파의 균형에 입각해서 관용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양파의 대립은 격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마침내 62년 기즈공(公) 측에 의한 신교도살해(바시의 학살)를 계기로, 이후 98년까지 8차에 걸친 위그노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과 화의(和議)가 되풀이되는 가운데, 72년 양파의 화해를 위해서 기도된 신교도의 총수 앙리 드 나바르(뒤에 앙리 4세)와 왕의 누이동생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결혼식은 구교파에 의해서 신교도 학살에 이용되어, 양파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 이 학살은 다른 지방으로도 확대되어 신교도 약 8000명이 살해되었지만, 신교도는 폭군격퇴를 외치면서 저항운동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 뒤 구교도는 과격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었는데, 과격파는 76년 기즈 일당을 중심으로 구교동맹을 결성했다. 온건파는 신앙상의 대립보다도 왕국의 통일을 중시해 폴리틱파라고 불렸는데, 그 대표적 사상가에 J. 보댕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트린을 중심으로 한 왕가에 신·구 양파를 더한 3세력의 싸움은, 85년에 시작된 이른바 <3앙리 전쟁>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앙리 드 기즈에 이어 앙리 3세가 암살되고, 89년 앙리 드 나바르가 앙리 4세로 즉위했다. 부르봉가(家)의 새 왕은 국내의 분열 및 외국, 특히 에스파냐와 교황청의 간섭에 직면해, 93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로써 폴리틱파의 지지를 얻어, 다음 해 2월에는 파리에 입성하게 되었고, 98년 <낭트칙령(勅令)>을 공표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이로써 내란은 종결되었다. 위그노전쟁은, 신·구 양파의 신앙상의 무력항쟁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도 두드러지게 정치적인 항쟁이기도 했으며, 신흥 부르주아층의 대두와 신구 양파를 각각 지원한 외국의 의도도 있어서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이 전쟁의 결과 약체화된 왕권 회복을 위해 앙리 4세는 절대왕정 확립을 위한 재건에 착수했다.
사회과 학습법영화 속의 역사수업§ 1. 영화 소개 §영화제목 : 감독 : 강제규주연 : 장동건(진태) 원빈(진석) 이은주(영신) 공형진(영만) 김수로(청년 단장)장르 : 전쟁등급 : 15세 이상 (국내)상영시간 : 148분개봉일자 : 2004-02-05제작국가 : 대한민국§ 2. 태극기 휘날리며 선정 이유 §‘태극기 휘날리며’ 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두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동족간의 전쟁에 대한 비극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요즘 청소년들에게 영화를 통해 6.25전쟁 전말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한 의도에서 선정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한국전쟁,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전쟁의 아픔과 고통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또한 이 영화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사상과 이념대립과 논쟁, 전쟁에 관하여 역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선정하게 되었다.§ 3. 줄거리 §1950년 6월..서울 종로거리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진태’(장동건)는 힘든 생활 속에도 약혼녀 ‘영신’(이은주)과의 결혼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생 ‘진석’(원빈)의 대학진학을 위해 언제나 활기차고 밝은 생활을 해 나간다.6월의 어느 날,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호회가 배포되면서 평화롭기만 하던 서울은 순식간에 싸이렌 소리와 폭발음,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해진다. 이에 , 남쪽으로 피난을 결정한 ‘진태’는 ‘영신’과 가족들을 데리고 수많은 피난행렬에 동참하지만, 피난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대구역사에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만 18세로 징집 대상이었던 ‘진석’은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군용열차로 오르게 되고 ‘진석’을 되 찾아오기 위해 열차에 뛰어오른 ‘진태’ 또한 징집이 되어 군용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평온한 일상에서 피 튀기는 전쟁터로 내 몰린 ‘진태’와 ‘진석’은 훈련받을 시간조차 없이 국군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으로 실전 투입이 되고 동생과 같은 소 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작전개시 태세가 되어있지 못하였고 전투부대는 인원과 장비면에서 완전한 편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며, 방어태세에 있어서도 한개 사단이 평균 60여Km에 달하는 넓은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교육 훈련면에 서도 거의 75%이상이 대대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유엔군의 파병이 결정되고 7월 4일에 평택-제천 유엔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17일-7월30일 영강전투영강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지연선을 전개하면서 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고 있을 때 국공 6사단과 제1사단이 함창 북방의 연강성 일대에서 북한군 제 2군단의 침공을 2주일동안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국군 및 유엔군의 금강 방어선이 붕괴된 후, 서부전선의 미군부대들이 대전, 영동, 길천 축선으로 철수하고 있을 무렵에 북한군 제 2군단이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함창-김천축선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이때, 국군 제 6사단이 영강선에서 이들과 맞서 2주일 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이 전투에 쌍방이 과반수의 병력손실을 보게 되었으니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8월 14일-30 328 고지전투낙동강 방어선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었으며 반격작전을 위한 교두보였다. 이 선은 일명 부산교두보, 또는 워커라인이라고도 불리었다. 이때 북한군은 무리한 작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 반면, 한국군과 유엔군은 계속된 전력의 보충과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상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작전의 주도권은 한국군 및 유엔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9월 14일-17일 756고지전투9월초 대구를 목표로 하여 총 공세를 취한 북한군은 미제1전차단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9월 10일 도덕산(대구북방12Km)까지 진출,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서 제1수사단은 즉각반격을 개시하여 도덕산을 탈취하는 한편, 이어 756고지(도덕산북방4Km)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목표탈취 후의 진적소탕과 경계군이 취한 공세 중에 가장 많은 부대가 동원된 공세였다.§ 6. 6.25 전쟁 속으로 §▶ 1950.6.25 북한군의 남침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인민군은 7개 보병사단,1개 기갑여단 및 특수전부대를 포함, 총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시작 하였다.▶ 1950.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한국의 사태를 보고 받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불법 남침 중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결의안을 찬성 9, 반대 0, 기권 1로써 가결하였다. 이 결의는 유엔이 집단안전보장조치로써 침략을 저지하고 평화의 회복을 달성하려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50.8.1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명령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선정하고 이 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을 계획하였으며, 미 제 8군 사령관 워키중장은 8월 1일 전군에 낙동강방어선으로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1950.8.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북한인민군은 8월 5일부터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국군 및 유엔군은 왜관·다부동, 창녕,·영산, 마산, 포항, 안강 등에서 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낙동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 일대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 하였다. 이것은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량의 융단 폭격이었다▶ 1950.8.31 ~ 9.8 인민군의 9월 공세8월 공세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북한군은 다시 9월 공세를 시작하여 왜관·다부동,창녕· 영산, 마산, 포항 등을 공격하였다. 한때 영천과 경주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은 사투를 벌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이곳에서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미 극동군사령관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6.25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북진하여 한만 국경선 가까이 도달함으로써 남북통일의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적을 포기하고 정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과 중공도 이런 사태를 인식하였으며, 마침내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정전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양측의 합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7. 전국 올 로케이션 §∬ 대관령혹한..강한 바람과 서린 눈발 속에 들려오는 커다란 폭발음..흰눈 속에 더욱 검게 그을어 보이는 검은 폭약연기..혹한의 서늘함을 한껏 더하는 처절한 비명과 차가운 쇳소리들...국군의 북진 중 압록강 겨울 전투 씬을 찍기 위해 눈발이 살아있는 로케이션 장소로 택한 대관령.. 그러나,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해발 1,100m 이상의 고지대라 기상예측이 전혀 불가능했고 바람의 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게다가 촬영장비 공수와 이동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제작진은 보다 리얼한 겨울 씬을 찍기 위해 무리수를 뒀고 두 달이 넘는 이동통로 공사 작업을 통해 드디어 촬영장비가 공수되기 시작되었다. 대관령 중 가장 험하다는 횡계 내의 삼양목장에서 이루어진 로케이션은 눈, 바람, 추위 등 자연과의 전쟁으로 일축된다. 운반로의 제설작업만으로도 하루가 다 가기 일쑤였고 다음날 되면 또 수북히 쌓인 눈 때문에 허탈감은 극에 달했다. 결국 촬영용 6륜 트럭과 탱크를 운반용으로 대체하여 기어이 촬영에 돌입한 제작진은 그야말로 최악의 여건에서 스스로와의 싸움을 해야만 했다. 결국, 1달이 넘는 힘든 촬영이 무사히 끝났고 스탭 들은 필름에 담아낸 자신들의 작품을 보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자신들조차도 상상하지 원도 한몫을 했다. 먼저, 축축한 습지의 땅과 거친 황무지느낌의 배경이 필요했던 두밀령 고지전과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황매산 정상에서 이루어졌다. 밑에서 카메라를 잡으면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산 정상인데다 거칠지만 비옥하고 광활한 초지였기에 대규모 전투 촬영을 찍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제작진은 한 달에 걸쳐 산 정상에 각종 교통호와 진지를 구축했고 역사상 길이 남을 스펙터클한 전투액션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합천군 용주 마을 수자원공사부지 2만2천평에 평양시가전을 위한 평양시가지세트 제작이 진행되었다. 유래 없던 태풍을 만나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평양시가지 세트는 촬영 후 합천군에 기증되어 합천군의 테마관광단지로 운영될 예정이다.∬ 아산향수폭풍 전야의 고요함.. 폭풍 속의 쓸쓸함..다가올 거대한 폭풍 앞에 한없이 슬퍼 보이기만 한 행복하고 평온한 일상...1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아산의 공세리 성당에서 이루어진 국군병원 씬 촬영의 가장 어려웠던 점은 모든 건물과 물건들이 귀중한 문화재였기에 항상 조심해야 했던 점이다. 장소 섭외부터 까다로웠던 터라 제작진은 충분한 사전 조율을 통해 세심하게 움직였다. 워낙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건물들이라 크게 손댈 필요는 없었기에 뒤뜰에 자그마한 취조실 건물만을 지었을 뿐 별다르게 손 댄 부분은 없었다. 다만, 보도블록과 아스팔트로 깔린 성당주변 길 위에 1톤 가량의 석분을 까는 작업은 예상보다 힘들었고 촬영 후 그 석분을 치워 원상 복귀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산시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촬영된 진태와 영신의 집은 전쟁 전 평온하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에 주위 경관과 평화로운 이미지 부각에 심혈을 기울였다.§ 8. 영화 VS 실제 §▶ 18살이 중학생??일제강점기 때 우리는 일본의 교육학제인 소학교-중학교-고보-대학교의 편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광복이 되고 미 군정기에 일시적으로 미국 학제를 따르다가 다시 정부가 수립된 후 초등교육 6년, 초급중등교육 3년